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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상, 기생충, 그리고 건축을 바라보다

Looking at Academy Awards, Film ‘Parasite’, and Architecture

칸느 영화제나 베를린 영화제, 미국의 아카데미 영화상은 우리와 전혀 상관 없는 것으로 그건 선진국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우리 수준이 세계적이지 않다는 인식이 깔려 있었다. 70년대에 조풍연 선생의 ‘영화이야기’를 읽고, 흑백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주말의 영화로 동경하던 아카데미 수상작, 칸느 영화제 작품상 등을 보았는데…….
최근 마음 깊숙히 있었던 한계치라는 장막을 걷는 뉴스가 들렸다. 몇 해 전 BTS가 미국 전국 네트워크 아침 방송 등에 나오고, 빌보드와 그래미에서 언급될 때 느꼈던 놀라움이었다. 한국 영화가 아카데미의 백미인 작품상과 감독상, 각본상을 수상한 것이다. 이 정도면 영화 자체로 인정받은 것이다. 영화의 핵심이 아닌가?
전체주의 국가들이 자랑하듯 만들어내는 영화가 아니다. 영화 제목도 ‘기생충’이다. 우리나라 기사에 웃기는 댓글 중 사기꾼이 부자털이 하는 빨갱이 영화라는 비아냥이 있었는데, 그런 영화가 자본주의 최정상 국가의 가장 자본주의적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은 것이다. 왜 댓글을 언급하냐고? 이 웃기는 댓글은 영화 ‘기생충’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감독의 은유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저급한 예술은 (이 표현도 조금 거시기 하지만) 직설적이다. 마치 욕설로 감정을 드러내듯 직접적이다. 이런 직설적 감정을 다각도로 복합적으로 바라보고, 해석하고, 은유와 비유로 설명할 때 수준 있는 예술이라고 한다. 유머까지 있으면 금상첨화다.
‘기생충’이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여러 배경에는 시대 정신과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 그리고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드는 소금 같은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미지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매체로, 충분히 그 자체의 힘으로 세련되고 매끄럽게 그리고 무엇보다 유쾌하게 만들었다.
스마트폰의 뉴스 알림으로 뜬 아카데미상 수상 소식에 영화광인 나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쳤다.
다음은 “건축이 돼야지!”
회사 직원들이 웃었다.
이미 오래 전 클래식 음악에서, 미술에서, 대중음악에서, 우리 문학에서 세계 곳곳에서 인정받은 작가와 작품들이 뉴스를 채웠다. 특히나 경제나 스포츠처럼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정서와 인식, 그리고 지성으로 인정하는 분야가 예술이다. 이런 분야들에서 우리나라 예술가들이 공감을 바탕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이러니 “건축은?”이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나올 수밖에 없었고, 기대감에서 “건축이!”라는 외마디가 나온 것이다.
과연 우리나라 건축이 창의성과 독창성을 바탕으로 세계의 공감을 얻어내면서 인정받을 수 있을까?
시대와 공감하는 우리 건축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글. 홍성용 Hong, Sungyong 본지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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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4.3.그룹과 건축교육

건축담론

편집국장 註

건축은 산업이면서, 기술이고, 문화고, 예술이다. 물론 건설을 동반해야 한다. 혹자는 이런 부연 설명을 마다하고 “건축은 건축이다”라고 말한다. 건축하는 사람들은 공감하지만 건축의 울타리 밖에 있는 사람들은 뭔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기술이나 문화, 예술로 빗대어 설명해야 한다.
건축은 한마디로 이런 모든 인문학과 공학을 담고 있다. 인문학과 공학을 엮으면 사유가 되고, 이는 철학이 된다. 그래서 건축의 연대기를 보면 수많은 철학을 바탕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당연히 상징과 이면의 내용을 언급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공학과 인문학적으로 표현할 때 우리는 건축에 ‘~ISM’을 붙인다. 철학이다. 그리고 이는 여러 건축을 구분하는 논리적 바탕이 된다.
사실 우리나라 건축에서 가장 필요하고, 요구되는 것이기도 하다. 절실한 것이지만, 조선시대 이후 산업화 과정을 지나는 동안 우리에게 부재한 것이기도 하다. 존재가 없었다. 조선 건축 이후로 구분 지을 만한 건축의 이야기가 없었던 것이다. 움직임도 크게 없었고…….
지난 1980년대 중후반부터 90년대에 IMF 경제 위기가 오기 전까지 ‘한국적’ 건축의 정체성 부재에 대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어떤 구체적 철학적 이야기나 바탕이 만들어지기 보다는 한국 건축 ‘사회’에 대한 치열한 논쟁과 움직임이 전개되었고, 3040 건축계 인물들이 논쟁을 시작했다. 아마도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는 움직임이었을 것이다. 바로 ‘43그룹’이라고 하는 일단의 인물들이다. 이런 시도는 더 많아지고 치열해지고 다양해야 하지만, 산업 건축 주류인 우리나라에서 지속되지는 못했다.
그리고 이들 ‘43그룹’은 오늘날 대한민국 건축계의 원로들이 되었다.
최근 “다시 한국 건축을 고민하자”는 언급들이 늘어나고 있다. 우리 건축의 진보와 발전을 위해서라도 우리 건축에 대해서 뜨겁게 논의했던 그 시절의 ‘43그룹’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런 이유로 이번 건축 담론에서는 ‘43그룹’이 다음 세대들에 전하는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01 4.3 Group and Architecture Education

벌써 십년의 세월이 지났다. 2011년 4.3그룹의 활동 20주기를 맞아 목천건축아카이브가 주관하여 구술채록을 진행하면서 관련 전시와 심포지엄을 함께 개최하였다. 이때 참가자들의 증언을 기록하고 또 관련 자료를 검토하면서 스스로 든 생각은, 4.3그룹이 한국의 건축계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은 바로 교육에 있다는 것이다. 그에 관한 내 생각과 심포지엄의 전체 내용은 관련 자료와 함께 『전환기 한국건축과 4.3 그룹』(도서출판 집, 2014)으로 묶여 출간되어 있으니 관심 있는 분들은 이를 참고하면 좋을 것이다.

4.3그룹의 활동 시기는 1990년부터 1994년에 걸쳐있지만, 집중적인 활동 시기는 세기말의 유럽 건축기행과 전시회가 있었던 1991~2년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막 독립하여 새로운 건축작업을 시작한 30대와 40대의 신예들이 자신의 건축 언어를 찾기 위한 방편으로 소모임을 결성하고, 주로 외부 강사를 초청한 강의와 자신들의 작품을 발표하는 세미나, 그리고 국내외의 건축 현장을 찾아가는 답사를 통하여 학습의 기회를 공유하였다.

