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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글꼴의 형태에 특정한 관념이 붙을까?

Why is there a specific notion attached to font types?

<사진 1> 영화 <시라노; 연예 조작단>에 등장한 와인바 글꼴

영화 <시라노; 연애조작단>에서 와인바를 찾은 한 여성이 주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와인바 라이터가 이게 뭐냐. 치킨집 라이터도 아니고.” 이 여성은 라이터 표면에 새긴 와인바 상호의 글씨체가 촌스럽다고 지적한 것이다.<사진1> 주인은 이렇게 답한다. “안 그래도 단가 높은 걸로 새로 주문했어.” 이 대화에서 현대인이 갖는 두 가지 관념을 짐작할 수 있다. 하나는 와인바에 어울리는 글꼴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예쁜 글씨체를 얻으려면 돈을 좀 써야 한다는 것이다. 돈을 주는 이유는 무엇인가? 단지 예쁜 글씨를 디자인해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인가?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와인바에 맞는 글꼴을 찾아줘야 한다. 이 말은 특정한 관념에 부합하는 특정한 형태가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고딕체를 생각해 보자. 고딕체는 이탈리아의 인문학자들에게는 오랑캐의 글꼴로 인식되었다. 로마제국을 멸망시킨 북쪽 오랑캐 고트족이 만든 글꼴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그리하여 로마적인 글꼴인 로만체를 만들어 고딕체를 구시대의 유물로 만들었다. 하지만 고딕체를 만들고 퍼뜨린 게르만 민족은 그 글꼴을 20세기 전반기까지 본문용 서체로 사용했다. 특히 나치는 고딕체를 민족의 글꼴로 여겨 나치를 선전하는 포스터에 적극 사용한 건 오늘날 남아 있는 나치 포스터와 책자 등을 통해 증명된다.<사진 2> 오늘날 네오나치들은 흔히 몸에 문신을 하는데, 마치 조폭들이 용 문신을 하는 것처럼 고딕체 글씨를 몸에 새긴다.<사진 3>

<사진 2> <오직 히틀러> 포스터, 1930년대. 변칙적으로 왜곡된 고딕체로 디자인되었다.

<사진 3> 텍사스의 아리안 형제 로고. 나치의 하켄크로츠와 함께 고딕체로 텍사스를 새겼다. © Ormr2014

나치는 사라졌지만, 고딕체가 독일적이라는 의미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 증거는 수많은 독일 맥주 레이블에서 볼 수 있는 고딕체 로고다. 최근 일본 맥주들이 편의점에서 사라지면서 독일 맥주들이 늘었다. 독일 캔맥주 로고를 보면 고딕체가 흔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사진 4> 한국의 대기업 맥주 로고들도 대개 고딕체를 조금 가독성 있게 변형한 것이다.<사진 5> 고딕체의 특성은 획의 윗부분과 아랫부분이 뾰족한 것이다. 클라우드, 하이트, 카스는 한결같이 고딕체다. 한국 대기업 맥주들이 이토록 고딕체를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맥주의 정통성이 독일에 있다고 보고 가장 독일적인 글꼴을 채택해 그런 정통성의 상징을 빌려온 것이 아니겠는가. 연희동에서 발견한 독일빵집의 간판 글씨는 한글이지만 최대한 로마자 고딕체처럼 디자인했다.<사진 6> 독일빵집을 주장하니 한글 글꼴도 로마자 고딕체처럼 보여야 한다고 여긴 것이다.

<사진 4> 독일 수입 맥주 바르슈타이너의 로고는 고딕체로 디자인되었다.

<사진 6> 한글 독일빵집의 글꼴을 로마자 고딕체처럼 보이게 디자인했다.

<사진 5> 한국 대기업 맥주들도 고딕체로 디자인되었다.

글자의 형태가 특정 지역과 시대를 연상시키는 사례로 투스칸 스타일 글꼴도 있다.<사진 7> 글자의 세리프가 물결 모양이고 세로획의 중간이 뾰족하게 튀어나와 있는 글꼴이다. 이 글꼴은 원래 19세기 초 영국에서 처음 개발되었으나 오히려 미국에서 더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서부개척시대 시골 마을의 술집인 살룬(saloon)이 투스칸 스타일로 디자인된 것을 서부영화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이 투스칸 스타일은 서부 개척시대의 대표적인 글꼴이므로 서부영화의 타이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사진 8>

<사진 7> 서부개척시대 마을 술집 살룬(saloon)이 투스칸 스타일로 디자인되었다.

<사진 8> 영화 <자니 기타>의 타이틀이 투스칸 스타일로 디자인되었다.

<사진 9> 1930년대 보스턴과 신시내티 팀의 유니폼 로고가 투스칸 스타일로 디자인되었다.

<사진 10> 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의 로고가 투스칸 스타일로 디자인되었다.

<사진 11> 1980년대 한국 국가대표 야구팀의 로고가 투스칸 스타일로 디자인되었다.

투스칸 스타일은 19세기에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글꼴이었으므로 19세기에 탄생한 미국 프로야구 팀의 로고로 가장 많이 채택되었고 20세기 전반기까지 유행했다.<사진 9> 그 흔적은 20세기까지 이어져 보스턴 레드삭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뉴욕 메츠, 텍사스 레인저스 같은 팀들의 로고에 남아 있다.<사진 10> 투스칸 스타일은 미국 메이저리그는 물론 일본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로고 글꼴이다. 그러다 보니 198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 국가대표 야구팀의 서체도 투스칸 스타일이었다.<사진 11> 한국 야구인들에게 투스칸 스타일은 야구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글꼴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사진 12> 19세기 영국에서 개발된 슬랩세리프 서체는 획의 굵기가 일정하다.

<사진 13> 서부개척시대 현상금 포스터의 글자가 웨스턴 스타일로 디자인되었다.

19세기 미국 서부개척시대를 대표하는 또 다른 글꼴이 있다. 웨스턴 스타일로 분류되는 이 글꼴은 모든 획의 굵기가 일정한 슬랩세리프(slab serif)에서 파생되었다.<사진 12> 웨스턴 스타일도 획의 굵기가 일정한 것은 슬랩세리프와 같은데 세리프의 굵기가 더 두껍다는 점이 다르다. 이 글꼴은 특히 19세기 현상금 포스터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사진 13> 말 그대로 웨스턴 스타일 글꼴이다 보니 서부 영화의 타이틀과 포스터에서 가장 많이 쓰인 글꼴이 되었다. 성수동에 갔다가 ‘우디Woody’라는 상호의 이발소를 발견했다.<사진 14> 이름과 간판 배경색을 보니 연상되는 것이 있었다. 바로 <토이 스토리>다. 이름도 <토이 스토리>의 주인공 우디로 지은 것이다. 우디는 카우보이다. 그렇다면 카우보이 우디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글꼴은 무엇일까? 카우보이는 19세기 서부개척시대의 산물이다. 그러니 웨스턴 스타일 글꼴이 가장 잘 어울릴 것 같다. 이 글씨는 웨스턴 스타일의 원형인 슬랩세리프를 선택했다. 세리프를 더욱 두껍게 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로만체나 산세리프체로 하는 것보다는 훨씬 적절한 선택이다. 서부시대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다.

<사진 14> 성수동 한 이발소의 상호 Woody가 슬랩세리프로 디자인되었다.

21세기에 제작된 서부영화 <장고: 분노의 추적자>는 대농장과 노예 학대로 악명 높은 남부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 흑인 장고와 인종주의를 혐오하는 현상금 사냥꾼이 미시시피주로 들어설 때 노예들이 비참하게 끌려가는 장면 위로 웨스턴 스타일 글꼴의 Mississippi 글자가 지나간다.<사진 15> 이것을 보는 순간 남부 백인 농장의 야만성이 떠올랐다. 그 글꼴에 어떤 의미가 부여되는 순간이었다. <미시시피 버닝>이라는 영화를 아주 예전에 본 적이 있다. 1960년대 미시시피 주에서 벌어진 극악한 인종차별을 다룬 영화다. 그 영화를 보면서 이미 미시시피 주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이 만들어졌다. 그러니 <장고>에서 본 미시시피라는 글자의 형태는 더욱 의미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진 15> 영화 <장고: 분노의 추적자>에 나온 웨스턴 스타일 글자

지난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사실 특정한 형태와 그것에 달라붙는 의미는 필연적인 연관성이 없다. 하지만 어떤 사연과 역사성 때문에 특정한 형태는 특정한 의미를 부여받기 마련이다. 글자의 모양에 어떤 인상이 부여되는 이유는 그것을 쓰는 주체의 성격과 관련된다. 특정 시대와 특정 지역,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이 가진 성격이 그들이 주로 쓰는 글꼴에 스며드는 것이다. 나는 웨스턴 스타일 글꼴에서 서부 개척시대 미국 백인들의 잔혹함을 읽었다. 물론 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해석이고 의미 부여다. 어떤 사람들은 이 글꼴에서 서부의 거친 황야나 진취성을 읽을 지도 모르겠다. 글자는 그것이 전달하는 내용뿐만 아니라 그것이 가진 형태까지도 독서를 요구한다.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kshin20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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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꼴과 형태에 부여된 뜻

Meaning expressed in fonts and shapes

<사진 1> 납활자의 모양. 맨 위는 얼굴(face), 중간은 몸(body), 맨 밑은 발(foot)이라고 부른다.

최근 국정원의 원훈석이 간첩 글씨체로 쓰여서 교체해야 한다는 뉴스가 있었다. 이 글꼴을 디자인한 사람은 신영복이다. 신영복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감옥살이를 하다가 20년 만에 가석방되었다. 그러니 신영복은 간첩이라는 것이고, 그가 쓴 글씨체는 간첩 글씨체가 된 셈이다. 간첩의 글씨체로 어떻게 국정원의 원훈을 쓸 수 있느냐는 것이다. 신영복의 글씨체는 ‘어깨동무체’로 널려 알려졌고, 디지털 서체로 만들어져 누구나 쓸 수 있다. 정치적 성향에 따라 신영복은 존경받는 학자, 아니면 간첩이라는 극단적인 판정으로 엇갈린다. 이 글에서 신영복이 진짜 간첩이냐 아니냐, 그래서 그의 글씨체가 진짜 간첩 글씨체냐 아니냐를 밝히려는 생각은 없다. 어떻게 특정한 글씨, 또는 특정한 형태와 디자인에 특정한 의미가 달라붙게 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글꼴, 또는 서체란 하나의 유형(type)을 갖춰야 한다. 사람이 쓰는 글씨체도 특정한 유형이 있지만, 인쇄를 위한 활자는 문자 하나하나가 수천, 수만 번을 찍어도 조금의 변화도 없이 완벽하게 똑같다. 그런 점에서 활자는 사람이 쓴 글자보다 더욱 견고한 타입이다. 활자는 영어로 ‘typeface’다. type은 일정한 형태를 가졌다는 뜻이다. 그런데 거기에 왜 얼굴(face)이라는 말이 붙었을까? 구텐베르크가 디자인한 납활자는 자루 모양이고, 그 끝에 글자가 새겨져 있다.<사진 1> 글자가 새겨진 그 맨 윗부분이 바로 얼굴이다. 활자의 얼굴인 셈이다.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처음 만들었을 때 어떤 글꼴로 만들었을까? 그는 자신이 활자로 인쇄한 책이 필경사들이 손으로 일일이 써서 만든 책인 채식필사본처럼 보이기를 원했다. 그렇다면 낯선 글꼴로 디자인하면 안 된다. 중세 필사본에 가장 보편적으로 쓰인 글씨체 모양으로 활자를 디자인해야 한다. 이에 따라 최초의 활자는 중세의 서체, 이른바 ‘고딕체(gothic)’가 유럽의 첫 번째 활자가 되었다.<사진 2>

<사진 2> 구텐베르크가 디자인한 납활자의 모양은 중세 필사본에 쓰인 글자의 유형을 따랐다. 나중에 이를 ‘고딕체’라고 이름 붙였다.

