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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제일교회

Chungdong First Methodist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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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마을 1930년대 근대도시 아파트, 충정 아파트

Disappearing village
Chungjeong Apartment, a modern urban apartment in the 1930s

서대문 충정로의 고층빌딩들 사이로 2020년 12월 넷플릭스에서 개봉된 화제의 작품 ‘스위트홈’의 촬영지인 녹색의 오래되고 낡은 건물이 눈에 띈다.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3가 250-5의 충정 아파트는 건축물대장이 발견되기 전 한때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라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지만, 1937년 8월 29일 준공된 1930년대 근대도시 아파트이다. 건립자인 도요타 다네오의 이름을 따서 도요타아파트로 불렸다. 지상 1층 지상 4층으로 철근 콘크리트 조의 52세대 임대아파트였다. 그 당시에도 상하수도는 물론 수세식 화장실과 응접실, 거주민을 위한 식당, 중앙집중식 난방, 샤워실 등을 갖춘 최신 아파트였다. 1940년에 당시 아파트들이 호텔로 업종을 변경했듯 이곳도 호텔로 바뀌기도 했다. 해방 이후 귀국 동포들이 잠시 사용하다가, 한국전쟁 중에는 북한군 인민재판소가 설치되어 지하에서 많은 양민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 곳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전쟁 후 미군 전용인 트레머호텔(Traymore Hotel)로 사용되었고, 여기에는 CIA의 합동고문단 본부가 함께 있었다.
5.16 군사 정변 이후 전쟁에서 여섯 명의 아들이 전사했다는 김병조라는 인물이 공로를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이 호텔의 영업권을 불하받아 한 개층을 불법 증축하여 코리아관광호텔을 열었다. 하지만 다섯 달 후 허위사실로 밝혀져 구속되고, 코리아관광호텔은 1962년 11월 23일 자로 문을 닫고 그 후 정부의 공매를 거쳐 1967년 다시 주거용 아파트인 유림 아파트로 전환되어 입주자들에게 분양됐고 1975년 충전아파트로 이름이 바뀌었다. 여기서 불법으로 증축된 5층 부분도 분양되면서, 5층 거주자들과의 갈등으로 1979년 도시계획도로 확장공사 당시 새 건물을 짓지 못하고 건물 전면의 7~8미터를 철거하면서 대지의 모양대로 비정형에 가까운 원형은 겨우 유지했다. 하지만, 도로에 접한 전면부는 아치형의 출입구와 전면계단 등이 잘려나가면서 전면의 디자인적인 요소가 사라져서 지금의 촌스러운 전면과 출입구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고, 세대수도 19가구가 사라졌다.
2008년 도시환경정비구역으로 재개발 대상이 되었으나, 원 거주민과 1979년 건물철거 때 공용구간 무단 점유 세대, 그리고 불법 증축의 5층에 거주하는 가구주 간의 갈등으로 재개발이 무산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아파트로 공인하여 문화재 지정도 추진했지만, 이미 E등급 안전진단 상태여서 지정이 무산되었다가 2022년 06월 15일 서울시 제7차 도시계획위원회에서 마포로 5구역 정비계획안이 수정이 가결되면서 철거가 결정되었다. 대신 같은 위치에 충정 아파트의 역사성을 담은 공개공지를 조성하기로 결정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충정 아파트는 격정의 시대들을 거쳐오면서 여러 용도로 사용되었고 원래의 모습이 잘리어 나가고 변형되었지만,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시대별 건축 자료들과 그 시대 거주민들의 삶의 흔적들은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역사적 무게감을 가지고 있다.

경성아파트(줄행랑)
1930년대부터 경성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나서 이전의 두 배인 40만 명대가 되었고, 1940년대에는 100만 명대가 되기도 했다. 이로 인하여 심각한 주거 문제가 발생했다. 1930년대부터 조선에 소개되기 시작한 아파트는 주택의 형태를 갖춘 세놓는 장기 숙박임대업 형식으로 1~4층의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아파트를 세놓는집이라 부르기도 하고, 내부가 복도형식으로 되어있어 줄행랑이라고도 불렸다. 1930년대 경성을 비롯한 각 도시에 있었던 아파트는 조선에 주재하는 직원을 위한 사택과 기숙사. 또는 조선에 체류하는 일본인에게 임대할 목적으로 모두가 일본인에 의해 지어졌고 운영되었다. 그 당시 이런 곳은 경성에만 70여 곳으로 추정되나 형태나 규모 등의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으며, 어느 정도 자료를 확인할 수 있고 실제 존재하는 곳은 12곳 정도이며, 현존하는 곳은 7곳이 있다(참고 자료: 『경성의 아파트』, 박철수 외, 도서출판 집).