그 시작은 당시 그들이 얼마나 준비 없이 작가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는지를 자각하는데 있었고,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얻은 경험들을 후진에게 넘겨주는 교육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4.3그룹이 처음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들이 선도한 수준 높은 인문학 강의와 해외 건축 답사는 당시 번성하였던 건축 잡지에 연거푸 소개되면서 건축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나아가 이들이 중심적으로 참여한 여러 건축교육 실험들은 당시의 제도권 학교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그 결실은 2002년 시작된 5년제 건축학 교육의 분리 독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시점으로 본다면, 겨우 열 명 남짓의 그것도 아직 경력이 일천한 30대와 40대의 젊은 작가들이 우리나라 건축계 전반에 영향을 끼친 것이 과연 가능할까 의구심이 들 정도이지만,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 사람이 아니라 세대의 문제였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4.3그룹의 활동과 그 영향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선 우선 1990년대 초라는 시점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건축 외부의 일반 사회를 기준으로 본다면 1990년대의 한국 사회는 간단히 민주화와 세계화의 시기로 간추릴 수 있다. 요령부득의 ‘한국적 민주주의’로 대변되는 국가주의 내지는 군부독재가 이전 시기의 상황을 요약한다면, 대통령조차 그 뜻의 차이를 몰라 헷갈려했던 국제화 또는 세계화는 결국 무차별적인 문호개방 그리고 사실은 미국식 가치기준과 제도의 적극적 수용에 다름 아니었다.
건축 내부로 본다면, 오랜 기간 한국 건축계를 대표하는 스타플레이어였던 김중업과 김수근이라는 양김 선생이 1980년대 후반 잇달아 타계하면서 3, 40대의 젊은 세대는 정신적 지주를 잃고 방황하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외 개방에 따른 경제의 폭발적 성장으로 전에 없던 많은 새로운 프로젝트가 연발하여 건축 시장이 극적으로 확장되어 가던 시기였다. 덩치가 커지면서 기존의 기관이나 단체는 전례 없는 양적 성장을 이루었지만, 새로운 시대에 맞는 비전을 제시하지 못함으로써 리더십은 오히려 약화되는 상황을 공통적으로 겼었다.
4.3.그룹은 이 힘의 공백, 혹은 권력과 권위가 불일치된 틈새에 자리하였다. 아니 4.3그룹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회 참여에 좀 더 관심이 있었던 사람들은 ‘건미준(건축의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을 결성하였고, 이는 후에 민예총(뒤에는 민건협) 그리고 더 멀리는 새건협으로 이어진다. 제도권 안에서도 경기대학에서 튜터 시스템에 근거한 새로운 건축설계교육에 대한 실험이 있었고, 이 경험은 sa(서울건축학교)로 이어진다. 현업의 건축사들이 참여하는 새로운 형식의 설계 교육에 대한 갈망은 커서, 이러한 설계워크숍은 대전과 대구, 광주전남 등 지역 단위의 학교와 대한건축사협회 시도건축사회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건축캠프, 한국건축가협회에서 주관하는 대안학교인 SAKIA와 민건협의 여름건축캠프 등 다양한 형식으로 퍼져나갔다.

2012년 12월 6일 인사동 KCDF 갤러리에서 열린 4.3그룹 20주년 기념 전시의 모습

같은 날 열린 심포지엄 후의 기념 사진

경기대의 건축교육 실험이 설계스튜디오의 튜터제를 선보였다면, sa는 인문학 강좌와 건축기행, 그리고 이 둘을 묶은 설계워크숍의 형식을 보급하는데 공로가 있다. 이때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건축과 인문학의 관계 설정은 스스로의 건축 작업이 단지 기술적 차원의 해결일 뿐만 아니라 인간과 사회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결과여야 한다는 당위를 만들어 내었고, 스스로의 작업을 하나의 개념으로 이어서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때 말하는 인문학이란 전통적으로 건축학 내부에 있던 건축역사학을 넘어서, 미술사학과 예술학, 그리고 문학과 철학 등 협의의 인문학은 물론 사회과학, 심지어 과학과 공학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전 학문 분야에 걸친 지식의 확장을 포괄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이러한 박학의 굴레가 피로감을 주기도 하고, 또 디지털 건축 등 신기술 습득의 압박 또한 커지면서 점차 힘을 잃어가고 있지만, 다가올 21세기를 기대와 불안이 뒤섞인 채로 맞이하고 있던 세기말의 정서에서는 뭐라도 기댈 곳이 필요했으리라.
건축기행은 이미 1970년대부터 각 대학의 건축과 학생회나 동아리 활동 등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이 시기엔 마이카 시대의 개막과 함께 전국의 구석구석을 누비는 개별 여행이 확산되고 또 해외여행 자유화 시대를 맞아 외국의 건축물 기행이 학생, 일반 할 것 없이 유행처럼 퍼져나갔다. 마지막으로 한 사람의 튜터가 10명 내외의 소수의 학생들 담당하여 설계의 전 과정을 대면 지도하는 튜터제는 특별한 이념적 지향에 따른 변화라기보다는 비정상이 정상화되는 자연스런 과정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4.3그룹의 활동은 1994년에 마무리되었지만, 그 후 앞서 언급한 sa와 각종의 건축캠프, 그리고 민건협 등의 활동은 2000년대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2002년 마침내 건축학 교육 개편이 이루어진다. 즉, 건축학과 건축공학의 교육이 분리되고, 건축학에는 5년제의 설계 중심 교육프로그램이 시행되었다. 건축학 교육개편의 발단은 엉뚱한 곳에서 시작하였다. 당시 세계 단일 시장을 꿈꾸며 발족한 WTO 체제 하에서의 전문자격의 국제적 상호 인증을 위하여, UIA의 자문을 거쳐 건축사가 되기 위해선 대학에서 최소 5년의 전일교육이 필요하다고 결정하였고, 무역에의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 정부는 서둘러 이 기준을 충족시키길 원하였다. 그래서 외교부에서 국토부를 거쳐 교육부에 전달된 정부의 의지가 서울대학을 시작으로 각 대학에 퍼지게 된 것이다.
5년제의 새로운 교육과정이 비교적 순조롭게 정착된 데에는 앞서 언급한 선행의 건축교육 실험들의 역할이 컸다. 이제 새로운 교육프로그램을 시행한지도 벌써 20년이 가까워지고, 그 졸업생들은 이미 건축사가 되어 현업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 성패를 논하기에는 아직 이른 감이 있고 또 학교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외국의 건축대학들과 교류를 하면서 느낀 바로는 국제적 수준의 교육이라고 하는 일차적 목표는 어느 정도 달성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 오히려 부족한 것은 수준은 국제적이지만 내용은 지역적인, 특색 있는 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가는 일로 보인다.

30년 전 4.3그룹에 참여하였던 건축사들은 지금 60대와 70대가 되어 현장에서 활동하는 가장 원로그룹에 속하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작품과 글을 묶어 책으로 내고, 국내외에서 활발한 건축전을 여는 등 새로운 건축사의 이미지를 집단적으로 구축한 첫 세대로 기록될 것이다. 첫 세대와 낀 세대의 차이는 이후에 그 맥락이 계승되는지의 여부에 달려있다. 1990년대라고 하는 한국 현대사의 큰 변곡점을 통과하며 4.3그룹의 멤버들은 앞 세대의 뒷자리가 아닌 뒷 세대의 앞자리를 차지하였고, 그것은 이들이 교육의 이슈를 선점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영광이었다.

 

글. 전봉희 Jeon, Bonghee  서울대학교 교수, 건축학

전봉희 서울대학교 교수, 건축학

1992년 조선시대 씨족마을에 관한 연구로 서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97년 이후 서울대에서 재직하고 있다. 건축역사와 건축아카이브, 건축문화유산의 보존관리 등에 주력하고 있으며, 문화재위원과 한국건축역사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현 서울대 박물관장.
jeonpark@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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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4.3그룹의 모더니즘과 이 시대 우리의 건축

건축담론

편집국장 註

건축은 산업이면서, 기술이고, 문화고, 예술이다. 물론 건설을 동반해야 한다. 혹자는 이런 부연 설명을 마다하고 “건축은 건축이다”라고 말한다. 건축하는 사람들은 공감하지만 건축의 울타리 밖에 있는 사람들은 뭔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기술이나 문화, 예술로 빗대어 설명해야 한다.
건축은 한마디로 이런 모든 인문학과 공학을 담고 있다. 인문학과 공학을 엮으면 사유가 되고, 이는 철학이 된다. 그래서 건축의 연대기를 보면 수많은 철학을 바탕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당연히 상징과 이면의 내용을 언급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공학과 인문학적으로 표현할 때 우리는 건축에 ‘~ISM’을 붙인다. 철학이다. 그리고 이는 여러 건축을 구분하는 논리적 바탕이 된다.
사실 우리나라 건축에서 가장 필요하고, 요구되는 것이기도 하다. 절실한 것이지만, 조선시대 이후 산업화 과정을 지나는 동안 우리에게 부재한 것이기도 하다. 존재가 없었다. 조선 건축 이후로 구분 지을 만한 건축의 이야기가 없었던 것이다. 움직임도 크게 없었고…….
지난 1980년대 중후반부터 90년대에 IMF 경제 위기가 오기 전까지 ‘한국적’ 건축의 정체성 부재에 대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어떤 구체적 철학적 이야기나 바탕이 만들어지기 보다는 한국 건축 ‘사회’에 대한 치열한 논쟁과 움직임이 전개되었고, 3040 건축계 인물들이 논쟁을 시작했다. 아마도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는 움직임이었을 것이다. 바로 ‘43그룹’이라고 하는 일단의 인물들이다. 이런 시도는 더 많아지고 치열해지고 다양해야 하지만, 산업 건축 주류인 우리나라에서 지속되지는 못했다.
그리고 이들 ‘43그룹’은 오늘날 대한민국 건축계의 원로들이 되었다.
최근 “다시 한국 건축을 고민하자”는 언급들이 늘어나고 있다. 우리 건축의 진보와 발전을 위해서라도 우리 건축에 대해서 뜨겁게 논의했던 그 시절의 ‘43그룹’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런 이유로 이번 건축 담론에서는 ‘43그룹’이 다음 세대들에 전하는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02 Modernism of the 4.3 Group and Echoes of an Era