구텐베르크가 활자를 디자인할 때 기초로 삼은 중세 필사본의 글씨체는 중세 건축인 고딕 성당을 닮았다. 고딕 성당의 첨탑처럼 글자의 세로획 윗부분과 아랫부분이 뾰족하다.<사진 3> 건축은 언제나 그 시대의 문화 규범으로서 가구와 서체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고딕 가구 역시 고딕 성당을 축소한 것 같은 모양이다. 15세기 중반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인쇄술은 전 유럽으로 퍼졌다. 15세기는 르네상스 시대였고, 유럽 문화의 중심지는 이탈리아 북부 지역인 만큼 베네치아가 유럽 출판물의 50%를 생산할 정도로 인쇄 중심지가 된다. 당시 인쇄소를 운영하는 사람들은 사업가보다 인문학자가 많았다. 자존심이 강한 이탈리아의 인문학자들은 독일인이 디자인한 고딕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는 그들이 고딕 건축을 좋아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다.

<사진 3> 중세 고딕 양식 건축의 첨탑(spire)과 고딕체는 유사하다.

고딕 양식은 프랑스에서 시작되었고, 독일과 영국으로 전해졌다. 프랑스와 독일, 영국의 민족은 갈리아족, 게르만족, 켈트족, 앵글로색슨족, 고트족 따위로 구성되어 있다. 로마시대부터 르네상스 시대까지 이 알프스 산맥 북쪽의 민족들은 이탈리아인에게는 야만족으로 취급받던 부류다. 동아시아에서 자기들이 문화의 중심이라고 주장하는 중국이 주변 이민족인 돌궐, 선진, 흉노, 몽고, 여진 등을 오랑캐로 취급하는 것과 같다. 유럽 문화의 중심이라고 주장하는 이탈리아 인문학자들이 그런 오랑캐가 만든 활자로 고귀한 책을 만든다는 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이에 따라 베네치아에서는 구텐베르크가 만든 고딕체와 다른 새로운 활자를 만드는데, 그것을 ‘로만체(roman)’라고 부른다.<사진 4> 오늘날 로마자로 쓰인 책들의 본문에서 가장 흔히 보는 글꼴이다.

프랑스인들이 창조한 고딕 양식에 ‘고딕(gothic)’이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붙인 사람은 조르주 바사리(1511~1574)다. 조르조 바사리는 전성기 르네상스 시대인 16세기에 활동한 화가이자 예술비평가이며 인문학자다. 바사리는 그의 명저 『예술가 평전(Lives of the Artists)』에서 프랑스에서 시작된 이 양식을 ‘고딕’이라고 이름 붙이고, ‘야만적인 독일 양식(barbarous German style)’이라는 말로도 풀이했다. 고딕이란 고트족을 뜻한다. 고트족은 4세기부터 줄곧 로마를 위협했고, 410년에 로마를 점령해 사흘 동안 사람을 죽이고 건물을 파괴했으며 엄청난 양의 값나가는 물건을 약탈했다. 북쪽 오랑캐들 중에서도 고트족은 로마인에게 씻을 수 없는 굴욕을 준 철천지원수다. 그러니 고트족은 이탈리아 인문학자들에게 위대한 고대 문명의 파괴자로 인식된다. 따라서 바사리가 ‘고딕’이라고 지칭한 것에는 이 양식을 경멸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 있는 것이다.

‘고딕 양식’이라는 용어가 16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므로 고딕 활자가 이탈리아에 전해진 15세기에는 그런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중세에는 이탈리아인들도 고딕체로 채식필사본을 만들었다. 하지만 고대 로마의 문화를 재생하려는 열망으로 가득했던 르네상스 시대에 이탈리아인들은 로마식 문자로 고딕체를 대체해야겠다는 의지가 생겼던 것이다. 이에 따라 베네치아 인쇄소에서 재빨리 로만체를 만들어 고딕체를 대체했다. 구텐베르크가 고딕 활자를 만든 뒤 불과 30년도 안 돼서 로만체가 등장했다. 로만체는 게다가 고딕체보다 가독성이 훨씬 좋다. 이탈리아와 프랑스, 영국에서도 로만체가 고딕체를 대체했다. 무엇보다 로마시대 기념비에 쓰인 글자에서 그 형태의 기원을 가져온 로만체는 이탈리아 인문학자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줄 만했다.<사진 5>

<사진 4> 베네치아 인쇄소에서 새롭게 개발한 로만체. 프랑스인 니콜라스 장송이 1460년대 말부터 디자인하기 시작했다.

<사진 5> 로만체의 기원이 되는 대문자는 로마시대 트라야누스 황제의 승전 기념비에 쓰인 글자체다.

엄밀한 의미에서 글자의 형태와 그것에 덧붙여진 의미는 필연성이 전혀 없다. 고딕체라고 명명한 그 중세의 서체와 고트족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자신의 역사를 통해서 의미를 부여하고 만든 것이다. 신영복이 쓴 그 글자 모양과 간첩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신영복을 미워하고 그를 간첩이라고 규정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의미일 뿐이다. 어디 서체뿐인가? 이 세상의 수많은 사물과 특정한 형태와 모양, 색채에 주어진 그 수많은 의미들, 예를 들어 장미는 사랑이니, 흰색은 순결이니 하는 그런 상징적 의미들은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이 아니다. 즉 타고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특정 시대의 역사와 문화가 자의적으로 만들어낸 산물일 뿐이다. 그런 식으로 신영복이 쓴 글자로 레이블을 만든 소주 처음처럼은 ‘좌파소주’가 되었다. 이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자의적인 것이다.
사람은 눈에 보이는 모든 대상에 특정한 뜻을 부여하려는 욕망을 멈출 수 없는 종이다. 그런 의미에는 인종, 성, 계급, 정치적 정체성을 판단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다음에는 글꼴 이외에 이런 정체성을 담은 여러 가지 형태들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kshin20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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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의 나이

The designer’s age

송해가 95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 칼럼에서는 어떤 사람이든 존칭 없이 이름만 쓴다. 하지만 ‘송해가’라고 표현하는 것이 왠지 불경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그는 국민의 사랑을 받는 최고령 아나운서였다. 그것이 어떤 직업이건 90대에도 현역으로 활동할 수 있다는 건 분명 축복이다. 포르투갈 영화감독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는 104세의 나이에 장편 영화를 연출했다. 영화 대본도 본인이 썼다. 이 영화에 출연한 배우 잔느 모로는 당시 84세였다. 이런 경우는 아주 희귀하다. 그렇더라도 사람들에게 자극을 준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나이와 일, 성취의 상관관계에 대해 무척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디자이너의 나이는 어떨까?

구겐하임 미술관 건설 현장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1867-1959), 1959년

건축, 디자인계에서 노익장을 과시한 대표적인 인물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다. 그는 말년에 그야말로 일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의 평전을 쓴 에이다 헉스터블에 따르면, 82세가 된 1949년과 1950년만 하더라도 600건이 넘는 의뢰를 받았고, 그가 행한 모든 일의 1/3 이상을 말년 9년, 즉 80대의 나이에 해치웠다고 한다. 1957년, 그의 나이 90세에 마지막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캘리포니아주 마린 시민센터로서, 이 건물은 나중에 조지 루카스의 SF영화 <THX 1138(1971)>, 그리고 또 다른 SF영화 <가타카(1997)>의 무대가 되었다. 90세 노인의 공상과학적 상상력이 폭발한 것이다. 라이트는 1959년 9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말년에 디자인한 작품이 너무 많아서 구겐하임 미술관을 비롯해 많은 작품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라이트는 말년에도 큰 성취를 이루었지만, 아주 이른 나이에 성공한 건축사이기도 하다. 그가 주택 설계로 두각을 나타낸 시기는 애들러&설리번 사무소를 나와 독립한 1893년이다. 이때 그의 유명한 프레리 양식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26세 때였다. 라이트가 이렇게 이른 출세를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19세기 말 시카고에서 건축을 시작했다는 사실이 있다. 대학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은 그의 진정한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루이스 설리번 역시 19세기 말 시카고에서 일을 시작했다. 설리번의 본격적인 성취는 1879년에 시작되었다. 그의 나이 23세 때였다. 그리고 1889년, 오디토리움 빌딩이 완공돼 설리번 경력의 절정기를 맞이했을 때 불과 33세였다. 이 프로젝트에는 22세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참여했다. 왜 이들은 이토록 어린 나이에 큰일을 해낼 수 있었을까? 19세기 말 시카고를 비롯한 미국의 주요 대도시에 건축 붐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카고는 1871년에 터진 대화재로 인해 도심이 완전히 파괴되었고, 그 재난 덕분에 새로운 건축을 관대하게 수용하는 토대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39세 무렵의 루이스 설리번
(1856-1924)

윌리엄 르 바론 제니(1832-1907)

한편 루이스 설리번에게 철골 건물의 공학과 디자인을 가르친 윌리엄 르 바론 제니는 이들보다 늦은 나이에 자신의 최고 작품을 남겼다. 제니의 주요 경력 중 첫 작품은 홈 인슈어런스 빌딩이다. 철골로 지어진 최초의 마천루로 평가받는 이 빌딩이 1885년에 완공되었을 때 제니는 53세였다. 그의 사무실에는 설리번을 비롯해 다니엘 번햄 등 이른바 시카고 학파의 대표 건축사들이 근무했다. 그들은 독립해서 다들 큰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그 시기가 모두 1880년대다. 이때 설리번과 번햄은 모두 30대의 팔팔한 나이였다. 반면에 제니는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건축을 배운 뒤 미국으로 돌아오자 바로 남북전쟁이 터져 북군 공병으로 복무했다. 그가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에 맡았던 주요 건축 프로젝트는 그랜트 장군을 위한 요새, 그리고 보급선을 단축시키기 위한 도로 건설이었다. 제니가 설리번이나 번햄보다 재능이 모자라서 늦은 나이에 주요 작품을 시작한 것이 아님은 자명하다.

재능은 언제나 그것을 가진 사람의 나이보다는 그것을 요청하는 시대에 따라 폭발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19세기 말에 건축을 시작했다는 것이 그의 경력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인지 알 수 있다. 1932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모던 건축: 국제 전시회>를 기획했던 큐레이터 헨리 러셀 히치콕과 필립 존슨은 라이트를 약간 조롱조로 ‘19세기 아키텍트’라고 불렀다. 그만큼 라이트의 나이가 다른 모던 건축의 개척자들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그는 빌리 더 키드, 부치 캐시디 같은 서부영화의 전설적인 갱들과 동시대 인물이다. 라이트가 젊은 혈기로 모던 주택을 정의할 때 유럽의 거장들인 발터 그로피우스, 르 코르뷔지에,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초등학생이었다. 이들이 뚜렷한 성취를 보인 나이는 대체로 40대 초반이다. 바우하우스 빌딩(1925-1926년, 그로피우스 42세), 빌라 사부아(1928-1931년, 르 코르뷔지에 41세), 바르셀로나 독일관(1929년, 미스 반 데어 로에 43세)이 지어진 시기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경제대공황이 시작되기 전 문화적 황금기였던 1920년대다. 이 시기, 특히 독일에서 가장 진보적인 성취가 건축, 디자인, 미술, 연극, 영화, 문학 등에서 쏟아져 나왔다. 나이가 몇 살이든 창조적인 분야에 종사하는 많은 이들이 이 시기에 최고의 작품을 내놓았다.

나이보다 시대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가 있다. 이탈리아 디자이너 마르첼로 니촐리는 그래픽 디자인과 매장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활동하다가 53세의 나이에 처음으로 기계 제품을 디자인하기 시작했다. 1950년, 63세의 나이에 올리베티 레테라 22 타자기를 디자인했다. 레테라 22는 타자기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타자기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니촐리가 그렇게 늙은 나이에 최고의 산업 디자이너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재능도 출중하지만 이탈리아에서 산업 디자인이 막 시작되던 시기에 그 일을 시작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20세기 중반 이후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마르첼로 니촐리(1887-1969)

비슷한 운명이 미국의 자동차 디자이너 할리 얼에게도 찾아왔다. 1920년대까지 자동차는 엔지니어들이 디자인했다. 얼은 그렇게 생산된 차를 개조하는 디자이너였다. 그의 디자인이 GM의 경영진 눈에 띄어 발탁되었다. GM의 CEO 알프레드 슬론은 자동차 기업 최초로 디자인 부서를 설립해 얼에게 디렉터를 맡겼다. 얼의 나이 34세 때다. 그는 1958년에 은퇴할 때까지 무려 31년 동안 GM에서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 그가 창조한 많은 디자인이 1950년대까지 미국 자동차 스타일을 정의했다. 산업에서 새로운 분야가 막 생겨날 때, 바로 그 순간 뛰어든 사람들은 늘 큰 이익을 본다. 말하자면 무주공산(無主空山), 즉 임자 없는 산을 쉽게 차지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나이는 늘 두 번째다. 천재성은 스스로 드러나지 않는다. 시대가 불러내는 것이다.

