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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호, 월간 건축사는 건축의 시대를 증명하는 유일한 자산이다

Vol. No. 600. Monthly ARCHITECT is the unique asset proving the era of architecture

얼마 전 유럽 도서관을 견학하던 건축사가 사진을 보내왔다. 도서관 한켠에 있는 월간 건축사. 그 사진을 보고, 느닷없이 담당하게 된 편집장이라는 자리를 고민하게 되었다.
과장하면 내가 만드는 월간 건축사를 통해서 유럽인들이 한국 건축을 이해하는 창구가 된다. 그러다 보니 게재되는 작품에 신경이 쓰인다. 하나라도 더 작품을 게재하고 싶은 욕심도 커지고 있다. 지금 실리는 건축 작품들이 개인 입장에서 흔적이 되지만, 우리나라 전체로 보면 한 시대를 드러내는 시대적 단면이기도 하다. 수많은 민간 건축지들이 창간과 폐간을 반복하는 동안 월간 건축사는 계속 진행형으로 지속되었다.
이런 지속성이 월간 건축사의 의미와 가치를 증명해주는 것이다. 우리 건축계의 시간적 단층을 볼 수 있는 유일한 매체이기 때문이다.
2019년 4월호는 창간 600호다. 600호를 고민하다가 50년 넘은 과거부터 살펴보기 시작했다. 다양한 기사들이 있다. 안타까운 점은 창간호부터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주제와 내용이다. 설계 보수와 감리에 대한 언급은 결의문까지 있다. 이는 지금도 우리가 말하고 주장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지난 50년 넘도록 개선되지 않았다는 것인데, 뭔가 특단의 방법이 필요하지 않을까?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흑백에서 칼라로… 과거의 페이지를 보면서 뭔가 아쉬움이 조금씩 커져갔다. 그것은 우리의 궤적을 볼 수 있는 작품들 때문이었다. 사진들은 변변치 않았고, 작품들은 몇 개 게재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척박한 우리나라 풍토에서 시도된 수많은 작품들을 보면서 선배 건축사들의 노력과 열정을 느낄 수 있었다.
문득 이들 작품들을 더 자세하게 그리고 생생하게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첨단 정보화 기술로 책상에 앉아서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을 통해서 과거의 존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특히 60∼70년대 작품들이 주는 매력은 대단했는데… 아쉽게도 과거 작품들이 존재 하지 않았다. 도시 구조가 바뀌고, 형태가 바뀌었다. 아예 지형이 바뀐 곳도 많았다. 건물은 없어지고, 새로운 건물로 대체되어 있었다.
과거 한국 건축은 어떠했을까? 해방이후 수많은 노력이 있었을 텐데, 우리는 김중업과 김수근만 기억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더더욱 놀라운 것은 건축계 자체도 다른 시도들과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사라진 건축처럼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아온 건축사들의 존재도 잊혀져 있었다. 기록과 흔적은 우리의 지나온 시간을 만나는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자료와 기록, 흔적은 남아있지 않다. 홍철수, 이희태, 노용진, 차경순, 공일곤 등등. 후대 건축계들은 이들을 기억하고 있지 않다. 그나마 월간 건축사의 흑백 사진이라도 남아 일말의 위안이 되기는 하지만…
수많은 도면들도 사라지고 남지 않았다. 국가도 민간도 우리의 기억을 지워버리고 소멸시킨다. 이는 건강한 일이 아니다. 미국의 경우 국회나 대학 도서관을 가면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건축 도면뿐만 아니라 생생한 사진들이 다양하게 남아 있다. 루이스 칸의 자료도 마찬가지고, 수많은 건축사들의 작품들이 손으로 그린 도면과 사진들이 넘쳐난다. 이제는 CAD로 그리지만 손으로 일일이 그렸던 과거의 도면은 그 건축사의 정체성이고 개성이었다. 누구도 보존하지 않고, 소각되고 버려지고 있다.
이제라도 우리는 시간을 모으는 노력이 필요할 때다. 그것은 국가적 자원이기도 하다. 건축의 아카이브는 국가의 자산이기 때문이다.

글. 홍성용 Hong, Sungyong 본지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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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시내 새벽

At dawn, downtown in Paris

파리시내 몽소공원 부근에 숙소를 잡았다. 여행은 낯선 작가의 흥미로운 책처럼 새로움을 준다. 여행지의 새벽 풍경은 아름답고 신비롭다. 욕심껏 돌아다닌 어제 일정 덕에 늦게 잠에 들었지만 나도 모르게 일찍 일어났다. 새벽의 도시가 푸른 빛으로 새롭게 열린다. 멀리 에펠탑이 푸르스름한 새벽하늘을 배경으로 형체를 드러낸다. 아이의 손가락처럼 꼬물꼬물 솟아 있는 굴뚝들, 지붕들. 이제서 서서히 제모습을 드러내는 다락방 창문들. 군집된 지붕들이 어우러져 파리의 스카이 라인을 만든다. 즐거운 노래처럼 변주되고 이어지는 도시의 스카이라인은 여행의 호기심과 겹치면서 나를 설렘으로 이끈다.

글. 이관직 Lee, Kwanjick (주)비에스디자인 건축사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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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축사

Column & Congratulatory Message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건축 본연의 이야기를 담아내 우리 건축의 맥 이어갈 것

석정훈(대한건축사협회 회장, 월간 「건축사」 발행인)

월간 「건축사」가 2019년 4월호를 기해 통권 600호를 맞았습니다.
스마트폰 시대 ‘종이 잡지’가 새로운 환경에서 다양한 변화를 겪는 가운데, 600호까지 오랜 시간 그 맥을 이어온다는 게 쉽지 만은 않은 일입니다. 종이잡지가 생명력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다양한 정보, 빼어난 편집, 종이를 넘기는 손맛의 매력 등 다양한 요소가 뒤따라야 하겠지만, 무엇보다 건축이 우리 삶과 일상으로서 입체적인 콘텐트와 함께 건축의 깊이를 더하게 하는 다양한 기획, 소통의 무게를 더해줄 수 있는 사유의 기회를 담아내야 합니다. 주류잡지와 구별되는 차별화된 시선과 가치가 필요하다 생각됩니다.
월간 「건축사」는 지난 50년 넘게 우리 건축사의 다양한 작품들과 건축계 소식, 더 나은 건축계를 위한 다양한 이야기를 담아내는 데 헌신해왔습니다. 실제 통권 600호를 넘겨 역사를 이어온 건축전문지는 흔치 않습니다. 때문에 월간 「건축사」는 역사적 가치와 더불어 한국 건축사를 그대로 녹여 담아낸 정말 값진 매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종이 잡지의 지속적 위기 가운데서도 이 가치를 계승해 ‘넘겨 읽는 손맛이 느껴지고, 유익하고, 수집할 만한 가치 있는 매체’로 발전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의 관심과 지원, 참여가 필요합니다.
올 1월부터 월간 「건축사」는 대대적인 변화를 꾀했습니다. 보다 심도 있는 건축작품 중심의 사고와 내용을 보여주고, 특히 전문적 학습과 고민을 한 건축사의 작품성과를 보여주는 데 집중하고 있습니다. 건축 독창성과 고유성, 새로운 해석, 사회적 기능과 해석을 어떻게 건축적으로 표현하는지, 그리고 이러한 건축사의 창의적 노력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작은 주택부터 큰 건축프로젝트까지 건축사들이 한땀 한땀 쏟아 만든 성과들을 소개합니다. 또 건축계의 소통을 위한 다양한 기획과 문화예술, 건축실무 정보도 충실히 담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아카이브의 중요성이 차츰 대두되는 가운데, 단순히 자료를 모아놓기 보다 일반인은 물론 건축계 인사들이 소장하고 있는 자료를 많이 활용해 아카이브형 전시와 연구도 지속될 수 있게 하는 노력도 함께 할 것입니다.
독자가 잡지를 끝까지 읽고 나서 느끼는 만족감과 완독성, 그리고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건축 본연의 이야기를 담아내 우리 한국 건축의 맥을 이어가겠습니다.
앞으로도 월간 「건축사」가 이러한 마음과 정성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노력에 격려를 당부 드리며, 모두가 한 뜻으로 함께 해 주시길 바랍니다.

 


시대가 원하는 건축 컨텐츠를 만들어가는 데 선도적 역할 해주길

김현미(국토교통부 장관)

건축과 사회를 잇는 다리 월간 ‘건축사’ 지령 600호를 축하합니다.
1966년 7월 창간된 건축전문지 월간 ‘건축사’는 대한민국 건축의 역사와 궤를 함께해왔습니다. 건축이라는 한 분야에서 반세기 넘는 긴 시간 동안 새로운 목소리를 내며 담론을 이끈 점은 분명합니다. 우리나라 건축의 창조성과 독자성을 널리 알렸고, 건축사의 작품 활동을 장려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한국 건축의 정수’를 긴 호흡으로 오롯이 담아왔기에 역사적 중요성 또한 매우 큽니다. 그뿐만 아니라 건축사들과 사회의 징검다리가 되어 건축계의 창조적이고 종합적인 의제를 만들어왔다는 점은 월간 ‘건축사’의 가치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우리 사회는 4차 산업혁명이 가속화되며 건축을 포함한 모든 분야에 커다란 변화의 물결이 일고 있습니다. 생활수준이 향상되며 공간 환경에 대한 관심과 눈높이 역시 높아졌습니다. 이제는 이런 시대적 흐름에 부합하는 콘텐츠를 발굴하는 데 집중해야 합니다.
앞으로 시대가 원하는 건축 콘텐츠를 만들어가는 데 월간 ‘건축사’가 선도적인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합니다. 이를 통해 다양하고 혁신적인 건축 작품이 더욱 늘어나고 대한민국 건축 문화가 한 단계 더 발전하기를 바랍니다.
국토교통부도 국민의 삶터이고 일터가 되는 건축물의 안전과 품질, 품격을 보다 높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그 과정에 우리 건축사 여러분들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다양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다시 한 번 지령 600호를 축하드리며, 시대의 격을 높이는 건축 담론지 월간 ‘건축사’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한국 건축의 축적된 시간 흔적 담아내는 건축전문잡지로서 더욱 성장하길

박순자(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위원장)

건축전문지 「월간 건축사」가 지령 600호를 맞이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지난 1966년 7월 창간된 「건축사」는 반세기 넘게 한국 건축의 가치를 높이고, 건축사의 창조적 작품 게재를 통한 한국 건축의 우수성을 알리는 데 노력해 왔습니다. 지난 50여 년간 기록된 건축작품과 건축계 이슈 및 담론들은 곧 한국 건축이 걸어온 여정을 담고 있습니다. 건축이 우리 삶 자체인 것처럼, 시대를 기록하고 사람을 움직이고 세상을 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건축사」와 같이 건축의 본질과 의미를 깊게 탐구하게 하는 건축전문잡지로 인해 우리 삶이 더 풍성해지고, 우리 사회가 문화적 다양성을 증진시킬 수 있습니다. 건축전문지 ‘도무스’가 전후 이탈리아의 디자인 르네상스를 견인했듯, 「건축사」도 국내외 건축계 경향을 소개하고, 신진건축사를 발굴하며 건축계 담론을 앞으로도 주도해나가기를 바랍니다.
건축은 사람에게 기쁨을 줄 수 있어야 하고, 새로운 기능을 자극해야 합니다. 주거복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크게 증대되고 있는 시기에 여러 세대와 같이 취할 수 있는 공간이 우리 사회에 많이 만들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국민 생활과 밀접한 작은 입자의 좋은 건축물들이 많아지고, 능력과 안목을 지닌 건축사분들이 도시 경관에 더욱 중요한 길목을 차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 시대를 대표하며 건축계에 영감을 줄 수 있는 작품들이 널리 공유돼야 합니다. 「건축사」가 한국 건축의 축적된 시간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아내며 건축전문잡지로서 더욱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다시 한 번 「건축사」가 지령 600호를 맞이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뿌리 깊은 전통을 바탕으로 새로운 혁신을 추구하는 건축매체로 성장하길

이현수(대한건축학회 회장)

대한건축사협회에서 매월 발행하는 「건축사」가 지령 600호를 맞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건축전문잡지인 「건축사」는 1966년 7월 창간된 이후 50년 넘게 발행되면서 시대의 건축조류와 건축담론을 살펴볼 수 있는 매우 값진 건축매체입니다. 「건축사」는 우리나라 건축역사의 소중한 기록이면서, 건축계의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조망하는 나침반이기도 합니다.
건축작품에 대한 건축사들의 창조적인 혁신노력을 전파하고, 건축문화의 보전과 창달에 기여코자 하는 창간정신을 되새기고, 더 나은 사회를 위한 건축인의 사명과 책임을 인지하면서 과감한 변신과 개혁을 시도하면서 새로운 미래를 향해 힘차게 정진하길 기대합니다.
지령 600호를 맞이하기 까지 「건축사」는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소통하며, 신진 건축사들의 등용문이 되기도 하였고 수많은 건축사들에게는 도약하는 기회를 마련해주었습니다. 최근에는 건축작품 외에도 문화, 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기획물을 소개하고, 학생기자단을 운영하면서 다양성을 갖춘 매체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활동을 바탕으로 「건축사」는 모든 건축인의 참여를 독려하면서 담론 형성과 소통의 중심으로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최근 디지털 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소셜미디어와 모바일 환경이 보편화 되면서 매체환경이 급변하고 있지만, 뿌리 깊은 전통을 지닌 「건축사」는 혁신을 추구하는 매체정신을 이어나갈 것으로 확신합니다. 앞으로 건축인 모두가 꿈꾸는 행복한 공간을 수록하는 친근하고 유익한 건축전문지로서 건축문화를 선도하는 새로운 역사를 쌓아나가길 성원합니다. 다시 한번 「건축사」 지령 600호의 발간을 축하드립니다.

 


600호는 한국건축사 발전 그 기록 이상, 역사 그 자체

강철희(한국건축가협회 회장)

1966년 창간 이후 끊임없이 발전하여 오늘에 이른 월간 <건축사>의 지령 600호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더불어 600호를 맞이하기까지 헌신적인 노력을 해온 대한건축사협회 및 편집부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월간 <건축사>는 이 시대 한국 건축의 창조성과 독자성을 알리고, 혁신적인 작품 활동과 노력을 이 시대 건축의 힘으로 만들기 위해 힘써온 건축전문지입니다. 건축담론, 건축계 인터뷰, 해외건축동향 뿐만 아니라 영화, 광고 등 문화전반에서 건축문화 소통의 장이 되어왔습니다.
특히 건축전문지로 600호라는 의미는 한국건축사 발전의 그 기록 이상일 것입니다. 한국건축문화의 역사 그 자체입니다.
앞으로도 건축전문지로서 건축문화예술 전반에 대한 지식을 나누고 사회와 소통하는 역할을 충실히 해주시기 바라며, 대한민국 건축의 역사를 기록하고, 시민들의 곁에 더욱 다가서는 매체가 되길 바랍니다.
600호라는 괄목한 만한 성과를 이루기까지 끊임없이 노력해온 대한건축사협회 및 편집부 여러분의 노고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리며, 이를 위해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신 월간 <건축사> 구독자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가정에 항상 웃음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월간 <건축사> 지령 600호를 다시 한 번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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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01 집짓기의 계륵, 건축사의 역할과 설계비

건축담론

편집국장 註

한국 건축은 어떻게 주도되고, 일반에게 다가서는가? 어느 집단이나 리딩그룹이 있고, 선도적 이슈를 제기하는 누군가가 존재한다. 이들의 헌신과 노력, 그리고 새로운 시도는 전체의 방향을 제시하기도 하고, 외부의 시선을 교정하는데 도움을 준다. 앞장 선 이들은 때로 책임감으로 나서줘야 할 때도 있고, 대외적 설득이 필요할 때도 있다. 지금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운 건축설계시장은 경쟁과 효율성이라는 미명하게 최악으로 가고 있다. 더구나 정부에서 추진 확대하는 공공건축가라는 사회적 역할이 커지는데, 명예를 앞장세운 공공의 경제적 불평등 계약이 확산되고 있다. 이럴 때 일수록 건축사의 업무 대가와 사회에 대한 책임감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보면 한국 건축의 리더 그룹은 누구이며, 역할은 무엇인가? 과연 충분한 역할과 노력이 되고 있는가? 작금의 건축계에서 건축의 리더 그룹, 엘리트는 필요한가? 이번 건축 담론은 이런 질문을 해본다.

