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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의 권위, 그리고 자신감

Authority and confidence

올해 느닷없이 하얏트 호텔 창업자가족이 만든 <프리츠커>상이 논란의 주제어가 됐다. 프리츠커 상은 일종의 공로상처럼 건축사의 작품과 철학을 존중해서 인정해주는 개념이다. 통상의 경쟁처럼 올해의 작품 같은 개념으로 상을 주기 보다는 노벨상처럼 건축사의 건축 철학과 비전, 그리고 작품을 평가해서 준다. 묵묵히 자기 자리에서 일을 하는 건축사들도 많지만, 상이란 것이 그렇듯 왠지 받으면 좋은 것 아니겠는가?
다만, 행정부 공무원들의 발상은 이런 의미와 내용을 차치하고 100미터 달리기해서 이기고 지는 듯한 개념으로 이해하고 정책을 언급해 논란이 되었던 것이다. 그 저변에는 여전히 산업 후진국의 발상이 자리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소위 ‘선진사례 견학’같은 사고가 저변에 있다. 세계적 건축사사무소에 파견을 보내서 선진건축기법을 익힌다는 발상. 참! 70년대스럽다.
그런데 이렇게 웃고 비아냥거리기엔 뭔가 아쉽다. 왜냐면 이런 사고가 몇몇 행정직 공무원의 발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많은 사람들은 우리 스스로의 능력을 과소 평가하고, 자기를 기준으로 한국 건축계를 자기비하식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한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의 능력은 그렇게 뒤떨어지지 않는다. 싱가포르의 많은 고층 건축이나 고급 호텔들의 시공사가 국내 건설사인 경우도 많고, 실제 엔지니어적인 현장 설계도면을 작성하는 노하우도 많다. 불가사의해 보이는 아부다비에 있는 장누벨 설계의 루브르 박물관도 국내 굴지의 건설사 설계팀이 BIM을 써가면서 완성했다. 선진 사례 견학을 통해 배울 것은 이미 우리나라 엔지니어 수준에서 상당히 접근되어 손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문제는 아이디어를 구체화시키는 건축의 철학과 비전, 그리고 가치의 실현이다. 과거에 비해 많이 좋아졌다 하지만, 아이디어를 인정해주는 국내 건축 풍토가 여전히 부족하다. 여전히 무시당하고 있다. 1% 건축사던, 30% 수준의 건축사던 공통적으로 토로하는 아쉬움은 창작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건축사에 대한 존중이 없는 사회라는 점이다. 건축사의 자질이 영향을 준다고 하지만, 건축에 대한 존중은 별개의 영역이다. 건축사들이 존중받지 못하는 것은 창작을 인정하지 않는 환경 때문이다. 그런 환경에서 자기 철학과 비전, 가치를 가지고 자신감 있게 발언하기 정말 어렵다.
이렇게 힘겨운 풍토에서도 조금씩 우리나라 건축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번 한국건축문화대상의 수상작들을 보면, 조금씩 자기 발언을 드러낸 작품들이 보여진다. 고유의 정체성과 건축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반영된 결과물들이다. 적당히 아는 사람 상주는 개념으로는 상의 권위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조금씩 발전되고 있는 한국건축문화대상의 운영과 심사는 정말 중요하다.
2019년 한국건축문화대상의 수상작들은 이젠 자신감 있게 발언해도 될 듯하다. 이런 식이라면 프리츠커 상이 부럽지 않을 듯 하기 때문이다.

 

글. 홍성용 Hong, Sungyong 본지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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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란델부르크문과 도이치돔

Brandenburger Tor and Deutscher Dom

베를린의 브란델부르크 문은 근대 독일 역사 속에 영광과 치욕, 화합의 상징이다. 모든 도시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역사는 특정한 장소와 건축물에 흔적과 의미를 남긴다. 프로이센이 유럽의 초강대국으로 성장하는 힘의 상징인 문이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1791년에 완공되었고, 후에 정복자 히틀러의 침략전쟁인 2차대전 패전 후 동서 베를린의 분단의 상징이 된다. 독일 통일이 되면서 이 문은 독일 통일의 역사적 의미를 가지게 된다.
브란델부르크 문에서 동남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독일 신교 교회로 건설된 도이처돔과 프렌치돔이라고 불리는 두개의 돔 교회가 있다. 잔다르망 시장 광장의 중앙에는 콘체르트하우스가 있고 두 교회가 양쪽에 위치한다. 프랑스의 루이14세가 카톨릭을 옹호하면서 개신교도인 위그노파들과 유태인이 독일로 이주하면서 생긴 교회들이다. 바로크 양식 돔의 모양이 쌍둥이 건물처럼 유사하다. 지금은 프렌치돔은 위그노 박물관으로, 도이처돔은 역사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고 한다.

 

글. 이관직 Lee, Kwanjick (주)비에스디자인 건축사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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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내가 프리츠커 상을 타지 못한 이유

건축담론

편집국장 註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건축상이 존재한다. 아쉽게도 사회적 권위와 명성을 확보한 건축상의 존재는 자신할 수 없다. 국전이라는 타이틀로 진행되어 왔던 과거 건축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정부각 부처가 담당하는 건축상도 우후죽순이다. 문화체육관광부나 국토교통부에 이어, 전국 지방자치단체들에서 부여하는 건축상도 수없이 많다.
이렇게 많다 보니, 우리나라를 대표할 건축상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정부에서는 우리나라 건축 수준을 높이는 방법으로 해외 유수의 건축사사무소에 파견지원을 하면서 프리츠커 상을 언급했다. 매우 투박한 사고방식이다. 차라리 ‘로마의 미국학술회(American Academu in Rome)’나 ‘로즈 장학금(RRhodes Scholaship)’ 같은 제도를 언급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이런 개념과 유사한 것은 재미건축사인 김태수씨가 주는 ‘김태수장학 TS Kim’ 상이 있어서 매년 시행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프리츠커 상보다 중요한 것은 건축을 대하는 사회적 태도다. 사회적 태도와 수용하는 능력이 커지지 않으면 결코 프리츠커 상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공공건축이어서 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좋은 설계를 해야 상을 받는 사실에 직시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공공건축 중 좋은 작품으로 평가 받는 대상들을 보면 그나마 건축 완성도에 무게중심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우리 스스로도 답을 알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건축 완성도 따위는” 관심 없고, 그 용도의 건물을 짓는 것에 여전히 무게중심을 두는 우리 사회의 인식이다. 설계비를 줄여야 할 경비나 비용으로 생각하는 발주처 앞에서 과연 후대의 유산이 될 도시를 남겨줄 수 있을까?
이런 공감대 차원에서 이번 건축 담론으로 다양한 건축계 인사들에게 의견을 받았다.

 

01 Why I didn’t win the Pritzker Architecture Prize

어이없는 비웃음과 함께 “무슨 씨나락 까먹는 소리?”라며 잠깐 시선을 붙잡았다면 우선 제목 설정은 성공한 셈이다. 물론 우문에 대한 현답은 ‘너 자신을 알라’ ‘제 탓이지’ 그런데 과연 그러하기만 한 건가? 그렇다면 얼마 전 정부에서 발표한 넥스트 프리츠커 프로젝트(NPP)사업대로 세계의 유수 사무실에서 쪽집게 선진 설계기법을 배워오면 누구나 탈 수 있을까?
비약적이긴 하나 프리츠커를 핑계 삼아 우리의 현실을 파헤쳐 보자. 내가 프리츠커 상을 포기(?) 할 수밖에 없는 남 탓에 대하여…

아는 바와 같이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우는 프리츠커 상은 매년 “건축예술을 통해 재능과 비전, 책임의 뛰어난 결합을 보여주어 사람들과 건축 환경에 일관적이고 중요한 기여를 한 생존한 건축사”에게 수여하는 청동메달이다. 문장 가운데 공통분모라곤 ‘생존한’ 밖에 없는 나는 우선 열외이고, 가진 거라곤 세계 최고 수준 두뇌의 국민성 밖에 없는 대한민국의 우수한 건축사들은 이웃 일본이 8명을 배출해온 동안 어찌 단 한 번도 영예를 누리지 못했을까?

최근 이 상의 심사기준은 개개 ‘건축물’에서 건축의 ‘공공성’으로 바뀌고 있다. 건축의 영역이 도시와 사회적 역할로 확장되는 추세다. 2014년 반 시게루 이후부터 수상자들의 경향이 주로 공공건축 분야에서 탄생한다. 최근 들어 공공건축을 통한 사회적 기여부분을 그 무엇보다 높게 평가하고 있음이다. 올해의 수상자인 일본의 ‘이소자키 아라타’에 대한 심사평은 “그의 건축에서는 환경과 사회적 요구에 대한 섬세한 배려가 돋보인다”고 했다. 작년 수상자인 인도의 ‘발크리슈나 도시’ 역시 빈민들을 위한 아라냐 공동주택에서 보여준 “사회와 인간에 기여하겠다는 책임감, 사회·경제·환경을 고려한 지속가능한 건축”이 심사위원단의 수상 이유였다.

이쯤에서 우리 공공건축이 처한 현실을 한번 살펴보자. 민간건축은 말 할 것도 없고 아직까지 우리 공공건축 환경은 바탕부터 우리 건축사들의 역량을 키우기엔 너무나 열악하다. 기획이나 전략의 부재로 오로지 물량조달만이 정책목표인 상황에서 설계, 시공 등 부실한 생산주체시장으로 방치되어 온 게 지금까지의 현실이다. 이제까지 대다수 공공건축의 설계자 선정은 요행에 가까운 방식에서 가장 저렴한 설계비를 제시하는 가격입찰방식이었다. 설계비 1억 이상이면 공모방식으로 변경되는 등 최근 설계공모를 통한 선정방식으로 많이 전환되고 있긴 하나 여전히 많은 소규모 공공건축물들의 설계는 요행 끝에 얻은 가장 싼 낙찰가만의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나마 공모방식은 공평한 기회로 설계자를 선정하고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위한 최상의 방법인 듯도 하다. 그렇다면 많은 이들의 도전이 끊이질 않고 갈수록 활성화되어 다양한 팀에 의한 훌륭한 결과물들이 줄을 이어야함이 당연하다. 그러나 현실은 그러하지 못하다. 언제부턴가 공모 참가는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궤변이 지배적 분위기다. 이는 각자의 디자인능력, 기술력, 경제력, 기타 인력과 시간 등 많은 이유에서 아무나 덜컥 도전하기엔 무리일 수 있다는 논지로 언뜻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보다는 제출한 작품이 본질만으로 제대로 평가 받을 수 있을까에 대한 의아심, 빈약한 로비력, 심사위원의 자질, 발주처의 평가방법, 점수배분방식 등에 대한 의구심, 즉 심사의 공정성에 대한 불신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이 또한 지자체에 따라 공개적인 방식으로 설계자의 설명을 듣고, 토론을 거쳐 투명하게 진행하는 방식으로 바뀌어 가고 있긴 하나, 공정심사는 유사 이래 가장 풀기 어려운 숙제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그렇게 공모에 당선되어도 난관은 지금부터다. 정말 이해 할 수 없는 설계비 감액협상, 주는 만큼 결과물이 나오는 건 세상의 이치인걸, 답답한 노릇이다. 턱없이 부족한 설계기간, 무슨 심의는 그렇게 많으며 무슨 보고회는 또 그리도 많은지, 각종 심의위원들의 개성, 기관장의 기호에 따라 몇 바퀴 돌고 나면 당선안은 간데없고 생뚱맞은 낯선 물체로 돌변해 있다. 장담컨대, 그동안 원안대로만 지어져 왔다면 우리도 10개 정도의 청동메달을 가져오지는 않았을까?

망상임을 잘 알고 있다. 서두에서 밝혔듯, 프리츠커는 핑계일 뿐, 그 세계는 나와는 차원이 한참 다른 별 세계임을 잘 알고 있다. 그동안 해외토픽 중의 한 줄 정도였지 별 관심도 없었으며 지금도 마찬가지다. 어찌 지금까지의 두서없는 서술이 프리츠커를 타지 못한 이유가 될까. 빗대어 우리가 처한 현실에 대한 푸념을 늘어놓고 싶었다. 위의 서술 또한 소규모 공공건축에 대한 극히 일부분에 불과할 뿐이다. 유례없는 불경기 속에 간소화는커녕 갈수록 쌓여가는 각종 규제, 끝도 없는 중복심의, 기약 없는 허가기간, 원칙 없는 부실한 설계시장 등등 우리를 슬프게 하는 고단한 현실에 대한 긴 넋두리를 토하고 싶었던 것이다.