“근대건축은 비인간적이므로 실패했다는 주장은 소위 국제주의 양식의 건축과 모더니즘 건축을 동일시하는 시각이다.” (이종상, 1992)
“재해석의 첫 대상은 모더니즘이다.” (민현식, 1994)
“여기서 얻은 결론은 비판적 모더니즘이나 비판적 전통건축으로 대응하여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우경국, 1994)

4.3그룹이 결성된 때가 벌써 30년 전이니 그들이 역사의 한 페이지에 남게 됐음은 분명하다.1) 1990년 4월 3일의 첫 회합 이래 수년 동안 세미나, 답사, 전시, 출판 등으로 함께 활동한 10여명의 소장 건축사들,2) 이들은 스스로를 4.3그룹이라 칭했다. 이 모임은 당시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키며 우리 건축계에 내적 성장을 위한 자극을 줬는데, 모임의 중단 후에도 이들은 제각기 유의미한 활동을 지속해간다. 당대 30~40대였던 이 젊은이들은 이제 60~70대의 원로가 됐다. 지난 한 세대에 걸친 그들의 활동이 현재 우리의 건축 지형을 형성한 중요한 축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이 아니리라.
4.3그룹 활동의 핵심은 결국 ‘공부’였다. 여러 전문가들의 초청강연과 답사, 서로의 디자인에 대한 비평과 방어는 그간 부족했던 학습을 보완했고, 그 바탕 위에 자기의 ‘말’을 벼려 전시와 출판으로 나타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매우 흥미롭게도 우리는 그들의 논의 속에서 ‘모더니즘(modernism)’이라는 말을 자주 마주하게 된다. 그들이 공동으로 출판한 두 권의 책 『이 시대 우리의 건축』(1992)과 『Echoes of an era/ volume #0』(1994)을 보라. 건축역사 속에서 ‘모더니즘’이 20세기 초 유럽 아방가르드의 경향을 가장 대표적으로 지칭한다고 볼 때, 커다란 시간과 공간의 간극을 넘어 1990년대의 한국에 이 말이 그리 중요하게 거론된 까닭은 무엇일까?

사실 구성원들 각각의 건축 및 시대에 대한 인식에 스펙트럼이 넓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모두 말끔히 정리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상당 부분 공유된 입장을 취했는데, 모더니즘에 대한 생각도 그렇다. 말머리에 인용한 세 문장을 보자. 전술한 두 권의 책에 출판된 서로 다른 세 사람의 글을 발췌해 조합한 것이다. 논리구조가 삼단논법에 기댄 듯 완결적인데, (논란의 여지가 있는 세 번째 문장의 “비판적 전통건축으로”를 유보하면) 20세기 건축에 대한 교과서적이고 모범적 인식으로 보인다. 이는 당대 4.3그룹 멤버들 대개가 공유한 인식이었고, 지난 세기 한국 건축계 전체의 중심적 사고였다고도 말할 수 있다.
첫 문장은 근대건축을 충분히 소화하지 못한 채 외래사조를 무분별하게 수입한 한국 현대건축의 혼란을 꼬집은 이종상의 말이다(「1992.12 서울」, 1992). 당대의 상황을 “세기말”로 여기며 포스트모던이나 해체건축의 모방, 그리고 상업주의적 난개발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동료들의 발언과 맥을 같이 한다. 승효상은 현란한 형태와 색상의 건축적 현실을 19세기 말 유럽의 “포촘킨 도시”에 빗댔는데(「빈자의 미학」, 1992), 이들에게 근대건축을 강의했던 김광현은 진정한 포스트모더니스트나 해체주의자가 되려면 먼저 근대건축에 철저해야 함을 역설했다(「근대건축 세미나 II」, 1992.5.30). 여기에 동반된 것이 아돌프 로스나 르코르뷔지에, 그리고 루이스 칸과 같은 대표적 모더니스트들에 대한 학습이었다. 침묵과 빛, 건축의 영속성 등 이 거장들의 건축에 대한 깊은 탐색은 “근대건축은 … 실패했다”는 식의 찰스 젱크스적 진단에 제동을 건다. 혹시나 실패한 게 있다면 그건 아마도 전체의 일부인 “국제주의”일지 모른다. 고로 근대건축을, 혹은 건축의 “모더니즘”을 다시 읽고 “재해석”해야 하는 것이다. 민현식에게서 가져온 두 번째 문장이 이를 말한다(「지혜의 시대, 우리의 건축」, 1994).
모더니즘의 재해석에 대한 결론, 즉 세 번째 문장의 콘텍스트에서 우경국이 각종의 답사와 독서를 통해 얻은 결론은 “비판적 모더니즘” 혹은 “비판적 전통건축”을 통한 대응이었다(「흐르는 회색 공간」, 1994). 급격한 세계화와 상업화 속에서 우리 건축이 무분별한 외래사조 및 형태어휘로 가득했던 1990년대 초, 4.3의 젊은이들은 서구의 모더니즘을 중요한 공통 기반으로 학습하고 그것을 한국적 현실에 “비판적”으로 적용하려 했다. 비록 각각이 모더니즘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데는 편차가 컸지만 말이다. 즉, 그들이 수용한 서구의 모더니즘은 필연적으로 여러 비판적 필터를 통해 걸러진 “비판적 모더니즘”일 수밖에 없었다. 그 필터는 “마당의 비움”이든, “서정적 추상”이든, 현대 “도시의 풍경”이든, 결국 우리의 ‘무엇’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필터는, 민현식(1994)에 근거해 말한다면, “왜곡된 민족주의”나 “감상적 한국성”이 아닌 “세계적 보편성”을 내포해야 했다. 이는 동시에 “맹목적인 근대추종”과 “로맨틱한 서구부정” 모두에 대한 경계 역시도 함의하는 것이었다.

서구의 모더니즘을 우리의 현실에 바탕을 두고 비판적으로 재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은 결코 새롭지 않은, 이전부터 있었던 당연한 논지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바는 지난 세기 말 우리 젊은 건축인들이 주장한 비판적 모더니즘이 반성적 모더니즘이라는 세계적 흐름과 어느 정도 맥을 같이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이들의 문맥에서는 케네스 프램튼의 “비판적 지역주의(Critical Regionalism)”(1983/1985)를 떠올릴 만하다. 주지하듯 이 개념은 보편적 세계 문명을 수용하면서도 지역 문화의 가치를 견지하려는 패러독스적 태도로서 현재까지도 영향력이 작지 않다. 우경국은 4.3그룹 결성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출판한 글에서 자신들이 표출한 이념 중 하나가 “비판적 지역주의”였다고 주장했는데(『공간』, 1990.8), 앞서 본 민현식의 어법이 프램튼의 입장과 조응한다. “현대 문명의 중심지에서 벗어나 있는” 주변에서 대안적 가능성을 탐색한다는 면도 그렇다.
그런데 여기서 요점은 프램튼이라는 세계적 비평가의 개념에 대한 칭송이 물론 아니다. (우리는 이제 그의 개념을 비판할 여유도 누린다.) 그보다는 4.3그룹이 당대 제기된 유력한 건축 개념을 논의할 만큼 세계적 흐름에 민감히 반응했고, 실제 이를 한국적 현실에 대입하려 나름 고투했다는 사실이다. 김광현이 『이 시대 우리의 건축』 서문에서 비판했듯 이들의 “유토피아의 언어”가 한계를 보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이들은 이러한 고투 위에 성장했고 부족하나마 현재의 한국건축을 일궜다. 이 점이야말로 4.3그룹이 한 세대를 지난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다. 그들의 족적이 외형적으로는 건축계의 교육이나 제도 개선 등으로 나타났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이 시대 우리의 건축”이 어떠해야 할까에 관한 담론이었다고 하겠다. 그렇다면 2020년, “이 시대 우리의 건축”은 어떠해야 할까? 이제는 ‘우리의 흐름’이 ‘세계적 흐름’이라 말해야 할 때가 오고 있지 않나? 선배들의 물음에 후배들이 답해야 할 차례다.***

