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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와 건축 _ 영화로 읽는 소설 속 도시와 건축 ⑥ <구모노수 죠 -거미집城-(蜘蛛巢城 くものすじょう; lit. Spider Web’s Castle)> 1957년 구로자와 아끼라(黒澤明) 감독

Architecture and the Urban in Film and Literature ⑥
The Throne of Blood(Film 1957 directed by Akira Kurosawa(1910~1998)

제작: 구로자와 아키라, 모토끼 소지로(本木荘二郎)/ 각본: 오구니 히데오(小国英雄), 하시모토 시노부(橋本忍), 기쿠시마 류우조(菊島隆三), 구로자와 아키라/ 원작: 세익스피어 <맥베스>/ 음악: 사토 마사루(佐藤勝)/ 미술: 무라키 요시로(村木与四郎)/ 촬영: 나까이 아사카즈 (中井朝一)/주연: 미푸네 도시로(三船敏郎, Mifune Toshirō, 1920 ~1997); 야마다 이스즈 (山田 五十鈴, Yamada Isuzu, 1917~2012); 시무라 다카시(志村 喬, Shimura Takashi, 1905~1982)
The Throne of Blood(Film 1957 directed by Akira Kurosawa(1910~1998)/ based on Macbeth by William Shakespeare(1564~1616)/ Starring: Toshiro Mifune, Isuzu Yamada, Takashi Shimura (running time: 110m)

<구모노슈 죠(거미집城[거미의성])> 포스터

올해 4월호부터 12편의 영화를 선정하여 연재를 시작했는데 이로써 반이 되었다. 박사 학위과정 중이던 과거를 돌이켜 보니, 꽤 오래 전인데 거의 마지막 학기로 기억한다. 학위과정 중이던 대학은 캠퍼스가 서울 및 수원에 있는데 건축학부는 수원이고 인문학부는 서울에 있다. 명륜동 캠퍼스는 사무실에서 자동차로 10분 이내에 도착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시간을 절약할까 궁리하던 중, 교칙을 열심히 찾아서 고고학 등 인문캠퍼스 개설강좌를 몇 과목 수강할 수 있었다. 그 중 하나가 영문학과 박사과정에 개설된 영국 문학과 현대영화 담론 관련 과목이었다. 젊은 교수는 이 과목을 영국영화나 감상하는 과목으로 안일하게 여기고 신청한 줄로 오해하고는 학기 초부터 아예 “잘못 알고 신청한 것 아니냐?”고 하면서 쉽지 않다고 못을 박았다. 물론 사무실이 바빠서 학기말에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지만 이 수업을 통해 얻은 게 많았다. 주제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였고, 시대를 거듭하면서 지속되어온 수많은 해석과 연극이나 영화 등 여러 가지 버전을 함께 논하는 수업이었다. 대부분의 젊은 학생들은 비교적 후대에 만들어진 마이클 보그다노프(Michael Bogdanov 1938~2017, 당시는 생존해 있을 때다)의 현대적 재해석 등에 관심을 보였다. 내 경우 구로자와 아끼라 감독이 재해석한 ‘거미집의 성’을 일본 성곽건축에 초점을 맞춰서 중간발표를 했다. 그 이전에도 이 영화는 여러 번 보았지만 대부분 구로자와 아끼라 감독이 만든 영화의 구도 등을 중심으로 이해했을 뿐이었는데, 11세기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배경인 맥베스를 16세기의 일본의 전국시대1)로 치환했다는 것과 전통극 노우(能)2) 의 구성을 차용했다는데 관심을 갖고 다시 보았다. 2007년 당시 초안을 했던 내용이 2022년 8월호 한국건축역사학회 기고문으로 발전한 것이다. 마침 영화모임의 일정도 우연히 일치하게 되어 동떨어진 내용보다는 일관성 있는 게 나은 것 같아 줄거리나 서술 등 일부는 같은 문장을 활용한다. 이 글의 초안에는 촬영지에 대해서는 미처 서술하지 않았으나, 보충하자면 당시 후지산에 거대한 세트를 만들어서 촬영을 했고 날씨가 좋으면 산 아래서 볼 수 있을 정도로 대규모 세트였다고 한다. 또 하나 주인공이 장렬하게 죽는 마지막 장면 촬영의 후일담은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빗발치듯 날아오는 화살을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몸 옆에 꽂았는지에 대해 영화모임 참석자들과 대화를 나눴다. 촬영 전에 화살에 줄을 매달아 당기고 그것을 거꾸로 돌려서 화면을 구성하기로 각본에 되어있고 연습도 했는데, 감독이 그냥 촬영을 감행하는 바람에 간담이 서늘했다고 한다. 그 덕에 주인공 배우의 놀라움이 더욱 생생하게 표현된 것 같다.
구로자와 아끼라 감독이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영화로 만들려고 했을 때 <시민 케인(1941)>을 만든 거장 오슨 웰스(1915~1985)가 이미 <맥베스(1948)> 제작에 들어갔다는 얘기를 듣고 그 계획을 연기했다가 뒤늦게 1957년에 완성했다고 한다.

<사진 1> 거미줄 숲. 영화 <구모노슈 조> 캡처(이하 동일)

<사진 2> 모노노케 요파

 

영화 줄거리
일본의 전국시대(戰國時代) ‘거미집 성’, 구모노수 죠(蜘蛛巢城)의 성주(城主) 즈츠키 쿠니하루(都築国春)는 북관(北の館)의 주인 후지마키(藤巻)의 모반으로 옹성을 결의한다. 그러던 중 와시즈 다케도키(鷲津武時)와 미키 요시아키(三木義明)의 활약으로 형세가 역전되었다는 보고를 받는다. 그 반란군을 제압하고 성주의 부름으로 성으로 귀환하던 무장(武將) 와시즈와 미키는 ‘거미집 성’ 근처 거미줄 숲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중 우연히 숲 속의 모노노케(物の怪) 요파(妖婆)를 만나게 된다.<사진 1>, <사진 2> 모노노케는 와시즈가 곧 북관(北の館)의 주인이 될 것이며, 얼마 지나지 않아 고쿠슈(國守: 옛날의 지방장관, 곧 城主)가 되지만 그 뒤를 잇는 것은 미키의 자손이라고 예언한다. 또한 미키는 제1요새(一の砦)의 대장이 된다고 예언한다. 성에 도착한 친구인 두 사람은 성주 즈츠키로부터 포상을 받고 모노노케가 예언한 직책에 임명된다. 그 후 와시즈는 북관을 방문한 즈츠키를 살해하고 성주가 된다. 다음으로는 자객을 보내 미키를 죽인다.<사진 3>, <사진 4> 모노노케의 예언에 사로잡힌 와시즈는 거미줄 숲이 공격하지 않는 한 성(城)은 안전하다고 생각한다. 회임(懷妊)한 와시즈의 처 아사지는 사산(死産)을 하고 미치고, 발광하는 아사지에 놀라 허둥대는 시녀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달아났던 미키의 아들은 노리야수 장군과 세력을 규합해 거미집 성(구모노수 죠)을 공격한다. 그들은 군사력의 보호를 위해 숲의 나무를 잘라 위장하고 진격한다. 움직이는 숲에 놀란 병사들, 사방에서 날아드는 부하들의 화살세례. 이리저리 피하던 와시즈의 목을 뚫는 화살 하나. 온몸에 화살을 맞은 와시즈는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3)

<사진 3> 모노노케의 예언에 따라 와시즈는 고쿠슈가, 미키는 제1요새의 대장이 된다.

<사진 4> 북관의 내·외부 모습과, 와시즈와 그의 아내 아사지

<사진 5> 영화의 시작과 끝 장면

 

영화의 구성
같은 화면으로 영화가 시작되고 같은 화면으로 영화가 끝난다. 성문의 돌담(石垣), 성의 폐허(廢墟), 자욱한 안개(漂う霧). 안개가 걷히면서 기둥 하나가 클로즈업되며 기둥에 새겨진 ‘구모노수-죠 폐허(蜘蛛巢城址)’라는 글자를 하나하나 보여준다. 역사가 남긴 폐허를 통해 인간의 욕망의 끝은 무덤이라는 것을 암시한다고 한다.<사진 5>
같은 합창으로 시작하고 같은 합창으로 끝난다. 시작의 합창은 이야기(모노가타리, 物語; 전설)를 서술한다. -여기에는 일찍이 위풍당당한 성(城)이 있었다. 그래서 여기에는…. 「見よ妄執の城の址・魂魄未だ住むごとし・それ執心の修羅の道・昔も今もかわりなし」 ‘보아라 욕망에 사로잡혔던 성의 폐허를· 혼백만이 아직 떠도는 곳· 그 집요한 살육의 길·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코러스가 끝나면서 「여기 거미집성이 있었노라(Here Stood/Spider webs Castle)」는 자막과 함께 이야기가 전개된다. 영화 종결부의 합창은 영화 시작의 이야기를 되풀이함으로써 우의(寓意)를 강조한다.

영화는 시작에서 끝(終)까지 23개의 장(chapters)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은 3~5분 정도의 길이이고, 짧은 것은 1분 10초, 긴 장(障)은 약 10분 정도 된다. 노우(能)의 공연요소가 영화 전체에도 적용되고 각 장에서도 적용된다. 전체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죠(序), 하(破), 큐(急)의 템포로 구성한 듯하나 때로는 각 장에서도 느린 동작과 갑작스러운 반전이 있다. 영화 전체에서 뿐만 아니라 각 장에서도 시작과 끝 장면이 반복되기도 한다(예: 9장의 시작과 끝).

 

일본의 전통극 노우(能)4)와 <구모노수 죠>
구로자와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재현하는데 미술, 분장 및 배우의 동작에서부터 음악까지 노우의 양식을 발상의 기점으로 했다고 한다.<사진 6>

영화에 사용된 노우의 요소로는
① 남성 합창: 영화 시작과 끝날 때의 합창으로, 구모노수 죠의 환상적인 무대로 관객을 끌어들이는 입구 및 출구의 역할을 한다. 노우가 끝날 때 대미를 장식하는 키리(切り)이다.
② 노우 장면: 슈라노우(修羅能)「타무라(田村)」_16장 연회장면에 삽입된 늙은 무장(老武將)의 춤사위와 우타이(謠)의 장면은 실제 노우이다.<사진 7>, <사진 8> 대부분의 슈라노우는 패전의 고통을 다루는 것이 많은데, 「타무라(田村)」는 가치슈라(勝修羅)라고 부른다. 귀신을 퇴치하는 스토리를 이야기하는 것이기 때문에 축언의 맛이 짙어서 ‘슈라 축언(修羅の祝言)’ 또는 ‘군대 축언(軍隊の祝言)’이라고 부른다. 늙은 무장(老武將)의 춤과 우타이(謠)의 가사를 주목하면 감독의 연출효과를 볼 수 있다.
「역신을 섬긴 귀신도(逆臣につかえし鬼も)」라는 대목에서 와시즈 다케도키는 움칠한다. 앉아 있던 아사지도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나서 와시즈는 극을 끝내라고 소리친다.
이 우타이(謠)의 내용은 헤이안시대(平安時代 794-1192년)의 무장(武將) 사카노우에노 타무라마로(坂上田村麻呂 758~811, [後시테])가 여행하는 승려(와키)앞에 나타나서 천수관음보살의 불력(佛力)의 덕으로 일찍이 자신이 스즈카 산(鈴鹿 山中)에서 귀신을 퇴치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대군(大君)을 배신한 역신(逆臣)과 그를 섬긴 귀신(鬼神)은 그래서 근절되었다(멸망했다)는 이야기인데, 와시즈 부부는 자신들이 한 행동이 있어서 이 우타이가 귀에 고통스러운 음악으로 들리는 것이다. 이렇듯 구로자와는 연회에 삽입된 우타이의 이야기까지도 영상과 밀접한 관계를 갖게끔 했다.

<사진 6> 노우(能) 무대의 구조

<사진 7> 슈라노우-타무라

<사진 8> 도끼벌 마감의 기둥

③ 노우 장면의 재현: 거미줄 숲에서 모노노케의 물레 잣는 장면도 실제 노우의 한 장면이다. 거미줄 숲의 초막(부끼야 葺き屋)은 노우 무대의 지붕(부끼야네 葺き屋根)의 같은 건축방법을 통해 노우 무대를 상징한다.
④ 노우의 분장(쇼조코 裝束)및 동작과 소품들: 아사지(浅茅)의 의복이나 얼굴의 화장 지극히 제한된 표정이나 동작은 노우에서 눈썹 위, 이마의 검은 칠과 검게 물들인 이는 노의 가면(能面)을 재현했다. 아사지가 빈 그릇에 손을 넣고 손의 핏자국을 씻는 장면도 노우의 실제장면이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와 구로자와의 <구모노수 죠>
① <맥베스>는 5막(Acts) 29장(Scenes)(7+4+6+3+9[8])으로 구성되었고 <구모노수 죠>는 전체 23章(chapter)를 크게 셋으로 나누어 노우의 공연요소로 구성됐다. 극은 일본전통 연희에서 차용하여 세가지 공연요소(죠[序], 하[破], 큐[急])로 구성되었고 끝으로 시작하고(시작과 끝이 같다), 노우(能)의 마무리 요소인 코러스를 사용했다.
② <맥베스>는 권력이동의 시기에서 산출되었다. 우화적인 이분법 해체가 주안점이고 봉건주의에서 절대왕정으로 권력이 이동하는 역사적·시대적 배경의 갈등이다. <구모노수 죠>는 맥베스의 배경인 11세기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서 16세기의 일본으로 옮긴(transpose) 것으로 일본의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하며, 전제군주에 대한 민중의 봉기로 마무리한다.
③ 초자연적인 세계의 표현으로는 <맥베스>에는 세 마녀(Three Witches-Weird Sisters)·헤카테(Hecate: Queen of Witchcraft)·유령(Three Apparitions)과 또 다른 마녀 셋(Three other witches)이 등장하고, <구모노수 죠>에는 모노노케와 사무라이의 환영(幻影) 셋이 나타난다.<사진 9>

<사진 9> 사무라이 셋의 환영을 통한 초자연적인 세계 표현

④ 맥베스 부인(Lady Macbeth)의 몽유병과 와시즈 부인 아사지(鷲津浅茅)의 정신착란(손 씻는 장면)
⑤ 맥베스의 죽음과 와시즈 다케도키(鷲津武時)의 죽음
⑥ <맥베스>의 주요 지명: 던칸의 궁(Duncan’s Royal Palace at Forres), 맥베스의 성(Macbeth’s Castle, Inverness), 맥더프의 성(Macduff’s castle, Fife), 잉글랜드왕 에드워드 궁(The Palace of King Edward, England) 맥베스의 성(Macbeth’s Castle at Dunsinane), 코더(Cawder), 글람스(Glamis), 버남 숲(Birnam Wood), 스콘(Scone; Scotland traditional coronation site)
<구모노수 죠>의 주요지명: 즈츠키 쿠니하루(都築国春)의 거미집성(蜘蛛巢城), 북관(北の館), 제1 요새(一の砦), 거미줄 숲(蜘蛛手の森)
⑦ <맥베스>의 대조적인 장면들(contrasting scene): 초자연적 세계와 전장터
<구모노수 죠>의 대조적인 장면들: 거미줄 숲이라는 자연과 성(城) 내부의 정제된 공간

지금으로부터 65년 전에 만든 영화로 언제 보아도 탄탄한 구성을 읽을 수가 있다. 1990년 미국 체류 당시 아카데미 시상식 외국어 영화상 후보작들을 MOMA에서 보았다. 그리고는 시상식에서 구로자와 아끼라 감독이 평생 공로상으로 오스카 트로피를 받는 장면을 TV를 통해 본 것이 엊그제 같다.

다음 호는 피터 그리너웨이(Peter Greenaway, 1942~ ) 감독의 <영국식 정원 살인 사건(The Draughtsman’s Contract)>을 다룬다.

 

글. 조인숙 Cho, In-Souk 건축사사무소 다리건축

조인숙 건축사·건축사사무소 다리건축(1986~ 현재)

·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건축학과 졸업(공학사)
·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건축학과 수료(건축학 석사/건축학 박사)
· 건축학 박사논문(역사·이론 분야): 한국 불교 삼보사찰의 지속가능한 보전에 관한 연구
· 독일 뮌헨대학교(LMU) 및 뮌헨공대(TUM) 수학(교환장학생)
choinsou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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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와 건축 _ 영화로 읽는 소설 속 도시와 건축 ⑤ <내 아저씨(Mon Oncle)> 1958년 자끄 따띠 감독, 주연 (음악: 프랑스와 바르첼리니 & 알랑 로망/세트 디자인: 자끄 라그랑주/가구 및 집기 디자인: 앙리 슈미뜨)

Architecture and the Urban in Film and Literature ⑤
Mon Oncle(My Uncle) (Film 1958 directed by Jacques Tati (1907~1982)
OST: Franck Barcellini (François Barcellini, 1920 ~ 2012) and Alain Romans (Roman Abram Szlezynger, 1905~1988)/Set design: Jacques Lagrange / Production design: Henri Schmitt (running time: 1h 57m)

<내 아저씨(Mon Oncle)> 포스터

<내 아저씨(My Uncle[Mon Oncle])>는 1958년에 발표된, 자끄 따띠가 만들고 주연을 한 프랑스판 코미디 영화다. 자끄 따띠, 장-피에르 졸라, 아드리안느 세르반티와 기타 주요 배우가 등장한다. <내 아저씨>는 이 연재물의 다른 영화와는 달리 문학작품에 바탕을 두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만을 선정한 프랑스 영화로 택했다. 영화의 특징은 한 도시 속 두 도시 이야기로, 당시로서는 아주 획기적인 첨단 주택 ‘빌라 아흐뻴’을 구시가지의 오래된 중층 다세대주택과 함께 선보임으로써, 서로 이웃하는 구도심과 신흥 개발지를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아흐뻴 부부는 유유자적하는 윌로 씨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 윌로 씨의 누이인 아흐뻴 부인은 그를 남편이 사장으로 있는 플라스틱 호스 공장 쁠라스탁(Plastac)에 자리를 마련해 삶에 적응하게 해 주려 하나 윌로 씨는 엉뚱한 행동을 하며 계속해서 크고 작은 소동을 일으킨다. 결국 그 도시를 떠나게 되면서 영화는 끝난다.

2009년 성 꺄뜨르에 전시된 ‘빌라 아흐뻴’ 모형
© wikimedia.org _ Gaël Chardon

성 꺄뜨르 입구
© wikimedia.org

2009년 성 꺄뜨르에 전시된 ‘빌라 아흐뻴’ 모형 내 차고
© wikimedia.org _ Gaël Chardon

윌로 씨는 비현실적이지만 9살짜리 조카 제라르 아흐뻴에게는 꿈같은, 사랑받는 삼촌이다. 그는 오래된 옛 도심의 낡은 집에 살며 도보나 벨로솔렉스(VéloSoleX) 모터 자전거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니니 누이 내외에게는 유유자적하는 것으로 비친다. 반면 아흐뻴 부부의 삶의 근간엔 눈에 띄는, 즉 남에게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들이 우선으로 자리한다. 일정대로 움직이는 삶, 틀에 박힌 남편과 아내의 역할, 많은 것을 소유하고 그것을 누리는 지위, 정원 중앙에 있는 조형 물고기 분수처럼 눈에 띄는 것들….