 

Dilemma in house building : The role of an architect and design costs

집을 짓는 일은 누구에게나 두 번 할 수 없는 일대사一大事라고 한다. 집짓기가 얼마나 힘든 일이면 집 세 채 짓고 저승 가면 무조건 천당행이라고 우스갯소리가 나왔을까? 내 집을 지어본 사람이면 두 번 다시 이 일을 하면 성姓을 간다고 할 정도로 문제와 다툼 없이 짓기는 어렵다.
건축주가 다툼 가운데 있게 되는 건 돈을 적게 들여 원하는 집을 지으려 하거나 일을 독단적으로 진행할 때 일어나게 된다. 시공자는 정해진 공사비에서 원가를 줄여 이윤을 확보하려고 애쓸 테지만 이윤을 뺀 실행 공사비가 부족해서 공사에 소홀하다 보면 문제가 된다. 좋은 집을 짓기 위해 뜻을 같이 해야 하는데 적정하지 못한 공사비는 늘 다툼의 원이 되기 일쑤다. 이렇게 다투게 되는 원인이 부실한 설계도면일 수 있으니 건축사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러니 다툼을 미연에 방지할 묘수도 건축사가 가지고 있는 셈이다.
공공건축물은 백년지대계로 지어져야 하므로 공공성과 공동성이 담겨 있어야 한다. 공공성이라 하면 목적용도를 편리하게 오랫동안 쓸 수 있어야 하는 것으로, 그만큼 버틸 수 있는 내구성과 심미안을 가져야 한다. 또 공동성은 불특정 다수 누구라도 안전하고 편리하게 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고민 역시 건축사의 몫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런 고민도 심의위원이나 담당자의 선에서 그쳐버리기 십상이다.
개인의 일대사라는 일반건축물이든 백 년 뒤에도 생명력을 잃지 않아야 하는 공공건축물이든 집을 지어내는 일을 누가 주도해야 할까? 설계와 감리, 그리고 준공이 되어 집이 세워지면 유지관리로 수명을 연장시키는 일까지 일선 업무를 담당하는 건축사가 하고 있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건축사를 어떤 자리에 두고 있는가? 집을 짓는다는 목표로 배를 저어가는 사공은 건축사인데 이리 가라 저렇게 저어라 하는 이들이 배를 산으로 몰고 있는 실정이 아닌가? 사공에게 뱃삯은 제대로 주지 않고선 길마저 제멋대로 간섭해놓고 제 시간에, 목적지에 닿지 못했다고 나무라고 있으니 이 일을 어쩌랴.

 

일반 건축물,
왜 평당 설계비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나?

동료 B건축사는 최근 공사 중인 종교건축물의 보완설계를 의뢰 받아서 작업 중이라고 한다. 그는 앞서 계약을 하고 건축허가를 받았던 A건축사와 공동 설계자로 참여하고 있다. 공사 중이라고 해도 도면이 미비하거나 시공자의 사정에 의해 변경이 필요하면 A건축사가 설계 변경을 하면 되지 않는가? 동료 B건축사가 이해되지 않는 설계변경에 참여하게 된 연유를 들어보니 문제의 발단은 저가 설계비에 있었다.
공공건축물은 법정 설계대가기준에 의해 설계비가 책정되고 있다. 그 대가기준은 물가를 감안하여 해마다 상승분이 반영되고 있다. 그런데 일반건축물의 설계비는 소비자인 건축주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유경쟁에 맡겨지고 있다. 시장 가격에 맡겨져 있는 것을 설계비로 얼마가 적정한지 건축주가 판단할 수 있을까?
건축사의 수에 비해 일감이 턱없이 부족하다 보니 수주경쟁에 내몰리고 있는 건 당연하고, 일을 수주하려는 건축사는 경쟁력 있는 설계비를 제시할 수밖에 없다. 거의 대부분의 건축사들이 일을 제대로 하기 위한 원가를 보전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건축물의 용도와 상관없는 ‘평당 설계비’에 내몰릴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일반건축물 중에서도 종교건축물은 설계 프로그램이 복잡하고 설계기간도 충분히 잡아야 한다. 협의 과정 또한 일에 관여하는 건축주가 다수라서 쉽게 안이 결정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주를 하기 위해서는 A건축사도 ‘평당 설계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 결과로 제출되었던 설계도의 내용은 수주를 가능하게 했던 미려한 외관은 유지했지만 건축물의 시공성을 생각해야 한다면 충분하지 못했다.
건축주는 변경작업을 맡긴 동료 B건축사에게 A건축사가 제시한 설계비를 한 푼도 깎지 않고 그대로 계약했다며 고개를 저었다고 한다. B건축사는 앞서 설계했던 A건축사를 탓하며 나라면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었다고 했다. 일을 수주하려고 견적금액을 적는 어떤 건축사가 ‘평당 설계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평당 설계비’로 수주해서 일을 하는 건축사는 죄를 짓는 무거운 마음에 짓눌리고 그렇게는 못하겠다며 버티는 건축사는 일이 없어 직업에 대한 회한에 고개를 떨군다.
허가절차를 밟기 위한 기본도면 작업으로 일을 끝내게 하는 ‘평당 설계비’를 저가 수주라며 비난할 건축사가 있을까? 그런 도면으로 결정되는 공사비도 당연히 ‘평당 공사비’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배우자를 만나는 어려움으로 얘기하는 시공자의 결정, 그 과정이 제대로 산출되지 않은 낱장 견적서의 최저가 ‘평당 공사비’로 이루어진다면 만족할 만한 집이 지어질 리가 없지 않겠는가. 또, 감리 건축사는 기본도면에도 미치지 못하는 허가도면으로 현장에서 무엇까지 확인할 수 있을지.
그나마 동료 B건축사가 참여하여 설계도면이 보완되면서 건축주도 만족하고 시공사도 공정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며 현장에 활기가 넘친다고 한다. 건축주가 동료 B건축사에게 말했던 내용을 옮겨 본다.

“저는 전문가는 아니지만 ‘구조, 기능, 미’라는 건축의 3대 요소는 압니다. 첫째로 구조는 집이 무너지지 않는 내구성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화재 등 사용상의 안전까지 포함되는 것 맞지요? 두 번째로 기능은 우리가 이 건축물을 지으려는 순목적뿐 아니라 얼마나 안락하고 편리하게 쓸 수 있는지 고심해야 되는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美라는 건 설계자의 과도한 창작의도 때문에 정해진 공사비가 부족하게 될 수도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이야기 끝에 동료 건축사의 마음을 울리는 말을 던졌다고 했다.

“건축사님은 설계를 하면서 이 세 가지 중에서 어느 요소에 치중합니까? 앞서 계약했던 A건축사는 1번 요소와 2번 요소는 제대로 챙기지도 않고 3번 요소에 너무 치중하는 바람에 공사비는 충분하지 않은데 집이 잘 지어질까 하는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렇게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작업 시간과 그만한 설계비가 지불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답을 하는 게 맞지만 계약을 하면서 제시하는 설계비는 우리 건축사가 정했던 금액이었으니 누구를 탓하리오.

 

공공건축물, 부산시립현대미술관을
설계시공턴키 입찰방식으로 지었다니

어느 도시든 미술관은 건축물 그 자체로 작품이 되고 관광명소가 되어 도시를 대표하는 랜드마크가 되고 있다.
빌바오는 스페인에서 4번째로 큰 도시이자 조선소로 유명한 도시였지만 침체되고 퇴색되어버려서 잊힌 상태에 불과했다. 빌바오 시는 옛 명성을 되살리고 활성화시키기 위해 공항과 지하철 역사를 새로 건설하는 등 도시 재구성 계획을 수립했다. 그 계획에서 네르비온 강변을 중심으로 재개발계획을 추진하면서 뮤지엄 건설을 포함시켰다. 구겐하임 미술관 건립은 도시 계획의 핵심으로 진행되었으며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이로 인해 빌바오 시는 활성화되어 관광 영순위로 떠올라 과거의 명성을 되찾게 되었다. 건축사 프랑크 게리의 위대한 능력은 낙후되어 버린 빌바오를 스페인 최고의 관광 명소로 재탄생 시켜냈다.
부산 사하구 을숙도에 있는 부산현대미술관은 2017년에 완공되어 2018년 6월에 개관했다. 준공 무렵 외관 시비로 개관이 늦어졌는데 시민들은 대형마트건물이냐면서 미술관을 이렇게 지을 수 있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외관만 문제가 되었던 것이 아니라 현대미술의 다양한 표현을 제대로 소화할 수 없는 내부 공간 구성, 관람객과 직원 동선의 혼재뿐만 아니라, 시공 상태마저 지하층에 습기가 차고 패널 마감의 줄눈을 맞추지 못하는 등 도마에 올라 지금도 구설수가 끊이지 않고 있다.
문화예술을 담아내는 건축물은 외관이나 공간감으로 도시를 대표하는 명소가 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또, 명소로서의 건축미와 공간감을 갖추어내는 건 물론이며 담아내어야 할 본질인 기능과 역할이 충분히 검토되어야 한다. 설계자는 국제공모가 아니더라도 국내의 건축사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진행되어 선정되었어야 마땅했었다. 그런데 입찰 방식으로 시공자가 주도하는 턴키 컨소시엄에 설계자가 포함되었으니 설계자는 시공자의 조력자에 그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건축사에게 미술관 등 문화예술을 담는 건축물은 출세작이 되기도 하며 직업의 명성을 더 높일 수 있기에 심혈을 다해 작업을 한다. 또한 작품에 대한 고뇌와 함께 현대 미술의 자유로운 표현을 전시 방식에서 충분히 담아낼 수 있도록 하는 설계 작업은 지난至難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럼에도 시공자가 주체가 된 프로젝트라면 설계자의 의지는 한정될 수밖에 없다. 또한 건축주인 부산시는 부산현대미술관이라는 호재로 동부산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는 서부산권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부산현대미술관은 개관을 미루어가면서 대형마트나 다름없는 외관 이미지를 바꾸고자 외벽 일부에 프랑스 식물 아티스트인 패트릭 블랑이 ‘수직정원’을 설치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더니 현대미술관이라는 소는 온데 없고 볼품없는 건물에다 미술관 관계자들이 현대미술을 담아내느라 애쓰고 있는 것이다. 부산현대미술관은 설계의 중요성을 가벼이 여겨 건축사의 작업 혼이 담기지 못한 얼빠진 공공건축물로 오래오래 도시의 흉물로 회자될 것이다.

 

부산현대미술관 _ 배면

건축사, Architect는
집짓기의 원칙을 만들고 이끌어 가는 사람

가우디에 따르면 architect는 ‘저 스스로 규약을 만드는 사람’이다. 규약la constituición은 흔히 헌법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는데, 만약 헌법을 만드는 자가 그것에 자기 마음대로 자신의 개인성을 담으려 한다면 과연 어떻게 되겠는가? 나는 돼지족발을 좋아하니 족발에는 부가세를 붙이지 않는다든가, 내 고향이 전라도니 전라도민에게는 가산점을 부여하든가, 이런 것들은 이치에 맞지 않다. architect, 그는 통치자다. 통치자의 자리는 굉장한 권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개인적인 모습은 숨긴 채, 오히려 원칙과 원리를 드러내야 하는 자리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떠한 원칙도 대자연의 위대한 책 앞에서는 초라한 것이 되고 만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 어떤 위대한 양식이라 해도 피었다가는 지고 말지만, 자연은 만고의 것이다. 그러고 보니 arquitecto라는 말의 그리스적 어원은 ‘arqui + tecto’인데, ‘arqui’는 원리와 원칙, 첫째를 가리키는 말이며, tectón은 결구 지워 세우는 것을 뜻한다. architect는 말 그대로 원칙을 만드는 사람인 것이다. (1) 〔가우디의 어록〕건축가Ⅱ-Byungki Lee

Architect, 건축사는 집을 짓는 일의 시작인 설계부터 감리 업무를 수행하면서 시공 현장을 챙겨 준공까지 책임을 진다. 어디 그뿐이랴, 지어지고 난 뒤에도 용도변경이나 리모델링 등의 유지관리까지 집의 잉태와 출산에서 멸실까지 집의 일생을 관여하는 유일한 직분을 수행하도록 국가에서 자격을 부여받았다.
의사가 사람의 일생에 간헐적으로 간여하는데도 6년의 수학기간을 가지는데 건축사는 5년을 배워서 자격을 취득하게 된다. 그런데 의사의 일은 국가가 발 벗고 나서서 관리하지만 건축사의 일은 나라에서 간섭만 할 뿐이지 않는가? 일을 하는 대가는 자유경쟁으로 알아서 먹고 살라고 방치하면서 사고가 나면 잘잘못만 따져 우선 십자가를 지운다.
집을 짓는 과정에서 건축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다면, 아니 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 결과로 우리 도시는 지금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

 

부산현대미술관 _ 정면 & 좌측면

건축사의 제 자리 좀 지켜주오

1939년에 지어진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낙수장, 이 주택은 지금도 전 세계에서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요른 웃존의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는 공기를 십년이나 넘기고 예정공사비의 1400%를 초과하는 등 수많은 비화를 남기고도 설계자는 불만족스러워 했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빌바오 구겐하임미술관은 건축사가 도시의 미래를 여는, 아니 세상을 바꾸어내는 장본인이 되었다.
공공건축물은 물론이거니와 평범한 사람의 주택이라 할지라도 설계자인 건축사만이 공정하고 원칙에 입각한 책임자가 될 수 있다. 百年之大計로 지어야 하는 건축물의 책임자가 되어야 할 건축사가 건축행정처리 담당으로 내몰리는 우리 사회, 건축사가 이런 대접을 받는 과보는 이미 받고 있다. 좋은 건축물이 있는 도시에서 살아야 행복하다지만 우리나라에는 해당되지 않을 것이라는 불편한 독백을 나만 중얼거리고 있을까?
세계가 인정하는 건축상을 수상하는 건축사가 우리나라에서는 왜 드문 것일까? 우리나라에 있는 건축물을 보기 위해 찾아드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우리나라에서는 세계적인 건축사가 설계자가 되어도 혼을 불어넣어 설계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이 모든 일들은 설계자가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 풍토에서 기인하는 것이리라.
건축사Architect는 집짓기에 있어 원칙에 의거하여 일을 하는 사람, 집을 짓는데 있어서 으뜸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고 한 바로 그 위치에 있어야 한다. 집짓기에서 건축주, 건축사, 시공자가 각자의 위치에서 하나의 목표를 향해 조화롭게 협력하는 동반자의 입장에 서야 한다. 동반자로서 교감할 수 있기 위해서는 설계도서라는 원칙에 의거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 목소리를 낼 수 있으므로 그 기준을 잡는 으뜸의 자리에 건축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4년이 아니라 5년 학제의 건축학과 교육, 전문가의 영역이라 건축사법으로 보호 받는 건축사 자격, 대통령 소속의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지방자치단체마다 앞다투어 위촉하는 총괄건축가 및 공공건축가제도를 보면 나라의 미래를 건축에 걸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건축을 위해 노력하는 일의 으뜸 자리는 건축사가 되어야 마땅하다. 건축이 이론이나 정책이 그치지 않고 결과물로 지어내는 최일선最一線에 서있는 사람이 건축사이기 때문이다.
제발 건축사라는 일이 부끄럽지 않도록 일반건축물의 설계비도 법으로 규정해서 책정 되도록 해주면 좋겠다. 건축사의 일을 간섭하기보다 도와주는 행정 지원이 되어 전문가가 권한과 책임을 함께 가지고 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왜 이런 도시를 물려주었느냐며 원망하지 않게 지금부터라도 오래토록 보전될 집을 지었으면 좋겠다.

 

김정관 도반 건축사사무소

김정관은 부산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했고 현재 도반건축사사무소 대표이며 부산건축제 조직위원회 이사와 건축사신문 논설위원을 맡고 있다. 건축사신문 4.5대 편집주간을 역임했고 지령100호기념 건축작품집 ‘건축유전1’, 부산건축사회 창립 50주년 기념사업위원장을 맡아 ‘건축유전2’를 기획발간했다. 단독주택 작업에 주력하면서 ‘집이 사람을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가’라는 주제로 글쓰기와 강연을 통해 세상에 알리고 있다. 단독주택 대표작으로는 觀海軒, 二入齋, 心閑齋가 있다.
kahn7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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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02 우리 건축의 엘리트주의와 엘리트를 생각한다

건축담론

 

Reflection on elitism and the elite of our country’s architecture

우리 시대 건축의 엘리트주의와 건축엘리트에 대한 생각은 ‘엘리트주의’라기 보다는 우리 건축계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생각과 이를 통해 여론을 주도할 수 있는 건축 엘리트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점과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현상에 의해 시작되었다.
첫째, 우리 시대 대부분의 건축사들은 생활건축 설계물량의 축소에 따른 당장의 현상에 메어 있어서 큰 방향의 건축 정책이나 지향점에 대한 공감이 부재하다는 것이다. 둘째, 대부분의 건축정책은 국민인식조사 및 전문가 연구를 실시하고 사회보장위원회 민간위원, 관계부처가 참여하는 추진기획단의 운영위원회를 거친 후 공청회를 통한 의견수렴 및 사회보장위원회의 심의를 거친 뒤 국무회의에서 확정되는데, 대부분 시장과 다른 정책을 만들어 내고 있다. 여기에 소위 건축계의 엘리트들은 서로 간의 의견과 관심이 상이해서 정치인이나 관료 등의 비 건축전문가들에게 건축정책의 주도권을 빼앗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통해 ‘엘리트주의’라는 우리 건축계의 문제점과 우리 건축이 나가야 할 방향의 제시, 건축정책의 여론을 주도할 수 있는 건축엘리트의 필요성 및 건축엘리트들의 역할과 방향, 책무 같은 것에 대해 고민해 보고자 한다.

