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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게임, 건축의 계급적 포지션

Squid Game, hierarchical position in architecture

웹드라마 <오징어 게임> 포스터 © 넷플릭스

떠들썩하다. 십여 년 전 싸이의 노래 강남스타일이 국위 선양하며 국뽕에 차오르게 하더니, 이번엔 BTS에 이은 한국 드라마가 넷플릭스에서 선전하고 있다. 일종의 금메달을 딴 느낌이다. 온·오프라인의 뉴스도 연일 국위 선양(?)하는 시청률을 보여준 드라마 한 편에 흠뻑 취한 느낌이다. 하도 요란해서, 탈퇴했던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에 재가입하고 연휴기간에 드디어 <오징어 게임>을 보았다. 9편의 시리즈를 전부 보고 나서 느낀 느낌은… 영화 <기생충>의 버전 2 같달까? 워낙에 좋아하는 장르여서 그런지 엉덩이에 땀이 날 정도로 집중해 보았다.

<오징어 게임> 스틸컷 © 넷플릭스<오징어 게임>은 총 9편의 시리즈로 되어 있다.

드라마는 경쟁 사회에서 이탈, 또는 패배한 자들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경쟁 사회에서 도태됐다고 해서 마냥 착하고, 순한 어린양이 아니다. 적당한 욕망과 게으름, 허영과 처절함, 상처와 더불어 거친 상황에서 나고 자란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다. 해서 초반에 등장인물들에게 감정이 이입되진 않는다. 이 문제 많은 사회의 패배자들 앞에 쥐덫의 먹이처럼 끄나풀로 살짝 살짝 유혹하는 죽음의 게임의 문이 열린다. 게임에는 논리나 당위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런 설명이 불필요하도록 가장 간단하고 기본적인 어린이용 놀이를 게임의 룰로 선정한 것인지도 모른다. 줄다리기에 어떤 대단한 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와 같은 놀이 역시 아주 단순하다. 뽑기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구슬놀이는 조금 머리를 써야 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이렇게 단순한 게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선수의 자질(?)이나 능력, 인성 등은 중요하지 않다.

이 드라마는 반어법과 상징, 은유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냥 폭력적인 영화로 보일 수도 있다. 반면 조금 더 상상력을 발휘해서 은유와 상징, 반어법과 우리 사회에 대한 어두운 면을 상기해 보면 소름 돋을 만큼 적나라한 묘사가 아닐 수 없다. 도덕적 보완 요소와 인권에 대한 인식이 없는 시장 자본주의의 냉혹함은 정글 그 자체가 아닌가. 그것은 우리가 이미 19세기 산업사회에서 겪었고, 당장 수많은 산업화 국가들의 초기 과정에서 겪은 바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지난 1960~1970년대 공장 노동자나 수많은 생산 기반 노동자들에 가한 비 인격적, 반 인권적 폭력을 떠올리면 된다. 그 시절엔 경쟁에서 이기지 않으면 생존이 어려웠다.

비단 우리나라만 그런 것은 아니다. 모든 사회 변화는 유사한 과정을 겪게 되며, 갈등이 발생하고 문제가 생긴다. 이런 갈등과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는 그 사회의 몫이다. 천만 다행으로 우리는 치열하게 한 단계씩 극복해 나갔다. 경우의 차가 있을 뿐 현재 자본주의 경쟁 사회의 룰에서 탈락한 사회 패배자(loser)들에게 선택할 기회는 없다. 사회 시스템의 문제일 수도 있고, 개인의 문제일 수도 있다. 그들이 가능한 것을 꿈꾸었다 실패했을 수도 있고, 과잉 욕망 또는 지나친 욕심으로 실패했을 수도 있다. 다만 이들은 21세기 사회 속 경쟁에서 탈락하는 순간 설 자리를 잃어버린다.

<오징어 게임>에서는 이 게임에 배팅하는 자본가들이 나오는데, 이들은 중국인, 미국인 등 다양한 글로벌 유한계층이다. 이들에게 목숨을 건 보통사람들의 생존게임은 한낮 게임의 배팅 대상일 뿐이다. 이들의 게임 속 놀잇감으로 전락한 사람들은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인물들이 아니다. 외딴섬에 있는 네모난 스타디움 같은 게임장은 이런 은유로도 보인다. 완전히 폐쇄된 곳이 아니라 하늘이 열려있는 곳이다. 하지만, 그 네모난 열린 상자 안에서 이들은 생사를 건 게임을 하고 있다. 이런 한계는 에셔의 공간같이 그려진 파스텔톤의 미로 공간에서도 드러난다. 보색관계로 구성된 핑크와 녹색, 그리고 노란색은 삼원색의 파스텔 톤 버전인 셈이다. 통상 만화적이고 유아적인 공간을 묘사하거나 표현할 때 사용하는 화사한 색상이 죽음의 게임이 벌어지는 공간에 사용된 것을 미장센의 메타포로 해석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 아니다. 왜냐면 에셔의 끝없는 계단을 연상시키는 이동 공간의 구성은 영화 속 게임 주관자들의 강력한 지배력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오징어 게임> 스틸컷 ©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 스틸컷 © 넷플릭스

그리고 매 게임의 장치들과 구성 역시 관념으로 우리가 통상 이야기하는 것들을 공간화 시켰다. 사회는 경쟁 구도일 수밖에 없고, 이런 경쟁에서 승리자가 전리품을 모두 획득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온라인 비즈니스의 경우도 시장 지배력이 점차 커지면서 시장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고, 오프라인 비즈니스 역시 마찬가지다. <오징어 게임>의 승리자가 획득하는 456억의 상금은 바로 이런 사회적 현상을 그대로 옮겨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당장 우리 사회에서 기업들을 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개별 기업들이 M&A가 되었든 단순 매각이 되었든 간에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끝없이 흡수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456억의 상금을 모두 확보하기 위해서는 영화처럼 상대들을 희생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오징어 게임>의 살벌한 메타포는 게임 참여자들과 진행자, 보조요원들의 신분에서 드러난다. 게임 참여자들은 우리 사회 최고의 학벌이라는 서울대부터 공업고등학교 출신, 그리고 조폭과 의사 등 모든 사회적 출신과 배경을 망라하고 있다. 다만 이들은 언제든 우리 사회 속 경쟁에서 탈락해서 없어져도 아무도 모르는 먼지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 이들을 구경하고 관람하는 이들은 권력과 부를 가진 자본가들이다. 이들 역시 이들 간 계급구조로 상호 계급의 구성이 생기기도 한다. 즉, 먹이사슬 구조처럼 윗단계, 그다음 윗단계 식으로 연속되어 있다. 이런 연속된 관계의 정점에 누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그런 역학적 관계는 약간의 상호관계로 존재할 수도 있다. 한마디로 절대 지배자가 없다. 프런트맨과 VIPS의 관계에서 이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는 내내 건축계 비즈니스가 중첩되었다.
공공이 되었건 민간이 되었건, 건축사의 가치를 존중하지 않는 태도와 이들 ‘갑’의 행태들이 중첩되었다. 이들의 요구에 의해 건축사는 본인의 작품을 공개하지 못하기도 한다. 공공건축은 여기저기 완장을 찬 이들의 간섭과 오지랖 넓은 지적질로 휘청이곤 한다. 같은 건축사사무소는 어떤가? 대형 건축사사무소들은 발주처로부터 당한 것을 한풀이라도 하듯이 외주비를 지연시키고, 덤핑을 유도하며, 물밑 로비를 통해 프로젝트 계약을 한다. 이들은 비즈니스 테크닉이라는 허울 좋은 타이틀로 설계외주를 통해 수익을 보전하고, 을의 지위를 ‘갑’의 지위로 신분세탁한다. 제한된 시장에서 건축사들은 네모난 게임장에서 벌이는 죽음의 게임 참여자들처럼 과잉 서비스와 무한 정보제공, 낮은 설계비를 감수하면서 제로섬게임에 참여하고 있다. 심지어 <오징어 게임> 참여자들의 서로를 죽여가면서 게임에 몰두하듯이 상호간의 허점을 휘두르며 완장질도 하고 있다. 그런 게임 모두 게임 주체자의 손바닥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임에도 말이다.

사실 건축에서의 사회적 관계를 언급하지만, <오징어 게임>의 사회 비판적 자아 고찰이 건축적 형태나 흐름으로 나타나긴 힘들다. 건축은 그 자체가 미학적 시각에서 출발하는 경향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 건축도 최근에는 서서히 사회적 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왜냐면 건축의 상당수는 사람들의 거주공간인 주택이고, 오늘날 주택문제는 심각한 사회 문제의 하나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난 수천 년간 삶의 고통과 투쟁은 먹고살기 위한 생존성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오징어 게임>도 근본적으로 먹고사는 삶의 문제에서 시작된 것이다. 반면에 건축은 우리가 벽을 뜯어 먹고 살 것도 아니기 때문에 잠잘 곳만 있으면 해결되는 대상이었다. 그런 대상이 먹고사는 삶의 문제로 떠오른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건축이 잉여자산으로 활용되고 상품과 이익 수단으로 확대되면서부터다. 21세기에 들어서며 전 세계 곳곳에서 주거문제가 삶의 필연적 복지 문제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주택이 상품으로 공급되었던, 또 정책적 이유로 사회공공주택이 공급되었던 건축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적극적으로 건설되는 것은 19세기 이전엔 없었던 일이다. 건축은 잉여 생산물이 아니며, 소수의 사용자를 위한 전형적인 주문 제조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공공은 공공대로 공급될 주택을 만들어야 했고, 정치적 이슈로도 경제적 이유로도 주택이 필요해졌다. 보다 생산적이고 다량으로 만들어 낼 필요가 있었고, 이는 고밀도 주택이 탄생하는 사회적 배경이 되었다. 국가 중심의 통제권이 강한 정부에서는 아파트라는 대량 공급 시스템을 국가적 주택 정책으로 제공하며, 민간 중심의 국가에서는 민간에게 허가권을 주면서 공급하도록 한다.

이렇게 공급을 해도 수요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주택이다. 주택은 어떤 재화보다 많은 비용이 투입되기 때문이다. 문화권에 따라서 공공주택에 투입되는 비용은 더 커진다. 당장 우리나라의 경우만 하더라도 온돌문화로 비용이 훨씬 더 투입된다. 정책은 민간과 공존하는 공급 정책을 펼 수밖에 없다. 민간에 의존하는 경우는 수익창출의 기회를 극대화하려는 특성상 대중적 주택보다 고가 주택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주택 공급은 각 사회 경제적 계층에 균일하게 매칭되기 극히 어렵다. 이런 불균형의 간극을 메우기란 정말 쉽지 않다.

민간이 공급하는 주택은 가격이 올라갈 수밖에 없고,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은 가격 상승의 동력이 된다. 가격 상승의 결과로 주택은 투자 상품이 된다. 사람들이 반드시 있어야 할, 거주해야 할 상품이기 때문에 시장에서 가장 안정된 수요 상품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주택은 캐피탈 게인(Capital Gain)의 도구화가 되어 공개시장에 던져지고 있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주택을 매입하기도 하지만, 가장 안정적으로 소득을 증가시킬 수 있는 대상으로 인식해 투자대상으로 매입하기도 한다. 이런 잉여 투자수단은 과소유 대상이 되며, 다시 가격 상승의 압박요인으로 작용한다.

<오징어 게임> 스틸컷 © 넷플릭스

이 과정에서 <오징어 게임>의 패배자처럼 타이밍을 놓친 사람들은 거주안정성을 상실하게 된다. 주식시장처럼 솟아오르는 주택 가격은 점점 투자 게임 참여자를 확대시키면서 한 번 기회를 잃은 사람들로부터 멀어져 간다. 이들의 노동 소득으로 결코 구입하기 어려운 가격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사회 작동 구조가 바뀌지 않는 이상 이미 상승한 주택 가격을 끌어내리는 것은 쉽지 않다. 그 사회, 국가 경제가 곤두박질치지 않는 이상 말이다.
그렇다면 <오징어 게임>의 구슬치기처럼 게임에서 진 사람은 총을 맞고 죽을 수밖에 없을까? 주거 안정성을 확보하지 못한 사람들은 악에 받쳐서 죽자사자 비 오는 날 온몸을 던져 싸울 수밖에 없을까? 이런 사회에서 건축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일까? 주택은 21세기의 새로운 주식(主食)의 대상인데 말이다.

사실 이런 시각에서의 주택 공급 노력들은 세계 각국에서 오래전부터 진행되어 왔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대체로 20세기 초반,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여러 가지 이유로 노동자 주택, 사회적 주택, 공공 임대 주택 등 다양한 이름으로 국가나 민간 자선 단체 중심으로 공급되고 있다.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그나마 반가운 사실은 초기 공급된 사회적 가치의 공공주택들은 ‘공급’ 자체에 의미를 부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공주택은 르 코르뷔지에가 언급했다던 “주택은 살기 위한 기계”적 가치로서 비를 피할 보송한 공간 정도로 만들어 공급되었다. 그러나 이런 생색내기 공급이 사람들에게 만족스러울 리가 없다. 왜냐면 사람은 단백질과 세포로 구성된 생물체가 아니라, 생각과 감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공짜에 준하게 제공되는 공공주택이라 할지라도 심리적 안정과 편안함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오징어 게임>처럼 타인의 죽음으로 획득되는 456억의 거금이 아닌, 누군가의 희생보다는 협력과 사회 재생산, 재기의 동력으로 만들어지는 공공적 주택이어야 한다.

이미 다양한 사례에서 이런 협력과 사회 재생산의 시각을 제공하는 주택들이 있다. 이 과정에서 건축은 힘을 발휘하고, 성과를 내고 있다. 단지 ‘공급’이 아닌 사람의 심리와 감성을 이끌어내는 디자인된 주택이 등장하고 있다. 성공하지 못했지만 영화배우 브래드 피트가 공급했던 ‘메이크 잇 라잇(Make it right)’ 재단과 함께 했던 프랭크 게리의 작품 같은 세계적 건축 작품들이 있다. 매번 전미 건축상 AIA를 수상하는 미국 홈리스지원 단체 ‘Skid Row Housing Trust’ 재단이 공급하는 공동주택도 있다. 그런가 하면 매년 각종 건축상을 수상하는 유럽의 수많은 사회적 주택들 역시 마찬가지다. BIG를 세계적으로 주목 받게 만든 저소득층 공동주택도 있고, MVRDV를 스타로 만든 네덜란드 노인 공동주택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정치적 이슈로 등장한 사회적 주택, 공공 임대는 우리 사회에서 혐오시설로 치부되는 형국이다. 누구보다 이를 설득해야 할 정치인이 공개적으로 이를 공격한다. 서유럽의 우파 정치인이나 미국의 트럼프조차 하지 않는 발언을 일삼는다. 이건 좌·우를 벗어난 무개념 선동이다. 슬픈 것은 이런 선동에 동의하고 박수치는 이기적 심리가 존재한다. 덕분에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 주택, ‘공공’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공동주택들은 이름을 숨기고 있다.

인도의 계급사회를 지적할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 건축의 계급을 극복해야 한다. <오징어 게임>에 숨어 있는 경제적 계층의 위상을 도시와 건축에서는 없애야 한다. 그래야 인간의 착한 본성이 인정받을 수 있다. <오징어 게임>의 마지막에서 우린 다음과 같은 희망을 볼 수 있다. 그래도 인간은 희망의 존재라는……. 슬프면서도, 아프면서도 <오징어 게임>의 핑크색이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어쩌면 이런 인간성에 대한 희망 때문인 듯도 싶다.

 

글. 홍성용 Hong, Sungyong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은 건축사(KIRA), 건축공학 박사, 서울시 공공건축가로 건축의 크로스오버를 오래 전부터 주장했다. 국내 최초의 영화와 건축을 해석하는 <영화속 건축이야기, 1999> 을 시작으로 여행기, 마케팅을 연구했다. 건축사로 최초의 경영서적인 <스페이스 마케팅 2007>을 삼성경제연구소를 통해 출간하였고, 도시경쟁력 연구인 <스페이스 마케팅 시티, 2009>, 그리고 2016년 <하트마크>를 출판했다. 신사동 임하룡씨 주택, 근생 멜론 등 다수의 건축작품과 인테리어 작품들이 있다.
ncslab@ncsarchitec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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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퓨쳐리스트 도시 브라질리아의 혁명가

The 20th Century city of future list, the revolutionist of Brasília

다큐멘터리는 지루하다. 공부하는 마음으로 본다. 가끔 정신없이 몰입하기도 하지만 쉽지 않다. 이야기 구조가 있으면 그나마 보는데 감정이입이 되지만, 다큐멘터리는 좀처럼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다. 물론 시선을 끄는 강렬함이 있는 경우는 조금 이야기가 다르다. 그렇게 시선을 강렬히 끄는 건축 다큐멘터리가 있어 그림을 구경하듯 1시간 30분을 몰입했다. 우리나라에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은 브라질의 수도, 브라질리아 이야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A Machine To Live In>이다.