프랑스판 슬랩스틱 코미디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자끄 따띠(1907~1982)의 영화에 앞서 참고로 그보다 앞 세대의 유럽 코미디 배우를 살펴보자. 주변 국가에서 활동하던 선대 영화인으로는 독일 바이에른의 카를 팔렌틴과 영국의 찰리 채플린을 빼놓을 수 없다. 카를 팔렌틴(Karl Valentin, 1882~1948)은 코미디, 광대이자 영화제작자이나 카바레티어(cabaret performer 만능 예능인)로 더 알려져 있다. 대영 제국 훈장 2등급(KBE)을 수상한 찰리 채플린(Sir Charles Spencer ‘Charlie’ Chaplin, 1889~1977)은 무성영화 시대에 크게 활약한 인물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다. 자끄 따띠는 프랑스가 자랑하는 코미디 필름 제작자로 아버지는 러시아인이고 어머니는 네덜란드인이며 프랑스 이블린주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생을 마쳤다.

<내 아저씨>는 자끄 따띠가 총천연색으로 만든 첫 필름이자 가장 성공적인 작품이다. 주인공 무슈 윌로(Monsieur Hulot, 윌로 씨)는 한편으론 우스꽝스럽게 보이나 순수한 사람이다. 그는 당대(전쟁 후) 프랑스인들의 현대화에 대한 열망과 팽배해 가는 소비 중심 문화와 소리 없는 투쟁을 한다. 윌로 씨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기존의 마을과 이웃하는 개발된 신 주거의 삶에 대한 이야기 <내 아저씨>는 그 해 영화를 대상으로 하는 아카데미상 외국어부문에서 오스카 트로피를 받았을 뿐 아니라 단번에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내 아저씨>에는 사실상 영화의 주인공 격인 서로 이웃하는 구도심과 신흥 개발지라는 두 개의 대조적인 도시 풍경과 그 안에 있는 두 종류의 판이한 주택이 등장한다. 두 개의 대조적인 주택은 하나는 가상 마을인 파리 외곽에 전 자동 시스템(home automation)으로 된 만능 주택 ‘빌라 아흐뻴’인데, 화가 자끄 라그랑주(Jacques Lagrange, 1917~1995)의 디자인과 앙리 슈미뜨(Henri Schmitt)의 첨단 가구·집기디자인으로 당대를 반영한 아주 모던한 단층 고급 주택이다. 다른 하나는 윌로 씨가 꼭대기층(펜트하우스)에 사는 중층 다세대주택이다. 자끄 라그랑쥬는 1953년부터 1982년 자끄 따띠가 폐색전증(肺塞栓症:혈관을 타고 흐르는 색전[emboli]이 폐동맥을 막아서 생기는 질환)으로 사망할 때까지 영화 세트를 함께 만들었다.
‘빌라 아흐뻴’은 윌로 씨가 사는 옛 도심에서 그리 멀지 않은 파리의 가상 신 주거지에 위치한 초현대적인 기하학적 주택과 정원으로 조성된 집이다. 아흐뻴 부인은 중요한 방문자라고 여기면 조형물 물고기 입에서 물이 솟구치는 분수를 튼다. ‘빌라 아흐뻴’의 각 요소는 기능보다는 볼거리로 설계되어 거주자의 편안함과는 아주 거리가 멀거나 편안함이 아예 부재한다. 불편하게 놓인 디딤돌, 바로 앉기 어려운 의자들, 귀에 거슬릴 정도로 시끄러운 가전제품으로 가득 찬 주방에 이르기까지 ‘빌라 아흐뻴’은 모양(디자인)만을 추구하는 사회를 나타낸다. 마치 선물상자 같은 집 앞에 조성된 퍼즐 풀밭과 채색된 디딤돌이 있는 정원 그 자체를 누리는 것만으로도 독특한 삶으로 조명된다. 건물 측면의 원형 창문은 때로는 눈동자처럼 움직이기도 하고, 자동 개폐장치를 장착한 차고 문, 기능이 뒤죽박죽이며 소음이 유발되는 장치와 가전제품은 아이러니한 첨단을 보여준다.

시네마테크 프랑세 전시 포스터

© wikimedia.org _ Jean-Christophe BENOIST

영화 <내 아저씨> 캡처

당시 촬영 세트는 1956년 니스 빅토린느 스튜디오(Les studios Riviera/le studios de la Victorine)에 설치했다가 촬영이 끝나자 멸실했다고 한다. 그 후 2009년 자끄 따띠에게 헌정된 전시회 ‘자끄 따띠: 되 땅, 트로아 무브망(두 번, 3개의 악장)’이 시네마테크 프랑세(Cinémathèque française)에서 열렸을 때 소개되었고, 성 꺄뜨르에서 재현 전시되었다. 성 꺄뜨르(Cent Quatre, 104, LE CENTQUATRE-PARIS[http://www.104.fr])란 2008년 11월 개관한 파리의 공공복합문화공간인데, 시(市) 장례장(1870년 착공, 1874년 개관)이 있던 곳이다. 지번이 ‘파리 19구 뤼 듀베르비유 104번지’라서 이 문화공간을 104로 명명했다. 소장 예술로는 현대미술, 조각, 회화, 그래픽아트, 사진, 뉴 미디어 필름 건축 디자인이다. 상설전시로 알고 몇 년 전 파리 출장 당시 찾아갔더니 그때 전시 후 철거했다고 해서 너무 아쉬웠다.

그 후 2014년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 프랑스관에서 이 ‘빌라 아흐뻴’이 재조명되었다. 2014년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제14회 국제 건축 전시회)를 되돌아보자. 주제는 ‘기본사항(The fundamentals)’이었고 렘 콜하스(Rem Koolhaas, 1944~ )가 총감독이었다. 여러 번의 건축 비엔날레가 동시대를 기념하는 데 집중했다면, 여기서는 ‘기본사항’이라는 주제로 역사를 살펴보고, 건축이 현재 상황에서 자신을 찾는 방식을 재구성하고 미래에 대해 추측했다. 이는 3개의 연동 전시로 구성되어 있었다. 즉, ① 주제관–‘건축 요소들(Elements of Architecture in the Central Pavilion)’, ② 아스날 관-‘몬디탈리아(Monditalia in the Arsenale)’, ③ 각 국가 전시관–‘현대성 흡수: 1914-2014(Absorbing Modernity: 1914-2014 in the National Pavilion)’로 구분되었다. 이 전시는 건축 분야의 과거, 현재, 미래를 조명했다.
프랑스의 아키텍트이자 건축역사학자인 장-루이 코언(Jean-Louis Cohen, 1949~ )의 프랑스 관 (Paris Pavilion)은 ‘현대성: 약속 또는 위협?(Modernity: promise or threat/menace?)’이 큰 주제였다. 이를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소주제로 나누어 각각 전시했는데 ‘빌라 아흐뻴’이 그 중 하나였다. ① 자끄 따띠와 빌라 아흐뻴: 욕망의 대상인가 터무니없는 기계인가?, ② 장 프루베(Jean Prouvé): 건설적인 상상인가 유토피아인가?, ③ 중량 프리훼브(Prefabrication) 패널: 척도의 경제성인가 단조로움인가?, ④ 그랑 앙상블: 치유의 헤테로토피아인가, 아니면 은둔의 장소인가?
장-루이 코언은 인터뷰에서 “프랑스는 렘 콜하스의 제안대로 현대성을 흡수했을 뿐만 아니라 현대성에 영감을 주어 다양한 기대, 약속,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위협을 제공했다.”라고 했다. 이 특별 언급에 대한 인터뷰는 오로지 진보와 웰빙으로만 이루어진 현대성에 대한 잘못된 환상에 의문을 제기한 것으로 본다.

영화 <내 아저씨> 캡처. 윌로 씨가 사는 중층 다세대주택

영화 <내 아저씨> 캡처

참고로 위에서 말한 네 가지 소주제를 간략히 살펴보자.
① 자끄 따띠와 빌라 아흐뻴: 욕망의 대상인가 터무니 없는 기계인가?
‘빌라 아흐뻴’에 초점을 맞춘 이 전시는 기계로 만든 삶의 약속과 때로는 어리석은 결과 사이의 긴장을 본다. 그리고 그 꿈을 현실로 만들려 노력한다. 빌라 아흐뻴은 행복한 가정생활에 기여하기보다, 사용자를 조종하므로 마치 현대 단독 주택에 대한 프랑스인의 거부감을 위로하는 것처럼 보인다.
② 장 프루베: 건설적인 상상인가 유토피아인가?
작가가 오랫동안 실험한 경량 금속 정면의 일부 재현을 보여준다. 이 전시는 그가 생각한 가벼운 구조물의 전체 범위를 개발하지 못했던 설계 및 구성 요소에 영향을 미치지만, 스스로 터득한 아키텍트이자 엔지니어이며 금속 장인인 장 프루베(1901~1984)의 삶을 연구한다.
③ 중량 프리훼브 패널: 척도의 경제성인가 단조로움인가?
시테 드 라 뮤에뜨(La Cite de la Muett)8)와 유사한 르 아브르(Le Havre)9)재건을 위해 엔지니어 레이놀드 까뮤(Reynold Camus)가 디자인한 조립식 프리훼브 패널10)을 보여준다. 전후 프랑스는 많은 다른 나라에서처럼 국가에서 주도하는 프리훼브 조립 기술을 채택하여 값싼 고품질의 건물을 제공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르 코르뷔지에의 “산업을 이어받는 산업” 계획이 “매우 단조로운 풍경”을 낳았다는 점을 감안할 때 저렴한 건설을 향한 유토피아적인 추진력을 형성할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한다.
④ 그랑 앙상블: 치유의 헤테로토피아(다른 장소)인가, 아니면 은둔의 장소인가?
스페인 카탈루냐의 호세 루이 세르(José Luis Sert, 1902~1983)는 1942년 유진 보두앙(Eugène Beaudouin, 1898~1983)과 마르셀 로즈(Marcel Lods, 1891~1978)의 드랑시(Drancy)주택 계획을 전후 주택의 프로토 타입으로 설정했다. 이 비극적인 변화는 도시 외부와 도시에 반대하여 건설되고 현재 재조직되고 있는 프로젝트의 모호성을 반영한다.

윌로 씨는 오래된 마을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광장 옆에 있는 중층 주거건물 (다세대 주택)의 꼭대기 층에 산다. 구겨진 중절모, 헐렁한 코트, 우산, 파이프, 모든 게 윌로 씨의 캐릭터다. 그는 뒷모습으로 등장하고 엉성한 포즈로 서서 신문을 읽는데, 야채가게에서 포장지로 쓰려고 벽에 걸어둔 날짜 지난 신문이다. 윌로 씨가 층층이 미로처럼 꼬불꼬불 얽힌 통로를 지나 건물의 꼭대기에 있는 자기 방에 이르는 긴 여행을 하는 장면은 전자동 주택이 불편한 것과는 다른, 적어도 불편이 편리라고 생각하게 되지는 않는 그런 불편함이다. 윌로 씨가 창문 유리의 반사를 이용해 아래층의 카나리아를 울게 하는 장면을 보면 집과 인간이 서로 활용하면서 공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하나 괄목할 만한 것은 배경음악이다. 프랑스와 바르첼리니의 이 중독성 강한 곡은 성 꺄뜨르 전시회를 배경화면으로 두고 음악에 일본가사를 입혀 일본에서는 많이 알려졌다고 한다. 내용은 전혀 다르지만 같은 제목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일본 영화 <보꾸 노 오지상(ぼくのおじさん, 2016)>도 있고 한국에서는 ‘나의 아저씨(2018)’라는 제목의 드라마도 있었다.

다음 호는 구로자와 아키라(黒澤明 1910~1998)의 1957년 개봉 영화 <구모노수 죠-거미집城-(蜘蛛巢城 くものすじょう; The Throne of Blood)>를 다룬다.

 

글. 조인숙 Cho, In-Souk 건축사사무소 다리건축

조인숙 건축사·건축사사무소 다리건축(1986~ 현재)

·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건축학과 졸업(공학사)
·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건축학과 수료(건축학 석사/건축학 박사)
· 건축학 박사논문(역사·이론 분야): 한국 불교 삼보사찰의 지속가능한 보전에 관한 연구
· 독일 뮌헨대학교(LMU) 및 뮌헨공대(TUM) 수학(교환장학생)
choinsou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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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와 건축 _ 영화로 읽는 소설 속 도시와 건축 ④ <젊은 그들> 1955년 신상옥 감독 (원작: 1930~1931년 김동인 소설 ‘젊은 그들’/ 각색: 이형표/ 음악: 김동진/ 가야금: 김소희/ 고증: 석진수)

Architecture and the Urban in Film and Literature ④
The Youth – Jeolm-eun geudeul
Film 1955 directed by Shin Sang-ok (1926~2006)/ screen play by Lee Hyung Pyo (1922~2010)/
a 1930~31 Novel “the Young Ones” by Kim Dong-in (1900~1951)/ running time: 89 minutes

<젊은 그들> 포스터

신상옥의 초기작에 속하는 영화 <젊은 그들(the Youth, 1955년/90분/흑백)>은 1930년 9월부터 1931년 11월 10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됐던 김동인(1900~1951)의 동명 장편 연재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제목에서 상상되는 것과는 달리 19세기 말 조선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정치적인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나 흥선 대원군(興宣 大院君, 1820~1898), 민겸호(閔謙鎬, 1838~1882) 등 몇 명을 제외한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가공인물이어서 저자 스스로 역사소설이 아닌 통속소설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분류를 하자면 지나간 특정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시대극(時代劇, period drama)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시간적인 배경은 19세기 말 조선의 약 1년간이다. 1881년경 시작해서, 임오군란(壬午軍亂, 1882년), 군란 이후 대원군의 재집권과 청국(淸國)으로 납치되어 간 직후 정도다. 상당수의 영화 서술에 구한말, 대한제국 말 등으로 구분하는데 소설의 원작은 그보다는 조금 전이고 영화에서는 그보다 좀 뒤로 설정이 되어 있다. 공간적인 배경은 조선의 궁궐, 당시 흥선대원군의 운현궁, 대원군의 복귀를 도모하는 활민숙, 민겸호의 처소 등이다.

영화가 시작되며 “풍운의 이조 말엽 광무(光武) 19년,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정국은 극도로 어지러워갈 무렵 나라의 장래를 근심하면서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바로잡으려는 젊은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민겸호(閔謙鎬) 등에게 살해당한 중신(重臣)의 자손들로서 대원군과 내통이 있는 이활민이란 선비의 지도 아래 암약(暗躍)하고 있었다. 그들이 모인 곳은 활민숙(活民塾)이란 서재(書齋)였다”라고 서술하면서 ‘젊은 그들’의 의미를 암시한다.<사진 1>

<사진 1>

활민숙에서 남장을 하고 지내는 이인화(본명 이인숙/최은희 분)는 민겸호의 집에 복돌이라는 가명의 상노로 잠입하였다가 민겸호(최남현 분) 집에 객으로 머물던 양주 최 진사의 눈에 띄게 된다. 위험하다는 민겸호의 조언으로 이인화는 활민숙으로 되돌아간다. 명성황후의 친정인 여흥 민씨 일족이 권력을 장악하고, 대원군을 배척하고 문호를 개방하면서 나라는 어지럽게 된다. 대원군(강계식 분)의 막역한 지기인 이활민(장일 분)이 뜻을 같이하는 젊은이들(민겸호에 의해 살해된 중신의 자제들)을 모아 활민숙을 개설하여 학문과 무예를 닦게 한다. 사찰인 안재영(본명 명진섭, 명 참판 아들·활민숙의 리더/최무룡 분)은 남장한 이인화가 그의 부모가 정해준 자기의 정혼녀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멸문의 복수를 위하여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이인화는 자신의 정혼자가 명 참판의 아들인 것으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이름을 쓰고 있는 안재영이 가문이 정한 정혼자라는 것을 모르고 사형 사제로 가까이 지낸다. 그러다 대원군을 시해하러 잠입했다가 붙잡힌 자객의 이름이 명인호(곽건 분)라는 것을 듣고 자기와 정혼한 사이로 오인하고 그를 풀어준다. 일월산인(日月山人)<사진 1>으로 활동하는, 활민숙의 리더 안재영이 도망가는 명인호를 따라가 죽였다고 활민 선생님께 고하는 말을 뒤에서 듣고 놀란다. 정혼자로 오인한 명인호가 죽은 줄 알고 소복에 해당하는 베를 옷 속에 입고 스스로 상을 치르며 안재영을 원수로 생각하나, 다른 한편으로는 오랜 사형사제 관계라 그런지 별로 밉지가 않다. 대원군과 사사로운 감정이 있었던 명인호는 오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안재영과 의형제를 맺고, 안재영은 민겸호의 계획을 파헤치던 중 저격을 당했으나 우연히 구해져 생명을 부지한다. 활민숙은 초토화되고 안재영은 끝까지 민겸호를 쫓는다. 마침내 이인숙은 안재영이 정혼자 명진섭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민겸호는 도망치면서 결국 못 속으로 빠져 죽게 되고 민겸호의 총에 맞은 안재영은 마지막에 이인화(이인숙)와 만나지만 그가 죽으면서 영화는 끝난다.

영화의 시작부분에 설명된 ‘이조 말 광무 19년’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 연도다. 고종(高宗, 재위 1863~1907) 건양(建陽) 2년이자 광무 1년은 1897년이고, 고종 광무 11년이자 순종 융희 1년이 1907년이며, 1910년 순종 융희 4년으로 대한제국은 14년간의 막을 내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설 속 시간적 배경은 앞에 언급했듯이 1881년부터로 아직 대한제국 연호를 사용하기 전이다. 주요 역사적 흔적은 임오군란(壬午軍亂, 1882년),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1894년~1896년) 및 대한제국(大韓帝國, Korean Empire 1897~1910) 등이 있다. 아마도 광무 19년은 고종 19년으로 이해해야 할 듯하다.

특히 현장촬영 영화를 일부러 찾아서 보는 많은 이유 중 하나는, 1950~1960년대 한국 영화는 스튜디오가 활성화되기 전이라 거의 현장에서 촬영한 영화이므로 지금으로부터 60~70년 전의 궁궐이나 도시를 그 때의 모습으로 되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100년 전이나 120년 전이라면 상당히 오래 전으로 인식하기 마련인데, 60년 전과 또 그보다도 60년 전이란 시간은 한 사람 기억 속에서 생생하게 남아 있는 시간들이기도 하다. 그 기억들만 바르게 떠 올려도 오늘날 도시나 건물의 수리 복원의 쟁점인 원형에 대해, 아니면 좀 더 가까운 과거의 모습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긴다.