 

엘리트주의(elitism)와 엘리트(elite)

사회학 사전을 통한 엘리트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소수에 의해 다수가 지배를 받는 것’이다. 세 가지 형태의 상이한 엘리트주의를 구분할 수 있는데, 하나의 규범적 이론과 두 개의 경험적 이론이 있다.
첫 번째 규범적 이론은 사회이론 만큼 오래된 것으로 사회적 사건을 통제하는 것은 특별한 개인의 집단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고, 엘리트는 그들의 특출한 자질에 의해 선발되며, 그들의 특수한 기능에 상응하거나 그러한 기능에 필수적인 특권이 부여된다. 엘리트들에게는 필수적인 자질(출생, 지능, 전문지식 등)과 그들의 직무수행이 보장하는 사회적 가치(질서, 진보, 경제적 우월성 등)의 정확한 특질에 관한 이론으로 엘리트주의는 이러한 의미에서 권력 정당화의 기본으로 이용된다. 두 번째 엘리트 이론은 경험적이고 다소 냉소적인 주장으로 19세기 후반 민주주의의 확산에 대한 반작용으로 발전하여 형태적으로 사회학적이다. “엘리트는 유익한 것이라기보다는 불가피한 것이다. 민주주의는 바람직하지 못하다기보다는 불가능한 것이다(저술가 모크카, 파레토의 주장). 세 번째 엘리트 이론은 가장 최근에 발생한 경험적 이론으로 엘리트의 존재를 민주주의의 규범과 결합시키고자 한다. 슘페터(Schumpeter)는 조직적으로 결정된 엘리트가 출현했지만 분열되어 있고 민주적 정당화와 자기방어의 필요에 의해 경쟁적 관계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다양한 엘리트 이론은 역사의 변화를 반영하고 어떤 단일한 이론이 광범한 지지를 얻기 어렵게 하고 있다. 첫 번째, 두 번째 이론은 엘리트와 나머지의 단순한 구분, 즉 ‘대중’에 대해 무시하는 관점이 있고 엘리트의 능력이 내재적인 것인지 혹은 사회적으로 획득된 것인지에 대한 혼동을 공유하고 있다. 세 번째 이론은 현존하는 자유-민주적 체제를 위한 특별한 변론이 되기도 한다.
엘리트주의(善良主義 : Elitism)는 사회를 기본적으로 엘리트(善良 : 뛰어난 인물을 뽑음)와 매스(大衆 : Mass)라는 도식에서 파악한 것으로 사회의 중심이 엘리트라고 보는 견해의 총칭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는 권력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일반 대중으로 나뉘며 소수 관료나 저명인사 등 사회지배 계급에 의하여 정책문제가 일방적으로 채택된다는 이론으로 정치적으로 무능한 일반 대중을 지배하는 엘리트 중심의 계층적·하향적 통치 질서를 중시한다.

 

막강 파워를 지닌 한국식 엘리트주의

한국에는 자칭 엘리트라고 생각하는 집단이 많다. 그들은 자신들이 선택된 엘리트집단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모두 자신들이 대단하고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미국에는 이런 말이 있다. 식당의 웨이터나 웨이트리스는 대부분 작가 지망생이라는 말. 그리고 미국에는 대단한 학자도 많지만 그저 공부를 좋아하는 학자들도 많다. 적절히 살 수 있을 정도의 환경만 주어진다면 노벨상 등의 대단한 성취가 없어도 좋아하는 글을 쓰면서 작가지망생을 유지하거나 좋아하는 학문을 하면서 학계에 그럭저럭 있을 수 있다. 그러다 보면 그중 어떤 사람들은 나중에 천재로 불릴 사람이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한국의 엘리트는 서양의 엘리트와 완벽하게 차별화된다. 한국의 엘리트는 소수의 대학 출신이라는 것이 중요하며, 중요한 직장 혹은 대학원 등의 경력이 필요하다. 사회의 적응에 있어서 부적응한 경력이 없어야 하며 사회 순응력을 최대한 발휘해야 한다. 이는 한국의 관료들이 고학력을 필수적으로 지녔고 한국 사회가 대기업 형태로 재편되고 소수의 관료적 엘리티즘이 한국사회를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라는 초고도 엘리트 사회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다.

 

한국 건축의 엘리트주의와 건축엘리트

영화 ‘건축학개론’은 이제훈이라는 배우가 건축학과 학생으로 출연하여 건축분야를 멋진 분야로 연출하였다. 그 영향으로 많은 학생들이 건축사로서의 꿈을 가지고 건축학과에 들어왔으나 많은 학생들은 잘 버텨내지 못하고 실망 끝에 취업률과 졸업률이 떨어지게 된다. 특히나 대한민국에서 건축사라는 직업이 값싼 설계비로 도면을 그려주고, 그 도면을 가지고 관청에 들어가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 숙여가며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 지점에서 전문가인 건축사나 건축계는 분노할 줄 알아야 한다. 과연 우리 건축사들은 그 존재감을 잘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며, 사회에서는 그만큼의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인가. 낙후된 건축사의 사회적 위상, 불합리한 사회현상, 도시건축 입안과 수행자인 공무원들의 비전문성, 편법과 불법을 요구하는 건축주들의 무례함 등의 우리 건축 분야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 필요하다.
2013년 6월 25일에 대학로 ‘예술가의 집’에서 당시 AURI 제해성 원장의 진행으로 [대중과 건축 – 건축의 소명과 사회적 위치]라는 주제발표가 있었으며, 우경국(예공 아트스페이스), 제갈엽(AMA 대표), 김미상(친환경건축연구센터 교수), 김영철(베를린 공대), 신혜경(단국대 교수) 등의 토론자들과 「한국건축의 정체와 지속가능성」 이라는 토론회가 있었다. 이 토론회를 통해 대중과 건축은 원칙적으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어야 한다고 하였으며, 단순히 정치적 의미나 계량적 측면에서의 다수를 의미하는 대중보다는 문화적 동질성의 공유자로서, 그리고 엘리트적이든 대중적이든 건축문화를 이끌어 갈 수 있는 추진체는 단순한 문화의 수혜자로 머무는 것이 아닌 건축과 건축문화의 생산과 소비 주체로 작동하게 하여 사회 중심적 기능을 담당하게 만들 것이라 하였다.
서울대학교 김광현 교수께서는 자신의 저서 『건축 이전의 건축, 공동성』에서 ‘엘리트 건축을 일갈’하셨다. 김광현 교수는 건축하는 사람들이 피해야 할 용어로 비움, 침묵, 미학을 꼽으시면서 ‘있어 보이는’ 말의 허울을 벗겼다. “비움은 일상의 삶과는 무관하고 단 한 번의 연출된 건축사진에만 남아 있는 거북한 비움이다.” 건축이 ‘침묵’하면 세상에서 고립된 뿐이며, 사소한 움직임에도 주목해야 하는 것이 건축이며, ‘미학’도 본질을 적절히 지우는 말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그는 흔히 통용되는 ‘건축은 종합예술’이라는 명제를 거부하면서 건축은 선과 면의 지적 조합이 아닌 우리 주변의 일상사를 가꾸는 실천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건축주가 초등학생이라고 생각하고 지어지는 건축물, 즉 한 세대 뒤까지 유용한 건축이어야 하며, 좋은 공공건축이란 공동체의 밖에 있는 ‘아직 말해지지 않은 것’을 찾아내야 한다고 하였다. 김인철 건축사는 이 책의 추천사에서 “이 책은 어느 순간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아 성숙되지 못한 우리 시대 건축에 대한 반성문이며 연구실을 벗어난 넓은 사유와 언설이 무게를 갖는다”고 평했다.

 

한국의 비뚤어진 건축 엘리트주의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수한 사람들이 모일 수밖에 없다.” 이는 한국의 비뚤어진 엘리트주의의 한 단면과 한국 교육의 실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진정한 엘리트라면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과 함께 어울릴 줄 알아야 하며, 보다 열악한 조건에서도 능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능력은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실패에서도 배울 수 있는 것이 있으며, 관용과 겸손의 미학을 엘리트들도 알아야 한다.
세계 최빈국에서 50여 년 만에 경제규모 세계 11위, OECD 9위의 국가로 도약한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는 눈부신 고도성장을 이룩해 왔고 그 원동력이 건설업이었다. 건설업은 1997년 I.M.F. 및 2008년 국제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국가경제의 버팀목이었고 앞으로도 대규모 신도시 개발 및 사회간접자본시설, 도시재생과 유지관리 프로젝트의 확충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러나 산업으로서의 건설과 문화로서의 건축 사이의 간격은 여전히 좁혀지지 않고 있으며, 이러한 간격은 건축을 건설의 종속 구도로 편재시키면서 건축사사무소의 대형화를 유도하였다. 건설과 건축의 종속 구도가 심해지면서 규모경쟁을 벌이는 대형 건축사사무소는 정책과 경기의 흐름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으며, 반면 소규모 건축사사무소는 더 영세해질 수밖에 없었다.
대형 건축사사무소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더욱 상업적으로 되어가고 있었으며, 반면 작품성을 추구했던 소형 건축사사무소는 더욱 일거리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상업적 건축과 예술적 건축의 양자구도 사이에서 건축 엘리트주의 추구와 건축엘리트의 거취가 불분명했다는 것이다.
1960년대 서양의 건축계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있었다. 근대건축의 거장들이 사라진 시기에 실험적 건축을 시도하였던 소수의 제3세대의 건축사들은 자신의 새로운 건축으로 거장들의 빈자리를 채우기 시작하였고, 새로운 공간과 형태를 구축하면서 건축계의 주목을 받아 과감한 혁신을 주도하였다. 현재 한국의 건축계도 이러한 성장의 기반을 구축해야 한다. 개인과 공공의 이익을 조화시키는 좋은 건축이 살아나야 중산층의 경제도 살아나고 젊은 건축사들이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이 생성될 것이다. 그래야 디자인과 기술이 융합된 혁신적 건축이 생겨나고 우리 건축 산업에 긍정적 효과를 줄 수 있을 것이다.
근대건축의 태동이 시작된 지 백여 년이 넘었고, 특히 올해는 현대식 건축교육의 모태인 바우하우스가 창립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모든 분야의 디자인의 시작이 지금부터 100년 전에 시도되었고, 이 모든 분야의 디자인을 건축으로 종합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건축은 모든 역사의 흔적이 공존하는 일상 속에서 우리 시대 인간의 흔적을 새기는 것이었다. 그 기념비적 행위로 인하여 인간존재의 아름다움을 확인하면서 신선한 호흡을 하게 하는 그것을 갈망하는 것이었다.
명지대학교 건축대학 김홍식 교수께서는 2005년 문화예술지에 건축분야의 문화현상 읽기에 「우리 사회 엘리트주의 건축을 경계한다」라는 논제를 투고하면서 엘리트주의 건축의 문제점과 대중주의를 고려해야 하는 건축사의 몫으로 건축사 스스로는 우리 사회가 지니고 있는 모순 해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 하였다. 김홍식 교수는 당시 ‘건축 잡지를 메우고 있는 엘리트 건축’에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는 우리의 문화 환경과 다른 과대 포장된 건물들과 서민의 고달픈 삶을 담아내는 성냥갑 모양의 아파트 외관 등을 역사가 없는 후진국 수준의 문화 환경이라 하였고, ‘우리나라에 대중주의는 없는가?’, ‘우리는 달동네 설계를 고민해 본 적이 있는가?’, ‘철학이 있는 유니크 한 건축 설계를 하려면?’ 등의 글을 통해 새로운 자본주의 시대에 자본가를 위한 미학으로서 엘리트주의도 필요하겠지만 이와 대등하게 노동자, 빈민 대중을 위한 미학으로서 대중주의도 요구된다고 하였다.
건축계는 유독 해외 유학파가 많은 엘리트 집단이다. 그러나 건축의 원리가 반드시 유학을 다녀와야 아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역사적 건축과 우수한 선진국 건축을 보고 배워야 했던 단계도 있었지만 이제 건축의 본질과 우리의 것을 보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건축사는 스스로 사회가 가지고 있는 모순의 해결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우리의 생명을 갉아먹고 있는 유행의 건축을 버리고 우리의 신화를 엮어나갈 살아있는 우리 시대의 버전을 찾아 나가야 할 때다. 자신의 소명을 다해 나가는 것이 진정한 엘리트의 모습이며, 한국의 건축계는 이러한 진정한 엘리트 의식이 절실할 때다.

 

황태주 서원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홍익대학교 건축학과에서 학사, 석사,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1998년부터 청주 소재 서원대학교 건축학과에서 후학양성에 전념해 왔다. 학창시절에는 건축설계에 많은 관심을 두어 학생공모전 참가 및 실무에 집중했으나 건축인의 사회적 위치에 대한 실상을 경험한 후 이들의 위상 제고를 위한 후학 양성의 길을 선택했다. 교직의 길에 있으면서 건축설계 및 현상설계에 참여했고 현상설계 심사를 통해 건축교육과 실무의 연계를 추구하고 있다. 불합리한 건축행정의 개선과 적절한 건축구현을 위해 건축 관련 학회 및 단체, 지역의 건축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다.
artjhwang@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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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 간 연결, 이슈가 사라진 시대… 다름과 작은 소리를 축적하며 변화하는 사회를 바라보아야” _ 김광현 교수

“Intergenerational connection, the era of disappeared issues
– It is time to look at the changing society while putting together differences and small voices”

대통령 소속 국가건축정책위원회, 건축정책기본계획, 건축도시공간연구소, 공공건축가. 지금 우리 건축계를 정의하는 중요한 개념들이다. 이 모두 2007년 제정된 건축기본법에 근거한 내용으로서 당시 건설기술·건축문화선진화위원회, 건설교통부, 문화관광부의 ‘건축문화 선진화전략’ 핵심과제였다. 그러나 ‘건축기본법’이 있어야 한다고 처음 주장한 사람은 김광현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명예교수였다. 그가 연구책임자로서 건축기본법의 바탕을 만들었으며, 오늘의 건축계를 정의하는 건축기본법의 틀과 개념 그리고 용어의 설정도 거의 그의 구상에서 나왔다. 대한건축사협회(한명수 명예회장)와 건설기술·건축문화선진화위원회(김진애 위원장)가 이 법 제정을 위해 큰 힘을 기울였다면, 그는 이론적 기틀을 확립한 인물이다. 그는 학계에 있었지만 설계대가 제값 받기에 유독 관심이 많았다. 이유는 학생들이 사회에 나가 전문가로서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최대의 근거는 제대로 된 설계대가에 있다는 그의 지론 때문이었다.
“학생들을 가르치는 최고의 목표는 그들이 사회에 나가 좋은 대접을 받게 하는 겁니다. 건축계에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게 뭐냐고 지금 또 묻는다면 단언컨대 나는 제대로 된 ‘설계대가’라고 말할 겁니다.”
김광현 명예교수는 과거 ‘공공발주사업에 대한 건축사의 업무범위와 대가기준’에서 ‘친환경건축물, 에너지효율등급’ 등 추가업무에 대한 대가를 제대로 받을 수 있게 하자고 주장하고 이를 연구한 책임자이기도 했다. 그는 지금 젊은 건축사 건축교육 저변확대를 위한 ‘공동건축학교’를 설립해 활발히 운영 중이다.
월간 「건축사」가 국내 건축계 발전을 위해 힘써오다가 작년 2월 정년퇴임한 김광현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명예교수를 3월 18일 그의 대학로 연구실에서 만났다. 그는 지난날을 회고하며 건축에 얽힌 이야기와 현재 하고 있는 일, 그리고 구상 중인 향후계획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전했다.

 

Q 그동안 많은 후학들을 양성하셨습니다. 건축계 리더들을 키워온 입장에서 소회를 말씀해주십시오.