 

글. 김현섭 Kim, Hyonsob 고려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김현섭 고려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영국 셰필드대학교에서 서양 근대건축을 공부했고, 2008년 모교인 고려대에 임용된 이래 건축역사·이론·비평의 교육과 연구에 임하고 있으며, 근래에는 한국 현대건축에 대한 비판적 역사 서술에 관심을 모으고 있다. 최근 『건축수업: 서양 근대건축사』(2016), 『건축을 사유하다: 건축이론 입문』(2017), 「DDP Controversy and the Dilemma of H-Sang Seung’s “Landscript”」(2018), 「The Hanok Paradox: Modernity and Myth in the Revival of the Traditional Korean House」(2019) 등의 단행본과 논문을 출판했다.
archistory@kore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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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성장 시킨 건 4.3그룹, 그것은 연대였다” _ 승효상 위원장

“What grew me up was 4.3 group, which was solidarity”

한국 현대건축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4.3그룹은 1990년 4월 3일 ‘문화로서의 건축과 토론의 장을 만들기 위한 스터디 그룹’으로 출발해 1994년 가을까지 4년간 활동했다. 목천건축아카이브의 후원 하에 발간된 도서 ‘전환기의 한국 건축과 4·3그룹<집>’, ‘4.3그룹 구술집 <마티>’을 살펴보면, 이 모임은 해방 후 지극히 짧은 역사와 비평의 부재 속에서 성장한 한국 건축계에 문제가 있다는 비판의식을 공유하면서, 한국 건축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상호 비평을 통해 각자의 건축을 확인하며 가다듬는 시간을 갖는다. 23번의 크리틱 및 세미나, 4번의 건축기행, 전시회, 두 차례의 도록 출판을 하는 등 밀도있게 활동을 펼쳤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집단지성의 발현으로 행해진 건축운동 활동상은 건축담론을 생산해 논쟁을 만들어내었고, 기존의 관점과 가치를 검증하게 했으며, 흐름을 이어가 한국 건축제도의 개선과 교육시스템의 변화까지 이끌어냈다.
월간 건축사가 ‘4.3그룹’ 30주년을 맞아 당시 그룹의 일원이었던 승효상 건축사(현 국가건축정책위원장)를 이로재에서 만나 대담을 나눴다. 90년대 초 현장 비평 등을 통해 당대 시대정신을 건축계에 불어넣었던 4.3그룹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Q 제가 인터뷰 요청을 드린 것은 4.3그룹 활동의 중심에 계셨었기 때문입니다.

그건 아닙니다. 제가 창설 멤버인 것 맞지만 중심에 있었다고 할 수 없어요. 열네 명 멤버 모두가 자기 의견이 명확한 분들이었습니다. 애초에 모임을 주창한 분은 우경국, 백문기 두 분인 것 같은데, 1990년 초엽에 제게 두 분이 찾아와서 같이 하자고 했습니다. 그때는 제가 사무실을 독립한 직후라 다소 두렵고 외롭기도 해서, 참여하게 되었지요.

 

Q 저 뿐만 아니라 설계를 하겠다고 생각했던 막 사회에 나온 친구들에게는 4.3그룹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을 기성세대에서 해주니까 희망처럼 보이고, 우리도 저런 길을 가야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하나의 등대 역할을 하셨다고 생각하거든요. 젊은 친구들은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때 어떤 포부로 4.3활동을 같이 하셨고 당시 성과는 어떤 것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당시는 건축담론에 대해 서로 목말라하던 그런 분위기가 있었어요. 기억하기로는 70년대 후반, 박정희 군부독재가 체제를 합리화하기 위해 강조한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퇴행적 단어를 프로파간다처럼 내세웠는데 공공프로젝트에서도 한국적 건축을 설계조건으로 강조했어요. 이게 전통에 관한 논의로 진전되었지요. 계기는 잘못되었지만 그게 한국건축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는 분위기를 이룬 것은 사실입니다. 물론 이것이 발전적으로 보편적 담론으로 성숙하지 못한 채 한국이라는 로컬에서 함몰했다고 하는 한계는 있었어요.
그러다가 이제 86년에 김수근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88년에 김중업 선생님마저 돌아가셔서 소위 양대 거장의 부재 상황이 됐습니다. 당시는 건축설계 물량이 88올림픽 특수와 맞물려 쏟아져 나온 탓에 활발한 건설의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이 외적 성장을 비판적으로 보던 젊은 건축인들 사이에서는 건축의 시대정신에 대한 탐구가 목마른 시기였습니다. 마침 저는 독립한 상황이었고요.
그런 분위기에서 4.3 그룹이 태동한 겁니다. 우리는 그때 한 달에 한번 만나서 자기가 설계한 건축의 현장에서 자청해서 신랄한 비평을 받고, 서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확인하는 과정을 진행했습니다. 생각의 차이와 간극이 너무 큰 경우도 있었지만 이 시대를 같이 하고 있다는 동질성이 모두가 대단히 긍정적이었습니다. 거기에 한 두 사람이 아니고 열네 명이 한꺼번에 모여 연대하니 소위 집단지성이 발휘되는 계기가 되면서 결론들은 늘 괜찮았고, 각자 얻는 바가 많았습니다. 여러 차례 의기투합해 논의를 이어가다 다른 나라의 건축과 그들의 상황도 알고 싶어 같이 해외 기행도 하게 됩니다. 실제 현장에 가서는 상상하던 것과 현실의 차이를 느끼게 되고 현장이 가진 진실을 목도한 중용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이 모든 게 4.3 그룹의 모든 멤버들 특히 저에게는 제 자신을 발견하는 중요한 과정이었습니다. 저는 김수근 선생의 문하에서 15년 있었으니까 김수근 건축 외는 다른 건축은 없는 줄 알 정도였지요. 제 건축을 어떻게 펼쳐야 할지도 몰랐지만 심지어 제 자신이 누구인지 조차 모르던 상태여서 이 4.3을 통해 많은 도움을 받았던 겁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1992년 12월 12일 ‘이 시대 우리의 건축’이란 제목으로, 동숭동에 있었던 인공화랑에서 그룹 전시를 열었습니다. 전시회의 전제는 각자가 어떻게 건축할 것인지를 언어로 정의하며 작업을 보여주자는 것이었는데, 저는 이게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수없이 많은 말 중에서 자기의 언어를 찾는다는 것은 본인에게는 진리를 찾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전시회의 전시 방법이나 전시 기간 중에 진행된 심포지엄도 대단히 특별했습니다. 결국은 이 전시회로 서로 얼마나 다른가를 알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그 전시회에서 선언한 내용으로 글로 정리해서 이를 모아 책을 내고 헤어졌습니다. 그게 4.3의 전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Q 건축은 개인의 크리에이티브라고 생각해 완벽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단어라고 말씀하셨지만 저는 각자의 아이덴티티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런 아이덴티티라면 개인의 관심사에 따라 기능 또는 조형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는 모든 시각에서 완벽하길 바라는 비평도 많고, 저는 그런 부분이 아쉽다는 입장인데 선생님은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

저의 경우 ‘빈자의 미학’이란 언어로 제 건축을 선언하고 나서 많은 비판을 접하기도 했고 격려도 들었습니다. 우선 빈자와 미학이라는 두 개의 단어가 서로 모순되는 듯 했으니 아마도 생소했을 테고 심지어 이를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4.3에서 서로 논의하고 현장을 가보고 했던 활동과 사유의 결과가 그 단어였으며 급기야 저한테는 진리로 다가온 것이어서 제게는 옳을 수밖에 없는 선언이라고 믿었던 겁니다. 그 안에서만 있으면 자유롭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랬습니다. 오히려 그 당시 경험의 부족과 지식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었지만, 제가 이 언어에 성실하기만 하면 이 담론의 지평이 넓어질 것이라고 믿어서 그런 비아냥들을 괘념치 않았습니다. 물론 상처는 있었겠죠. 그렇지만 후회했던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Q 활동 간 서로 간의 치열한 논쟁을 벌이거나 공격과 방어도 있었을 텐데요?