영화 <젊은 그들>의 대부분은 1997년 이래 세계유산 목록에 오른 창덕궁과 그 후원의 이곳저곳, 후원의 연경당, 궁궐 전각 부분의 왕과 왕비의 침전, 그리고 경복궁 향원정 및 경회루에서 촬영되었다. 창덕궁 연경당은 극중 활민숙으로, 때로는 민겸호의 처소로 스케치된다. 특히 연경당에서 촬영된 부분을 보다 보면 지금에 와서 달라진 것들도 눈에 띄고, 때로는 그대로는 있지만 무심코 보던 것들이 다시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영화에는 그대로 있지만 없어진 것들 중 하나는 연경당 일원의 굴뚝이다. 적어도 내 기억 속에도 꽤 최근까지 굴뚝 두 기(基)가 있었는데 어느 날 감쪽같이 사라져서 창덕궁에 문의했더니 동궐도에 없어서 없앴다고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없앤 지 불과 20년도 채 되지 않았다. 도저히 동의할 수는 없지만 문화재청의 전문가들의 결정인데 마구 반발할 수만도 없다. 동궐도는 제작연도를 1830년대 초로 보고 있다. 동궐도 및 동궐도형에 연경당은 묘사되어 있지만 낙선재 일원이 없는 것으로 보아 기록에 남은 연경당의 건립시기인 1827~1828년부터 낙선재 일원 조성시기인 1847년 사이에 제작되었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이 건립시기도 『궁궐지』에는 1828년(순조 28년)이라 되어 있으나 『한경지략』과 『동국여지비고』에는 1827년(순조 27년)으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궐도에 묘사된 연경당은 지금의 연경당과는 아주 다른 모습이므로 이 또한 1860년대 후반인 고종 연간에 재축을 하면서 지금처럼 안채, 사랑채, 반빗간 및 서재와 정자로 구성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특히 영화에서는 지금은 굳게 닫힌 반빗간(飯備間) 문이 열려 있다. 당시는 드나들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북행각 또는 별채라고 하는 반빗간은 안채 뒤에 담으로 구획된 부분으로 음식을 저장하고 조리를 하던 부엌과 광을 말한다. 영화에서 연경당의 정문인 장락문을 좋은 각도로 보여주면서 극 중 여러 번 여러 사람이 드나든다. 특히 이 장락문 편액을 건 소슬대문 부분은 안과 밖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연경당이 있는 곳은 궁궐의 후원으로 일반인에게는 상당히 조심스러운 곳이다. 즉 궁궐에서 연경당으로 간다는 것은 서로 다른 세계로 가는 일종의 암묵적인 공간이동의 처리가 필요한 곳이다. 즉, 궁궐의 원유공간인 후원은 왕을 위한 공간이다. 이곳에 진입하는 데는 다양한 과정이 필요하다. 문을 지나고 다리를 건너 다양한 공간을 거쳐서 나름 성스러운 공간인 궁궐 후원으로 진입한다. 그 후원에서 반대로 사대부집을 표방한 곳으로 들어가야/나가야 한다. 즉, 집을 에워싸면서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흐르는 물(일종의 명당수)을 건넘으로써 궁궐의 후원이라는 귀한 공간에서 다시 민(民)의 공간으로 들어간다/나간다. 좁은 실개천을 넓은 돌다리(사실은 몇 쪽을 연결했다)로 건너 소슬대문을 지나고 행랑마당을 지나고 장양문/수인문을 지나서 마당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드나듦의 끊임없는 교차 반복은 안이 밖이 되고, 밖이 다시 안이 되는 그런 공간구성을 조성한다. 다리를 건너기 전에는 계수나무가 있고 네 귀퉁이는 네 마리의 두꺼비가 사방을 지키는 사각형 돌 수반이 월궁을 상징하도록 설정되어 있다고 이해한다. 세 마리는 밖을 향하고 한 마리는 안쪽을 향하는 것을 정과 동의 균형을 맞춘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을 낸 적이 있다.<사진 2, 3>

<사진 2> 영화 속의 연경당

<사진 3> 오늘날(2020년 5월 5일) 연경당(장락문) 안팎에서 바라본 모습 © 조인숙

창덕궁 연경당은 지난 2012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같은 해 창덕궁 낙선재 일원은 석복헌 수강재는 제외하고 낙선재만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와는 달리 창덕궁 연경당은 안채와 사랑채 모두 하나의 보물로 지정되었다. 연경당에 관한 글 중 다음의 글이 보충설명이 될 것이다. “건축사 조인숙, 조선 사대부 공간 ‘연경당’ 엿보다”. – 2015년 1월 (http://kor.theasian.asia/archives/130839)
영화 속에서 연경당이 활민숙으로 촬영된 경우와 민겸호 집으로 촬영된 경우를 볼 수 있다.<사진 4> 사람을 심하게 고문하고 죽이려 데리고 나갈 때 여성가마에 구겨 넣는 모습의 마당 스케치, 일각문으로 사랑채 마당에서 안채 마당으로 들어온 장면 및 이인화가 남장을 하고 민겸호 집으로 늠름하게 들어가는 장면이다. 장락문 안에 들어서서 소위 사대부집의 남성 공간으로 진입하는 장양문을 향해 가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장애인 램프를 놓아서 문의 위용이 간 곳 없다. <사진 5>

<사진 4>

<사진 5> 영화 속 연경당에서 장양문으로 들어가는 장면과 오늘날의 장양문 모습

대원군·이활민·명진섭의 만남, 명진섭·기생 연연·명인호의 만남, 이활민· 최진사의 만남으로 묘사된 실내 공간 스케치로는 병풍을 배경으로 하거나, 다락의 장지문을 배경으로 하거나 발을 드리워 내·외부 공간의 소통, 또는 한지를 바른 창호나 가구 등을 표현한 것도 볼 수 있다.<사진 6> 특히 창호지를 바른 문의 마감의 경우 요즈음 도배 기법과는 달리 문의 가장자리가 너덜너덜해 보이는 것도 그대로 남아있다.<사진 7> 요즈음 와서는 창호지를 바를 때 지저분해 보이니 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문틀에 여백을 주고 반듯하게 잘라버리는데, 적어도 어린 시절 기억 속에는 해마다 창호지를 바르면 끝이 너덜너덜하도록 했던 것이 기억난다. 건축을 전공으로 하고 보니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보기에는 다소 지저분해 보이지만 기능은 아주 훌륭한 것이었다. 일종의 웨더스트리핑(weather stripping) 역할을 하도록 끝을 외기부분으로 더 나가게 남겨놓아 겨울이면 바람이 실내로 들어오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쌍창의 경우 두 짝의 문짝이 만나는 부분을 직절해서 반듯하게 만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서로 엇비슷이 잘라서 빛이 들어오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바람도 덜 들어오게 한 것이다. 그래서 두 짝을 한번에 닫는 것이 아니고 하나씩 닫아야 반듯하게 닫아진다.

<사진 6>

<사진 7>

민겸호가 활민숙을 치라는 명령을 하던 비밀회의는 지금의 경복궁 향원정과 향원지(香遠池) 못에서 스케치했다. 명진섭(안재영)은 취향교 밑을 헤엄쳐 향원정에 다다라서 그들의 음모를 듣는다. 결국 침입이 발각 나 혼신을 다해 도망하나 잡혀서 모진 고문을 당하고 날이 밝으면 처형당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사진 8>

<사진 8> 경복궁 향원정·취향교

경복궁의 향원정(香遠亭)과 취향교(醉香橋)엔 최근 현저한 변화가 일어났다. 육모정자인 향원정은 초석이 침하되어 2017년 이래 4년여 간의 대대적인 해체수리 복원을 하고 모습을 정비했다. 이와 아울러 전쟁 후 연못의 남쪽으로 복원되었던 돌로 된 다릿발에 목재 난간을 갖춘 평교인 목교 취향교를 없애고 북쪽인 건청궁과의 사이에 아치형 나무다리를 세운 것이다. 향원정에 사용된 목재연륜연대 측정 등으로 1885년 건립추정의 근거도 확보하는 등 상당한 역사고증을 통해 이루어진 것엔 찬사를 보내나 항상 의문으로 남는 것은 ‘원형 보존’이다. 전쟁 후 남쪽으로 복원된 목교로 고증되었던 내용은 시대가 바뀌어서 간 곳이 없다. 이제는 그 목교는 영화로 남은 다리가 되어버렸다. <사진 9, 10>

<사진 9> 2021년 11월 9일. 현재 복원된 취향교 © 조인숙

<사진 10> 2013년 11월 15일 우연히 찍은 경복궁 향원정 취향교(구). 이제 이런 장면은 없다. © 조인숙

백성들이 들고 일어난 것은 현재 창덕궁 희정당(왕의 침전 영역) 앞을 민중이 빠른 움직임으로 스케치 했고, 민겸호가 이를 피해 도망가는 구성은 민중에 밀려서 왕비의 처소인 대조전으로 들어가 연결 복도를 통해 희정당내부 쪽으로 도망을 하는 것으로 스케치했다.<사진 11> 마지막 부분은 시간 공간을 넘어 경복궁 경회루로 도망을 하는 민겸호와 명진섭의 육혈포 대결로 경회루 아래층에서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며 결국 가문끼리 정혼했던 두 남녀는 한 사람의 죽음으로 만난다.<사진 12>

<사진 11> 창덕궁 희정당

<사진 12> 경복궁 경회루

민겸호가 도망을 하던 대조전에서 희정당까지의 복도는 최근 개방 전까지 이 영화를 통해서 내부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지금 건물은 1917년 불에 타서 1922년 경복궁의 강녕전 및 교태전을 해제해서 이건하여 새로 지은 것이다. 왕의 침전이지만 집무기능을 함께 했던 건물로 1985년 둘 다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으로 스케치된 경복궁 경회루 부분을 자세히 보면 당시는 연못 전체가 연(蓮)으로 덮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경회루는 나라의 경사가 있거나 사신이 왔을 때 연회를 베풀던 곳이다. 앞의 향원정이 19세기말 고종과 명성왕후의 원유공간이라면, 경회루 및 경회루 못은 왕의 침전인 강녕전 서쪽에 15세기 초 조성된 국가공식 원유공간으로 1985년 국보로 지정된 건물로 수리복원을 수차례 거듭했다.<사진 13>

<사진 13> 2020년 5월 9일 촬영한 경복궁 경회루의 모습 © 조인숙

영화 속에 실수로 삽입된 슬레이트보드(혹은 클래퍼보드, slateboard/clapperboard) 일명 딱따기를 볼 수 있다. 이는 영화나 텔레비전 방송 촬영에 사용하는 도구로 사운드 마커(sound marker)라고도 한다. 프로덕션 넘버, 영화감독, 촬영 감독, 날짜, 테이크 넘버 등 정보를 촬영할 때마다 기록한다. 클랩스틱이 서로 마주치며 소리가 난다.

영화 <젊은 그들>의 동명 원작 소설(김동인作)

 

다음 호는 자끄 따띠(Jacques Tati 1907~1982)의 <나의 아저씨(Mon Oncle 1958)>를 ‘영화로 보는 한 도시 속 두 도시 이야기’라는 주제로 다룬다.
<나의 아저씨>는 1958년 프랑스 코미디 영화 제작자 자끄 따띠가 만든 첫 번째 컬러 영화이자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영화는 현대성과 미국식 소비주의에 대한 전후 프랑스의 여과 없는 집착에 대한 윌로씨(M. Hulot, 자끄 따띠 분)의 희극적이고 기발하며 순수한 투쟁에 중점을 두고 있다. 같은 해 바로 아카데미 최우수 외국어 영화상(오스카), 칸 특별상, 권위 있는 뉴욕 영화 비평가상을 수상하면서 빠른 속도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이 영화는 이 연재물의 다른 내용들과는 달리 소설을 바탕으로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건축적 배경과 서로 다른 공존하는 도시풍경을 중점으로 다룬다.

 

글. 조인숙 Cho, In-Souk 건축사사무소 다리건축

조인숙 건축사·건축사사무소 다리건축(1986~ 현재)

·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건축학과 졸업(공학사)
·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건축학과 석사/박사
· 건축학 박사(역사·이론–논문: 한국 불교 삼보사찰의 지속가능한 보전에 관한 연구)
choinsou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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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와 건축 _ 영화로 읽는 소설 속 도시와 건축 ③ <기러기> 1953년 도요타 시로 감독 (원작: 1915년[1911~1913] 모리 오가이 소설 ‘기러기’/ 각색: 나루사와 마사시게/ 음악: 단 이쿠마)

Architecture and the Urban in Film and Literature ③
The Wild Geese-雁, がん, GAN
film 1953 directed by Toyoda Shirō 豊田四郎(1906~1977) /a 1915(1911~1913) Novel by Mori Ōgai 森鷗外 (1862~1922) /screenplay: Narusawa Masashige 成沢昌茂(1925~2021)/music: Dan Ikuma 團 伊玖磨(1924~2001)

<기러기> 포스터 © The Criterion Collection

영화 <기러기(雁, Wild Geese. 1953)>는 모리 오가이(森鷗外 1862~1922)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이다. 도요다 시로(豊田四郎 1906~1977)감독의 비탈진 골목길을 다루는 안목과 당대 여배우 다카미네 히데코(高峰 秀子, Takamine Hideko, 1924~2010, 오타마 역)의 연기는 괄목할 만하다.

영화 <기러기>의 동명 원작 소설(모리 오가이作) © 문예출판사

시간적 배경은 1880년이고, 공간적 배경은 도쿄의대에서 시노바즈노이케(不忍池)로 가는 비탈진 골목언덕인 무엔자카(無緣坂)를 중심으로 한다. 오타마라는 한 소녀의 삶의 현실과 다양한 모습의 사랑들을 다루고 있다. 주인공 오타마(お玉)는 엿장수를 하는 아버지와 근근히 살아가는데 처자(妻子)가 있는 줄 모른 채 순사와 거의 강제 결혼을 한다. 어느 날 고향에서 온 그의 아내가 난리를 치자 우물에 빠져 죽겠다고 뛰쳐나갔다가 겨우 이웃이 말려서 살게 되었다. 그런 상황을 다 아는 스에조(末造)라는 고리대금업자가 매파를 넣어서 오타마를 첩으로 들여앉힌다. 오타마는 스에조가 포목상을 하는 줄 알고 그의 도움을 받으며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지만, 사실은 스에조가 고리대금업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게다가 상처한 줄 알고 첩 자리를 허락했는데 부인이 나타나서 갈등한다. 그러던 중 매일 집 앞을 산책하는 도쿄 의대생 오카다(岡田)에게 마음이 간다. 오타마는 기회를 기다리지만 끝내 마음을 전하지 못하고 독일로 유학을 떠난다. 이러한 줄거리에 공간적 배경인 옛 에도 도쿄의 한 골목길과 일본 가옥 등이 잘 녹아들어 있는 영화다.

“오래 전 이야기다”라고 시작하는 소설 원작은 24개의 소절로 구성되어 있고. 시간적 배경인 1880년 이후 35년이 지나 당시를 회상한다. 주인공 오카다와 가미조(上條)라는 하숙집에서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옆방에 살았던 선배격의 ‘내’가 서술한 소설이다. 이야기의 일부는 오카다와 친하게 지내면서 목격한 것이고, 나머지는 오카다가 독일로 떠난 후에 우연히 오다마를 알게 되어 전해들은 것이다. 즉, 전에 본 것과 나중에 들은 것을 조합하여 만든 이야기라고 소설의 말미에 서술하고 있다.

수 년 전 우연한 계기로 이 영화를 보게 되었고 영화의 한 장면인 귀뚜라미가 들어 있는 유리 사각형 등에 관심이 가서 다시 보고, 또 다시 보았다. 2년 전에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조선왕실 등 만들기 키트’인 사각형 등을 조립할 수 있는 상품으로 개발하여 판매함과 동시에 경복궁의 몇몇 전각에 매달아 놓았다. 그것을 보고 1880년을 배경으로 하는 1953년작 일본 영화에 등장하는 것과 같은 등이니 시대규명 등에 참고하라고 권했다. 국립고궁박물관 관계자는 이 등은 일본이 아닌 청나라와의 교류에 의한 산물이라고 한다. <사진 참조> 판단은 독자 여러분께 맡긴다.

영화 <기러기> 속 사각등 / 경복궁 만춘전의 사각등 © 조인숙

시노바즈노이케(시노바즈연못, 上野不忍池)는 일본 도쿄도 다이토구에 있는 우에노 공원 안의 천연 연못으로, 주위 둘레는 약 2킬로미터, 너비는 약 110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한다. 7~8월에는 연꽃이 피고, 겨울에는 11만 마리가 넘는 철새가 찾는다. 연못 한 가운데에는 칠복신 중 하나인 벤자이텐(弁才天べんざいてん、梵、巴: Sarasvatī)을 모시는 사당인 벤텐도(弁天堂 弁天島べんてんじま)가 있다.

무엔자카 언덕길은 동서로 200미터 정도, 북쪽에는 화재가 많았던 에도의 마을에서 지금도 현존하고 있는 방화 건축인 소석회(石灰Stucco, lime)로 외벽 마감을 한 고안지(講安寺, Kogan-ji)나, 도쿄대의학부가 있다. 남쪽에는 구 이와사키 저택의 돌담이 이어진다.
그 비탈 위에 무엔지라는 절이 있었던 것에서 유래하여 ‘무엔자카’라고 명명되었다고 한다. 에도시대의 지도에도 그 이름이 남아 있는 언덕이다. 혼고의 도쿄 대학에는 정문, 아카몽, 용오카몽 등 역사적인 많은 문이 있는데, 의학부 뒤편에 있는 철문도 그중 하나다. 1876년(메이지 9년)에 도쿄대 정문으로서 만들어지면서, 다이쇼 시대에는 철거되어 2006년 의학부 150주년 기념에 재건되었다고 한다. 이 철문에서 우에노 시노바즈노이케(연못)로 향해 내려가는 한 언덕길 일대가 바로 이 <기러기>의 무대 무엔자카다.

* 고안지는 정토종 사원(浄土宗寺院)으로 센슈잔 칭앙원(専修山称仰院)이라고 한다. 고안지는 경장 연간 유시마 텐진시타에 창건, 1616년(겐와 2년) 이곳으로 이전, 1928년(쇼와 3년) 8월 29일, 마츠가야 소안지(松が谷宗安寺)와 합병했다고 한다. 고안지 본당과 고(庫) 등은 토장조(土蔵造り)라는 방화 건축 양식이 남아 있어 분쿄구 문화재(文京区文化財)로 지정되어 있다.
* 토장조(土蔵造り)란 건물의 외관이 토장(土蔵)처럼 대벽(大壁 おおかべ)구조로 흙벽 위에 석고 등을 바르고 마무리한 것으로, 그 이름대로 창고에 많은 건축양식이다. 토장(土蔵)의 주구조는 목조이지만, 외벽을 두꺼운 토벽으로 하고 표면은 백벽으로서, 외측에 목조부분을 노출하지 않는 방화 건축이다. 참고로 대벽(大壁 おおかべ)은 기둥 등의 나무구조를 노출하지 않는 구조이고 진벽(真壁 しんかべ)은 기둥과 보가 노출된 구조다.

 

주인공인 오카다 청년은, 무엔자카를 산책로로 걷는다.
“오카다가 매일 하는 산책은 대체로 그 코스가 정해져 있었다. 한적한 무엔자카(無緣坂)를 내려가, 오하구로(お歯黒)처럼 검은 아이소메천(藍染川)이 흘러 들어가는 시노바즈노이케(연못) 북쪽을 돌아 우에노 산(上野山)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유명한 요릿집인 마쓰겐(松源)이나 간나베(雁鍋)가 있는 히로코지(廣小路)로 가서, 좁고 번잡한 나카초(仲町)를 지나 유시마텐진(湯島天神) 신사 경내를 통해 음산한 가라타치데라(カラタチ 寺)의 모퉁이를 돌아서 온다. 가끔 나카초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무엔자카로 돌아올 때도 있다.” (모리 오가이, 김영식 옮김, 『기러기』, 문예출판사, 2012, 11~12쪽)

* 오하구로(お歯黒): 이를 검게 물들이는데 사용하는 액
* 아이소메천(藍染川): 도쿄(東京都)를 흐르는 타니타가와(谷田川)의 다이토구(台東区)부근의 별명.