현존하는 경성아파트
1. 미쿠니 아파트 1930 남산동 1가 지상 3층 벽돌조 사원 숙소 6호
2. 취산 아파트 1936 회현동 2가 지하 1층 지상 3층 철근콘크리트조 46호 (1967년 두 개 층 증축)
3. 도요타 아파트 1937 충정동 3가 지하 1층 지상 4층 철근콘크리트조 52호 (1962년 한 개 층 증축)
4. 황금 아파트 1937 을지로5가 지하 1층 지상 2층 벽돌조
5. 청운장 아파트 1938 회현1동 지하 1층 지상 5층 철근콘크리트조
6. 적선 하우스 1939 적선동 지상 3층 철근콘크리트조
7. 국수장 아파트 1940 인현1동 지하 1층 지상 2층 목조
현존하는 7개의 아파트 중 미쿠니 아파트와 도요타 아파트, 황금 아파트, 국수장 아파트는 현재도 주거시설로 사용 중이고 나머지는 다른 용도로 사용 중으로 원래의 모습을 온전히 갖추고 있는 곳은 미쿠니 아파트 한 곳뿐이다(참고 자료: 『경성의 아파트』, 박철수 외, 도서출판 집).

중정(中庭)
1930년대 아파트는 모두가 복도식으로 구성되었으며 중복식도 많이 있었다.
충정 아파트는 독특하게 중정을 가진 복도식 아파트였다. 대지가 비정형 형태라서 나올 수 있었던 결과다. 하지만 1979년 도로 확장으로 건물 일부가 철거되는 과정에서 자기 집 일부가 허물어져 전용면적이 줄어든 주민들이 공용공간인 복도와 계단실 중정을 점유했다. 다른 주민들의 반발로 일부는 철회됐지만 107제곱미터였던 중정의 면적이 2/3로 줄었다. 지금의 중정 모습은 이때 만들어졌다. 그 당시의 아파트 자료들이 없어 최초의 중정 모습을 확인할 수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역동의 시대를 내다보았을 85년의 세월이 묻어있는 창문

철골 보 / 굴뚝
1962년 5층을 불법 증축하여 코리아나호텔을 만들 때 구조보강을 위해 설치한 철골 보와 1970년대 초까지 사용되었던 중앙집중식 난방을 보여주는 굴뚝.

1979년 재개발 사업 추진과정에서 조합원 간 갈등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공고문

추억(追憶)
– 정연복​
알록달록
기쁨과 슬픔의
집을 지으며 살아왔네
산새알 물새알 같은
아롱다롱 추억들이 쌓여
세월의 강을 건너는
돛단배 되네
눈물짓던 시절도
세월이 흘러 뒤돌아보면
그리움으로 남는 것
사랑하던 사람은
가고 없어도
가슴속 깊은 곳
연분홍 사랑의 추억은 남아
고단한 한세월
그럭저럭 견딜 만하지
오!
추억의 힘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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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코믹북 _ 우아한 속물

Architecture Comic Book _ Elegant snob

글. 김동희 건축사 Kim, Donghee 건축사사무소 케이디디에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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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닭실마을 청암정

Cheongamjeong in Bonghwa Daksil Village

중앙선이 준고속철도로 연결되면서 경상북도를 여행하기가 정말 편해졌다. 청량리-영주 간 기차 한 시간 사십분, 영주역에서 승용차로 삼십분, 석천계곡에 도착했다. 소나무로 가득 찬 숲 속에 맑은 물이 흐른다. 청암정이 있는 유곡리(酉谷里), 닭실마을에서 내오는 물이다. 계곡을 앞에 두고 석천정사가 있다. 예전에는 이곳이 마을 입구였다고 한다. 개천을 따라 오른쪽으로 돌아서 십여 분을 걸으면 높지 않은 야산을 배경으로 한 닭실마을이 펼쳐진다. 마을의 왼편, 단풍나무와 회화나무가 숲을 이룬 곳에 청암정 지붕이 보인다. 2007년 지어진 박물관 마당을 거쳐 북측 문을 들어서면 단촐한 맛배지붕의 충재와 단청을 한 청암정이 보인다. 정자는 연못 가운데 거북모양의 바위에 아름다운 지붕을 펼치고 서있다. 마루에 앉았다. 500년전 조선 중기, 곧은 절개의 선비가 남긴, 공부하던 마루에서 단풍나무 너머 초록으로 펼쳐진 논을 바라본다. 남겨진 모든 것에 감사하다.