환상적이고 공상과학 영화에나 어울릴 법한 도시 풍경을 가진 브라질리아를 이렇게 자세히 보기는 처음이다. 다큐는 공상과학영화처럼 내레이션을 하는 식으로 영상이 구성됐다. 감독이 가히 신난 듯하다. 브라질리아는 20세기 초반 경제적으로 잘나가던 브라질의 야심작인 신도시 계획이었다. 그리고 유토피아적 사고와 혁명적 진보주의자인 오스카 니마이어의 천재적 성과물인 도시다. 30대의 나이에 르 코르뷔지에의 영향을 받아 과감하게 시도한 브라질리아의 도시 풍경은 반백 년이 넘은 지금에 봐도 가히 혁명적인 모양을 보여준다.
흡사 공상과학영화 <가타카>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보는 듯하다. 미니멀한 분위기와 묘한 기하학적 구성, 그리고 언밸런스한 아날로그적 재즈와 클래식한 음악을 배경으로 구성된 다큐다. 너무나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사실 이렇게 인공적인 조형미로 도시를 구성하고 만든다는 것도 놀랍다.

오스카 니마이어가 설계한 브라질리아 대성당(1970)

브라질리아 대성당의 내부 모습

오스카 니마이어 설계의 브라질리아 국회의사당(1960)

도시와 건축의 완결성은 계획하는 디자이너의 완벽한 의도도 구현되지 않는다고 믿는 한 사람으로서 이런 디자인은 관상용이다. 도시의 역사를 보면 완벽하게 계획된 도시는 비인간적이고, 철저한 계급적 구성으로 시간이 지나면서 파괴가 된다. 인간은 기계적 이성으로만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탈과 감정, 적절한 오류와 부정확함도 필요한 인간적 균형추이다. 계산된 도시는 시간이 지날수록 불평등과 불공정의 대상이 되고, 필연적으로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동반된다. 수학적 도시였던 로마의 도시들이 중세시절 기형적으로 변형되고, 일그러지는 것도 바로 이런 인간의 모순과 한계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지전능한 신의 역할을 하고 싶어 하는 파시스트적인 아키텍트들은 도전하고, 실패한다.

20세기의 흔적들이 바로 그것이다.
브라질리아가 신도시로 성공했는지는 논란이 많고, 인도의 샹디갈(찬디가르)처럼 계획도시의 한계가 있다는 말도 있다. 다시 말하지만, 로마 도시들이 중세로 넘어가면서 계획된 도시구조가 깨지고, 각종 바이러스나 침투한 기생충에 훼손된 신체 장기 같은 복잡하고 엉클어진 미로 도시처럼 이들 계획도시도 그렇다. 철저하게 거주자에 대해 계획을 했지만, 의도치 않은 도시 빈민층의 마을이 질서정연한 계획을 깨고 있다. 로마 시대 성 밖은 계획도시도 아니었고, 위생 인프라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아시아의 고대 도시들도 마찬가지고, 우리나라 역사 속 도시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에도 계획도시가 많다. 1970년대 철저한 산업의 기능으로 구분된 산업도시에는 창원이나 울산 같은 계획도시가 있다. 그런가 하면 부동산 가격 폭등의 문제로 인해 만들어진 일산과 분당 같은 신도시도 있다. 한발 더 나아가 국가기관의 부동산 투자가 대박을 터트린 광교나 판교, 위례 같은 도시도 있다. 그런가 하면 철저한 관료들의 도시, 공무원 도시인 세종시도 있다. 모든 시설에 용도가 정해진 계획은 거칠다. 그런 거친 계획으로는 삶의 다양한 변화를 담아내지 못한다. 우리나라 신도시들이 얼마나 지루하고 재미없는가? 아주 끔찍하다. 그런 끔찍함을 말하는 내가 까탈스럽고 유난해 보이긴 한다. 하지만, 해가 진 신도시의 아파트 단지를 걸어 보았는가? 아파트 단지를 감싸고 둘러친 인도를 걸어보았는가? 범죄가 일어나지 않은 게 신기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민도에 박수를 칠 환경이다.

우리보다 더 빈부격차가 심하고, 갈등이 많고, 부패가 만연한 브라질은 이런 문제가 더욱 극명하게 나타난다. 그래도 긍정적으로 한번 바라보자. 브라질리아는 비록 도시적 성공을 말하긴 어렵지만, 모험과 실험 그리고 철학을 바탕으로 시도된 도시다. 오스카 니마이어의 확신과 과감함으로 완성된 브라질리아지만, 중세도시처럼 의도하지 않은 도시의 변형과 보통 사람들의 개입으로 정교한 완벽함이 깨져있다.

그러면 우리의 신도시들은 어떨까? 세종, 송도, 위례, 판교, 분당, 일산…… 기계적 완성도가 있을지 몰라도 어색함이 존재한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억제된 곳임은 분명하다. 그래서 재미가 없다. 아마 브라질리아도 그런 듯하다. 다큐 중간에 주목한 젊은이들의 모습을 봐도 그렇다. 오토바이족으로 보이는 이들의 행렬과 손가락 욕은 유머스럽기도 한 비꼼이다. 인공적 도시 풍경이 아닌 뒷골목의 자유로움과 엉클어짐, 불규칙한 모습들. 인간은 이성의 합리성과 변칙적 감정의 소유자다. 이런 인간의 본질을 단순화해서 하나의 성질로 정의를 내려버리면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느긋한 틈이 있는 도시, 변화와 개인의 자유의지를 허용하는 도시들은 브라질리아보다 훨씬 따뜻하고 인간적인 감정을 갖는다. 그리고 그런 도시들은 지속가능성을 허용하고 있다. 느긋한 계획(?)이라고 할까, 아니면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100% 완벽하지 않은 불완전한 계획이라고 할까. 어쩌면 개인들이 자유롭게 개입할 수 있는 허용치를 인정해 주는 것이 더 완벽한 것일지도 모른다. 굳이 브라질리아가 아니더라도 당장 우리나라 신도시를 가보면 숨이 막히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이유도 이런 것이다.

잠실의 계획된 도시 풍경 안에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 신천 새마을 시장을 아는가? 도시계획가 어느 누구도, 계획한 시장이 아니다. 정교한 가로세로형 바둑판 도시에서 사람들의 삶의 의지로 기하학의 정교함을 덕지덕지 깨가면서 만들어졌다. 바로 이런 변칙성, 자유의지, 삶의 방식에 주목하고 이를 인정해야 한다. 다큐멘터리의 브라질리아는 계획만능주의자였다고 볼 수밖에 없는 중남미 최고의 공산주의자였던 오스카 니마이어의 환상이 아니었나 싶다. 계급이 평등하고, 계층 간 우열 없는 유토피아적 사고관이 만들어낸 그의 디자인이 실제로는 너무나 비인간적인 차가움을 전달해 주는 것도 아이러니다. 그건 낯설음이었고, 신기한 모습이다. 한발 더 나아가 기묘한 샤먼적 감정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브라질리아라는 대상으로 다큐가 전개되지만, 공산주의자 오스카 니마이어의 유토피아적 관점을 다양하게 해석하고 있다. 이 부분이 이 다큐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부분인지도 모르겠다. 언어의 단절을 극복하기 위한 만국공통 목적으로 만들어진 에스페란토어의 사용과 독점적 소유가 아닌 공동체의 삶. 인간과 기계의 조화, 그리고 욕망의 배제와 헌신. 이성과 감성의 경계선과 자유로움의 표현. 그렇다고 이 도시, 오스카 니마이어의 이런 실험이 마냥 비난을 받을 건 아니다. 적어도 20세기 초반 브라질 정치권이 모험과 실험, 도전을 받아들일 만큼의 여유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이 안에서 긍정적 가치도 분명 발견할 수 있다. 창조적 인간의 노력과 도전에 대한 가치다. 오스카 니마이어가 100년 넘는 삶 동안 도전해온 원천의 장소가 브라질리아다. 그의 탐구와 도전은 과감한 시각적 건축으로 살아남았다. 분명 인류의 유산으로서 가치는 인정할 만하다.

이 다큐멘터리의 감독은 바로 이 점에 주목했던 것 같다. 좌우 대칭의 엄격한 구성과 여백을 만들어서 화면을 만드는 것은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그래픽이다. 그것만으로도 지루하기 짝이 없는 다큐멘터리를 볼 때 만족할 만하다. 사회학적 관점과 사회와 인간의 관계로 빚어지는 도시와 건축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다소 비판적일 수밖에 없지만, 미학적 측면에서 본다면 별 4개짜리 추천 다큐로 인정할 만하다. 아울러 황당한 외계 존재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감을 자극한 것도 있는 듯하다.

흥미로운 점은 기하학적 구성을 만들어낸 오스카 니마이어의 이런 작품들이 최근 우리나라 건축 작품이나 인테리어에 대 유행이라는 점이다. 그의 철학과 사상은 배제된 유니크한 기하학적 그래픽이 세련되게 느껴지게 한다. 마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수직 수평의 스케치가 유럽에 건너가서 그의 유기적 철학이 배제된 채로 데스틸의 미학적 동기로 작용한 것과 같다. 무척 흥미로운 현상이다. 오늘의 이런 유행은 어쩌면 단시간 소비되는 상품의 도구로 소모되는 건축적 공급 시대여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 참고 링크 https://g.co/kgs/XA3P6B

 

글. 홍성용 Hong, Sungyong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은 건축사(KIRA), 건축공학 박사, 서울시 공공건축가로 건축의 크로스오버를 오래 전부터 주장했다. 국내 최초의 영화와 건축을 해석하는 <영화속 건축이야기, 1999> 을 시작으로 여행기, 마케팅을 연구했다. 건축사로 최초의 경영서적인 <스페이스 마케팅 2007>을 삼성경제연구소를 통해 출간하였고, 도시경쟁력 연구인 <스페이스 마케팅 시티, 2009>, 그리고 2016년 <하트마크>를 출판했다. 신사동 임하룡씨 주택, 근생 멜론 등 다수의 건축작품과 인테리어 작품들이 있다.
ncslab@ncsarchitec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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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 매트릭스 vs 2021 메타버스

1999 Matrix vs. 2021 Metaverse

<매트릭스> 포스터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2021년. 정치인의 구호에서, 언론의 사회현상에서, 경제계의 화두에서, 메타버스(Metaverse)가 화제가 되고 있다. 가상화폐 논란도 수년째 계속되고 있다. 건축사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직업을 갖고 있는 입장에서 이런 화두가 어리둥절하다. 메타버스가 뭘까?

메타버스는 확장된 가상 세계라는 개념으로 우리 생활에 점차 깊숙이 들어오고 있다. 언뜻 이해되지 않는 개념이지만, 이미 우리 생활에 스며들어 있다. 내 집 컴퓨터에서 언제든 목적지를 찾을 수 있는 로드뷰도 일종의 메타버스 세계고, 마우스를 클릭해가면서 모델하우스를 이리저리 구경하는 것도 메타버스의 세계다. 증강현실은 좀 더 구체화된 메타버스의 세계로 몇 해 전 스마트폰으로 포켓몬을 잡으러 찾아다니던 것을 기억하면 된다.

과학적으로 생각해 보면 ‘경험’한다는 개념은 뇌에서 만들어진 다양한 알고리즘의 연결망에서 비롯된 결과다. 만약에 뇌를 속인다면 인간의 생물학적 신체에서 느껴지는 오감으로 기억하는 경험을 가공의 자극과 정보 전달로 만들어 낼 수 있다. 영화 <토탈 리콜(2012)>이나 <AI(2001)>에서는 장갑이나 의류를 통한 전기 자극과 디지털 헬멧으로 실제 감각 이상의 느낌을 주어 성적 판타지를 자극하는 장면이 나온다. 오래전 읽은 경제학자의 글에서 이런 가상의 성적 경험으로 사람들의 신체 접촉 빈도수가 줄어들게 되어 성병이나 임신, 출산의 과정이 사라질 것으로 예측하는 것을 보았다.

과학의 발달이 인간의 생물학적 자극과 본능의 방향을 바꿔버린다는 것이다. 이런 상상력은 인공지능의 독립적 의사결정이 가능하다는 전제까지 하게 되고, 소설가나 만화가가 아닌 과학자들이 이런 위험을 경고하기도 한다. 문득 이 경고의 끝은 어디인가 상상해 보니, 20년 전 우리에게 충격을 주었던 영화 <매트릭스(1999)>가 결코 불가능한 상황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든다.

<토탈 리콜> 스틸컷 © 소니픽쳐스 릴리징 월트디즈니 스튜디오스 코리아(주)

당시 여러 잡지에 영화 관련 글들을 게재했는데, 막연하게 언젠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영화를 감상했던 당시 글을 보면 영화 자체에 포인트가 맞춰져 있다.

“녹색의 글씨로 낙수(落水)하는 초반의 장면은 <공각기동대>를 본 사람이라면 쉽게 오버랩 된다. 더구나 고층건물에서 다이빙하듯 뛰어내리는 장면에 이르면 이미지 카피로 인한 식상함을 느끼게 된다. 그런가 하면 장자의 호접몽처럼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이야기로 전개되어, 현실의 모호함을 배경으로 나타내기도 한다. 이는 <토탈 리콜>이나 <12 몽키즈> 속 현실과 비현실의 애매한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과 유사한 설정이기도 하다. 다만 이 영화들이 좀 더 심리적이고 정신 분열적인 상황으로 연출하고 있다면, 매트릭스는 의식만으로 존재하는 세계와 현실에서 기계에 의해 조정되는 이분법으로 나뉜다. 이런 생각은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통해 초시간적이고, 초 공간적인 관계가 가능한 현재의 상황에서 이해할 수 있는 설정이기도 하다. 의식만의 세계에서 엮어지는 다양한 이야기들. 큰 줄기는 메시아적 주인공이 악(영화에서는 굳이 이것을 악이라 칭하지 않았지만, 제거해야할 기계의 존재가 그다지 매력적인 천사의 모습으로 표현되지 않는다.)의 세계를 구원한다는 전형적인 권선징악의 구조를 기본으로 한다. 다만 주인공의 메시아적 이름-네오-에서부터 다양하게 등장하는 인물들의 작명은 관객들로 하여금 지적인 토론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주인공 네오(neo)는 새로움, 신기원을 이룬다는 그리스어(neos)로 해석된다. 모피어스(morpheus)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꿈의 신이며, 그리스어로 ‘morphnos’가 의미하는 어둠처럼 주인공들의 복장이 검정인 것을 해석하고 있다. 또한 네오와 상대역인 트리니티(trinity)는 기독교의 삼위일체를 뜻하며, 동시에 삼위일체는 기독교에서 하나님에 대한 의미임과 동시에 네오는 메시아로서 그리스도를 의미한다는 해석도 등장한다. 더구나, 리로리드에서 등장하는 지하 인간세계인 시온(zion)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땅’으로서 예루살렘을 상징하기도 한다. 또한 이는 이집트로부터 출애굽을 행한 이스라엘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리로리드에 나온 시온의 장면이 중동적인 시각적 장치를 보여주는 것을 보면, 마치 찰톤 헤스톤 주연의 <십계>의 한 장면이 오버랩 되기도 한다. 고딕의 어두움, 구원에 대한 이미지들과 기계에 대한 인간의 회복력을 보여주는 르네상스적 관점을 드러내기까지 이 영화는 수많은 생각과 이미지를 드러내고 있다. 영화를 보면서 지적 욕구와 스스로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과 학습의 한계를 답답하게 느낀 <베를린 천사의 시> 이후로 두 번째가 아닌가 싶은 영화다. 더구나 작가주의적 심도 깊은 영화와 상업영화 사이의 교묘한 줄타기는 이 영화의 최대 장점이기도 하다. 보는 이에 따라 각기 다른 양상으로 이해되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20년이 지나 다시 영화를 생각하면서 당시의 글을 펼쳐보았다. 크게 주목하지 않았던 ‘가상성’은 이제 현실화되어 경제적 활동 영역의 한 가운데 있다. 이런 가상 사회에서 구분되고 정의되는 시간의 개념은 그 의미가 약해진다. 장소에 대한 변별성 역시 마찬가지다.

골프시뮬레이션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실내 골프장인 ‘골프존’을 가보자. 그곳에서는 세계 유수의 골프장을 선택할 수 있다. 또 실제의 장소처럼 느끼게 하기 위한 보조적인 물리적 장치들이 수반된다. 처음엔 어색하지만, 이내 몰입하게 되고 현장의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는 느낌을 받는다. 온라인 쇼핑몰은 모니터에 나열된 상품을 구매하던 패턴에서 가상세계화된 나의 아바타를 위한 각종 쇼핑을 유도하고 있다. 모니터 안의 이미지에 인격체를 부여해서 현실의 돈을 지불하면서 생활감을 경험하고 있다.