콘셉트 카 뷰익 Y-Job을 타고 있는 할리 얼(1893-1969)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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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즘과 엔트로피

Modernism & Entropy

문학, 미술, 음악, 건축, 가구 등 어떤 장르를 막론하고 모더니즘의 보편적 특징은 새로움이다. 다른 장르와 마찬가지로 모던 건축과 모던 디자인 역시도 역사주의와 결별하고 완전히 새로운 것을 발표해서 사람들을 당혹하게 했다. 문학이나 미술, 음악은 그것을 감상하려면 특정한 공간으로 들어가 집중적으로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따라서 그것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느낄 수 없다. 제임스 조이스가 아무리 낯선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소설을 썼다고 해도 그것을 읽지 않는 한 그 새로움을 체험할 수 없다. 피카소의 입체주의 그림이나 쇤베르크의 무조음악도 보거나 듣지 않으면 현대인의 삶과 별로 관계가 없다. 그러니 문학과 미술과 음악은 그 새로움이 피부에 와닿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실제로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모더니즘 예술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채 죽는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모더니즘 예술은 태어난 지 벌써 100년이 지났지만 대중에게는 여전히 난해하다. 내가 유명한 모더니즘 소설인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읽을 때 이게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두 번째 읽을 때야 비로소 그 형식에 조금 적응했지만, 그렇다고 쉽게 술술 읽지는 못했다. 소설의 형식이 너무 독특하고 파격적이어서 그러한 모더니즘 기법은 좀처럼 널리 퍼지지 못하는 것 같다. 미술 분야의 모더니즘은 조금 더 대중화되는 길을 걸었지만, 이 역시 공부하지 않으면 어떻게 감상해야 할지 난감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건축과 제품은 주변에 널려 있으니 눈을 감지 않는 한 피할 도리가 없다. 좋아하든 싫어하든 때로는 그런 모던 건물의 내부로 들어가 그 공간을 강제적으로 체험 당하지 않을 수 없다. 제품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모던한 가구를 싫어하더라도, 공공장소에서 모던한 의자에 앉는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경우의 수는 무척 낮다. 아니 불가능에 가깝다. 건축과 제품의 모더니즘은 그것을 회피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 양식에 익숙해진다. 익숙해지면 난해하거나 혐오스러운 것이 될 수 없다. 21세기에 커튼월 건물을 보며 “저 유리로 반짝이는 건물이 정말 싫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호불호의 대상마저 되지 않을 정도로 모던 건축과 제품은 일상이 된 것이다. 하지만 한때 모더니즘 디자인은 그것을 처음 발견한 유럽인들에게 혐오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모더니즘을 일종의 문화반란, 문화모독으로 받아들였다. 모던한 건물에 손가락질을 하고 돌을 던졌다. 그러나 아무리 싫은 대상이라도 자꾸 보면 친숙해지니 그것을 반기지 않았던 사람도 가랑비에 옷 젖듯이 그것에 익숙해졌다. 이것이 모더니즘 문학이나 모더니즘 미술과 다른 모더니즘 디자인의 유리함이다.

<사진 1> 바우하우스 학생 빌헬름 바겐펠트가 디자인한 조명. 기하학의 순수 형태로 디자인했다.

<사진 2> 바우하우스 학생 마리안느 브란트가 디자인한 주전자. 순수 형태가 지나쳐서 기능적인 문제가 있다.

모던 디자인이 대중이 수용할 수 있는 보편적 미학이 된 더 근본적인 원인은 모던 디자인이 궁극적으로 순수형태를 추구했다는 데 있다. 즉 원, 삼각형, 사각형 같은 기하학의 가장 근본 형태로 조형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바우하우스가 발표한 조명과 주전자, 가구들이 그렇다.<사진 1, 2> 1950년대 보수적인 미국에 모더니즘의 전파를 주도한 뉴욕 현대미술관은 굿 디자인 전시회를 개최하면서 굿 디자인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사진 3> 그중 하나가 절제된 순수형태로 제품을 디자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던 디자인은 흔히 기능주의를 특징으로 하고, 그 점에서 역사주의와 구별된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것은 절반쯤만 맞는 말이다. 어떤 경우 역사주의 가구가 모던 가구보다 더 기능적이다. 모던 가구가 더 기능적인 부분은 생산효율성뿐이다. 그러니 기능주의는 모더니즘 디자인의 부차적인 문제다.

<사진 3> 뉴욕 현대미술관의 <굿 디자인> 전시회, 1951-1952년

최근 『엔드 오브 타임』이라는 물리학 대중서를 보면서 그 점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이 책의 두 번째 장에서는 엔트로피 법칙에 대해서 말한다. 엔트로피 법칙은 경우의 수로 정의된다. 경우의 수가 낮으면 엔트로피가 낮은 것이고, 경우의 수가 많으면 엔트로피가 높은 것이다. 책의 저자 브라이언 그린은 분자가 공기 중에 어떻게 배열되는가 하는 경우의 수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내가 숨 쉬고 있는 방에서 산소 분자들이 골고루 퍼져 있는 것은 엔트로피가 높은 상태다. 산소 분자들이 어떤 특정한 곳에 모여 있을 가능성은 대단히 낮다.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나는 숨을 쉬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그렇게 분자가 아주 유별나게 배열될 확률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의 비율로 경우의 수가 낮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엔트로피가 어마어마하게 낮아서 그렇게 죽을 일이 없다.

브라이언 그린은 이를 좀 더 쉽게 설명하기 위해 동전 던지기를 예로 든다. 동전 100개를 던졌을 때 모두 앞면이 나오거나 모두 뒷면이 나올 확률은 대단히 낮다. 그런 상태가 엔트로피가 낮은 것이다. 앞면이 50개 안팎이 나오고 뒷면 역시 50개 안팎이 나오는 경우의 수는 굉장히 높다. 그런 상태가 엔트로피가 높은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흔히 엔트로피 법칙은 ‘무질서도’라고 비유한다. 질서가 잡힌 상태는 나올 경우의 수가 낮으므로 엔트로피가 낮고, 무질서한 상태는 보편적인 상태이므로 엔트로피가 높다. 엔트로피가 낮은 상태, 즉 질서가 잡히도록 만들려면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한다. 아름다움을 질서가 잡힌 상태로 본다면, 질서는 엔트로피가 낮은 것이므로 엄청나게 노력하지 않으면 아름다움에 도달할 수 없다.

이것을 조형의 상태로 옮겨보자. 자연에서 기하학의 순수 형태인 원, 삼각형, 사각형으로 이루어진 대상을 찾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만약 그런 기하학적 형태의 사물을 찾으면 사람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생겨날 경우의 수, 즉 엔트로피가 매우 낮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람들은 그렇게 저절로 어떤 질서 있는 형태가 이루어지면, 그 대상을 버리지 않고 간직한다. 보석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표면이 매끄럽고 모난 데가 없이 동글동글한 돌도 좋아한다. 거기에서 어떤 미적 쾌감을 느낀다. 이는 거의 본능에 가깝다. 나는 우리 아들이 만 두 살 조금 넘었을 때 정원에서 발견한 반짝이는 하얀 돌을 주우면 ‘예쁜 돌’이라며 가져가고 싶어 했던 모습을 기억한다. 문명 세계의 미적 규범을 배우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였는데도 말이다. 그러니 그 아이의 판단은 학습된 것이 아니라 타고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들조차 엔트로피 법칙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 작용에 대해서는 이미 타고난 감각이 있는 것이다.

<사진 5> 1968년작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원시 인류가 기하학적 순수 형태의 돌 형상을 보고 놀라워하고 있다. 이 돌은 10년 전에 완공된 시그램 빌딩을 닮았다.

또 하나 예를 들어보자.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는 원시 인류의 미적 체험에 대한 내용이 잠깐 나온다. 영화 속 인류는 언어조차 갖고 있지 않을 정도로 원시적이다. 외계인이 그들을 가르칠 목적으로 어떤 물질을 보낸다. 그 물질은 마치 미스 반 데어 로에가 디자인한 시그램 빌딩처럼 대단히 매끄러운 직육면체의 물질이다. 그 물질을 본 원시 인류는 그것에 눈을 떼지 못한 채 다가간다.<사진 4, 5> 그들은 그것을 두려워하기도 하고 강렬한 호기심도 갖는다. 이것이 바로 경이로움의 감정 상태다. 그들은 왜 그런 비석 같은 직육면체의 물질에서 극도의 경이로움을 느꼈을까? 그런 형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고, 그런 물질의 존재란 엔트로피가 어마어마하게 낮기 때문이다. 비록 영화의 한 장면이지만 만약 원시 인류에게 그런 일이 진짜로 발생했다면, 충분히 그렇게 반응을 할 것이라고 상식적으로 예측할 수 있다.

<사진 4> 미스 반 데어 로에가 디자인한 시그램 빌딩은 순수한 직육면체다.

<사진 6> 뉴욕에서 두 번째로 완공된 유리 커튼월 빌딩인 레버하우스, 1952년

실제로 그런 일이 1950년대 뉴욕에서 벌어졌다. 1952년에 유리 커튼월 건물인 레버하우스가 완공되었다.<사진 6> 뉴요커들은 이 모던 건물을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고 한다. 보행자와 택시 운전자들도 이 건물 근처에 오면 속도를 줄이고 올려다보았다. 마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원시 인류가 순수한 직육면체 물질을 경이로워하듯이 말이다. 뉴욕에는 이미 수십 층이 넘는 마천루로 가득하니 21층밖에 되지 않은 레버하우스의 높이에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두 가지에서 놀랐다. 하나는 순수한 기하학의 형태라는 점, 또 하나는 표면이 매끄럽다는 점이다. 재료가 유리인 것도 한몫 했겠지만, 그것보다 본질적인 것은 단차나 장식이 없는 매끄러운 표면이다. 국제주의 양식이 나타나기 전 뉴욕의 마천루는 대부분 단차가 있거나 역사주의 양식으로 건물의 표면을 장식해왔다. 그런 건물과 1950년대 완공된 뉴욕의 대표적인 유리 커튼월 건물이자 국제주의 양식을 세상에 퍼뜨린 주역인 레버하우스, 시그램 빌딩, UN빌딩은 모두 극도로 낮은 엔트로피의 조형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역사주의 건물이라고 해서 엔트로피가 높은 것은 아니다. 그리스 신전에서 시작된 고전주의 건축과 중세에 시작된 고딕 건축 모두 서양 역사주의 건축의 양대 축으로 대단히 질서정연하고 통일된 조형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엔트로피가 낮다. 하지만 순수형태로 건설된 모더니즘 양식과 비교하면 역시 엔트로피가 높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모더니즘의 조형은 단순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러한 질서를 구축하는 데 더욱 많은 에너지가 들어갔으리라고 예측할 수 있다. 오늘날 매끈한 스마트폰을 보면 이것을 구현하는 데 얼마나 큰 에너지가 들어갔는지 예측할 수 있다. 사람들은 그 순수한 형태와 매끈한 표면에서 낮은 엔트로피를 느끼며, 동시에 그 기술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반면에 모더니즘 이전의 장식적이고 복잡한 형태의 가구들도 분명히 장인의 놀라운 기술적 산물이지만, 그것이 신의 솜씨라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즉 장인의 높은 기술로 만든 가구는 도달할 수 있는 경우의 수에 해당한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가 요구한 것처럼 이음매가 완벽한 현대 기술의 산물들은 사람 손의 솜씨를 넘어선 것으로 여겨진다. 미스 반 데어 로에가 “신은 디테일에 있다”고 했을 때 그 디테일은 복잡한 장식이 아니라 단순한 형태에서 확인할 수 있는 완벽한 마감과 질서다. 표면의 복잡함이 사라지면 사람은 그 대상의 덩어리와 부피, 비례, 조합상태, 마감상태에 더욱 신경이 집중된다. 단순한 형태에서 결함이 훨씬 더 잘 드러난다. 그렇기에 순수한 형태의 조형에서 이루어진 통일성과 균형감, 질서는 고전건축이 이룩한 통일성과 균형감, 질서보다 더 도달하기 힘들다. 다시 말해 엔트로피가 더욱 낮다.