글. 이관직 Lee, Kwanjick (주)비에스디자인 건축사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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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마을 시간이 멈춘 마을, 서천군 판교면 판교마을

Disappearing village _ A village where time has stopped,
Pangyo Village in Pangyo-myeon, Seocheon-gun

193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흔적들이 남아있는 마을.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모습으로 어느 날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사라지고 그들이 살았던 건물들만 남은 듯한 풍경이 있다. 그래서 이 마을을 시간이 멈춘 마을, 타임캡슐 마을이라 부른다. 판교마을이라 부르는 현암리(玄岩里)는 서천군 판교면의 15개 리(里) 소재리로서 면사무소와 치안센터, 우체국, 농협 등 각 기관이 있으며 판교중학교와 오성초등학교가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는 서천군 동면에 속해있다가 1943년에 판교면에 편입되었고, 현암리의 지명 어원은 현재도 남아있는 ‘검은 바위’에서 비롯되었다. 현암리가 판교면에서 가장 큰 마을이 된 것은 1930년 일제강점기에 식량 수탈과 징용 등을 위해 만든 장항선의 판교역이 들어서고 1932년 판교리에 있던 장터와 면사무소, 주재소 등 행정기관이 옮겨오면서였다. 전북과 충남의 상권이 이곳으로 집중되고 1970년대 제재·목공, 정미·양곡·양조 산업이 크게 발전하면서 판교장(板橋場)의 규모가 충남의 3대 시장으로 커지고 충남에서 가장 큰 우시장(牛市場)이 생기면서 주변 지역 중에서 가장 크고 최고의 번성기를 누렸다.
1980년대 이후 산업화에 따른 대도시 집중 현상으로 젊은이들이 떠나고, 2008년 11월 27일 장항선 직선화 공사로 역사가 옮겨가기 시작했다. 4차선인 국도 4호선과 충남 서천 고속도로가 생기면서, 교통과 경제의 지리적 중요성을 잃고 경제가 급격히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마을 또한 성장하던 때처럼 빠른 속도로 쇠퇴하였다. 마을 일대가 철도시설공단 대지로 건축이 제한되면서 마치 1970~1980년대의 세월에서 멈춘 듯한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카페나 패스트푸드점조차 하나 없는 개발의 진전이 전혀 없는 곳, 마치 영화세트장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다. 현재 판교마을 인구는 200명이 안 되며 65세 이상 비율이 70%를 넘는다. 2021년 10월 13일에 구 판교역 주변으로 형성된 상권 지역 22,956제곱미터가 국가 등록문화재(제819호) 서천 판교 근대역사문화공간으로 지정되어 문화 재생 사업으로 리모델링을 추진해 왔지만, 이미 상실된 마을의 존재감을 되살리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멈춤은 사라지는 시간을 내포하고 있고 개발과 파괴의 저항을 요구하기도 한다. 사라짐을 막기 위해 박제형 보존을 할 것인지 또는 새로운 변화의 지표로 삼아 변화할 것인지에 대한 많은 숙제가 있다. 하지만 이미 상실된 마을의 존재 의미, 그리고 인구감소와 고령화에 따른 자연적 소멸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성장의 동력인 경제력이 상실되고 유입인구가 없는 마을은 더 이상 존재적 의미조차 상실한 채 그렇게 사라질 것이다. 국가 등록문화재로 등록된 동일 정미소, 동일 주조장, 장미사진관, 오 방앗간(삼 화장 미소), 판교극장, 구 중대 본부, 일광상회 7개 건물 외에도 이곳에서는 애국지사 고석주 선생을 기념한 기념공원, 구 적십자, 의용소방대, 구 판교면 사무소, 전도관 등 30~70년대의 건물들을 볼 수 있다.