모니터 안에서 펼쳐지는 활동 폭과 범위가 넓어질수록, 모든 분야가 통합되고 공유된 하나의 집합 공간이 필요해진다. 물론 이런 교집합도 0과 1로 만들어진 인식의 바탕일 뿐이다. 뇌로 인식되는 하나의 영역, 하나의 세계가 바로 메타버스의 세계, 즉 각종 인터넷 정보 세계인 것이다.

사람들은 그 안에서 쇼핑하고, 게임을 하고, 대화를 한다. 인식의 몰입은 중독성이 동반되는데, 전 세계인이 동시에 가상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아마도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가상의 세계에 몰입될 것이다. 물리적 과학과 상업화의 성과는 가상 세계의 몰입도를 더욱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발달할 가능성이 높다. 몰입을 위한 도구로 개발되고 개선될 것일 텐데, 이런 과정에서 건축은 어떻게 진행될까?

영화 <매트릭스>에서 말하고자 한 이야기의 결말이 뭔지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일종의 미래에 대한 상상에 기반한 중계방송 같은 전개를 보면 현재 진행 중인 과학 발달에 대한 두려움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런 두려움은 현실의 것과 차원이 다르다. 물론 매트릭스의 가상세계에서는 현실과 동일한, 부동산 투기며 도박, 사기, 매춘 등 각종 범죄가 가능하다. 그러나 간단히 말해서 이런 범죄는 플러그를 빼버리면 그만이다. 매트릭스에서도 이런 위험 상황에서 플러그를 빼버리는 것으로 벗어나려 한다. 물론 인간의 신체는 뇌로부터 통제를 받기 때문에 극도의 상황이 되면 몸 자체가 영향을 받아 위험하게 되기도 한다. 매트릭스의 두려움은 바로 이런 지점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철학자들이 말하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통제하는 어떤 거대한 권력. 그것이 자본의 권력이든, 정치적 권력이든…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은 목표가 없는 맹목적이면서 강력한 권력일지도 모른다.

이런 시각에서 2021년에 바라보는 영화 매트릭스는 사뭇 위협적이고 소름 돋는 디스토피아 영화의 정점 같은 느낌이다. 참고로 매트릭스를 설명해 주는 만화영화 매트릭스를 보면 영화의 이해도가 훨씬 높아진다. 반면에 후속편 몇 개는 아쉽다. <매트릭스3 : 레볼루션>은 그냥 상업영화로 봐도 무방할 듯하다. 아무튼, 각종 첨단 정보화 도구 개발과 생활화된 지금 <매트릭스>를 다시 보는 것도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자, 그렇다면 이런 메타버스의 시대에 건축은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 단순하게는 상업적 활용으로 사용되고 있는 가상체험형 모델 하우스가 있다. 가상체험형 모델 하우스는 평면에서 벗어나 이제 마우스를 따라 이동하는 입체적 시뮬레이션까지 가능하다. 한발 더 나아가 주택 모델하우스뿐만 아니라 도시 전체를 입체로 구현한 도시공간 시뮬레이션도 현실화되어 있다.

여기에 연구되는 프로그램은 사람들의 이동량도 포함시켜서 시뮬레이션이 가능하다. 이동량의 추측을 통해 특정 도시 공간에서의 건축이용량도 파악할 수 있고, 빅데이터를 가공하면 상업적 프로그램 개발도 가능해진다. 한마디로 기획접근의 유용성이 현실화 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건축 시뮬레이션을 통해 공사비를 절감하고 변화에도 대응할 수 있다. 이미 현실화된 BIM 여러 경우의 수 중 하나다. 건축 설계 역시 증감현실과 각종 3D도구 개발로 점차 대중화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건축의 좌표, 더 나아가 건축적 창조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더 중요한 것은 18세기 산업혁명 당시 등장했던 두려움의 반작용인 러다이트 운동이 21세기 메타버스의 시대에 필요한가 하는 점이다. 일자리를 뺏는 것은 생존과 직결되는 것이다. 18세기 노동자들의 반발은 충분히 이유가 있었고, 시대 변화로 이들이 학습된 제조업의 노동자로 재편성되면서 러다이트 운동은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의 한복판에 있는 메타버스의 시대에서 경제적 약자들은 대응할 힘이 없다. 왜냐면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더 이상 이들 노동자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인식과 판단의 기능이 점차 가능해지는 인공지능 시대에 인간의 각종 노동의 힘과 가치는 위축되고 있다. 육체적 노동은 점차 개발되는 인간화 로봇으로 대체될 것이다. 각종 생산 역시 마찬가지다. 심지어 기획하고 창조한다는 지극히 인간적 사고 분야까지도 모순과 실수를 학습하는 인공지능으로 대체가 가능하다고 하는 세상이다.

메타버스의 시대. 건축사들은 어떻게 될까? 앞으로 10년 뒤 세상이 또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하면서도 약간 두렵다.

<토탈 리콜> 포스터 © 소니픽쳐스 릴리징 월트디즈니 스튜디오스 코리아(주)

 

글. 홍성용 Hong, Sungyong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은 건축사(KIRA), 건축공학 박사, 서울시 공공건축가로 건축의 크로스오버를 오래 전부터 주장했다. 국내 최초의 영화와 건축을 해석하는 <영화속 건축이야기, 1999> 을 시작으로 여행기, 마케팅을 연구했다. 건축사로 최초의 경영서적인 <스페이스 마케팅 2007>을 삼성경제연구소를 통해 출간하였고, 도시경쟁력 연구인 <스페이스 마케팅 시티, 2009>, 그리고 2016년 <하트마크>를 출판했다. 신사동 임하룡씨 주택, 근생 멜론 등 다수의 건축작품과 인테리어 작품들이 있다.
ncslab@ncsarchitec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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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장센의 건축 코드

Mise-en-Scène Architectural Code

미장센(Mise-en-Scène)은 영화나 연극 등에서 사용하는 배경에 대한 총체적 표현을 말한다. 원래 무대장치 일체를 말하는 것이었으나, 점차 확대되어 배우의 배치, 의상, 무대장치, 조명, 분위기 일체를 연출하고 계획하는 총체적 구성을 말한다. 위키피디아에서는 영어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Putting on Stage(무대에 배치한다.).”

미장센을 잘 다루는 영화감독으로 유명한 알프레드 히치콕은 영화의 몰입도를 강화하고 긴장감을 증폭시키는데 천재적 연출을 보여주기도 했다. 미학적 측면이 다분히 강한 미장센은 배우들의 연기에 추가 설명하는 역할이나 복선이나 암시 같은 보조적 역할을 한다. 그래서 제3의 배우라고 언급하기도 한다. 의도했는지는 모르지만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2019)>을 보는 내내 알프레드 히치콕이 떠오른 건 이런 미장센의 역할 때문이었던 것 같다.

사실 미장센을 적극 활용하는 감독이나 영화들은 무수히 많다. 영화사의 시초에 나오는 프리츠 랑의 영화들뿐만 아니라, 찰리 채플린의 무성 영화에서도 활용되었다. 영화의 발전과 더불어 미장센은 점차 확장성을 가지게 되는데, 화려한 라스베이거스 쇼의 무대장치처럼 활용되기도 한다. 물론 이야기 구조의 한 축을 형성하기도 하고, 음악과 같이 화려한 1950~1960년대 뮤지컬 영화의 배경처럼 다뤄지기도 한다. 배우이자 무용가인 프레드 아스테어의 현란한 탭댄스도, 혼연일체로 구현된 배경 장면이 있었기에 몰입도가 컸던 것 같다. 상징과 기호의 대가인 피터 그리너웨이가 그런 미장센을 영화 전체에 활용한 감독이 아닐까 한다.

피터 그리너웨이의 영화는 화려한 영상미와 더불어 은유와 상징으로 영화의 이야기 전체를 이끌어 간다. 그가 감독한 작품으로, 고전화되어버린 오래전 영화 <건축가의 배(The Belly Of An Architect, Il Ventre dell’architetto, 1987)>, <영국식 정원 살인 사건(The Draughtsman’s Contract, 1982)>,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The Cook The Thief His Wife & Her Lover, 1989)>, <필로우북(The Pillow Book, 1996)> 등이 있다. 그의 영화는 충분히 토론할 가치가 있고, 인문적 비평 대상이 될만한 자극을 준다.

나는 그의 영화에서 보여주는 이런 상징과 은유를 건축교육에서도 매우 유용한 도구로 사용했다. 그의 영화구조에서 보이고 함축적으로 다뤄지는 이면의 이야기는, 설계수업에서 상업적 공간을 풀어나가는 것과 어느 정도 유사하기 때문이었다.
상업공간들은 브랜드라는 개념이 있어서, 브랜드의 상징성을 디자인으로 전환해서 소비자들에게 제공해야 한다. 이런 개념을 훈련하는 간접 도구로 영화의 미장센 분석은 가장 효과적인 학습 방법이다.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경우도 있지만, 하나하나의 장치에 숨겨진 의도와 상징을 활용해서 연출한다. 심지어 조명과 리드미컬한 화면 구성까지 영화 관객의 심리적 흐름을 이끌며 주도하고 있다. 피터 그리너웨이의 영화가 교과서적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에는 이런 가치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영화 <깊고 푸른 밤> 포스터 ©동아수출공사

영화 <황진이>의 한 장면. 우리나라 영화는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미장센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자, 그럼 우리나라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우리나라에서 영화의 미장센이 강조된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물론 1960년대 황금기 시절에 만들어진 영화를 보면, 열악한 제작환경에서도 나름대로 고민한 흔적들이 보이긴 한다. 다분히 리얼리즘 경향이 없지 않지만, 틈틈이 표현이 강조된 영화들도 있긴 하다. 최근 미국 아카데미 영화제 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의 초연작이 대표적이다. 김기영 감독의 <화녀(1971)>에 등장하는 배경은 다분히 미장센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후 우리나라 영화에서 의도적으로 연출된 미장센을 분석할 만큼은 아니었다.

사실 이야기 중심의 영화, 특히 리얼리즘 계열의 영화에서는 미장센보다 배우들의 대사와 연기의 사실적 구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미장센은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뤄지는 경향이 있다. 이탈리아 리얼리즘 영화의 대가인 비토리오 데 시카의 작품들을 보면 지극히 사실적인 화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흐름은 일본 영화의 대가인 오즈 야스지로의 작품도 유사하다. 물론 미장센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상징과 은유로 큰 역할을 하는 미학 중심의 영화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약하다. 오즈 야스지로처럼 잔잔하게 무거운 이야기를 가볍게 흘려보내는 고레에다 히로카즈나 우리나라 이창동의 영화들은 이야기 중심으로 전개되어 상대적으로 미장센은 약하다. 아! 이런 유의 영화감독으로 홍상수도 있다.

아무튼 우리나라 영화의 이런 흐름은 1980년대 들어 조금씩 새로운 영화들이 등장하면서 조금씩 바뀌었다. 미장센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배창호 감독의 <깊고 푸른 밤(1984)>이나 <황진이(1986)>를 언급할 수 있다. 이런 흐름에서 한국적 미장센을 전면에 등장시킨 영화들이 계속 나오는데, 차갑고 미니멀한 배경으로 이야기의 끈적함을 다소 제거한 이재용 감독의 <정사(1998)>, 우리나라 도시 공간을 풍자와 유머로 다룬 봉준호 감독의 <플란다스의 개(2000)> 등이다. 더불어 박찬욱 감독이 영화에서 다루는 미장센은 이미 세계 영화사에 남을 만한 작품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는 미술감독이다. 미술감독들은 영화의 이야기 구조를 보강하고 강화시키는 미장센을 창조하고 이끌어내는 주역들로, 올드보이의 류성희 감독이 대표적이다.

최근 우리나라 영화뿐만 아니라 드라마 역시 이런 미장센 연출에 합류했다. 건축을 하는 입장에서 볼 때 우리나라 드라마에서 건축이 제대로 묘사되거나 등장하는 경우는 드물다. 특히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는 건축작품이 등장하는 건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다. 물론 장소 섭외의 어려움이나 건축을 보는 안목의 모자람도 한몫했을 것이다.

드라마 <스카이캐슬> 속 주택의 모습. 스카이캐슬은 성공에 대한 욕구를 이미테이션화된 이탈리아 풍의 주택과 중첩시키는 등 이야기 구조와 공존하는 건축적 배경을 잘 보여준다. ©JTBC

이런 관점에서 최근 방송된 드라마는 깜짝 놀랄 만했다. 최근 몇 년 사이 국내 드라마에서도 미장센이 전혀 다뤄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대단한 화제가 되었던 <스카이캐슬 (Sky-castle)>은 드라마의 이야기 구조와 공존하는 건축적 배경을 보여주었다. 허영과 속물적 성공에 대한 욕구를 이미테이션화된 이탈리아 풍의 주택들과 중첩시킨 점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놀이동산의 테마 건축 같은 이탈리아 모사품 주택들은 공예적 정교함이나 가치는 제거된 채, 상업적 판매 상품으로 주택이 만들어진 전형적 사례다. 이런 사례를 은유적으로 등장시킨 <스카이캐슬>은 드라마에 숨겨진 성공 욕망을 드러내는 보조장치였다. 물론 그것까지 연출에서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석하고 비평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무릎을 칠 만한 것이었다.
골목길을 잘 다룬 <경이로운 소문(2020)>이나 개발의 뒤안길을 우울하게 다룬 여러 드라마에서는 작은 공간에서 확장되어 도시로 이어지는 관찰을 보여준다. 이런 맥락에서 한발 나아간 드라마로 <마인(2021)>을 흥미롭게 보았다.

드라마 <마인> 효원 家 포스터. © tvN

<마인>은 건축적 접근이 매우 강렬하고 명확했다. 더구나 국내 드라마에서 보기 드물게 건축의 구성과 장치를 이야기 도구로 활용한 점에서 매우 탁월했다. 무엇보다 안도 타다오의 작품인 뮤지엄 산이 주인공의 집으로 등장했다. 뿐만 아니라 알바로 시자가 설계한 미메시스에서도 촬영되었다. 국내외 건축적 가치가 있는 배경이 이토록 많이 나온 국내 영화나 드라마는 기억나질 않는다. 섭외도 탁월했던 것 같다.
무엇보다 이 드라마에 나온 건축의 완성도를 드라마 마니아들에게 선보인 점이 내심 반가웠다.

특이한 것은 안도 타다오나 알바로 시자의 간결한 건축적 표현들이 가상의 최상위 재벌들의 공간으로 등장했다는 점이다. 이전 같으면 클래식 장식이 뒤엉킨 유럽의 고전 건축 장식들이 난데없이 흩뿌려진 배경이었을 텐데, 이 드라마에서는 장식이 배제된 간결한 공간으로도 충분히 적합하게 최상류층을 설명했다.

건축과 영화의 접점을 언급하고 비평하는 입장에서 드라마 <마인>에 주목한 또 다른 이유는 전체 시리즈가 진행되는 내내 어색한 배경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뮤지엄 산이나 미메시스뿐만 아니라 블루 더 카페 같은 상업공간 등 여러 배경 장소의 공통점은 간결함이었다. 중간톤의 인테리어나 건축의 구성은 폭발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형식보다 뭔가 조용하고 잔잔한 느낌으로 제격이었다.

이런 색감과 구성은 드라마가 절정으로 이르는 단계에서 시청자의 감정을 억제할 수 있었다. 드라마 전개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의 중심 코드가 작용한 듯 보였다. 마치 드레스 코드처럼 이야기를 중심으로 치밀하게 공간을 선택하고, 디자인의 방향을 설정한 것이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이질적이거나 어색함이 없었던 이유다. 때로는 전체 흐름에서 튕겨져 나갈 수 있는 건축도 정밀하게 조율되었음을 알 수 있다. 꿈보다 해몽일지 모르지만, 이야기의 기승전결 곳곳에 수많은 복선과 이미지 암시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다.

감상의 대상에서 영화는 일종의 테스트 북 같은 역할로도 활용될 수 있다. 미장센의 구성과 심리적 관계를 분석해 보면 현실 세계에도 적용할 요소들이 충분하다. 특히 상업적 목적으로 공간을 기획하고 디자인한다면, 또 그런 건축을 기획하고 디자인한다면 지금부터 영화를 진지하고 섬세하게 관람하길 바란다.
Good Luck!

