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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비평_역사적 선례는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가

Architecture Criticism
What historical precedents give us?

수도자의 공간, 즉 수도원은 외부와 격리된 은둔자의 공간이다. 세상과 떨어져 스스로 유폐된 공간이기에 주로 깊은 산이나 외딴 시골에 건립되곤 했으며, 내향적인 중정 공간을 형성하여 고립된 위요 공간을 이루었다. 또한 수도사가 거주하는 공간이기에 하나의 셀로서, 자족적인 검박한 생활의 장소이자 영적인 공간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침묵이 강조되며 개인적인 수양과 규율이 강조되는 집단생활의 공간이기도 했다. 이런 수도원 공간은 르코르뷔지에 같은 근대건축 거장에게 많은 영감을 주는 공간이었으며, 새로운 공간을 제안하는 데 활용되거나 집합 주거 모델이 되기도 했다. 특히 ‘라 투레트 수도원’의 설계를 의뢰한 쿠튀리에 신부는 르코르뷔지에게 ‘르 토로네 수도원’을 방문하여 설계에 참조해달라고 요구했고, 이를 방문한 르코르뷔지에가 깊은 감명을 받았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수도원 공간은 영적 공간, 공통 생활공간, 개인 생활공간, 중정, 회랑으로 구분할 수 있다. 기본적인 수도원의 구성 방식은 사각형 중정과 중정을 둘러싸는 회랑, 회랑의 한쪽 편에 접한 성당, 다른 쪽에 접해 있는 공동생활 공간이 있으며, 그 위층에는 기도실, 침실 등이 자리 잡았다. 크게 보면 성당의 영적인 공간과 수도사의 생활공간이 중정을 공유하며 결합한 형태인데, 가장 핵심 공간은 이 두 공간을 구분 지으며 연결하는 공간인 네 변을 가진 정원과 정원을 둘러싸고 형성된 열주가 있는 회랑이다. 내향적인 공간을 형성하고 이를 둘러싼 회랑은 철저히 외부와 차단된 채 하늘을 마주하는 공간이며, 내부 통로 겸 신앙을 가다듬는 순례의 길이라 할 수 있다. 매일 여러 차례 의례와 생활을 위해서 지나다니는 이 공간은 건축적으로 보면 강렬한 태양이 내뿜는 빛과 열주가 만들어내는 그림자를 어떻게 조성하느냐가 중요한 문제였다. 르코르뷔지에의 ‘라 투레트’도 피아노 건반을 연상시키는 창문을 통해 빛의 변주와 공간의 리듬을 만들고 있다. “건축은 얼어붙은 음악”이라는 유명한 비유가 생겨난 이유이기도 하다.

다소 장황하게 수도원 공간에 관해 이야기한 것은, ‘세빛자매원’이 여러모로 전통적인 수도원을 연상케 했기 때문이다. 물론 가톨릭과 개신교라는 종교적인 차이도 있고, 무엇보다 시대적인 차이도 거론할 수 있겠지만, 공간의 구성만은 많은 점에서 비슷하다. 전체적으로 건축사가 힘을 빼고 간결하게 디자인한 것을 알 수 있다. 배치나 전체 평면을 보면, 직각 삼각형에 가까운 대지의 형상에 따라 북향에 해당하는 직각 부분은 건물이 둘러싸고 남향의 긴 변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열린 형상으로 배치되었다. 달리 보면, 디귿(ㄷ)자 형상으로 대지 외곽을 둘러싸고 배치되고, 중앙 부분에 식당과 친교 공간 건물이 배치되어 중정을 형성하며 한쪽은 길게 뻗어져 나와 독립된 교회당을 이룬다. 이런 중정 공간은 내밀함을 만들어 주변 공간과는 독립된 위요 공간을 만드는데, 가운데 중정은 튼 미음(ㅁ)자 형태로 엄격한 공간은 아니나, 직사각형 수변공간과 야외데크로 이루어져 정적이며 고요한 공간을 이룬다. 중정은 네 단의 낮은 계단을 통해 살짝 들어 올려져 있어 주차장 공간과의 경계를 형성한다. 식당 및 친교 공간과 1층에 사무실 공간 등을 제외하고는 각각의 침실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침실과 복도의 배치는 침실의 향(向)을 우선 고려하여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 보니, 복도는 중정을 향해 시작되어 건물의 바깥쪽 면을 따라 돌아 다시 중정을 면하여 이어진다. 두 면의 침실은 외부를 향하지만, 한 면은 중정을 향해 있다.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긴 경사로는 복도의 연장으로, 연속되는 산책로를 형성한다. 침실은 독립된 원룸의 형식으로, 작지만 독립적인 거주가 가능하게 소박하지만 밝고 깨끗한 공간으로 구성되었다.