깊어가는 가을밤, 실없는 독백은 이쯤에서 접자.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서술이 길었다. 푸념, 넋두리만 하고 있을 것인가. 남 탓은 무슨, 스스로를 돌아보자. 건축사의 위상, 우리의 가치를 높이는 일, 한동안 남 탓만 해 왔었다. 여전히 설계사로 통용되는 이 사회를 향해 왜 우리를 제대로 알아주지 않느냐고. 이제라도 똘똘 뭉쳐, 규제는 풀어가고 잘못된 관행은 바로 잡아가자. 그리고 우리 스스로 우리의 가치를 높여 오히려 천직으로 알고 있는 건축설계, 이 일만으로도 가치 있게 해내고 제대로 대우받는 환경을 만들어 가자. 나름의 원칙과 자존감으로 브로커들을 단숨에 제압하고 덤핑은 영혼을 파는 행위와도 같다며 설계비 제값받기에 앞장서는 훌륭한 선배 건축사를 여럿 보아왔다. 항상 노력과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고 역량을 키워가는 훌륭한 후배 건축사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BTS가 세상을 휘어잡고 있는 시대에 머지않아 이들 또는 고매하신 분들 가운데 메달을 가져 오는 이가 당연 있을 것이다.

올해 이소자끼 선생이 87세, 작년 도시 선생이 91세, 그렇다면 너, 나, 우리도 속단은 이르겠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인생, 조금 더 두고 볼 일이다.

물론 ‘생존한’이 우선 필수다.

 

글. 조형장 Cho, Hyungjang 건축사사무소 메종 <부산광역시건축사회>

조형장 건축사사무소 메종

조형장은 동아대 건축과를 졸업, 한국해양대 해양공간건축학부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는 부산건축사회 미래전략위원장과 건축사신문 논설위원, 부산건축제 감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해양대 해양공간건축학부 겸임교수, 한국해양디자인기술연구원 부원장을 역임하고 있다. 최근 주요 해양건축 및 공공프로젝트로는 △부산항 거점형 마리나 항만개발계획 △부산 해양정책 플로팅아일랜드 리조트 개발계획 △감천문화마을 작가레지던시 △홍티예술촌 등이 있다.
jecr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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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사회적 소통을 바탕으로 한 건축문화

건축담론

편집국장 註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건축상이 존재한다. 아쉽게도 사회적 권위와 명성을 확보한 건축상의 존재는 자신할 수 없다. 국전이라는 타이틀로 진행되어 왔던 과거 건축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정부각 부처가 담당하는 건축상도 우후죽순이다. 문화체육관광부나 국토교통부에 이어, 전국 지방자치단체들에서 부여하는 건축상도 수없이 많다.
이렇게 많다 보니, 우리나라를 대표할 건축상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정부에서는 우리나라 건축 수준을 높이는 방법으로 해외 유수의 건축사사무소에 파견지원을 하면서 프리츠커 상을 언급했다. 매우 투박한 사고방식이다. 차라리 ‘로마의 미국학술회(American Academu in Rome)’나 ‘로즈 장학금(RRhodes Scholaship)’ 같은 제도를 언급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이런 개념과 유사한 것은 재미건축사인 김태수씨가 주는 ‘김태수장학 TS Kim’ 상이 있어서 매년 시행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프리츠커 상보다 중요한 것은 건축을 대하는 사회적 태도다. 사회적 태도와 수용하는 능력이 커지지 않으면 결코 프리츠커 상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공공건축이어서 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좋은 설계를 해야 상을 받는 사실에 직시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공공건축 중 좋은 작품으로 평가 받는 대상들을 보면 그나마 건축 완성도에 무게중심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우리 스스로도 답을 알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건축 완성도 따위는” 관심 없고, 그 용도의 건물을 짓는 것에 여전히 무게중심을 두는 우리 사회의 인식이다. 설계비를 줄여야 할 경비나 비용으로 생각하는 발주처 앞에서 과연 후대의 유산이 될 도시를 남겨줄 수 있을까?
이런 공감대 차원에서 이번 건축 담론으로 다양한 건축계 인사들에게 의견을 받았다.

 

02 Architectural culture based on social communication

국토교통부는 지난 5월 넥스트 프리츠커 프로젝트(이하 NPP사업)라는 해외연구 지원프로그램을 마련해 추진·시행한다고 밝혔다. 청년 건축인이 해외 유수의 설계사무소나 연구기관에서 선진 설계기법을 배울 기회를 제공하자는 취지로서 연수자로 선정되면 짧게는 3개월에서 길게는 12개월까지 1인당 최대 3000만원의 비용을 지원하는 내용이다. 국토부는 “우리나라도 프리츠커상을 받을 수 있는 세계적 건축사를 배출하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적극 노력할 것”이라며 “사업의 성과로 우리나라가 건축설계 선진국으로 도약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정작 청년 건축인을 적극 돕겠다는 취지로 기획한 정부의 지원책에 건축계의 반응은 싸늘하다 못해 차갑다. 우리나라 건축사들의 역량은 부족하니 정부가 나서서 ‘설계기법’을 배워오게 하겠다는 거냐는 냉소적 반응부터, 과외로 더 좋은 대학을 보내자는 것과 다름없는 웃픈 발상이라는 의견이 주를 이룬다.

건축에 대한 정부의 이해수준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자 건축을 해외 단기 연수쯤으로 성과를 낼 수 있는 기술 또는 제품으로 인식하는 건 아니냐는 비판 내지 의문일색이었다. 과연 선진설계기법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나 하며, 3개월에서 1년 사이에 습득될 수 있는 것인가?

공공 프로젝트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정부의 이러한 건축에 대한 이해와 인식은 결코 가볍게 볼 문제가 아니다. 어려운 환경에서 고군분투하는 많은 건축사들이 받아들이기엔 참으로 불편한 뉴스였던 것은 둘째 치고, 그만큼 반대로 국내 건축환경이 척박함을 여실히 드러낸 한국 건축계 현실의 한 단면이기 때문이다. 취지는 좋았으나, 그 방법에 있어서 심히 엇나간 정책이 아닐 수 없다.

근현대를 거치며 우리나라의 건축문화는 건축을 부동산, 재산증식의 절대적 수단, 경기부양의 수단으로만 여겨왔다. 결과로 우리나라 건축법에 규정된 건축의 정의는 “건축이란 건축물을 신축, 증축, 개축, 재축하거나 건축물을 이전하는 것을 말한다”고 규정되어 있으며, 건축을 문화가 아닌 건물 덩어리로 보는 시각에 갇혀 있다. 반면, 다양한 건축의 실험과 성취가 일어나고 있는 프랑스의 건축법에서 건축에 대한 정의를 보자. (참고로 프랑스의 건축은 우리나라처럼 국토교통부 산하가 아닌 문화부 산하이다.)

“건축은 문화의 표현이다. 건축적 창조성, 건축의 품격, 주변 환경과의 조화, 자연적/도시적 경관 및 문화 유산의 존중 등의 공공적 관심사다.”

우리나라는 건축의 가능성을 부동산으로만 간주하며 정의 내렸고, 프랑스는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존중하며 건축법을 제정한 것이다. 건축에 대한 정의부터 이렇게 다른 두 도시의 건축과 도시는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건축은 단순한 기능을 담는 조형적인 그릇만은 아니며 더더욱 제품이 아니다. 건축이라는 공간 안에는 물질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 담기는데 이것을 나는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성찰이라고 말하고 싶다. 건축이 사회의 성찰과 고민을 담아내는 창의적인 작업의 결과물이라는 이해의 공유가 절실하다.

사람들을 통해서, 사회와 건축에 대한 성찰과 고민이 보편적인 언어로 일상 안에서 편하게 소통되고 공유될 수 있을 때 사회가 성숙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가 건축에도 투영되어 한낱 물질에 지나지 않던 건축이, 건축이 아닌 다른 차원으로 승화된다. 이때의 건축은 인격체처럼 격(格)을 갖게 되며 마치 생명체처럼 시대를 거듭하며 새롭게 진화할 수 있는 것이다. 사회적 소통을 바탕으로 한 건축문화의 성숙이야말로 우리다움이며 우리의 정체성인 것이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진지한 성찰과 끊임없는 토론의 장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나는 그 가능성 중의 하나를 건축상(賞) 이라는 이벤트가 될 수 있다고 본다. 다행히 우리나라에는 오랜 기간 역사를 이어온 건축상들이 있고, 요즘은 각 지자체마다 건축상이 새로 만들어지는 추세다. 건축이 사회와 만나는 플랫폼으로서 건축상은 건축사가 건축을 통해 어떠한 이야기를 하려했는지 건축사의 언어가 아니라 일반인의 언어로 이야기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매년 연말이면 각종 영화제가 열리고 수상자, 작품들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듯이 말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건축상들은 얼핏 보면 그들만의 리그인 것은 아닌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그리고 이미 자리를 잡고 있는 건축상들뿐 아니라 우후죽순 생겨나는 지자체의 건축상들도 어느 날 갑자기 수상작들이 신문에 소개되고 언제 전시회가 열린다라는 일방적 소개에 그친다. 좀 더 일반인이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으로 변화를 시도해 보는 것은 어떨까? 후보 작품들도 공개하고 작품을 뽑는 과정에서부터 일반인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으면 더 좋다. 건축작품에 등수를 매긴다는 것은 좀 우스운 일이긴 하지만 적어도 이러한 건축상들이 도시의 이벤트로 자리 잡고 좋은 건축을 다룬 영화를 보듯,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하고 즐기고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들이 생긴다면 건축을 문화로 인식하는 뿌리도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건축이 건축 전공자들만의 영역에 갇힌다면 좋은 가치가 있다고 해도 담장 밖의 세상으로 그 존재와 의미를 알리기 어렵고 시대와 함께 진화할 수 있는 추진력을 얻기 어렵다. 건축 외의 시각으로도 건축을 활발하게 접하고 건축의 새로운 이야기로 만들어내고, 그 이야기가 건축상, 영화, 다큐멘터리, 책, SNS 등을 통해 일반인들과의 접점을 찾으면서 대중성을 얻는 것이 필요하다. 건축이 사회와 만나는 플랫폼이 다양해야 한다.

건축과 일반인의 소통이 이렇다면 국내와 국외의 소통은 어떨까. 일본 정부는 일찍부터 보다 큰 시각에서 건축을 지원했다. 일례로 일본 건축의 국제교류를 위해 자국 건축사들의 해외 전시를 재정적으로 지원했으며 이러한 전시에 해외의 유명인사들이 참여하도록 하여 영향력을 넓힐 수 있게 했다. 또한 출판을 통한 자국 건축사들의 해외소개를 강력하게 지원해왔다. 일본은 프리츠커상 원년부터 심사위원 자격으로 참여했었는데 이러한 배경에는 국제적 건축교류에 대한 일본정부의 지원이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넥스트 프리츠커 프로젝트는 참여 기회를 얻은 젊은 건축인들에게는 분명 좋은 경험이자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세계적인 건축사를 만들어내는 건축문화와 시스템은 우리 현실에 대한 제대로 된 진단과 고찰로부터 시작된다. 각종 정책들이 문제의 본질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 추진된다면 정책의 질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고, 국가적으로도 큰 낭비다.