 

글. 홍성용 Hong, Sungyong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은 건축사(KIRA), 건축공학 박사, 서울시 공공건축가로 건축의 크로스오버를 오래 전부터 주장했다. 국내 최초의 영화와 건축을 해석하는 <영화속 건축이야기, 1999> 을 시작으로 여행기, 마케팅을 연구했다. 건축사로 최초의 경영서적인 <스페이스 마케팅 2007>을 삼성경제연구소를 통해 출간하였고, 도시경쟁력 연구인 <스페이스 마케팅 시티, 2009>, 그리고 2016년 <하트마크>를 출판했다. 신사동 임하룡씨 주택, 근생 멜론 등 다수의 건축작품과 인테리어 작품들이 있다.
ncslab@ncsarchitec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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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 도시의 성장과 그늘… ‘소년시절의 너’

Growth and shadow of a competing city… ‘You in your boyhood’

영화 <소년시절의 너> 포스터 ©영화특별시SMC

소위 인터넷 프로토콜 텔레비전(IPTV) 덕분에, 지나간 영화를 보는 게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면서 이달의 숙제를 하기 위해 영화 사냥을 했다. 그렇게 우연히 발견한 영화에 시선이 꽂히면서 2시간이 넘도록 지루할 틈 없이 집중해서 보았다.
영화의 주제는 오래전 일본에서 시작되어 우리나라와 중국, 그리고 간간이 미국이나 유럽에서도 공통적으로 거론되는 청소년 왕따 문제다. 어쩌면 이는 전 세계적 문제일 수도 있다. 지금의 50대 이상은 사실 크게 느끼지 못했던(그렇다고 없었던 건 아니지만) 따돌림 문제의 심각성에 대한 조명이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풍경은 그다지 세련되거나 정리된 공간이 아닌 우중충하고 한눈에 봐도 뭔가 불안함이 가득한 공간이다. <소년시절의 너(少年的你, 2019)>라는 제목과 다르게 영화 속 배경은 낡고 지저분하고 황폐화 되어 있는 슬럼가다. 제목만 보면 조금 노스탤지어 적이고 낭만적인 어감 아닌가? 그러한 제목과 영화 속 공간의 불균형은, 나의 시선을 끄는 시작점이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라서인지, 거칠면서도 강렬하고 적나라한 화면은 영화의 몰입도를 높였다. 내용은 우리가 익히 아는 왕따 학원물의 전형같이 보였다. 왕따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바로 자기 주변의 가장 약한 대상에게 화풀이하는 데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청소년기에 겪는 스트레스의 이유는 여러 가지일 것이다. 경쟁에서 오는 스트레스, 차별과 압축된 사회의 모순이 그대로 전달되어 오는 청소년기의 배신감과 분노 등… 더구나 본인의 노력과 무관한 태생적 환경으로 인한 차이는 좌절감을 안겨준다. 한 케이블 TV의 교양프로 ‘금쪽같은 내새끼’를 보면 아이는 태생적인 악함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전부 성장기의 문제였다.
자신이 처한 태생적 환경에서 벗어나려는 아이들도 분명 존재한다. 그렇기에 유일한 탈출구인 ‘좋은 학교’ 진학은 이런 아이들에겐 간절한 소망이 되었다. 배움이 단지 학문과 소양이라는 개념을 넘어서 사회 경제적 성장 도구로 활용된 지 오래다. 우리나라를 포함한 많은 나라에서 일종의 경제적 성공을 위한 라이선스인 것처럼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치열하게 학업에 뛰어들고, 그렇게 아이들을 훈련시키고 있다. 충분히 긍정적이고, 나쁜 방법은 아니다. 다만 물질 중심, 금전 중심 사회에서 아이들의 상처는 이미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런 상처는 뼈에 새겨진다.

이런 암시는 영화 속 대사에서도 나온다. 대학을 졸업하면 얼마를 벌 수 있냐는 샤오베이의 질문은, 대학을 다니지 못하는 뒷골목 인생의 좌절을 어린 청소년의 발언을 통해 확인하게 한다.
이런 일은 비단 중국에서만 벌어지는 상황이 아닌 듯하다. 대부분의 산업국가에서 벌어지는 현상으로, 학력과 얼추 비례해 경제적 보상이 피드백 되는 현실에서, 기성 사회의 성인들은 자신들의 자녀들에게 그 라이선스를 취득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역시도 마찬가지로 보통의 사람들과 같은 궤도에 올라타 있다. 매년 우리나라 국무위원급 청문회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바로 자녀들의 학교 문제다. 특목고니 자사고니, 이중국적이니 하는 대부분의 사안들은 우리 사회의 경제적 사회 컨베이어 벨트에서 자녀들을 조금 더 유리한 위치에서 시작하게 하려는 데서 출발한다. 때문에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로 인해 비롯된 비인간적이고 비윤리적 상황을 비판하는 각종 영화나 소설, 드라마나 다큐멘터리들이 수십 년째 등장하고 있다. 이는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상의 뻔한 고전적 레퍼토리일 수도 있다. 다만 이런 현상은 눈으로 확인되는 실체라기보다는 머릿속의 상황이다.

영화 <소년시절의 너> 스틸컷 © 영화특별시SMC

그래서 <소년시절의 너>에서 나오는 대비되는 도시 풍경은 자연스럽게 영화의 이야기 속에 스며든다. 화려하고 깔끔한 고층건물이 즐비한 신흥 성장 국가 중국의 대도시 풍경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도시를 가로지르면서 흘러가는 고가도로 아래의 판잣집 풍경은 중국의 고성장과 그늘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런 풍경은 대부분 산업국가의 초기 상황에서 등장하는 풍경이기도 하다. 가깝게는 우리나라 1960~1970년대 청계천 일대의 풍경이 그렇고, 홍콩의 1980년대 구룡반도(주룽반도) 풍경이 그렇다. 좀 더 과거로 시간을 돌리면 20세기 초반 뉴욕 맨해튼의 풍경도 마찬가지다. 1959년도 영화 <그림자(Shadow)>는 도시에서의 삶의 치열함을 보여주고 있다. 매력적인 도시의 예술성과 동시에 처절함도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삶이란 것이 항상 처절한 건 아니다. 오히려 이런 처절함을 코믹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인간의 또 다른 욕망과 섞어서…… 허영과 착각도 가끔 필요한 만큼 <티파니에서 아침 (Breakfast at Tiffany’s, 1961)>은 편안하게 볼 수 있는 영화다. 하지만 이 코미디 영화 속 삶 역시 녹록지 않다. 부유한 여성 사업가에 의지하는 한량인 남자와 부유한 남자 사업가에게 한몫 챙기려는 하류 인생인 것이다. 도시에서의 삶은 한적한 시골에서의 삶보다 훨씬 치열하고 처절하다. 성공한 이들의 삶을 바로 옆에서 보기 때문에 성공에 대한 욕망도 그만큼 강하다. 사회에서 성공 욕망은 더 어린 아이들의 세계에서도 나타난다.

<소년시절의 너>는 학교에서부터 처절한 모습을 보여준다. 교도소라 말해도 무방할 철망 처진 복도는 낭만과 거리가 먼 사육장 같다. 아마도 자살을 막기 위한 궁여지책일지도 모른다.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책상을 가득 메운 교과서와 책상들의 규칙성은 도시의 축소판이자, 정글 같은 경쟁의 현실을 그대로 시각화한 것이다.

순수하고 아름다워야 할 청소년 시기의 학교 역시 사회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영화에서도 나오듯이, 예쁘고 부유하지만 삐뚤어진 웨이라이는 가난하면서 공부를 지독히 하는 주인공 첸니엔이 못마땅하다. 그래서 모욕을 주고, 망신을 주고, 공개적으로 위협한다. 청소년 시절의 치기 어린 행동이라 하기엔 너무나 잔인하고 치명적이다. 웨이라이의 부유한 부모가 당당하게 학교와 사회에 발언할 때, 보호받아야 할 첸니엔은 이미 학교에서 차별과 차이, 그리고 부조리를 느낀다. 어찌 보면 불공평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해야 삶이 편할지도 모른다. 다만 이런 장면과 이야기를 보는 관객은 순간순간 치밀어 오르는 화를 다스려야 한다.

아무도 없는 문 닫힌 상가들이 즐비한 골목길과 화려한 도시 풍경 뒷골목의 계단 등, 영화 속 미장센들은 이야기와 맞물려 불안감과 어두움을 가속화하고 있다. 이렇게 영화에서 다뤄지는 청소년 시기의 학교에서는, 정글 같은 생존경쟁과 미성숙함의 잔인함이 어우러져 경쟁의 스트레스를 서로에게 풀어낸다.

나는 가끔 엉뚱하게도 이런 처절함을 여행길에 만나는 도시 풍경에서 느끼기도 한다. 도시 풍경으로 드러나는 다양한 경관은 마치 그 사회의 상황을 그대로 재현한 것 같은 느낌이다. 동남아 어떤 도시에서 한참 보행로를 걷다가, 갑자기 보행로가 사라지고 엉겁결에 호텔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런 엉뚱한 공간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지만, 호텔 사업가의 힘으로 보행로를 없애고 행인들을 그곳으로 스며들게 만들었음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낮은 주택들이 즐비한 경관을 자랑하는 곳에 불쑥 솟아 오른 고층건물은 정책의 일관성을 해치는 결과물이다. 이런 도시 경관은 누군가 게임의 룰을 어기고 지위와 권력을 이용해 만들어내는 부조리한 풍경일 것이다. 그것은 이 영화의 흐름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매력적인 도시 경관을 다시 관찰해보면 그 사회의 합의와 논리에 순응한 결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균형은 어느 한쪽의 강력한 자본이나 권력으로도 깰 수 없었기에 유지된 것이다. 흔히들 유럽 도시 경관을 이야기하는데, 그들의 역사를 보면 모순과 혼란, 갈등 속에서 조금씩 균형을 잡아가면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인정하는 프랑스의 도시 파리를 보자. 파리의 도시 풍경은 완벽한 이야기 속에 탄생하지 않았다. 정리되지 않고 온갖 모순이 가득 차 있던 상황에서, 그런 파리를 치유적 개념으로 개선한 것이 아니라 엘리트 의식과 권위로 밀어붙여 정리했다. 당시 수많은 상처와 피를 부르며 진행됐다. 그러나 이후에 파리의 도시 경관이 유지되고 지속된 과정을 보면, 반칙을 억누르고 공공적 가치에 대한 합의와 타협을 거친 산물임을 알 수 있다. 피를 부르는 한 번의 독선적 과정이 있었지만, 그 바탕 위에 다듬어진 것은 수많은 모델로 자리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만들어지기 전 당시 파리 정치가들의 결정이 온당하다고는 할 수 없다.

흥미로운 것은 런던의 경우다. 오스만의 강력한 파리 시가지 정리를 부러워한 영국에서 런던도 이렇게 정리를 하려고 했지만, 이미 다수의 자본가와 시민들이 소유한 런던을 정비하기엔 설득도 힘들고, 파리의 오스만 시장처럼 힘으로 밀어붙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런던은 파리의 무모하고 일방적인 정책보다 타협을 선택했다.

분명 런던이 파리보다 혼란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파리의 성과를 연구하고 적용해서 조금씩 개선된 모습을 구성했다. 전체적인 아름다움은 완성하지 못했지만, 부분적인 개선을 시도한 것이다. 여전히 개선하고 고쳐나가야 할 모습이지만, 그렇다고 형편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느 도시가 모델로 더 적합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왕이면 런던의 타협과 이해를 바탕으로 파리처럼 되면 좋았을 것이다. 물론 그렇더라도 갈등은 존재한다.

영화 <유브 갓 메일> 스틸컷 © 워너 브라더스

런던이 배경은 아니지만, 영화 <유브 갓 메일(You’ve got Mail)> 은 이런 논쟁과 갈등의 도시에 대한 이슈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로맨스 영화다. 혼란스러운 도시 풍경도 다 같은 배경과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이다. 중국의 도시는 강력한 개발 권력의 주도로 진행되며, 이 과정에서 개발이익에 순응하는 이들의 묵인이 동반된다. 마치 과거의 파리 도시개조 시절 같다. 국가 중심적 일당 지배 체제의 중국에서 소수의 개인들이 개입하거나 발언할 여지가 사실 없는 상황이다.

그렇게 적당히 개발의 에스컬레이션을 타서 선점한 경제적 지위를 확보한 영화 속 악역인 웨이라이의 우월감이 왠지 중국의 도시 풍경에 녹아 있을 것 같은 생각도 든다. 합리적 의문이라고나 할까? 분명히 주인공 첸니엔이나 아예 희망을 포기한 샤오베이의 존재처럼 성장궤도에 올라타지 못한 실패한 삶들은 어느 도시, 어느 공간, 어느 시간에나 존재했다. 물론 그들의 실패가 온전히 사회 때문은 아닐 것이다. 개인의 역량과 노력이 더 중요한 것은 말할 필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은 이런 실패한 이들에 대한 관심과 도움이 필요하다.

서구에도 이런 아픈 시절과 그림자는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역시 황금기라고 하지만, 전쟁의 상처와 트라우마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다. 실패의 굴레에서 도시의 그림자를 밟으면서 사는 삶인 셈이다. 결코 해피엔딩이라 볼 수 없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두 주인공이나, <그림자>의 등장인물처럼 도시의 엑스트라 1·2 같은 인생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그렇게 상처가 있거나 약한 사람들이 도시에서 생존하기란 쉽지 않다. 야생에 상처를 가진 채 노출된 것과 같다. 이런 적나라함은 1956년 다큐멘터리 <술집에서(On the Bowery)>에서 특별한 스토리 없이 관찰로 보여주고 있다. 성인판 <소년시절의 너>와 같은 영화 <부룩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Last Exit To Brooklyn, 1989)>에서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야기에서 동정심이 일기도 한다.

서로 가장 가깝게 있는 도시라는 공간에서 밝고 화려함만 보이는 듯하지만, 그 안에 뒤처진 루저 같은 인생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 또한 나름의 방법과 노력으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사는 경우가 더 많다. 그렇기에 사회에 대한 좌절감과 공포감, 무력감보다는 희망과 긍정을 제시하고 만들어주는 세상이 필요하다.

문득 이를 위해 우리 도시에서 건축이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 생각하게 된다. 사실 건축은 그 역할을 할 수 있다. 우리 안에도 이미 이런 생각을 하는 이들이 존재하고, 노력하는 이들도 많다. 다만 욕망이, 야망이 이를 덮고 보지 않으려 하기에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재건축과 재개발의 욕망이 정치적, 개인적 주기로 화두가 되는 우리 사회에서 한 번쯤 고민해 볼 주제다. 특히 건축사들은 비판보다 대안을 제시하는 전문가의 역할을 고민해야 한다.

글을 마무리하려다가 문득 2020년 건축영화제에 다뤄진 다큐가 떠올랐다. 다큐에서 다뤄진 홈리스를 위한 주택, 그리고 그 주택을 주도하는 미국의 자선 단체 Skid Row housing trust가 발주한 건축들이다. 놀랍게도 홈리스 주택들인데, 미국 AIA 건축상을 수상한 최고의 작품들이 즐비하다. 참여 건축사의 고민이 그대로 보인다.
그냥 의무적으로, 생색내기로 짓는 것이 아니다. 자~알 건축하는 것을 홈리스 공동주택으로 만든다.

 

글. 홍성용 Hong, Sungyong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은 건축사(KIRA), 건축공학 박사, 서울시 공공건축가로 건축의 크로스오버를 오래 전부터 주장했다. 국내 최초의 영화와 건축을 해석하는 <영화속 건축이야기, 1999> 을 시작으로 여행기, 마케팅을 연구했다. 건축사로 최초의 경영서적인 <스페이스 마케팅 2007>을 삼성경제연구소를 통해 출간하였고, 도시경쟁력 연구인 <스페이스 마케팅 시티, 2009>, 그리고 2016년 <하트마크>를 출판했다. 신사동 임하룡씨 주택, 근생 멜론 등 다수의 건축작품과 인테리어 작품들이 있다.
ncslab@ncsarchitec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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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리에, 사교적 소비 공간인 카페에서 사랑에 빠지다

Amelie falls in love at a cafe, a social consumption space

<아멜리에> 포스터 © 콜럼비아트라이스타·프리비젼 엔터테인먼트

사교적 소비 공간은 사람들을 만나고 교류하는 것을 목적으로 비용을 지불하는 곳이다. 오래전 발간된 논문에서는 사교적 소비 공간에 대해 이렇게 정의를 내렸다. 대표적으로 카페와 레스토랑이 있으며, 다방도 여기에 해당된다.

그냥 일개 상업 공간일 뿐인 카페를 주목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 때문이다. 물건을 사고파는 상점 등의 상업 공간에 갈 때는 명확한 구매 의사와 목적을 가지고 방문한다. 이 과정에서 구매하고자 하는 물건을 보고 판단해서 구매하는 행위가 끝나면 사람들은 그 공간에 더 머물지 않고 떠난다. 상점에 있는 점원과 이용자는 어떤 감정적 교류와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 그것은 옷을 파는 곳이든, 참기름을 파는 곳이든, 생선을 파는 곳이든 마찬가지다.