예. 굉장했죠. 하지만 저도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모두가 그 혹독했던 4.3의 시간을 통해 많은 도움과 혜택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전에 하던 건축을 완전히 버리고 새로운 건축을 하고 계신 분도 있습니다. 4.3의 과정 동안 서로에게 질타나 비난을 안 받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그 과정 속에서 모두가 성장했다는 건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Q 그런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저는 그런 그룹 안에 들어가 본 적이 없어 사실은 그런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그런 계기가 없었으니까요. 4.3그룹의 시대적 배경과 생각들을 개방된 공간에서 활동한 게 부럽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 당시 전시, 담론 등의 성과물도 다양하게 생산하셨고요. 그런 활동을 하셨던 입장에서 요즘 바라보는 30, 40대의 모임이나 움직임에 대해 조언 또는 응원, 그리고 방향성에 대해 제안을 해주신다면?

요즘의 세대들은 예전에 비하면 비교적 빨리 독립하는 것 같아요. 충분한 디시플린을 갖고 현장에 임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위험하지요. 쉽게 건축주의 하수인이나 시녀로 전락할 가능성이 많아져요. 먹고 살기 다급해지니까……. 그런데 건축주와 한번 그런 관계가 되면 바른 관계로 회복하기가 참 어려워져요. 그러니 뭐라 그럴까… 일이 없을 때도, 외로울 때도 견딜 수 있는 체질을 닦아 놓아야 하는 거지요. 그걸 이루자면 혼자는 어려우니까 연대를 해야 한다고 봐요. 동료로부터 위로도 받고 격려도 하며 가치를 나누는 그런 연대 말이지요.
요즘도 건축하는 이들 서로 만나기도 하는 것 같지만 혹시 개인적 위로 차원에서 끝이 나고 사회를 위한 공의의 결기가 다소 부족한 것은 아닌지 묻고 싶어요. 물론 지금은 한 가지 대의를 발견하기가 이전 시대와 달라 쉽지 않습니다. 지금은 SNS, 인터넷으로 인한 정보의 홍수 시대여서 시대정신이라는 것도 일치하기 힘들고, 한 사람이 주장해서 그것을 다 따르는 시대는 이제 불가능하지요. 이른바 만인 대 만인의 투쟁시대, 누구든 자기 생각을 제시할 수 있는 시대니까요. 그렇다 하더라도 서로 다른 생각이더라도 서로를 발견하고 존중해주는 집단이라면 훨씬 더 강력한 힘을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공존과 공유의 가치가 훨씬 필요한 시대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밀실에서 만든 가상현실은 필시 파편적이고 단편적이라 오프라인에서는 공동체를 와해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회가 건전할 리 없겠지요. 각자가 추구하는 가치가 설혹 서로 다르다 하더라도 뭔가 하나의 틀을 만들어놓고 그 속에 들어가서 연대하자고 제안하는 사람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건축이 가져야 할 첫 번째 가치는 공공성이라고 믿습니다. 이의 실천은 연대에서 비롯될 것이라고 또한 믿습니다. 건축은 결국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인 까닭입니다.

 

Q 4.3 구성원들은 그와 같은 논쟁을 주저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자신들이 치열하게 논쟁하며 상처받을 것도 각오하고 가감 없이 드러냈고요. 그런데 제가 편집국장을 하면서 느끼는 건 좀 다릅니다. 대체로 말하는 건 좋아하는데 공론화하는 것에 대해서는 굉장히 부담스러워하고, 책임지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면도 있겠죠. 예전에는 정보가 귀했기 때문에 정보를 가진 이에게 모두가 귀를 기울였습니다. 권력을 한 사람이 가졌다는 말입니다. 근데 지금은 정보의 홍수 시대이다 보니 어느 누구나 모든 걸 혼자 다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죠. 이것이 공동체가 와해되는 이유이기도 할 겝니다. 그런데 건축설계가 이런 문제에 저항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일이어야 하는 것 아닐까요? 시대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시대가 보여야 할 가치를 제시하는 것, 그래서 우리의 공동체를 좀 더 건강하게 지속시키는 일이 건축의 바른 임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혼자서 섬 같은 땅에 살지 않는 다음에야 모여서 사회를 이루어야 하는 우리에게 공동체의 문제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니, 나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타인에 대해 그 삶에 대한 애정과 존중의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보는 겁니다. 다른 사람의 삶을 조직하는 게 건축설계라는 것을 안다면 더 그렇지요. 남에 대한 관심, 동료에 대한 관심이 없는데 제 건축 속에서 살게 되는 이들의 삶을 이해한다는 말이 성립될까요?

 

Q 말씀하신 몇몇 건축사들은 유튜브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을 보면서 좀 더 조직화되고 시스템을 갖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당연합니다. 같이 모여서 전시회를 한다던가. 지역끼리 모여도 좋고요, 연령별로 모여도 좋은데 그렇게 함께 모여 이야기를 하는 게 필요합니다. 작업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협업을 많이 했어요. 오래 전, 파주출판도시 같은 프로젝트가 제게 왔을 때, 이건 여러 사람이 같이 참여하고 논의해서 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을 하여 무려 마흔 명이 넘는 건축사들이 같이 노력하여 만들었지요. 그 후에도 다른 주거단지 같은 프로젝트가 들어오면 여러 동료들과 나누어 같이 협업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어요. 저는 주로 코디네이터 역할을 한 것이죠. 특히 주거 프로젝트인 경우에는 한 사람의 설계보다는 여럿이 나눠서 하면 거주인들에게 더 유익한 주거환경을 만들 수 있거든요. 때로는 그런 일들은 빠르게 성과를 내야 하는 디벨로퍼를 건축주로 맞이하면 설득하기가 힘들기도 하지만 저는 늘 그 입장을 견지해왔습니다. 같이 협력해서 일을 하면 설혹 서로 합의를 보지 못하더라도 서로 얼마나 다른가를 확인하는 것만으로 의미가 있다는 겁니다.

 

Q 4.3활동이 다음 세대로 연결된 게 있었을까요?

굉장히 중요한 게 변화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4.3그룹은 1993년에 책을 낸 것이 마지막 활동이었습니다. 아마도 서로를 이제는 너무 잘 알게 되어서이기도 했을 겝니다. 4.3그룹은 해산했지만 몇 사람들은 4.3에서 얻은 공의를 바탕으로 ‘건미준(건축과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에 참가하여 우리 사회의 잘못된 건축제도를 개혁하는 일에도 열심을 기울였고, 그 이후 우리 건축의 근본적인 문제는 교육에 있다고 판단하여 보다 다양한 건축인들을 규합해서 ‘서울건축학교(sa)’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 서울건축학교를 10년 정도 운영했는데 이 과정에서 기존의 건축 교육기관들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당시 WTO의 권고도 있어 우리나라의 건축교육제도가 급히 바뀌어야 할 필요가 생기기도 했지만, 서울건축학교가 한국 건축교육의 개혁에 촉매로 작용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일 겝니다. 기존의 건축 관련 대학들의 교육과정이 바뀌는 것을 보고, 서울건축학교는 한예종(한국예술종합학교)이 대학원을 만들면서 이 과정으로 변환되어 새로운 제도권이 됩니다. 서울건축학교의 후신이 한예종 대학원이니 중요한 성과라고 할 수 있죠. 제도도 바뀌고, 학교도 바뀌고 또 덕분으로 새건축 운동이 일어나서 결국은 현재의 새건협도 태동한 셈입니다.