 

글. 권재희 Kwon, Jaehee (주)목금토 건축사사무소 <경기도건축사회>

권재희 (주)목금토 건축사사무소

건축사 권재희는 홍익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에서 도시 및 지역계획을 전공했다. 현재 (주)목금토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서울시 함께 꿈 사업’ 디자인 디렉터로도 활동하고 있다. 2016년부터 도시의 커뮤니티 및 커뮤니티 교류센터를 연구 중에 있으며, 성남에서 우리동네 건축인 모임 협동조합 이사로 참여하며 건축, 도시, 커뮤니티 관련 설계를 진행하고 있다. 2019 한국건축문화대상 준공건축물부문 우수상을 수상했다. 주요 작업으로는 방배동 주택, 양평주택, 제천주택, 은평구 패시브주택, 운중동 패시브주택, 협소주택 ‘공감’, 인천 도화동 아파트 커뮤니티시설,빈집 프로젝트, 여성 크리에이티브랩 등이 있다.
mgt050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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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우리의 수상授賞<상을 줌>이 수상受賞<상을 받음>보다 가치있기를

건축담론

편집국장 註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건축상이 존재한다. 아쉽게도 사회적 권위와 명성을 확보한 건축상의 존재는 자신할 수 없다. 국전이라는 타이틀로 진행되어 왔던 과거 건축상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정부각 부처가 담당하는 건축상도 우후죽순이다. 문화체육관광부나 국토교통부에 이어, 전국 지방자치단체들에서 부여하는 건축상도 수없이 많다.
이렇게 많다 보니, 우리나라를 대표할 건축상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정부에서는 우리나라 건축 수준을 높이는 방법으로 해외 유수의 건축사사무소에 파견지원을 하면서 프리츠커 상을 언급했다. 매우 투박한 사고방식이다. 차라리 ‘로마의 미국학술회(American Academu in Rome)’나 ‘로즈 장학금(RRhodes Scholaship)’ 같은 제도를 언급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이런 개념과 유사한 것은 재미건축사인 김태수씨가 주는 ‘김태수장학 TS Kim’ 상이 있어서 매년 시행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프리츠커 상보다 중요한 것은 건축을 대하는 사회적 태도다. 사회적 태도와 수용하는 능력이 커지지 않으면 결코 프리츠커 상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공공건축이어서 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좋은 설계를 해야 상을 받는 사실에 직시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공공건축 중 좋은 작품으로 평가 받는 대상들을 보면 그나마 건축 완성도에 무게중심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우리 스스로도 답을 알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건축 완성도 따위는” 관심 없고, 그 용도의 건물을 짓는 것에 여전히 무게중심을 두는 우리 사회의 인식이다. 설계비를 줄여야 할 경비나 비용으로 생각하는 발주처 앞에서 과연 후대의 유산이 될 도시를 남겨줄 수 있을까?
이런 공감대 차원에서 이번 건축 담론으로 다양한 건축계 인사들에게 의견을 받았다.

 

03 Our conferring is hopefully worth more than award

사람의 수상욕심은 어렸을 때부터 각인된 DNA일 것이다. 체력이 국력이라고 한 시절의 올림픽에서의 상은 나라를 알렸고, BTS의 빌보드 상은 금메달보다 더 어렵다고들 한다. 국가대표급의 수상은 국민들을 웃게 만드는 효과만점의 한 방이다. 국토부의 프리츠커 프로젝트(NPP)는 건축계에서는 거센 반향이 있었지만, 준비해준다는 데 안 받는다는 느낌일 수도 있을 것이라 씁쓸하다. 상을 둘러싼 애증만 남을 뿐인가? 에둘러 가는 길도 한번 가볼 것인가?

1905년 독일 건축공무원 헤르만 뮤테지우스의 저서 ‘영국의 집’

미국의 American Academy in Rome은 1896년부터 매년 15명의 아티스트, 작가, 건축사들을 선발하여 로마에서 공부하는 기회를 주는 것으로, 건축에서는 스티븐 홀, 리차드 마이어, 찰스 무어 등의 미국인들이 1970년대에 젊었을 때 선정되어 로마에서 공부하며 일할 기회를 가져서 자신만의 건축어휘 형성에 빠른 기회를 가졌다. 세계적인 건축상의 수상에 직접적인 원인이 될 수는 없지만, 장학금과 같은 형식의 지원은 저변확대의 필요충분조건이다. 이런 후학양성방식의 방식 말고 건축의 역사에서 증명된 또 다른 방식의 저변확대를 생각할 수 있다. 19세기 말 독일의 건축공무원 헤르만 뮤테지우스(Herrmann Muthesius, 1861-1927)는 1896년에 런던에 독일대사관에 파견되어 그 후 6년 동안 영국의 수공예운동에서 비롯된 영국 중산층의 실용적인 주택에 대하여 직접 조사하고 연구하여서 1905년에 영국의 집(Das Englishe House)이라는 저서를 발간했다. 산업혁명 후 영국의 집들은 실용적이며 동시에 수공예적인 텍토닉의 전통을 이어가고 있었으며, 가장 근대적으로 발전된 주거문화를 만들고 있었다. 영국의 산업혁명의 리더십을 따르고자 했던 독일은 헤르만 뮤테지우스의 저작이 시의 적절했으며, 건축에서는 자체적으로 공방문화를 독일공작연맹(Werkbund)으로 탈바꿈하여 영국에 비해서는 늦었지만 오히려 더 영향력있는 근대건축문화를 이루게 됐다.

시대가 흘러 모든 가치가 변하는 현대문화에서 최근 프리츠커 상의 심사기준은 ‘건축의 우수성’에서 ‘건축의 공공성’으로 옮겨가고 있다. 올해 프리츠커 상 수상자인 이소자키 아라타의 건축은 “환경과 사회적 요구에 대한 섬세한 배려”라는 평을 받았으며, 2018년 수상자인 발크리슈나 도시 역시 “사회와 인간에 기여하겠다는 책임감, 사회·경제·환경을 고려한 지속가능한 건축”으로 공공성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건축은 건물이라는 한정되었던 범위를 넘어 도시, 사회, 인간, 환경 등으로 그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이처럼 건축은 이제 복합적인 물음이자 사회적 요구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열악한 건축 설계 환경과 제도적 지원, 그리고 경제위기와 경기불황을 소위 존버하고 있는 건축사들에게는 너무나 무겁고 가혹한 멍에가 아닐 수 없다.

Aranya Low Cost Housing 1989 Indore, India / 사진=DIVISARE
2018년 프리츠커 상 수상자인 발크리슈나 도시는 인도의 유구한 전통을 살린 건축과 도시 빈민들을 위한 집합주택 설계로 모범을 보였다. 사회와 인간에 기여하겠다는 책임감, 사회·경제·환경을 고려한 지속가능한 건축으로 공공성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건축사들이 처한 상황과는 무관하게 정부의 제안은 NPP사업이었고 이는 건축계의 거센 반향을 가져왔다. 최근의 프리츠커 수상자들은 공공성있는 건축을 통해 사회적 소임을 함으로써 탄생하지만 우리의 공공건축 환경은 턱없이 열악하다. 내년부터는 설계비 추정가격이 1억 원 이상인 공공건축물은 설계공모방식을 통해 최적의 설계안을 선정한다. 이는 도시공간의 공공성을 확보하고 디자인 향상을 통해 변화하는 건축문화의 패러다임에 발맞추기 위함이다. 우수한 안이 당선되더라도 실현 과정에서 각종 심의와 인증제도의 벽에 막히고 결국 재료와 시공 단계에서 싼값으로 저질 건축이 되기 십상이다. 즉, 상을 받을 후보자도 넉넉지 않은 환경을 만들어 놓고 왜 상을 타오지 못하느냐고 묻는다.
이러한 아이러니와 모순의 상황에서 공공건축의 실현과정을 개선하기 보다는 늘어나는 각종 건축상을 통해 달래기에 급급하다. 물론 상 자체는 젊은 건축사들이나 소규모 아틀리에에게 좋은 홍보 수단이자 보상이 된다. 최근 많은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공공건축가제도 역시 건축사들에게 비슷한 효과를 줄 것이다.
건축사들에게 공모전이나 다양한 건축상의 수상은 분명히 의미가 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상을 받았느냐 보다는 어떤 상을 받았는지이며, 궁극적으로는 그 상을 탄생시킨 사회의 건축문화의 저변이 얼마나 심도 있고 성숙했느냐는 사실일 것이다. 정부와 지자체, 관련 학계와 실무 전문가들은 보다 나은 건축과 도시의 공공성을 위하여 제도 개선에 힘쓰고 있으나 현실의 변화는 더디다.
상의 수가 많아서 많은 건축사들이 상을 받고 수면 위로 등장하는 것은 좋은 현상이며, 상을 받은 이들이 더욱 의욕 충만하게 건축과 도시의 성장에 일조할 것은 자명해 보인다. 그러나 그 바탕에는 그들이 제대로 역할 할 수 있는 공공 건축의 토대가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상은 그 자체로 가치와 영향력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프리츠커 상이 건축계의 노벨상이자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인식되는 것은 건축계가 나아가야하는 방향을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상이 갖는 무게는 그 상의 의미와 가치에서 나온다. 우리는 안다. 어떤 상이 수상했을 때 진정한 의미를 갖는지, 어떤 상이 그저 수상의 기쁨만을 주는지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수상授賞은 수상受賞보다 가치 있어야 한다.

 

글. 송하엽 Song, Hayub 중앙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 미국건축사

송하엽 중앙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건축학과 졸업 후 미시건대학교에서 건축학 석사과정, 펜실바니아대학에서 데이빗 레더배로우(David Leatherbarrow) 교수의 지도아래 ‘파사드 포셰: 마르셀 브로이어, 리처드 노이트라, 호세 루이 서트 건축에서 창-벽 기능의 표상(Facade-poche: Performative Representation of Thickened Window-Walls in the Works of Marcel Breuer, Richard Neutra, and Jose Luis Sert)’ 논문으로 건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필라델피아에서 건축사로 활동하며, 미술관, 청소년관, 공동주거 등을 설계했다. 2009년부터 중앙대학교 건축학부 교수로 디자인과 역사 및 이론을 가르치고 있으며, 건축과 도시, 환경의 공통영역을 다루는 건축, 도시, 공간환경 디자인 작업을 하고 있다.
hysong@ca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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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정책이 지향하는 가치와 목표는 공공성…정책 개혁 매달리는 근본 이유는 좋은 건축으로 우리 사회 삶의 방식 진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믿음 때문” _ 박인석 교수

“The value and goal that Architecture policy seeks is public interest… the reason why we take effort on Policy reformation is based on true belief in which our lives and society need to be advanced”

월간 건축사가 현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위원인 박인석 명지대학교 건축학부 교수를 만났다.
제5기 국가건축정책위원회는 작년 4월 출범해 어느덧 임기 종반으로 접어든다. 국건위가 추진해온 주요 과제들로는 ▲건축허가-심의 절차 개선 ▲설계공모 당선작에 대한 설계비 감액(수의시담) 폐지 ▲조달청, 교육청, LH 등 주요 발주기관의 건축설계공모 시행절차 정상화 ▲건축설계 가격입찰 배제 ▲공공주택 사업기획절차 개편 및 ‘도시-건축’ 통합설계 절차 마련 등이며, 이 모두 건축계가 오랜 시간 요구해 온 과제들이다. 특히 민간건축의 중요한 척도가 될 공공건축사업의 절차 등에 관한 사항을 규정한 ‘공공건축특별법안’이 지난 10월 30일 발의됐다. 건축설계자의 역할이 결정적인 건축공사의 특성에 맞춘 법제도 환경 구축을 위해 여러 법률적 조치들이 진행 중인데, 이 법은 우리 사회 건축의 근원적 혁신을 위한 건축공사 시행절차와 기준을 담는 통합 법률이다. 일반적으로 특별법이라 함은 그 목적에 따라 특별한 사람, 사항 등에 대하여 적용되는 법을 의미하는데, 특별법적 영역에 해당하는 법률관계에는 특별법이 일반법에 우선 적용된다.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박인석 교수는 ‘공공건축 설계생산 과정의 정상화’를 키워드로 설계공모, 건축설계의 가격입찰 문제, 주요 발주기관 혁신, 학교건축, 건축교육, ‘도시-건축’ 통합설계, 소규모 건축시장 정상화 등 여러 건축 관련 의제를 진단하고 의견을 냈다. 이는 건축과 집, 도시, 일자리에 관한 모든 쟁점을 다루며 각종 통계·법규·자료로 현실적 대안을 제시한 그의 저서 ‘건축이 바꾼다’의 발언과도 맞닿아 있다.

박인석 명지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_ 박인석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위원(명지대학교 건축학부 교수)이 지난 11월 14일 경기도 성남 소재 카페에서 <월간 건축사>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박인석 교수는 우리 건축발전을 저해하는 문제들의 공통점으로 ‘공공건축의 설계 관련 모든 법, 제도가 좋은 설계자를 선정한다’라는 목표에 투철하지 않은 것이라고 지적하며, “‘공공건축 설계생산 과정의 정상화’를 국가건축정책위원회의 최우선 과제로 삼고 있다”고 밝혔다.