리처드 로저스는 그의 책 『Cities for a small planet』에서 도시를 활성화시키는 여러 가지 특징들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얀 겔 등의 다양한 이론을 언급하면서, 가로를 활성화시키고 도시의 역동성을 만들어내는 카페의 시발(始發) 기능에 주목하고 있다. 대부분의 상업 공간은 구매 목적을 이루고 나면 더 이용하지 않지만, 사교적 목적으로 만나는 공간인 카페는 그 공간에 머무는 것이 목적이다. 이런 이유로 카페는 특정 범위의 공간에서 사람들을 모으는 독특한 집객성을 가지고 있다. 특히, 소득이 올라가고 도시에서 거주하는 이들의 잉여시간이 늘어나면서 카페 이용률은 더더욱 늘어나고 있다. 그런 이용은 공간에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한다. 리처드 로저스는 이를 관찰해서 도시 공간의 카페를 하나의 건축적 요소로 분명히 하고 있다.

최근 우리나라 관광지를 보면, 의외로 카페와 같은 소비공간이 부각되면서 화제에 오르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확장되면 카페는 체험형 공간으로 커지고, 다시 상업공간인 쇼핑몰의 캐릭터가 되기도 한다. 이런 특징을 천천히 살펴보면, 비상업적인 사회적 행동 패턴이 오히려 상업적으로 활용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절대적 수요가 공급을 초과했던 시절을 떠올리면 이해할 수 없는 행위들이 21세기에 벌어지는 것이다. 왜냐면 이제는 모든 상품들이 공급의 경쟁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받을 수 있는 서비스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것은 공간도 마찬가지고, 도시도 마찬가지다.

상품 서비스를 제공하는 입장에서는 사람들이 길을 걸어가는 행위조차도 눈여겨봐야 하고, 이를 그들의 상업적 목적과 연결해야만 한다. 사람들이 멈춰 서서 이야기하고, 안부를 묻고 커피 한 잔을 마시는 행위에 주목하는 이유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지극히 비 상업적 행동이 상업을 목적으로 하는 사업가들에게 주목받는다는 것이? 이렇게 말하고 나니, 스타벅스 전 CEO 하워드 슐츠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하워드 슐츠의 스타벅스 이야기를 보면, 그는 이탈리아 거리에서 단골손님들과 대화를 하며 그들에게 맞춤형 커피를 만들어 주는 바리스타에 주목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갈증 때문에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카페에서 친구를 만나 대화하기 위한 도구로 커피를 애용하는 것이었다. 이웃과 소통하고, 친구를 만나고, 함께 시간을 즐기며 수다를 떠는 사회적 관계 말이다.

커피를 만드는 바리스타라는 호칭에 필이 꽂힌 하워드 슐츠는 커피 친구를 만드는 이탈리아 카페 문화를 도입하기 위한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스타벅스다.

오는 손님, 가는 손님 모두와 친구처럼 웃고 떠들며 그들의 취향대로 커피를 조제하는 정성과, 일상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밀한 관계. 그런 관계를 주도하는 바리스타를 카페 사업의 핵심으로 본 것이다. 물론 사업이 확장되고 속도와 수익이 중요해진 지금은 스타벅스 바리스타가 방문하는 손님과 사적 잡담을 나눌 시간은 없다.

관련해서 이번에 언급하고 싶은 영화는 유쾌한 영상미를 자랑하는 프랑스 영화 <아멜리에(Amelie Of Montmartre, 2001)>다. 성인 동화처럼 만들어진 이 영화는 그래픽적인 컬러와 아름다운 영상미를 보여준다. 심장이 약하다는 오해로 아멜리에의 생활은 어릴 때부터 제한된다. 그 반동으로 세상에 대한 그녀의 호기심과 궁금증은 오히려 커져만 간다. 집에서 멀리 떠나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신경이 과민한 어머니에게 홈스쿨링으로 교육을 받는 생활은 타인과 사회에 대한 그녀의 궁금증만 더더욱 커지게 만들었다.

어머니가 사망하고, 어쩔 수 없이 독립된 생활을 하면서 그녀는 여러 가지 생각의 변화를 겪는다. 그러다 화려한 스캔들의 주인공 영국 다이애나 비의 사망사고를 계기로 그녀는 누군가를 돕기로 결심한다. 이런 각오는 아멜리에의 태도와 생활을 변화시켰다. 주변의 곤란함을 보고, 도와주기도 하면서 그녀는 점차 주변 사람들의 해결사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엉뚱 발랄한 아가씨 아멜리에는 그녀가 근무하는 카페에서 아티스트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이 영화에서 카페는 두 사람의 관계를 이어주는 매력적인 장소다. 목적 없이 갈 수 있는, 그리고 짝사랑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아멜리에>의 주인공인 그녀는 일하는 카페에서 아티스트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 콜럼비아트라이스타·프리비젼 엔터테인먼트

<아이 엠 샘>의 주인공 샘이 스타벅스에서 일하는 모습은 일종의 기업이미지 전략으로도 볼 수 있다. ©브에나비스타코리아

우리 주변의 어떤 장소가 이런 기능과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우연히 공원에서 낯선 사람을 만난다? 1960년대 낭만이라면 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이라면 오히려 공포의 순간이다. 낯선 사람이 내게 말을 건다? 둘 중 하나다. 도를 믿으십니까 아니면 돈 달라는 이야기다. 결코 낭만적인 이야기가 그려지지 않는다.

이야기 속에는 어느 정도 제한된 사람들을 만나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이야기꾼들은 이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카페는 영화나 이야기를 다루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공간이다. 카페의 모습은 매우 다양하다. 왜냐면 일종의 기호성 공간이기 때문이다. 골라 먹는 재미처럼, 골라서 가는 공간이 카페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카페 문을 열고 분위기를 0.5초 안에 스캔한다. 만약 원하는 분위기가 아니라면 카페를 나간다.

그렇게 선택된 기호 공간인 카페는 이야기를 풍성하게 만드는 매개 공간의 기능을 한다. 특히 길거리에 있는 카페는 개성이 더 강하다. 수많은 영화와 소설에서 거리의 카페는 관계를 형성하는 매력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과거 영화에서 거리의 카페는 낭만적 묘사로 사랑하는 사람을 훔쳐보거나, 거리를 구경하는 해프닝의 공간이었다. 덕분에 많은 사람들에게 거리의 카페는 낭만 그 자체이다.

동아시아에 있는 우리에겐 이런 카페의 풍경은 판타지 같은 이미지였다. 특히 뉴요커 영화감독인 우디 알렌(Woody allen)은 상당수 영화에서 이러한 거리의 카페 풍경을 아침 공기처럼 묘사하곤 했다. 영화 <맨해튼(Manhattan, 1979)>에 등장한 엠파이어 디너는 덕분에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스트리트 카페는 아니지만, 또 다른 우디 엘렌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Midnight in Paris, 2011)>에서도 전형적인 프랑스 스타일의 카페가 등장한다. 짙은 초콜릿색의 실내 카페는 낭만적인 프랑스 장식을 드러내면서 환상의 이미지로 주인공을 초대한다. 덕분에 영화를 보는 우리 역시 유쾌한 과거 시대로 빠져들어간다. 이 작은 공간에서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것은 카페라는 공간이 갖는 기본적인 사교적 속성 때문이다. 물론 그런 만남의 목적에는 사랑도 빠질 수 없다. 더구나 영화의 주된 소재가 사랑이 아니던가?

미국 영화 <유브 갓 메일(1998)>에서 캐슬린 켈리 역의 맥 라이언이 사람들을 만나는 장소는 카페다. 이른바 별다방 카페의 세계적 이야기가 시작되던 시점으로, 사람들은 태평양 건너 우리나라에서는 영화가 성공하지 못할 거라 장담하곤 했다. 왜냐면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카페가 살롱식 분위기를 연출하는 고급스러운 라운지 개념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다만 커피는 설탕과 우유, 그리고 인스턴트커피를 고정 비율로 섞은 것을 팔았을 뿐이다.

<유브 갓 메일>에 등장한 스타벅스는 이른 아침에 손님들이 줄을 서서 포장커피 (To-Go-Coffee)를 주문해 받아 들고나가는 풍경을 이색적으로 보여주었다. 덕분에 2000년대 들어 본격적으로 확산된 우리나라 스타벅스에서, 맥 라이언으로 빙의한 수많은 손님들은 스타벅스에서 주문하는 성취감을 맛볼 수 있었다. 카페의 판타지에 이제 기업 전략이 함께 붙은 셈이다.

스타벅스의 이런 이미지 전략은 상당히 많은 영화에서 활용되었다. 숀 펜(극 중 샘)이 지적 장애를 겪으면서도 아이를 키우는 따뜻한 내용의 영화 <아이 엠 샘(I am Sam, 2001)>에서 스타벅스는 한술 더 떠 장애인을 고용하는 착한 기업 이미지까지 만들어 냈다. 지적 장애를 가진 샘은 스타벅스 모자를 쓰고, 앞치마를 입고, 하루 종일 스타벅스에서 일한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스틸컷 © (주)피터팬픽쳐스

아무튼, 많은 영화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카페에는 커피를 마시고 사람을 만나는 목적을 강화하기 위한 더 많은 전략들이 동원되기 시작했다. 이런 카페들은 카페 자체에 방문하고 싶은 목적성을 강화하기 위한 공간의 테마들을 하나씩 추가하기 시작했다. 영화는 이런 전략의 매우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 영상미가 디자인 작품 수준이었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The Grand Budapest Hotel, 2014)>은 그렇게 도구화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보다 영화 속에 등장한 수많은 이미지들을 더 많이 이야기할 정도다.

파스텔컬러의 매력적인 화면 연출은 마치 일러스트를 보는 듯한 시각적 풍성함을 연출해 관객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영화를 보게 된다. 이런 시각적 전략을 민간 기업에서 그대로 차용해 성공한 사례는 정말 많다. 특히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서 만들어진 이미지는 상업 카페에서 그대로 차용해서 그들의 매장 영업 전략으로 삼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 지금 당장 경리단 길이나 시내의 카페들을 찾아가면 이런 이미지 차용이 정말 많음을 알게 된다. 사람들은 그런 공간에서 느끼는 체험에서 영화를 연상하고, 공간에 머물게 되기 때문이다. 덕분에 많은 상업 공간의 기획과 디자인 과정에서 영화를 참조하는 경우가 많고, 영화를 상업 공간의 테마로 삼아 연출하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공공에서도 카페를 공간의 주요 시설로 구성하기 시작했다. 박물관이나 미술관, 심지어 도서관조차도 방문객의 편익을 도모하는 단순한 목적의 카페 구성에서 점차 핵심 집객 공간으로 카페를 다루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개별 시설 내 카페뿐만 아니라 도시 정책, 도시 전략으로 카페를 바라보는 시선도 있다. 대표적인 곳이 바로 호주 멜버른 시내의 가로 카페(Street Cafe) 정책이다. 멜버른은 2000년부터 적극적인 도심 재생 정책 중 하나로 가로 카페를 구상하는 아이디어를 만들었다. 도심 가로의 번화한 정도를 계량화해서 개별 블록마다 금액을 책정하고 민간에 임대를 준 것이다. 그리고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세부적인 구성 지침을 마련해서 가로 카페를 적극적으로 구성했다.

그렇게 20년이 흐른 지금, 멜버른의 가로 카페는 단순히 음료를 파는 공간이 아니라 오래된 도심을 재생하는 청년 공간 창조의 기폭제가 되었다. 단순한 도심재생이 아니라, 도시 활성화까지 이끌어낸 미끼 상품과 같은 공간으로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 덕분에 단 몇 개의 가로 카페만이 있던 20년 전에 비해서 100배가 넘는 200여 개의 도심 가로 카페가 활성화 중이다.
우리도 가끔은 주변에 있는 가로 카페에 들러 낭만에 빠져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글. 홍성용 Hong, Sungyong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은 건축사(KIRA), 건축공학 박사, 서울시 공공건축가로 건축의 크로스오버를 오래 전부터 주장했다. 국내 최초의 영화와 건축을 해석하는 <영화속 건축이야기, 1999> 을 시작으로 여행기, 마케팅을 연구했다. 건축사로 최초의 경영서적인 <스페이스 마케팅 2007>을 삼성경제연구소를 통해 출간하였고, 도시경쟁력 연구인 <스페이스 마케팅 시티, 2009>, 그리고 2016년 <하트마크>를 출판했다. 신사동 임하룡씨 주택, 근생 멜론 등 다수의 건축작품과 인테리어 작품들이 있다.
ncslab@ncsarchitec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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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 달린 집, Nomad Vs Diaspora

House on Wheels, Nomad Vs Diaspora

기독교 영화라고 할 수 있는 <십계(1962)>를 보면 수많은 유대인이 고대 이집트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나온다. 이들은 고향을 뒤로 하고 이집트의 노예로 끌려와 수많은 인구를 형성하면서 각종 노역에 동원된다.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말은 그리스어에서 유래가 된 단어로, 원래는 ‘흩뿌리거나 퍼트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말은 고대 이스라엘민족이 바빌로니아나 로마제국에 의해 해외로 흩어진 현상을 언급하면서 사용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어느 문화, 어느 나라의 역사 속에서도 존재했던 현상이다. 강한 정복욕과 지배력을 가진 민족이 존재했고, 그런 왕조들이 있었다. 이들은 가장 효율적이고 빠르게 점령지를 운영하기 위한 전략을 폈다. 새로 만들기보다는 점령지를 활용하는 전략으로, 정복한 지역의 노동력이나 자원들을 활용하는 것이다. 로마는 한 술 더 떠서 전쟁에 동원될 군인도 이런 식으로 흡수했다. 점령지 사람이라도, 로마 군인으로 복무하면 그 다음 세대나 가족에게도 로마인의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로마의 이런 확장과 흡수 전략은 역사 속의 여러 나라에서 펼쳤던 정책이기도 하다. 이들 나라 대부분은 사회 시스템의 기반을 작동하는 노동력을 필요로 했지만, 경우에 따라서 지적자산이나 시스템을 가져가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지식계급의 활용도 있었다.

징기스칸의 원나라 같은 경우도 이러한 대표적 국가였다. 끝없는 침략과 정복을 통해 인구를 늘리고, 영토를 늘렸다. 거대한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 다양한 인적 자원을 재분배 했고, 활용했다. 당장 고려시대에 우리나라를 침공한 몽고는 수많은 사람들을 데려가 노동착취에 활용했고, 일부 지배계층은 그들의 부족한 관료조직에 흡수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점령지 사람들의 유랑 같은 이주 생활이 만들어졌다. 특히 이스라엘 사람들, 유대인들은 서구 역사 내내 떠돌아다니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디아스포라라는 말이 성경 신명기에 나온다는 것을 보면 그들의 역사가 어떨지 알 수 있다.

유대인에게만 나타난 현상은 아니다. 이런 디아스포라 현상은 거의 전 문화권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다. 이주해온 자들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은 다수의 주류 문화권에 형성된 이질적인 소수 문화적 공동체 집단의 모습으로 가시화된다. 서구 역사 내내 따로국밥처럼 존재한 유대인들의 게토(ghetto)가 대표적이다. 다만 조금 혼돈스러운 것은 디아스포라와 피난 난민·해외이주민들에 대한 정의인데, 학술 자료나 연구들을 보면 서로 구분하고 있다.

학자들에 따라 디아스포라의 정의를 위한 조건을 언급하는데, 대략 내용을 보면 △원래의 본원지에서 두 개 이상의 지역이나 해외로 흩어짐 △집합적인 기억과 신화의 보유 △현 거주지와 다른 정서와 문화적 이질감 또는 소외감 △돌아가야 할 고향에 대한 희망 △본원지 유지와 복구에 대한 기대 △본원지와의 유대관계를 통한 공동체 의식과 단결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점 등이다. 이런 내용을 보면 피난 난민이나 해외 문화에 흡수되는 해외 이주민은 별개로 보여진다.

영화 <차이나타운> 포스터 © CGV아트하우스

<차이나타운> 스틸컷 © CGV아트하우스

흡수되지 않은 디아스포라 문화들은 도시나 장소에서 시각적으로 확연히 분리되기도 한다. 냄새나 소리뿐만 아니라 언어와 생활 양식, 무엇보다 공간적인 구분이 명확하다. 거리의 색이나 건축 양식이 특히 그렇다. 대표적으로 전 세계 어느 곳에나 있는 차이나타운을 떠올리면 된다. 그리고 이런 공간들은 다양한 영화에서 등장한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부정적 의미의 <차이나타운(2015)>은 이국적이고 흥분되는 공간이 아닌 공포스러운 갱스터의 공간으로 묘사되고 있다.

영화 속 배경의 도시 공간은 매우 일상적인 우리네 도시 풍경이다. 전형적 성장 도시에서 일군 소자본가들의 경제적 건축물들이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다. 때로는 벽돌로 때로는 타일로 마감된 말 그대로 서민 동네를 형상화 하고 있는 건물들이다. 특정 시기에 구할 수 있는 외장재로 가장 경제적인 비용으로 지어진 통상의 건물들은 그 자체로는 문화를 드러내지 않는다. 철저한 경제적 논리로 지어진 일상적 건물군이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도시들은 이렇게 캐릭터가 존재하지 않는, 경제성으로 지어진 수익건축이 태반이다. 이런 무성격의 도시 풍경은 사실 어떤 디테일을 부여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백지와도 같다.