결론을 말하자면 모더니즘 건축과 제품은 기능주의가 아니라 엔트로피가 낮은 아름다움에서 승부를 걸었다. 엔트로피가 낮은 상태, 그러한 조형과 질서란 난해한 소설이나 미술, 음악과 달리 사람들이 쉽게 느끼고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소설과 미술, 음악은 새로운 것을 감상하려면 사전 지식, 즉 문화적 학습을 필요로 한다. 반면에 순수 형태를 향한 선호는 학습이 필요 없다. 이미 사람의 마음속에 주어진 것이다. 그 점이 모던 디자인의 대중화를 이끈 핵심적 원인이다.

<사진 7> 아이폰 첫 번째 모델. 순수한 형태, 깨끗한 이음매, 매끈한 표면을 특징으로 하는 이런 조명은 엔트로피가 매우 낮은 상태의 조형이다.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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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은 미디어를 따른다

Design follows the media

미디어는 우리의 사고체계를 바꾼다. 영상 미디어에 익숙한 사람은 문자 미디어에 익숙한 사람보다 덜 논리적인 대신 통합적인 사고를 한다고 미디어 학자인 마셜 맥루언은 말한다. 미디어는 사고체계뿐만 아니라 내용과 디자인도 결정한다. 맥루언은 그것을 “미디어는 메시지다”라고 표현했다.

 

유화와 수묵화

<사진 1> <명나라 단지가 있는 정물>, 빌렘 칼프, 1669년

물을 많이 사용하는 동양의 수묵화와 기름을 많이 사용하는 서양의 유화는 그림의 형식도 다르지만, 화가가 선택하는 그림의 대상도 다르게 만든다. 번들거리는 특성을 갖는 유화는 모든 사물들을 반짝거리게 만들 수 있는 재능을 가졌다. 이에 따라 화가에게 그림을 의뢰하는 부유한 후원자는 자기가 소유한 것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것인지를 과시하는 도구로 유화를 활용했다. 17세기 네덜란드의 정물화가 빌렘 칼프가 그린 정물화에는 번쩍거리는 도자기의 광택, 빛을 산란시키는 유리잔의 투명함, 정교한 금속 세공품, 화려한 색채의 직물들이 마치 컬러 사진처럼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사진 1> 프랑스의 인류학자인 레비스트로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물건의 소유자 입장에서나 심지어 그것을 구경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다 같이 이렇게 탐욕스럽게 물건을 소유하려는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서구 문명의 미술에서 가장 독보적이고 두드러진 특색 가운데 하나로 생각된다.” 소유의 욕망을 표현하는 데 유화만 한 미디어가 없다. 서양에서는 풍경화가 아주 늦게 태어났다. 풍경의 대상이 되는 자연은 개인의 소유물이 아니어서 풍경화를 요구하는 후원자가 별로 없었던 것이다.

<사진 2> <계곡을 지나는 여행자>, 범관, 10세기 말~11세기 초

반면에 수묵화는 채색을 하더라도 물감이 종이(또는 비단) 속으로 스며들어 채색된 대상을 돋보이게 하는 데 한계가 있다. 유화처럼 대상의 세부와 질감을 정밀하게 묘사하여 대상의 덩어리감과 부피감, 촉감을 살리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이에 따라 수묵화에서는 질감보다는 윤곽선, 즉 선의 표현이 두드러지고, 그것은 정물보다는 먼 곳에서 바라본 산이나 강과 같은 자연을 대담한 생략 기법으로 표현하는 데 더 적합하다.<사진 2> 동양회화에서 정물화보다 자연을 관조하는 듯한 산수화가 압도적으로 많은 이유는 노장사상 같은 철학적인 배경도 있겠으나 수묵화라는 미디어가 더 좋아하는 소재가 따로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목판 인쇄술과 활판 인쇄술

<사진 3> 손글씨를 바탕으로 만든 인쇄용 목판

<사진 4> 지암바티스타 보도니가 조각한 펀치(punch: 납활자를 만들기 위한 원형 금속)

중국은 목판 인쇄술을 1세기 무렵에 발명했고, 독일의 구텐베르크는 15세기 중반에 활판 인쇄술을 발명했다. 두 발명의 차이는 목판 인쇄술에서는 글자가 목판에 고정되어 있고, 활판 인쇄술에서는 글자가 독립되어 움직인다는 것이다. 목판 인쇄술에서는 글자를 쓰는 사람과, 그 글자를 바탕으로 목판을 조각하는 기술자가 서로 다르다. 글씨를 잘 쓰는 학자가 쓴 것을 목판 기술자가 그대로 베껴서 나무를 깎아 새기는 것이다. 따라서 목판 인쇄술에서는 손으로 쓴 듯한 글꼴이 대부분을 차지한다.<사진 3> 반면에 활판 인쇄술에서 독립된 활자를 디자인하는 사람은 학자가 아닌 인쇄소의 장인이다. 가라몬드(Garamond) 서체를 디자인한 프랑스의 클로드 가라몽이나 보도니(Bodoni) 서체를 디자인한 이탈리아의 지암바티스타 보도니는 학자가 아닌 인쇄 기술자이자 디자이너였다. 따라서 활판 인쇄술에서는 사람이 손으로 쓴 듯한 글꼴에서 기하학적인 모양으로, 즉 기계적인 글꼴로 진화한다.<사진 4> 20세기 모더니즘 시대에 들어오면, 세리프가 없고 모든 선이 수평선과 수직선으로 구성되며, 모든 곡선은 오직 정원의 선만으로 디자인한 기하학적 산세리프가 등장한다.<사진 5> 이 또한 활판 인쇄술이라는 미디어가 만들어낸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 5> 유니버설, 디자인: 헤르바르트 바이어, 1925년

 

회화와 사진

사진이 태어나기 전, 서양의 회화는 대상을 정확히 재현하려는 속성을 지녔다. ‘그림처럼 닮았다’는 은유가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그림이 대상의 정확한 모방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화가들은 원근법 같은 기법, 또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 같은 광학 기술의 힘을 빌려 더욱 정확하게 대상을 재현하고자 애썼다. 하지만 사진이 등장하자 객관적인 재현에서 회화는 사진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때부터, 그러니까 사진이 태어난 1839년 이후부터 회화는 대상의 정밀한 재현의 의무로부터 해방된다. 마네의 파격적인 회화처럼 당시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성의 없이 대충 그린 그림, 인상파 그림처럼 주관적인 그림이 19세기 중반부터 폭발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결국 20세기가 되면 화가들은 아무것도 재현하지 않는, 즉 자연의 대상을 모방하지 않는 추상화를 그리기에 이른다. 회화라는 미디어의 본질은 사진의 탄생과 함께 더욱 분명해졌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사진가들은 처음에는 지나치게 기계적으로 대상을 정확하게 묘사하는 사진의 특징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게다가 작가가 그런 기계적 기록에 별로 개입할 여지가 없다는 점에 실망하고 오히려 회화를 모방하는 길을 갔다. 하지만 회화가 주관적, 추상적 재현의 길을 걷기 시작하자 사진가들은 결함으로 여겼던 기계적이고 객관적인 기록이 오히려 사진만이 갖는 고유한 특성임을 깨닫는다. 따라서 객관적 현실을 냉정하고 무심하게 기록한 다큐멘터리 사진이 회화가 따라올 수 없는 사진 미디어만의 독자적인 영역으로 발전해 왔다.

 

흑백사진과 컬러사진

<사진 6> <후추 30호>, 사진: 에드워드 웨스턴, 1930년

흑백사진은 음영의 대비가 주는 미묘한 변화가 대단히 아름다운 미디어다. 특히 하이라이트부터 가장 어두운 부분까지 그 계조가 잘 살아난 사진을 볼 때 높은 예술성을 느낀다. 그러한 계조를 잘 표현한 대표적인 사진가로는 에드워드 웨스턴을 들 수 있다. 그의 대표작인 피망 사진은 계조의 풍부한 표현으로 인해 클로즈업된 피망이 마치 유기적인 조각 같은 인상을 준다.<사진 6> 웨스턴은 이렇게 아주 미묘하고 섬세한 계조가 잘 표현될 수 있는 대상, 즉 들어가고 나옴이 분명한 피망, 주름이 잡힌 양배추, 빛에 따라 추상적인 주름 패턴이 드러나는 사막 등을 주로 찍었다. 물론 꼭 그런 대상이 아닌 도시 또는 대자연을 찍은 사진에서도 그처럼 흑과 백의 대비, 그 사이의 미묘한 농도 변화가 보는 이로 하여금 시각적 즐거움을 준다. 음악에서는 소리의 높낮이, 소리의 길이 변화가 사람들의 감정을 자극한다. 그런 것처럼 색 정보가 없는 흑백 사진에서는 밝음과 어두움의 변화와 대비가 관객의 눈을 사로잡는다. 어떤 면에서 흑백사진은 회화적이다.

<사진 7> <부두>, 사진: 에드워드 웨스턴, 1948년

반면에 컬러사진에서는 밝기의 변화와 대비가 아니라 색채의 강렬함이나 구성이 그 역할을 대신하므로 계조의 풍부함이 시각적인 주도권을 행사하지 않는다. 에드워드 웨스턴은 늦은 나이에 컬러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가 찍은 컬러의 부두 사진과 흑백의 피망 사진을 비교해 보자.<사진 7> <부두>의 주제는 집 자체라기보다 집의 표면에 입혀진 색채들, 그 색채들의 구성에 있다. 붉은색, 파란색, 노란색이 연달아 있고, 그 색들이 물에 반사되어 있는 것까지 하나의 구성작품이다. 이 컬러사진은 피망 사진에 두드러졌던 입체감은 사라지고 평면화되었다. 기록사진가가 아닌 예술사진가 웨스턴에게 컬러사진이라는 미디어는 평면적인 대상이 더 적합한 피사체라고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컬러사진은 다큐멘터리 사진에 더 어울린다. 컬러사진은 사람이 눈으로 본 세상과 더욱 닮아 있기 때문이다. 즉 컬러사진은 흑백사진보다 덜 회화적이다.

이상에서 본 것과 같은 미디어의 차이뿐만 아니라 무성영화와 유성영화, 영화와 TV, TV와 유튜브 역시도 그 미디어가 내용과 메시지의 선택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니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다면, 그 메시지와 가장 어울리는 미디어를 선택하는 게 더 현명한 판단일 것이다. 미디어를 결정한 순간 미디어는 작가의 의지를 넘어서며, 작가는 미디어가 이끄는 방향으로 쏠리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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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가 장악한 세상

A world dominated by the media

현대인은 자신이 얼마나 미디어에 장악 당한 채 살아가고 있는지 느끼지 못한다. 현대인은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미디어에 접속하고 잠이 들기 바로 전까지 그 접속 상태가 지속된다. 그리하여 미디어가 없는 세상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것을 보여주는 현상은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그중 하나는 과거를 재현하는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때 쉽게 찾을 수 있다. 세계적으로 흥행한 영화 <글래디에이터>를 보면, 로마 원로원의 위원들이 검투사 경기가 열린다는 홍보 전단지를 보는 장면이 나온다. 고대에 종이가 얼마나 귀한 물건이었는지를 생각하면 이런 장면은 결코 연출될 수 없다. 물론 현대의 사극 영화들은 그러한 고증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을 무시해도 된다고 영화 제작자들은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중세까지 종이가 극도로 귀한 물건이라는 걸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중세까지도 종이가 대단히 귀했다. 중국의 채륜이 발명한 종이는 10세기가 되어서야 북아프리카를 통해 스페인 지역에 겨우 도착했기 때문이다.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이용한 인쇄술을 발명한 시기가 15세기 중반인데, 이때서야 비로소 전 유럽에 종이가 퍼진 상태였다. 종이가 없던 시절에는 양피지를 사용해 기록을 하고 책을 만들었다. 양피지는 염소, 양, 송아지 같은 살아 있는 가축을 죽여 그 가죽으로 만든 종이다.<사진 1> 중세 유럽에서 가축은 대단히 귀해서 우유, 털, 노동력을 착취한 뒤 더 이상 이용할 가치가 없을 때 비로소 도축했다. 요즘처럼 전적으로 식용으로 키우는 게 아니라 에너지를 제공하는 소중한 자원이었다. 그런 자원을 기록을 위해 도살한다는 건 상당한 대가를 치르는 일이었다. 그런 종이를 검투사 경기의 홍보용 전단지로 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종이를 홍보용 전단지로 쓴 것은 인쇄술이 발명된 뒤인 16세기부터다. 그마저도 양피지가 아니라 식물로 만드는 종이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진 1> 양피지를 만드는 모습. 양, 염소, 송아지 가죽으로 만드는 양피지는 상당히 고가의 물건이다.