A 많은 나의 제자들이 과연 어떤 리더가 됐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리더라고 해도 크고 작은 리더가 있고 또 그들을 리더로 알아주는 것은 결국 사회이기 때문이지요. 서울시립대에서 시작하여 서울대로 옮겨 건축을 가르친 시간이 41년 8개월하고도 24일이었습니다. 서울시립대에서는 12년 반 있었어요. 그때 만났던 초기의 제자들은 저와 나이가 크게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저를 아직까지도 참 극진히 대해 줍니다. 참 고마운 일이지요. 지금은 훌륭한 건축사, 교수가 되어 가끔 만날 때면 그저 약간 아래인 후배 같아요.
저는 제자 복이 많아서 참 많은 학생을 제 제자로 둘 수 있었습니다. 대학원생 수만 따지면 꼭 200명 됩니다. 이것이 제게 가장 큰 복입니다. 서울대학교로 옮긴 후에는 제자가 참 많았어요. 그래도 제일 기억에 남는 사람은 서울대로 부임했을 때 어쩌면 김광현 교수가 오실지도 모른다는 소문을 믿고 석사과정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던 중앙대 전영훈 교수, 제주대 김형준 교수, 세종대 김동현 교수 세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대학을 옮기자마자 제게는 석사과정생이 있었고, 돌아가신 이광노 교수님 연구실을 이어받았으므로 남아 있었던 이 교수님의 많은 박사과정생들이 제게 주어져서 부임 때부터 연구실에는 제자가 많았습니다.
이들은 고맙게도 저를 선생으로 받아준 이들이었다는 의미에서도 그 인연이란 정말 굉장한 인연이지요. 저는 이들을 제자라기보다는 저의 좋은 연구 동료자로 대하고자 노력했습니다. 그럼에도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았고, 특히 자리에서 물러나고 보니 그 허점을 더 잘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회로 나가 교수가 된 사람도 많고,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는 이들도 많으며 특히 최근에는 35세 전후의 제자들이 건축사사무소를 열어 열심히 잘 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건축설계에서 약간 거리를 둔 곳에서 일하는 제자도 많습니다만, 저는 이들이 더 넓은 건축의 영역 속으로 나가 있는 이들이라고 생각하지, 다른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건축설계 일만 건축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들이 저의 전공, 저의 주요 관심 분야에 근거하여 이를 얼마나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42년간의 교육 사업 치고는 많이 밑진 장사가 되겠지요? 그렇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선생으로서야 “아, 선생님 말씀이 맞습니다”라는 제자가 많으면 좋겠지만, 이런 제자 열 명 중에 한 명 있으면 됩니다.

김광현 서울대학교 건축학과 명예교수 작년 2월에 정년퇴임한 김광현 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오늘의 건축계의 문제로 세대와 세대가 이어지지 못하고 사회에 부응하는 이슈를 적극적으로 펴지 못하는 것을 우려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의견을 자세하게 말했다. / 1979년∼1993년 서울시립대 건축공학과 교수, 1993년∼2018년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2006년∼2009년 한국건축학교육협의회 회장, 2006년∼2009년 대한건축학회 부회장, 2008년∼2011년 건축단체통합혁신위원회 위원장, 2008년∼2010년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위원, 2009년∼2017년 친환경건축설계아카데미 원장, 2011년∼2015년 서울특별시 도시건축공동위원회 위원, 2012년∼현재 한국건축가협회 건축교육원 원장, 2016년∼현재 공동건축학교 교장

사실 저는 30∼40대에는 나의 전공에 관한 주제를 주로 다루었습니다. 건축형태, 건축의 자율성과 같은 문제에 큰 관심이 많아 다소 아카데믹한 분위기를 중요하게 여겼어요. 그래서 그때의 저를 기억하시는 분은 좀 딱딱하고 어려운 이야기를 늘어놓는 교수로 생각하고 계실 거예요. 그렇지만 80∼90년대에는 학생이건 실무 하는 건축사들 모두 참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러나 저도 그 사이에 당시의 교수 치고는 학교에 있으면서 설계를 많이 했고, 많은 건축사들이 싫어하는 서울시 등의 심의, 심사, 각종 위원회에서 참 많은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나이가 50이 넘어가면서 시야가 달라졌어요. 제도, 공간, 시설, 공동성, 주변이라는 주제로 관심이 확장됐어요. 그러면서 학회에 논문 100편 쓰더라도 그것이 건축설계를 위한 법규 두 세 자 못 고친다면 의미가 없다, 그러니까 공부는 사회의 제도를 바꾸는 것에 힘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 강해졌어요.
어느 사이엔가 건축사란 누구인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를 학생들에게 자주 말하는 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가게 될 건축사 편에서 나의 학문을 생각해야겠다는 생각이 깊어졌습니다. 서울대 건축의장연구실 문에는 이런 글을 늘 붙여 두고 있었습니다. 박지원 선생의 글인데 연구실의 좌우명과 같은 것이었지요. “선비가 독서를 하면 그 은택이 천하에 미치고 그 공덕이 만세에까지 전해진다.” 학문적인 연구는 그 은택이 사회에 미쳐야 한다는 뜻이에요. 사회에 은택을 주지 못하는 건축학 연구는 의미가 없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현대건축의 주요 개념, 주장, 이슈를 이런 실천적인 관점과 관련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학생들과 공부를 했습니다. 서울대에 들어와 25년 있는 동안 매주 금요일에 밤 10시, 11시까지 하던 연구실 ‘금요세미나’를 은퇴할 때까지 1,005회를 했습니다. 거의 매주 한 것이지요. 저는 이 기록은 전무후무할 것이라고 믿어요.

 

Q 최근 건축사지 600호를 맞아 창간호부터 PDF 파일을 훑어보다가 창간호부터 설계보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봤습니다. 1966년도부터 설계보수 이야기가 주기적으로 나오고, 설계·감리비 제대로 받아야 한다는 말을 합니다. 심지어 72년도는 “대가 제대로 받고, 건축사의 사회적 위상을 제대로 인정받자”고 감리 선언까지 해요.

A 설계·감리비 제대로 받아야 한다는 것은 한때의 이슈가 아니라 변하지 않는 진리인가 보죠.(웃음) 그건 제가 이야기할 게 아니라 건축사협회의 원로 건축사들께서 말씀하시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만, 그럼에도 대학 교수였던 저도 참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이었습니다.
건축은 빛과 그림자라는 관점도 중요하지만, 건축사가 어떤 사람이고, 우리가 어떤 일과 노력을 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는 데에 관심이 많아지게 해야 해요. 학교에서부터 이런 이슈를 절실하게 가르쳐야 하는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아요.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수들에게 묻고 싶어요. 누구를 위해서이고 뭘 위해서지요? 논문 실적이라는 것도 결국 누구를 위한 실적이고 무엇을 위한 실적이어야 하나요? 논문 자체가 목표이고 연구 주제가 목표일까요? 만일 그것이 가장 큰 목적이라면 교수는 왜 학교에서 ‘건축’을 가르치지요?
“설계하는 사람을 architect라 부른다. ‘arch-’는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건축은 미학이요 종합예술이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 백날 하면 뭐하나요. 건축하는 인간에게 제일 소중한 건 제대로 된 설계 대가를 받아 자기 일을 잘 하고, 건축을 통해 주변에 이로운 일을 하며 사회에 조금이라고 공헌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 이상으로 무엇이 있겠어요. 그러니까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최고의 목표는 그들이 사회에 나가 좋은 대접을 받게 하는 겁니다. 건축학 교육 인증도 다 이런 것에 목표를 두어야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대학에서 연구라는 것이 건축사와 기술사로 하여금 좋은 작업을 하고 또 제대로 대접을 받게 하는 것에 의미를 두어야 하지요. 연구 자체가 목적은 아녜요.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게 설계대가입니다. 건축학이 진리를 찾는 학문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건축실무쪽은 어떤가요? 현실이 이를 따라주지도 못하면서 일각에서는 비워라, 침묵해라, 그러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하고 있는데, 이것이 일반 대중에게 듣기에는 멋지게 보이겠지요. 그러나 이런 주장은 건축의 현실과 동떨어진 허망한 사고에 머물 가능성이 큽니다.

2009년 즈음 건축사자격시험 출제위원장을 두 번 정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채점을 다 완료한 후 회식 자리에서 국토부 건축기획과장에게 뭔가 설계 대가를 고쳐야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중국집에서 짬뽕 얼마에 잡수세요?”했더니 “왜 그러세요, 교수님. 6000원인가요?”래요. 그래서 “‘삼선’짬뽕은 얼마예요?”그랬더니 “7000원 하나요?” 그러면서 또 물었지요. “그러면 ‘삼선특’짬뽕은 얼마예요?” “그런 게 있어요? 한 만원 줘야겠죠? 그런데 교수님 왜 그런 말을 자꾸 하세요? 중국집 하세요?”라기에 이렇게 말했지요, “하다못해 짬뽕도 해산물이 더 들어가면 값을 더해 주는데, 친환경 설계, IBS 빌딩 설계비는 왜 따로 안주고 시키나요?”했더니 갑자기 머쓱해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말했지요. 설계비는 그대로이면서 같은 값에 친환경 설계해라, BIM 설계 하라 하면 결국 국가가 설계비 깎는 게 되지 않는가라고, 일을 더 시키려면 그것에 합당한 비용을 더 지불하게 해야 하지 않는가 하고요.
3일 후에 건축기획과장께서 전화를 주셨어요. “말씀 들어보니 선생님 말씀이 맞더라고요”라면서 “설계대가 연구를 해야겠어요”라는 거예요. 그래서 친환경설계, BIM, IBS 빌딩, 에너지 효율등급, 현행 건축설계대가를 포함한 ‘건축설계대가 산정기준 연구’를 하고 국토부 장관 고시가 나오게 되었지요. 그런데 어느 날 같이 연구하던 박인석 명지대 교수가 회의실에 들어오자마자 발표 요약지를 내밀면서 우리 건축사협회는 해방 이후로 한 번도 설계대가에 대해 뭘 어떻게 해달라고 주장해본 적이 없다고 한탄하더군요. 정부에서 정한 대가를 그대로 받고만 있었다는 거죠. 그때 이런 연구를 하면서, 왜 건축사들은 스스로 대가를 어떻게 해달라고 안 하는지 참 많은 의문을 가졌습니다.
과거 대한건축학회장 출마 때 학회장이 돼서 2년 동안 설계대가 개선을 정부를 상대로 설득한다면 뭔가 바뀔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했는데 결국 성공을 못했습니다. 바로 그 시점이 설계 대가를 변동시킬 수 있는 무언가 흐름이 존재하고 있는 적기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출마한 단 하나의 목적은 그것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는 출마 안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 저를 반대하는 학회에 소속한 분들이 “아니, 저 사람은 왜 건축사협회에서 해야 할 일들을 학회에서 한다는 거야? 저 사람 건축사 앞잡이 아니야?” 이러기까지 했죠.(웃음) 그런데 어디 그렇습니까? 학생들을 왜 키우나요. 그들은 5∼10년 지나 건축사, 기술사가 될 사람들인데. 그렇다면 학교에서 이들을 위해서라도 뭔가를 해줘야 하지 않습니까? 대학은 해외로 유학 가는 박사들만 키우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건축계에서 해야 할 중요한 게 뭐냐고 지금 또 묻는다면 단언컨대 나는 ‘설계대가’라고 말할 겁니다.
이걸 해결 못 하면 건축을 배우려는 학생들도 줄고, 교수들도 약해질 수밖에 없어요. 건축사 단체가 강하고 그 산업이 잘 돼야 관련 교수들도 힘을 받고 다른 쪽으로 영역이 넓어져 다양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건축설계 대가는 건축사가 사용하는 거지만,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고 스스로 문제를 이야기할 수 없다면 외곽에 있는 사람들이 이런 것이 바뀌도록 제도개선을 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왜 그게 안 될까요? 그래서 지금도 묻고 싶습니다. 건축학회는 ‘설계대가’를 위해 과연 무슨 역할을 해왔느냐고.

 

Q 건축사가 어려우니 월급도 낮고, 비전도 보이지 않고, 일에 시달린다고 학생들이 잘 건축학과에 오지 않죠. 그런데 제가 일을 해보니까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그렇지만 자본주의 시장에서는 소득이 어느 정도는 나와야 하고, 그러려면 설계대가가 올라야 합니다. 협회 신문에서도 기사를 준비 중입니다.

A 그 사이에 설계비가 안 올랐으니 그렇다면 10년∼15년 전에는 참 싼 설계비를 받은 셈이 되는군요. 자, 설계 대가는 건축사만의 것이 아닙니다. 구조나 설비 기술사의 대가도 그것에 다 포함되죠. 최근 한국경제신문 칼럼에 “건축설계는 거대한 수제품이다”는 글을 실었습니다. 그러나 본래 제목은 “내 제자들의 건축설계를 싼 값으로 사지 마라”였죠. 정말 본래 제목처럼 심각합니다.

 

Q 저는 클라이언트와 설계대가에 대해 이야기할 때“싱크대 얼마짜리 쓰세요? 수입제면 4미터 기준으로 한 3,000∼4,000만원이고, 비싼 건 7,000∼8,000만원까지 하는데, 난 이 집 전체를 해주지 않나요”라고 하면 클라이언트들이 더 이상 깍지 않더군요.(웃음)

A 맞아요. 설계비는 그럴 정도의 것이에요. 지난번 어떤 신문 칼럼에도 썼듯이 큰 설계사무소든 중형사무소든 웹사이트를 들어가면 내용이 전부 똑같습니다. 메뉴를 보면 ▲피플 ▲프로젝트 ▲어바웃 ▲컨택트 등. 그리고 처음 화면 아주 멋있고 신선한 말들이 있어요. 그런데 설계비는 어떻게 받아야 한다는 말은 한 마디도 없어요. 우리는 설계비 얼마에 이런 이런 일을 한다는 일종의 약속을 전혀 알리지 않고 있는 거죠. 그러면서 설계대가를 제대로 받겠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리딩 아키텍트들이 꼭 이런 것까지 해야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얼마를 설계대가로 받겠다는 선언 정도는 해야 리더라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게 안 되면 양을 줄여서 하겠다든지, 다른 걸 잘할 수 있다든지 이런 것들을 표현해주면서 주장을 펴야 대가가 결정되는데 전부 다 똑같은 마음에 자기가 받아야 할 대가에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니 값이 형성이 안 되고, 66년부터 시작했던 말들을 아직까지 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물론 제 말도 어디까지나 제3자에서 하는 말이고 보면 경영하는 입장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요.

 

Q 제가 과거 건축사지를 보면서 60∼70년대 저도 모르던 선배들의 작품들을 보게 됐어요. 그러나 공일곤, 홍철수 선생님을 주변에서 거의 모르더군요. 작품을 보니 너무 좋았습니다. 조사를 해봤는데 현재까지 남아있는 작품이 없더군요. 저는 이렇게 우리 건축 작품의 맥이 끊어지는 게 너무 안타깝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가 학문적으로 한국적인 현대건축을 이야기하지만 사실 이론적으로 정립이 안 됐을 뿐더러 지금 건축아카이브가 없지 않나요. 지금이라도 이걸 하지 않으면 20∼30년 뒤 2000년도에 우리가 무얼 했는지 알 수가 없지 않습니까.

A 우리는 왜 아직도 김중업, 김수근 선생 이야기만 하는지. 사실 이 두 분은 대등한 인물이 아니에요. 김중업 선생이 한참 위인 분이죠. 그런데 어느 날 ‘김중업, 김수근’ 하더니 어느 사이에 ‘김수근, 김중업’이라 하고, 이제는 김중업 선생 이름은 아예 빼 버리고 ‘김수근, 김수근’만 말하는 경우도 참 많습니다. 왜 그러냐고요? 그건 김수근 선생의 제자가 더 많기 때문이지요.
그럴 정도로 한국건축계 담론은 1960년대 김중업과 김수근 시대에 멈춰 있어요. 그러나 우리 건축을 만드신 분들은 이 두 분만 계신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대학교 2학년 때 건축사지를 통해 나상진 선생님의 작품을 보았는데 참 멋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분 성함을 거의 다 모릅니다. 지금 대학생들은 엄덕문 선생님 성함도 잘 모릅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누구나 알지만, 한국 건축사는 몰라도 국민 모두가 알아주는 사람이 있어요, 안도 다다오요. 입시 면접 때 제일 많이 듣는 사람은 안도 다다오예요. 너도나도 안도 다다오에 감명을 받아 건축학과에 지망했데요. 며칠 전 수원의 옛 서울대 농대 자리에 강의동 건물이 있는데 이걸 설계한 분이 누구냐는 거예요. 김희춘 교수님이라고 말해 주었는데 이제는 누가 설계했는지 아무도 모르더군요. 이분 또한 남겨진 작품이 다 사라져 내 블로그에 한 자 남아서 제게 전화 걸었답니다. 이 분이 이럴 분입니까?
건축계 큰 별, 작은 별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정도로 잔뜩 있지만, 이런 분들은 다 잊어버리면서 내 작품, 내 작품 하면 뭐합니까? 자기 선배, 조상도 모르는데 계통이 서겠어요? 그러면서도 ‘작가’, ‘작품’은 무지하게 좋아해요. 게다가 자기 작품을 ‘무슨 미학’이라고 말하기도 좋아하지요? 부산의 제자 교수가 알려주더군요. 부산 지역에서는 대학에서 한국건축사를 가르치는 곳이 한 곳도 없데요. 효율적 운영을 한다고 한국건축사 같은 것은 제외해 버렸다네요, 참.