 

“그 당시에도 무엔자카 남쪽엔 이와사키 저택이 있었는데 지금과 같이 높은 토담은 없었다. 거칠게 쌓은 돌담의 이끼 낀 돌들 사이로 고사리와 쇠뜨기가 보였다.” (모리 오가이, 김영식 옮김, 『기러기』, 문예출판사, 2012, 15쪽)

* 구 이와사키 저택 (旧岩崎邸庭園) : 구 이와사키 저택은 미츠비시 재벌을 창설한 이와사키 가문의 본저로 1896년에 건립되었다. 3대 사장 이와사키 히사야(1865~1955)때 세운 양옥이다. 영국 건축사 조시아 콘도르(Josiah Conder, 1852~1920)가 설계한 서양식 건물로 17세기 영국의 자코뱅(Jacobean) 스타일을 바탕으로 르네상스나 이슬람 양식도 도입한 목조 건축이다. 서양식 건물과 함께 일본식 건물의 일부도 남아 메이지 시대에 근대화를 향해 힘차게 발돋움하던 당시 재벌의 장대한 저택의 모습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주소: 다이토구 이케노하타 1-3-45)

<기러기> 캡처 _ 도코노마

“스에조는 진위를 알 수 없는 육필 유키요에(浮世繪) 족자와 치자꽃을 꽂아 놓은 작은 꽃병이 있는 도코노마(床の間)를 등지고 앉아 예리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리 오가이, 김영식 옮김, 『기러기』, 문예출판사, 2012, 34쪽)

* 도코노마(床の間)란, 일본 주택 중 격식을 높인 손님간 등에 마련되는 일정한 공간으로 바닥보다 한 간 높게 만든 곳이다. 족자를 걸고 도자기나 꽃병 등으로 장식한다. 정확하게는 ‘토’로 부르고, ‘도코노마’는 속칭이다.

<기러기> 캡처 _ 마쓰겐(松源)

영화에는 특히 당대 도쿄의 무엔자카 및 일본 목조주택건축의 세세한 부분을 화면에 잘 담고 있다. 요리집 마쓰겐(松源)이나 오타마가 사는 집의 다다미 구조 및 장마루, 다다미와 후수마 및 도코노마 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주요 등장인물들은 무엔자카를 반복해서 산책하거나 지나간다. 스에조는 물건을 사들고 오타마를 방문하고, 스에조의 아내와 오타마는 선물받은 양산을 들고 언덕길에서 마주친다. 보이지 않는 영역을 잇기도 하고 가르기도 하는 조그만 다리에서 아버지와 만나기도 하고 떠나는 오카다를 바라보기도 한다. 게다가 기러기가 안행(雁行)을 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소설의 마지막에는 기러기를 잡아서 가져가는 부분이 나오는데 한 쌍이 함께 하지 못한다는 것을 은유하는 것 같다. 다양한 에피소드가 무엔자카 비탈길 언덕에서 묘사된다.

<기러기> 캡처 _ 장마루가 있는 구조

또 하나, 이 비탈을 유명하게 한 것은, 사다 마사시(さだまさし佐田 雅志 1952~ )의 명곡 <무엔자카>다. “‘어머니’가 어린 ‘나’의 손을 잡고 이 무엔지(無緣寺)를 올라갈 때마다 언제나 한숨을 쉬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한다.”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어른이 되고 나서 불우했던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리는 이야기의 노래인데, 비탈의 이름의 슬픔과 함께, 듣는 사람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
여기서 무엔(無緣)이란 행운과는 정말 인연이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오카다는 졸업을 기다리지 않고 유학을 가기로 결정해 벌써 외무성에서 여권을 받고 대학에 자퇴서를 냈다. 동양의 풍토병을 연구하러 온 교수 W가 왕복 여비 천 마르크와 월급 2백 마르크를 주는 조건으로 오카다를 고용했기 때문이다. 독일어를 할 수 있는 학생 중에서 한문을 잘 하는 사람을 찾아 달라는 부탁을 받고 벨츠(Baelz)교수가 오카다를 소개했다.” (모리 오가이, 김영식 옮김, 『기러기』, 문예출판사, 2012, 128쪽)

* 벨츠(Baelz) 교수는 독일의 의학자로 1877년 초청을 받아 일본에 왔다. 도쿄대학에서 생리학 내과 정신학 등을 강의하며 일본 근대의학의 확립에 공헌했다.

지금 도쿄대의 전신인 일본의 현대식 고등교육은 1877년 시작되었다. 19세기 말의 일본과 독일의 교류에 대한 내용이 소설에 녹아 있다.

모리 오가이(森 鷗外, 1862~1922)는 일본 메이지·다이쇼 시대의 소설가·번역가·극작가다. 육군 군의총감 정4위 훈2등 공3급 의학박사이자 문학박사로 제1차 세계대전 이래, 나츠메 소세키와 나란히 문호(文豪)라고 불렸다. 본명은 모리 린타로(일본어: 森林太郎)이고, 도쿄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육군 군의관이 되어 일본 육군성에서 파견한 유학생으로서 독일에서 4년을 보냈다. 귀국 후 번역시 ‘오모카게(於母影)’, 소설 ‘무희(舞姫)’, 번역시집 ‘즉흥시인’을 발표했고, 또 스스로 문예잡지 <시가라미 소시(しがらみ草紙)>를 창간해서 문필 활동에 들어갔다. 그 후, 군의총감(중장에 해당)이 되어 한때 창작 활동에서 멀어졌지만, <스바루(スバル)> 창간 후에 ‘이타 세쿠스아리스(ヰタセクスアリス)’, ‘기러기’ 등을 집필했다. 노기 마레스케의 순사에 영향을 받아서 ‘오키쓰 야고에몬의 유서(興津弥五右衛門の遺書)’를 발표한 뒤에, ‘아베 일족(阿部一族)’, ‘다카세부네(高瀬舟)’ 등의 역사소설, 사전(史伝) ‘시부에 주사이(渋江抽斎)’를 썼다. 또, 제실박물관(帝室博物館) 총장이나 제국 미술원(帝国美術院, 현재의 일본 예술원日本芸術院) 초대 원장 등도 역임했다.

도쿄대 의대생 오카다 역의 배우 아쿠다카와 히로시(芥川 比呂志 1920~ 1981)는 라쇼몬(羅生門 1915)의 작가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あくたがわ りゅうのすけ 1892~1927)의 아들이기도 하다.

다음 호는 김동인(1900~1951)의 장편 연재소설 ‘젊은 그들(1930~1931)’을 신상옥 감독의 1955년 필름으로 다룬다.

* The Youth-Jeolmeun geudeul-(film 1955 directed by Shin Sang Ok(1925~2006)/screen play by Lee Hyung Pyo(1922~2010)/a1930~31 Novel ‛the Young Ones’ by Kim Dong-in(1900~1951)/running time: 89 minutes.

글. 조인숙 Cho, In-Souk 건축사사무소 다리건축

조인숙 건축사·건축사사무소 다리건축(1986~ 현재)

·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건축학과 졸업(공학사)
·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건축학과 석사/박사
· 건축학 박사(역사·이론–논문: 한국 불교 삼보사찰의 지속가능한 보전에 관한 연구)
choinsou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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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와 건축 _ 영화로 읽는 소설 속 도시와 건축 ② <젊은 느티나무> 1968년 이성구 감독 (원작: 1960년 강신재/ 각색: 나한봉/ 음악: 김동진)

Architecture and the Urban in Film and Literature ②
A Young Zelkova – Jeolmeun Neutinamu
Film 1968 directed by Lee Seong-gu(1928~2005) /
a 1960 Novel, Young Zelkova Tree by Kang Shin-jae(1924~2001)

<젊은 느티나무> 포스터 © Yang Haenam Collection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아니 그렇지는 않다. 언제나, 라고는 할 수 없다.”
이는 1960년대의 많은 여학생들에게 잊을 수 없는 소설의 첫 문장으로 당대 문학소녀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내용이다. 많은 곳에 이미 언급되었지만 특히 이 첫 문장은 이상(1910~1937)의 단편소설 「날개 (1936)」의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와 최인훈(1936~2018)의 중편소설 「광장(1960)」의 “바다는 크레파스보다 진한, 푸르고 육중한 비늘을 무겁게 뒤채면서, 숨을 쉰다”와 함께 삼대 유명한 소설의 첫 문장으로 알려져 있다.

「젊은 느티나무」는 1960년 1월 사상계에 발표한 강신재(1924~2001)의 단편소설이다. 소설 속 여고생 숙희는 느티나무가 있는 마을에서 어머니가 사는 서울로 이주한다. 숙희는 개가한 어머니의 새 남편인 경제과 대학교수 ‘무슈 리’의 아들인 물리학 전공의 대학생 오빠 현규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혼란한 감정을 느끼게 되고, 그것이 사랑임을 알게 되면서 겪는 갈등을 표현한 1인칭 소설이다. 소설에 “재작년에 서울에 도착했고…”, “나는 E여고로 전학을 하였다…”, “지난 해 4월에는 〈미스 E여고〉에 당선되었다” 등으로 묘사된 것으로 보아 여고생이 대학생이 된 후 변화하는 사랑의 감정을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영화에서는 스물네 살의 남성과 스무 살의 계집아이, 즉 숙희가 스무 살의 여대 1학년 전학생으로, 오빠 현규는 스물네 살의 수재 대학생으로 묘사된다.
영화는 1968년 3월 개봉했고 약 42,000명의 관객을 동원했다고 한다. 1968년 영화의 주연은 신성일(1937~2018)과 문희(1947~) 윤양하(1940~2021) 등이다. 타이틀 롤을 맡은 문희가 스무 살로 제 나이의 역을 연기했고 상대역인 신성일은 실제 나이 보다 어린 스물 네 살의 청년 연기를 했다. 안성기(1952~ )가 지수(윤양하 분)의 동생인 고교생으로 출연하며 마지막 아역을 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소설에 묘사된 마을이나 건축물 또는 실내 관련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는 성큼성큼 내 방으로 걸어 들어와 아무렇게나 안락의자에 주저앉든가, 창가에 팔꿈치를 짚고 서면서 나에게 빙긋이 웃어 보인다.”
“뽀얗게 얼음을 내뿜은 코카콜라와 크래커, 치즈 따위를 쟁반에 집어 얹으면서 내 가슴은 ….”
“오늘도 그는 그렇게 내 방에서 쉬고 나더니, 「정구칠까?」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옆집이라고 하는 것은 구왕가에 속한다는 토지의 일부분인 기실 집이라고는 까마득히 떨어져서 기와집이 두어 채 늘어서 있고 이족은 휘엉 하니 비어 있는 공터였다. 그 낡은 기와집에 사는 사람들은 이 공터를 무슨 뜻에선지 매일 쓸고 닦고 하여서 장판처럼 깨끗이 거두어 오고 있었다.”
“시무룩해 가지고 테라스 앞에 오면…(중략)… 그 안 넓은 방에 깔린 자색 양탄자, 여기저기 놓인 육중한 가구, 그 안에 깃들인 신기한 정적, 이런 것들을 넘겨다보면…(중략)… 그리고 주위에 만발한 작약, 라일락의 향기, 짙어진 풀내가 한데 엉켜 풋풋한 이 속에 와서 서면—”
“서울의 중심에서 떨어진 S촌 숲 속 환경도 내 마음에 들고, 무슈 리가 오래전부터 혼자 살아왔다는, 담쟁이덩굴로 온통 뒤덮인 낡은 벽돌집도 기분에 맞는다.”
“지수는 K장관의 아들이다. 언덕 아래 만리장성 같은 우스꽝스런 담을 둘러친 저택에 살고 있다. 현규랑 함께 정구를 치는 동무이고 어느 의과대학의 학생인데…(중략)… 지프차에다 유치원으로부터 고등학교까지의 동생들을 그득 싣고 자기가 운전을 하여 학교에 가곤 한다.”
“할머니한테 갔다 온다고 우겨 대어 서울을 떠났다.”
“날이면 날마다 나는 뒷산에 올라간다. 한 시간 남짓한 거리에 여승들의 절이 있다. 나는 절이란 곳이 싫었으나 거기를 좀 더 지나가면 맘에 드는 장소가 나타났다. 들장미의 덤불과 젊은 나무들의 초록이 바람을 바로 맞는 등성이였다.
바람을 받으면서 앉아 있곤 하였다. 젊은 느티나무의 그루 사이로 들장미의 엷은 훈향이 흩어지곤 하였다.”

여승이라고 표현된 비구니들의 조직은 1968년 이후 생긴다. “전국비구니회의 전신인 우담바라회가 1968년 1월 결성된 이래 마땅히 갈 공간 한 평 없어 조계사 구석 3~4평짜리 가건물에서 곁방살이하던 시절…” (출처: 불교신문-“비구니 스님의 어제와 오늘-현황” 2003.03.08)
영화에는 당시 서구의 많은 영화에 등장하는 기차 장면이 시작부에, 그리고 거의 뒷부분에 사용된다. 느티나무가 있는 외가에서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타러 가는 부분의 화면이 좀 더 자세하면 어느 마을에서 촬영했는지 알 것도 같은데 글자를 알아볼 수가 없어서 좀 아쉽다. 후반부에는 기차를 타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는 광경도 있다. 당시 서울까지의 기차 삯 321원은 상당히 흥미로운 내용이다.
신형 새마을호 객차는 1968년 이후 스테인리스로 제작되었다. 그 이듬해인 1969년 중앙일보 “기차 삯과 담배 값”에 “정부는 스스로 경제의 안정기조를 흐리게 하는 공공요금 인상을 교묘한 수단으로 합리화함으로써 국민의 빈축을 사고 있다. 특급열차의 3등을 폐지하고 1·2등차만 운행키로 하였다는데 이는 사실상의 철도운임 인상을 꾀한 것으로서 첫날부터 승객들을 크게 당황케 하였다.”라는 기사(중앙일보, 1969.02.11)도 있다. 이 시기는 집중적으로 객차의 국산화가 이루어지던 때다. (출처: 한국철도 차량 100년사)

1964 포드 머스탱 컨버터블. © 한국영상자료원

기차 외에 영화에 등장하는 자동차, 버스, 자전거 등의 탈것들을 살펴보자. 소설에서 동생들을 그득 싣고 다니는 지프차로 묘사된 지수의 차는 영화에서는 중형급의 클래식 컨버터블이다. 영화 <결혼 교실(Marriage classroom, 1970)>에 등장했던 자동차와 유사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포드 머스탱 1964년/1967년 모델인 듯하다. 1960년대 자동차와 관련해서는 다음이 흥미롭다. “1966년 1월 신진공업이 토요타와 기술 제휴를 맺고, 신진자동차공업(주)로 사명을 바꿨다. 그리고 차관을 바탕으로 근대화된 조립공장을 건설해 토요타의 1,500㏄급 코로나를 CKD(complete knock down, 완전 분해해서 수입)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1967년에는 중형급의 크라운을 생산….” (출처: 자동차의 역사 – 1960년대 한국의 자동차 http://www.motorian.kr/?p=5391)
대학생들이 단체로 대관령으로 스키를 타러 가는 버스는 경남관광버스인데 화면에 전화번호를 여러 번 확대해서 보여준다. 요즈음 말로 하면 제품의 간접광고(PPL: product placement)라 할 수 있겠다.

<젊은 느티나무> 캡처 ©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에서 서울 거리는 “처음 보는 서울 거리, 그 큼직큼직한 건물들과 복잡한 거리…”라고 묘사된다. 뒤에 지수가 자동차에 숙희를 태우고 가는 서울 거리는 양 옆에 줄지어 보이는 간판들이 아주 흥미롭다. ‘건축자재, 부동산 공사, 목재상사, 건축자재사, 명성 공업사, 건설건재, 삼성 후형 스레트’ 등 그 사이에 ‘범아건축설계사무소’라는 간판이 있다.
같은 해 대한건축사협회 소식에는 회원 동정에 ‘사무소 이전, 결혼, 회원가입, 사무실 명칭변경, 위원위촉, 면허 취소 및 분소 설치’ 등의 기사가 있는데 여기에 범아 건축, 삼미 건축설계사무소, 조자룡 건축사무소 등이 회원가입한 것으로 나와 있다. (출처 : 1968년 5월 <건축사> 협회소식)
전쟁 복구와 개발의 필수적인 산업들-건축자재와 부동산 간판이 줄지어 있는 거리 풍경…. 이들은 전형적인 개발도상국의 거리 풍경이다.
밤거리에 보이는 삼각형의 OB맥주 간판, 그리고 다방 풍경….. 다방에서 지수와 숙희가 마신 진 피즈(Gin Fizz). – 2020년 IBA (International Bartender Association)의 공식 칵테일인 진 피즈는 피즈 스타일의 칵테일 중 하나이자 가장 유명한 칵테일이라고 한다. ‘피즈’란 미국의 유명 바텐더 제리 토마스(Jerry Thomas)가 정립한 스타일로, 스피리츠에 탄산과 레몬주스, 설탕을 더해서 만든 것을 말한다.

등장하는 건축물 중 괄목할 만한 집은 소설 속 “서울의 중심에서 떨어진 S촌 숲 속”의 “담쟁이덩굴로 온통 뒤덮인 낡은 벽돌집”이다. 낡은 벽돌집은 영화에서는 삼각형 뾰족 지붕을 한 석재로 마감을 한 멋진 집으로 그 삼각형 지붕 아래엔 숙희의 방과 현규의 방이 있다. 사실 영화 속 이 댁은 당시 설계를 해서 지은 집으로 판단되나, 어느 건축사의 설계인지 가늠이 안된다(혹시 알고 있는 분들은 말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소설 속 안락의자로 묘사된 흔들의자(Rocking chair)가 방에 있고, 여닫이 방문에 끼워 넣은 반투명 유리창 디자인은 눈 목(目)자 파자(破字)를 하나 아니면 둘이나 셋을 결합하여 고창인 란마(欄間らんま) 디자인에 쓰이던 달 월(月)의 파자(破字)를 응용한 것으로 보인다. 거실엔 육중한 고급 서양식 가구들이 중앙에 자리하고, 한편으론 전통적인 사방 탁자 등도 그대로 있다.

현대화된 가구와 일부 전통 가구를 함께 배치했듯이 등장인물들의 의상도 숙희의 어머니(주증녀 분)는 한 복에 비단 배자를 곱게 입고 젊은이들은 1960년대 문화를 대변하는 경쾌한 차림이다. 지식인의 외모를 한 무슈 리(박암 분)는 파이프를 들고 있다. 식탁에서도 현대화된 식사차림이기는 하나 밥주발과 국사발 크기는 여전했고, 그릇들은 전통적인 사기로 보인다. 소설이 발표된 것이 1960년인데 집에 냉장고가 있고 코카콜라, 치즈, 크래커를 꺼내 먹는 것으로 보아 경제적으로 상당히 넉넉한 집으로 묘사된다. 모차르트를 듣는 문리과대학 물리학 전공의 현규, 그리고 테니스를 잘 치며 연애편지도 멋지게 쓰는 현규 친구이자 졸업 후 도미 계획을 하고 있는 의과대학생 지수. 지수는 소설에서는 K장관의 아들로 묘사되고, 영화에서는 재벌가의 아들로서 티를 내지 않는 상당히 괜찮은 젊은이로 묘사된다. 지수의 집은 우스꽝스러운 담벼락으로 둘러싸인 대저택이라고 소설에 묘사되어 있으나 영화에는 자세히 나오지 않는다. 이들은 테니스를 치는데(소설에서는 정구를 친다고 되어 있다), 네트를 울러 메고 와서 설치를 하고 복식으로 테니스를 친다. 여중생 때 같은 반에 아버지는 공직에 계시고 오빠가 셋인 친구가 있었다. 아버지와 오빠들 넷이 복식 테니스를 한다고 여러 번 말해서 언니 오빠가 없는 나는 그게 너무 부러웠다.