 

Q 편집국장으로서 확인하는 것이 건축계 내 갈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이 과정도 치유되거나 개선이 되어 서로 개방적인 시각으로 만나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단순히 불만만을 토로해서는 안 되겠지요. 제가 주장하는 의무가입이라고 하는 것은 건축허가제도를 선진국 수준의 시스템으로 바꾸는 일환이고, 이렇게 되면 건축사에게 많은 혜택 속의 좋은 환경이 제공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하나의 조건으로 자정적 징계 장치를 마련하자는 것입니다. 거기로 가는 단계로서 의무가입입니다. 대한건축사협회도 건축계를 아우르기 위해선 대단한 변신, 변화의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여러 가지 개선되는 건축제도가 오히려 개악이 될 수가 있습니다.

 

Q 4.3활동이 교육계에도 영향을 줬지만, 건축정책에도 크게 영향을 줬다고 생각하는데요. 국가건축정책위원회도 이에 뿌리를 둔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렇습니다. 건축이 단순히 건설의 행위가 아니라 문화의 중요한 현상이며 역사적 기록이라는 바탕에서 그 가치를 공유한다고 여깁니다. 저 같은 경우 설계하는 사람으로서의 공공적 가치와 윤리를 4.3의 과정을 통해 습득했으니 그때 배운 걸 실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4.3이나 건미준, 서울건축학교 같은 문화운동적 차원의 활동이 아니었으면 지금의 공공영역에서 복무하는 저를 생각하기가 힘들었을 겁니다. 저 만이 아닙니다. 지금 지방자치단체들에서 총괄건축가 직무를 맡고 계신 민현식(경상남도), 김인철(부산시), 이성관(대전시) 선생이 다 4.3의 멤버들이었으니까 4.3그룹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고 봐야죠.

 

Q 선배님들 뵈면 현업이시고, 제도개선에도 직접 참여하시는데, 후세대에서는 현업군과 학교가 분리된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학계의 발언권이 오히려 커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학계의 발언권이 현역, 건축사 발언보다 정부나 공공기관에서 더 신뢰받고 있는 것 같다는 거죠.

건축사들은 개인적 작업을 하는 입장에 있다 보니 공적인 입장이 아니고, 교수는 공적이라고 생각해서 정부나 공공기관에서는 건축사보다 교수를 대하기가 쉽겠죠. 그건 무책임한 사고라고 말할 수 있어요. 또한 위원회 제도 자체가 어떻게 보면 공무원들이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한 제도이기도 한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교수들이 위원회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책임지지 못하는 발언들과 결과가 심심찮게 도출되어 위원회에 대한 회의가 늘 있게 됩니다. 사실 좋은 위원회라면 중지를 잘 모으는 것이니 학교보다는 현장에서 수많은 사건을 겪고 있는 건축사로부터 나온 지혜가 더욱 유효하다고 생각합니다. 단 그 건축사가 공적 가치를 신봉하느냐가 전제되어야 하겠지요.

 

Q 4.3의 힘이라면 실무경험과 집요한 논쟁과 학습을 했기에 현재의 아웃풋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각종 위원회에 가보면 그냥 오시는 분들 많다는 거예요. 그런 부분에 대해 밸런스를 맞출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개인적인 문제의식이 있습니다.

위원회가 워킹그룹이 되어야지 자기 일이 아닌 양 혹은 존재의 과시를 위한 비판만 하면 없느니 보다 못한 프로세스가 되는 겁니다. 위원으로 위촉되면 그 커뮤니티에서 적극적으로 가담해서 실제로 일을 해야 하고 서로 결과를 나눠야 합니다. 아무 준비 없이 파편적이고 단편적인 생각들을 뱉고 가는 위원회는 마땅히 폐지되어야 합니다. 불행하게도 현재 우리가 꾸리고 있는 많은 위원회가 그런 것이 문제이지만…….

 

Q 4.3과는 다른 문제인데, 심의를 없애자고 하셨는데 그 부분은 저도 축소가 맞다고 생각합니다.

면허라는 단어가 원래 허가를 면해준다는 뜻이지요. 운전사가 운전할 때 허가를 받지 않고, 의사가 수술할 때 허가 받지 않는 것처럼 국가가 자격과 면허를 줬으면 그 사람을 믿고 행위를 하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국가가 허가권을 갖고 있으면서 책임은 안 지지요. 다른 나라의 경우를 보더라도 현재의 우리의 허가제도는 잘못된 제도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걸 폐지하듯 개선하자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되면 면허를 소지한 사람의 태도가 굉장히 중요해집니다. 자기 책임 하에 설계하고 잘못하면 철저히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니까요. 이렇게 되면 심의가 필요 없게 되겠지요. 국가가 자격을 줬고 그 안에서 행하자는 것이니까 모든 것이 명확해집니다. 도면에 자기 이름의 도장을 찍을 때 이 모든 것을 책임진다는 확실한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공무원은 자격 있는 사람의 날인 여부만 확인하면 되는 것입니다. 허가는 기존 법규를 어겨서 설계할 때 공공의 이익에 부합되는지 위배되는지 그럴 때만 필요하게 되는 거죠.

 

Q 특정 지역의 경우 공공건축가에 간판업자가 들어가고, 일부 지역의 총괄건축가에는 도시계획분야 분이 선임됐더라고요. 자격기준에 대해 아쉬운 점이 있습니다.

지방의 자치단체에도 총괄건축가 제도를 확산시키는 일도 국건위의 중요한 과제여서 저는 지방자치단체장들과 이와 관련한 회의를 연속으로 진행해 왔습니다. 그럴 때 총괄건축가의 인선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임의대로 뽑는 경우 적절한 사람이 뽑힐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예상되는 문제가 많지요. 우리에게 이런 제도의 시작단계에 있어서 당분간 문제도 발생하겠지만 결국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다만 서로의 문제를 공유하는 게 필요하다 싶어 일관된 규례를 구상 중에도 있습니다.

 

Q 다시 4.3으로 가서 제 기억 속에는 10년 정도 활동했다고 생각했는데, 4년 활동하셨습니다. 그럼에도 건축계 임팩트는 크다고 봅니다. 저는 이런 움직임이 계속 이어지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는데, 방법이 있을까요?

4.3그룹은 그 임무가 끝이 난거죠. 이제 젊은 세대에서 이런 류의 모임이 나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뿐만 아니라 다른 형태의 여러 모임이 나와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자기 개인 스스로에게 만족하는 것 같아서, 그게 이제 불안해요. 결코 개인이 완벽할 수 없거든요. 앞에서 강조한대로 연대하는 게 중요해요. 강제적으로 만들 수도 없고 해서 기다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사실 4.3 그룹에서 구성원이 애초부터 대단했던 것은 아닐지도 몰라요. 멤버들 모두가 자기를 버리고 다듬어서 단단해진 것입니다.

 

Q 이제 4.3그룹은 현직에서 보면 원로급이 되셨는데, 회고전과 같은 행사를 혹시 준비하고 계신 게 있을까요?

올해가 30년이 되는 해여서 뭔가 기념할 만한 좋은 시기인 것이 틀림없어서, 지난주에 참 오랜만에 한번 모였어요. 뭘 하자고 얘기가 나오긴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건축에서 은퇴하다시피 한 분도 있고, 건강이 불편한 이도 있고 해서 무엇을 같이 하자는 일은 어렵다는 걸 확인하고 말았습니다.

 

Q 낮에 만난 한 건축사가 자기 꿈은 아틀리에로 가는 게 꿈이고, 모델이 되는 선생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비교적 젊은 건축사들에게는 4.3 건축사들이 훌륭한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사실 4.3의 여러 분들, 어떤 분들은 저보다도 나이가 많은데 여전히 현역으로 설계를 하고 있는 게 전 시대 선배들의 조기은퇴 현상을 생각하면 참으로 다행스럽고 감사하게도 여깁니다. 그게 4.3의 시간 덕분이라고도 여기기도 하고요.
저는 이제 공공 영역 복무를 4월에 마치고, 건축사 고유의 직업으로 복귀한다고 말해왔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런 공공영역의 활동도 제 자신의 건축을 연마하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르고 또한 그렇게 바라고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건축설계는 다른 이들의 삶을 조직하는 일인 만큼 나이 들어 삶에 대한 지혜와 세상 이치에 대한 이해가 더해지면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렇기 되기 위해서는 젊을 때부터 치열하게 무장을 해야지요. 좋은 이념과 담론이 없는 나이든 건축사에게 누가 일을 의뢰하겠어요? 대부분이 그렇게 일을 그만두는 겁니다.