 

Q 아카이브에 대한 논의가 건축계 전반에 문제제기가 되어 논의돼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A 더 큰 문제는 건축계 이슈가 사라지고 있다는 거예요. 말할 거리가 없어지는 시대에 옛날 것을 알아서 뭐하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나 봐요. 사정이 이런데 최근 저는 일본의 마키 후미히코 선생은 나이가 87세에 ‘표류하는 모더니즘’이라는 책을 낸 것에 놀랐습니다. 그러더니 이 분의 생각에 이토 도요 등 많은 분이 자기 의견을 적어 ‘응답 표류하는 모더니즘’이라는 책을 냈습니다. 그러나 다들 자기 논지를 쭉 써서 풀어놨지 “선생님 참 훌륭하십니다”라고 적은 게 아녜요. 그런데 이 ‘응답 표류하는 모더니즘’ 책 뒤에 마키 선생이 또 다시 ‘응답에 대한 응답’을 또 썼습니다. 다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래도 자기 입장이 옳다는 것이지요. 그때 나이 90세입니다. 우리는 어떤 건물이 누가 설계했는지조차 잘 모르고 있는데, 그들은 건축계의 어른이 말하고, 듣고, 이의를 제기하고 또 말하고 있어요. 이런 이슈가 ‘표류하는 모더니즘’이라는 책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 이 시대의 이야기 거리는 무엇입니까? 서울시 비엔날레 등 인위적인 주제를 걸고 그렇게 일회성 전시회는 많이 하면서 왜 모여서 제대로 된 말은 하지 않습니까? 무엇이 우리 시대의 건축 언어입니까?

 

Q 정체성이 뭔지 이야기할 때 맥이 연결이 안 되니 계속 수입만 하지 않습니까. 요즘 잡지를 보며 드는 불만 중 하나가 책에 한글을 지우면 그냥 해외잡지와 똑같다는 겁니다. 일본은 그 사람만의 색깔이 보이지 않나요. 색깔 있는 건축작가들이 나오려면 주목을 해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A 정년퇴임 기념으로 작년에 동경으로 부부가 여행을 가서 건물 사진 같은 것 찍지 말고 그냥 놀기만 하다 오자고 했는데, 계획과는 달리 ‘일본의 건축전’이 아닌 ‘건축의 일본전’이라는 전시회를 우연히 봤습니다. 거장들부터 젊은 작가들까지 다양한 작품들을 전시하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저는 오랜 생각 속에서 얻어낸 말들을 인용한 문구들이 작품과 함께 벽에 크게 적혀 있던 것에 눈길이 자주 갔습니다. 이걸 보면서 그렇다면 우리는 오랫동안 연구하고 논의하던 생각을 과연 어떤 문구를 인용하며 표현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 이슈가 무엇인지 알아야 젊은 작가가 잘하는지, 못 하는지를 알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결국 더욱 큰 문제는 세대 간 연결, 그 맥이 사라지고 있다는 직감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나이 드신 분들이 왜 일찍 사라질까요. 정년퇴임을 하면 왜 다들 아무 말씀이 없게 될까요. 책으로 치면 과월호는 별 의미 없고, 신간만 좋다는 뜻인가요. 옛날 선생님들께서는 건축을 하려면 젊은이처럼 뭔가를 금방 배워 잘할 수 있는 게 아니니 나이가 들어야 되는 거라고, 이야기를 많이 들으려면 장수해야 된다고 하셨죠. 나이 듦으로 얻게 되는 다양한 경험들로 같은 말이라도 그 속에는 많은 것들이 녹아 있습니다. 상대도 그 말을 들을 때 평소 공부하고 학습해야만 그 말뜻이 제대로 들리는 법이죠.

 

Q 다양한 스펙트럼을 한 울타리 안에서 이야기할 수 있게 하는 힘이 사실은 필요합니다. 빨간색은 빨간색끼리, 파란색은 파란색끼리 모이는 건 건축을 위해서 바람직스럽지 않다고 생각해요.

A 정말 그렇습니다. 맞아요. 그게 지금의 풍토예요. SNS을 통해 자기주장은 많이 해요. 거의 매일 올리는 사람은 거의 신문 기자 수준이에요. 그러나 그곳에 적은 것, 읽은 것은 모두 다 지나가 버려요. 그런가 하면 건축하는 사람이 자기주장을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려면 자기와 의견을 같이 하지 않는 사람들과 소통해야 하는데, 반대로 의견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만 일단 소통하고 있는 듯해요. 흩어진 것을 모으려 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자기 의견과 같이 하는 이들만 모여 줄을 서서 논의하고 일을 서로주고 받는 일이 있기 때문에 ‘그들만의 리그’라는 말도 나오는 거 아닙니까? 이들이 건축계를 편 가르고 금을 긋고 있다면 이들이 어떻게 건축계의 리더라 할 수 있습니까? 건축이야말로 정말 협업 없이는 안 되는 단체전 아닌가요? 이 협업이 잘못되어 건축 하는 다른 사람들이 괴로워하고 잘못된 법과 제도로 각종 불법·불공정함에 불편을 당하기도 하지만요.
공공건축가도 일을 하기 위해 줄을 선다든지 또는 줄을 세우는 식으로 오인되거나 해서는 안 될 겁니다. 공공건축가란 공공의 일을 맡아서 하는 건축가가 아닙니다. 공공건축가는 시민에게 국민에게 양질의 건축 행정 서비스가 있게 노력하는 별도의 전문가적인 사명감을 가진 이들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최근 제가 잘못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공공건축가들이 속해 있는 자치단체에 만들어진 공간과 구조물에 대해 이렇다 할 비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잘했다는 사람이 10명이 있다면 이를 비판하는 이들도 한두 명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문제 해결에만 관심이 있지 그 결과를 직능인으로서 해석하고 가치 판단하는 태도가 점점 더 사라지는 느낌입니다. 혹시 입을 다무는 게 안전하다고, 우리 모두 알게 모르게 훈련돼 가고 있는 건 아닌가라는 이상한 생각마저 듭니다.

 

Q 사실 맥이 끊어지고 있는 것은 서로를 보기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상처받으면 저쪽 세계를 안 보는 식이죠. 서로에게 상처가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일단 사무소 운영이 어렵다보니 젊은 친구들과 이야기해보면 눈앞에 있는 것 외에는 이야기하기를 싫어합니다. 미래나 거시적인 것을 이야기하면 모이지도 않을뿐더러 말하기도 싫어하고요.

A 지금 건축계의 특징은 어떤 주제를 두고 대담, 좌담, 토론을 누적해 가지 않고, 대안들은 딱히 없는 현실에 누구나 분노만을 표출하고 있다는 것이예요. 지금 우리 건축설계계는 아예 대담, 좌담, 토론을 잊어버린 것 같아요. 여러 사람이 말할 때 누구 곱하기 누구 하지 않습니까? A라는 사람 곱하기, B라는 사람 곱하기. 곱하기를 하지 않는 풍토가 지금 우리 건축의 가장 큰 약점인 것 같습니다.
1971년 건축학과 커트라인은 어쩌다가 서울대에서 가장 높았어요. 죄송하지만 의대는 저 밑이었어요. 또 제가 서울대로 옮겼을 때인 93∼96년에는 공대가 입학 커트라인이 가장 높았고 뛰어난 학생들이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들이 지금 나이가 마흔이 넘는데, 과연 이들에게 지금 무엇을 해줄 수 있나 생각하게 됩니다. 그 이후에도 훌륭한 친구들이 많았지만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터전을 갖게 해주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이 내가 가진 유일한 무기라서 저는 몇 년 전 ‘공동건축학교’를 만들었습니다. 이로써 대학 출신, 분야의 경계 없는 풍토를 만들어가고 싶습니다. 여러 사업을 구상하고 있는데, 요즘 또 다른 사업 하나 늘었습니다. 대담, 좌담, 토론을 누적시키는 플랫폼을 만들어야겠다는 겁니다. 그것도 30대, 40대의 총명한 생각이 난무하는. 꼭 만들고 싶습니다. 주변에서 많이 도와주세요.

 

Q 최근 프리츠커상을 이소자키 아라타가 받았습니다. 일본, 중국에 이어 최근에는 동남아 건축사들도 거론됩니다. 우리 건축사들은 거론이 안 되는 부분이 있는데. 앞서 이야기하셨던 것처럼 정체성면에서 인정을 못 받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A 일본은 오래전부터 프리츠커상 후원에 관여를 많이 해왔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이소자키 아라타지요. 일본 건축사들이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뒤에서 조력하고 사실 그가 제일 늦게 받은 거예요. 그런데 그전에는 아무 말도 안하다가 프리츠커상 수상 이야기만 나오면 왜 우린 이 상을 받지 못하냐고 더 이상 안 했으면 좋겠습니다. 프리츠커상을 받을 만한 사람이 나오면 좋겠지만, 그것의 바탕이 되는 것으로 많이, 빨리, 깊게 축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나라가 프리츠커상을 받은 사람이 10명쯤 되면 우리 건축 전반이 강해지거나 행복해집니까? 그런데도 수상자가 나오도록 누굴 밀어주자는 이야기가 나돕니다. 이게 무슨 말이지요? 그보다는 늘 우리가 해야 되는 일, 중요한 일을 인식하고 그 답을 발견할 수 있어야겠어요. 참 답이 없는 어려운 주문이지요?

 

Q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안정돼야 생각할 여유도 생기는 건데, 예전은 일하는 재미로 살았는데 지금은 다른 것들도 충족돼야 하잖아요. 기본적인 설계비를 올려서라도 그 방법을 고민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A 원인 중 많은 부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상대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건축계가 뭘 해야 하는지 능동적으로 나서 해야 하는 게 우선입니다. 그래야 달라고 요구해야 들어줄 사람이 생기죠. 민간 설계대가가 공정거래위원회 담합에 걸린다면 왜 걸리는지 연구도 하고 이에 대한 여러 방안을 찾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요.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인데, 경제가 좋을 때 설계대가 인상을 이야기했어야 했어요. 그러나 지금은 시기적으로 경제도 활기를 잃어가고 있어서 건축사들이 피곤한 상태잖아요. 그러니 건축계가 무언가를 하려 해도 서로 들어주기 어려운 형편이 되어 가고 있는 듯해요. 설계대가를 제대로 받자는 이야기가 66년도부터 나온 누구나 알고,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는 건데, 답이 없었다는 것은 아무도 이야기를 하지 않거나 매우 어려운 문제였거나 둘 중의 하나였겠네요. 이에 대한 대학 교수들은 예외가 될 수 없어요. 건축은 단체전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런 문제도 건축계가 모두 나서서 단체로 해야 해요. 그렇기 때문에 중심을 잡아줘야 할 대한건축사협회는 그런 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이 주어진 것을 늘 통감해야 합니다.

 

Q 매우 안타까운 상황인 것 같아요.

A 이제 곧 건축계 원로급으로 진입하려는 분들이 건축계 협업에 대해 얼마나 고민을 해주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학제가 5년제로 되고나서 건축설계에 실무를 직접 하는 분들이 참여해 대학의 교수가 되어 학생을 가르치는 것은 참 좋은 현상이지만, 반대로 이들은 자기 작업에는 열심이어도 설계대가 제값받기라는 단체적 문제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듯합니다. 그러다보니 설계대가의 문제를 늘 말하는 교수들의 수가 현격히 줄어 버렸습니다. 설계를 하지 않거나 생존에서 조금이라고 자유로운 분들이 측면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나 같은 경우는 돈키호테 기질이 있어 간혹 주장하고 있지만, 대학 교수는 이 사회가 뭔가 잘못 되어 가면 질타도 하고 옆에서 도와주고 해야 하는데, 옆에서 지켜본 바로는 점점 작품, 논문, 승진, 프로젝트, 심의, 심사에 훨씬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습니다. 학계에서 논의가 줄어들다보니 이런 문제를 꺼내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한 사람이 되는 분위기가 대세가 된 것 같아요.

 

Q 건축이 폭이 넓고 다양한 니즈를 수용해야 하는데, 울타리를 쳐서 정의내리면 실행하려다 못 담아내는 것도 있지 않을까요?

A 저는 71학번이에요. 이때 공부한 사람은 고등학교 때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면서 자랐던 세대예요. 속으로는 불만이 있어서 학생 때 반정부 데모도 했지만, 그 바탕에는 어쩔 수 없이 학교에서 배운 국민교육헌장이 무의식중에 남아 있는 세대라고 부정할 수 없어요. 이게 교육의 무서움입니다. 내가 싫다고 해서 없어지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이런 71학번이 그 당시 배운 게 흔들림이 없는 근대건축이었습니다. 동시에 자본을 가진 사람이 허세부리고 허영을 충족시키는 차이의 건축을 목격한 이들이지요. 그런데 이런 이들이 그 눈으로 지금의 건축을 바라보는 것 같아요. 70년대 시각으로 80∼90년대 현상을 비판하여 크게 칭찬을 받았는데, 그 후 스스로를 연마하지 않고 자기가 정체된지도 모르고 이런 주장을 계속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 눈으로는 2010년, 2020년의 건축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어요. 오히려 30년 후, 50년 후에 기다리고 있는 건축을 하자고 해야 맞는 겁니다. 우리 현대건축의 이슈는 무시했던 것들, 별 볼일 없던 것들에 가치를 발견하는 데 있습니다.
특히 저는 건축이론 공부하면서 30대 때는 뭐가 있어서 하는 줄 알았는데, 나이 들고는 내 강의명도 바뀌고 주장도 크게 바뀌었습니다. “건축의 이론이라는 건 없다. 다 사후에 정해지는 거다. 건축은 앞서가지 않는다”입니다. 그런데 최근 인문학이 유명세를 타다 보니 ‘건축인문학’이라는 용어를 만들어 대단한 지식인처럼 여겨주기를 바라는 경우를 보는데, 이것은 결국 건축의 본질, 공학, 물질, 기술, 부동산 등과의 관계를 멀리 하게 만드는 원인 제공자가 되고 있음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건축에 인문학적 성질이 있는 것은 사실이에요. 그만큼 건축은 영역이 큰 실천 학문입니다. 그러나 건축이 인문학이라고 그쪽에다 몸을 댈 수는 없잖아요? 건축으로 파생된 중요한 실천이라면 박수를 치겠지만, 건축을 이렇게 부드럽게만 만드는 것은 큰 문제입니다.
또 근대건축의 사고는 ‘분류’가 늘 기본이에요. 그러나 현재 아마존 매장이 분류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봤나요? 분류, 구별, 분절 등이 해소가 되어야 하는 것이 현대건축의 근간입니다. 그런데도 “A급 건축, B급 건축, 너는 무슨 파”라는 분류·구별하기도 하고, 좋은 건축 나쁜 건축 하면서 아이와 같은 말을 하고 있으니 참 문제입니다. ‘비움의 건축’은 배제하는 것이고 구분하는 것이고 엘리트적 건축을 달리 말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비우다니요? 반대로 많은 가능성을 찾으려면 가득 차야죠. 쓸데없이 여겨질지라도 그것까지도 가득 차서 건축사가 다루는 환경의 범위를 넓혀야 할 때입니다. 예전부터 건축은 정신의 산물이고, 건물을 물질의 결과라는 사고를 깊게 믿는 이들이 많은데, 저는 이것이 빨리 사라져야 우리 건축이 건실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동산은 물적인 것이라고 하대하는 태도도 있는데, 부동산이 뭐가 나쁜가요? 젊은 사람들은 그런 거 구분하지 않아요. 부동산 쪽으로 뭔가의 가능성을 캐서 얼마든지 좋은 건물을 만들 수 있다면 그쪽 잘 들여다보아야지요. 설사 자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다른 사람은 할 수 있게 긍정은 해 주어야지요. 이렇게 다양한 다름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넓어지고 깊어지고 가능성이 커지는 거죠. 우리 지금 현대건축의 이슈로 무엇을 논하고 있나요? 현대건축은 2019년에 지어졌다고 현대건축이 아니에요. 그것은 현대에 일어나는 이슈를 건축으로 어떻게 대응하고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 때 주어지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어떤 이슈가 있나요. 또 한국성, 지역성, 지역 재생 외에도 또 뭐가 있나요? 가야할 바가 정확하지 않다면 잠자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Q 그래야 현재라는 게 보일 것 같아요. 교수님 말씀에 공감이 많이 됩니다.