영화 속 여주인공이 다니는 석조 아치로 된 청운여대의 교문을 보면 아마도 지금의 ㄱㅎ 대학이 아닌가 한다. 당시 ㅇㅅ 대학, ㅎㅇ대학 등은 학생들이 자동차를 가지고 다닌 경우가 종종 있었고, 많지는 않았지만 부모와 함께 골프를 치는 학생들도 더러 있었다. 여고생 시절 남학교와 함께 하던 봉사단체인 클럽 회원 중 중학생 때부터 골프를 하던 남학생 선배 하나가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그 대학총장 골프 코치를 하던 것이 기억난다.

영화 속 현규를 비롯한 대학생들은 단체로 경남관광 버스로 대관령에 스키를 타러 간다. 리프트가 없던 시절이라 옆으로 걸어서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활강으로 내려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강원도 대관령 스키장은 1953년 건설되었다. 등 뒤의 번호판을 보면 1967년 2월 평창군 대관령면 지르메 제1 슬로프에서 열린 제48회 전국체육대회 동계스키대회 광경과 오버랩된다. (참조: 대한뉴스 610호 대관령 스키대회)
이들은 캠프파이어를 하며 당시 풍미하던 트위스트 음악과 춤으로 즐겁게 논다. 트위스트는 미국을 포함해 전 세계적으로 트위스트 열풍을 일으킨 락앤롤 가수 처비 체커(Chubby Checker, 1941~)의 곡 트위스트(The Twist)에 맞춰 춘 춤의 일종으로 1960년대에 미국에서 시작되어 전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는데 발목 부분으로 균형을 잡고 가슴, 허리, 팔을 좌우로 움직이는 형태의 춤이다.

영화 <반도의 봄(1941)>, <시집가는 날(1957)>, <자유결혼(1958)> 등의 감독 이병일 (1910~1987,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영화를 공부)의 동생인 이성구 감독(1928~2005)은 지난 호에 소개한 그의 대표작 <장군의 수염(1968)>으로 이듬해인 1969년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분 작품상 및 감독상을 받았다. 그의 아내는 김기영 감독(1919~1998)의 <하녀(1960)>에서 하녀 역을 연기한 이은심(서옥선 1935~, 1960년 제1회 한국최우수영화상 신인상 수상)이다. 그들은 1982년 브라질로 이민을 갔으며 이성구 감독은 그곳에서 타계했다. 원작을 각색한 나한봉(1933~2015)은 한국영화계를 대표하는 시나리오 작가 가운데 한사람으로, 대표작인 <초우(1966)>, <메밀꽃 필 무렵(1967)>, <아리랑(1968)> 등 약 70여 편의 시나리오가 영화화되었다. 영화 음악은 ‘행군의 아침’, ‘가고파’, ‘뱃노래’, ‘수선화’, ‘진달래꽃’ 등 수 많은 가곡을 작곡한 김동진(金東振, 1913~2009)의 곡이다. 그는 백치 아다다 등 영화음악도 많이 남겼다. 1968년, 여중생일 때 작문을 가르치시던 은사님인 시인 김영삼(1922~1994)으로 부터 군가 1번 ‘행군의 아침’을 6.25전쟁 피난길에 기차 안에서 작사하고 거기에 곡을 붙인 분이 김동진 선생님이라고 누누히 들었던 기억이 난다. (출처: 한국영상자료원)

다음 호는 일본 문필가 모리 오가이 (1924~2001)의 장편소설 「기러기 (1911~1913)」를 토요타 시로 감독의 1953년 필름으로 다룬다.
* The Wild Geese-雁, がん, GAN – (film 1953 directed by Toyoda Shirō 豊田四郎 /a 1915 [1911-1913] Novel by Mori Ōgai 森鷗外 [1862~1922]) 상영시간: 104 minutes

 

글. 조인숙 Cho, In-Souk 건축사사무소 다리건축

조인숙 건축사·건축사사무소 다리건축(1986~ 현재)

·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건축학과 졸업(공학사)
·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건축학과 석사/박사
· 건축학 박사(역사·이론–논문: 한국 불교 삼보사찰의 지속가능한 보전에 관한 연구)
choinsou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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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와 건축 _ 영화로 읽는 소설 속 도시와 건축 ① <장군의 수염> 1968년 이성구 감독 (원작: 1966년 이어령/ 각색: 김승옥)

Architecture and the Urban in Film and Literature ①
<General’s Mustache> 1968 directed by Lee Seong-gu (1928~) /
Screen text by Kim Seung-ok (1941~)/ a 1966 novel by Lee O-young (1934~2022)

개괄

30여 년 전인 1990년부터 사무실에서 설계 외에 다양한 문화활동을 곁들여 왔다. 건축작품 전시회를 한다든가 세미나도 열고 서울 답사를 하는 등. 그 후 설계 일이 주춤할 때마다 드문드문 지속해 온 일은 ‘서울을 걷는다’와 ‘영화 보기’다. 그 중 영화 보기는 주로 ‘영화로 남은 도시와 건축’을 주제로 했다. 종합촬영소가 활성화되기 전 영화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거리 또는 괄목할 만한 건축물이나 건물 내부에서 촬영을 했다. 무심코 보던 흑백영화에서 없어진 건물을 우연히 발견한 것이 영화모임의 계기가 되었고, 상당히 많은 1950~1960년대 영화를 통해 이미 기록에서 사라진 건물들의 모습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오래전 강의자료로도 활용한 대표적인 영화들은 <젊은 그들(1955, 신상옥)>, <서울의 휴일(1956, 이만희)>, <서울의 지붕 밑(1961, 이형표)> 등이다. 창덕궁 연경당에서 시작해 경복궁 경회루에서 마치는 영화 <젊은 그들(1931, 김동인 원작)>에서는 지금은 바뀐 향원정 일대의 취향교와 창덕궁 희정당, 대조전 내부의 실내공간까지 볼 수 있고, 서울의 휴일에서는 청계천 복개 전 제 자리에 있던 수표교, 화재로 소실된 프랑스에서 설계해 온 벽수산장(도면이 남아있다), 반도호텔 등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한옥 강의에 자주 사용하는 <서울의 지붕 밑>에서는 하천 복개로 사라진 현 통의동 근방의 대상한옥(帶狀韓屋: 띠 모양 한옥군) 주거지의 신구 문명이 마주하는 한 골목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를 통해 다양한 60년 전의 한옥을 볼 수 있다.
2021년 말에는 서울시립대 박물관 요청으로 ‘영화로 남은 60년 전 서울’이라는 주제의 강의를 통해 1950~1960년대에 만든 걸작 중 6개의 영화를 다루기도 했다. 대학생들이 강의를 촬영하고 유튜브 편집을 한 것이 시립대학교 공식 홈페이지에 수록되어 있다. (참고 : [서울시립대학교 박물관 시민 강좌] 영화로 남은 60년 전 서울)

2022년엔 문학작품을 영상으로 만든 것을 10여 개 선정해서 내 외국인이 함께 하는 월례모임을 통해 도시와 건축이 어떻게 묘사되었는가를 매달 한 편씩 살펴본다. 무슨 거창한 목표나 목적은 없지만 유쾌한 시간들을 공유하고자 한다.

 

장군의 수염

당대 영향력 있는 분으로 살다가 얼마 전 가신 이어령(李御寧 1934. 1. 15~2022. 2. 26) 선생님도 기릴 겸 <장군의 수염(1968)>으로 시작한다.

한국 모더니즘 영화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장군(將軍)의 수염>은 1966년 잡지 『세대』에 발표된 이어령의 같은 제목 소설을 김승옥(1941~ )1)이 각색하고 이성구 감독(1928~ )이 만들어 1968년 개봉한 영화다. 어둡고 난해해서 흥행에 실패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1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고 한다. 특이한 점은 파격적으로 애니메이션을 삽입한 점이다. 애니메이션 감독은 서울대학교 건축과 출신이자 한국 최초의 장편 만화 영화 <홍길동(1967)> 감독 신동헌 화백(1927~2017, 만화가 신동우의 형)이다.

전직 사진기자 김철훈의 예사롭지 않은 죽음에 민완 형사가 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해 그가 살아있을 때 접촉했던 사람들을 차례로 만나며 사건의 실마리를 찾으려 하는 중, 그와 한때 동서생활을 했던 댄서 출신 나신혜를 만난다. 대화 중 철훈이 ‘고해(告解)놀이’나 ‘추장놀이’ 등을 비롯한 비현실적인 망령된 고집에 사로잡힌 사나이였다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고 아마도 그가 자살을 택했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며, 일단 수사를 마무리 짓는다는 것이 줄거리다.

<장군의 수염> 포스터 © Yang Haenam Collection

소설 속 ‘기우는 뗏목과 바다’로 묘사된 벽에 걸린 그림은 <메두사호의 뗏목(Le Radeau de la Méduse, 캔버스의 유화 716 x 491 cm, 낭만주의 역사화)>이 원본이다. 테오도르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 1793~1824)가 당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소재로 1819년에 제작한 그림으로 루브르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를 언급한 것으로 보아 저자는 이미 파리를 방문했던 것으로 보인다.

2층 셋방에서 전직 사진기자인 한 남자 ‘철훈’의 연탄가스 중독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영화는 시작한다. 김철훈이 세 든 집과 그 동네 및 나신혜가 근무하는 M빌딩 등은 1960년대의 서울을 잘 보여준다.
“철훈은 신혜와의 동서생활(同棲生活)을 ‘표류’라고 했고 2층 셋방을 ‘캐빈(선실)’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끝없이 표류해 가는 거라고 그는 신혜에게 말했다.”
“그들은 ‘선창(서쪽 창)’에 기대어 노을이 지는 것이라든가 오물이 떠 있는 그 지저분한 바다 (市街)를 굽어보는 것으로 얼마는 만족했다.”
“연탄재, 달걀 껍데기, 말라비틀어진 쥐의 시체, 쓰레기들-좁고, 질고, 어두운 골목길을 몇 개나 지나왔다. 사그라져 가는 판자 울타리들이 늘어선 골목길을 빠져나오자 또 한 번 커브가 꺾였다.”
“김철훈이 세 든 집은 그 골목이 끝나는 막다른 지점에 있었다. 일본 사람들이 살던 철도 관사였던가 보다. 낡은 2층 목조건물들의 나가야(長屋)인데, 여러 세대마다 제가끔 울타리와 대문을 해 닫을 수 있게 뜯어고친 것이라 그 구조가 복잡해 보였다.”
“육조 방(다다미를 뜯어낸 마루방) 이었지만 가구가 없는 탓인지 허전하도록 공간은 넓었다. 연탄난로는 불이 꺼진 채였다. 책상이 놓인 벽 위에는 그림들이 걸려 있다. 제리코의 그림인가? 조난당한 사람이 기우는 뗏목 위에서 먼 바다를 향해 외치고 있다.”
“서쪽으로 넓은 창 하나가 뚫려 있는데, 해가 질 무렵에나 겨우 햇볕이 들어올 것 같았다. 흡사 동굴과도 같은 방이었다.”

일제가 남기고 간 목조건물의 일종으로 지금은 서울에서 거의 사라져 보기 어려운 나가야(長屋)는 일본에서는 서민 거주지역인 시타마치(下町)의 좁은 골목에 죽 늘어선 목조주택이다. 한 건물 안에 여러 집이 벽을 공유하는 형태로 구성된 집합주택으로 각각의 주택이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직접 밖으로 이어지는 현관이나 어프로치를 갖고 있는, 일본 역사에서 전통적으로 도시주택의 대표적인 형태의 하나다. 한국에는 철도를 놓으면서 상당수의 관사를 지었으나 지금은 거의 소멸되었다. (참고: “일제하 서울의 대단위 철도관사단지의 조성과 소멸” -서울과 역사 2017, vol., no.97, pp. 215-256 (42 pages)/이영남, 정재정)

<장군의 수염> 캡처 © 한국영상자료원

일본 다다미(畳, たたみ) 기본 방 크기는 보통 6조(畳)인데 다다미 한 장의 표준은 1.8미터× 0.9미터다. 그러나 도쿄처럼 인구가 밀집된 곳은 1.76미터×0.88미터를 1조로 계산하기도 한다고 한다. 다다미 6조 방이란 3.6미터×2.7미터로, 조선시대 한옥으로 보면 9자(尺)×12자(尺)로 그리 작지 않다. 1970년대 주택연구소에서 연구하던 국민주택 규모로도 안방(3.6미터×3.6미터) 다음으로 큰 방이다.

한편 M빌딩의 5층 사무실은 머리를 부딪힐 것 같은 나직한 계단 통로를 올라가야 하는데 나신혜가 근무하는 대지기업사다.
“M빌딩은 종로의 번화가에 자리잡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수리하지 않은 구식 콘크리트의 어두운 건물이었다. 대낮인데도 불이 켜져 있다. 한쪽 눈이 먼 늙은 수위가 손을 내 흔들면서 청소부와 무엇인가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있었지만, 30년대 형의 고물이었다. 그나마 ‘정전운휴(停電運休)’라는 푯말을 붙여 놓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승강기는 일제기에 일본인 건축가 ‘다쓰노 긴고(辰野金吾, 1854~1919)’가 조선은행 본점(1912, 현재 한국은행 화폐금융박물관)에 설치한 화폐운반용 유압식 승강기와 요리 운반용 리프트로 알려져 있다(기고문에는 1910년으로 되어 있다). 승객용 엘리베이터는 1914년 지금의 ‘웨스틴 조선 서울’인 철도호텔에 처음 설치됐다. 1941년 서울 화신백화점에 우리나라 최초로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기도 했다. 1940년대 한국 내 승강기는 약 150대에 달했다고 한다. (출처: 한국건설신문. 승강기산업 100주년 특집기획/김덕수 기자 2010.07.09)

이 외에도 김철훈이 어린 시절 지주의 아들로 살았던 한옥이나 나신혜 아버지인 나목사의 교회, 사반나 호텔, 그리고 지금은 없어진 반도호텔 스카이라운지 등이 소설 속에서 묘사되고 있다.

또한 1960년대에 이미 엘리베이터가 있는 건물들이 종로에 즐비했다는 것과 구식 콘크리트 건물이라는 묘사에서 콘크리트가 상당히 오래 전부터 건축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로 1938년 건립된 반도호텔은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지하 1층 지상 8층에 연면적 18,300제곱미터로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건물로 군림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출처: 김상식, 정성훈, “건축분야에서의 철근콘크리트 기술의 발전”, 콘크리트학회지 제21권 3호 2009. 5 pp. 54-60)

한편 영화에서 괄목할 만한 장면은 애니메이션의 삽입이다. 서울대학교 건축과 출신인 신동헌 화백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영화 바로 직전해인 1967년 아우인 만화가 신동우 (1936~1994)의 1200회 연재만화 ‘풍운아 홍길동’을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으로 만들었다. 1968년 <장군의 수염>에는 영화 일부에 애니메이션을 삽입했다. 지금으로부터 55년 전이다. 지금 보아도 상당히 다이나믹하고 유쾌한 장면이다.

 

후기-소설과 영화에 빠져버린 건축사

학생 시절, 주인공이 건축 설계하는 사람인 어떤 소설에 영향을 받아 건축이라는 직업을 알게 되었고 동시에 적성검사에서 ‘공간지각력(Spatial Perception)’이 월등히 높은 학생의 1순위 권장 전공이 건축이어서 멋모르고 전공분야로 택한 것이 1971년이니, 건축을 가슴에 들여놓은 지 50년이 넘었다. 풍전등화 같은 사무실을 끌어안고 틈날 때마다 딴짓을 하나 사실 모든 일은 다 건축설계와 연관된다. 공부도 많이 오래 했다. 대학을 마치고 건축사사무소에 근무한지 20년이 되던 해 시작한 늦깎이 석사과정은 일과 병행하다 보니 젊은 학생들의 두 배의 시간이 걸려 간신히 학위를 마쳤다. 연이어 박사과정에 입학은 했지만 쉽지 않았다. 이미 학업을 중단했을 것이라는 주위의 확신을 뒤엎고 재입학 포함 18년 만에 학위를 받고 공자 위패 앞에서 ‘흥, 평신, 흥, 평신’을 했다. 학사도 5년 반(당시는 4년제였다), 석사도 4년 걸렸으니 유치원과 초·중·고를 포함하면 재학기간이 무려 40년이 넘는다. 지금까지 삶의 60%는 학생이었다.

대학생 시절 어떤 해는 1년에 100회 이상의 프랑스 영화를 봤다. 심지어 영화를 더 잘 알아듣기 위해 불어까지 배웠다. 미국 뉴욕 체류 시 MOMA 또는 57번가나 첼시의 영화관에 더 오래 앉아 있었고, 교환장학생 자격으로 독일 뮌헨 체류 시엔 시립 필름뮤지엄 영화관을 안방처럼 드나들었다. 서울시 정책세미나 발표 요청에 대응하여 아예 로마2대학 단기 ‘보존’과정을 수료했다. 이에 오래된 도시를 이해하려고 이태리 흑백 영화 보기를 시작하면서 로마에서 촬영했거나 로마가 주인공인 영화를 50여 편 이상 본 후 ‘미래를 여는 과거: 로마 – 창의문화도시와 역사보존 (2008)’의 발표 자료를 만든 것이다.
이렇게 내 것으로 돌아오니 1950~1960년대 한국영화에 푹 빠질 수밖에 없다. 그 결과 당시 한국영화의 가치를 더욱더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원전인 소설과 접목을 하기 시작한 것도 벌써 십수 년이다.

다음 호는 강신재(1924~2001)의 <젊은 느티나무(1960)>를 이성구 감독의 1968년 필름으로 다룬다.

 

글. 조인숙 Cho, In-Souk 건축사사무소 다리건축

조인숙 건축사·건축사사무소 다리건축(1986~ 현재)

·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건축학과 졸업(공학사)
·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건축학과 석사/박사
· 건축학 박사(역사·이론–논문: 한국 불교 삼보사찰의 지속가능한 보전에 관한 연구)
choinsou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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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건축 12 건축

Term@Architecture 12
Architect

architectural terms 건축용어
우리나라 건축용어 중에는 왜 그렇게 표현하는지 어원을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이 연재에서는 필자가 이해하기 어려웠거나 호기심이 크게 생겼던 표현들을 소개하고, 그 어원과 출처를 추적할 것입니다. 이를 통해 독자들과 함께 보다 적절한 표현은 무엇일지 고민하는 계기를 갖고자 합니다.

 

나를 낳아주고 키워주신 부모님을 떠올려보자. 이 분들이 친부모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 사람이 있을까? 출생의 비밀이 있어야 재미를 더하는 막장 드라마가 아니고서야 부모님을 의심하는 것은 흔한 일은 아닐 것이다. ‘건축사에게 「건축(建築)」이 적절한 용어인가?’라는 의문은 ‘부모님이 친부모일까?’라고 의심하는 정도의 일인지도 모르겠다. 건축공학부 4년, 건축대학원 5학기를 마친 필자도, 졸업 후 수년간 건축사사무소에서 실무를 하면서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건축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건축사사무소를 지금껏 운영하면서도 당연하게 건축(建築)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그 의미에 대해 곱씹어 보지는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숨쉬기 위해 필요한 공기가 항상 우리 곁에 있는 것처럼 「건축(建築)」은 너무나 당연하고 기본적인 용어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건축(建築)」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 할수록 ‘이 용어가 적절한가?’라는 의문이 조금씩 커지고 있다. 다른 건축사분들과 건축계의 다양한 전문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궁금하다. 「건축(建築)」을 「건축(建築)」이라고 하는 것은 적절할까?