알렉산더 대왕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며 “알렉산더 대왕이 어린 시절부터 책을 무척 좋아했다”는 대목을 듣고 나는 또 한 번 미디어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대인이 이런 말을 들으면 알렉산더 대왕이 위대한 군사 전략가이면서 동시에 지적 호기심도 대단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알렉산더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머리맡에 두고 즐겨 봤다고 한다. 만약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아들이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머리맡에 두고 즐겨 봤다면 그 아이는 정말 지적 호기심이 대단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왜냐하면 책 보기를 방해하는 매력적인 미디어들이 주변에 널려 있기 때문이다. TV, 컴퓨터, 스마트폰의 유혹을 물리치고 책을 본다는 건 정말 책에 대한 도를 넘는 집착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알렉산더는 어땠을까? 그의 주변에는 어떠한 미디어도 없다. 미디어가 없다는 건 즐길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칼싸움이나 씨름 같은 몸을 써서 하는 놀이는 언제든지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언어 정보로 구성된 콘텐츠는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없는 것이다. 그나마 책이 있으면 좋겠는데, 양피지로 만든 책은 엄청난 고가인데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어서 책은 잘 만들지 않았다. 고대는 물론 중세까지도 90% 이상의 민중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소리꾼의 목소리로 들었지 결코 책으로 보지 않았다. 떠돌이 소리꾼이 동네에 나타나 한번 들려주고 떠나면, 그 재미난 이야기를 언제 또 들을 수 있을지 기약이 없었다. 심지어는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의 저자인 호메로스조차도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쓴 적이 없고, 이 동네 저 동네 떠돌아다니며 입으로 노래했던 것이다. 그런 시대에 왕의 아들이라는 금수저로 태어난 알렉산더는 그 귀한 책을 소유하는 특권을 누렸던 것이다. 미디어가 없이 무료한 날을 보내는 고대인들에게 책은 기가 막히게 재밌는 사물이었다. 독서를 극도로 싫어하는 우리 아들이 만약 고대 세계로 시간 여행을 떠났다면, 스마트폰에 빠져 사는 것보다 훨씬 심각하게 책에 중독되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알렉산더가 책을 좋아했다는 사실은 이렇게 번역해서 들어야 한다. 그는 손쉽게 책을 얻을 수 있는 특권을 가짐으로써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똑똑하게 자랄 수 있었다.

아무튼 유럽의 심각한 책 부족 현상은 15세기에 구텐베르크가 가동활자와 인쇄술을 발명함으로써 해결되었다.<사진 2> 책의 대량 인쇄가 가능해짐으로써 그전에는 책으로 옮기지 않고 단지 구전되던 시와 소설 같은 대중문학이 본격적으로 문자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바로 이것이 유럽의 역사를 뒤바꾼 전환점이 되었다.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까지 사람들은 대부분의 정보를 음성으로 들었다. 문자를 아는 지식인들조차 그랬다는 것이다. 책이 대량생산되자 책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인쇄술 발명 전까지 유럽 도서관의 책을 다 모아도 5만 권이 안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인쇄술 발명 뒤 50년의 기간 동안 유럽에서는 무려 900백만 권 이상의 책이 발행되었다. 그렇게 되면 문자를 아는 지식인들의 정보 유통 방식이 혁명적으로 바뀐다. 목소리로 듣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읽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의미를 가질까?

<사진 2> 구텐베르크가 인쇄한 성경, 1450-1456년.

귀로 듣는 소리 미디어는 시각에 호소하는 문자 미디어보다 훨씬 감정적이다. 공간을 가득 채워 귀로 들어오는 소리는 사람의 감정을 뒤흔들 수 있다. 배우는 같은 단어를 수 십 가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현대인은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문자로 읽을 때 좀처럼 감정의 동요가 일어나지 않는다. 반면에 호메로스가 노래하듯이 이야기해 주는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듣는 고대인들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울렁임은 현대인이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것을 훨씬 넘어선다. 귀로 듣는 이야기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과 마음으로 들어온다. 반면에 문자로 읽는 이야기는 가슴과 마음이 아니라 머리, 즉 이성에 호소하므로 좀처럼 감정적 동요를 일으키지 못한다. <일리아드와 오디세이> 같은 고대의 서사시는 기본적으로 음성으로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므로 현대인이 그것을 문자로 읽는 것은 마치 영상을 보지 않고 영화 시나리오를 읽는 것처럼 메마른 것이다. 이것이 청각에 호소하는 예술인 음악이 시각에 호소하는 예술인 미술을 감정적으로 압도할 수 있는 이유다. 회화는 기본적으로 그 내용을 해석할 수 있는 사전 지식과 이성을 필요로 하지만, 노래는 사전 지식 따위 필요 없이 순식간에 사람을 사로잡는다. 문자 메시지의 세계에서 이모티콘이 발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시각, 즉 이성에 호소하는 문자가 메마른 미디어이기 때문이다. 현대의 소설가가 묘사력이 뛰어난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그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문자밖에 없는데, 문자는 기본적으로 논리적 속성을 지닌다. 따라서 소설가는 가능한 한 독자가 머릿속에 생생한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도록 자세하고 섬세한 묘사력을 곁들여 독자의 감정적 동요를 일으키려는 것이다. 미디어가 덜 발달한 20세기 중후반기까지만 해도 이런 소설은 힘을 가졌다. 하지만 영상 미디어에 완전히 장악 당한 21세기의 젊은 세대들은 소설의 치밀한 묘사를 읽어낼 능력을 키우지 못한다.

음성 미디어의 또 다른 특징은 즉흥적이라는 것이다. 고대와 중세의 이야기꾼들은 처음에 정한 대로 이야기하는 법이 없다. 관객의 반응에 따라 이야기를 바꾸기도 하고, 흥분한 관객이 끼어들어 이야기가 즉흥적으로 바뀌기도 했다. 음성 미디어는 동시적이기 때문이다. 음성 미디어는 화자와 청자가 같은 장소와 같은 시간대에 있어야 소통된다. 또 음성으로 전달되는 메시지는 논리적으로 정확하지 않아도 대체로 그 맥락이 관객에게 전달된다. 아무리 훌륭한 문장가라고 하더라도 연설을 시키면 논리가 흐트러지고 비문이 쏟아지기 마련이다. 그렇더라도 청자는 소리가 갖는 풍부한 정보(소리의 높낮이와 장단, 감정)로 인해 쉽게 설득된다. 반면에 문자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면 독자는 당장 비문과 오탈자를 들춰내며 저자의 논리를 지적할 것이고, 그 문장은 설득력을 잃고 만다. 사람들은 음성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문자에 대해서는 가혹하다. 소통이 이루어지는 환경도 중요하다. 화자와 함께 하는 청자와 달리 문자를 읽는 사람은 혼자 고립된 채 읽는다. 동시성이 없으므로 다른 관객의 반응으로부터도 고립되어 있다. 그리하여 독자는 더욱 논리적으로 문장을 독해하려고 한다. 한번 쓰인 문자는 결코 즉흥적으로 바뀔 수도 없다. 탁월한 미디어 학자인 마셜 맥루언은 <미디어의 이해>에서 시각에만 호소하는 문자 미디어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각 기능을 강화하고 확장하는 표음 알파벳은 문자 내에서 청각이나 촉각, 미각 같은 다른 감각들의 역할을 빼앗는다.” 따라서 문자 문화에 속한 사람들은 대단히 차갑고 논리적으로 사고의 체계가 변화한다. 이것이 구텐베르크가 인쇄 혁명을 일으킨 뒤 유럽인에게서 일어난 변화다. 책은 순차적으로 봐야 하며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집착하도록 만든다. 문자 미디어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분석과 분류에 더 능통하여 끊임없이 개념을 만들어내고 이러한 사고체계가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킨다. 동양에서도 책은 오래전부터 존재했지만, 대량 인쇄술이 없었던 관계로 19세기가 끝날 때까지도 문자 미디어가 아닌 음성 미디어의 세계에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문자를 기반으로 한 책이라는 미디어의 특징은 움직이고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대에는 벽이 미디어로서 유력하게 이용되었다. 벽은 이동할 수 없고 소유하기도 쉽지 않다. 그에 반해 책은 이동해서 다른 지역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소유할 수 있다. 마셜 맥루언은 미디어는 “인간 감각 기관의 연장”이라고 정의한다. 그런 미디어는 끊임없이 확장하려는 속성을 가지기 때문에 결국 벽을 벗어나 종이로, 그리고 책으로 확장을 했고, 20세기에 들어와 책보다 훨씬 가볍고 빠르게 이동하는 전파 미디어인 전화기, 라디오, TV로 확장되었다. 21세기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디지털 신호를 기반으로 한 온라인 미디어 전성시대를 낳았다. 손아귀에 잡히는 미디어를 누구나 소유하고 있다. 알렉산더 대왕이 그토록 소중하게 여긴 두루마리 책의 수백만, 아니 수천만 배 이상의 정보를 언제 어디에서든지 볼 수 있다. 이렇게 완벽하게 미디어에 둘러싸인 환경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은 고대, 아니 20세기 전반기의 사람과도 완전히 다른 별개의 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태어나자마자 온라인 미디어의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태어나서 TV 정도가 가장 친숙한 미디어로 알았던 50대 이상 사람과도 별개의 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미디어는 언제나 사람의 사고체계를 바꾸기 때문이다. 미디어는 사람의 사고뿐만 아니라 디자인조차 통제한다. 새로운 미디어가 등장할 때마다 디자인은 급격하게 변화해왔다. 이 부분은 다음 호에 이야기해볼까 한다.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kshin20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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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텐실 글꼴의 통일성

The unity of stencil font

사람의 손글씨를 보면 재미있는 현상이 하나 있다. 못 쓴 글씨나 잘 쓴 글씨나 모두 글씨의 꼴이 균질하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통일성을 갖는다. 만약 한 사람의 글씨가 균질하지 않다면, 사건 현장에 남은 필적으로 범인을 찾아내는 그런 수사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또는 글씨체로 성격을 추론하는 그런 학문도 존재할 수 없다. 글씨를 잘 쓰고 못 쓰고를 떠나 사람이라면 누구나 균질한 글씨를 쓴다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인다. 사람이 글씨를 똑같은 모양으로 쓰는 것처럼 활자도 똑같은 모양으로 디자인된다. 영어로 A부터 Z까지, 한글로는 ㄱ부터 ㅎ까지 그 모양은 균질해야 한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현상이며 당연하게 받아들이므로 나는 조금 다른 형식의 글자에서 그 통일성의 지향성이 얼마나 강렬한지 살펴보려고 한다.

그 글자는 스텐실 글자다. 스텐실은 영문의 가라몬드나 헬베티카, 또는 한글의 명조체나 궁서체처럼 활자화된 서체의 종류가 아니다. 스텐실은 글자를 만드는 데만 적용되는 것도 아니다. 원래는 그림을 그리는 데 활용한 기법이다. 스텐실은 그림이 표현될 종이나 벽 위에 구멍이 뚫린 마분지나 금속, 나무와 같은 중간 매개체를 올려놓고, 구멍 안에 붓이나 스프레이로 색을 채워 그림을 그리는 기술이다. 그 구멍의 모양이 바로 그리고자 하는 그림의 내용이 되는 것이다. 그런 기술로 그림뿐만 아니라 글씨도 쓸 수 있음은 물론이다. 글씨는 그림보다 더 단순하고 명확해야 하기 때문에 많이 활용되는 것 같다. 스텐실 기법이 가장 많이 활용되는 곳은 군대다. 스텐실 글씨는 손으로 쓴 글씨와는 달리 삐뚤빼뚤 하지 않게 곧고 바르게 쓸 수 있다. 즉 군대의 성격에 맞게 절도 있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일종의 대량생산 방식이어서 똑같은 모양으로 복제하기 좋다. 스텐실의 그런 특성으로 인해 군대에서 많이 사용되었다.<사진 1>

<사진 1> 2차 세계대전 중 군용 지프차에 스텐실 기법으로 글자를 새기는 군인들.

<사진 2> 스텐실 기법에 따라 알파벳 O자를 만들고자 구멍을 내면 안쪽의 원은 표현할 수가 없다.