Q 최근 교수님의 저서 ‘건축이 바꾼다’를 읽었습니다. 흔히들 건축에 대해 말할 때 통계 없이 이야기하는데, ‘건축이 바꾼다’는 주장의 근거가 구체적인 데이터를 인용해서 공감이 갔습니다. 책이 다룬 쟁점만큼이나 국가건축정책위원회가 다방면에서 폭넓은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1기 이래 국건위 활동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지만, 건축계에 필요한 중요한 일들을 해온 것은 사실입니다. 건축기본법을 만들었던 국건위 전신 ‘건설기술 건축문화 선진화 위원회’ 바통을 이어 가장 중요한 ‘건축서비스산업진흥법’을 만들어서, 설계공모가 의무화 되며 건축계가 나름 ‘더 나은 제도적 환경을 만들 수 있다’라는 비전을 비로소 갖게 됐습니다. 그전까지는 불평, 비관, 자조적 넋두리가 팽배할 뿐 아무 대책과 반향 없는 자폐적인 이야기뿐이었잖습니까. 이런저런 비판도 없지 않았지만, 건축서비스산업진흥법 등을 제정할 수 있었던 것은 국건위가 대통령 직속 자문기구라는 위상을 가진 조직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봅니다.

5기 국건위는 인적 구성, 위원장의 개인적 위상 및 정치적 영향력 등 여건이 상당히 좋습니다. 국건위는 정부기관들에게 ‘권고’하고 ‘자문’하는 절차를 통해 일을 하는데, 결국 대통령과 총리가 힘을 실어주고 기관들이 자문을 무겁게 받아들여야 힘을 발휘합니다. 국토교통부장관이 건축계에 우호적이고, 국무총리도 관심을 갖고 건축정책이 총리 주재 회의 안건으로 올라가는 등 힘을 받고 있는 것도 이런 여건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지금 국건위는 사실 건축계에서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하고 있어요. 의미있는 성과도 이미 내고 있죠.

 

Q 5기 국건위의 최우선 핵심과제는 무엇인가요?

공공건축이 기획되는 단계부터 설계가 발주되는 일련의 과정 전체를 정상화하는 것을 가장 큰 과제로 삼고 있습니다. 이른바 ‘공공건축 설계생산 과정의 정상화’입니다. 공공건축은 통계상 연면적 기준으로 우리 사회 건축생산의 10%를 차지합니다. 국가의 법과 제도로서 직접적으로 컨트롤할 수 있는 대상이기도 하지만, 90%를 차지하는 민간건축의 설계비 등 여러 기준의 잣대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한 정책수단으로 삼을 수 있고 정책효과도 바로 나올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수한 설계인력풀 육성과 민간의 건축수준을 리드하는 데도 중요한 정책 툴이 됩니다. 지금 우리 건축발전에 가장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 ▲턱없이 낮은 대가 ▲부실한 기획 ▲중소규모 건축물 설계의 가격입찰 ▲심사위원 선정 등 설계공모의 공정성과 불투명성 문제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이들 문제의 공통점을 딱 잘라 말하면 ‘공공건축의 설계 관련된 모든 법과 제도, 그리고 기준들이 좋은 설계자를 선정한다’라는 목표에 투철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냥 형식적으로 공정하고, 행정적으로 효율성을 좇을 뿐 좋은 설계자를 선정해서 좋은 설계를 생산하겠다는 목표가 분명치 않아요. 오히려 그걸 방해하는 방식으로 제도가 형성돼 있고, 좋은 설계자를 선정하는데 관심이 없어요. 아무렇게나 설계자를 선정해놓고 엉뚱하게 교수들에게 자문하는 것으로 해결하려는 이상한 버릇·관습들을 갖고 있습니다. 좋은 설계자를 선정하는 시스템이 충분치 않다는 게 문제의 핵심입니다. 모든 과제는 바로 여기에 집중돼 있습니다.

법과 제도를 좋은 설계자를 선정하는 시스템으로 바꿔야한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좋은 설계자를 많이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합니다. 옛날에는 몇몇 분들에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지금은 경제규모에 걸맞게 좋은 설계자들이 굉장히 많아졌죠. 문제는 그 좋은 설계인력을 실제 설계업무에 매칭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우수한 설계인력은 민간부문에서 시장논리로 경쟁하고 있을 뿐 정작 우수한 설계자를 육성하는데 역할을 해야 할 공공부문에서는 오히려 가격입찰 같은 후진적 제도로 국가예산을 투입해 날림시장, 나쁜시장을 육성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를 정상화하는데 국건위 업무의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건축설계를 건설, 토목 취급한다는 것도 결국 좋은 설계자를 선정하는데 아무 관심이 없는 문제로 귀결됩니다. 이 역시 국건위 법제도 개선 과제의 핵심입니다.

 

Q 국건위 출범 후의 성과를 간략히 말씀해주신다면.

첫째 충실한 건축기획이 이뤄지도록 건축기획업무를 의무화한 것입니다.
전국의 229개 기초 지자체, LH를 비롯한 몇십 개의 공공기관들은 전부 독자적인 발주기관입니다. 각자 알아서 잘하면 좋겠지만 이건 기대하기 힘든 일이죠. 일단 공공발주기관 모든 주체가 건축기획이라는 업무를 공식적으로 하도록 하자는 게 가장 중요한 과제라 봤습니다. 건축서비스산업진흥법 개정으로 올해 12월 19일부터 모든 공공건축은 기획업무를 반드시 하도록 의무화 됐습니다. 아마 담당공무원들이 스스로 직접 할 수 없으면 용역발주를 할 텐데, 공공건축 기획업무가 중요한 독립된 업무로서 수행될 법률적인 근거가 확보된 셈이죠. 그리고 설계비 오천만원 이상인 사업은 공공건축심의위원회를 두어서 심의를 받습니다. 심의얘기만 나오면 또 심의냐 하시겠지만, 이 심의는 설계자를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라 공무원의 기획행위를 심의한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기획을 어떻게 해놨느냐, 설계발주 어떻게 하려고 하냐 등을 심의합니다. 사이트를 어디에 정해서 어떤 프로그램으로 할 것이고, 이 정도 면적과 공사비가 적정한가를 살펴봅니다. 가령 “이렇게 중요한 설계를 그냥 협상에 의한 계약으로 하겠다고?” “설계공모로 하세요.” 뭐 이런 걸 하도록 하는 심의를 받는 거죠.

사실 지금 공공건축설계과정부터 공사과정 전체가 토목 법률인 ‘건설기술 진흥법’에 의해 관리를 받습니다. 그래서 생기는 웃지 못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건설기술심의를 위해 지방정부는 건설기술심의위원회를 두게 돼 있고, LH같은 공공기관들은 건설기술자문위원회를 두게 돼 있어요. 그 곳에서 설계 심의와 자문을 받는데 여기에 토목하는 사람들이 선정한 건축분과심의위원회에서 건축설계를 심의합니다. 그런데 건축위원회 심의보다 더 비합리적인 심의 사례가 적지않다고 합니다. 지금 공공건축심의위원회를 만든 건 그걸 대체하려고 하는 겁니다. 물론 모든 지자체와 모든 공공기관의 심의위원회가 처음부터 문제 없이 작동하기는 어렵겠지요. 하지만 이런 틀을 만들어 놓으면 모범사례들이 나올 겁니다. 서울시, 영주시 이외에 모델로 삼을 만한 곳이 더 생겨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례가 확산되어야 합니다. 그걸 기대하고 법적 틀을 만든 겁니다.

둘째는 설계공모 개선입니다. 이미 2014년부터 설계공모가 의무화 됐는데, 건축서비스산업진흥법 시행령 개정으로 내년부터 의무대상 금액이 설계비 1억원 이상으로 확대됩니다. 아직까지 설계비 2.1억원 이상 설계공모 물량이 얼마나 되는지, 1억원 이상으로 확대하면 얼마나 늘어나는 지 통계가 없습니다. 상시적으로 집계하는 시스템이 없고, 조사자체를 안 하고 있는데, 참 웃지 못할 일이죠. 공공건축이 설계비 규모별로 몇 건이나 발주되고, 공모·협상에 의한 계약·가격입찰별로 얼마나 되는지를 집계하지 않고 있습니다. 통계를 내지 않는다는 건 관심도 없고, 정책대상이 아니라는 얘기 아닙니까. 국건위가 권고를 해 비로소 통계시스템 구축이 국토부 과제로 잡혔습니다.
통계가 없는 까닭에 이곳 저곳 데이터를 수집해 집계를 내봤는데, 설계비 2.1억원 이상이 450건으로 공공건축 전체의 4.5%정도 됩니다. 1억원 이상으로 확대하면 400∼500건이 늘어납니다.

나머지 8000∼9000개는 여전히 사각지대에 있다는 얘기이니 아직 할 일이 많은 거죠. 또 설계공모 당선작에 대해 수의시담 금지를 권고해서, 몇 달 전 기재부에서 예규를 고쳐 행안부도 준수하며 수의시담은 이제 거의 없어진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 다음 설계공모 운영지침을 대폭 바꿔서 개정했습니다. 심사위원 구성을 건축설계 이외 전문가나 발주기관 내부 인원 다 합해서 30%를 초과할 수 없게 확 줄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LH, 조달청, 교육청에서 저항이 많았어요.

셋째는 각종 지역사업에 포함된 건축물 설계 문제입니다. 농림축산식품부는 농산어촌 종합개발사업, 국토부는 도시재생사업, 해수부는 어촌 뉴딜사업 등 부처별로 지역지원사업들을 시행 하고 있는데, 이들 사업의 기본계획이 엔지니어링업체에게 발주됩니다. 그런데 이들 사업 안에는 마을회관, 선착장 등 크고 작은 건축물들이 포함되기 마련인데 엔지니어링업체가 건축설계를 하지 못하니 하도급을 줍니다. 가격입찰보다도 못한 설계발주가 전국에서 벌어져 온 것이지요. 이것들을 모두 독자적인 건축사업으로서 건축서비스산업진흥법에 따라서 발주하도록 했습니다. 국토교통부, 농림축산식품부, 해양수산부가 100% 따르겠다고 한 상황이고, 설계발주체제를 조금씩 바꿔나가고 있습니다. 어촌마을 선착장에 마을 첫인상을 망치는 건물이 들어서는 그런 일도 좀 나아질 거라 기대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LH를 혁신하는 것입니다. 신도시 등 새로운 개발사업에서 건축물과 공간환경에 대한 개념 없이 토지이용계획부터 한 다음 블록별로 건축설계를 하도록 하는 계획방식, 결국 관행적인 아파트단지만 반복될 수밖에 없는 이런 계획방식을 언제까지 지켜만 볼거냐는 문제의식을 갖고 바꾸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 3기 신도시를 비롯한 수도권 공공주택지구에서는 새로운 계획절차를 적용하는 것을 추진하고 있는데, 그 첫 케이스로 지난 11월 12일 과천지구 도시건축 통합계획 설계공모 공고가 났습니다. 도시 기획단계에서부터 도시, 건축, 시설물을 아우르는 입체적 도시 마스터플랜을 세우고 이를 기반으로 도시계획과 건축계획을 수립하는 방식입니다. 2차원 도시계획을 세운 뒤 건축설계를 진행했던 기존 택지개발 방식과는 달리 도시와 건축이 조화된 도시공간을 구현하는 게 목적입니다. 획일화되고 단절된 주거단지에서 열린 주거지, 개인 중심의 공간에서 공동체 중심의 공간으로 도시를 바꾸자는 거죠. 의도대로 된다면 엄청난 변화가 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도시구조 조성의 새로운 모델이 생기는 거죠.

학교건축에도 손을 대고 있는데 솔직히 참 어려운 분야입니다. 자치 지대라서 교육감이 적극적으로 나와 주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LH 등 다른 기관은 최고 경영자와 공감하면 어느 정도까지는 해볼 수 있는데, 교육청은 지자체와도 독립돼 있고, 난공불락입니다. 현재의 학교건축 설계공모는 아는 사람 아니면 못 들어가는 굉장히 비정상적인 상황이죠. 몇 년 전부터 건축자문관 제도를 도입한 서울시 교육청이 이미 선두주자로 나선 상황인데, 다른 교육청들이 더 활발히 움직여줬으면 좋겠습니다. 국건위가 교육부에 우선 시범적으로 새로운 설계공모 절차를 적용해보라고 권고하여, 교육부가 특수고등학교 2개교를 국제설계공모 등으로 추진하는 것으로 신축 학교 설계공모제도 정상화 작업을 스타트했습니다.

 

Q 교육청의 경우 건축법의 치외법권 지역으로 어려움이 많았을 텐데요.

맞아요. 조달청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울시에 하듯이 설계공모 운영위원회를 만들어 설계지침 리뷰 및 심사위원 구성을 하라고 권고하고는 있는데, 계속 난색을 표합니다.