「건축(建築)」이라는 용어를 살펴보기 전에 우선 건축(建築)의 영문표현인 Architecture를 살펴보자. [ 고대 그리스어, 라틴어의 Architecture/Architect의 의미에 관한 연구(서현, 2009) ]에 따르면, Architecture와 Architect는 고대 그리스 어휘인 ‘Archi’(우두머리)와 ‘tekton’(무엇인가를 만드는 제작공)의 합성어인 ‘architecton’(제작공의 관리자)과 라틴어 어휘인 ‘architectus’(커다란 작업의 계획자, 건물을 짓는 자에서 세상의 창조자까지 만드는 작업의 계획 감독의 주체)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Architect는 커다란 작업을 계획하는 주체이고, Architecture는 그 계획의 결과물인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꼭 건축물을 계획하는 것 외에 거대한 시스템을 개발하거나 새로운 세계관을 담아 게임을 만드는 사람들도 영어 표현으로 Architect라고 부르는 것이 이해가 된다.

다시 「건축(建築)」으로 돌아오자. 「건축(建築)」은 영어인 Architecture에 해당하는 현재의 우리말이다. 한자어인 건축(建築)은 세울 건(建) 자와 쌓을 축(築) 자를 사용하는데, 필자의 이해로는 세우고(建) 쌓는다(築)의 의미는 서구권에서 사용하는 Architecture라는 용어의 의미를 충분히 표현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축(建築)」이 뜻하는 세우고 쌓는다는 행위가 Architecture가 의미하는 커다란 작업 또는 무엇인가를 만드는 작업의 범위에 부분적으로 포함될 수는 있겠지만 Architecture의 개념적 의미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만 Architecture를 「건축(建築)」이라고 부르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발음 차이가 있지만, 한자 문화권에 속한 중국, 일본, 베트남도 Architecture에 대응되는 용어로 우리처럼 「건축(建築)」을 사용하고 있다. 아마도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의 공통된 특징일 것이다.

그렇다면 동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는 「건축(建築)」이라는 용어를 언제부터 사용하기 시작했을까? 건축공간연구원(AURI)의 연구보고서인 [ 건축사의 호칭과 업무의 제도적 형성에 관한 연구(2015) ]에서 「건축(建築)」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진 배경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연구에 따르면, 「건축(建築)」이라는 용어는 19세기 말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신조어로 만들어진지 겨우 100년이 조금 넘은 용어다. 일본에서는 19세기 말까지 Architecture에 대응어로 조가(造家:집을 짓다.)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동경대학교 건축학과의 옛 이름도 조가 학과였다고 한다. 변화는 서양식 건축 교육과 개념이 유입되면서 생긴다. Architecture를 조가(造家)가 아니라 「건축(建築)」이라고 해야 한다는 이토 쥬타(伊東忠太) 등의 주장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일본 건축계는 스스로가 서양의 Architect처럼 전문성과 사회적 지위를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Architecture처럼 권위 있는 새로운 용어가 필요했다고 한다. 그래서 단순히 집을 짓는 사람과 구분하고자, 조가(造家)를 버리고, 「건축(建築)」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그리고 ‘화가’, ‘조각가’, ‘미술가’를 부르는 것처럼 전문성과 권위를 갖는 ‘-가’라는 접미사를 「건축(建築)」에 붙였다는 설명이다. 「건축(建築)」이라는 용어는 이런 배경에서 의도를 갖고 만들어진 신조어였다.

이토 쥬타(伊東忠太) ⓒ wikimedia.org

일본에서 조가(造家)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면, 우리는 「건축(建築)」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전에 어떤 용어를 사용했을까? 조선시대의 건설공사보고서라고 할 수 있는 「영건도감의궤」나 토목이나 건축물 공사에 사용하던 조선시대 줄자인 「영조척」의 이름을 살펴보면, 영조(營造) 또는 영건(營建)이라는 용어를 찾을 수 있다. 공통적으로 보이는 영(營)은 ‘경영하다’ 또는 ‘다스리다’라는 의미이므로 Architecture의 ‘Archi-‘와 유사하다. 또한 조(造)는 세우고 쌓는 건(建)과 축(築)을 포함하면서 짜 맞추는 가구식 구조 등 다양한 건축 기법을 포괄하는 의미여서 Architecture의 ‘–tekton’과 상통한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낯설기는 하지만, 영조(營造) 또는 영건(營建)이라는 용어가 뜻하는 의미가 건축(建築)이라는 용어보다 더 Architecture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서양에 「건축십서」가 있다면, 중국에는 「영조 법식」이 있다. 「영조 법식」은 하나의 건축물을 짓기 위한 방법과 양식을 지칭하는 용어이면서, 북송시대 이계(李誡)가 편찬한 건축설계, 시공에 관한 이론서이기도 하다. 이렇게 다양한 사료를 살펴보면, 우리나라와 중국에서는 Architecture에 해당하는 용어로써 오랜 기간 동안 「영조(營造)」를 사용했다고 볼 수 있겠다.

영조법식 ⓒ wikimedia.org

북궐도형

그렇다면, 조선시대에 어떤 사람들이 크고 작은 공사를 계획하고 총괄, 즉 영조(營造)했거나 영건(營建)의궤 작성을 총괄했을까? 이런 역할을 했던 사람이 있다면, 조선시대의 Architect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경복궁과 한양도성을 건설한 김사행이 있다. 김사행은 고려 때 원나라에 보내졌던 환관인데, 그곳에서 건축에 대한 견문을 쌓고 익혔다고 한다. 지금으로 치면 일종의 유학파인 셈이다. 고려로 돌아온 그는 공민왕의 명으로 노국공주 묘역을 조성하고 총예를 크게 받았다. 환관이긴 했지만, 토목과 건축분야의 전문성을 인정받은 것이다. 그 후 나라가 바뀌어도 김사행 같은 전문가는 더욱 필요했던 모양이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의 새로운 수도를 건설하는데 그 책임자로 김사행을 등용한 것이다. 태조에게 김사행이 있었다면, 태종과 세종에게는 박자청이 있었다. 박자청은 노비 출신이었지만, 김사행을 도와 경복궁과 한양도성 공사를 하면서 계획과 공사까지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고 한다. 유학파 스승에게 수학한 국내파인 셈이다. 정도전 세력과 대립하던 태종은 경복궁을 놔두고 창덕궁을 건설하는데, 박자청을 책임자로 세웠다. 창덕궁 외에도 경복궁 경회루, 성균관 문묘, 청계천 정비, 중랑천 살곶이 다리 그리고 제릉, 건원릉과 헌릉까지 건축에서 토목분야는 물론 다수의 왕실 묘역까지 박자청의 손을 거쳤다. 세종대의 인재 장영실이 종 3품까지 올랐는데, 박자청은 종 1품까지 올랐다고 하니 그의 능력을 간접적으로 가늠해 볼 수 있겠다.

경회루(박자청)

환관 출신 김사행과 노비 출신 박자청과 달리 높은 신분으로 건축계획을 한 경우도 있다. 은퇴를 앞둔 퇴계 이황 선생이 대목수였던 법연 스님과 서로 서찰을 주고받으며, 도산서당의 건축계획을 상의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후학에게 학문을 전하는 공간이니 지금 우리가 건축 공간의 주제와 개념을 설정하듯 어떤 공간이어야 하는지 고민하고 의견을 나누었을 것이다. 건축계획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문의 종갓집들이 건축적 특징을 갖는 경우도 있었다. 해남 윤 씨 가옥들은 공통적으로 두 가지 특징이 있다고 한다. 조리를 하는 부엌에는 지붕으로 환기가 되도록 용마루에 솟을 창을 둔 것과 사랑채 서쪽에 덧 지붕을 설치한 것이 특징들이다. 실학 가문으로 외국서적들을 다수 보유하면서 깊은 서향 빛으로부터 책들을 보호하고자 이런 건축적 특징이 생겼다고 한다. 종가인 녹우당은 물론이고, 분가한 다른 종가에도 공통적으로 반영되었다. 더욱이 윤선도는 보길도에 본인만의 마스터플랜을 수립하고, 낙서재, 동천석실, 세연정 등 다수의 건축물을 남겼다. 경주에는 양동마을 출신 회재 이언적이 있다. 양동마을은 본래 경주 월성 손 씨의 집성촌이었는데, 혼인을 계기 여주 이 씨가 함께 살게 되었다. 외가인 월성 손 씨의 종택 ‘서백당’에서 나고 자란 회재 이언적은 외가의 건축적 공간구조에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회재가 어머니를 위해 지은 향단은 그 공간 구성과 건축적 완성도가 남다른데, 그의 건축적 재능이 십분 발현된 것이라 생각한다. 은퇴 후 고향에 내려온 회재 이언적은 자신의 거처인 독락당을 스스로 구상했다. 한쪽은 맞배 다른 한쪽은 팔작으로 비대칭인 지붕 형태가 독특하고, 담장에 살창을 설치해서 시선을 확장하고 계곡으로 연결한 것은 훌륭한 건축적 장치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모두 공사에 참여해 직접 목재를 다루지는 않았다. 하지만, 계획을 하고 과정을 관리하는 역할을 훌륭히 해낸 Architect였다.

퇴계이황 표준영정(1974,이유태)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도산서당(이황) ⓒ 국가문화유산포털

윤선도 초상 ⓒ 해남 윤씨 귤정공파 종친회

녹우당(해남 윤 씨)

회재 이언적

독락당(회재 이언적) ⓒ 국가문화유산포털

조선시대까지 영조(營造)라는 용어가 지금의 건축(建築)처럼 사용되었다고 하더라도, 지금에 와서 건축(建築)을 버리고 영조(營造)나 다른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건축(建築)이라는 용어가 그 의미와 개념을 표현하는데 적절하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우리의 뇌는 언어학적으로 건축(建築)이라고 쓰고 Architecture라고 읽고 있는 것 같다.

오랜 기간 이 땅에서 사용되었던 영조(營造)나 영건(營建)이라는 용어는 이미 도태되었다. 19세기 말 논란 속에 자리 잡은 건축(建築)은 지난 100년에 걸쳐 확고한 용어로 자리 잡았다. 그래서 새로운 개념이나 재료를 개발하고 도입할 때 적절한 용어와 이름을 사용하는 인식이 필요하겠다. 부적절한 용어를 사용해서 후배들에게 부끄러운 선배가 될까 싶어 오늘도 조심스럽다. 그동안 읽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리며 연재를 마친다.

 

글. 신민재 Shin, Minjae AnLstudio 에이앤엘스튜디오 건축사사무소

신민재 에이앤엘스튜디오 건축사사무소

한양대학교 건축공학부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Artech과 JINA에서 실무를 했다. 2011년부터 AnLstudio 건축사사무소를 공동으로 운영하며 전시기획에서 인테리어·건축·도시계획까지 다양한 스케일의 작업을 하고 있다.
젊은건축가상(2016, 문화체육관광부), 경기도건축문화상 특별상(2017, POP하우스), 충남건축상 최우수상(2017, 서산동문849), 대한민국목조건축대전 본상(2018, 양평시옷(ㅅ)집), 서울시건축상(2019, 얇디얇은집), 한국리모델링건축대전 특선(2020, 제이슨함갤러리) 등을 수상했다.
현재 한양대학교 겸임교수이자 서울시 공공건축가이다.
shin@anlstudi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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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건축 워치 10 북한의 건축교육 ②

North Korean Architecture Watch 10
North Korea’s architecture education ②

해방 후 평양에는 소련의 지원을 받아 많은 공공건축물 사업이 추진되었으나, 건설기술자가 매우 부족한 실정이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한반도의 건축고등교육기관은 경성고등공업학교가 유일하였으며, 몇 개의 기술견습학교가 있을 뿐이었다. 해방 당시 경성고등공업학교(경성고공)가 개교한 후 건축을 전공한 조선인 졸업생은 60여 명에 불과하였고, 일본에서 건축을 공부한 사람도 100여 명에 불과하였으며, 북한지역에 건축전문가는 더욱 적었다. 해방 당시 북한에는 경성고공에서 건축을 졸업한 사람은 20여 명이 있었고, 일본 유학생 출신도 소수였다고 한다(안창모, 「서구건축문화의 이식통로 원조프로그램과 한국건축계 재편」, 2006.07).

평양 1만 세대 살림집 건설 모습. 건설 현장에 평양건설대학교 학생들도 설계, 기사 등으로 동원되었다(노동신문 보도사진, 이하 동일).

비록 인력은 많지 않았지만 건설사업을 위한 건축 전문가와 건설기술자의 조직화가 필요하였으므로 1946년 5월 10일 북조선건축가동맹을, 6월 1일에는 북조선건축위원회, 북조선건축공업 등 건축관련 단체 및 위원회를 결성하였다. 건축가동맹위원장은 니혼대학 건축과 출신의 김응상이 맡았다.(김응상, 『주체건설력사의 갈피를 더듬어』, 조선노동당출판사, 1998) 그리고 부족한 건축전문가 양성을 위하여 김일성대학교 공학부에 건축과를 설치하였다.

 

1. 김일성종합대학 내 설치된 건축과

해방 후 소련의 지원 아래 북한지역에서는 지방정권 성격의 각 도별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북한은 독자적 정부 구성을 위하여 1945년 10월 평양에서 ‘북조선 5도 인민위원회 연합회의’를 개최하였고, 11월에는 산업국, 교육국, 보안국, 사법국, 교통국, 농림국, 재정국, 체신국, 보건국, 상업국 등 10개국으로 구성된 ‘북조선 행정 10국’이 발족하였다.

이 행정 10국을 모체로 하여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위원회를 결성하고 11개의 당면 과업을 제시한 결정서를 채택하였으며, 3월에는 새로이 수립되는 민주주의적 임시정부가 기초해야 될 20개 정강을 발표하였다. 11개 당면 과업에서는 ▲교육제도의 민주적 개혁 ▲민주주의적 인민의 교양 항목이 포함되었고, 20개 정강에는 ▲의무교육 ▲인재양성을 위한 특별학교의 설치 ▲민족문화, 과학, 기술의 발전 ▲과학 기술 및 예술분야 인사의 장려 등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당면과제와 20개 정강을 보면 북한이 새로운 나라 건설을 위한 교육, 특히 문화(예술), 과학 및 기술분야의 교육을 중요시한 것을 알 수 있다.

북한은 산업시설운영을 위한 초급기술관료와 기술자 양성을 위하여 중앙산업간부양성소와 각 도별 고등기술원양성소를 설치하였다. 이 양성소에서는 건축설계원도 교육하였다.

그리고 고급인력 양성을 위하여 1945년 말부터 종합대학설립을 추진하였으며, 부족한 기술인력 양성을 위하여 이공계 위주로 전공과가 설치되었다. 1946년 7월 16일 발표된 학생 모집요강에는 전체 7개 학부 24개 학과 중 문학부, 법학부 외에는 모두 이공계관련 학과였으며, 정원 1,500명 중 70% 인 1,050명이 이공계였다(통일뉴스. 2016.10.02). 그리고 정원 중 약 50%는 노동자, 농민의 자녀 중에서 선발하여 3년 과정의 예과를 거쳐 입학하도록 하였다. 건축과는 김일성대학교 공학부에 속하였으며, 정원은 약 40명이었다. 당시 북한에는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대학에서 건축 관련 교육을 할 수 있는 인원이 부족하였으므로 남한에서 염창현, 황의근, 강상천, 이홍구, 오영섭, 전창옥, 김면식 등의 건축가와 기술자를 초빙하였다.
북한은 종합대학 설립을 추진하는 한편, 1946년부터 중견간부훈련소를 설립하여 단기 교육 후 졸업생들을 소련 및 동유럽으로 유학을 보냈다. 이 기관을 통하여 유학을 간 학생은 420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정근식 외, 「북한에서 소련형 대학 모델의 이식과 희석화」, 아시아리뷰, 2017). 건축분야에도 소련 및 동유럽 유학생이 있었다. 모스크바에 유학한 김정희, 남상진, 우랄대학에 신순경, 리형, 슬로바키아의 림준섭, 프라하 공대의 김영성, 동독 드레스덴 공대의 신동삼 등이 대표적인 유학생들이었다(박동민, 「북한의 건축가 리형: 엘리트 건축가와 독재자의 협력」, 2020). 이들 유학생은 귀국 후 북한 건축계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유학생 중 일부는 1958년 종파사건에 연루되어 숙청되었다. 체코에 유학하였던 김영성은 1992년 탈북하여 서울로 왔으며, 동독에 유학하였던 신동삼은 현재 서독에 거주하고 있다.

1948년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공학부, 운수공학부, 의학부, 농학부 등을 분리하여 별도의 대학을 설립한다. 공학부는 평양공업대학(현 김책공업종합대학), 의학부는 평양의학대학, 농학부는 사리원농업대학(현 원산농업대학)이 되었다.

평양공업대학에는 광산지질학부, 금속공학부, 기계공학부, 전기공학부, 운수공학부, 섬유공학부, 건설공학부가 있었으며, 1951년 북한군 총사령관으로 한국전쟁 중 사망한 김책의 이름을 따서 김책공업대학으로 변경하였다.

평양건축대학을 방문한 김정은 위원장의 모습.

평양건축대학 학생이 김정은 위원장을 모델로 스케치를 하고 있다.

2. 평양건설건재대학교의 설립

1953년에는 김책공업대학의 건축공업학부(건설공학부)를 따로 떼내어 평양건축대학을 새로 만들었다. 평양건축대학에는 건축학부, 건설공학부, 시설공학부의 3개 학부를 두고 있었으며, 건축학부에 2개 학과(건축학과, 도시경영학과), 건설공학부에 1개 학과(건설공학과), 시설공학부에 3개 학과(수리건설학과, 교량 및 턴넬학과, 도시건설 및 측량공학과) 등 모두 6개 학과가 있었다.

1959년 평양건축대학의 이름을 평양건설대학으로 바꾸고 건설공학부의 토목 관련 학과와 김책공업대학의 운수공학부를 합쳐 평양운수대학(1959년 설립)을 설립하였으며, 수리건설 관련 학과는 새로 설립된 평양수리대학(1959년 설립)으로 이전하였다. 평양수리대학은 1965년 함흥으로 옮겨져 현재 수리동력대학으로 운영되고 있다.

평양건축대학교 수업 모습(북한방송 캡처).

그리고 1967년에는 평양운수대학 운수건설학부에 있던 도로학과, 교량학과를 평양건설대학 도시경영학부로 옮겼으며, 이름을 평양건설건재대학으로 바꾸었다. 평양건설건재대학은 건축학부, 건축공학부, 도시경영학부, 건설기계학부, 건재학부로 나뉘어 있었다. 건축학부는 단지계획분야(도시계획)를 포함하고 있으며, 도시경영학부에는 도시경영, 교량, 도로, 지하구조물, 원림 등의 전공이, 건재학부에는 유기재료와 무기재료 등의 전공이 있었다.