 

Q 젊은 세대들의 경우 지금 먹고 살기도 힘든데 우리에게 많은 걸 요구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그런데 간과하는 것이 사실 그때도 힘들었을 거라는 말이죠.

(웃음) 저는 젊었을 때 무척 힘들게 살았지만 요즘 젊은 친구들이 듣기 싫어해서 그 이야기는 요즘 안 합니다. 그보다는 건축의 공공적 가치에 대한 이야기를 부쩍 하고 있습니다. 오래전에 한 건축주가 10층짜리 건물을 지어달라고 하는데 제가 보니까 주변과 어울리지 않아 6층만 제안한 일이 있었습니다. 건축주와 이 일로 의견이 다르게 되고 제가 의견을 굽히지 않았으니, 그 건축주는 그냥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4.3그룹 멤버들과 같이 어려울 때 서로 위로하며 쌓은 신념을 배반할 용기가 제겐 없었습니다. 그런 과정이 쌓이고, 어느덧 시간이 지난 후 그때 인연을 맺지 못했던 건축주가 다시 와서 당신 말이 맞다고 말하며 찾아오는 행복한 경우도 생깁니다.
다른 이들의 보다 나은 삶을 조직시켜주어야 하는 건축은 어떻게 보면 진리를 찾는 일이어서 시시때때로 고독하고 더러는 황망해요. 그래서 연대가 필요합니다. 혼자 하면 금방 포기하지만 같이 있으면 절대 쉽게 포기 안하거든요. 연대가 중요합니다.

대담=홍성용 편집국장, 글 장영호·박관희 기자, 사진=장영호 기자

4.3그룹이 30주년을 맞아 지난 2월 17일 종로 몽중헌에서 회동을 가진 후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왼쪽 두 번째부터 4.3그룹(14명) 구성원 중 ‘승효상·백문기·방철린·민현식·동정근·이성관·곽재환·우경국·김인철’. 석정훈 대한건축사협회장(왼쪽에서 일곱 번째), 박성준 대한건축사협회 이사(왼쪽 첫 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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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비평 _ 아름다운 비례를 가진 건축, 카페 조슈아

Architecture Criticism
Architecture with Beautiful Proportion, Cafe Joshua

건축의 기본은 무엇일까? 시대마다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고 건축 또한 세상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에 대처한다. 그러나 무언가 건축의 기반을 이루는 생각이나 자세가 있을 것이다.
현대의 건축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세상이 복잡해지며 세상을 닮아가는 것인지 건축은 점점 복잡해지고 화려해진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화려한 겉모습에 비해 빈약한 내면을 가지고 있는 건축이 많아지고 있다. 시대를 막론하고 건축에는 분명 아주 중요한 기본이 있고 추구해야 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포근한 겨울의 한 가운데에 고속도로와 국도를 섞어서 달려 평택 시내를 벗어나 바야흐로 논과 밭이 펼쳐지고 평택호와 서해안으로 들어가는 물길, 안성천이 흐르는 벌판에 들어섰다. 그곳에 높지 않지만 오똑하니 서 있는 하얀 건물이 한 채 서있다. 평택의 외곽에 도심이 끝나는 곳, 평야가 시작되는 곳에 지은 건물인데, 끝과 시작이 맞붙어있고 도시라는 수직과 평야라는 수평이 맞붙어 있는 장소이다. 동네 이름은 평택시 통복동인데 마치 두 개의 다른 차원, 혹은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 같다는 생각이 든다.
커피향이 층고가 높은 실내에 잔뜩 퍼져 있는 안으로 들어갔다. 빵과 커피의 향은 기호를 떠나서 사람의 마음을 눅여주는 기능이 있다. 그리고 수평의 구도 역시 사람의 마음을 눅여주고 한없는 평화를 느끼게 한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건축이란 땅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주변과 상호작용을 하면 자리를 잡고 형태가 드러난다. 그러나 이곳에는 그런 맥락이 없다. 주변은 광활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넓고 시야는 툭 터져 있다. 다시 말해 땅이 주는 정보가 별로 없어서 스스로 성격을 부여하고 존재를 만들어 나가야하는 상황이다. 마치 김제 평야에 나트막한 동산인 백산이 랜드마크 역할을 하는 것처럼 이곳에서도 이 건물은 어디에서나 인지된다.
그래서인지 이 건물은 크지 않은 덩치이지만 산처럼 느껴진다. 하얀 외벽에 낮은 경사지붕은 작은 산처럼 보인다. 직사각을 비스듬한 사선으로 가르고 일정하지 않은 경사를 주어 4면의 입면이 모두 다르다. 경사의 느낌이 다른 네 면은 주변에 대한 반응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북쪽의 도심과 남쪽의 평야에 대한 반응이고 앞으로 확장될 도심에 대한 반응이다. 그런 느낌은 내부에서도 드러난다.
사선으로 가른 지붕 안에는 1/3부분이 통층으로 되어있고 그 안에는 일정하지 않은 위치에 창문이 달려있다. 그 창들은 무엇을 보아야 할지 애매한 창문이다. 여름에는 나뭇잎이 보이고 겨울에는 하늘이 보인다.
일정하지 않지만 리듬이 느껴지는 창문이다. 그건 마치 어떤 실내에 들어서는데 편안한 느리기를 가진 음악이 나오는 것처럼 안정감을 준다. 그리고 외부와 내부의 비례가 무척 좋은 건물이다.
“비례라니!” 참으로 오랜만에 떠올리는 단어라는 생각이 든다. “건축의 아름다움은 비례에서 온다.” 물론 이런 이야기를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대학에서 건축을 배울 때 가장 궁금한 것이 비례에 대한 이야기였다. 건축가들의 화려한 수사를 들어도 봤고 아름다운 비례를 가진 건물의 분석도를 보고 수업시간에 설명을 듣기도 하였지만, 도통 그 미감이 와닿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적용하기가 어려웠다. 가장 아름다운 비례? 그건 마치 내가 무척 오래 공부했지만 여전히 알아듣지 못하는 미국인의 언어와 비슷한 것이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런 의문만 품은 채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왔다. 구구단을 외우지 못한 채, 혹은 맞춤법을 익히지 못한 채 초등학교를 졸업한 학생처럼 어딘가 한 구석이 휑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공부한답시고 답사를 다니기 시작했다. 옛날 살림집도 답사하고 오래된 사찰도 구경했다. 역시 책에서 보고 말로 듣는 것보다 훨씬 와닿는 것이 있었다. 그러나 비례에 관한 의문은 말끔히 해소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일 년에 한번 쓸 수 있는 휴가 1주일 답사를 한 적이 있다. 90년대 중반이었는데 석탑과 불상을 위주로 계획을 짰다. 전북 부안에서 시작해서 고창, 영광, 해남, 구례, 하동 등을 거치며 서해안과 남해안 일대를 도는, 말하자면 국토의 남쪽을 디귿자 형태로 도는 여정이었다. 무척 많은 탑을 보았고 무척 많은 불상을 만나봤다. 모두 그 시대의 얼굴과 그 시대의 미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내가 뭉뚱그려서 알고 있던 불교 조각과는 무척 다른 개별성을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분류해서 볼 수 있는 감식안과 여러 시대를 통틀어 볼 때 얻어지는 통시적인 눈이 조금 열리기 시작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가지 석탑을 보았는데 고려시대의 약간 웅크린 듯한 느낌이 드는 탑들도 보았고 보림사에 있는 신라말기에 만들어진 수려한 석탑도 보았다.