스텐실 기법의 묘미는 폐쇄된 글자에서 나온다. 폐쇄된 글자란 영문의 A, B, D, O, P, Q, R처럼 폐쇄된 공간(타이포그래피에서 이 공간을 카운터[counter]라고 부른다)을 갖는 글자들이다. 한글에서는 ㅁ, ㅂ, ㅇ, ㅍ, ㅎ이다. 다른 글자를 만들 때는 그냥 모양대로 구멍을 파내면 된다. 하지만 O의 경우 구멍을 파내면, <사진 2>의 왼쪽의 결과를 얻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오른쪽의 결과가 나온다. 글자의 윤곽을 살려내려면 <사진 3>에서 보는 것처럼 브릿지(bridges)와 아일랜드(islands)의 개념으로 구멍을 파내야 하는 것이다. 이 개념도를 보면 마치 글자의 윤곽은 강이고, 그 강을 건너는 다리가 있고, 그 안의 카운터 공간은 섬처럼 묘사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브릿지와 아일랜드의 존재가 바로 스텐실 글자의 묘미이자 매력이다. 스텐실 글씨는 특정한 서체가 아니므로 반드시 이 브릿지가 보여야 스텐실 글씨로 인식된다. 그에 반해 브릿지가 반드시 필요한 경우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카운터가 있는 문자들이다. 영문의 C나 E, 한글의 ㄱ이나 ㄴ은 카운터 공간이 없으므로 굳이 브릿지가 필요 없다. 영문이나 한글이나 카운터가 없는 문자가 훨씬 더 많다. 게다가 한글의 경우 모음은 폐쇄된 부분이 하나도 없다. 따라서 브릿지가 필요한 경우는 제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 3> 스텐실 기법에서 알파벳 O자를 제대로 표현하려면 획의 중간에 브릿지를 만들면 된다.

<사진 4> 스텐실로 표현한 ‘사다리차’. 폐쇄형 글자가 없어 브릿지가 없다.

<사진 5> 스텐실로 표현한 ‘기계운반설치’ 속 폐쇄형 글자에 브릿지를 넣었다.

<사진6> 폐쇄형 글자이든 아니든 브릿지를 넣어 전체적인 통일성을 살렸다.

몇 해 전 갤러리팩토리에서 열린 <툴툴툴>이라는 전시에서 일반인들이 만든 스텐실 글씨들이 출품되었다. <사진 4>는 ‘사다리차’를 홍보하는 스텐실 글씨다. 이 글자에는 폐쇄된 문자가 하나도 없으므로 브릿지도 없다. 이런 글씨는 스텐실 글씨로 느껴지지 않는다. <사진 5>는 ‘기계운반설치’라는 글자인데, 여기에서는 계, 운, 반 자에만 브릿지가 있다. 이것은 반쪽짜리 스텐실로 느껴진다. 마지막 <사진 6>의 ‘기업철강’이라는 글자에서는 모든 글자에 브릿지를 넣어줬다. 사실상 브릿지가 없어도 되는 ㄱ과 ㄹ에도 브릿지를 넣어준 것이다. 그랬더니 확실히 스텐실 글씨로 인식된다. 아쉬운 것은 ㅊ에도 브릿지를 넣었어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만약 아마추어가 이것을 디자인했다면, 그에게 미적 감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브릿지가 필요 없는 열린 문자에도 왜 브릿지를 넣었을까? 바로 균질성 때문이다. 모양의 균질성을 통해 통일된 디자인을 추구하는 것은 조금이라도 미적 감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매우 자연스러운 태도다. 미국에서 디자인된 초창기 스텐실 활자로는 미국활자주조소인 ATF가 1937년에 생산한 ‘스텐실’ 글꼴이 있다.<사진 7> 이 글꼴을 보면 A부터 Z까지 모든 글자에 일관되게 브릿지를 적용했다.

<사진7> 스텐실 글꼴, 디자인: 로버트 헌터 미들턴, 1937년.

건축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례는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역사적인 사례는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가인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가 디자인한 루첼라이 궁이다.<사진 8> 이 궁의 파사드를 보면, 8개의 벽기둥이 규칙적인 간격으로 나 있고, 기둥과 기둥 사이 벽에는 창문이 하나씩 뚫려 있어서 창문 또한 아주 규칙적인 간격으로 7개가 있다. 전체적으로 이 건물의 파사드는 대단히 규칙적이고 통일되어 있다. 이 건물이 주는 미적 가치는 바로 이런 수학적인 규칙성과 통일성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매끈한 유리 커튼월 빌딩의 멀리언 간격을 보는 듯하다. 하지만 루첼라이 궁에는 거짓이 있다. 1층에 있는 두 개 문 위의 창문은 사실 가짜다. 그 안쪽은 구멍이 뚫리지 않은 벽이지만, 디자인의 통일과 창문의 규칙적인 리듬을 살리고자 가짜로 창문 모양을 넣어준 것이다. 창문뿐만 아니라 규칙적 벽기둥 역시 진짜 기둥이 아니므로 그 안의 구조는 밖에서 보는 것과 전혀 다르다. 기둥 위에 새겨진 엔타블러처, 즉 1층과 2층, 2층과 3층을 구분하는 가로의 장식 부분 역시 건물의 실제 구조와는 무관하게 디자인된 것이다. 알레르티에게는 건물의 실체와 기능보다 눈에 보이는 미적 효과가 훨씬 더 중요한 것이었다.

<사진8> 팔라초 루첼라이, 디자인: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1446-1451년.

하지만 실체와는 무관해 보이는 미적 효과라는 것은 인간 사회에서 대단히 중요하게 작용해 왔다. 뇌과학자, 물리학자, 생물학자들은 모두 대칭의 아름다움에 대해 각자의 분야에서 과학적인 근거를 밝히려고 노력한다. 물리학자에 따르면 원은 각도를 아무리 조정해도 대칭적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따라서 원은 가장 대칭적인 형태이므로 가장 아름답다고 말한다. 원과 비슷하게 대칭적인 기하학의 형태는 정사각형이다. 하지만 정사각형은 90도, 180도, 270도, 그리고 360도로 회전했을 때만 대칭성이 유지된다. 그 외의 각도에서는 대칭이 깨지며 불안정해 보인다. 다른 도형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그토록 완벽하게 대칭적인 원은 어떤 이익을 가질까? 원은 엔트로피 법칙이 지배하는 우주에서 에너지를 가장 덜 쓰면서 움직일 수 있는 형태다. 말하자면 가장 단순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가장 단순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파악하는 데도 에너지를 덜 쓴다. 엔트로피 법칙에 따르면 모든 생명체는 에너지를 덜 쓰도록 프로그래밍되었으므로 원은 아름답게 판단되는 것이다. 생물학자에 따르면 모든 동물들, 특히 새와 인간은 대칭적인 배우자를 선호하도록 프로그래밍되었다. 대칭이 그 배우자의 건강과 자질을 증명하는 지표로 쓰인다는 것이다.

<사진9> 스텐실 글자처럼 디자인한 빵집 간판.

이 대칭성이라는 것은 규칙성과 통일성, 균형의 다른 이름이다. 대칭이라는 것은 오른쪽과 왼쪽, 위쪽과 아래쪽이 똑같다는 뜻인데, 그것은 모든 것이 통일되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스텐실 글씨가 카운터가 있건 없건 모든 글자에 브릿지를 넣어주는 것, 그리고 알레르티가 벽에 구멍이 있건 없건, 건물 내부의 구조가 어떻든 간에 건물의 파사드에 시각적인 규칙성과 통일성을 부여하는 것은 똑같이 대칭을 만들고자 하는 태도의 발현인 셈이다. 나는 내가 사는 동네 빵집의 간판을 보면서 감탄한 적이 있다.<사진 9> 빵이라는 글자가 있는데, 옆으로 넓게 퍼진 받침 ㅇ에 브릿지를 넣어 스텐실 글자처럼 보이게 했다. 그렇다면 쌍자음 ㅃ의 닫힌 공간에도 브릿지를 넣어주어야 통일성이 있는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 간판은 스텐실을 채택한 것이 아니다. 이 글자를 보면 상당히 볼드해서 ㅂ의 속 공간의 면적이 아주 작은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렇게 폭이 좁은 공간에 또다시 브릿지를 넣는 건 복잡성을 높일 뿐이다. 스텐실 글자를 만들 의도가 없었는데, 왜 ㅇ에는 브릿지를 넣어주었을까? 그것은 가운데 ㅂ자 속 공간의 얇은 흰색 배경의 수직적 연속으로 ㅇ에도 길을 터준 것이다. 또한 이 글자는 쌍ㅃ의 ㅂ과 ㅂ사이, 그리고 가운데 ㅂ과 ㅏ사이에 동일한 간격의 흰색 배경 공간이 있다. 이것과 동일한 성질을 받침에도 균질하게 넣어준 것이다. 이것은 디자이너가 빵이라는 글자의 위아래를 대칭적으로 만들어주고자, 다시 말해 규칙성과 통일성을 적용하고자 디자인한 것이다. 스텐실 글자를 만들고자 한 결과가 아니다. 사실 ㅇ에 넣은 흰색 길(브릿지)이 없어도 가독성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사람이란 이처럼 무의식적으로 대칭과 균형의 강박에 시달리도록 프로그래밍된 것이다. 통일성을 지향하는 디자인은 그러한 프로그래밍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kshin20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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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 기표

Signifier of freedom

얼마 전에 머리를 잘랐다. 원래 자르던 곳이 있었는데, 거리가 좀 멀다 보니 귀찮아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에 가서 깎았다. 처음 가는 미장원은 늘 불안하다. 아니나 다를까 남자 이발사가 처음부터 줄곧 바리캉으로 머리를 밀어버린다. 원래 가던 곳의 이발사는 가위로 섬세하게 자르는데 말이지. 참 편리하게도 깎는구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래도 머리를 맡겼으니 중간에 그만둘 수도 없고. 머리를 다 깎은 모습을 보니 영락없는 호섭이 스타일이다. 집에서 아내가 보더니 호섭이 머리라며 놀린다. 그러면서 아들한테 “아빠가 호섭이 머리 됐다”고 말한다. 아들의 반응은 “호섭이가 누구야?”다. 아들은 호섭이를 모르기 때문에 호섭이 머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 아들의 반응을 유식한 말로 표현하면, 아들에게 ‘호섭’이라는 이름은 ‘기의’로 다가가지 않는 순수한 ‘기표’다.

스위스의 언어학자인 페르디낭 드 소쉬르는 기호를 기표와 기의로 나누었다. 기표(記標)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일종의 매개이고 형식이다. 소리가 대표적이다. 나무를 지시하기 위해서는 ‘나무’라는 소리를 내야 한다. ‘나무’라는 그 소리가 바로 기표다. 기의(記意)는 ‘나무’의 의미와 개념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나무라는 기호에는 ‘나무’라는 ‘소리’와 그 소리가 지시하는 나무의 ‘개념’이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20세기의 많은 철학자와 예술가들이 이 기표의 개념을 확대했다. 기표는 소리뿐만 아니라 문자이기도 하고 이미지이기도 하며 어떠한 대상이 되기도 한다. 나무를 그린 그림도 그것은 진짜 나무가 아니라 나무를 지시하는 기표다. 기표와 기의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그림이 르네 마그리트가 그린 <이미지의 배반>이다.<사진 1> 파이프를 그려 넣은 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써 놓았다. 진짜 파이프가 아니라 파이프를 지시하는 기표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사진 1> 「이미지의 배반」 르네 마그리트, 1929년

이 그림 속의 글, 즉 문자도 기표다. 나는 사실 불어를 알지 못하므로 그 기표는 의미로 와닿지 않는다. 마치 ‘호섭이’라는 기표가 아무런 의미작용을 하지 않는 아들의 머릿속과 같다. 기표가 특정한 의미로 닿지 않는 상태에서 그 기표는 순수한 기표가 된다. 외국인들이 많아진 오늘날 특정 지역에 가면 조금도 짐작할 수 없는 문자로 쓰인 간판을 가끔 본다. 그 문자가 나에게 전혀 기호가 될 수 없는 이유는 의미작용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머릿속에 연상되는 기의가 전혀 없으므로 나에게 그 문자는 순수한 기표로만 존재한다. 그렇게 의미작용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기표는 나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펼쳐 보여준다. 내 마음대로 상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낯선 대상에 대해서는 고정관념을 가질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알 수 없는 그 문자는 나에게서만큼은 기의를 지시할 의무로부터 해방된 상태, 자유의 기표다.