2000년 이후, 평양건설건재 대학은 설계원을 양성하는 학부(건축학부 등)는 5년제로 운영되고 있다. 학부는 건설재료학부, 건축학부, 설계학부, 미술학부, 도시경영학부와 그리고 박사원을 두고 있고 학생 수는 약 3,000명 정도이다. 박사원은 남한의 대학원에 해당하며, 박사원 과정을 거치면 준박사(석사)와 박사가 될 수 있다.
평양건설건재 대학은 1980년 말까지 공산권에서 건축분야의 우수한 대학으로 유명해 중국 등에서 유학 온 학생들이 많았다. 지금도 러시아, 중국, 몽골 등에서는 평양 건설건재대학 출신들이 많은 활약을 하고 있다고 한다(중국에서도 소문난 평양의 건설건재대학, KBS 통일방송연구, 2006.03.19.).

평양건설건재대학교가 한동안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북한이 해방 후부터 건축기술자 양성을 위하여 소련, 동독 등에 유학생을 보내어 인력을 양성하였기 때문이다. 1950년대 평양시 도시계획을 수립한 김정희는 1947년 첫 건축유학생 8명 중 한 명으로 선발되어 모스크바 건축아카데미에서 수학하였으며, 그 이후에도 여러 건축가들이 외국에서 유학을 하였다.

북한은 상대적으로 과학기술자들의 해외유학 기회가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물리학, 재료공학, 금속공학, 전자공학 등 핵, 미사일, 프로그래밍 등 관련 학문의 유학생이 많다(중앙일보, 2017.09.07). 건축분야도 해외 유학기회가 다른 분야에 비하여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14년에는 프랑스 국립 파리 라빌레트 건축학교에서 유학 중인 북한 학생이 탈북하면서, 프랑스에 10명의 건축 전공 유학생이 있는 것이 알려지기도 했다(V.O.A, 2014.11.26.).

프랑스는 2002년부터 비공식적으로 10여 명의 건축전공 북한학생을 초청하여 프랑스의 국립 라빌레트 건축학교, 벨빌 건축학교 등에서 교육시키고 있으며, 유학생을 건축분야를 정한 것은 북한이었다(연합뉴스, 2014. 11.19).

평양건설건재대학교는 2012년 단과대학에서 평양건축종합대학으로 바뀌었다. 김정은 위원장은 집권 후 평양과 지방에 대규모 건설공사를 추진하고, 건설사업을 큰 치적으로 내세우고 있으므로 평양건축대학에 많은 관심을 표명하였다. 김정은 위원장이 직접 명예총장을 맡았으며, 2013~2014년 평양건축종합대학을 연속적으로 방문하여 북한에서 가장 주목 받는 대학교 중 하나가 되었다. 북한 주민들 사이에 건축종합대학의 인기가 높아 예비시험 점수가 높아야 진학할 수 있다고 한다.

김정은 위원장의 평양건축종합대학 방문 사진.

그러나 2020년 8월 평양건축종합대학은 2012년 경 종합대학이 되었던 원산농업종합대학, 함흥화학공업종합대학 등과 함께 다시 단과대학 체제로 변경되었다. 이 학제의 변경은 전문계열화 된 대학에 다른 전공학과를 추가하지 않고, 단순히 명칭만 변경하여 실효성이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북한에는 설계원(건축가)과 건설기술자를 양성하는 대학은 평양건축종합대학 외에 함흥화학공업종합대학내에 건설대학에 있어 두 개의 대학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함흥건설대학은 2002년 4월 설립되었으며, 건축설계, 건축공학, 건설운반기계, 측량, 원림, 도시경영, 건설재료 관련 학과가 있다. 2012년 함흥화학공업종합대학에 통합되었으며, 함흥화학공업종합대학은 2020년 8월 다시 일반대학이 되었다.

 

북한의 건축대학은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고 졸업생도 많지 않으므로 졸업 후 안정적인 직장에서 생활하며, 당 또는 내각의 요직을 맡는 경우도 많다. 북한의 건설건재공업성, 도시경영성, 국가건설감독성 등의 역대 장관(상) 상당수가 평양건축대학교 출신이며, 조선건축가동맹 중앙위원장을 역임한 경우도 많다.

대학 외에 설계원과 건설기술자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각 도별로 설치되어 있는 건설전문학교가 있다(탈북건축가 장인숙 증언). 건설전문학교는 3년 과정이며, 전문학교를 졸업하면 준기사 혹은 준설계원 자격이 주어진다. 기사나 설계원이 되기 위해서는 대학에 편입하여 졸업하여야 한다.

그 외에 건설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공장대학이 있다. 공장대학은 큰 공장, 기업소, 그리고 중요 공업지구에 설치되어 기업소 근로자들이 직장생활을 하면서 학업을 병행할 수 있도록 한 고등교육기관으로, 농장대학, 어장대학, 통신대학과 함께 ‘일하면서 공부하는 교육체계’에 속한다. 이는 일반대학과 같이 정규 학제에 포함되는 학력인정기관으로, 졸업 시 해당 부문의 기사 자격증이 주어진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공장대학). 평양에는 건설자재생산기업소를 관리하는 평양건재총국이 있으며, 건재총국산하의 기업 직원들이 진학할 수 있는 ‘평양건재대학’이 있다. 그 외에도 지역별로 건설관련 공장대학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에는 건설기능공 양성교육체계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건설기능공은 군대의 공병부대, 청년돌격대, 그리고 취업 후 건설사업소에 배치되면 작업을 하면서 습득한다고 한다. 북한 건설기능공은 단일 직종이 아니라 목수, 조적, 미장, 온돌, 철근, 콘크리트 시공 등 다양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다기능공 성격을 가지고 있다.

 

3. 남북한건축교육협력

남북경협은 2010년 이후 답보상태이지만, 여전히 북한은 한국경제의 성장동력으로 기대되고 있다. 또한 건설업계에서는 남북관계 개선 시 대규모 북한개발사업이 추진될 것으로 예상하고 대비를 하고 있기도 하다. 남한의 인력과 자재로만 북한개발 공사를 할 수 없으므로 북한의 건설기술자와 건설자재의 활용이 필요하다.

북한의 건설 기술력이 과거에는 상당하다고 알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경제적 여건, 건축재료 등의 한계로 인하여 인력자체는 우수하지만 기술수준은 낮은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북한의 건축대학졸업생은 년간 500~700명 정도로 추정되고, 건설기능공 양성을 위한 체계적인 시스템도 없으므로 전문인력과 기능공이 매우 부족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므로 북한의 건축대학교, 전문학교 및 직업훈련원 등을 통하여 건축기술자 및 기능공 양성을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된다.

2000년대 초반 남한의 여러 대학교에서 북한대학교와 자매결연을 추진하고 교육기자재를 지원하기도 하였으며, 2002년에는 한양대학교의 교수 2명이 김책공대에서 김일성대학교와 김책공대 재학생을 대상으로 2개월간 정보통신(IT)강의를 한 일도 있다. 또한 평양과학기술대학은 현재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향후 건축학부 개설을 추진하고 있기도 하다.

북한 개발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경험을 살려서 남한의 대학교와 자매결연한 북한대학에 건축 및 건설학과 설치를 지원하고, 북한 개발을 추진하는 기관 및 기업체에 학생들을 취업시키는 방안 등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글. 변상욱 Byun, Sangwook 대한건축사협회 남북교류협력위원회 위원·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도라산출입사무소장·건축사·시공기술사

변상욱 건축사·건축시공기술사

1999년부터 현대아산에서 근무하면서 금강산관광지역 건축물과 평양체육관 등 건설사업관리업무를 수행했으며, 2004년부터 2016년까지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에서 근무하면서 개성공업지구 종합지원센터, 기술교육센터 등 건설사업관리와 공장건축 인허가업무를 담당하였다.
gut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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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건축 11 건축물

Term@Architecture 11
Building

architectural terms 건축용어
우리나라 건축용어 중에는 왜 그렇게 표현하는지 어원을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이 연재에서는 필자가 이해하기 어려웠거나 호기심이 크게 생겼던 표현들을 소개하고, 그 어원과 출처를 추적할 것입니다. 이를 통해 독자들과 함께 보다 적절한 표현은 무엇일지 고민하는 계기를 갖고자 합니다.

 

‘건축사님은 아파트에 사세요, 빌라에 사세요?’ 종종 이런 질문을 받는 경우가 있다. 다른 이가 살고 있는 주거 유형을 물어보는 것이 우선 불편하지만, 주거 유형을 아파트와 빌라로 단순 구분해서 물어보는 것도 불편하다. 그런데 이 ‘아파트’는 무엇이고 또 ‘빌라’는 무엇일까?

아파트는 떨어지거나 분리하는 것을 의미하는 ‘apart-’와 결과나 생산물을 뜻하는 ‘-ment’가 합쳐진 말이다. 무엇인가 떨어지고 분리되어 존재하는 모습을 의미한다. 프랑스에서는 ‘아파트멍(appartement)’이라고 했는데, 궁전이나 대저택에서 각각 독립된 생활공간들을 의미하는 용어로 쓰였다. 주인이 거주하는 곳, 방문객을 응접하는 곳, 하인들이 생활하는 곳 등 각 기능을 하는 부분을 아파트멍(appartement)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시민사회로 접어들면서 아파트멍(appartement)은 공동주택이라는 의미도 갖게 된다. 미국에서도 20세기 초반에 승강기와 개별 전기 등 편리한 시설을 갖춘 도심 공동주택이 대도시를 중심으로 다량 공급된다. 그러면서 왕족과 귀족들의 대저택을 지칭하던 용어인 아파트멍(appartement)을 도심 공동주택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아파트먼트(apartment)’다. 우리는 이 아파트먼트(apartment)라는 용어에서 apart- 부분만 따서 5층 이상 규모의 공동주택을 ‘아파트(aprt-)’라고 지칭하고 있다. 우리의 아파트다.

프랑스의 appartement

미국의 apartment

법적 용어는 아니지만, 일반적인 용어로써 다세대와 다가구를 통칭하는 ‘빌라(villa)’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그럼 빌라(villa)는 무엇일까? 본래 빌라(villa)는 로마시대 귀족들이 소유한 농지를 가리키는 말인데, 농지를 관리하는 대저택도 빌라(villa)라고 한다. 빌라(villa)는 주변의 넓은 농지를 활용해 독립적인 생산 시스템을 갖추는데, 하인에게 농지를 경작시키고 수확한 작물로 빵과 와인을 생산하고 저장했다. 일종의 생산시설인 빌라(villa)는 자급자족이 가능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를 비롯한 대도시에서 생활하던 귀족들은 언제든 빌라를 찾아가서 장기간 머무르며 휴양을 할 수 있었다. 자신의 빌라(villa)에는 하인들이 항상 대기하고 있었고, 창고에는 빵과 와인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로마시대 빌라 구성

옛 빌라(villa)를 설명하는 그림을 살펴보자. 누워서 식사하는 식당인 트리클리니움(triclinium), 욕실(baths), 주방(kitchen)이 있고, 2층에는 방들(family rooms)이 있다. 기본적인 주거 공간을 제공한다. 나머지는 모두 생산과 저장을 하는 공간들이다. 빵을 굽는 곳(bakery), 외양간(cowshed), 포도를 가공하고 기름을 짜는 공간(room for pressing grapes, oil-pressing rooms), 포도주 발효를 위한 마당(fermenting yard)과 탈곡하는 마당(threshing floor) 그리고 창고(barn)를 갖추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시설을 운영하는데 하인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하인들이 머무르는 공간(servants’ rooms)도 있다. 이런 점에서 빌라(villa)는 계급사회였던 조선시대의 종갓집 구성과 공통점이 많다. 양동마을의 향단은 로마시대 빌라(villa)처럼 생산과 저장을 위한 공간을 모두 갖추고 있다. 양동마을이 비옥한 안강 평야를 기반으로 가문의 세력을 유지했던 것도 필자가 로마의 빌라(villa)와 우리의 종갓집을 유사하게 바라보는 이유이다. 양동마을의 또 다른 종갓집으로 ‘농사짓는 것을 바라본다 ‘는 의미의 관가정(觀稼亭)을 곱씹어 볼 만하다. 그 시대의 사회구조를 엿볼 수 있는 이름이 아닐 수 없다.

빌라 로툰다와 주변 농지

계급사회를 벗어난 현대에 이르러 빌라(villa)는 일반적으로 휴양지의 별장이나 규모가 큰 개인주택을 지칭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우리는 도심에 위치한 소규모 공동주택을 빌라(villa)라고 부르고 있다. 귀족들이 소유했던 집이라는 특별함이나 호사스러움 같은 이미지를 차용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래서 빌라(villa)라는 말을 들으면, 계급사회를 동경하는 시민사회의 아이러니한 모습이 느껴져서 안쓰럽고 착잡한 맘이 든다.

조선시대 종갓집(향단) 구성 ⓒ 한옥기술개발연구단

양동마을과 안강평야 ⓒ 네이버 항공사진

한편으로 빌라(villa)가 지칭하는 법정 용어인 ‘다가구’나 ‘다세대’는 어떤가? 건축법에서는 주택을 크게 단독주택과 공동주택으로 분류하는데, 소유를 구분하여 등기할 수 없으면 단독주택으로 분류하고, 소유를 구분하여 등기할 수 있으면 공동주택으로 분류한다. 다가구는 단독주택에 속하고, 다세대는 공동주택에 속한다. 즉 다가구는 구분 소유를 할 수 없는 단독주택의 한 종류이고, 다세대는 개별 호를 구분하여 소유할 수 있는 공동주택이다. 그런데 정작 가구(家口)와 세대(世帶)라는 개념은 건축물의 용도와는 무관한 개념이다. 가구(家口)는 혈연관계와 상관없이 주거와 생계를 함께 하는 단위를 뜻하고, 세대(世帶)는 혈연, 혼인, 입양 등으로 하나의 가족 구성을 이룬 사람들의 집단을 뜻한다. 그래서 거주하는 건축물의 용도 구분을 하는데, 가구(家口)나 세대(世帶)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예를 들어보면, 다가구 주택은 하나의 소유주체에 여러 개의 독립된 생활공간인 호(戶)들로 구분되어 있는데, 각각의 호(戶)에는 구분된 세대들이 거주한다. 건축물의 용도 구분은 다가구로 구분되지만, 여러 세대가 거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다가구인가, 다세대인가? 건축물 용도 구분에서 용도의 개념과 용어의 개념이 상호 오류에 빠진 부분이다.

건축법의 건축물 용도에는 없지만, 한국사회 전반에서 전문 용어처럼 언급되는 땅콩주택과 협소 주택이라는 말이 있다. 땅콩주택은 하나의 필지에 두 세대가 함께 거주하는 주택을 지칭하는 말이다. 단독주택만 허용되는 필지에 두 세대가 토지와 건축물을 지분으로 나누어 공동 소유하지만, 구분된 호(戶)에서 독립적으로 생활하는 형식을 의미한다. 건축법의 용도로는 단독주택에 속하는 다가구이다. 단독주택이기 때문에 소유권을 구분하여 등기할 수 없으므로, 지분으로 공동소유를 하고 상호 간에 협의를 통해 생활공간을 구분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같은 다가구이지만 공동 소유하지 않고 임대인과 임차인으로 생활하는 일반적인 다가구는 땅콩주택이라고 할 수 없겠다. 땅콩주택이라는 용어는 다가구주택을 공동 소유하는 특별한 경우로서 일반적인 임차/임대 방식과 구분되는 개념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무분별하게 일반적인 다가구를 칭하는 데 사용되는 것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얇디얇은집(AnLstudio) ⓒ 이한울

몽당주택(AnLstudio)

협소 주택이라는 용어 또한 기준 없이 각자 주관적으로 사용하고 있어 불편함이 크다. ‘협소’라는 말은 좁다(협, 狹)라는 의미와 작다(소, 小)라는 의미의 한자로 구성된 용어이다. 좁다와 작다 모두 상대적인 의미이므로 어느 정도를 좁거나 작은 것으로 볼 것인지 기준이 필요하겠다. 필자가 설계하고 2019년 서울시 건축상을 수상한 ‘얇디얇은 집’은 일반적인 생활공간이나 건물과 비교하여 폭이 좁은 집이다. 폭이 가장 좁은 부분이 1.5미터를 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규모는 지하 1층, 지상 4층이고, 연면적은 140제곱미터에 이르니 결코 작은 집이라고는 할 수 없겠다. 그렇더라도 ‘얇디얇은 집’에 일반적인 가구를 적용할 수 없을 정도로 폭이 좁은 것은 분명하므로,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작은 집은 아니지만, 폭이 좁은 주택’이라고는 할 수 있겠다. 또 다른 예인 몽당 주택은 지상 3층 규모의 단독주택인데, 연면적이 49.5제곱미터이다. 연면적 50제곱미터를 넘기면 주차장을 설치해야 하는데, 대지면적이 34.5제곱미터였던 몽당 주택은 주차장을 설치할 수 없어서 연면적을 49.5제곱미터에 맞췄다. 몽당 주택으로 생각해 보면, 주차장을 설치할 수 있을 만큼 여유(?) 있는 규모의 대지와 건축물을 협소하다고 할 수 있을까? 다양한 매체에 쏟아지는 협소 주택들은 택지개발기준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작은 크기의 필지에 지어진 주택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주차장을 설치해야 하는 주택규모(50제곱미터)를 초과하는 경우도 많고, 국민주택규모(85제곱미터)를 넘는 경우도 많아 보였다. 우리 건축계가 협소 주택의 개념을 정의하지 못한 것은 안타깝다. 그래서 법적인 용어가 아니더라도 협소 주택의 사회적 정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건축물의 용도기준은 1978년 10월 30일 건축법 시행령 제2조 제1항에 근거한 [부표] 시설로부터 시작된다. 모법인 건축법이 제정된 것이 1962년이었으니, 16년이나 지나서야 생긴 것이다. 게다가 자주 개편이 된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60번이 넘는 용도분류체계 개편이 있었다고 하니, 1년에 한 번 이상은 꼬박꼬박 변경이 있었던 셈이다. 이렇게 자주 변화하며 나름 사회의 변화에 대응하는 건축물의 용도지만, 건축법의 건축물 용도와 무관한 용어들도 많다. 타법에서 필요에 의해 만든 건축물의 구분이 그것이다.

농막

‘지방세법’에서는 세율을 달리 구분하기 위해 ‘고급주택’을 정의하고 있다. 농지법에서는 농민이 농업을 하는데 필요한 시설로서 ‘농막’을 정의하고 있다. ‘펜션’은 법적으로 숙박시설이 아니다. 주택을 활용하는 ‘농어촌 민박사업 시설’은 ‘농어촌 정비법’과 ‘관광진흥법’에서 정의하고 있다. ‘휴양펜션업 시설’이라는 용어는 ‘제주특별자치도 설치 및 국제자유도시조성을 위한 특별법’에서 정의하고 있으니, 이 법에 따른 제주도의 ‘휴양펜션업 시설’에서 ‘펜션’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농어촌민박업과 제주도의 휴양펜션업은 ‘공중위생관리법’에 따른 ‘숙박업’이 아니고, 건축법의 숙박시설도 아니다. 단독주택으로 구분된다. 이런 이유로 펜션이라는 용어는 ‘비숙박업’과 ‘숙박업’을 넘나들며 소비자에게 혼란을 주는 용어라고 생각하며, 소비자의 피해와 고소, 고발이 있으니 나쁜 용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겠다.