<세빛자매원> © 임준영

외관은 어찌 보면 작은 학교 건물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기숙사 건물 같기도 하다. 벽돌로 치장된 격자형의 균일한 사각형 유닛이 반복되며, 간결하되 익숙한 외관을 이루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삶이란 무릇 일상의 반복과 익숙함이 빚어내는 풍경 아닌가. 마치 이를 웅변하듯, ‘세빛자매원’은 힘을 빼고 간결하며 반복된 입면을 드러낸다. 고단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이들을 가장 따뜻하게 맞이할 것도 반복의 일상이 주는 여유로움 아니겠는가. 낮게 자리 잡은 건물과 2층의 옥상이 각각의 마당과 같이 사용된다는 점도 돋보인다. 긴 동선 끝에 만나게 되는 옥상 마당은 과도하게 채우지 않고 비워둠으로써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중정에서 벌어지는 작은 행사를 2층의 옥상과 마당에서도 함께 즐기는 모습이 연상된다. 건물의 한쪽 끝단에는 교회당이 놓여 있다. 주차장에 붙은 작은 교회당은 재료와 형태 모두에서 다른 건물과 독립된 건물로 인지되며, 외부에서 접근성도 쉽다. 한눈에 건축사가 정성을 기울인 공간임을 알 수 있는데, 다른 건물이 벽돌로 이루어진 평지붕에 가까운 건물임에 비해, 경사가 급한 박공지붕에 목재로 마감한 외장은 생활공간과의 차별성을 부각하며 이곳이 성스럽고 특별한 공간임을 드러낸다. 그렇다고 벽돌과 이질적이지도 않다. 내부는 콘크리트 색감으로 소박하게 마감되었고, 측면에서 들어오는 빛을 받아들이기 위해 사각형의 창문이 여럿 어긋나며 배치된다.

건축사가 역사적 선례를 의식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비슷한 형식의 건물이 비슷한 공간구성을 취하며 또한 변용되는 것을 보는 건 흥미롭다. 물론, 필자는 ‘세빛자매원’의 평면을 보며 수도원의 평면을 떠올렸지만, 이 건물은 수도원과는 엄연히 다르다. 우선, 가톨릭과 개신교의 종교적 차이도 있을 테고, 무엇보다 은둔과 고행의 공간과 은퇴한 선교사들의 편안한 노후를 위한 생활관이라는 큰 차이도 있다. 그럼에도 전통적인 수도원 공간에 대한 연상을 피할 수 없음을 생각해 보면, 오히려 그 연관성이 미약하다는 점이 아쉽게 여겨진다. 우선 가장 중심적인 공간인 중정을 둘러싼 회랑이 복도로 변용되면서 건축적 즐거움이 손상되었다는 느낌을 준다. 중정을 둘러싼 각각의 셀들과, 이를 회랑처럼 연결된 복도가 감싸고 있다는 점에서 전통적인 수도원과 유사하고, 벽돌로 감싼 기둥이 유닛마다 규칙적으로 반복되고 있고 거대한 창호가 그 사이를 메우며 변용되고 있지만, 회랑이 주는 아늑함과 시간에 따른 빛의 변화, 공간의 율동감은 주지 못한다. 배치나 형태 역시 전형적이라는 점도 아쉽다. 대지의 형상에 따라 자연스레 중정을 형성하며 향을 고려한 각 실의 배치는 가히 교과서적인 해법이라 할 만하지만, 벽돌로 치장된 익숙한 외관과 더불어 익숙함은 쉽게 상투적인 것으로 변질되기 마련이다.

문뜩 스치는 물음, 역사적 선례는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 것일까? 르코르뷔지에가 역사적 선례를 통해 길어 낸 것은 어떤 고정된 유형이나 형태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그는 아마도 선례를 통해 느꼈던 감동의 정체를 고민했을 것이며, 그것이 빛이라는 가장 오래된 건축의 요소가 지닌 역사의 힘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을까. ‘라 투레트 수도원’과 ‘롱샹 성당’에 벽과 천장을 뚫고 무수히 꽂아 넣은 빛의 대포는 역사적 선례가 던지는 물음에 대한 르코르뷔지에만의 응답 아니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역사는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의 답이 아니라, 건축함에서 응답을 기다리는 마르지 않는 질문의 샘은 아닐까.

 

글. 이경창 Lee, Kyoungchang 건축비평가·구와미로 건축사사무소 대표

이경창 건축사·구와미로건축사사무소

건축비평가이자 구와미로 건축사사무소 대표이다. 건축평론동우회 동인이며, 제5회 와이드AR 건축비평상을 수상했다. 건축이데올로기 비평과 건축의 정치성, 건축을 통해 드러나는 사회의 여러 증상에 관심이 있으며, 최근엔 지젝을 통한 라깡 읽기에 빠져 있다.
sesang99@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