영화의 전체적인 어두운 이야기 구조와 맞물려, 중국의 이미지를 형성하고 있는 가로는 우리에게 부정적 시각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들 또한 잠시 머물 공간이기 때문에 동화될 의지가 전혀 없다. 잠시간 머물려 하는 무의식은 정착을 위한 동화를 막는 역할을 한다. 바로 그것이 수십 년, 수백 년이 지날 지라도 결코 동화되지 않는 고유의 정서적·문화적 고립을 이끄는 원동력이다. 누군가는 그것이 불편할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다양성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차이나타운이 시각적으로 분리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이런 시각적 분리는 때때로 집단 거주지에서 벗어나 지역 문화에 동화된 사람들에게는 마음의 고향 역할을 하기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중국이 다른 나라들의 식민지로 점령되어 강제로 끌려갔다기보다도 어찌 보면 근현대의 개념인 이민자처럼 떠나 다른 나라에 그들의 생활권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역 문화에 쉽게 동화되지 않고 그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이식하고 있다. 그들의 정착지는 새로운 생태적 고향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굳이 중국이 아니어도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이 고향의 역할을 한다. 일본 요코하마의 경우도, 미국 맨해튼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조이 럭 클럽(1993)>은 몇 대에 걸쳐 미국인으로 동화된 중국계 미국인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전히 중국어를 사용하고, 읽을 수 있지만 그들은 미국 문화에 정서적으로 동화되어 있기 때문에 본토의 중국인과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 한편에서는 또 다른 중국으로 여겨지는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을 찾는다. 조이 럭 클럽의 미국태생 중국인들에게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은 고향이다. 그들에겐 이 공간이 어찌 보면 디아스포라의 분점이라고나 할까?

거리의 상점 쇼윈도에 어떤 물건들이 진열되고, 어떤 색과 빛으로 연출되느냐에 따라 거리의 문화적 풍경은 확 달라진다. 가로의 정체성은 의외의 덧씌워짐으로 이질적 풍경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시각화된 간판들과 문자들이다. 하얀색 바탕의 붉은 한자어나 유행이 한물간 네온사인들로 채워진 거리는 분명 우리 도시의 한 장소일 뿐인데, 매우 낯설다. 소품처럼 구성된 상점들의 진열과 상품들, 그리고 디테일로 구분되지 않는 냄새와 연기 등이 하나로 어우러지며 이질적인 중국의 이미지를 형성한다.

이런 현상은 다양한 문화권에서 나타나며, 적어도 영화에서는 강력한 문화적 정체성을 확보하고 있는 민족들을 소재로 삼고 있다. 예를 들면 이탈리아나 그리스 등 서구문화의 뿌리에 해당하는 경우다. 이탈리아 특유의 악센트와 음식 문화는 같은 유럽 출신과 명확히 분리된 공간적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맨해튼 인근의 이탈리아 거주지 같은 경우가 그렇다. 이탈리아 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그들 고유의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자신들의 문화를 공유하고 있다. 시리즈로 나온 <대부(1972)>의 이탈리아인들은 그들의 출신을 그대로 시각화한 공간에서 거주하면서 생활하고 있다. 이탈리아식 인테리어를 하고, 이탈리아식 장식을 한 주택에서 거주한다. 이탈리아 음식으로 비즈니스를 하고, 이탈리아 출신들과 함께 살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시리즈에서는 떠나온 이탈리아의 남부, 시칠리아를 찾아간다.

이런 종류의 영화를 보면, 도시와 건축에서 문화적 정서와 공감을 형성하는 중요한 장치들은 결국 시각화된 것임을 발견하게 된다. 거리를 공간으로 만드는 여러 요소 중 간판이나 벽면의 사인 등으로 시각화되는 문자는 공간을 특정하는 역할도 하고 있다. 문자는 문화의 다름을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읽게 만드는 요소다. 그리고 가로의 건축 입면을 구성하는 장식적 요소들도 중요한 장치로 작용하고 있다. 창문의 디테일, 구성, 출입문의 구성과 재료, 입면의 장식적 요소들은 특정 문화권을 시각화한다.

이런 장치들은 LA의 코리아타운 역시 마찬가지다. 차이나타운만큼 시각적 지역성을 드러내진 않지만, 거리의 입면 요소로 작동하는 한글 표기야말로 사람들에게 공간과 장소적 경계를 손쉽게 느끼게 해준다. <깊고 푸른 밤(1985)>의 두 주인공이 떠도는 공간이 실제 미국 한복판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은 돌아갈 한국에 대한 그리움의 공간으로 설정되는 것이다.

영화 <미나리> 포스터 © 판씨네마(주)

<미나리> 스틸컷 © 판씨네마(주)

그렇다면 다시 돌아가지 않을 이국에서의 정착은 어떻게 봐야 할까? 이민이라고 하는 행위는 돌아가지 않을 타향살이를 선택하는 개념이다. 적어도 <미나리(2020)>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 한국인 가족은 디아스포라적으로 보기보다는 유목적 삶, 유목적 정착으로 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 왜냐면, 이들은 기본적으로 문화적 정체성을 보유는 하지만 정치적인 이유나 경제적인 이유로 한국을 떠나진 않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이 있다. 바로 영화에서 나온 ‘바퀴 달린 집’이라는 표현이다.

영화 속에서 이민 계기가 드러나진 않았지만, 우리나라의 많은 이민자들의 시작이 그렇듯 휴전으로 잠시 전쟁을 멈춘 국가에서 삶의 불안정함을 느끼고 시도된 이민행렬들이다. 일종의 선택인 셈인데, 수십 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교포 2~3세로 불리면서 현지화하고 있다. 이들 교포 2세 또는 3세, 더 나아가서 4세 등으로 내려갈수록, 문화적 동질감을 가진 하나의 민족성을 확보하기보다는 점차 미국의 수많은 인종 퍼즐 중 하나로 동화된다. 즉, 다민족 국가인 미국에서 이들은 아시안이라는 타이틀로 우리나라에서 벗어나기를 시작한다. 한국계 미국인이면서 동시에 아시안 아메리칸(Asian American)이 되는 것이다. 그 다음 단계는 당연히 미국인이 될 것이다.

인종적 식별이 확연한 외모로 완전한 미국인으로 인정받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흐르고 상대적으로 인종의 비율이 균등해지면 의미가 없어질 지도 모른다. <미나리>에서는 아직 그런 심리적 갈등이 시작되지 않았지만, 꼬마 데이빗의 발언을 통해 문화적 단절 또는 거리감을 예측할 수 있다. 집은 바닥에 정착되어 있는 것을 기초 상식으로 알고 있는 우리에게 <미나리>의 바퀴 달린 집은 낯설고 어색하다.

이런 형식의 집들이 다른 국가에도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는 몽골 유목민의 이동식 주거공간인 게르의 현대 버전같이 보인다. 거대한 텐트이면서 동시에 유목민의 주거공간인 게르는 어느 장소에서나 쉽게 만들고 해체할 수 있다. 장소의 고유성이나 정착성은 의미가 없고, 언제 어디든지 해체와 조립이 가능해야 한다. 그것은 유목민의 삶이다. 흥미로운 점은 미국에는 버젓이 이런 이동식 주거가 가능한 집들의 군락이 존재한다. 미국의 공인중개사 사이트를 찾아가면 이런 집을 소개하고 중개하는 코너가 상당히 많다. 이른바 조립식 또는 이동식 주택이 공식적인 주거 유형으로 매매되고, 중개도 되고 있다.
이런 주택들은 당연히 일반 주택보다 가격도 저렴하고, 권리가 복잡한 경우도 많다. 다만, 미국에서 이런 이동식 주택에 거주하는 것은 그만큼 생계가 불안정한, 저소득층인 경우가 많다. 물론 그동안 그랬다는 것이고, 지금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어바인이라는 도시의 경우 최근 모바일 주택이 5~6억을 넘는 경우도 많다.

몽골 유목민의 이동식 주거공간인 게르(ger)의 모습

영화처럼 바퀴 달린 집이 멀쩡히 도시를 차지하고 있는 미국의 경우 언제 어디든지 이동할 수 있는 자유로움이 있다. 하지만, 이런 이동식 주택은 캠핑카처럼 제한적인 공간에서 방이나 거실 등이 분할되고 나눠지기 때문에 공간적으로 풍요롭진 않다. 1950~1960년대 새로운 건축에 대한 다양한 발상과 제안이 넘치던 시절 이런 이동식 주택은 공장에서 제조·생산될 수 있는 재화로 제안되기도 했다. 공장 생산을 통해 안정성과 경제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으로 이해되었고, 주거 문제를 비롯한 다양한 해법의 하나로 보았다. 하지만 이런 이동식, 또는 조립식 주택은 생각만큼 만족스러운 품질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개인의 취향에 맞춘 단독주택이 많은 미국 시장에서는 결과적으로 그렇게 선호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미나리>의 바퀴 달린 집은 유목적 삶의 거처로, 때로는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장소를 위한 주택으로 등장한다. 그런 만큼 적응력 또한 중요하다. 영화 제목처럼 어디서든 잘 자라는 미나리 같이 어디서든 정착의 노력과 노고를 마다 않는 사람들이 있고, 이들의 희로애락을 담아내는 바퀴 달린 집은 잠시나마 그들을 위로하는 위안의 공간으로 제공된다. 과연 21세기에 이런 바퀴 달린 집만 그럴까?

프랑스의 경제학자 자크 아탈리가 분석한 것처럼 경제적 이유로 노동 이동의 유목적 삶을 향한 노동자들이 있는 반면, 경제적 자유도와 성취를 위한 유목적 삶을 영위하는 부르주아 기업가 또는 활동가들이 있다. 유목적 삶의 이주 노동자들은 이동식 주택이나 컨테이너 주택, 때로는 비닐하우스에 머물며 디아스포라적 회귀를 꿈꾸기도 한다. 그러나 프랑스나 독일처럼 이주 장소를 그들의 고향 또는 고국으로 삼아 프랑스인인 중동 민족이나 독일인인 터키혈통이 될 가능성도 높다. 반면에 유목적 삶을 영위하는 부루주아 기업가 또는 활동가들에게 바퀴 달린 집은 고급 호텔이다. 또는 언제든 선택할 수 있는 결정 자유도가 있는 공유주택에 거주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와 경제 구조에서는 같은 유목적 삶이 아니고, 같은 디아스포라적 환경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거주 배경으로 건축의 유동성, 공유적 시각의 새로운 대안이 요구되는 시대다.

 

글. 홍성용 Hong, Sungyong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은 건축사(KIRA), 건축공학 박사, 서울시 공공건축가로 건축의 크로스오버를 오래 전부터 주장했다. 국내 최초의 영화와 건축을 해석하는 <영화속 건축이야기, 1999> 을 시작으로 여행기, 마케팅을 연구했다. 건축사로 최초의 경영서적인 <스페이스 마케팅 2007>을 삼성경제연구소를 통해 출간하였고, 도시경쟁력 연구인 <스페이스 마케팅 시티, 2009>, 그리고 2016년 <하트마크>를 출판했다. 신사동 임하룡씨 주택, 근생 멜론 등 다수의 건축작품과 인테리어 작품들이 있다.
ncslab@ncsarchitec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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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대면 사회, 존재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지다

Untact society, raises a fundamental question about existence

시작을 알 수 없는 바이러스 전염병이 세계를 뒤흔든 지 벌써 1년이 넘어가고 있다. 초고속 백신 개발로 1년 만에 세계 각국에서 백신 예방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어서 남아공 변이 바이러스나 영국발 변이 바이러스가 다시 유행 시작이다. 치료제가 개발되었다는 반가운 뉴스도 일부 연령대에서는 무용지물이란다. 혼란과 혼돈의 연속이다.
그야말로 세기말적 아노미(anomie)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제 겨우 21세기 들어선 지 20년 밖에 안 지났는데 이런 혼란이 오다니……. 전염병으로 인한 혼란은 세계 각국의 기존 질서와 문화, 사회 체제에 조금씩 균열을 가하고 있다. 단순한 균열이 아닌 근본적인 변화의 사전 경고음처럼 빽빽거리고 있다.

단순한 전염병의 확산 이상이다. 고령층의 치사율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더 크게 판이 바뀌고 있다. 가속으로 달려가며 스스로 조금씩 대안을 찾아가던 사회를 송두리째 바꾸려는 것이다. 경제적 성장과 이로 인한 반작용, 산업 발달과 이로 인한 부작용에 대해서 조금씩 대안을 만들어 가던 중이었다. 예를 들면 ‘공유’ 같은 개념으로 등장한 대안이었다. 그렇게 상호 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하던 공유경제가 송두리째 흔들리고, 자유로운 이동으로 비롯된, 말 그대로 우주적 유목 시대에 종언을 고하고 있다.

무엇보다 전염병은 사람들의 이동을 제한하고 고립을 유도하고 있다. 물론 완전한 고립은 아니다. 21세기 IT 발달로 어느 정도 고립된 생활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이 와중에 초고속 성장하는 기업도 있고, 주체 못 할 이익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다만 모두에게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이동의 제한은 상당수의 사람들에게 직·간접적인 경제적 실패 또는 손해를 안겨주었다. 대면을 통해 이뤄지던 수많은 사람들 사이의 거래나 관계는 파괴되었다.

사회적 모순은 이러한 상황에서 일어난다. 분명히 물리적으로 단절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발달한 IT로 인해서 더 먼 곳의 사람들과 화상회의를 하거나 화상으로 만남을 갖는다. 전에는 사람들이 광장같이 열린 공간에 모여서 의견을 나눴다면, 이제는 온라인 화면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의견을 나누고 있다. 분명 신체적 이동 거리나 활동 공간이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인지적 이동 거리나 활동 공간은 인터넷을 타고 오히려 더 확산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비대면은 매우 공포스러운 상황이기도 하다. 영화 <더 네트(The Net, 1995)>는 이런 비대면으로 인한 고립을 헐리우드 영화다운 상업적 공포로 꾸몄다. 영화를 보던 당시만 해도, 자발적 고립을 선택한 생활은 정신적으로 광장 공포증이나 대인기피증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해는 하지만 몰입되지 않았다.
샌드라 블록이 분한 주인공 안젤라 베넷은 컴퓨터 시스템 분석가다. 한 소프트웨어 회사에 소속되어 있으나, 오로지 재택근무에 의존하고 있다. 업무적 특성상 굳이 사람들과 대면할 이유도 없는지라, 불안정한 대인관계는 그녀의 이런 고립 생활을 유지하게 했다. 대부분의 생활은 전화와 온라인으로 이뤄지고, 외출 혹은 타인과의 접촉도 거의 하지 않는다. 집 밖을 나가는 것은 알츠하이머병을 앓고 있는 어머니를 방문하는 일이 전부다. 그러던 중, 그녀는 회사 동료로 인해 의도치 않는 의문의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누군가의 의도로 의식불명의 사고에 빠지게 되고, 깨어난 다음은 완전히 다른 환경에 놓이게 된다.

온라인과 전화가 대인 관계의 전부였던 그녀. 실제 그녀와 접촉한 이들도, 그녀를 기억하고 있는 이들도 거의 없다. 더구나 그녀에 대한 모든 기록과 온라인 데이터들은 삭제되었거나 왜곡되었다. 모든 기록이 전산화되고 비대면으로 활동한 덕분에 왜곡된 정보는 그녀의 존재를 완전히 새로운 인물로 재창조해버렸다. 집도, 회사도 그녀의 기억과 달라 머물 곳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완전히 리셋(Reset) 되었다고나 할까? 이제 그녀의 공간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상업 영화인 덕분에 이런 설정은 하나의 배경으로 작용했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가능한 일일 것 같다는 상상을 했었다.

이렇게 상상만 하던 현실이 25년이 지난 지금 피부로 와닿고 있다. 아이들이 학교를 가지 않고, 선생님들과 화면으로 이야기하며 수업을 받고 있다. 비대면으로 어떻게 수업을 할지 궁금했던 체육시간이나 미술시간도 화면으로 상호 반응하도록 하여 수업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코로나로 재택근무가 익숙해지고 있고, 심지어 종교 활동까지 비대면으로 하고 있는 상황이다. 교회 예배가 온라인 영상으로 실시간 중계되면서 온라인 예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벌써 일 년째다. 몇 년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견을 보이지만, 이는 19세기 주요 운송수단이 마차에서 자동차로 바뀌던 시대의 반응과 같다.