어떤 대상을 기의로부터 해방된 기표, 자유의 기표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창조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대상에 따르기 마련인 의미가 사라진 상태이므로 그 대상에 대한 고정관념도 없기 때문이다. 기표가 기의로 가닿지 않을 때 사람이 얼마나 상상력이 풍부해지는지 잘 보여주는 소설이 있다. 안톤 체호프의 단편 소설 <굴>이 그것이다. 모스크바로 올라와 일자리를 찾지만 몇 달 동안 굶주린 부녀가 있다. 어느 날 아버지는 구걸을 시작하고 어린 딸은 식당 창문에 쓰인 ‘굴(러시아 발음으로 Ústritsy)’이라는 글자를 발견한다. 그런 단어를 태어나서 처음 본 소녀는 그것이 식당 주인의 이름인지 의심해본다. 아버지에게 물어보니 ‘바다 생물’이라는 답변에 상상의 나래를 펴기 시작한다. 굴이라는 놈을 재료로 만든 각종 요리를 상상한다. 굴 요리 냄새가 나기 시작하고, 그것을 맛있게 먹는 환상에 사로잡힌다. 그러다가 아버지에게 굴 요리에 대해 물어보니 굴은 딱딱한 껍질 속에 들어있고, 산 채로 먹는다는 말에 실망하고 만다. 맛있는 요리에 대한 환상이 갑자기 사라지고 징그럽게 생긴 바다 생물을 상상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배고픔 때문에 소녀는 이내 눈과 이빨과 발이 달린 생물, 상상 속 굴을 먹는 환상에 빠져든다.

어린아이의 머릿속에서 순수한 기표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아이들은 흔히 대상을 자기 마음대로 바꿔 노는 환상에 빠진다. 스스로를 바람이 되거나 기차가 되는 상상을 하며 논다. 아주 드물게 어른이 되어도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화 <길>의 주인공 젤소미나가 그런 사람이다. 젤소미나는 어린아이들을 즐겁게 해주는 재주가 있다. 들판에서 한 아이가 자신을 따라다니는 걸 눈치챈 그녀는 소녀를 즐겁게 해주기로 한다. 큰 가지 하나가 옆으로 길게 뻗은 나무 한 그루를 보고 젤소미나는 자신의 팔을 뻗어 나무 흉내를 낸다.<사진 2> 그걸 본 아이가 까르르 웃는다. <길>에서 이 장면은 어른인 젤소미나가 여전히 맑고 순수한 영혼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고정하지 않고 나무로 변신하는 것, 또 나무를 보고 팔을 뻗은 사람으로 상상하는 것, 두 가지 모두 어린아이처럼 주체와 대상을 순수한 기표로 보는 태도 또는 주체와 대상을 고착된 기의로 보지 않는 태도에서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 2> 「길」 페데리코 펠리니, 1954년

예술가들은 젤소미나의 태도를 지닌 직업인이라고 볼 수 있다. 대상을 해방된 기표로 보는 ‘유연한’ 눈을 가진 사람인 것이다. 피카소의 <황소의 머리>라는 작품은 자전거 안장과 손잡이로 구성되었다.<사진 3> 피카소가 자전거 안장과 손잡이를 자유로운 기표로 보았다는 걸 보여준다. ‘안장’이라는 기표를 ‘자전거를 타는 사람의 엉덩이를 받치는 좌석’이라는 기의로 절대화한다면 안장의 변신 가능성, 그것의 창조적 잠재성은 소멸되고 만다.

<사진 3> 「황소의 머리」 파블로 피카소, 1942년

<사진 4> 「메차드로(Mezzadro)」 아킬레 카스텔리오니, 1957년

<사진 5> 「아르코(Arco)」 아킬레 카스틸리오니, 1962년

자유로운 기표가 가진 변신 가능성을 활용하는 건 디자인의 세계에서도 흔히 발견된다. 이탈리아의 아킬레 카스틸리오니가 이런 태도를 가진 대표적인 디자이너다. 그가 디자인한 메차드로는 트랙터의 좌석과 휘어진 막대기, 그리고 나무 받침대를 결합해 스툴을 만들었다.<사진 4> 그가 디자인한 스툴 역시 기존의 스툴과 너무나 다른 모습이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스툴처럼 보이지 않게 한다. 즉 이 스툴 역시도 기의로 잘 가 닿지 않는 기표인 셈이다. 카스틸리오니는 그렇게 정체성이 분명하지 않은, 즉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모호한 디자인을 잘 한다. 그가 디자인한 아르코라는 램프가 있다.<사진 5> 이 램프는 플로어 램프인지, 펜던트인지, 테이블 램프인지 그 범주가 명확하지 않다. 이러한 모호성은 기표를 고착된 기의로 확정하지 않음으로써 사람들을 혼란하게 만든다. 낯섦, 이것은 창조적인 예술가와 디자이너들이 추구하는 목표 가운데 하나다. 낯섦이란 해방된 기표, 자유로운 기표의 다른 이름이다.

반면에 그러한 모호함보다 확고한 질서를 추구하는 사람들도 많다. 기표는 하나의 기의로 반드시 고착되어야 한다는 태도를 지니는 것이다. 그런 태도를 보수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문신을 생각해 보자. 문신이라는 기표는 오랫동안 ‘범죄자’, ‘야만인’이라는 기의로 곧장 날아갔다. 영화에서 흔히 목욕탕 신에 등장하는 문신한 몸은 조폭을 뜻하는 클리셰다. 하지만 최근 문신은 ‘스웩’이 되었다. 고착된 기표와 기의를 강요하는 보수주의는 새로움을 창조하기 힘들다.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고착되는 것은 지식이 늘어나기 때문이며, 그런 태도를 가진다는 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 세상을, 이 세상의 그 수많은 대상을 순수한 기표로 바라본다는 건 불가능하다.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일종의 사회적 약속이므로 이것을 알아야 사회생활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상을 순수한 기표로 바라본다는 건 노력을 필요로 한다. 창조적이 된다는 건 억지로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로 만드는 것이다. 억지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런 태도를 갖는 사람은 축복을 받은 셈이다.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간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kshin20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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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는 크기를 따른다

Shape follows size

미국의 진화 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는 내가 알고 있는 생물학자 중 건축과 디자인에 대해서 가장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쉽지 않은 생물학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종종 건축을 비유의 대상으로 끌어온다. <다윈 이후>라는 그의 저서에 실린 21장 ‘크기와 형태’에 그런 비유가 등장한다. 크기와 형태는 마치 기능과 형태의 관계처럼 법칙이 있다. 크기가 작거나 크면 형태는 그 크기에 제약을 받아 변형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공상과학 영화에서 나오는 것처럼 인간이나 동물이 엄청난 크기로 확대되더라도 그 형태와 비례를 그대로 유지한 채 커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주 작은 생명체들을 보라. 개미나 모기, 파리 등의 다리를 보면 무척 가늘다. 하지만 개미는 자기보다 큰 나뭇잎을 그 가느다란 다리로 거뜬히 든다. 이는 입체 기하학의 원리를 따르는 것이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이렇게 말한다. “필연적으로 그들(동물)은 자신들의 크기에 가장 적합한 형태를 취하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이 아주 작은 크기로 축소되면 인간의 팔다리 역시 지금과는 달리 무척 가냘프게 가느다라진다는 이야기다. 반면에 코끼리 같은 큰 동물을 보면 다리가 무척 두껍다. 이 또한 입체 기하학의 원리를 따른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아주 큰 크기로 확대되면 인간의 팔다리 역시 코끼리만큼이나 두꺼워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연민을 자아내게 가느다란 팔다리를 가진 인간이나 부담스러울 정도로 두꺼운 팔다리를 가진 인간이라면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입체 기하학의 법칙은 크기와 형태의 관계를 규정한다. 물리법칙에 따르면 입체적인 물체의 크기가 커지면 부피도 늘어나고 표면적도 늘어나지만, 표면적은 부피의 팽창만큼 늘어나지는 않는다. 직육면체를 예로 들어보자. 직육면체에서 면적의 크기는 x축과 y축을 곱해서, 즉 제곱으로 산출되지만, 부피의 크기는 x축과 y축에 더해 z축이 추가되어 세제곱으로 산출된다. 따라서 직육면체의 크기가 확대되면 부피가 늘어나는 양은 면적이 늘어나는 양보다 많다. 굴드의 표현을 빌리면 “부피는 면적보다 더 빨리 늘어난다.” 그러니까 아주 작은 생명체들은 상대적으로 부피에 비해 표면적이 크고, 아주 큰 생명체들은 상대적으로 부피에 비해 표면적이 작다.

이는 살아있는 동물의 모양과 형태에 큰 영향을 미친다. 부피에 견주어 상대적으로 표면적의 비율이 높은 곤충들은 중력의 영향을 덜 받는다. 만약에 곤충이 똑같은 모양과 형태 그대로 커진다면 이제는 반대로 부피에 비해 표면적의 비율이 지나치게 작아진다. 그렇게 되면 중력을 피할 수 없는데, 그런 모양대로라면 서 있는 것조차 불가능해진다. <콩: 스컬 아일랜드>라는 SF영화에는 공룡만큼 거대한 거미가 등장하는데, 다리가 대나무 굵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사진 1> 영화 속 거대 거미는 자연 속의 작은 곤충인 실제 거미와 모양이 똑같다. 이런 상상력은 과학적으로 전혀 근거가 없다. 거미의 크기가 그렇게 거대해지면 대나무보다 수십 배 더 굵은 다리를 가져야 겨우 서 있을 정도가 된다. 이 원리를 발견한 사람은 갈릴레오다. 굴드는 갈릴레오의 이론은 이렇게 요약한다. “큰 동물의 뼈가 작은 동물의 가느다란 뼈와 상대적으로 같은 힘을 내기 위해서는 단순한 비례 관계 이상으로 굵어져야 한다.”<사진 2> 이것이 코끼리 다리가 두꺼운 이유다. 그런 법칙에 따라 거미가 코끼리보다 커지려면 거미는 가느다랗고 긴 다리를 포기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더 이상 거미가 아니고, 관객들에게 흥미를 줄 수 없을 것이다. 영화는 늘 과학과 실제를 무시함으로써 흥행을 유지해왔다.

<사진 1> 영화 <콩: 스컬 아일랜드>에 나오는 거대 거미

<사진 2> 크기와 형태의 관계를 표현한 갈릴레오의 그림

굴드는 이런 입체 기하학의 원칙이 생명체뿐만 아니라 건축에서도 확인된다고 말한다. 중세 성당이 바로 그것이다. 유럽에서 성당은 11세기 이후에 극적으로 커졌다. 성당이 커지면 동물의 경우처럼 표면적과 부피의 관계가 발생한다. 성당의 내부 공간은 세제곱으로 늘어나는 반면, 창문을 만들어 빛을 끌어들이는 벽의 면적은 공간의 부피와 같은 비례로 늘어나지 않으므로 상대적으로 따지면 줄어드는 셈이다. 이는 내부 공간의 빛 부족 현상을 낳는다. 중세 건축가들은 성당의 크기를 키울수록 성당 내부가 굉장히 어두워진다는 현실을 직시했을 것이다. 내부를 밝게 하려면 창문의 면적을 늘려야 한다. 창문의 면적을 늘리려면 표면적 자체가 늘어나야 한다. 하지만 표면적을 늘리면 부피도 함께 늘어나는 문제가 생긴다. 해결 방법은 건물의 폭은 좁게 하고, 길이를 늘리는 것이다. 폭이 좁은 만큼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은 건물의 중심부까지 이를 수 있다. <사진 3>

<사진 3> 폭이 좁고 길이가 137미터에 이르는 노리치 성당의 평면도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창문을 더 늘리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트랜셉트(transept)다. 트랜셉트는 성당을 위에서 보았을 때 라틴 십자가처럼 보이게 한다.<사진 4> 트랜셉트 디자인은 신학적 상징이 더 큰 목적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창문이 늘어나는 효과를 보았다. 또한 동쪽 벽에 여러 개의 반원형 앱스(apse)를 추가하는데, 이 앱스 역시 더 많은 창문을 추가해 준다.<사진 5> 마치 서양 주택의 코너 타워나 퇴창처럼 창의 면적을 늘려준다. 작은 앱스들 역시 표면적으로는 신학적인 목적으로 만들었겠지만 빛 부족이라는 문제를 해결해 준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작은 성당에는 트랜셉트나 추가된 앱스가 거의 없다고 한다. 성당 건물의 크기가 커지면 형태도 변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진 4> 중세 성당의 트랜셉트 부분

<사진 5> 부르주 대성당의 앱스. 건물에서 튀어나와 있다.