A 예를 들어 WWW와 HTML에 그랜드스토리가 있나요. 수많은 데이터만 있지요. 그런데 이것이 주는 중요한 메시지가 있어요. 그 많은 데이터베이스는 적당한 OS나 브라우저를 만날 때 비로소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요는 사물을 ‘어떻게 해석해 내느냐’가 관건이라는 것이지요. 같은 데이터베이스도 어떤 환경에서 바라보는가에 따라 한없이 달라집니다. 이것은 무얼 말합니까? 사전의 선입관, 경직된 사고, 구분, 배제의 시선으로 보지 말고, 다름과 작은 소리를 축적하며 변화하는 사회를 보고 배워야 합니다.
그러려면 젊은 건축사들의 말들을 많이 듣도록 해야 될 겁니다. 대한건축사협회도 젊은 건축사들이 언제든지 찾아와 토론할 수 있게 자리도 만들고 모여서 의견을 축적하여 다른 이에게 전하게 해 주려고 하세요. 자꾸 열고 담아야 젊어집니다. 건축이 본래 그런 것 아닙니까? 대형(大型)사무소는 규모가 큰 사무소이지만 이제는 ‘대형(大兄)’ 사무소가 되어야 할 겁니다. 큰 형님처럼 건축계를 넓게 걱정해 주는 역할을 해 주었으면 합니다. 젊은 건축사 자주 불러서 좋은 생각을 축적해 주는 역할을 하세요. 술 값 얼마 안 합니다.(웃음) 젊은 건축사와 그 후보자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보려고 애를 써야 해요.

 

Q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A 젊은 후배, 제자, 동료들에게 두 가지 측면에서 이야기하고 싶어요. 하나는 나이로 보아 30∼40대들은 꿈같은 시기이고 자기만 보게 되어 있어요. 여기에 장단점이 있을 거예요. 그렇다고 30∼40대는 개인적이지 않아요. 단지 작은 규모로 일을 해야 되니 그렇게 보일 따름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나이든 분들보다 협의도 잘하고 대화도 잘하십니다. 그들도 알려지지 않은 범위에서 동년배끼리 대화가 많고 새로워지려고 머리가 복잡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 건축계는 이 젊은 건축사와 그 후보들에게 배우고 그들의 사고, 일하는 방식 등을 잘 배워야 한다고 보아요. 30대가 대화도 잘하지만, 어떤 일에 잘 참고 스스로 해석을 잘해요. 이런 특성을 가진 사람들의 진지한 목소리, 자신을 꾸려가는 지혜를 건축계에 모이게 했으면 좋겠어요.
반대로 젊은 분들은 나이 드신 분들의 이야기를 늘 경청하려고 하세요. 10시는 12시보다 나은 것이 아니고 오후 1시가 오후 5시보다 나으며 오후 4시가 저녁 8시보다 나은 것이 아니에요. 모든 시간이 동등하게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니 젊다고 나이 든 건축계 어른을 낮추어 본다든지 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모든 나이가 똑같이 값어치가 있습니다. 빛이 1층도 비추고 5층도 비추어 주듯이 말이지요.
또 하나는 옛날 개그콘서트 코너 중 “일등만 알아주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우스갯말이 있잖아요. 학교에서도 최상위는 아주 적게, 보통은 많게 성적을 주라고 해요. 그런데 특히 건축설계계는 1등만 알아줘요. 설계공모에서 1등만이 의미가 있지 2등, 3등은 없는 것과 같다고 보거든요. 그러나 이런 사고가 우리를 순수주의, 작가주의, 작품주의에 가두어 버립니다. 그러나 지금 시대는 최고는 어디서든 나타날 수 있다고 여기고 있는 사회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처음부터 5,000평, 10,000평 건물설계부터 시작하겠어요? 학교에서는 생각하지 않았던 작고 초라한 환경의 집을 설계하는 일부터 시작하는 일이 훨씬 더 많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1등, 완벽, 순수, 중심인 것에서 벗어나, 2등, 3등이라 여기던 의견, 환경, 공간, 여건 등 작지만 주변의 다른 소리에 귀를 기울여 그 속에 잠재된 가치를 발견하여 건축의 환경을 크게 넓혀 갔으면 좋겠습니다. 그게 참여이고 공유이고 협력이며 단체전을 기반으로 하는 건축사의 직능적 사고의 근본이기 때문입니다.

 

대담 홍성용 편집국장, 글·사진 장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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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비평 _ 사라지는 건축, 공간 설계자료

Disappearing architecture, materials for space design

▲ 40여 년 전 건물자료를 보면서.

70년대 발간된 건축사지 PDF 자료를 보면 여러 생각이 든다. 당시 건축계에서 고민한 주제가 40여 년이 흐른 지금과 비슷하다는 것과 그 당시 회원작품으로 소개된 건물들이 지금은 그 작품소개 페이지가 아니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 1973년 5, 6월 건축사지의 작은 칼럼에는 ‘사라지는 서울의 근대건축’이라는 글이 2회 연재되면서 1936년 완공된 ‘반도호텔’을 이야기하고 있다. 1975년에 들어설 롯데호텔에 의해서 역사적인 건물이 사라지는 것과 중구 소공동 국립중앙도서관, 미도파백화점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요즘처럼 강하게 보존해야 한다는 논조는 아니다. 하지만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언급하고 있다. 70년대에 30년대 건물의 소멸을 생각하는 것이 현재 서울이 1967년에 지어진 세운상가를 보존, 이용하는 모습과 겹쳐 생각하게 된다. 지금 세운상가와 같이 이름난 건물이 아닌 수많은 60~70년대 많은 건축사의 노력결과가 거의 사라지고 남아있는 것은 오래된 건축사지에 있는 사진과 작은 도면뿐이라면 너무 아쉬운 생각이 든다. 주택가 골목의 좀 규모가 큰 대지에 설계된 70년대 당시 회원작품 대부분은 80년대 다세대, 다가구주택 신축으로 모두 사라졌다. 그 다세대들은 골목과 함께 아파트단지가 되었다. 현실 어디에도 건물의 흔적은 없다.

 

▲ 지금도 사라지는 건물, 공간의 역사

그 당시 설계를 진행했던 많은 건축사사무소가 지금까지 도면과 문서자료를 가지고 있을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최근 제법 큰 설계사무소 건축사님의 갑작스러운 부고와 함께 그 사무실에서 만들어진 자료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사무실을 누군가 이어받아 운영할 처지가 안되는 것 같아 나오는 이야기라 생각된다. 이것이 단지 그 사무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최근 리모델링 또는 용도변경 등을 진행하려다 보면 건축주는 설계도면을 가지고 있는 것보다 아무것도 없는 경우가 더 많고 원래 작업한 사무소의 폐업도 많아 자료 없이 건축물관리대장의 도면만 가지고 시작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지금 2019년 설계하는 건물들의 도면자료와 그 과정의 경험들은 어떻게 될지, 40년 후 사라질 수 있는 건물의 역사는 누가 가지고 있는 것이 좋은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물론 개인재단에서 유명건축가들의 스케치와 역사를 보관하는 사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이 경우는 좋은 보관이 되고 역사가 남겠지만 그 밖의 수많은 노력의 결과는 어디에 두어야 할까? 지금은 설계한 건축사사무소에서 보관되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생각된다. 그 사무실이 40년을 더 지속하여 나갈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지금의 많은 작업은 건축물대장의 도면으로 남는 것과 함께 70년도 잡지의 한 페이지처럼 각종 온라인의 이미지로만 남을 수밖에 없을 수 있다.

 

▲ 보존되지 않는 자료

건축물과 공간을 공공재라 생각한다면 건물과 공간의 역사는 개인이 보관하는 것과 함께 잘 보관되고 활용될 수 있는 방안도 모색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 대한건축사협회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는 ‘건축종합정보센터’의 서비스 내용이 잘 운영되어 건축물대장의 기본도면이 아닌 실시준공도면 자료와 설계과정, 행정과정 등 필요한 부분이 공유되어 더욱 효율적인 설계업무가 가능하게 되고 이런 자료를 바탕으로 다른 유익한 작업 계획을 구상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지금 각 건축사사무소에서 프로젝트가 진행되면 많은 문서가 만들어지는데 그 문서들이 프로젝트가 마무리되면 잘 선별되어 저장되겠지만 많은 과정기록은 간략화되어 법적 필요 서류 중심으로 정리되는 것이 대부분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법적서류 보다 좀 더 많은 설계과정의 기록이 잘 정리되어 보관되어야 건물과 공간 설계의 역사가 이야기로 만들어질 수도 있고 건물을 다른 방식으로 이용하고자 방안을 모색할 때 그 자료는 큰 가치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 많은 자료를 가지고

2019년 올해부터 2021년까지 정부는 중앙부처·지자체·공공기관 등 총 784곳이 보유한 데이터를 모두 개방한다. 개인정보와 국가안보, 영업비밀을 제외한 공공데이터를 모두 개방하는 것이다. 그 수는 약 14만2천여 건에 달한다. 지금 공개된 것의 5배에 달한다. 이렇게 개방되는 자료와 특히 건축사들만이 구축할 수 있는 건축, 공간설계자료를 가지고 새로운 구상을 할 수는 없을까? 최근 지번과 공시지가, 인근 토지매매자료, 인허가자료를 한눈에 보여주면서 그 대지의 사업성을 3D형태로 분석하는 서비스도 진행되고 있다. 이처럼 축적된 데이터결합의 가능성은 다양한 모습일 것이다. 한 건물설계과정의 자료를 잘 정리하고 적정한 규격을 만들어 사용할 수 있도록 잘 보관하는 것은 공공재로서의 건물의 생명을 관리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자료들로 건축사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새로 마련하거나 지금의 업무수행 방식을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각 건축사사무소에 보관되는 설계과정 자료를 잘 보존하고 유지, 활용하는 일은 점점 더 중요해질 것이다.

이번 건축사지에서 특집으로 소개하는 원로건축사들의 70년대 주택들은 정확한 주소가 없어 그 흔적을 따라가기도 쉽지 않다. 하지만 그 짧은 기록을 가지고도 그 시대의 건축상황을 들여다볼 수 있다. 1971년의 주택건축비가 10만5천 원/평, 73년도 14만 원/평, 그리고 76년도 22만 원/평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런 작은 단서도 우리나라 근대 건축역사를 유추할 수 있게 하는 좋은 자료가 될 수 있다. 물론 지금 지어지는 건물들의 이미지 자료는 여기저기 너무 많아서 사라지는 것을 염려할 필요는 없다. 잘 보존해야 하는 것은 기술적인 사항의 도면과 그 집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그 건물설계에 참여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많은 이야기가 남아 도시, 건축, 공간 이야기를 풍부하고 재미있게 만들 수 있다. 근대건축이론과 신소재인 콘크리트로 한국건축을 만들어온 그 건물들이 사라졌고 그 과정의 이야기들도 건축사의 퇴장으로 개인의 기억으로만 남는다면 너무 아쉬운 일이다.

1930년대 건물이 사라지는 것을 1970년대에 이야기했고 2019년에도 근대문화유산을 잘 보존하고자 한다. 지금 지어지는 많은 건물도 역사의 일부분이고 어떤 이유로든 사라질 것이고 그 건물을 설계한 사무소도 영원히 그 건물의 순환과정 기록을 보관할 수 없다. 그렇지만 자료는 남아서 건물과 도시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기초가 되고 잘 활용되어서 건물의 생명을 잘 유지할 수 있는 길잡이 설계도가 되어야 한다. 그 자료를 수집하고 보관하는 좋은 조건을 가진 건축사협회에서 이 기회를 잘 활용 할 수 있으면 한다.

 

조원준 (주)이제이 건축사사무소 · 건축사

성균관대학교 건축과를 졸업하고 ‘원도시건축’을 거쳐 프랑스에서 ‘건축재료’ 관련하여 수학하고 2003년부터 건축설계 강의를 하고 있다. 현재 대한건축사협회 서울특별시건축사회 건축산업연구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주)이제이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cwonju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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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 건축의 미부(美浮) – 두 사람의 작가

Emergence of beauty in Korean contemporary architecture – Two artists

편집국장 註

1974년 10월 ‘월간 건축사’에 글이 하나 실렸다. 건축 작품이 정치사회적 논쟁의 중심에 섰던 최초이자 마지막이 아니었던가 싶은 김수근의 <부여 박물관>에 대한 일본풍 논쟁이었다. 논쟁의 발단은 한참 선배인 김중업의 언급에서 시작됐다. 한국 현대 건축의 시작점에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를 일본을 거쳐 배운 김수근과 유럽의 르 코르뷔지에 말년 3년을 같이 한 김중업의 논쟁이었다. 일본풍은 <왜색>이라는 자극적 표현 때문에, 독립된 지 얼마 안 된 우리 정서로는 매우 민감한 부분이었고 사회적으로 파란이 일었다. 여러 사람들이 논쟁에 가담했었는데, 이런 논쟁이 단 몇 차례로 끝나고 이어지지 않은 것은 우리 건축계를 위해선 안타까운 일이었다.
600호 특집을 준비하다 발견한 <월간 건축사 1974년 10월호> 글은 놀라웠다. 그리고 1974년의 통렬한 비판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언급할 가치가 있는 내용이었다. 자그마치 45년 전 건축계 전체에 대한 발전을 촉구하는 글에서 지금을 생각하게 됐다. 특히 두 ‘귀화인’이라는 표현에서 여전히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지 못한 대한민국 건축계에 울리는 소리가 크다. 여전히 직수입된 사고와 생각을 유행매체에 마케팅하는 전략이 먹히는 풍토에서 이 글은 반성의 시간을 가지게 만든다. 피터 춤토르가 스위스 산속에서 혼자 뚝딱거리면서 조용히 건축을 하고, 중국에서 왕 슈는 폐자재로 수공예하는 건축을 하다 세계에 존재감을 알리게 되고, 알렉한드로 아라베나는 빈민주택으로 사회적 정체성을 알렸다. 해외대학 이력이 국내 대학보다 활동하기 좋은 대한민국 건축계는 반성의 시간을 가져야 할 것 같았다. 과연 45년 전 보다 선명해 졌는가?
원문을 거의 그대로 옮긴다. 다만 한자 표현이나 이해 어려운 문장은 다소 변환했다. 천천히 음미하면서 읽어보시길… 1974년 10월 두 귀화인의 논쟁에 대한 학문적 비판글.

 

1940년대 박길룡씨의 간접문화시대를 어떻게 지양하느냐 하는 것은 사실상 오늘의 우리 작가에게 부과될 가장 중요한 문제의 하나다. 그것은 비단 건축에 있어서만 아니다. 모든 예술과 사회전반에 걸쳐 제기되어 왔던 문제이기 때문이다. 말을 바꾸면 그것은 결국 〈우리의 것〉을 어떻게 창조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우리 것〉의 문제는 모든 유럽지역에서 공통적으로 제기되는 현상으로써 일차적으로 그것은 〈유럽 문명에 대한 우리〉라는 자각으로부터 출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차적 문제의 제기가 1940년대의 박길룡씨는 일본을 통한 간접문화라는 기형적인 공간속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우리 것〉에 대한 정립은 우선 유럽문명에 대한 추체험(다른 사람의 체험을 자기의 체험처럼 느끼는 일)이 직접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해방 후 외래문화의 수입선이 일본에서 미국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결국 간접문화가 직접수입의 형태로 바뀌었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사태가 〈우리 것〉의 정리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은 뒤에 이야기 될 것이지만, 우선 유럽문화의 추체험이라는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다행스러운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만 이러한 기회가 우리에게 있어서 어떻게 활용되어 왔는가, 또한 어떻게 활용되어질 것인가 하는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김중업씨의 문제를 생각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된다.

과연 김중업씨는 무엇을 가져왔으며, 어떻게 그것을 옮겨 놓았는가? 그가 도불하여 르 꼬르뷔지에의 문하생이 된 것은 1952년이며 귀국한 것은 1956년으로 약 3년간에 걸쳐서 르 꼬르뷔지에 프로젝트에 참가하고 있다. 만 3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꼬 르뷔지에를 중심으로 하는 유럽 현대건축의 정신을 충분하게 터득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그곳 현장에 서 왔다는 사실 하나만 으로서도 충분한 흥미거리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출면점(出免点)에서의 조용한 막상(膜想)〉이라는 아포리즘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생명 – 나 이전에 존재하는 대자연의 의지
그렇기에
사명을 위하여 창조되어야 하는 대자연의 소산
나는 고로 존재한다.

존재되기 위하여 〈나〉의 의지가 주어진다.
대자연과 〈나〉 – 인간의 에고(ego)
이 두 의지사이의
신비에 찬 에-코(Echo)
그것은 비극 이전에 위(魏)의 이전에
영겁을 동한 모든 것의 본원이리라.