어쩌면 교회의 온라인 예배는 종교의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서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람의 의식을 좌우했던 거대한 공간에서 집단 속 일원이 되는 군중심리를, 온라인 예배를 통해 극복하게 된다. 비대면 예배에는 온전히 나에 대한 사색과 기도, 몰입만 있을 뿐이다. 이는 기독교뿐만 아니라 천주교나 불교, 심지어 이슬람교도 동일하다 본다.

영화 <그녀> 스틸컷 © (주)더쿱

그렇다면 온라인(비대면)을 통한 감정이입은 불가능할까? 이 역시 가능하다. 어쩌면 인간이 단계별로 기계와 인간적 친밀감을 높일지도 모른다. 영화 <그녀(her, 2013)>에서는 이러한 감정적 몰입을 보여준다. 더 네트에서의 주인공이 컴퓨터 시스템 엔지니어였다면, 이 영화의 주인공은 대필 편지를 써주는 웹 기반 회사의 편지 대필 작가다. 흥미로운 점은 웹을 기반으로 하는 IT 기술을 통해 편지라는 아날로그 상품을 취급하는 회사라는 상반된 이미지의 기업 설정이다. 아무튼, 내성적인 성격의 주인공 테오도르는 혼자 놀기를 좋아하나 외로움을 많이 느끼는 사람이다. 타인과의 관계는 서툴지만 그 역시 사람들과 사회적 관계, 더 나아가서 감정적 교류를 할 수 있는 관계를 원하고 있다. 비혼? 싱글이 점차 늘어나는 시대를 설명하는, 그에 딱 어울리는 캐릭터지만 그 역시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실제 만남을 힘들어하는지라 AI인 그녀와 교감하면서 점차 연애 감정을 키우게 된다.

이미 우리는 PC 통신을 다룬 <접속(1997)>이라는 영화를 통해 직접 만나지 않아도 감정적 사랑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주인공이 상대방과 문자로 대화를 나누다 점차 감정 이입하게 되어 사랑에 빠지는 것과, 목소리까지 들려주는 AI와 사랑에 빠지는 것이 뭐가 다를까?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도 있지만, 온라인 대화에서 시작해 결혼까지 도달하는 커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모든 생활이 온라인을 통해 가능해진 2021년. 그렇다면 우리들의 공간은 어떻게 변화하고 구성될까? 아주 단순하게 생각해 보면, 비대면 업무의 증가와 이동 제한으로 집에 머물며 일과 생활을 병행하게 된다. 집이 더욱 중요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집에서 영상을 보며 운동하니, 홈 트레이닝이 가능한 운동실이 필요하다. 집에서 일을 하니 사무 공간도 필요하다. 배송으로 모든 물품을 주고받으니 현관의 기능이 복잡해진다. 수시로 손 씻기를 강조하니 위생 공간이 절대적이다. 하나씩 늘어나는 필요성에 따라 구성하다 보면 집이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렇게 큰 집을 어떻게 마련하고, 입주할 수 있을까? 굳이 출근하지 않는데도 비싼 값을 주고 도시 중심에 집을 마련해야 할까? 이러한 고민과 생각들은 수많은 곳에서 발표, 언급되고 있다.

<그녀> 의 주인공 테오도르는 AI인 사만다와 교감하며 연애감정을 키운다. © (주)더쿱

과연 내년, 내후년에는 어떻게 될까? 개발된 백신의 접종이 일상화되면 이전처럼 자유로운 생활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지만 아쉽게도 많은 학자들이 새로운 변이 바이러스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날 것을 예견하고 있고, 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되면 또다시 새로운 변종이 생길 거라고 단언하고 있다. 결국 이전의 생활, 이전의 사회와 전혀 다른 양상에 우리가 적응할 수밖에 없다.

과연 미래의 우리 생활 모습은 어떨까? 아마도 ‘사회적 거리 두기(Social Distancing)’의 일상화보다는 ‘물리적 거리 두기(Physical Dstancing)’가 보편화되는 사회가 될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어서 근본적으로 타인과의 교류를 억제하긴 어렵다. 다만 온라인으로 대체될 뿐이다. 그렇게 본다면 현재 우리나라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말하는 ‘거리 두기’는 스킨십이나 직접 접촉이 아닌 비물리적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물리적으로 만나지 않을 뿐이지 온라인상으로는 얼마든지 만날 수 있는 사회다. 이미 수많은 회의와 모임을 다자간 화상 모임으로 일상화 하고 있다. Zoom, Google Duo 등 화상 모임이 가능한 다양한 앱들은 점점 더 섬세하게 발달하고 있다. 공간을 다루는 건축사의 입장에서 봤을 땐 배경 화면을 바꾸는 기능이 가장 흥미롭다. 낮밤은 물론, 도시를 바꾸고 공간을 바꾸는 효과를 연출한다. 실제 화상 회의로 업무를 보는 직장인들의 경우 배경 화면을 의도적으로 연출해서 본인의 실제 공간을 숨기기도 한다. 배경을 동남아의 멋진 휴양지로 바꿀 수도 있고, 화려한 거실 공간으로 바꿀 수도 있다. 실제 머무는 공간의 중요성이 퇴색되는 것이다. 결국 이는 가상 공간의 현실화인 셈이다.

이쯤에서 영화 <인셉션(Inception, 2010)>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인셉션>에서는 무의식, 즉 꿈을 언급하는데 이 꿈과 온라인의 차이가 뭘까? 이런 허상을 언급하다 보면 <12 몽키즈(1995)>와 <매트릭스(The Matrix, 1999)>도 함께 언급할 수밖에 없다. 비록 장르는 판타지지만, 이런 영화들이 허투루 보이지 않는 것은 앞서 언급했던 <더 네트>에서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결코 과장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인식이 뇌의 뉴런(신경세포) 간 전자 접촉에 의한 퍼즐이라고 보면, 결국 <매트릭스>의 허상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매트릭스> 스틸컷 ©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주)

매트릭스에서의 공간은 매우 중요한 역할로, ‘현재의 나’를 인식시켜주는 중요한 장치이다. ‘현재의 나’가 어디에 있는지는, 배경이 되는 공간에 따라서 결정된다. 그 공간은 인식하는 주체인 ‘나’가 만지고, 보고, 듣는 것에서 시작한다. 경험을 통해 기억 저편에 존재하던 공간이 만지고, 보고, 듣는 행위에 따라 기억 저편에서 나와 눈앞에 실재하는 것 같은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는 것이다. 촉감은 뇌를 통해 실제 무언가를 만지는 것처럼 얼마든지 속일 수 있다. 이렇게 속이기 위해 <매트릭스>에서의 환경은 의도적으로 바뀌고 있다.

이러한 영화를 감상하다 보면, 비대면 사회에서의 고립된 개인, 또는 고립된 사람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있는지 문득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새삼 ‘존재’에 관해 고민하게 된다. 내가 만지고 냄새 맡는 대상은 과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 그리고 나는 지금 광장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아주 작은 나의 방에 있는 것일까?
비대면 사회로의 전환은 우리가 절대적으로 여겼던 실재하는 공간들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와 문제 제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글. 홍성용 Hong, Sungyong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은 건축사(KIRA), 건축공학 박사, 서울시 공공건축가로 건축의 크로스오버를 오래 전부터 주장했다. 국내 최초의 영화와 건축을 해석하는 <영화속 건축이야기, 1999> 을 시작으로 여행기, 마케팅을 연구했다. 건축사로 최초의 경영서적인 <스페이스 마케팅 2007>을 삼성경제연구소를 통해 출간하였고, 도시경쟁력 연구인 <스페이스 마케팅 시티, 2009>, 그리고 2016년 <하트마크>를 출판했다. 신사동 임하룡씨 주택, 근생 멜론 등 다수의 건축작품과 인테리어 작품들이 있다.
ncslab@ncsarchitec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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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집 이야기

Many house stories

누군가에게 집은 달콤한 로맨스가 펼쳐지는 매력적인 장소이기도 하고, 어쩌면 두렵고 무서운 곳이기도 하다. 같은 집에서 서로 다른 추억과 기억을 공유하기도 하고, 일평생을 살아온 집은 그 자체로 그 사람의 정체성이 되기도 한다. 영화 <업> 포스터 ©한국소니픽쳐스릴리징브에나비스타영화

‘집’은 우리나라 사람들과 오래전부터 애증의 관계가 형성된 삶터이다. 다른 말로 하면 부동산. 이 단어로 전환되는 순간 사람들의 애증과 희로애락은 한순간에 사라지고 한숨과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자고 나면 집값이 오르는 통에 부동산은 1960년대 정치적 사회 문제의 주제가 되었고, 1970년대와 1980년대도, 1990년대를 지나 2020년대에도 여전히 핫이슈다. 부동산과 집이라는 단어는 분명 서로 다른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으나, 동일한 건축 형식을 띈다. 그러나 사용되는 단어에 따라 이 동일한 건축을 대하는 시선과 태도는 판이하다.

산업화 시대를 지나서 4차 산업 혁명의 시대에 들어선 지금도 부동산 이슈는 여전하고, 오히려 정치적 주제로까지 확산되었다. 심지어는 없어도 될 심리적 계급 갈등의 출발지가 되기도 한다. 집은 과연 무엇일까? 집을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먼저 비판적 시각으로 본 재테크 수단으로써의 부동산인 집과, 동시에 아련한 정서적 대상으로서의 집이다. 이 두 가지는 동일한 건축을 달리 바라보는 시각이다. 감정과 이성으로 봐야 할지, 물욕과 서정으로 봐야 할지 모르겠다. 집이 이렇게 우리 삶을 휘두르는 것은, 어쩌면 집이 그만큼 중요한 대상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다만 건축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오래전부터 집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삶의 배경이 되는 곳으로 설명하곤 했다. 이는 서구나 우리나 매일반인 듯하다.

집은 인간에게 있어 절대적으로 필요한 건축인 동시에 잉여 자산으로써의 재테크 수단이다. 절대적으로 필요한 대상이기 때문에 항상 수요가 있는 것이고, 수요를 맞추지 못하기 때문에 가격이 오르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과 기대를 채워가는 상품으로써 수요를 자극해서 구매 희망자를 늘리고 이를 통해서 집값이 다시 오르는 원리가 작동되고 있다. 그런 대상이 바로 집이다. 때문에 마냥 집을 서정적이고 아련하게만 생각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부정하게 생각하거나, 불온시할 이유는 없다. 왜냐면 그런 현상 자체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삶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마음속 한편에는 뭔가 집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 그것은 집이라는 공간 속에서 만들어지는 시간 때문인 것 같다.

영화 <업>의 한 장면. 아무리 낡고 오래된 집이라도, 주인공에게는 일평생 희로애락을 함께한 시간과 추억이 깃든 떼려야 뗄 수 없는 공간이다. ©한국소니픽쳐스릴리징브에나비스타영화

국민소득 3만 달러가 넘으면 사회적 관심 소재가 건축으로 나타난다는 말처럼, 최근 유독 방송에서 건축을 소개하는 코너가 늘어났다. 건축의 수많은 유형 중에 집이 중심이 된 것은 말할 나위 없다. 집은 우리에게 공기처럼 익숙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중 매체에서는 집을 주제로 한 여러 이야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특히 EBS의 ‘건축탐구-집’이라는 프로그램은 그동안 우리가 잠시 잊고 있었던 정서적인 집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삶이라는 주제에 초점을 두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에 수많은 사람이 이야기를 듣고 보면서 반응하기 시작했고, 상당한 시청률이 나오면서 장수프로그램화 되고 있다.

우연히, 즐겨보는 프로그램에 출연해 강원도 고성의 화재가 발생한 동네에 직접 설계한 집을 소개하게 되었다. 내가 고스란히 설계한 집 외에도 불탄 이후 재건된 고성의 여러 집과 함께 하는 형식이었다. 그리고 여러 집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문득 2009년의 만화 영화 <업>이 떠올랐다. 재개발한 복판에 고집스럽게 버티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담은 만화 영화로,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진지한 질문을 주제로 담고 있다. 삶의 희로애락을 함께한 주인공의 집은 사별한 아내와 마찬가지로 주인공에게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곳이다. 단지 목재와 기와, 페인트로 마무리된 건물이 아니라 매 순간의 다양한 기억을 함께 한 동반자인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와 만나고, 아이를 갖지 못하는 시련을 겪고, 웃고 떠들다 세월이 지나 홀로된 이야기가 있는 곳이다. 그곳은 하룻밤 머물며 자는 호텔이 아닌,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곳이다. 그곳은 기억이며 존재 자체다. 그러니 개발 업자들이 아무리 팔라고 해도 팔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을 팔라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업>의 이런 스토리는 이성적으로 충분히 이해되지만, 평균 정주기간이 4.5년인 우리나라 동시대 사람으로서 뼛속까지 전달되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런데 고성에서 만난 몇 분의 집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정말 집은 동반자이고 자식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태어나 결혼하고, 자녀를 장성시키고, 손자를 보는 70대 노인이 될 때까지 살아온 집. 그 집이 불타 사라질 때 느꼈던 심정적 아픔이 이야기를 듣는 내내 절절했다. 외아들을 잃고 떠나온 새로운 동네에 정착한 노부부, 타지로 떠나 자수성가해서 본인의 고향 근처로 온 노부부, 모두의 이야기는 <업>과 다를 바 없었다. 아무리 멋지고 깔끔한 새집이 주어진다 해도 아련한 시간과 기억이 있는 낡고 오래된 집과 같은 감정이입은 쉽지 않았다.
아! 집은 이런 것이었다. 정체성 그 자체인 셈이다.

<시월애>의 한 장면. 주인공들은 같은 장소, 다른 시공간에 존재한다. 그렇기에 호숫가에 거대하게 지어진 화려하고 세련된 집은 허무한 곳이다. ©브에나비스타인터내셔널코리아

<작은 아씨들>에서의 집은 네 자매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놀면서 웃고 떠들고, 때로 싸우기도 하는 등 성장기를 거치며 서로 같은 경험, 또는 다른 기억을 쌓아올린 장소다. ©소니픽처스코리아

하지만 누군가에게 집은 허무하고 허전한 곳이기도 하다. 그것은 누구와 함께하느냐에 따라 다른 이야기로 전개되는 삶과도 같다. 이룰 수 없는 시간의 사랑을 다룬 판타지 영화 <시월애>처럼 멋진 곳이지만 만날 수 없는 운명의 그 또는 그녀가 존재하는 공간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호숫가에 거대하게 지어진 화려하고 세련된 집은 허무한 곳이다.
똑같은 호숫가 또는 바닷가인지인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누군가의 집은 너무나 사랑스럽고 달콤한 곳이다.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에서 집은 달콤한 로맨스가 펼쳐지는 곳이다. 사랑과 기대의 로맨스가 넘치는 곳일 경우는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매력적인 곳이 집이다. <작은 아씨들>의 이야기 배경 역시 집이 중심이다. 따뜻한 벽난로에 옹기종기 모여서 왁자지껄 떠드는 곳이다. 사람의 감정은 다양하고, 삶이 다양한 것만큼 집 역시 다양하다. 백인백색(各人各色)의 이야기와 표정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집을 정의하기는 쉽지 않다. 집이 어떻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섣부르다.

집이 항상 아름답고 로맨틱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누군가의 삶이 고통스럽고 힘든 것만큼 그들의 집 역시 마찬가지다. 때로는 두렵고, 무섭기도 하다. <양들의 침묵>에서 나오는 집은 우리가 알고 있는 행복하고 멋진 개념과는 완전히 다른 잔혹하고 끔찍한 곳이다. 집이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이라는 이유로,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잘 노출되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최근 가정에서의 끔찍한 아동 학대 사건들이 뉴스에 나오고 있다. 이런 대부분의 학대 중 70%가 친부모 가정에서 벌어진다고 한다. 가장 안전하고 쉴 곳이라 생각했던 집이 가장 두려운 공간이 되는 순간이다.