중세 성당, 특히 고딕 양식에서 나타난 버트리스(buttress) 역시 크기와 관련된 문제라고 할 수밖에 없다. 건물이 높아지면서 벽체가 엄청난 압력을 받게 되었다. 그것을 해결하려면 벽 또는 기둥을 받치는 외부 구조물인 버트리스가 도입되어야 한다. <사진 6> 고딕 성당에서는 더 많은 빛을 끌어들이고자 엄청나게 큰 스테인드글라스가 벽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스테인드글라스는 하중을 견뎌낼 구조가 아니므로 스테인드글라스 사이에 있는 기둥에 하중이 집중되고, 건물은 붕괴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에 따라 그 하중을 분산시키는 버트리스의 존재는 필연적인 것이 된다. 동물의 크기가 커지면 세제곱으로 늘어난 부피의 무게를 견디도록 굵은 다리를 가지게 되는 것처럼 크고 높아진 성당은 버트리스라는 구조물을 갖게 된 것이다. 그 구조물이 필연적이라는 점에서 더욱 형태는 크기에 따라 변형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사진 6> 파리 노트르담 성당. 건물 벽의 기둥 부분에 버트리스가 연속해서 붙어 있다.

<사진 7> 에릭슨 베이클라이트 전화기, 디자인: 장 하이베르크, 1931년. © Holger.Ellgaard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예술비평가 조르조 바사리는 이런 고딕 양식을 무질서하고 혼란스러운 것으로 비평했다. 실용적인 공간의 확보를 위해 부차적인 구조물이 지나치게 비대해진 것을 비난한 것이다. 근대에 들어서서 공학기술의 눈부신 발전으로 크고 높은 건물을 지으면서 부가적인 구조물을 더 이상 만들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또한 전기 조명 기술로 인해 건물의 폭을 좁게 할 필요도 없어졌다. 크기가 커지면 따를 수밖에 없는 제약들이 사라진 것이다. 직육면체의 매끈한 초고층 마천루를 보면 인간이 자연의 법칙으로부터 벗어나 조형의 자유를 성취하고자 얼마나 각고의 노력을 했는지 깨닫게 된다.

이것은 인공적인 사물에서도 나타난다. 과거의 전화기는 인간의 얼굴을 배려했다. 20세기 전화기의 표준을 만든 사람은 노르웨이의 장 하이베르크나 미국의 헨리 드레이퍼스다. 그들이 디자인한 전화기의 송수화기는 사람 입과 귀의 위치, 그리고 손의 크기를 고려해서 디자인한 것이다.<사진 7> 이 전화기는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명제를 잘 실현시켰다. 하지만 디지털 기술의 눈부신 발전은 얇고 매끈한 직육면체로 전화기의 표준을 바꿔버렸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명제가 무색해졌다. 때때로 인간은 자연의 법칙으로부터 벗어나 무중력의 공간에, 또는 진공상태의 공간에 자신의 문명을 세우려는 무모한 욕망을 고집스럽게 실현하고자 한다. 이들은 대체로 완고하게 질서를 고집하고, 이 세상에는 완벽한 비례와 아름다움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조형을 적당히 자연의 법칙에 내맡겨도 되는데 말이다.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kshin20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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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변통의 창조성

Impromptu creativity

<사진 1> 옷걸이를 변형해 실내화 걸이로 만든 임시변통

집 안에 있는 실내화가 늘 문제였다. 신지 않는 동안 실내화는 자기 자리를 잘 찾지 못한다. 거실 여기저기, 방안 여기저기에 굴러다니기 일쑤다. 시각적으로 보기 불편하다. 무엇보다 진공청소기를 돌릴 때 이놈의 실내화들이 늘 걸리적거린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실내화 걸이가 나타났다. 정식 걸이는 아니다. 아내가 옷걸이를 약간 변형해서 실내화 걸이로 용도를 변경한 것이다.<사진 1> 그걸 보니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 엄마 방에 있는 전등은 잡아당길 수 있는 얇은 끈이 켜고 끄는 기능을 담당했다. 그 끈은 일종의 공중에 매달린 스위치다. 끈의 길이는 일어나야 비로소 잡을 수 있는 정도였다. 그런데 엄마는 다리가 아파서 일어나기가 몹시 불편했다. 그래서 그 스위치 끈의 끝에 기다란 실을 달아 길이를 연장해 누워서도 잡을 수 있게 했다. 앉거나 누워서도 전등 불을 켜고 끌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제조업체가 정식으로 생산한 것이 아니라 일반인이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사물을 이용해 특별한 목적을 실현하는 것을 ‘임시변통’이라고 한다. 임시변통의 사전적 의미는 “갑자기 터진 일을 우선 간단하게 둘러맞추어 처리함”이다. 이런 사례들은 주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것으로 도로의 지정주차구역에 다른 차가 함부로 주차하지 못하도록 막는 플라스틱 대형 물통을 들 수 있다.<사진 2> 이 물통은 휘발유를 담는 용기에서 유래해 지금은 업소용 세제, 간장 등을 담는 용기로 사용된다. 사용이 끝난 뒤 물이 채워져 주차를 막는 방해물로 임시변통되는 것이다. 최근에 개봉된 영화 <모가디슈>에서는 자동차가 총격을 받는 것을 대비해 차의 표면을 책으로 뒤덮어 보호막으로 임시변통했다.<사진 3>

<사진 2> 대형 물통에 물을 채워 주차장 방해물로 임시변통했다.

<사진 3> 책과 문짝을 승용차 방탄재로 임시변통한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그러고 보니 책은 빈번하게 임시변통되는 대표적인 사물이다. 책의 목적은 정보를 담고, 사람에게 읽히는 것이다. 집안에는 많은 책이 있기 마련이고, 그 책들은 대개 읽히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이 때로는 냄비받침으로 쓰이거나 부러진 테이블의 다리를 대체하는 용도로 임시변통되더라도 그리 나쁠 것은 없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사람들이 어떤 사물을 보고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라면을 끓여서 바닥에 놓고 먹고 싶은데, 바닥재가 상하지 않게 뭔가를 받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주변을 살펴보는데, 두툼하고 냄비보다 조금 큰 크기의 책이 눈에 띈다. 주저하지 않고 냄비받침으로 쓴다. 이런 임시변통이 실현되려면 어떠한 의식이 있어야 한다. 갑작스럽게 어떤 일을 원만히 처리할 도구가 필요하다는 걸 인식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미룰 수 없이 당장 해결되어야 한다. 그런 의식 상태에서 사람은 매우 창조적으로 변화한다. 마감이 다가오면 극도로 머리를 굴리는 현상과 비슷하다. 그 창조의 힘은 특정한 용도의 사물에서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예전에 이를 주제로 드라마도 만들어졌다. <맥가이버>가 그것이다. 이른바 ‘맥가이버칼’이라고 부르는 스위스 아미 나이프는 임시변통의 아이디어를 좀 더 정제해서 상품화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사진 4>

<사진 4> 맥가이버칼’로 알려진 스위스 아미 나이프는 임시변통을 정제한 것이다.

책을 냄비받침으로 쓸 때 책에서 발견하는 사물의 가능성은 책의 평평한 면이 뭔가를 올려놓기 쉽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툼한 두께가 냄비의 열을 차단한다. 책을 총알을 막는 보호막으로 사용할 때도 그 사물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원시 인류가 날카로운 모서리를 가진 돌을 발견하고 그것을 고기의 가죽을 찢는 칼로 사용한 것 역시 사물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이다. 시간이 흐르자 인류는 아예 둥근 돌에서 날카로운 모서리를 만들기로 한다. 이때 돌은 다른 기능을 가진 세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칼로 이용될 돌이고, 하나는 칼을 다듬는 돌이며, 마지막으로 칼이 될 돌을 올려놓는 평평한 면을 가진 모루돌이다. 원시 인류는 서로 다른 돌의 모양을 보고 각각의 용도에 맞는 돌로 선택했을 것이다. 인류는 엄청난 기술 문명을 발전시켰는데, 그 시작은 바로 이런 미천해 보이는 도구들이다. 도구 창조의 원동력은 사물에서 어떤 가능성을 보는 능력이며, 그것이 바로 오늘날 현대인들도 늘 하는 임시변통이다.

임시변통의 중요성을 역설한 사람은 영국의 건축비평가인 찰스 젠크스다. 그는 임시변통에 해당되는 영어인 ‘makeshift’라는 단어 대신 라틴어인 ‘애드호크(ad hoc)’라는 용어로 예술, 디자인, 건축 분야에서 나타나는 창조적인 즉석 제작을 설명한다. 라틴어 애드호크는 “특별한 필요와 목적을 위하여”라는 뜻이다. 이 세상 어떤 인공적 사물이 특별한 필요와 목적을 위하지 않고 태어났겠나? 하지만 애드호크에서 젠크스가 강조하는 것은 ‘속도’와 ‘실용성’이다. 속도란 최적의 재료와 정제된 기술을 기다릴 시간적, 금전적 여유가 없기 때문에 주변에 이미 존재하는 사물을 급하게 이용하고 에너지를 아낀다는 점에서 ‘경제성’을 뜻한다. 실용성은 너무 평범해 보인다. 모든 인공적인 사물이 실용적이지 않느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개 공장에서 생산된 정제된 물건들은 실용성과 함께 상징성도 지니고 있다. 즉 그 물건을 소비할 타깃층에 맞게 재료와 형태, 색상과 질감이 섬세하고 세련되게 디자인된다. 그런 점에서 순수하게 실용적인 것은 아니다. 애드호크는 오로지 사물의 기능적 목적만을 지향한다.

<사진 5> 병원의 이동용 수액걸이와 좌석을 결합해 움직이는 스툴로 만들었다.

내가 시장에서 발견한 스툴을 예로 들어보겠다.<사진 5> 이 애드호크적 임시변통의 사물은 앉은 채로 이동할 수 있는 스툴이다. 이 스툴은 병원에서 환자들이 사용하는 이동용 수액걸이의 바퀴 달린 받침대, 그리고 다른 의자의 좌석을 결합했다. 그 결합 상태가 거칠고 조잡하다는 점에서 이 이동용 스툴은 순수하게 목적 지향적이며 실용적이다. 이렇게 애드호크적인 사물들은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물들이 결합해 특정한 목적을 이룬다. 재빠르게 목적을 실현했으므로 깔끔하고 매끄러운 마감 상태를 보이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임시변통과 애드호크는 아름다움에 대해서 대단히 관대하다.

<사진 6> 강철 파이프를 용접해 많은 짐을 실을 수 있도록 했다.

<사진 7> 좌석 위에 캐노피를 달았다.

<사진 8> 많은 철판이 결합돼 삼륜차로 변신한 오토바이

이러한 임시변통과 즉석 제작의 사례는 동대문종합시장 주변에 널려 있는 배달 오토바이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한 번에 많은 물건을 싣고자 짐을 싣는 뒷좌석의 받침대에 강철 파이프를 여기저기 거칠게 용접해서 높이와 길이를 연장했다.<사진 6> 어떤 오토바이는 비가 오는 것에 대비해 캐노피를 달았다.<사진 7> 어떤 오토바이는 아예 삼륜차처럼 개조하기도 했다.<사진 8> 애드호크적 조합이 매우 다양하다. 이것은 운전자가 자기 경험에 비추어 특별한 목적을 실현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오토바이 제조사가 이러한 다양한 요구를 모두 수용해 각기 다른 오토바이를 생산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제조사는 언제나 이윤을 위해 표준 모델을 생산한다. 거기에 더해 특별한 목적을 수용해 개조하는 것은 소비자의 몫이다. 소비자는 이를 위해 큰돈을 들일 수 없으므로 그 결합상태는 조잡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것은 소비자 주권의 능동적인 디자인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옷걸이에서 실내화 걸이의 가능성을 보는 눈과 일반 오토바이를 배달에 최적화되도록 개조하는 임시변통에는 공통점이 있다. 이 능동적인 소비자들은 사물의 가능성에 대해 열린 태도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특정 기능에 대응하는 영구적인 형태가 존재한다고 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 바로 그 점에서 창조적이다. 인류 문명의 진화 역시 이러한 태도가 만든 임시변통의 축적 과정이다.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kshin201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