설계공모 관련해서는 올해 안으로 세움터에 국내 공공건축 설계공모 포털이 생길 겁니다. 설계공모 정보 제공보다는 누구나 들어가서 어떤 심사위원이 무슨 심사평으로 어떻게 심사를 했는지 볼 수 있게 하자는 취지입니다. 심사풍토를 개선해 자체정화 시스템이 원활하게 작동하게끔 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 심사비리 문제는 발주청에서 전관예우 한다는 말도 있고, 로비하는 업체도 있겠지만, 결국 심사위원의 문제 아닙니까.

자체정화 시스템이 작동하려면 심사위원들에 대한 평판이 조성되고 폭넓게 공유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설계공모에 직접 관계하는 사람들 이외에는 심사위원들에 대한 평판이 충분히 공유되고 있지 않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기관별로 공개하는 심사결과를 살펴보기가 힘들어서입니다. 일부러 찾아보려면 너무 힘들잖아요. 그래서 세움터에 마우스 클릭 한 번만 하면 심사평 등을 다 볼 수 있게 해서 어떤 심사위원이 어떤 심사평으로 심사결과를 내는지 그걸 다 볼 수 있게 될 겁니다. 심사위원들에 대한 크리틱이 생길 수 있게 되는 거죠. 그래야 문제 있는 심사위원은 배제하는 분위기가 된다고 봐요. 자율적인 윤리가 작동케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많은 사람들이 모든 내용을 소상히 알게 하는 게 중요합니다.

 

Q 누구나 볼 수 있게 기록을 공개하는 것은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모든 심사위원들이 의무적으로 자기 크리틱을 쓰게 하는 것은 암묵적인 스트레스가 될 것 같습니다.

서울시가 모든 공공건축 공모에 대한 심사결과 공개를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심사결과 공개에 방점이 찍힌 포털이 만들어지는 셈이죠. 이런 식으로 심사위원의 책무와 윤리의식을 강화하는 것만이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 총괄건축가, 공공건축가가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설계공모와 심사위원 추천 절차에 참여하거나, 따로 운영위원회를 만들어 심사위원을 추천하는 것도 방법일 수 있습니다.

 

Q 국건위의 존재가 의미 있다는 내용에는 공감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성과라는 것은 기수에 따라 차이가 있을 것 같은데요. 혹시 성과에 대한 평가를 객관적으로 수치화할 수 있는 제도나 구조적인 시스템에 대해 다루는 행정조직이 있습니까?

있을 수가 없습니다. 가령 법적 행정조직이라면 고유의 업무나 국가적으로 배당된 업무, 예산이 배정되기 때문에 그 업무를 훌륭하게 처리하면 잘 했다고 평가받습니다. 하지만 국건위의 업무는 자체적으로 판단하고 집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문과 권고를 통해 간접적으로 처리됩니다. 이번처럼 국토부에서 법을 개정하고 특별법을 발의하게 된 것도 전부 자문 형식을 통해 이뤄졌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어촌 사업 역시 관련 부서에서 국건위 권고를 무겁게 받아들여줬기 때문에 성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저희 권고가 총리회의의 안건으로 올라갔기 때문에 총리께서 그 내용을 접할 수 있었고, 이것이 국토부장관에게 전달되어 관련된 업무들이 아래에 지시된 것입니다. 관련 부처에서 적극적으로 관심을 가져주면 국건위 자문이 힘을 받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실무자들이 자문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국건위 업무 성과는 다른 부처들이 대통령직속자문위원회의 권고나 자문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느냐에 달렸습니다. 국건위는 ‘이걸 개선하라, 이런 새로운 제도를 채택하라, 이런 법을 만들어라’와 같은 권고를 통해서 성과를 낼 수밖에 없습니다.

Q 네. 그렇지만 자문이라는 것을 반드시 지켜야한다, 이런 법은 없지 않습니까? 듣기에 따라서는 업무 성과가 운에 좌우될 가능성이 큰 것처럼 보입니다. 이러한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서는 자문을 통해 업무를 추진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제도가 필요할 것 같은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현재 자문을 통해 업무추진을 보장하는 법은 없습니다. 또한 이를 제도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면 저는 그럴 수 없다고 봅니다. 정치가와 협력관계라는 파트너십을 가지고 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려하신 대로 운에 의해 성과가 좌우되거나 예상하지 못한 위험한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도 물론 있습니다. 만약 사익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이 총괄건축가가 된다면 어떻게 될까, 나쁜 정치가가 나쁜 파트너를 데리고 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러한 우려는 항상 있습니다. 모두가 순수하지는 않으니까요.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도 꽤 섞여있을 것입니다. 윤리적 부담감이 상당한 총괄건축가에 비하면 공공건축가 쪽이 그런 부분에 더 취약할 거예요.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인데 모두 완벽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부 실패나 미진함이 있더라도 개선효과가 뚜렷한 사례가 적지 않을 것이고 그러한 효과가 확산되는 것을 비전으로 삼고 추진하는 거지요.
사실 공공건축가제도를 운영하려면 업무를 체계적으로 지원하는 조직이 있어야 하는데 아직까지는 임명해놓고 그 다음이 없습니다. 전국적으로 다 그래요. 서울은 그래도 도시공간개선단이라는 공무원 조직을 만들어서 그때그때 대응하고 있습니다만, 지방은 대부분 공무파트너도 없습니다. 그들 없이 과연 업무가 가능할까 싶습니다. 아직 보강해야 할 과제가 많은 거죠.

Q 소규모 공공건축 중에 정부에서 최근 생활SOC 지원 이야기를 한 적 있습니다. 관광진흥법에 보면 미술관, 박물관 같은 경우 보증해서 정책자금을 해줄 수 있는 루트가 있는데, 문의 결과 문화시설 보증 지원은 단 한 건도 없다고 하더군요. 미술관 등은 개인이 하고 싶을 경우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 생각되는데 이런 정책지원을 건축정책 측면에서 고민해볼 수 없는지 궁금합니다. 또 건축학과 5년제가 시행되고, 올해를 마지막으로 건축사예비시험이 폐지됩니다. 이후 많은 건축 관련 대학들은 별다른 준비가 없었는데요.

미술관 등의 문화시설을 민간 지원을 통해 확충하는 방안은 충분히 가능성 있다고 여겨집니다. 문화시설 뿐 아니라 민간을 지원하는 방식으로 확충할 수 있는 생활SOC들이 있을 수 있는 중요한 내용이므로 어떤 식으로든 검토하도록 해보겠습니다.
건축교육과 건축사 제도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직 우리 사회에 충분히 논의가 되어있지 않은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국건위에서도 충분히 논의되지 못한 상태라 순전히 개인적인 견해로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로스쿨이나 의과대학에서 대학의 인원 수급을 조절하는 것이 과연 사회적으로 정의로운 것인지에 관해 의문을 갖고 있습니다. 업계 내부적으로는 효율을 위한 것이지만, 이것이 사회정의 측면에서 과연 바람직한 일인가 하는 점에서는 논의가 필요합니다. 국민의 입장에서는 양질의 서비스가 염가로 제공되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서비스 대가가 너무 낮아서 전문직으로서 생활이 힘들다는 것은 다른 차원에서 논의될 일이지 국민 서비스 수준을 통제함으로써 확보하는 것이 옳은지는 의문입니다. 사회적인 공감과 합의가 뒤따라야 풀리는 문제로,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여겨집니다.
왜 이런 전문 직종에 관해서만 경쟁 완화를 허용하느냐, 다른 사람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 살고 있는데 전문 직종에서만 경쟁 완화가 필요한 것처럼 얘기되는 것은 또 하나의 문제입니다. 이도 정의롭지 않은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건축교육 학제 등의 문제는 준비가 미흡한 부분이 있는 게 사실인데, 원론적으로 그간 무엇을 하였는가 하는 점에서 책임이 가장 큰 사람들은 교수들일 겁니다. 그러나 다르게 보면 학생들에게 길이 없는 것은 아니거든요. 4년제를 나온 학생들은 2년제 대학원을 가면 됩니다. 현재 건축전문대학원이 하나(건국대)뿐으로 줄었는데, 입학할 학생이 없기 때문에 문을 닫은 거죠. 하지만 입학할 학생들이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다시 생기지 않을까요.
5년제가 아닌 학생들을 위해 실무수련기간을 좀 더 인정해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나오고 있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의 스탠다드를 실무로 대체하는 건 원론적으로 좋지 않은 방법입니다. 교육과 실무는 별개로 봐야 합니다. 교육은 5, 2+3, 4+2 등으로 풀면 됩니다. 여러 의견과 논의가 나오고 합의되는 과정이 필요하겠죠. 개인적으로는 현재 원칙적으로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Q 화제를 전환해서 교수님이 책에 언급하신 소규모 건축물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소규모 건축물 시장을 성장시키기 대해서 국가가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소규모 건축물은 일단 통계가 없어요. 그런 점에서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정확한 통계는 아니지만 한 해에 착공되는 건축물 중 30% 정도가 소규모 건축물로 추산 됩니다. 소규모를 공사비 10억 원 이하로 잡으면 27~28%, 50억 이하라고 하면 40%예요. 건수로 보면, 총 건축물 중 90% 정도를 소규모 건축물로 볼 수 있습니다. 건축생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에서도 무시 못할 큰 비중이지요.
소규모 건축물의 발전은 우리 건축의 비전하고도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학생들에게 항상 그런 얘기를 해요. 이제 대규모 개발 시대는 끝날 것이라고.
앞으로 우리의 일거리는 소규모 건축물이 밀집한 기성시가지 관리가 될 것입니다. 향후에는 골목을 정비하고 관리하는 세심한 도시설계 업무가 점점 중요해 질 것이고 이것이 건축사의 전문적인 업무로 자리 잡을 것입니다. 아마 10년 이내에 판도가 바뀔 겁니다. 지금부터라도 소규모 건축 설계시장을 정상화시켜야 이러한 흐름에 대비할 수 있습니다.

 

Q 소규모 건축 시장을 정상화시키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되겠군요.

네. 당장 떠오르는 방법은 공공건축이 선도하여 현재 대부분 하급시장에 속한 소규모 건축 시장들을 견실한 시장으로 끌어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공공건축만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소규모 건축을 민간에서 정상화시키는 것이 필요한데, 이것은 간단히 해결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중장기적으로 차근차근 추진해야 합니다. 여기에 주택성능보증 제도나 우량주택 인정제도와 같이 사업자들을 육성해주는 정책들을 마련하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요약하자면, 전망은 긍정적입니다. 소규모 시장이 점점 늘어나면서 퀄리티에 신경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만들어질 것으로 전망되고, 그에 따라 섬세한 도시설계를 위해 건축사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시대가 곧 올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라도 소규모 건축설계 시장을 정상화할 수 있는 제도 마련이 제일 중요하고, 가장 시급히 해야 할 일입니다. 또, 소규모 공공건축을 위한 기획업무나 설계비 1억 원 이하 설계발주를 정상화하는 일들이 빨리 제도적으로 정비돼야 합니다. 공공건축마저 헤매고 있는 처지에 민간건축이 정상화되길 기대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대규모 공공건축이나 큰 규모의 민간 건축은 나름대로 절차적 기준이 마련돼 있습니다. 다만 그 퀄리티와 과정상의 부도덕한 행위가 문제일 뿐이죠. 대부분 문제는 소규모 공공건축에 있습니다. 소규모 건축의 가격입찰 같은 불필요하고 후진적인 상황을 벗어나는 게 시급합니다.