구. 판교역
일제강점기인 1930년 11월 1일 식량 약탈과 전쟁물자 수송 징용 징병을 목적으로 개통한 장항선 역사로서, 옆 앞의 광장과 5분 거리에 오일장인 판교장이 있어 이곳을 오가는 사람들로 항상 붐비는 곳이었다. 이곳은 지역민들의 만남의 장소로서 행정과 문화의 매개 장소로서 인근에 판교장을 오가는 사람들로 가장 활기가 넘치는 곳이었으며, 판교마을의 번성기와 쇠퇴기를 만든 역사의 장소이다. 1930년대 주민 신봉균과 박동진 씨가 심은 역전 소나무는 역 광장 앞에서 일제 식민지 시대부터 해방과 전쟁과 산업화 시대, 그리고 지금까지 판교마을의 아픔과 번영과 쇠퇴를 묵묵히 지켜보며 기억하고 있는 역사의 산증인이다. 지금은 그 당시 역사의 일부만 남기고 판교특화음식촌으로 새롭게 변모하여 서천9미를 맛보게 하고 있다.

판교장(板橋場)
판교역의 개통과 더불어 1932년 판교리 복판에 있었던 판교장이 이곳 현암리로 옮겨오면서 원근 각지에서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물자를 사고파는 큰 시장으로 발전하였다. 곡물 의류 잡화 등을 판매하는 전통 오일장이었으며 주거래품목은 소와 세모시였는데 우시장은 광천, 논산과 더불어 충남의 3대 우시장으로, 세모 시장은 모시가 가장 많이 생산되는 저산팔읍(苧山八邑- 서천·비인·한산·홍산·임천·부여·공주·남포) 보부상들이 모시를 거래하는 곳으로 유명했다. 1980년대 중반까지 이곳 우시장은 7~9월에 약 1,000여 마리 정도의 소가 묶여 있었고 하루에 수백 마리의 소가 거래되는 곳이었다.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지 어깨를 부딪치며 걸었을 정도였다. 우시장 주변은 소와 함께 음식, 그리고 사람들의 다양한 사연이 회한과 기쁨 등으로 함께 한 정겨운 곳이었지만, 세월은 흐르고 현재는 그때의 모습을 담은 벽화만 남아있다.

옛 공회당(판교극장)
1960년대 지방 정부 홍보 및 집회시설로 사용할 공회당 건립을 추진하면서, 1961년 판교면이 우수 면으로 선정되어 지어졌다. 처음에는 지역민의 공공 행사를 위해 사용되다가 1967년부터 극장으로 활용되었다.
판교역과 판교장과 연관해서 1970년대 말까지 이곳에서는 영화 상영과 유명 코미디언 또는 가수들의 공연, 지역 콩쿠르 등 다양한 인근 지역 사람들의 문화 활동 공간으로 큰 역할을 했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텔레비전 보급에 따라 극장은 하향길을 걷게 되고 지금은 이곳을 방문하는 여행자들에게 그때의 추억을 아련하게 전하고 있다.

오 방앗간(삼화 정미소)
1930년대 문을 연 판교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방앗간으로 주인의 성을 붙여 오 방앗간으로 불렸지만, 정식 이름은 삼화 정미소이다. 삼대에 걸쳐 운영했으며 상호의 삼화(三和)는 삼 형제가 의좋게 운영하라는 아버지의 뜻을 담아 지은 것이라 한다. 절충식 목조구조체 독특한 외관과 함께 정미용 설비와 기능적으로 잘 조화된 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건물로서 현재에도 기본적 건축형식의 원형과 내부 설비까지 작동 가능한 상태로 잘 보존되고 있다.