‘발코니 확장’은 우리 건축계가 반성하고 고쳐야 할 큰 문제 중 하나다. 법에서는 ‘발코니 등의 구조변경’으로 명시한 ‘발코니 확장’은 바닥면적에 산입되지 않는 ‘발코니’를 실내로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문제는 바닥면적에서 제외하고, 취득세와 재산세를 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 국민에게 적용되기 때문에 공평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부적절하고 정의롭지 못하다. 용어의 표현도 부적하다. 발코니 부분을 거실로 만들면서 거실이 확장되는 것이니 ‘거실 확장’이라고 하거나, 조사를 붙여 ‘발코니로 확장’이라고 해야 한다. 아니면, ‘발코니 삭제’ 또는 ‘발코니 전용’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발코니 확장’은 부정적 행위를 긍정적으로 인식하게 한 최악의 용어라고 할 수 있다.

모델하우스의 발코니 확장라인 ⓒ 송의현

‘다가구, ‘다세대’, ‘발코니 확장’처럼 잘못 사용되어 널리 퍼진 용어를 바로잡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새로운 개념을 만들거나 도입할 때 적절한 용어와 이름을 사용하는 인식이 필요하겠다. 부적절한 용어를 사용해서 후배들에게 부끄러운 선배가 될까 싶어 오늘도 조심스럽다.

 

글. 신민재 Shin, Minjae AnLstudio 에이앤엘스튜디오 건축사사무소

신민재 에이앤엘스튜디오 건축사사무소

한양대학교 건축공학부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Artech과 JINA에서 실무를 했다. 2011년부터 AnLstudio 건축사사무소를 공동으로 운영하며 전시기획에서 인테리어·건축·도시계획까지 다양한 스케일의 작업을 하고 있다.
젊은건축가상(2016, 문화체육관광부), 경기도건축문화상 특별상(2017, POP하우스), 충남건축상 최우수상(2017, 서산동문849), 대한민국목조건축대전 본상(2018, 양평시옷(ㅅ)집), 서울시건축상(2019, 얇디얇은집), 한국리모델링건축대전 특선(2020, 제이슨함갤러리) 등을 수상했다.
현재 한양대학교 겸임교수이자 서울시 공공건축가이다.
shin@anlstudi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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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건축 워치 09 북한의 건축교육 ①

North Korean Architecture Watch 09
North Korea’s architecture education ①

북한은 김정은 위원장이 집권한 후 대규모 건설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건축대학의 위상도 높아지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집권한 해인 2012년 평양건설건재대학의 명칭을 평양건축종합대학으로 바꾸었으며, 2013년 현지지도 시에 학생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그리게 하였다. 2014년에는 평양건축종합대학의 명예총장이 되겠다고 발표하였으며, 12월에는 노동신문 한 면을 할애하여 평양건축종합대학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최근 평양건축종합대학은 북한에서 가장 경쟁률이 높은 대학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남북 관계가 개선되면 철도, 도로, 항구, 발전소, 전력망, 경제특구개발 등 대규모 건설사업이 추진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건축기술수준, 건설산업, 건축교육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북한의 개발 시 북한건축인력의 활용이 필수적이므로 북한의 건축교육현황 파악과 건설관련 인력양성방안 검토가 필요하다.

1. 북한의 교육

일본은 이미 1900년에 4년제 초등의무교육을 실시하였으며, 1909년에는 6년제 의무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에서는 의무교육을 실시하지 않았으므로 1936년 조선의 초등학교 취학률은 26%, 해방 당시에도 초등학교의 취학률은 43%(남학생 60%)에 불과하였다. 1935년 일본에서도 중등학교 진학률이 20%를 넘지 못하였고, 대학진학률은 3%에 불과하였으므로 식민지 조선인 중 중등교육과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은 아주 적은 숫자였다. 1944년 전문학교(2~3년제)와 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1만9,658명(당시 인구 약 1,500만 명)에 불과하였다.

김일성대학 건설과 관련한 북한 영화 <졸업증>의 한 장면(북한방송 캡처). 대학생들이 대부분 남학생이고, 교복을 입은 것이 이채롭다.

국가의 미래를 위하여 무엇보다 교육이 중요하다. 남북은 1945년 해방 후 국가 건설을 위하여 교육체제 정비를 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두었다. 남북은 모두 제도교육 정상화를 위하여 ▲초, 중등교육기관의 학제개편 및 확대 ▲초등의무교육 실시 ▲고등교육기관 설립 등을 추진하였고, 문맹률이 78%에 달하였으므로 문맹퇴치 운동도 시행하였다.

북한은 해방 후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새로운 교육제도 수립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인력 양성 ▲민주개혁을 위한 사상의식개조 등을 교육의 목표로 정하였다. 이를 위하여 1945년 11월, 일제강점기의 ‘국민학교’라는 명칭을 ‘인민학교’로 개칭하였으며, 학교 교육제도는 소련의 교육제도를 참고하여 1년제 유치반을 포함하여 인민학교 5년, 초급중학교 3년, 고급중학교 3년, 대학 4-5년으로 정하였다. 1949년에 북한은 초등학교의 취학률이 98%에 달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초등의무교육을 1950년부터 실시할 예정이었으나, 한국전쟁으로 미루어져 1956년에 4년제 초등의무교육을 실시하였다. 1958년에는 의무교육을 7년으로 늘렸으며, 1969년에는 9년제 중등의무교육(인민학교 4년, 중학교 5년)을, 1976년에는 취학 전 교육 1년과 인민학교 4년 및 고등중학교 6년을 합쳐 11년제 의무교육을 실시하였다. 2012년 김정은이 집권한 후 12년 의무교육제 실시를 발표하고, 2017년부터 12년제 의무교육을 실시하였다. 12년제 학제는 입학 전 교육 1년, 소학교 5년, 초급중학교 3년, 고급중학 3년으로 구성되어 있다.

남한은 6년제 초등의무교육을 1950년부터 실시하기로 하였으나, 6.25전쟁으로 인하여 지연되었다. 1953년 휴전 후 의무교육완성 6개년 계획을 수립하였으며, 1959년 취학률이 96%를 넘어 초등의무교육이 정착되었다. 그러나 시설이 열악하고 부족하여 한 반이 70~80명에 달하는 과밀학급이 많았고, 2부제·3부제 수업을 하기도 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학교 수가 증가하고, 출산율도 떨어지면서 교육환경은 지속적으로 개선되었다. 남한의 중학교 의무교육은 도서지방 등을 대상으로 1985년부터 시작되었으나, 완전한 중학교 의무교육이 시행된 것은 2004년이 되어서다. 일본은 1947년에 9년제 의무교육을 실시하였으며, 많은 국가들이 1970년대에 9년제 이상의 의무교육을 도입한 것에 비하면 남한의 중등의무교육 도입은 많이 늦은 것이었다.

해방 후 북한의 교육정책에서 의무교육 외에 시급하게 추진한 것은 종합대학교 설립이었다. 일제의 식민통치 시기에 조선인은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적었다. 해방 직후 조선에는 고등교육을 받은 인텔리가 매우 적었으며, 북한지역에는 그 수가 더욱 적었다. 일제강점기 고등교육기관은 경성제국대학과 전문학교를 포함하여 20여 개가 있었고, 1942년까지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한 조선인은 600여 명에 불과하였다. 해방 당시 북한지역에는 평양의학전문학교, 평양공업전문학교, 함흥의학전문학교 등이 있었을 뿐이다.

1945년 광복 후, 남북한에 일제 군국주의적 교육정책을 청산하고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고등교육기관의 확대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조성되었다. 남한은 1946년 4월 경성제국대학의 3개 학부, 관립전문학교와 사립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를 통합하여 종합대학교를 설립하는‘국립서울대학교설립안’을 발표하였으며, 1946년 8월 국립서울대학교가 설립되었다. 대학 설립 후 일부 학생과 교수들은 대학교의 통합과 학교에 대한 경찰의 간섭 반대, 그리고 친일 교수 배제 등을 주장하며 국대안 반대 운동을 본격화하였다. 이 운동은 해방 후 정치적 상황에 영향을 받아 좌·우익의 대결 양상으로 전개되었으며, 일부 지식인들이 월북을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북한은 해방 후 국가 건설을 위한 지식인과 권력 엘리트를 양성하기 위하여 여러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우선 군사정치학교인 ‘평양학원(1946년 2월, 초대원장 김책)’, 당 간부 양성을 위한 ‘중앙당학교(1946년 6월, 초대교장 김일성)’, 경제관료 양성을 위한 ‘중앙고급지도간부학교(1954년 인민경제대학으로 변경)’를 설립하였다. 이들 교육기관은 2~6개월의 단기교육과정으로 당장 필요한 간부인력을 양성하는 학교였으므로, 국가 건설을 위한 고급인력의 체계적 양성을 위한 고등교육기관 설립이 절실하였다.

북한은 종합대학을 설립하고, 종합대학을 모체로 하여 분야별 대학을 설립하는 방침을 세우고 1945년 11월에 평양대학건설기성회를 결성하였다. 건설기성회는 김일성을 고문으로 최용건 위원장, 강윤범 외 8명의 위원으로 구성됐다(통일뉴스, 2016.10.02). 1946년 5월에는 종합대학 창립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일부 대학 설립자금은 주민들의 모금으로 충당되었다. 북한 지도층에서는 대학 설립보다 경제분야에 예산을 사용하여야 한다며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으나, 대학 설립에 대한 주민들의 열망이 높았다.

1946년 7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북조선에 대학을 설치하는 결의’를 채택하고 법령 40호를 발표하였다. 결의는▲1946년 9월 1일 신학년부터 평양시에 북조선종합대학을 설립하며 ▲평양의학전문학교와 평양공업전문학교는 대학으로 승격해 종합대학에 편입시키고 ▲본 종합대학에 조선해방을 위하여 일본 제국주의와 투쟁한 조선민족의 영웅 김일성 장군의 이름을 부여하여 ‘김일성대학’이라 칭한다 등의 주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법령 서문에서 김일성은 ‘진보적 민주주의 원리에 입각하여 인민경제와 문화를 건설할지 도력 있는 고등기술인들을 발달시키는 것을 중요시하여’ 대학을 설치한다고 밝혔다.

김일성종합대학은 1946년 9월 15일 개교식을 하였으나, 실제로는 1946년 10월 1일 개교하였으며, 공식적인 창립일은 1946년 10월 1일로 하고 있다. 김일성종합대학을 서둘러 창립한 것은 남한의 서울대학교 설립에 대한 대응이기도 하였다.

대동동업전문학교를 설립한 이종만에 대한 이야기가 실린 책 「럭키경성」.

김일성종합대학은 평양의학전문학교와 평양공업전문학교(대동공업전문학교의 후신)를 대학으로 승격시키고 학부로 편입시켜서 설립하였다. 대동공업전문학교는 일제강점기 시절 금광왕으로 불리던 이종만이 1938년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자진 폐교한 숭실전문학교 건물을 인수하여 설립하였으며, 1944년 태평양전쟁으로 경영이 어려워지자 총독부에서 인수하여 관립인 평양공업전문학교가 되었다. 이종만은 최근 강동원 배우의 친일파 외조부로 화제가 된 적이 있으나, 단순히 친일파로 보기는 어려운 이상주의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일성대학은 평양공전 2학년과 평양의전 3학년 학생을 대학 1학년의 자격으로 입학시켰다. 창립 당시 7개 학부, 24개 학과, 1개 예과가 설치되었으며, 68명의 교원과 1,500명의 학생으로 구성되었다. 해방 당시 중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많지 않았으며, 특히 가난한 노동자와 농민의 자녀들은 교육을 받을 기회가 거의 없었으므로, 노동자와 농민 자녀들을 입학시키기 위하여 대학교 설립과 동시에 3년 과정의 예과를 개설하였다.

부족한 교원은 남한의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을 초빙하였다. 남한에서 전문학교를 통합하여 국립서울대학교를 설립하면서 실직하였거나, 사회주의 성향을 가진 지식인 또는 국대안에 반대한 교원들을 초빙하였으며, 특히 과학·기술계통이 많았다.

1947년에 김일성종합대학은 8개 학부, 학생 수는 3,813명이 되었다. 초기에는 교사가 없어 흥국공업중학교, 창생상업중학교, 평양사범학교, 인민재판소, 검찰청 건물 등을 교사로 사용하고 일본인 소유의 호텔과 식당은 학교 식당과 기숙사로 사용하였으며, 1948년 9월에 모란봉 동남쪽 용남산 기슭에 대학 본 교사가 건설되었다. 김일성종합대학은 1949년 첫 졸업생을 내보냈다. 현재 김일성대학교는 부지 156만 제곱미터에 건물면적은 40만 제곱미터이며, 학생 수가 12,000여 명에 교직원 수는 2,500여 명이다.

1948년 7월 7일에 북조선 인민위원회는 제69차 회의에서 결정 157호 ‘북조선 고등 교육 사업 개선에 관한 결정’을 통과시켜 김일성종합대학에서 4개의 학부(공학부, 운수공학부, 농학부, 의학부)를 분리했다. 이를 모체로 하여 평양공과대학(현 김책공업종합대학), 사리원농업대학(한국전쟁 전에 원산으로 옮겨 현 원산농업대학), 평양의과대학 등 3개 대학을 새로 창설하였다. 종합대학에서 분야별 대학으로 분리는 소련의 교육체제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김태윤, 「해방 직후 북한의 과학기술 교육기관 설립과 체제형성(1945~1950)」, 서울시립대 통일평화연구원, 통일과 평화 10집 2호·2018, p115~155). 그 외에도 1947년에는 북한 최초의 공업대학인 흥남공업대학(현 함흥공업화학대학)을, 1948년에는 보건의료인력확보를 위하여 함흥의과대학, 청진의과대학 등을 설립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만주 일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하다가 회생된 독립운동가 자녀의 교육도 해방 후 북한의 중요한 교육정책 중 하나였다. 김일성은 해방 후 중국 동북지방 및 국내에서 항일유격대 유자녀와 생존한 항일유격대의 가족들을 찾기 위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광범위한 조사를 하여 이들을 귀국시켰으며, 1947년 10월 평안남도 대성군 간리역에 임시교사를 설치하여 개교한‘평양혁명자 유가족학원’에 입학시켰다. 1948년에 만경대에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하였고, 1958년에는 만경대혁명학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한국전쟁 후에는 전사한 군인들의 자녀들도 입학하게 하였으며. 이들 중 일부는 소련과 동유럽 국가에 유학을 보내기도 하였다. 만경대혁명학원은 중고등학교과정 6년과 군사교육 2년 등 8년제 과정이며, 졸업 후에는 김일성종합대학 및 각종 군사학교에 진학하여 북한의 핵심 엘리트로 길러지게 된다. 만경대혁명학원의 졸업생은 총리를 지낸 연형묵과 최영림(1기 졸업생), 인민무력부장을 지낸 김영춘, 국방위 부위원장을 지낸 오극렬 그리고 최근 핵심 실세로 떠오른 최용해, 김영철도 만경대혁명학원 출신들이다. 만경대 유자녀학원 외에도 남포유자녀학원(남폭혁명학원), 신의주유자녀학원, 해주유자녀학원 등도 설립하였다.

1980년대, 김정일의 후계체제가 공식화되면서, 교육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초반까지 북한교육의 특징으로 ▲과학기술과 외국어교육의 강화 ▲수재교육의 도입 ▲고등교육의 대중화와 이원화를 들 수 있다.

과학교육을 위하여 인민학교와 고등중학교의 교과내용에 수학, 과학 및 전자계산학 등의 과목을 개설하여 교육하고, 김책공업종합대학, 평양기계대학, 평양철도대학 등에 프로그래밍학과, 전자계산기학과, 정보처리학과 등 관련 학과를 설치하거나 기계, 전자, 자동차 부분의 단과대학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대외교역 확대와 외국선진기술 습득을 위하여 인민학교, 고등중학교에서 외국어교육, 특히 영어교육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평양에만 있었던 고등중학교 과정의 외국어학원을 각 시도별로 12개 추가 설립하였다.

평양 외국어학원 전경 © 통일부

1984년 평양 제1고등중학교를 설립하면서 수재교육을 시작하였다. 고급인력양성이 국가발전을 이끈다는 김정일의 방침에 따라, 1985년에는 각도재지 12개지역에 제1고등중학교를 설치하였다. 1995년에는 각 도와 시에 26개의 제1고등중학교가 운영되고 있었으며, 1999년에는 그 수를 더 늘어났다. 그리고 남한에 널리 알려져 있는 예술분야의 영재교육기관인 ‘금성학원’도 1989년 ‘금성제1고등중학교’로 설립되었으며, 나중에 인민학교, 중학교, 전문학교, 대학교과정이 있는 금성학원으로 바뀌었다.

1986년에는 대학입시에 예비시험제도를 도입하였다. 북한의 대학입시는 각 기관, 기업소별로 대학 입학시험을 볼 수 있는 추천 인원이 정해져 있다. 성적, 품행, 성분, 군대근무 등을 고려하여 인원을 추천하면, 추천받은 인원은 각 대학별 시험을 치뤄서 합격하면 대학생이 될 수 있었다. 김정일은 당 간부의 자녀이면 성적이 낮아도 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고 비판하면서 지역별 예비시험을 도입하도록 하였다. 예비시험을 본 후 성적을 고려하여 대학별로 시험을 볼 수 있게끔 추천을 받도록 규정을 바꾼 것이다.

김정일은 1984년 고등전문학교를 단과대학으로 개편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에 따라 1984년 20개의 고등전문학교가 단과대학으로 개편되는 것을 시작으로, 점차 3-4년제 단과대학으로 개편되었다. 대학 수는 1960년 78개에서 1970년 129개, 1980년 170개, 1990년 260개로 빠르게 증가하였다. 이 정책은 중심대학(김일성종합대학, 김책공업종합대학 등)을 통하여 핵심인재를 양성하고 단과대학, 전문대학을 통하여 지방의 산업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 고등교육 기회를 확대하는 정책이었다.

2011년 김정일 위원장이 사망한 후 2012년 김정은이 집권하면서 가장 먼저 교육개혁 정책을 발표하였다. 학제를 11년에서 12년으로 개편하고, 12년 의무교육제 실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발표 후 5년이 지난 2017년부터 12년제 의무교육이 실시되었다. 의무교육 학제는 학교 입학 전 교육 1년, 소학교 5년, 초급중학교 3년, 고급중학 3년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학교시설 개선에 대대적인 투자를 진행하고, 정보화 등 첨단과학기술 교육을 강화했으며, 일반 노동자 대상 원격교육 등에 대한 인프라도 구축하였다.

김정숙제사공장의 원격교육 모습 © 내나라

의무교육을 12년으로 개편한 것은 국제적으로 의무교육 혹은 무상교육이 12년제로 실시되는 것이 일반적이고, 북한이 만 17세에 사회에 진출하는데 반하여 외국은 19세에 사회에 진출하는 것을 고려한 것이다. 그리고 중등교육 다양화와 직업교육을 강화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참고문헌
신효숙, 「북한의 체제와 정책」中 12장, 명인문화사, 2014, p.354~380.

 

글. 변상욱 Byun, Sangwook
대한건축사협회 남북교류협력위원회 위원·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도라산출입사무소장·건축사·시공기술사

변상욱 건축사·건축시공기술사

1999년부터 현대아산에서 근무하면서 금강산관광지역 건축물과 평양체육관 등 건설사업관리업무를 수행했으며, 2004년부터 2016년까지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에서 근무하면서 개성공업지구 종합지원센터, 기술교육센터 등 건설사업관리와 공장건축 인허가업무를 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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