소규모 건축시장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민간부문 설계비 문제도, 우선적인 과제는 공공건축의 설계대가 정상화입니다. 설계대가 수준 자체도 문제지만 현재의 대가기준을 준수하도록 하는 것이 보다 먼저입니다. 가령 리모델링 설계에서 요율을 1.5배로 한다거나 추가업무에 대한 대가 산정을 명확하게 하기만 해도 실제 설계비가 상당 수준 높아질 것입니다. 이를 견인하기 위해서 세부업무별로 설계비가 명시된 표준계약서를 만들고 그 사용을 의무화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계약서에 대가가 명시된 업무만 설계자가 수행할 업무범위로 명확히 함으로써 추가업무에 대한 공공의 대가 지급 책임을 명확히 하자는 거지요.
민간의 설계비는 공공건축을 보고 영향을 받아서 일정부분 따라올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공공건축에서 적정 설계비로 정상적으로 설계업무가 추진되는 시장을 만드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 일을 꾸준히 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소규모 공공건축에 좋은 설계자를 매치해 좋은 건축물이 설계되도록 해야 합니다.
좋은 공공건축물로 얻을 수 있는 효과 중에 하나는 주변 민간건축물을 자극할 수 있다는 점이에요. 지금 민간 주택이나 상업건물을 작지만 예쁘게 지으려는 수요가 늘고 있어 좋은 타이밍이라고 여겨집니다. 또 하나는, 좋은 설계자의 사회를 육성시키는 효과입니다. 결과물을 보고 찾아오는 민간 클라이언트를 촉발할 수 있습니다. 우리 경제규모가 커진 만큼 소규모 민간건축에서도 좋은 건축이 금방 늘어날 것입니다. 현재까지는 공공건축이 그 역할을 하지 못했는데, 마음먹고 법을 바꾼다면 금방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요. 공공건축이 촉매역할을 해서 좋은 건축을, 좋은 설계자들과 함께 만들어내면 민간의 시장도 서서히 좋아질 것입니다. 공공건축이 그 바로미터이자 촉매가 될 수 있고, 따라서 소규모 공공건축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Q 정책적 대안들을 제시하시면서 건축계 전반의 흐름을 만들고 계시는데요. 마지막으로 바람직한 우리나라의 건축, 그리고 건축계, 더 나아가서 건축과 함께하는 우리 국민들에게 바라시는 것이 있으시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건축설계 발주제도 혁신이든 소규모 공공건축 혁신이든 총괄건축가제도 확산이든, 모든 건축정책의 개혁에 매달리는 근본 이유는 좋은 건축을 통해 우리 사회의 삶의 방식을 진전시킬 수 있고 그래야 한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건축설계업무 여건을 호전시킨다거나 건축인들의 대가수준 향상 자체가 목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는 국민들의 지지를 받을 수도 없을 겁니다.
건축정책이 지향하는 가치와 목표가 우리사회와 도시의 삶을 개선한다는 공공적인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흔히들 건축사들의 처우가 상대적으로 좋은 선진국들과 비교하곤 하는데 ‘건축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처음부터 건축을 대우해 준 나라는 없다는 것이죠. 그만큼 그 사회의 건축인들이 자신의 사회와 시민들을 위한 공공적 역할에 힘써왔기 때문에 그런 대우를 받는 것입니다. 시민들이 그 역할과 가치를 인정해주었기 때문이지요. 이 점을 잊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대담 홍성용 본지 편집국장, 글·사진 장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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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 仙境과 요산요수(樂山樂水) ‘桂林’

Mystical fairyland and beautiful scenery ‘Guilin’

계수나무가 많아 계림이라 불리우는 중국 광시좡족(廣西壯族) 자치구 북동부의 도시로서 차에서 내리자마자 異國의 신비로움과 秘景이 펼쳐진다.
베트남이 멀지않은 곳이라 연평균 기온이 18∼19도를 유지하는 아열대성 지역이다. 습윤한 계절풍 기후로 따뜻하고 비가 많다. 일조량이 풍부하고 사계절이 뚜렷하여 차량 이동을 하는 동안 길가에는 노점에서 열대성 과일을 파는 광경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구이린(桂林)은 옛날부터 월나라 사람들이 사는 땅이었고, 진나라 시황제가 정복을 하여 계림군에 편입시켰다. 중국 강산에서도 보석 중의 보석으로 여겨지는 곳이다. 독특한 카르스트 지형과 아름다운 이강이 조화를 이루어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다. 또한, ‘산청(山淸 / 맑은 산), 수수(水秀 / 빼어난 물), 동기(洞奇 / 기이한 동굴), 석미(石美 / 아름다운 돌)’가 어우러진 것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다. 계림의 곳곳에 아름다운 비경이 도처에 있으나 지면 관계로 양삭, 이강, 용척제전, 이름 모를 계림의 한적한 강촌과 소동강의 선경을 소개한다.

이강(漓江)
계림(桂林)에서 양삭(阳朔)까지 흐르는 83킬로미터 하천리강 ‘漓江桂林山水甲天下’. 계림산수가 천하제일이라 할 만한 정도로 아름다운 산수를 자랑한다. 중국의 화폐 20위안의 뒷면에 인쇄되어 통용될 정도로 중국 사람들이 아끼는 경치로서 그들의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

양삭
계림양삭을 ‘계림산하갑천하 양삭산수갑계림 (桂林山河甲天下 陽朔山水甲桂林)’이라고 할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풀이하면 ‘계림의 풍경은 천하제일이고, 양삭의 풍경은 계림에서 제일’이라는 뜻이다. 계림시에서 양삭현까지는 65킬로미터 거리다. 이동시간은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양삭은 원래 양각(羊角 양의 뿔)이었는데 1950년도에 지도를 만들면서 주민들의 의견을 반영, 양삭(陽朔)으로 개명되었다고 한다. 서양 사람들이 계림은 몰라도 양삭은 알정도란 말이 있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양삭 시내의 건축물 중 6층 이상의 건축물을 찾기가 쉽지 않다. 이유는 계림의 아름다운 경치가 건축물에 의해서 시야를 가리지 않게 규제를 하기 때문이라고 현지인들은 전한다. 그러면서도 전혀 불평하지 않음은 그들의 계림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때문일 것이다.

용척제전
계림시의 용승현에 위치한 용척제전은 해발 300미터에서 1100미터 사이에 있는 경사가 최대 50도에 달하는 계단식 논이다. 산기슭에서부터 산 정상까지 굽이굽이 이어지고 층층이 휘감으면서 수백 층의 계단을 이루고 있는 논의 모습이 마치 하늘로 날아올라 가는 용의 등줄기를 연상케 한다고 하여 용척제전이라고 부른다.
용척제전의 계단식 논은 원나라 때 만들어진 것으로 현재까지 70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용척제전 관광지는 동에서 서쪽 방향으로, 금갱(金坑), 대채홍요제전(大寨红瑶梯田), 평안장족제전(平安壮族梯田), 용척고장채제전(龙脊古壮寨梯田) 등 세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중국 광서(廣西) 계림(桂林)지역에 위치하며 계단식 논밭의 총칭이다. 계단식 논 내부에는 장족과 요족 두 소수민족이 거주하고 있다. 경이로운 자연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동시에 그들의 전통적인 생활문화를 엿볼 수 있으며 소수 민족문화의 생활상을 체험할 수도 있다. 이곳은 인공과 대자연이 어우러진 가장 훌륭한 경치를 경험할 수 있다. 장족사람들은 마치 사과의 껍질을 벗기듯 산을 깎아 농작물을 재배했는데 멀리서 보면 ‘천국으로 가는 계단’과 같아서 보는 이를 감동케 한다. 또한 그들의 끈질긴 삶에 대한 애착과 자연과의 융화를 통하여 자연과 순응하며 살아온 흔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그들의 治山기술에 경의를 느낀다. 최근에는 중국 여행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최고의 오지이며 관광지로 각광받고 있다. 인간이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만들어낸 대서사시로서 인간의 의지로 만든 아름s다움의 극치를 볼 수 있는 곳이다.

중국 계림 이강의 지류인 소동강(小東江)
후난 즈징은 양삭에서 차량으로 6시간 이상 이동해야 하는 곳이지만 현지인들은 그저 이웃동네 정도로만 인식하는 듯하다. 지속되는 고온의 영향으로 소동강 수면에 일상적으로 안개가 발생하여 주위의 풍광과 어우러져 한 폭의 묵화를 보는 것 같은 일상들이 연속된다. 안개 낀 소동강의 신비한 안개 속에서 조각배를 몰아 그물질하는 어부의 노래 소리와 함께 소동강의 아침이 시작되고, 여러 차례의 그물을 투척 했음에도 빈 그물이 올라와도 순진한 웃음을 잃지 않는 그들의 순박함과 유유자적 하는 모습에 나 자산의 일상을 되돌아보게 한다.

계림의 목동
계림은 아름다운 풍경만큼이나 날씨가 따뜻하고 온난해 사람이 살기에 좋다. 기원전 214년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나서 ‘계림군’을 세우면서 계림의 역사가 시작됐다. 사람들은 강 주변에서 농사를 짓고 물고기를 잡으며 살아갔고, 많은 소수민족들도 마을을 이루고 살고 있다.

계림의 석양
계림에선 푸른 산 사이로 독특하게 만들어진 기암괴석이 가장 먼저 눈길을 끈다. 그 스케일과 화려함이 상상 이상이다. 은은한 석양빛이 진귀한 형상을 한 산봉우리를 비춰 ‘현세 속 선경(仙境)’을 연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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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들은 누군가가 필요하다

Everyone needs someone

지금의 내 나이에 죽어버린 선배의 1주기 추모식에 갔었다. 학생운동을 거쳐 오랜 세월 노동운동에 헌신하다가 병을 얻어 고향인 제주도에 내려가 살던 선배였다. 납골당이 있는 추모공원에 마련된 제례실에 조촐한 제사상을 차려놓고 선후배와 가족들이 둘러 앉았다. 모인 이들의 대다수가 죽은 이보다 나이가 많았다. 선배는 죽어 나이가 멈추어 버렸는데 나만 나이가 들어, 나도 선배와 동갑이 되었다. 길지 않은 생애의 약력을 읽고 선배의 친구가 추모사를 낭독했다. 둘러 앉은 사람들이 돌아가며 선배와의 인연이나 추억을 이야기 했다. 이른 아침 비행기로 내려온 후배는 추모식 내내 훌쩍거렸다. 덩치가 산 만한 녀석이 “형 좋아했어요. 지금도 좋아합니다.” 겨우 두 마디를 어렵게 말하고는 다시 우는데 나도 덩달아 눈가가 뜨거워졌다. 추모식 끝에서는 모두 소리를 모아 ‘님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각자 종교도 다르고, 추모의 예식도 다르니 학교 다닐 때 자주 어울려 불렀던 노래를 부르는 것은 괜찮은 선택이었다.
나는 무슨 말을 했던가? 선배에 대한 기억을 더듬자 집에 있는 고사리 나물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선배가 손수 뜯어 말렸다며 보내준 나물이다. 살림은 언제나 뒷전인 내게 나물 반찬 만드는 일은 노벨상 받는 일만큼이나 멀고 먼 일이어서 받은 지 3년이 되도록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아, 그리고 뒷모습…. 제주 집으로 가려던 공항에서 위급한 상황이 되어 응급실로 실려갔다가, 임시로 수소문해 들어간 신촌 어느 병원의 입원실에서 선배를 만났다. 아니 벽을 보고 잠든 선배를 보았다.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있는 뒷모습이 고작 대여섯 살 아이처럼 작아 보였다. “형 만날 때마다 구박 했어요. 막걸리 마시지 말라고, 몸 잘 돌보라고. 괜히 그랬어. 이렇게 빨리 갈 줄 알았으면 그냥 맘 편하게 마시라고 할 걸….” 일어나서 이런 얘기를 했다. 어떤 거창한 기억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고, 사소한 목소리 뜻없이 한 말들만 생각났다. 세상 뜨기 일주일 전, 서울대 병원에서 마지막 보았을 때도 선배는 병을 이기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털고 일어나겠다고 말했고, 친구가 싸가지고 간 과일을 맛있게 먹었다. 선배의 부고를 듣고 달려간 장례식장에 앉아 국밥을 먹었다. 선배가 차려준 밥이니 잘 먹어야겠다 중얼거리며 국 한 그릇을 다 비웠다. 오랜만에 만난 선후배들과 슬프지만 반가운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49제는 작년 12월 31일이었다. ‘날도 참 잘 잡는다, 절대 잊어버리지 않을 거야 형’ 속으로 선배에게 말했다.
제주도에서 선배는 다른 이의 과수원을 빌려 저농약으로 귤농사를 지었다. 농약을 안 쳐서 병충해가 생기면 자기 과수원까지 옮는다고 옆집 과수원 주인에게 야단을 맞기도 했단다. 선배가 키운 노지 귤은 유난히 달았다. 팔아준다는 마음으로 주문했다가 달콤한 맛에 반해 다른 집에 선물로도 보냈다. 노지 귤이 나오는 철이 되니 선배의 귤이 먹고 싶다. 선배가 못난 글씨로 운송장을 적은 귤 상자를 받고 싶다. 그런데 2억 가지가 넘는 상품을 취급한다는 전자상거래의 거인 아마존(Amazon.com)에서도 선배가 키운 귤은 찾을 수가 없다.
쓸쓸한 마음으로 아마존의 올해 연말 광고를 찾아 보았다. 스마일 심볼이 그려진 아마존의 배달 상자를 가득 실은 트럭이 달린다. 아마존의 상자를 들고 기차를 탄 사람도 있다. 눈보라 치는 추운 벌판에서 배달된 상자를 받는 사람도 있고 아파트에서 받는 사람도 있다. 한 해를 정리하며, 크리스마스 즈음에 누군가의 산타가 되어 선물을 사고 보내고 받는 모습이 정답고 따뜻하게 보인다. 등장 인물들이 돌림노래처럼 이어서 부르는 노래 가사에 ‘모든 사람들은 누군가가 필요해요’(Everybody needs somebody)라는 구절이 반복된다. 사랑할 사람이 필요하고 그리워할 사람, 입맞춤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가사에 고개를 끄덕인다. 맞다, 이 땅에 살아있는 우리는 누구 한 명 예외없이 누군가가 필요하다. 어깨를 감싸줄 사람, 얼굴을 묻고 울 수 있는 사람, 아무 이유 없이 그냥 불러내도 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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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모든 사람들은 누군가가 필요해요.