장미사진관
1932년에 판교면을 지배했던 일본인 부호 11명이 사용했던 곳이다. 남자 다섯, 여자 여섯이 동면 사람들 5,515명을 지배하며 농토와 상권을 장악하였다. 그 당시 일본 지주는 일본어로 일왕을 찬양하며 만세 삼창을 외쳐야 쌀을 빌려줬다고 한다. 해방 후에는 우시장에 온 사람들의 여관으로 사용하다가 그 후 쌀가게와 사진관이 반반씩 사용하였고, 지금은 빈 건물로 파란 슬레이트 지붕이 있는 마을의 유일한 2층 적산가옥으로 일제강점기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동일 주조장 / 동일 정미소
회백색 콘크리트 외벽에는 검은색의 세월의 때가 묻어 있다. 1932년에 지어진 주조장 건물로 이 지역 최고의 부호 박호성이 운영하던 술도가였다. 3대째 이어오다 2000년 12월 문을 닫았다. 1970년대 원활한 쌀 수급을 위해 바로 옆에 동일 정미소를 함께 운영했었다. 주조장 바로 앞 우시장과 오일장의 주막과 마을 사람들에게 술을 제공했던 곳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여기서 번 돈으로 바로 옆에 판교중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판교의 현존하는 유일한 주조장으로서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으며, 판교의 근대사적 상징적 산업시설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촌닭집
1932년 행정기관들이 이곳으로 옮겨온 이후 관공서 관련 업무인 행정문서를 작성해주는 대서방으로 사용되다 양품점·만화방·한의원·건강원 등을 거쳐 마지막으로 닭집으로 사용된 이 낡은 건물에는 마을 주민들의 삶이 겹겹이 붙은 채 시간이 정지된 건물 중 하나로 남아있다. 건물의 뒤편에 마을의 상징인 현암 바위가 있고, 일자형 목구조로서 전면공간은 상가 용도로 후면 공간은 주택용도로 구성되어 있다. 이 마을에 오래된 간판의 글씨체들이 그 당시의 모습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마치 서체 박물관 같은데, 이곳의 모습도 많은 글씨를 지니고 있다.

세월
– 곽재구​

사랑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세월은 가슴팍에 거친 언덕 하나를 새겨놓았다

사람들이 울면서 언덕을 올라올 때
등짐 위에 꽃 한 송이 꽂아놓았다

우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눈물을 모아 염전을 만들었다

소금들은 햇볕은 만나 반짝거렸다
소금은 소금 곁에서 제일 많이 빛났다

언덕을 다 오른 이가 울음을 그치고
손바닥 위 소금에 입맞추는 동안

세월은 언덕 뒤 초원에
무지개 하나를 걸어놓았다

 

글·사진. 정원규 Jeong, Wonkyu 창대 건축사사무소 ·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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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Make hay while the sun shines.

길쭉청년 한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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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마을 _ 조국 부흥의 마을, 상동읍 구래리 중석마을

Disappearing village _ Ilgwang Mining Village,
The village of national revival, Jungseok Village in Gurae-ri, Sangdong-eup

강원 영월군 상동읍은 1970~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주요 수출품의 하나였던 중석(重石) 광산 중 가장 대규모 광산이 있는 곳이다. 특히 광산이 있었던 구래리는 광산의 규모가 가장 크다.
상동광산은 1916년 4월에 발견되고 1937년에 일본 고바야시광업 회사에 의해 개발이 이루어졌다. 해방 이후 국영기업인 대한중석으로 운영되면서 1970년대 전 세계 중석 시장의 8%를 차지하고 한때 대한민국 전체 수출액의 60%를 차지했다. 이곳을 통해 파생된 많은 가공산업은 대한민국 산업부흥의 기반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 값싼 중국산 중석으로 수출이 급감하고 1992년 6월 채굴이 중단되면서 이곳도 쇠퇴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1994년 2월 민영화 이후에도 인수기업인 거평그룹의 부도에 이어 몇 차례의 인수와 퇴출을 거쳐 결국 2000년 11월 지금의 금속가공 다국적 기업 IMC 그룹에 인수되었다. 1971년 인구가 총 2만 2,600명 정도로 번창하며 영화를 누렸던 이곳은 지금까지 오랫동안 광산의 재개가 이루어지지 않아 올해 5월 기준으로 인구가 1,005명으로 줄어들어 전국에서 가장 많이 인구가 감소한 작은 마을로 바뀌었다. 광산이 문을 닫고 사람들이 빠져나간 자리는 곳곳에 폐가와 폐상가들이 버려져 있고, 고요한 적막 속에 1970, 80년대 모습으로 남아있다. 영월군이 이곳을 추억의 광산 역사거리로 조성하여 새로운 관광명소로 만드는 시도를 했었고, IMC 그룹의 알몬티대한중석이 최근 새로운 채광 작업을 준비하고 있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기계화되어 최소한의 인력이 상주하고 있다. 광산의 재개에도 불구하고 마을의 중흥은 기대할 수 없고, 마을을 떠날 수 없는 고령자들만 남아 마을은 쇠퇴로 인한 퇴로의 길을 걷고 있다.