생은 아름다운 것인 것을 생은 희열에 찬 것을 –
오로지 대자연의 의지를 탐낼 때 비극과 추가 있으리니 ­

이 아포리즘은 그가 본질적으로 르 꼬르뷔지에의 원리로부터 시작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생명, 나 이전에 존재하는 대자연의 의지/ 대자연과 나-인간의 에고, 두 의지사이의 신비에 찬 에-코/영겁을 통한 모든 것이 본원이리라/에서 선언하고 있는 사상은 나(ego)가 모든 것의 본원인 대자연의 의지 속에 종속되어 있다. 근대적 자아를 폐함으로써 얻어낸 아르누보의 예술원리 바로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가 대자연과 나와의 의지적 에-코를 말 할 때에도 그것은 결코 대자연과 자아가 대등한 관계를 뜻하는 것은 아니며, 더욱 자아를 대자연의 의지보다 더 강조하고 있는 것은 절대로 아닌 것이다.
즉, 이 아포리즘에는 영감을 봉한 본원의 정체, 이른바 <없음 無〉에 대한 요해를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없음 無〉에 대한 발견은 결국 근대합리주의적 자아를 버리는 것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이며, 이 지점에서부터 유럽의 정신은 현대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건축에 있어서 이러한 정신을 선언한 것이 아르누보라면 우리는 김중업씨의 아포리즘에서 간단없이 그것을 확인하게 된다. 우리는 아르누보의 테제는 헤겔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그것은 마루쿠제의 지적과 같이 시민사회를 기반으로 했던 <이성>에 대한 불신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말을 바꾸면 그것은 산업혁명이후에 등장한 상업도시, 문화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아르누보의 운동은 본질적으로 공업도시형 문화를 예견하면서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인간의 <이성>이 주도가 되었던 상업도시의 문화로부터 기계가 그 사회의 중심이 되는 공업도시, 이른바 기능적인 원리는 인간의 자아로부터가 아니라, 그것은 자연에 본원적으로 있어진 것. 즉 존재적 원리를 말하는 것으로 흔히 말하는 신즉물주의가 그것이다. 일찍이 이러한 원리는 비 유럽, 특히 고대 그리스나 아시아에 있었던 것으로 결코 아르누보에 의해 시작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이 자기시대의 새로운 비전에 그러한 낡은 시대의 원리가 맞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상파 시대의 화가나 아르누보의 예술가들이 반드시 지중해문화나 아시아, 아프리카의 토착문화에 그 영감을 얻어냈던 사실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은 <이성>, 이른바 <대자(對自, Fürsich)>의 노출이 없이 사회를 민주적으로 원만하게 이끌어 갈 수 있는 보다 보편적인 원리를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노력은 아르누보, 이른바 르 꼬르뷔지에, 그로피우스, 미스 반 데어 로에, 기디온을 중심으로 하는 C.I.A.A.에 의해 건축적으로 활발하게 표현되었다. 즉 그것은 외형적으로는 재래적인 양식으로부터 기능적 상징주의로 완전하게 전환되는 결과가 되었으며 구조적으로는 본원적인 <없음 無>, 이른바 기능적인 원리는 가장 간명하게 효율적으로 구현함으로써 전체적으로 낡은 시대의 계층적 건축 미학을 완전하게 청산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아르누보가 민주주의시대, 공업화 시대, 국제화 시대를 열어놓았던 문화적 원동력이었다. 새로운 건축 미학을 펼쳐놓을 수 있었던 기능적인 원리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가 간단하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령 르 꼬르뷔지에가 자기의 원리를 시적으로 표현하여 태양과 바람과 물이라고 할 때, 그것은 연금술의 어떤 기본적인 재료이지 그 자체가 원리는 아닌 것이다. 피카소나 쁘라크의 입체, 혹은 칸딘스키나 몬드리안의 기본형태는 그것이 르 꼬르뷔지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연금술 이전의 것이며 기본언어를 구사하는 자체(작품)가 하나의 원리인 것이다. 이러한 원리가 구현되는 건축이 등장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공업 도시 문화의 실현을 뜻하는 것이지만 존재론적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을 단순히 기계적 존재로 경화시키는 것을 뜻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는 C.I.A.M 이후의 작가들이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고 또 스스로 지양하고 있으나 김중업씨를 말하기 위해서는 그 이상 언급하지 않아도 족할 것이다. 그럴 것이 김중업씨의 문제는 르 꼬르뷔지에의 테두리에 한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총체적으로 말해서 김중업씨가 약 3년간 르 꼬르뷔지에의 문하에 있었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시대를 만나고 왔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김중업씨를 말할 때 이러한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흔히 김중업씨의 작품을 두고 전통적인 조형성이라거나, 혹은 민족적이라고 평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에게 있어서 전통적인 조형성이 인정된다면 김중업씨의 문제는 한결 복잡해지게 된다. 그럴 것이 본질적으로 아르누보의 기능주의라는 것은 민족성이나 지방성은 물론 고전적 장식성을 거부함으로써 인터내셔널 스타일을 형성하는 것이다.

주한 프랑스대사관 <김중업 건축사 작품>

만일 자기의 작품을 스승의 정신, 기능적 원리에 의해 제작하였다면 결코 민족적인 조형의 의식으로 눈을 돌리지 않았을 것이다. 자기의 작가정신과 본질적으로 배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적인 조형이 성립된다면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런 현상은 그가 르 꼬르뷔지에의 패반에서 떨어져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을 보였다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는 헛된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작품 <프랑스 대사관>의 지붕. 또 <H 씨집〉의 지붕은 우선 르 꼬르뷔지에의 <떠받이식 원리>를 충실히 따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지붕이 가지는 장식성을 완전히 박탈하고 단순히 기본적인 포름만을 추상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붕을 <떠받이式〉으로 만들어 두드러져 보이게 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르 꼬르뷔지에게 있어서 그것은 기능적 원리를 상징화하며, 그 상징적 조형을 일차적(자연적)인 것과 구별하기 위함이다. 말을 바꾸면 자기의 조형에 실존성을 부여하기 위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전통적인 조형이 지붕이라는 것의 확대로 대표될 수 있는 것인가?
여기에서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우리의 건축은 절대로 어느 부분에 의해 이해된다거나 대표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앞에서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의 건축은 공간론적으로 파악돼야만 그 본래적인 예술의사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중업씨의 일련의 지붕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기능적인 조형성의 결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그는 르 꼬르뷔지에의 시각으로서 우리의 지붕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경우 우리의 지붕은 하나의 소재로서 쓰여진 데 불과한 것이지 결코 우리의 지붕이 가진 예술성을 재생산한 것이 아니다.
그 단적인 증거로서 나는 상기한 그의 두 지붕이 우리의 미래적인 장식성을 완전히 추상시켰다는 점을 들려고 한다.
김중업씨의 문제를 생각할 때 중요한 문제는 지엽적인 것에서가 아니라 보다 근원적인 곳에서 찾아야 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즉 그가 몰고 왔던 아르누보 양식의 건축이 ‘우리의 도시에 그대로 이식되어도 좋은가?’ 하는 문제이다.
이러한 본질적인 물음은 앞에서도 제기되었던 것인데, 이는 건축이 단순히 물리적인 가치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서두에서 선언한 바와 같이 개인과 집단의 의식을 한정하는 예술이기 때문이다. 즉 아르누보 양식의 건축이 우리 도시에 이식된다는 것은 곧 우리들의 도시가 산업형 도시에서 공업형 도시로 바뀐다는 것을 뜻하며, 문화적으로는 계층에서 민주화, 획일화, 이성적인 것에서 다수(민상)의 시대로 전환한다는 것을 뜻하게 된다.
우리의 도시는 엄밀하게 말해서 아직도 농업형, 상업형, 공업형이 공존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뒤집어 말하면 아직 우리의 도시는 아무것도 되어 있지 않다고도 말할 수 있게 된다. 르 꼬르뷔지에는 자기의 아포리즘에서 도시 계획 없이 새로운 건축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때 그가 말한 도시계획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공간의 변혁, 즉 새로운 개인, 새로운 집단의식을 형성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이토록 엄청난 혁신의 의지가 우리에게 있어보지 못했다는 것은 어제 오늘 깨달은 이야기는 아니다. 적어도 주어진 한정 내에서라도 변혁을 시도하는 것이 우리 작가가 처한 조건이라면 김중업씨의 의의는 매우 훌륭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해서 이러한 부분수정은 오히려 한국의 건축 상황을 더욱 혼란하게 만드는 결과가 될 것이며, 설사 그것이 어떤 효용성을 지닌다 하더라도 여전히 비평적 대상으로서의 기능주의가 가진 안티 휴머니즘의 문제는 남는 것이다.

CIAM의 해체가 아르누보의 패배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패배가 아니라 변형 메타모포시스(Metamorphoses)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변형의 모습을 바우하우스에서 본다. 어떤 의미에서 바우하우스는 아르누보와 표현주의의 결혼식장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아르누보의 즉물주의에 표현주의 정신이 가미됨으로써 기능화시대가 만들어낸 창백한 분위기에서 인간적인 것을 회복하려고 하였다. 우리는 그러한 작품들을 로에, 미로, 클레, 칸딘스키에서 볼 수 있게 되지만, 예술은 도리어 당대의 유럽적인 위기를 더욱 조장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까닭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왜 인간적인 것을 옹호하려던 예술이 도리어 비인간적인 것을 조장하게 되었는가. 이러한 아이러니는 본질적으로 유럽의 예술이 가지는 자기모순의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즉 유럽의 예술은 이미 기반을 상실한 곳에서부터 출발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예술이 결코 사회와의 결별에서 이루어지는 아니라는 원리를 재확인하게 되며 건축에 있어서 공간개념의 도입이 없이 참다운 건축이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말이 된다.
사실 바우하우스 시대의 유럽이란 자본주의 문화 최악의 상태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미스 반 데어 로에가 미국으로 옮겨갔다는 것은 자기 예술이 서식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간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 우리의 눈은 미국 속에서의 ‘로에’에게로 가게 된다. 그러나 당대의 미국은 본질적으로 얼마나 유럽과 다른 것이었는가. 물론 미국에는 민주주의가 있었다. 그것이 파시즘과 공산주의가 등장하여 양극화되던 당대의 유럽과는 다른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미국의 민주주의는 본질적으로 유럽 전통의 연장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라이트’의 이야기를 해야 된다. 그는 유럽의 전통에 대해서 저항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로에’와 ‘라이트’의 대비는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현대예술의 새 지평을 보게 해주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그렇다면 ‘라이트’의 예술이란 무엇인가. 아르누보의 시대를 존재적 실재의 탐구로 규정짓는다면 라이트의 출현은 존재론적 실재의 탐구로 규정할 수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라이트의 아르누보가 가지는 인터내셔널 스타일을 경험했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그는 새로운 예술을 준비하고 있었다. 즉 그는 실재를 대상에서 구한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구한 것이다. 아르누보의 실재가 <기능>이라면 그는 그러한 기능의 원리를 <자기 안에 있게>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라이트에서 있어서도 르 꼬르뷔지에나 로에와 마찬가지로 근대적인 자아는 그 자취를 감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 유의할 점이 있다. 그것은 아르누보의 기능적 원리가 근대적 자아 즉, <이성>을 대신한 것이라면 ‘라이트’는 그 모든 것을 자기 안에 삼켜 버린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때의 자기라는 것은 범아(Super Ego)이며 라이트에게 있어서는 자연 즉, 자기와 자연과의 혼연의 상태를 뜻한다.
말을 바꾸면 아무것도 없게 하려는 상태, 그것이 라이트의 실재인 것이다. 작품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돋보이는 것(떠받이식)에 대한 숨기려는 경향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로소 공간의 사상을 그에게서 발견하게 되며, 건축이 점 존재로서 독립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유기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물론 라이트의 유기성은 건축과 자연과의 관계, 즉 자연 환경과 건축과의 유기적인 관계를 강조하는 것이지만 그러한 유기성은 결국 공간 개념의 중요성을 환기시키는 것이었으며, 오래지 아니하여 도시 건축에 있어서도 공간 개념을 자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라이트의 예술은 일본의 전통건축의 샘플 없이는 성숙되지 못하였다는 주장에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건축적 전환에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일본 전통건축의 구법이었다. 이를 말하는 것 같다.)

김수근씨의 문제를 말하려고 할 때, 무엇보다도 라이트와 일본건축의 관계가 중요하다.
라이트가 일본건축의 샘플을 본 것은 1893년 시카고 만국 박람회 때가 처음이고 직접 보게 된 것은 그가 제국 호텔을 짓기 위해 일본에 왔을 때였다. 그때 그가 일본의 재래건축을 대하고 어떻게 그것을 받아들였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극단하기에 어렵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그가 일본 건축을 본 눈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지금까지 우리가 말해온 유럽 예술사의 변천과정에서 이미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즉 일본의 건축이야 말로 유럽예술이 앓고 있었던 병인을 치료할 수 있는 <그 무엇>임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라이트의 사랑을 일본건축에서 재확인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일본 건축이 지니는 체계를 만난 것이 아니라, 어떤 도시성을 만났다고 할 수 있다.
일찍이 인상파 시대의 화가들이 호쿠사이를 만났던 것과 마찬가지다. 즉 호쿠사이가 일본의 전부를 통시적으로 나타내는 화가는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부르노 타우트가 일본의 이세신궁과 계이궁(가쓰라리큐)에 보낸 찬사를 기억하고 있지만, 그것은 동아시아가 아니라, 서구의 어법으로 만난 자기 확인의 기록이다. 이점에 대한 반성은 보다 심각한 문제로 우리에게 제기되는 것이지만, 여기에선 더 이야기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김수근씨의 문제는 동아시아가 아니라, 서구의 문맥으로 다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김수근씨의 세계에서 배어나오는 일본적인 것은 본래적인 일본이 아니라, 미국인 라이트나 독일인 타우트가 서구적 어법으로 확인한 새로운 예술인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가령 피카소가 아프리카의 목각 인형을 자기의 어법으로 재창조했다는 것으로도 능히 이해가 될 만하다. 아프리카의 목우를 소재로 만든 피카소의 작품을 두고 아프리카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금까지 김수근씨의 문제를 말하기 위해서 라이트를 이야기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김수근 예술의 토양은 요시무라(吉材)와 일본건축이지만 그 예술의 발생법이나 어법은 라이트로 연결된다.(*편집자주: 요시무라 준조는 김수근이 일본 유학당시 배운 스승)
이제 우리는 그의 작품을 통해서 이 점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1960년에 당선된 그의 처녀작품 〈국회의사당〉은 바로 라이트의 어법으로 이해될 수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즉 땅속으로 기어들어가려는 납작한 형태(수평선)는 라이트의 〈숨기려는〉 어법으로 그것은 아르누보 계열의 〈돋보기〉에 대한 안티 테제로서 이해되는 것이다. 앞에서 이미 언급했던 바와 같이 라이트의 그러한 어법은 자연 속에 자기를 투기함으로서 결과적으로 자기를 비우고 자연성을 그 속에 채움으로써 결론적으로 자기와 자연이 하나의 흐름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을 우리는 존재론적 실재의 탐구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김수근씨의 문제는 결국 존재론적 미학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존재론의 전개는 모든 대상을 <만남>의 시간으로 환원케 함으로써 대상이 가지는 역사적인 현실성을 배제해 버린다. 그러므로 그 납작한 수평선의 미감이 호쿠사이의 판화와 같다거나 혹은 계이궁의 형태와 같다고 지적된다 하더라도 그것을 일본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한낱 웃음꺼리가 될 뿐이다. 또한 작품 <국회의사당>의 벽면은 계이궁의 검은색 기둥과 흰벽의 모티브가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이점 또한 라이트가 즐겨 다루고 있는 몬드리안 스타일의 디자인과 같은 어법으로 풀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품 <국회의사당>은 유럽 예술사의 문맥을 쫓아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수근씨의 작품은 김중업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귀화인의 작품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럴 것이 김중업씨의 존재적 실재의 전개나 김수근씨의 존재론적 실재의 전개는 제들마이어가 지적한 것처럼 양극화의 현상으로 오로지 유럽 문명이 낳은 비극적인 결과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과거에 있어서는 그러한 양극화의 전통은 보기 힘들었으며 모든 것이 중용을 이상으로 하였다. 이점은 일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계이궁이나 이세신궁, 그리고 동조궁은 부르노 타우트의 지적처럼 그것이 각기 독립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은 동시대적으로 하나의 체계 즉 아시아적 공간 개념(만다라)에 의해 조화되어 있는 것이다.