          모든 사람들은 사랑할 누군가가 필요해요.

          모든 사람들은 누군가가 필요해요.

          그리워할 누군가가,

          입맞춤할 누군가가.

          나는 네가 필요해, 너, 너 바로 네가.

          사람들은 모두 누군가가 필요해요.

          입맞춤할 누군가가,

          그리워할 누군가가.

Na)    내가 하나 알려줄 얘기가 있어요.

          그 누군가를 가졌다면 그 사람을 꽉 잡으세요.

          그들이 어디에 있든 당신의 사랑을 전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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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가 떠나고 1년이 지났다. 아무도 죽지 않은 것처럼 세상의 시간은 흘렀다. 아무도 잃지 않은 것처럼 나의 시간도 흘러갔다.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지난 1년, 나는 삼백 예순 다섯 날만큼 기뻤고 슬펐고 불행했고 행복했다. 그 때마다 예상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나타나 나의 기쁨을 진심으로 함께해 주었고, 나의 슬픔을 덜어주었다.
아주 힘겹게 여름을 보내고 있을 때는 지구를 반 바퀴 돌아야 닿는 곳에 사는 친구가 와서 많은 시간을 내주었다. 책을 내기 위해 일본어 번역 감수가 필요한 순간에는 마침 일본에서 귀국한 선배가 귀찮아 하지 않고 해결해 주었다. 선배들은 이 늙은 후배의 재롱을 어여삐 봐주었고, 후배들은 이 모자란 선배를 기꺼이 찾아주었다. 보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인간의 바닥을 만나기도 했지만,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내게 쏟아지는 위로와 배려를 누리기도 했다. 살아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살아 있었기에 먹고 마시고 웃고 울 수 있었다.
1년의 끄트머리에 서서 나는 나와 인연 맺은 누군가에게 마음 속의 인사를 건넨다. 내 곁을 떠나간 당신, 잊고 사는 날이 많지만 그립지 않은 것은 아니야. 나를 배신한 당신, 죽어 버렸으면 싶게 밉지만 한 때의 진심까지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내 옆에 있는 당신, 나를 참아주어 고마워. 당신 덕분에 나 무너지지 않고 살고 있어. 멀리 있는 당신, 비 오는 날에도 꽃피는 날에도 그대 얼굴 보고 싶어. 지금은 잊혀진 당신, 혹시 나를 기억한다면 먼저 연락해 줘. 미안함까지 보태 열 배로 반길게…. 그리고 그 모든 누군가에게 떼를 쓰듯 부탁한다. 부디 오래 살라고. 이희중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당신이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이 지긋지긋해질 때까지’ 내 곁에 있어 달라고. 내 곁에서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할 누군가가 되어 달라고…. 여기 이희중 시인의 시를 덧붙인다.

 

상가(喪家)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오래오래 살아야 한다

 

오래오래 살아서

내가 그들 곁에 있다는 사실이

대수롭지 않은 일이 되고

그보다 더 오래오래 살아서

지긋지긋한 일이 될 때까지

견뎌야 한다

그러고도 더 오래오래 살아서

내게도 그들이 지긋지긋한 존재가 될 때까지

더 견뎌야 한다

그래야 순순히 작별할 수 있다

 

유족과 조객들이

영안실에서 밤새 웃고 떠들며 논다

고인도 그 사이에 언뜻언뜻 보인다


– 이희중

아마존닷컴_TVCM_2019_유튜브링크

 

글. 정이숙 Jeong, Yisuk 카피라이터

정이숙 카피라이터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카피라이터로 광고업계에 입문했다. 롯데그룹의 대홍기획을 시작으로 (주)샴페인, 한화그룹의 한컴, 종근당 계열의 벨컴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했다. 독립대행사인 (주)프랜티브에서 ECD로 일하다 독립하여 다양한 광고물 제작과 글쓰는 일을 하고 있다.
abacab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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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 그리고 산 후안 카피스트라노의 수도원

Mission San Juan Capistrano

12월은 한 해의 마지막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새해를 맞이하는 준비의 시간이기도 하다. 특히 예수의 탄생을 추정하면서 기독교 국가들 중심의 대대적 종교 행사가 열린다. 로만 가톨릭이나 개신교가 국교화되었던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예수 탄생일인 크리스마스는 가장 중요한 축제다. 우리나라 또한 예외가 아니다. 조선시대 말 유입된 선교사가 아닌 자발적 종교유입이 진행된 세계적으로 드문 경우로, 일본 식민지 시대에 저항하는 상당수의 독립군들이 개신교를 비롯한 가톨릭 등 범(汎)크리스찬이 많았다. 일본 해방 이후에도 근현대사의 상당한 족적에 이들 개신교와 가톨릭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기득권과 개혁세력의 양편에 항상 중심에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대체로 독립과 개혁 진영에서 활동한 이들 덕분에 사회 전체적인 이미지는 2019년 현재 그다지 나쁘진 않다. 물론 지나친 세속에 몸이 담겨 아픈 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도 여전히 존재하고, 선동꾼들도 상당하지만 이런 종교에 대한 다양한 시선과 해석은 과거에도 존재했다.
비단 종교개혁의 대상이었던 가톨릭만 해당되지 않는다. 부패와 권위에 대한 도전과 신학적 논쟁과 해석을 통해 등장한 프로테스탄트들(Protestant)의 기독교 또한 마찬가지다. 규모가 커지고 경제적 영향력이 커지면 권력이 되고, 정치를 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관계들은 고스란히 공간을 만들면서 세속을 지휘하게 된다.
종교는 어느 문화를 막론하고 고스란히 건축과 도시, 일상의 생활에 침투하고 흔적을 남긴다. 기독교 또한 마찬가지다.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된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믿게 된 로마는 탄압과 순교 대상인 기독교를 국가 종교로 개종하게 된다. 그러면서 순교하던 기독교인들은 국가의 권력 중심에 들어가게 된다. 반대로 정치가들이 종교인화 된다. 로마의 황제가 가톨릭의 최고 성직자가 됐다. 세속 권력을 민간에 이양하고, 종교권력을 장악한 것이다. 많은 로마시대의 건축들은 교회와 수도원 등 종교 건축으로 전환됐다. 건축 스타일이나 형식이 바뀌기보다 기능과 용도가 바뀐 것이다. 일반 대중의 신앙심은 종교 건축의 밑거름을 만들기 시작했다. 종교 공동체 사회가 되었고, 귀족과 평민, 노예의 구조는 동일한 하나님과 예수를 믿는 신앙인으로 재구성됐다. 예수의 기독교사상은 불완전한 사회적 평등구조를 로마시대에 비해서 확산시켰다. 왜냐면 모두가 신 앞에 착한 기독교인으로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권력에 의한 계급피라미드가 사라질 리 만무지만, 적어도 로마에 비해선 완화됐다. 대신 교회가 모든 사회 체제의 중심이 됐다. 정치와 종교가 적절한 권력의 배분과 균형을 유지하고, 타협한 국가 권력들은 선교를 매개로 해외 식민지를 점령해 갔다. 금과 은, 그리고 향신료에서 촉발된 경제적 동인은 교회와 국가의 부를 축적하게 되었고, 유럽 국가들은 경쟁하게 된다. 그들의 선택지로 새롭게 찾아낸 아메리카 대륙은 한마디로 노다지다.
영화 ‘미션’은 이런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탄생됐다. 화려하고 정교한 세공이 장식된 교회는 궁전과 같다. 이들의 중요한 관심사는 더 많은 황금과 힘이었고, 종교국가들인 유럽의 패권 국가들은 신대륙을 점령해 가면서 종교를 전면에 내세운다. 영화 미션의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역할에 충실히 식민지를 점령하고, 각자의 이익과 목표를 향한다. 하지만 기독교의 중심인 예수가 말한 것들은 모든 사람들의 선린과 평등, 그리고 사랑이 이들의 삶에 일체화 되지 않는다. 인간의 욕망과 정치는 교회 뒤에 숨어 있을 뿐이다.

San Juan Capistrano Mission

노예 상인이었던 로드리고는 사건에 휘말리면서 자신이 납치해서 팔았던 원주민 마을로 들어간다.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가족을 납치했던 로드리고를 알아보고 죽이려 하지만, 원수를 사랑하라는 기독교인화 된 그들은 용서하게 된다. 신부들과 함께 선교에 나서면서 서서히 원주민들과 동화되어 간다. 이 장면에서 원주민의 짐을 끊어내어 폭포 밑으로 버리는 장면은 세상의 무거운 짐과 고통을 벗어버리는 종교적 은유이기도 했다. 서서히 신앙심이 깊어지는 로드리고는 예수회에 함께 하기로 하면서 그들과 운명 공동체적 정서를 공유하게 된다.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의 영적 평등함을 체험하는 과정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런 평화스러운 상황은 오래가지 않는다.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경제적 패권 경쟁은 원주민들을 그들의 땅에서 몰아내려 한다. 정치와 교회의 긴장과 협력은 매우 정치적인 것이었고, 로드리고와 원주민 선교에 함께하는 가브리엘 등의 신부들은 동의하기 어려웠다. 결국 그들은 원주민들과 함께 하기로 하고 세속권력과 종교권력에 대항한다.
단순화하기 어려운 이 영화의 배경은 쉽게 누가 나쁘다 말하긴 어렵다. 하지만, 종교의 순수함과 본질적인 인간 사랑에 대한 욕망에 근거한 권력과 세속의 폭력은 명확하다. 이는 세월이 흘러 지금 이순간도 마찬가지다.
원주민들은 자신들과 동등한 하나님 앞의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선민의식의 신부와 맞서는 가브리엘과 예수회 신부들은 종교에서 무엇이 본질인지 새삼 깨닫게 만든다. 종교는 갈등의 원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갈등을 봉합하고, 타협하고, 희생하는 존재가 되어야 하며 그래야 한다. 이 영화 ‘미션’은 이를 되묻고 있는 것이다. 유럽의 화려한 성당과 원주민들이 만든 투박한 성당은 어느 것이 더 훌륭하고, 멋진 것이라 할 수 없다. 왜냐면 하나님 보기엔 모두가 같은 것이고, 더 중요한 것은 누가 더 신과 닮은 사랑과 희생을 한 존재이며, 신앙심이 깊은 가다.
결국 욕망과 권력은 이들 신부들을 순교하게 만든다. 선교를 위해 오지로 가서 목숨을 건 포교와 동화에 앞장선 신부들은, 오히려 그들과 함께 호흡하고 생활한다. 입으로 언제나 포교와 선교를 떠들고 신앙심을 앞세운 유럽의 점령자들은 오히려 살육과 약탈을 일삼으면서 자신들의 욕망을 숨긴다. 살인을 하고 회개하는 종교적 이중성을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으로 여긴다. 비단 수백 년 전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 선교 시대만 그럴까?
지금 이 순간 21세기 대한민국의 종교인들도 마찬가지다. 일상의 죄악과 욕망의 행동들을 그들의 교회와 절에 가서 회개하고, 참회하고 다시 돌아 나온다. 그리고 다시 이전의 행동을 반복하며 스스로 용서를 받았다고 자위한다. 갈등을 부추기고 재물과 권력에 취한 ‘미션’의 고위직 성직자들과 오늘의 우리 사회에서 비난을 받는 종교인들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영화에 등장하는 화려하고 정교한 유럽의 교회 건축들과 장식들은 숨이 막힐 지경이고, 황제의 복장처럼 복잡하고 거대한 사제들의 모습은 공작새가 날개를 펼친 듯한 과장이었다. 웅장하고 화려한 고전 양식의 공간은 교회의 진솔함과 검소함, 그리고 인간에 대한 본질적 사랑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히려 밀림으로 들어가 원주민들에 대한 인간적 공감과 동질감, 그리고 예수의 선린과 사랑을 공유하며 인간 본연의 순수함에 호소하는 신부의 모습에서 기독교의 본질을 읽게 된다. 선교를 내세우지만, 폭력적 선교는 참된 것이 되기 어렵다. 공감하고 공유하고, 진심으로 같은 인간으로 봉사하고 노력하는 신부들에서 기독교의 본질을 본다. 비록 영화 ‘미션’에서 건축이 중요한 장치는 아니지만, 영화 전반에서 말하는 종교적 본질은 화려하게 지어진 교회보다는 밀림의 원주민 거주지에서 웃고 떠들고, 함께 공동체를 만들어내려는 원주민 마을이 교회의 성스러움을 만들어낸다. 결국 건축에서 시작된 공간은 본질이 아닌 보조수단인 것이다.