한때 학생 수 2,000명으로 오전, 오후반으로 나뉘어 수업을 진행했던 구래초등학교도 지금은 7명의 학생을 5명의 선생님이 가르치고 있다. 학교 뒷산에 있는 꼴두바위가 있다. 조선시대에 송강 정철 선생이 훗날 이곳 첩첩 산골에 많은 사람이 살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광산 개발을 예언한 것이라고도 한다. 꼴두바위는 지금도 소원을 비는 바위로 많은 사람이 찾고 있다.

까치발 거리
이곳은 전성기를 누리던 1970~1980년대만 하더라도 인근에 극장은 물론 고급 요식업소들이 성업 중이던 말 그대로 영월지역 최고의 번화가였다. 지금은 거의 대다수가 폐상가가 되어 있고, 일부는 주택으로 바뀌어 상권의 기능은 거의 사라졌다. 영월군의 관광 재생 사업으로 거리는 새롭게 채색되고 새로운 시설들이 조성되었지만, 거리의 모습은 마치 영화 세트장과 같다.

캐낸 광석 중 쓸모없는 것을 골라내던 상동광업소의 선광장
채굴 중단 후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대한중석의 폐공장들은 인수업체인 이스라엘 IMC그룹 알몬티에서 채광을 재개하면서 다 철거되고, 거대한 축대와 잔여물만이 과거의 영광을 짐작하게 하고 있다. 이곳의 중석은 아직도 1억 300톤의 매장량이 있어 앞으로 200년간 채광이 가능한 양이고, 세계 평균의 2.5배에 달하는 최고의 품질을 가지고 있다. 현재 텅스텐은 코발트·리튬·니켈·망간과 함께 5대 핵심 광물로 꼽힌다. 이런 전략적 광물이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는 사실에 가슴이 아프다.

폐가로 남아있는 300여 채의 광산사택은 한때 남들이 부러워하는 최고의 직장 대한중석의 사택이었지만, 지금은 오래전 희미한 영광의 그림자로 남아있다.

상동성당은 1959년 10월 21일 건립되어 광산지역의 노동자와 주민들의 삶을 이끄는 구심점 구실을 해 왔다. 채굴이 중단된 후 신도 수가 줄어들어 1993년에 공소로 격하되기도 했지만, 여전한 이 마을의 역사물로서 마을 공동체의 핵심이다. 2021년 1월 1일 화재로 상당한 부분이 소실되기 전까지 근현대 등록문화재 등재를 추진할 예정이었다. 마을의 쇠퇴와 더불어 이곳의 역할도 끝난 것일까?

걱정 말아요 그대

– 전인권

 

그대여 아무 걱정 하지 말아요
우리 함께 노래합시다
그대 아픈 기억들 모두 그대여
그대 가슴에 깊이 묻어 버리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떠난 이에게 노래하세요
후회 없이 사랑했노라 말해요

그대는 너무 힘든 일이 많았죠
새로움을 잃어버렸죠
그대 슬픈 얘기들 모두 그대여
그대 탓으로 훌훌 털어 버리고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우리 다 함께 노래합시다
후회 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우리 다 함께 노래합시다
후회 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우리 다 함께 노래합시다
후회 없이 꿈을 꾸었다 말해요
새로운 꿈을 꾸겠다 말해요

 

글·사진. 정원규 Jeong, Wonkyu 창대 건축사사무소 ·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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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코믹북

Architecture Comic Book

 

글. 김동희 Kim, Donghee 건축사사무소 케이디디에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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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마을 일제 강제징용의 마을, 일광 광산마을