즉 타우트가 동조궁(도쇼구)보다 계이궁이 더 훌륭하다고 주장한 것은 그들이 유럽적인 양극화의 발상법으로 재단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김수근씨의 예술이 결코 일본적인 것이 아니라, 유럽 귀화인의 것이었다는 사실에 더욱 확증을 얻게 된다.
이러한 논법으로 작품 <부여 박물관>에 접근해 본다. 아니 작품 <부여 박물관>은 그러한 문맥으로서만 작가의 진실에 도달할 수 있는 작품이다. 즉 그 작품에 나타난 이세신궁의 형태, 이른바 도리의 모티브도 앞에서 언급했던 작품 <국회 의사당>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본질적으로 역사적인 현실을 배제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였던 유럽의 현대 예술의 체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해야 옳다. 말하자면 김중업씨의 <프랑스 대사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도리>나 <합장지붕>의 형태가 소재로서 징발당한 것이지 일본이라는 특수성이 표현된 것은 아니다. 이점은 역시 피카소와 아프리카의 목각인형, 혹은 마티스와 일본 판화의 예와 다를 바 없다.

부여박물관 <김수근 건축사 작품>

그러므로 <부여 박물관>에 대한 김중업씨의 비난은 외형적으로 보면 귀화인끼리의 싸움으로 보아야 하며 내용적으로는 로에와 라이트의 쟁점이 재연되는 것이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못하였다. 즉 <부여 박물관>에 대한 왜색시비는 예술에 대한 시비가 아니었으며 그럼으로 하여 작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한낱 사회적인 사건에 불과했다. 그럴 것이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왜색이 아니라 바로 귀화인의 예술,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한국 문화전반에 걸쳐 제기되는 <귀화인의 의식>이다. 즉 귀화인의 예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가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럴 것이 현대 건축이라는 하나의 세력은 그것이 유럽의 사회사적인 변천과정에서 필연적인 것으로 이룩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현대 건축의 세력을 우리가 그대로 관세 장벽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은 곧 그쪽과 동등한 사회사적 리듬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도시유형으로 보자면 그것은 농업형 < 상업형 < 공업형의 단계적 이행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도시는 그러한 서구적 사회변천의 리듬을 갖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현시점에 있어서 국제주의적 예술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이 귀화인의 예술이 된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김수근씨는 하나의 시대적 모순을 안고 건축계에 등장하였으며 그러한 결과는 무단히 작가와 사회 간에 일어나는 특수한 마찰계수를 의식하게 하였다. 그 실례를 들어보자.
작품 <국회의사당>은 라이트 어법으로 이해되는 작품이다. 즉 건축이 단순히 <인간을 담는 그릇>이 아니라,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 그릇>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그릇은 단순히 기능적인 그릇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존재론적 그릇이 자연환경과 유기적인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연환경이야 말로 라이트에게 있어서는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 영감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라이트의 작품은 미국의 기성도시에서가 아니라 초원에서 실현되기를 원하였으며, 또 그렇게 되었다. 그것은 미국의 기성도시는 이미 자연환경이 깡그리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라이트 건축의 어법이 이러하다면 김수근씨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과연 작품 <국회의사당>은 자연과의 유기적인 조화라는 입장에서 합당한 것이었는가. 또한 <국회의사당>이라는 주제가 본질적으로 라이트의 양식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던가. 만일 받아들인 것이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남산에 세워진다는 것은 라이트의 어법과 모순된다. 그럴 것이 이 건축은 자연 환경 속에서 두드러지면 안 되는 것이며, 어디까지나 언덕 위에 외롭게 서 있는 하나의 거목에 그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남산위에 세워지는 작품 <국회의사당〉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여기에서 우리는 김수근 씨의 예술이 일으키는 마찰계수를 측정하계 된다. 즉 그의 예술이 라이트의 어법을 고수하는 한, 우리의 도시에는 그의 작품이 차지할 자리는 없다고 보아야 하는 것이다.

글. 박용숙 Park, Yongsook 1974년 당시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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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드리드 문서 센터 / 도서관 1994-2002_스페인 마드리드 건축사 Mansilla Tunon

MADRID DOCUMENTATION CENTRE/LIBRARY. 1994-2002.

whole complex

이번 호에 소개할 작품은 스페인 마드리드에 위치한 ‘El Aguila’의 복구 및 부분적 신축 프로젝트인 ‘도서관 및 아카이브’다. ‘El Aguila’는 1994년에 산업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던 맥주를 만들던 공장 이름이다. 마드리드 시에서 이의 산업 건축의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고자 현상 공모전를 냈고, 마드리드의 건축사 그룹인 Mansilla & Tunon architects가 당선되었다. 1994년 현상 설계부터 2002년 완공까지 8년에 걸쳐서 복구rehabilitaion 작업 및 신축 공사가 진행되었다.

공장과 같은 산업 건물의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보존하고, 새로운 기능을 불어넣는 작업은 유럽에서는 이미 굉장히 활발하게 진행되어진 주제 중 하나이다. 특히 18~19세기 산업 혁명 이후 건축물의 고유한 특성과 시대적 환경에 대한 기억을 건축물을 통해 보존하고자 하는 노력은, 서양 문명의 복구, 복원 역사의 연장선 상에서 읽을 수 있겠다.

마드리드 ‘El Aguila’ 공장은 하나의 독립된 건물이 아닌 산업이 점차적으로 융성함에 따라 하나둘씩 건물이 증축되고 덧붙여진 건물군complex이였다. 건물군의 복구에 앞서 설계자들은 북쪽 및 서쪽의 건물군을 완전히 허물고, 역사적으로 보존할 가지가 있다고 판단되면서 보존 상태가 꽤 양호한 남쪽과 동쪽의 입면을 온전히 살리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전체적인 블록의 매스는 기존 건물군의 ‘전체 블록’에 대한 기억을 보존하고자 기존 건물의 70%는 복원시키고, 새로운 건물군이 30%만 차지하는 것으로 계획하였다.

Planimetry

El Aguila_old factory 전경

새로운 건물군을 기존 건물군에 끼워넣는 방식은, 기존의 건물이 존재하던 위치를 기본으로 하되, 한쪽으로는 L 자 형으로 대지의 둘레를 부분적으로 둘러싸고, 다른 한 편으로 출입구 주변으로 얇고 가는 매스를 올려놓았다. 공장을 가장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요소 중 하나인 대형 사일로Silos의 매스의 형태나 공간은 고스란히 보존하고, 이를 세미나실이나 기록 보관소의 일부로 사용하였다.

이러한 ‘끼워넣기’ 작업은 기존 건물과 새로운 건물을 평행으로 배치하거나 기존 건물 입면을 부분적으로 닫아줌으로써 작은 길과 중정을 형성하는데, 이는 서로 다른 시대 상을 반영하는 입면의 공존을 통해 흥미로운 사이공간-Inbetween space-을 경험하게 한다.

axo-old and new

이제 새로운 건물군의 입면을 이루는 재료를 살펴보자. 흰색 콘크리트는 블록의 기단 및 골조를 이루는데 쓰이고, 유리 및 금속 등의 차가운 재료가 외장으로 쓰였다. 기존 공장의 입면을 이루는 빨간색 벽돌의 닫혀지고 따뜻한 느낌과는 대조적으로, 콘크리트 골조가 대부분 노출되고, U-glass나 투명 유리, 또는 금속 루버의 외벽은 투명하고, 차갑고 이성적이다.

이러한 재료의 선택은 거의 ‘병치juxtaposition적 대조’를 이룬다. 오래된 공장에 속해있던 여러 등장 인물 – 건축 재료, 배치 방식, 입면 등의 다양한 설계 요소- 은 그들이 생성될 수 있었던 역사적 배경을 안고 자신의 목소리를 보존하면서, 새로운 등장인물인 새 건물군은 기존 건물의 적극적인 Background로써의 역할을 충실히 하기를 바랐던 설계자의 세심한 의도가 아니었을까. 이는 서양화의 한 장르인 정물화의 방식과도 비슷하다. 정물화 장르에서는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생명이 없는 물건, 즉 화초, 과일, 죽은 동물, 악기, 책 등 그 자체는 정지하고 있으나 배열의 미적 효과를 위해 화가에 의해 자유롭게 움직여진 채 그림이 그려진다. 이 프로젝트에서도 마찬가지로 허물 부분과 보존할 부분을 선택적으로 결정하고, 채워질 부분을 독립적이고 특징적인 ‘오브제화’함으로써 기존 오브제의 특성이 오히려 부각되었다.

inbetween space

facade

interior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몇 년간 이러한 복구 프로젝트의 움직임이 활발하다. 이전에는 문화재로서 지정된 건물만이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다고 여기고, ‘활용’이 아닌 ‘보존’을 지향하는 문화가 있었다면, 이제는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현대시대에서 요구되는 기능에 맞게 활용하는 여러가지 방법들이 모색되고 있다. 공장 및 국가의 산업 기반 시설물도 예외가 아니다. 유럽에서는 종교적 성당 이었던 건물이 몇백년을 거치면서 시청, 도서관, 바bar 등의 형태로 이용되기도 한다. 결국 건물의 이용성이 장소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장소에 대한 기억은 곧 우리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지현 BCHO Architects Associates 파트너

KAIST 산업디자인과와 밀라노 공과대학 건축과를 졸업했다. 이탈리아 밀라노 건축사. 졸업 후 이탈리아 및 홍콩에서 설계 실무를 했으며 현재BCHO Architects Associates에서 설계자로 활동하고 있다.
jihyun.lee81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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過去, 現在, 그리고 未來가 공존하는 항구도시 釜山

Busan, a port city where the past, present and future coexist.

한반도의 남쪽 끝에 위치한 부산. 국제적 항구도시이자 우리나라 제2의 도시로 위용을 자랑한다. 역사적으로도 수많은 애환과 질곡을 품으며 도도히 발전을 이룩해 왔다.
수많은 외세의 침탈의 경로가 되었던 적도 있었고, 6·25전쟁으로 인한 피난민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한반도 각 지역의 문화적 합류점이 되기도 했다. 70∼80년대의 눈부신 경제성장 동력의 발판이 되어 태평양으로 무한히 뻗어나가는 우리나라 국력과시의 출발점이자 거점역할을 톡톡히 수행하고 있다.
뱃고동 소리와 함께 바다가 있는 낭만도시에는 오늘도 각자의 생활을 위한 힘차고 생기 넘치는 발걸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다. 밤이 되면 밤바다와 함께 현란한 도시의 야경이 펼쳐지며 드라마틱한 풍광이 펼쳐지기도 한다.
6·25 참전 미군들이 야간에 도착한 부산항의 야경은 수많은 빌딩의 불빛으로 착각하게 해서 그들을 깜짝 놀라게 했고, 아침이 되자 전날의 야경은 산비탈의 수많은 판자집임을 알고 두 번 놀랐다는 씁쓸한 일화를 가진 도시. 그러나 전쟁 이후 눈부신 비약적 발전을 거듭하며 현재에 이르른 항구도시 “釜山”은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발전해가고 있으며 앞으로 다가오는 해양시대의 교두보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이다. 부산의 곳곳에 산재하는 아름다운 풍경 몇 곳을 소개하고자 한다.

수영만의 요트경기장 선착장
해운대의 아름다운풍경 중 하나인데 마치 다른 나라에 온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장소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 경기장으로 개설된 곳으로 우리나라 요트인들의 각광을 받고 있다. 주변 건축물들과 조화를 이루어 멋진 풍광을 연출한다. 야간에는 광안대교를 지나는 자동차 불빛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면서 아름다운 야경이 연출돼 많은 사진가들의 촬영지가 되는 곳이다.

부산항대교와 광안대교의 야경
도시에 어둠이 내리고 먼 나라로 가는 뱃고동 소리에 부산항 전체가 중저음의 진동을 느낄 즈음에 항구도시 부산의 아름다운 야경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빨간색, 초록색, 파란색, 주황색 전등에서 나오는 색깔이 번갈아 가면서 부산항 대교의 현수구조물을 비춘다. 수면에 반영된 두개의 부산항이 다시 살아나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며 생동감이 가득해 진다. 광안대교와 나란히 서있는 멀리 해운대 마린시티의 아파트 창문에서 하나둘씩 불빛이 켜지기 시작한다. 해운대 마린시티의 창밖으로 보석 같은 불빛들이 현란한 빛을 발하고, 광안대교를 질주하는 자동차 불빛의 궤적이 함께 하며 부산의 밤이 깊어간다.

해운대의 마천루
부산 역시 개발의 몸살을 앓고 있음이 역력하다. 그러나 그것이 환경을 파괴하는 괴물로만 보이지 않음은 어째서일까? 6·25전쟁으로 인한 후유증을 치유하기 위해 앞만 바라본 수십년간의 무질서한 개발이 만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도시의 재정립과정으로 봐야 할 것 같다. 이 치유과정에서 우리 건축사의 역할이 있었음을 생각할 때 무한한 자부심이 느껴진다. 현재 108층 규모를 자랑하는 마천루들이 키높이 경쟁을 하듯 스카이라인을 바꾸어 나가고 있다. 10년, 20년 뒤의 해운대의 풍경이 어떨지 자못 궁금해진다.

太宗臺와 영도등대
우리나라 사람이면 태종대의 명성은 누구나 익히 알고 있다. 반도의 남쪽 끝에 있는 명승지다. 흔히 알고 있는 자살바위, 대중가요 속의 꽃피는 동백섬으로 우리의 심금을 울리며 시름을 달래기도 하던 이곳. 태종대는 신라 太宗무열왕(김춘추)이 화랑시절에 호연지기를 연마하기 위해 이곳에서 바다를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하여 태종대로 명명되었다고 한다. 밤이면 영도등대는 대한해협을 항해하는 배들의 정겨운 길잡이가 되고 있다.

죽성드림성당
기장군 죽성리에 위치한 죽성성당. 바다를 배경으로 외로이 서있는 고딕양식의 죽성성당을 바라보면 마치 외국에 와 있는 듯하다. 쉴 새 없이 들이치는 파도소리가 영화의 배경음악 효과를 연상하게 한다. 바람이 강한 날에 집채 만한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는 장관도 볼 수 있다.

산토리니를 연상하게 하는 감천문화마을 바닷가 바위에 붙어있는 따개비를 연상시키는 부산의 오랜 역사를 가진 마을. 전쟁 통에 오갈 데 없던 피난민들이 하나 둘씩 자리 잡아 얼기설기 종이박스, 나무판자 등의 부실한 소재로 삶의 터를 만들었다. 이를 시작으로 오늘날의 동네가 구성됐다. 얼핏 보면 무질서하게 보이지만 나름대로 규칙과 질서가 자리 잡혀 생활에 장애가 되는 점은 없어 보인다. 올망졸망한 골목길에 들어서면 각자의 개성을 지닌 자그마한 생활공간들이 빼곡하다. 내가 가장 궁금했던 점은 이런 산비탈에서 집을 지을 때 각 집에서 배출되는 하수처리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었는지다. 그러나 걱정은 기우였다. 좁은 골목길 바닥에 잘 정비된 배수구, 맨홀이 가지런히 설치되어 있음을 보고 서로가 배려·양보하고, 공공의 이익을 위한 소통이 잘되고 있는 마을임을 알 수 있었다.

화손대 모자섬의 일출
우리나라의 아침을 가장 빨리 맞이할 수 있는 곳. 우리나라의 일출사진 촬영의 명소는 다수가 있지만 화손대의 일출은 건너편의 모자섬과 함께 가히 으뜸이라 하겠다. 모자섬 위에서 낚시를 즐기는 태공의 휘어진 낚싯줄에 걸린 해가 바둥대며 올라온다.

다대포항의 여명
밤의 고요를 걷어내며 먼동이 트고 있다. 붉게 물들기 시작하는 하늘에 갈매기들이 막 출항하는 어선을 따라서 바다로 날아가고 있다. 출조하는 낚시꾼들이 모자섬으로 향하는 낚싯배에 오르기 위해 부지런히 잔교를 건너는 모습이 오버랩 되는 듯하다.

마린시티(Marine City)
마린시티는 해운대구 우동에 위치한 과거 수영만 매립지였던 곳에 조성된 주거지 중심의 신도시다. 부산광역시의 부촌 중 한 곳이며, 가장 화려한 외관을 가지고 있다. 현재 마린시티의 야경은 미국 뉴욕이나 홍콩, 일본 도쿄, 중국 상하이에 준하는 한국 최고의 마천루 뷰로 자리 잡고 있다. 해운대 해수욕장이 근접해 있고 주변 경치와 편의 시설이 잘 갖추어져 국민명소가 됐다.

누리마루 APEC 하우스
누리마루는 아름다운 동백섬에 위치해 있으며, 2005년 11월 18∼19일에 열린 제13차 APEC 정상회담 회의장으로 사용됐던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누리마루 APEC하우스 명칭은 순수 우리말인 누리(세상, 세계), 마루(정상, 꼭대기)와 APEC회의장을 상징하는 APEC하우스를 조합한 것이다. “세계정상들이 모여 APEC회의를 하는 집”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울창한 동백나무와 송림으로 둘러싸인 자연경관과 함께 잘 어우러져 해운대의 관광명소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