San Juan Capistrano Mission

산 후안 카피스트라노 공공 도서관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내용 중 하나는 원주민들이 마을에 성당 십자가를 세우는 장면이다. 유럽의 어떤 교회 건축이나 상징물보다 완성도가 높거나 건축적 가치가 좋은 건 아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미켈란젤로의 예술적 성과도 아니지만, 순수한 신앙심 하나로 엮어져서 만들어져 가는 성당과 십자가는 종교에 대한 경외감과 감동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왜냐면 원주민들은 예수회 신부들의 순수함과 예수의 사랑을 믿었기 때문에 진심으로 영혼의 구원을 바라며 함께한 결과였기 때문이다.
북미의 서부지역, 멕시코부터 미국 해안가를 따라 가보면 가톨릭 성자들의 이름이 도시 이름으로 된 경우가 많다. 샌디에이고 (San Diego), 산후안 카피스트라노(San Juan Capistrano),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 등이 그렇다. 이들 지역을 가보면 원주민들과 성직자들이 함께 건축한 소박한 성당과 수도원들을 만나게 된다.
이들 지역들에서 만나게 되는 종교 건축들은 결코 미학적 구성이 세련되거나 아카데믹 하지 않다. 오히려 투박하고 거칠다. 건축 평면의 형식은 전형적 유럽 교회 건축의 신부들 수도원이나 성당의 형식을 가진다. 성당의 구성도 전형적 가톨릭 성당과 같다. 하지만 부족한 재료와 장인들 대신에 이들은 투박한 그림으로 장식을 대신하고, 세련되고 화려한 대리석 대신에 벽돌과 페인팅으로 그들의 신앙심을 드러낸다.
그중 한 곳인 산 후안 카피스트라노의 미션에서 느껴진 건축의 진솔함과 순박함은 마음을 차분하게 했다. 지진으로 허물어진 일부의 모습과 두꺼운 벽돌벽의 거친 구성. 벽면에 새겨진 부조와 페인트의 흔적들은 화려한 프랑스 파리의 노틀담 성당이나 밀라노의 두오모 성당과 비견해 결코 감동이 부족하지 않다. 어떤 면에서는 당시 이 거친 미션과 성당을 신앙심으로 표현한 것을 공감하게 된다.

PS_ 산 후안 카피스트라노의 미션(Mission San Juan Capistrano)은 1770년대 캘리포니아 서부 해안가에 세라 신부가 세운 9개의 수도원 중 하나다. 지진으로 몇 번 재건축된 이 미션과 성당은 이 지역의 건축 기준이 되어, 신축된 학교나 공공건축, 민간 건축의 디자인 기준이 됐다. 장소의 컨텍스트 기준이 된 것이다. 그중 가장 유명한 곳은 성당 옆에 지어진 마이클 그레이브즈 설계의 산 후안 카피스트라노 공공도서관(미국 건축상 수상작)이다.

 

글. 홍성용 Hong, Sungyong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은 건축사(KIRA), 건축공학 박사, 서울시 공공건축가로 건축의 크로스오버를 오래 전부터 주장했다. 국내 최초의 영화와 건축을 해석하는 <영화속 건축이야기, 1999> 을 시작으로 여행기, 마케팅을 연구했다. 건축사로 최초의 경영서적인 <스페이스 마케팅 2007>을 삼성경제연구소를 통해 출간하였고, 도시경쟁력 연구인 <스페이스 마케팅 시티, 2009>, 그리고 2016년 <하트마크>를 출판했다. 신사동 임하룡씨 주택, 근생 멜론 등 다수의 건축작품과 인테리어 작품들이 있다.
ncslab@ncsarchitec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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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복의 효과

Effects of uniforms

나는 서촌에 산다. 이곳은 매일 크고 작은 시위가 있고 토요일에는 대규모 시위가 있다. 평일 시위는 다양하지만, 토요일 시위는 거의 예외없이 애국 보수 단체의 반정부 시위다. 요 몇 달 동안 시위가 없는 토요일은 한 번도 없었던 거 같다. 시위가 있는 날이면 버스도 다니지 않는다. 토요일에 친구들과 함께 인왕산에 오르기로 한 날 오후에 밖을 나왔다. 아니 웬 일인지 시위가 없다. 요 몇 달 사이 시위가 없는 토요일은 처음이다. 경복궁역 정류장에서 만나기로 해서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군복을 입은 한 노인이 천천히 정류장 쪽으로 걸어온다. 두리번거리면서 뭔가를 찾는 것 같았다. 그리곤 버스 정류장 앞에서 뒷짐을 지고 서 있다. 그는 분명히 시위를 하러 나왔을 것이다. 토요일이니 당연히 시위가 있을 줄 알고 나온 모양이다. 근데 주변에는 등산복 입은 중년의 남자들은 많아도 어디에도 군복 입은 애국 보수 단체 멤버들은 보이지 않는다. 실망스럽고 허탈할 것 같다. 왠지 그 군복이 부끄럼을 타는 듯하다.

애국 보수 단체의 나이든 남자들은 군복을 즐겨 입는다. 그들은 모두 군대를 제대했을까? 군복을 입었다고 그들의 군복무가 증명되는 건 아니다. 분명한 건 그들이 입은 군복이 최신 군복이라는 점이다. 물론 자신이 입었던 그 낡은 군복을 소중하게 간직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당연히 사서 입을 수밖에 없다. 요즘 군복 파는 장사가 잘 될 수밖에 없다. 사실 그들이 군복을 입는 배경에는 군복무의 신성한 의무를 증명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

1) 군복 입은 노인이 서 있다. 보수단체는 군복을 통해 소속감을 고취한다.

첫 번째는 군복이 갖고 있는 상징성을 사는 것이다. 군복은 전쟁, 폭력, 군기, 절도, 질서 같은 것을 연상시킨다. 또한 애국의 의미도 갖고 있다. 그런 군복을 입었을 때 늙고 힘없는 초라한 노인이 아니라 나라를 지키는 현역 군인의 충성심으로 충만하게 된다. 군복은 기존 질서 체제와 그 유지의 산물이므로 그것을 깨려 하는 좌파에 대한 저항을 증명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군복은 일종의 무장으로서 ‘늙고 힘없음’이라는 현실을 숨겨준다. 그리하여 군복을 입은 노인은 위협적인 존재가 탈바꿈한다. 이것이 군복의 효과다.

두 번째는 그것이 다 함께 입는 유니폼, 즉 제복이라는 데 있다. 보이스카우트의 유니폼부터 기업의 유니폼, 국가대표의 유니폼, 내가 응원하는 프로 구단의 유니폼에 이르기까지 제복은 늘 소속감과 자긍심을 부여한다. 따라서 제복의 의미는 동질성의 확인이다. 런던 지하철인 언더그라운드의 디자인 사례는 최초의 CI(기업 통합 작업) 중 하나로 평가 받는다. 20세기 초 영국의 지하철과 버스, 전차는 100여 개가 넘는 크고 작은 회사들로 분리되어 있었다. 이것이 20여 년에 걸쳐 런던운송회사로 통합됐다. 이때 이 회사의 경영자인 프랭크 픽은 회사 유니폼을 새롭게 제작해 지급했다. 자신이 소속된 회사가 사라지고 새 회사에는 강한 소속감이 없을 때, 이 유니폼은 어수선한 직원들의 마음을 통합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것이 바로 제복의 효과다.

2) 런던운송회사 소속 직원들이 제복을 입고 기념일에 행진하고 있다.

개성을 추구하는 현대의 개인은 나와 같은 옷을 입은 사람이 눈에 띄는 일이 고통스럽다. 하지만 제복의 경우는 반대다. 나와 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여럿 있을 때 그들은 고양된다. 그들은 마치 종교 의식에 참여하는 신자들과 같다. 제복의 의미가 동질성의 확인이므로 제복은 함께 있을 때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다 함께 같은 제복을 입고 있을 때 그들은 두려움이 사라지고 테스토스테론이 상승한다.

3) 1950년대 출근하는 회사원들. 회사원의 정장 역시 일종의 유니폼이다. 정장은 공장에서 일하는 육체 노동자와 화이트 컬러를 구분해준다. 그들에게 소속감과 자부심을 안겨준다.

옷은 형식이라고 볼 수 있다. 일종의 껍데기다. 하지만 그 껍데기는 내용을 규정한다. 예비역들이 예비군복만 입으면, 그리고 훈련 장소에 다 함께 모이기만 하면, 개가 된다는 이야기가 있다. 절도 있게 옷을 입는 게 아니라 셔츠 단추를 풀어헤치고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노상방뇨를 하고 훈련소에서는 술을 마시고 화투를 친다. 평소 점잖던 사람들이 말이다. 예비군복이 자신의 원래 소속, 즉 가족, 직장, 사회로부터 일탈을 가능케 해주는 것이다. 노인들에게 군복은 비슷한 효과를 발휘한다. 그들의 원래 소속과 처지로부터 벗어나 강력한 힘을 얻는다. 군복이 예비군과 노인들에게 주는 효과는 같지 않지만, 공통된 점은 각자의 개별적인 성격에서 벗어나 어떤 익명성으로 통합되어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 정류장의 제복 입은 할아버지는 혼자다. 제복의 효과가 반감된다. 함께 할 때의 그 의기양양함은 간데없다. 나는 그 노인의 뒷짐 진 뒷모습에서 왠지 모를 쓸쓸함을 느꼈다. 위협적인 시위대의 일원이 아니라 누군가의 아버지, 누군가의 할아버지처럼 보였다. 다시 말해 익명성에서 벗어나 개별적인 존재로 되돌아온 것이다. 아무리 호전적인 무장을 했더라도 동질성을 느끼게 해주는 무리에서 떨어지자 그는 구체적인 개인, 초조함과 외로움을 타는 노인일 뿐이라는 걸 드러냈다.

옷, 형식, 껍데기를 선택하는 행위만큼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도 없다. 옷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은 옷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는다고 반박할지도 모른다. 결코 그렇지 않다. 첫 번째는 옷에 신경 쓰지 않는다는 그 행위 자체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강력한 의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옷 따위에 신경 쓰지 않는 ‘태도’를, 결국 덜 신경 쓴 ‘옷’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두 번째는 아무리 옷에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라도 결코 입지 않는 옷이 있다. 그러니까 뭔가를 선택하는 행위보다 선택하지 않은 행위로써 강한 의지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다. 결국 옷이란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떤 선택을 하지 않던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분명한 태도를 표명하는 일이다. 그리고 옷을 입는 순간 그 옷이라는 형식과 껍데기는 그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의 사람됨을 만든다. 몽테뉴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늘 옷을 잘 차려 입고 글을 쓴다. 늘 나에 대한 글을 쓰기 때문이다.”

4) 월드 시리즈에서 승리를 기원하는 휴스턴 애스트로스의 팬들이 팀의 상징인 오렌지색 유니폼을 입고 오렌지색 수건을 흔들며 오렌지 물결을 만들고 있다.

그런데 정체성을 찾는 것, 그것은 과연 진짜 ‘개성’을 발휘하는 일인가? 나만의 고유한 옷 입기인가? 그렇지 않다. 그런 옷 입기의 형식으로 사회가 나눈 어떤 범주에 자신을 집어넣는 행위다. 노인들이 군복 입기를 통해 스스로가 생각하는 애국과 보수의 범주로 자신을 소속시키듯이 말이다.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kshin201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