Disappearing village _ Ilgwang Mining Village,
a village of forced labor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읍 달음길 44(원리 663-7번지) 일원, 달음산 북동쪽 산기슭에 있는 광산(鑛山)마을은 자원 약탈을 위해 1930년 3월 11일부터 일본의 전범 기업인 스미토모 광업 주식회사에서 닛코광산(일광광산)을 개발하면서 형성된 광산촌이다. 광산의 규모는 조선의 5대 구리광산이었으며 채산성도 우수한 곳이었다. 일제 강점기 말인 1944년 4월 1일 이후에는 자원 약탈의 목적으로 인력을 강제로 징용하여 매일 주간과 야간 2교대로 쉬는 날 없이 일을 시키는 지옥의 일터로도 유명했었다. 해방 후에도 채광과 휴광을 거듭하기도 하고 구리 대신 중석(텅스텐)을 채광할 때와 1980년대 중화학 공업의 발달로 구리 수요가 급증할 때는 규모도 커지고 광산과 마을이 활성화되었지만, 1994년 폐광되면서 광산촌의 기능은 상실되었다. 당시 마을은 광산 입구에서 동쪽으로 흐르던 실개천에 다리를 설치하고 개천 가장자리에 석축을 쌓아 집터를 만들었다/ 마을 부지는 계단식으로 형성하여 4개 단지로 구성되어 있고, 지금도 그 당시 쌓은 일본식 모서리가 각진 석축과 진입 계단들을 볼 수 있다. 초기에 형성된 20여 채의 가옥은 이후 90여 채까지 지어졌으나, 지금은 57여 채가 남아있고 실제 거주 가옥은 45여 채다. 가옥은 그동안 많이 수리되고 재생 사업으로 지붕도 바뀌었지만 지금도 마을의 건물에서 일본식 적산가옥의 특징인 함석판 지붕과 눈썹 처마, 목재 비늘판 외벽 등을 볼 수 있고 일본식 마름모 모양의 석축들도 그대로 남아있어 일제 강점기 역사적 현장으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2020년 새뜰마을사업 대상지로 선정되어 재생 사업을 시행 중이지만 주민 초고령화로 인한 마을의 쇠퇴는 불가피하며, 마을은 역사적 의미의 유적지로 남겨질 것이다.

사택(舍宅)과 숙소(宿所)
마을 부지는 계단식으로 형성, 4개 단지로 구성하여 맨 위쪽은 일본인 숙소, 두 번째는 일본인 간부 사택, 나머지는 조선인 숙소를 만들었다. 일본인 간부급 사택과 조선인 숙소 등이 아직도 일본식 적산가옥의 건축양식으로 그대로 남아있다. 일본인 간부 사택은 넓은 마당을 가진 독립체로 형성되어 있고 숙소는 일자형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기본단위는 23제곱미터로 이곳에 일본인 2가구, 조선인 5가구가 모여 살았다. 1가구를 4명으로 산정해도, 20명이 이 좁은 숙소에 살았다는 것이다. 아직 남아있는 공동 화장실과 공동 우물, 빨래터, 집 앞 외부 화구 등에서 그 당시의 열악한 주거환경을 짐작할 수 있다.

적산가옥(敵産家屋)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스미토모광업주식회사 사무실과 간부 사택으로, 일본식 걸침기와의 지붕과 입구 포치, 창문 위 눈썹지붕의 모습은 전형적인 그 당시의 일본식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가옥 옆에는 그 당시 심은 은행나무가 역사의 아픔을 지키고 서 있다.

더덕더덕 붙어있는 다양한 자재의 낡은 외벽과 문짝들. 지금은 재생 사업으로 많은 가옥이 기와로 덮여 있지만, 오랜 세월에 때 묻은 슬레이트 지붕들은 오랜 세월 덧입혀진 시간의 아픈 흔적으로 애잔함이 묻어나온다.

지금은 창고로 사용되고 있는, 마을의 가장 뒤편에 일렬로 설치했었던 공동 화장실의 배치가 독특하다.

노동에 지친 징용자들이 사는 좁은 숙소에는 별도의 조리 공간은 없었다.
숙소마다 집 앞에 설치하여 사용했던 아궁이의 화구(火口)와 장독대가 이들의 삶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나의 노래
– 오장환

나의 노래가 끝나는 날은
내 가슴에 아름다운 꽃이 피리라.

새로운 묘에는
옛 흙이 향그러

단 한 번
나는 울지도 않았다.

새야 새 중에도 종다리야
화살같이 날아가거라

나의 슬픔은
오직 님을 향하여

나의 과녁은
오직 님을 향하여

단 한 번
기꺼운 적도 없었더란다.

슬피 바래는 마음만이
그를 좇아
내 노래는 벗과 함께 느끼었노라.

나의 노래가 끝나는 날은
내 무덤에 아름다운 꽃이 피리라.

 

글·사진. 정원규 Jeong, Wonkyu 창대 건축사사무소 ·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