집은 사회의 축소판을 보여주기도 한다. 재작년 전 세계적인 화제 속에 흥행에 성공한 우리 영화 <기생충> 역시 집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하녀> 역시 마찬가지다. 이러한 영화에서, 집은 거대한 사회의 축소판이면서 사회의 계급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계급 공간이다.
<남아있는 나날>이라는 영화에서 거대한 저택은 철저한 계급으로 구성된 공간을 보여준다. 지하에 있는 하녀들과 집사들의 공간은 그들만의 분리된 세계로 지상과는 철저히 다른 작업 동선이 구성되어 있다. 언제 어디서든 지상층에 있는 위 계급이 부르면 달려갈 수 있도록. 사실 계급적 시각에서 이런 공간 구성을 보기 때문에 문제의식을 느끼는 것이지, 서비스를 받는 사람과 서비스를 하는 사람의 동선으로 본다면 당연한 구성인지도 모른다. 미술관이나 백화점이 작업 동선과 관람객과 소비자의 동선을 겹치지 않게 구성하는 것과 동일하다. 미술관이나 백화점의 서비스 동선은 벽으로 구성되어 관람객이나 소비자들이 발견하기 어렵다. 이런 형식은 디즈니랜드의 배치에서도 나타난다. 디즈니랜드의 작업 동선은 철저하게 관람객과 마주치지 않도록, 그러나 언제 어디서든 등장할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기생충>의 지하와 반지하는 당연한 곳일 수 있다. 그것은 위생 배관처럼 필요하지만 드러날 필요 없는 서비스 공간이기 때문이다. 주인이 일하는 또는 보여주는 주방은 화려하고 세련되었다. 주인이 세련된 주방에서 얼마나 일을 할까? <기생충>에서 불을 다루는 사람은 가정부이고, <남아 있는 나날>의 주방 역시 하녀들이 일하는 곳이다.
이렇게 공간의 이면들을 생각하다 보면 양반집의 구조도 생각하게 된다. 고위직 양반의 가옥에서 부엌이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음은 당연한 일이다. 온갖 노동의 일선에는 하인들이 있었을 테니까. 그렇게 본다면 뒷간처럼 냄새나고 복잡한 곳은 한편으로 외진 곳에 있거나 물러나 있을 수밖에 없다. 우아한 정경부인이 매번 팔을 걷어붙이고 아침 저녁상을 만들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었을까? 이런 시선으로 한옥을 보니 새삼 다르게 보인다. 우리가 그토록 멋지고 우아하게 보던 매력적인 한옥은 노동이 배제된 지적 유희의 공간이었던 셈이다. 물론 다수의 사람은 그 안에서 노동을 했을 터이지만…….

<양들의 침묵>에 나온 집에서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한다. 영화를 떠나서, 누군가에게는 집이 두려운 공간이 될 수도 있다. © 오라이언 픽처스

이번 고성 화재를 겪은 한 집은 1944년 지어진 한옥이었다. 솜씨 좋은 할아버지가 직접 목수들과 만든 집으로 집주인의 자부심이 대단했다. 할아버지가 지은 집에서 태어난 어르신은 자신의 대에서 불타버린 집에 대한 아쉬움과 그리움으로 이야기 도중에 눈물을 보였다. 반면에 평생을 노동하고 소여물을 주며 고생했던 아주머니는 그런 그리움보다는 새로 지은 주택의 편리함과 따뜻함에 감사하고 있었다. 대조적인 이 두 사람의 모습은 인터뷰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멋진 새집에 있으면서, 불타 사라진 집의 스케치를 드리자 눈물을 보이는 어르신들의 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집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집이란 무엇일까? 어떻게 정의를 내려야 할까?
어쩌면 정의를 내리는 것이 무모한 일인지도 모른다. 수많은 영화 속 배경으로 나오는 집들의 다양함과 다양한 역할처럼, 집도 수백만 가지의 모습과 정의를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결국 집은 집이다. 그게 맞는 말 같다.

 

글. 홍성용 Hong, Sungyong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은 건축사(KIRA), 건축공학 박사, 서울시 공공건축가로 건축의 크로스오버를 오래 전부터 주장했다. 국내 최초의 영화와 건축을 해석하는 <영화속 건축이야기, 1999> 을 시작으로 여행기, 마케팅을 연구했다. 건축사로 최초의 경영서적인 <스페이스 마케팅 2007>을 삼성경제연구소를 통해 출간하였고, 도시경쟁력 연구인 <스페이스 마케팅 시티, 2009>, 그리고 2016년 <하트마크>를 출판했다. 신사동 임하룡씨 주택, 근생 멜론 등 다수의 건축작품과 인테리어 작품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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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유적 공간과 상징을 담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

Miyazaki Hayao’s works that embody metaphorical space and symbol

마녀 배달부 키키 포스터 © (주)스마일이엔티

붉은 돼지 포스터 © 브에나비스타코리아

하울의 움직이는 성 포스터 © (주)이수C&E

미야자키 하야오는 아마도 일본인보다 외국인들이 더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일본의 만화 영화 감독이 아닐까. 어린 시절, 주인공의 이름이 전부 한국식 이름으로 바뀌어 있어 우리나라 만화 영화인 줄로만 알았던 만화들의 상당수가 그의 작품이었다.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그의 작품 중 <엄마 찾아 삼만리>라던가 <플란다스의 개>, <미래소년 코난> 등의 일부 장면은 50대 중반이 넘어서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의 실력은 텔레비전에 방영되는 만화 영화보다는 장편 영화에서 빛을 발한다. 아마도 거의 대부분을 본 듯한데,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천공의 성 라퓨타>, <마녀 배달부 키키>, <붉은 돼지> 등 대부분 흥행에 성공했다. 우리나라에는 암암리에 들어왔다가, 일본 대중문화가 공식적으로 개방된 2000년대 이후 정식으로 극장 개봉을 했다.

서정적이고 아기자기한 그의 영화들을 보면서 어른 동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의 동료이면서 청년시절 격렬한 현실 운동에 참여했던 다카하타 이사오와 유사하면서도 결이 다른 만화영화를 선보였다. 과거 동경대의 격렬한 사회주의 운동에 영향을 받은 다카하타 이사오의 작품에는 이런 청년 시절의 사회적 관점이 녹아들어 있다. 전쟁의 공포와 인간성에 대한 비극을 처절하게 담은 <반딧불이의 묘>나 개발에 대한 환경 파괴를 직접적으로 다룬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 등은 현실의 문제를 은유적이면서도 강하게 묘사하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 역시 사회적 이슈나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가졌으나, 다카하타 이사오보다는 좀 더 우화적이고 간접적으로 다루고 있다. 강렬한 서정적 묘사에 가려진 사회적 메시지는, 만화를 자세히 분석하고 봐야만 읽어낼 수 있다.

마녀 배달부 키키 © (주)스마일이엔티

<마녀 배달부 키키>의 배경이 된 스웨덴 고틀란드 섬 해안의 휴양도시 비스뷔(Visby)

흥미로운 점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수많은 작품에서 나타나는 도시와 공간에 대한 해석이다. 만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철저한 로케이션 촬영과 묘사, 그리고 재해석으로 배경을 그리는 집요함이 보이는데, 평화와 인간애라는 주제 배합이 기가 막히다. 그의 만화에서 보이는 서정적 묘사는 낭만성을 자극하고 드러내는데, 이런 낭만적 표현들은 사람들이 이야기에 편하게 몰입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런 낭만은 기억을 자극하는 다양한 시각적 표현으로 채워지고 있다.

특히 도시 풍경과 거리의 모습, 골목길은 유럽이나 일본을 배경으로 하는 공간적 요소들이 다수 등장한다. 아기자기한 미로 같은 골목길은 의외성과 드라마틱한 관점을 동원해서 관객들을 이야기로 몰입하게 만드는데, 만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실사 영화 같은 정교한 묘사는 이런 몰입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조금 의아한 부분은 그의 상당수 영화에 등장하는 배경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일본이 아닌 유럽의 특정 도시풍경들을 담아내는데, 이는 이국적 풍경에 대한 판타지를 강조하는 역할도 한다(기본적으로 미야자키 하야오는 일본 국내를 대상으로 상업 만화 영화를 만든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일본의 대중문화를 비판하는 시각으로, 19세기 서구 문물의 도입 이후 일본인들이 그리는 이상적 풍경으로 삼은 유럽의 고전 건축이 가득한 도시에 대한 맹목적 추종으로 오해할 수도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이상향은 공동체 중심의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이다. 그는 유럽의 도시풍경을 이상적 사회주의의 도시 모습이라고 발언한 바 있다. 특히 중세 도시의 개별화되어 있으면서도 서로 공유되는 공적 공간의 특성은 그가 감동을 받은 도시 구성 요소다. 유럽의 중세 도시 구조를 보면, 중앙중심적이고 통치를 위해 계획적으로 구성한 것이 아닌 자연발생적 공간들로 구성돼 있다. 그리고 제한된 사적 공간에서 해결되지 않는 개방성을 갖춘 공간으로는 교회나 광장을 중심으로 구성된 공동체의 공간이 있다. 이런 도시 풍경은 <마녀 배달부 키키>, <붉은 돼지>, <하울의 움직이는 성>등에 나타나는 요소들이다.

소녀에서 성인 마법사가 되기 위해 좌충우돌하는 성장과정을 보여주는 <마녀배달부 키키>에서는 주인공인 키키가 해변가의 도시를 뛰어다니고 하늘을 날아다니는 장면들이 나온다.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 수 있다는 동화적 요소는 판타지로 충분한데, 키키가 하늘을 나는 과정은 여러 가지 상징과 추상적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해변 마을의 이사 장면을 위해서 실제 장소를 찾아서 모델링하고 적용했다. 상상의 내용이 현존하는 도시 공간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과정을 보면 그가 현실과 상상 사이에서 어떻게 관객들의 몰입을 유도하는지 알 수 있다.

<마녀 배달부 키키>에서 배경이 된 해변 마을은 실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1995)된 스웨덴의 도시 비스뷔(Visby)다. 비스뷔는 14~15세기 중세 시절 활성화된 스웨덴의 항구도시다. 그런 덕에 도시 곳곳에는 중세 고딕적인 건축 양식들이 즐비하고, 그런 건축 유산들이 고스란히 남아 보존되고 있다. 중세는 마녀 등 주술적 상황이 실제화 하는 것으로 느껴지던 시대였고, 그런 중세 도시를 배경으로 마법 판타지 이야기가 전개되는 상황은 절묘한 구성이기도 하다. 더불어 영화 내용의 대부분은 창조적 야망에 대한 은유인 마법의 비행에 대한 열정을 재발견하려는 키키와 관련이 있다.
그렇다고 키키의 생활상이 과거는 아니다. 현재의 어느 시점으로 묘사되어 있다. 마법이라는 유럽의 전통적 이야기 소재와 판타지, 기술 발전 및 현대적 상황들이 혼재된 것이다. 모호한 시간대는 오히려 이야기 몰입을 도와준다.

붉은 돼지 © 브에나비스타코리아

<붉은 돼지>의 실제 배경 모델인 크로아티아 비스(Vis) 섬의 해안가 풍경

그런가 하면, 전쟁 관련 문제를 드러낸 <붉은 돼지>는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다. 극 중의 전쟁은 제1차 세계대전을 이야기하는 것 같은데, 전쟁의 광기 아래서 다뤄지는 집단의 폭력성을 코믹하면서도 은유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야기는 이탈리아 어느 도시의 풍경에서 시작된다. 포르코 로소가 사는 가상의 도시 피우메는 실제 크로아티아의 비스 섬과 풍경 좋은 남쪽의 스티니바를 모델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구가 몇천 명 정도에 불과한 비스 섬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지중해의 작은 도시이기도 하다. 어업을 중심으로 하는 평화롭고 작은 섬의 도시 풍경과 스티니바 해변가 풍경의 절벽과 해안선은 너무 흡사하다.

밀집된 중저층의 건물들이 즐비한 도시 풍경에서 골목길의 흥겨움과 의외성, 오픈 카페의 낭만들이 묘사되고 있으며 이는 평화적 상황을 설명하는 일상 그 자체다. 주인공은 포르코 로소라 불리는 비행사이자 의인화된 돼지로, 그를 사랑하는 지나와 함께 한다. <붉은 돼지>에서는 당시의 시대상인 파시스트 정부와 비밀경찰, 노동자 등을 묘사하고 있다. 주인공 포르코의 활약은 배경 속에서 함께 하는데, 네오르네상스가 만개한 이탈리아 밀라노가 주 무대로 등장한다. 극 중 밀라노는 농업 중심에서 산업화로 진전하는 근대화 중심 도시로, 좀 더 밀도 있는 도시로 구성되었다. 규모는 커지고, 다양한 길들은 자동차가 지나다니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차를 피해 다니는 공간이 탄생한 것이다.

주인공이 하늘을 나는, 즉 비행을 하는 과정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상당수 작품에 등장한다. <붉은 돼지>처럼 비행기를 몰거나, <마녀 배달부 키키>처럼 빗자루에 올라타는 등의 행위를 통해 비행을 한다. 그의 대표적 TV만화 시리즈인 <미래소년 코난>에서의 비행 장면 역시 마찬가지다. 포르코 로소의 비행은 과학과 기술의 산물이지만, 키키의 비행은 동화와 상상의 산물이다. 같은 행위지만, 상징하는 바가 완전히 다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판타지는 사실 매우 비논리적인 동화적 상상에서 출발한다. 실제 그는 한 인터뷰에서 “내 방식은 논리를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내 잠재 의식의 우물을 파헤치려고 노력합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순간에 뚜껑이 열리고 매우 다른 아이디어와 비전이 해방됩니다”라고 말했다. 이런 감정의 표현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1)에서도 드러난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 © (주)이수C&E

이러한 이유로 그의 작품에서는 마법이라는 행위가 공통적으로 나타나는데, 마법은 은유적 상상력을 담은 표현으로 묘사되며 물질적 영역 너머에 있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만화 영화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사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에 자극받아 만들어진 것으로, 전쟁의 고통과 무의미함을 고민한 반전 주제를 담고 있다. 더불어 반전 이상의 더 많은 의미와 상징을 보여주고 있다. 국가의 욕망과 폭력에 대한 일반 시민들의 상처와 고통을 고민하고, 또 그 중에서도 어린이와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담고 있는 것이다. 미야자키의 능수능란함은 무겁고 어려운 이런 주제들을 연민과 낭만으로 쉽게 풀어내고 있다.

1960년대 서구 각국과 일본을 휩쓴 사회적 파동과, 청년들이 현실 운동으로 저항하는 시절을 겪은 미야자키 하야오의 감수성일 수도 있지만, 그런 비판은 사실 사회에 대한 애정과 긍정에서 출발한다. 희망과 긍정이 없다면 결코 낭만이 묘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낭만은 작품 내내 이야기되는, 사람이 늙어간다는 것과 이에 대한 연민이 담겨서 표현되고 있다. 소녀와 노인을 오가는 변화는 각자가 겪게 되는 새로운 환경과 사람들 사이에서의 관계를 이해하게끔 한다. 여성에 대한 관점과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묘사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여성의 역할이기도 하다.

자연과 환경 파괴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모노노케 히메>에서는 무리의 대장 역할일 뿐 아니라 주도적인 영웅으로서의 여성을 그리고 있고,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서도 주도적 여성을 묘사하고 있다. 유럽이 아닌 일본을 배경으로 하는 <이웃집 토토로>에서도 어린 자매의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생활 모험이 등장하고 있고, <벼랑위의 포뇨>에서도 여성은 엄마로서 능동적이다.

어린 아이와 여성은 평화를 상징도 하고, 조화로움을 의미한다. 비록 전쟁 시절의 기억이 희미한 미야자키 하야오지만, 전후 고통에 대한 여러 가지 상황들을 직접 겪었을 그를 짐작한다면 그가 왜 반전과 평화에 집착했는지 유추할 수 있다. 그런 집착은 오랜 시간 공존해온 도시의 연속성과 흔적에서 동기를 부여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앞서 그의 이상향으로 언급되었던 공동체 중심의 유토피아적 사회와, 개별화된 공간과 공적 공간이 공존하는 이상적인 유럽의 사회주의 도시 모습 말이다. 예를 든 세 작품 외에 유럽의 골목길과 낡은 공간들을 배경으로 하거나, 일본의 시골이나 오밀조밀한 사람 냄새나는 풍경을 담은 여타의 작품들 역시 마찬가지다.

일견 아이들이 보는 영화 같지만, 어느 영화 못지않게 진지한 삶에 대한 관찰과 사색, 그리고 우리 삶에 영향을 주는 사회에 대한 발언을 놓치지 않고 담아내는 그의 작품은 관람 후 다시 한 번 깊은 생각을 하게끔 만든다.

그래서일까? 흥미롭게도 미야자키 하야오의 만화 영화들이 학술적 대상으로 분석되고 있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그의 작품 속에 나타나는 반전, 평화, 선악의 묘사, 나이에 대한 고찰, 페미니즘, 전통과 민속, 숲과 나무 그리고 다양한 신화들이 분석되고 있다. 특히 공간과 도시, 건축을 통해 묘사되는 기억과 향수, 익숙함을 보면 미야자키 하야오를 철학자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글. 홍성용 Hong, Sungyong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은 건축사(KIRA), 건축공학 박사, 서울시 공공건축가로 건축의 크로스오버를 오래 전부터 주장했다. 국내 최초의 영화와 건축을 해석하는 <영화속 건축이야기, 1999> 을 시작으로 여행기, 마케팅을 연구했다. 건축사로 최초의 경영서적인 <스페이스 마케팅 2007>을 삼성경제연구소를 통해 출간하였고, 도시경쟁력 연구인 <스페이스 마케팅 시티, 2009>, 그리고 2016년 <하트마크>를 출판했다. 신사동 임하룡씨 주택, 근생 멜론 등 다수의 건축작품과 인테리어 작품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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