그러다 일주일 여정의 마지막 종착점은 경주였다. 경주는 아주 익숙한 도시이고 약간은 식상한 도시이다. 그 중 불국사는 식상함 그 자체라 할 수 있는데, 그 곳에 다시 가서 본 마당에 석가탑이 서 있었는데 내가 알던 석가탑이 아니었다. 화려한 광채를 내뿜고 있는 마치 금강석으로 빚은 것 같은 탑을 보게 된 것이다.
왜 나는 그 동안 석가탑의 진가를 몰랐을까. 그리고 왜 탑은 그대로 있는데 지금 아름다워 보이는 걸까. 답은 석가탑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비례였다. 내가 여러 가지 탑을 보고 삼층석탑의 완성이라는 석가탑을 보게 되니 차별성을 느끼게 되었고 그 비례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아름다운 비례는 숫자로 표현하고 그 숫자를 익히는 것이 비례 이전의 무엇이라고 생각한다. 편의상 숫자로 비례를 표현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편의상이고, 사실 비례는 사람의 손이나 사람의 눈에 들어있다. 혹은 우리 감각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이라고 생각한다. 건축을 공부하는 것은 바로 그런 안목을 키우는 일이고 그런 감각을 손에 집어넣는 일이다. 비례는 손에 있다. 많이 그려보고 많이 본 사람의 손 안에 비례가 있는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손에 미켈란젤로의 손에 아름다운 비례는 있었고 김홍도의 손에 겸재의 눈에 비례는 들어와 있다. 그것은 오랜 시간의 숙련기를 거쳐야 얻어지는 것이다. 건축은 그 지점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이 집에 와서 집을 둘러보며 아주 오래 전에 헤어진 친지를 만나는 것처럼 반갑게 비례라는 단어가 떠올랐고 불필요한 수사를 걷어낸 단정하고 힘 있는 문장을 만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 건물에는 거추장스럽고 수다스런 건축의 어휘는 거의 없다. 단정하게 건물의 매스를 결정하고 가장 기본적인 디테일을 집어넣었다.
오랜 시간 설계를 하고 규모가 큰 건물을 많이 설계했던 이인호 건축사는 그 안에는 그간 갈고 닦았던 건축의 기본을 착실히 채워 넣었다. 대개 상업적인 용도의 건물은 사람의 눈에 띄어야하고 많은 허장성세가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건물은 흰색과 단정한 경사지붕 뿐이다.
정연한 가로선과 세로선이 있고 기울기가 다른 두 개의 사선이 자연스럽게 만난다. 그리고 크기가 다른 정방형의 창문들이 벽면에 배열되어 있다. 그 창문들은 내부에 다양한 풍경을 집어넣었다. 높이가 다른 창문들은 하늘을 보여주기도 하고 너른 들을 보여주기도 하고 무수한 사선으로 보이는 나뭇가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맥락이 없는 대지이며 맥락이 생기기 시작하는 대지에 이 건물은 과장된 표현이 없이 건축 본연의 아름다움으로 건물을 세웠고 그런 아름다움이 들판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글. 임형남 Lim, Hyoungnam 건축사사무소 가온건축 · 건축사

임형남 건축사사무소 가온건축 · 건축사

임형남 건축사는 땅과 사람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둘 사이를 중재해 건축으로 빚어내는 것이 건축사의 역할이라 생각한다. 1998년부터 가온건축을 운영하고 있다. ‘가온’이란 순우리말(순한국어)로 가운데라는 뜻과, ‘집의 평온함(家穩)’이라는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다. 가장 편안하고, 인간답고, 자연과 공존하는 집을 만들고자 한다. 금산주택, 루치아의 뜰, 신진말 빌딩, 존경과 행복의 집, 언포게터블, 미장아빔 등을 설계했다. 적십자 시리어스 리퀘스트, 유니세프 관련 청소년 시설, 북촌길·계동길 탐방로 등 도시․사회 관련 설계를 진행했다. 조선일보, 세계일보 등에 건축 관련 칼럼을 연재하고 있고, 『그들은 그 집에서 무슨 꿈을 꾸었을까』, 『사람을 살리는 집』, 『나무처럼 자라는 집』, 『작은 집, 큰 생각』, 『이야기로 집을 짓다』, 『서울풍경화첩』등 11권의 저서를 냈다.
studio_ga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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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과 삶 일과 사랑을 담은 하얀 집…커피家 좋다

Architecture and Life
A white house with work and love… I like Coffee House(家)

건축(建築)이 어떻게 우리의 삶을 품격 있고 풍요롭게 변화시키는지, 건축사가 이를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는지 전해드리기 위해 월간 건축사가 건축주를 직접 만나 그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건축사(建築士)는 건축을 만드는데 끝나지 않고, 그 속에 담기는 우리들의 삶까지 그 집과 더불어 건축하게 됩니다.
삶을 바꾸는 공간의 힘과 우리네 소박한 삶을 품고 있는 건축, 그리고 삶을 조직(組織)하는 건축사의 건축에 대해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건축주 이상준, 김현정 부부. 카페 전면에 설치된 창을 배경으로 환하게 웃고 있다.

누구나 살고 싶은 집에 대한 로망이 있다. 하지만 막상 구체적으로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누구와 무엇을 하며 살지, 가족의 ‘생활’을 먼저 그려야하기 때문이리라. 여기, 자신들의 생활과 꼭 닮은 집에서 사는 부부가 있다. 지난해 11월에는 그 집 단풍나무 아래 정원에서 결혼식도 치렀다. 건축주인 SBS 8기 공채 개그우먼 김현정 씨와 그녀의 남편 이상준 씨, 그리고 이들의 보금자리를 설계한 이인호 건축사 세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결혼을 앞둔 예비부부가 원한 것은 집과 카페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건물이었다. 건축사 입장에서는 고민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한정된 예산과 (두 사람이 운영할 수 있을) 규모 내에서 몇 가지 스케치를 그려봤지만 주변과의 조화를 생각하면 이내 막막해졌다. 시내에서 벗어난 그곳은 공장과 차고지가 전부인 허허벌판이었다. 외지인 입장에서 주변 정서를 모르니 그곳에 어울리는 집에 대해 감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한편, 같은 시기에 현정 씨의 심정도 복잡했다. 이년 전 예산에 맞춰 이곳을 선택하긴 했지만 인적 드문 벌판을 보고 있으면 ‘여기서 장사하며 살 수 있을까’ 고민이 됐다. 상준 씨와 함께 주한 스위스 대사관(설계_버트하르트 파트너社의 건축사 니콜라 보셰, 이인호 건축사) 개관식에 참석했을 때 현정 씨는 또 한 번 주저했다. “이런 분이 그 시골에 우리 집을? 대사관을 보니 부담스러웠어요.” 반면에 상준 씨는 같은 이유로 이인호 건축사가 그들의 집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멋진 대사관을 만든 분이잖아요. 그분이 맡아주시면 영광이죠.”
개그우먼으로 살아온 여자와 서울에서 카페를 운영한 남자가 어떻게 만나서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는지……, 진솔한 부부의 이야기를 듣자 건축사의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다.
“기존 카페에서는 볼 수 없는, 약간 독특할 수도 있는 카페를 만들자, 여기에 이들의 재능과 정성이 더해지면 틀림없이 장사가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웃 할머니가 선물한 개나리꽃. 그새 새 잎이 났다.

좌우 경사가 다른 지붕…부부를 닮은 ‘하얀 집’

조슈아카페는 카페 운영과 거주를 동시에 할 수 있도록 이층으로 설계됐다. 층별로 공간을 분리했다. 건축사는 부부의 생활이 자연스레 녹아들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데 초점을 맞췄다. “남편은 반듯한 인상이고 아내는 오래 전에 알고 지낸 사람처럼 친근하면서도 통통 튀는 매력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지붕을 대칭으로 설계했었는데 이들을 만나고 몇 번이나 바뀌었죠. 지붕의 용마루를 사선으로 돌리고 지붕 경사도를 좌우가 다르게 변형시켰어요. 덕분에 심플해 보이면서도 개성 있는 집이 완성됐습니다. (건축주를 바라보며) 닮지 않았나요?”
처음에 부부는 건축사의 이 ‘특별한 기획’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황량한 주변에 비해 튀지 않을까 우려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얀 설계 모형물을 본 후부터 부부는 건축사를 전적으로 신뢰하게 됐다. 건축사는 회벽을 바른 옛 초가집을 생각해서 콘셉트 색상을 화이트로 정했다. 의도대로 하얀 엠보싱 텍스처로 마감한 외관은 햇빛이 드는 위치에 따라 다양하면서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한편 주변과도 조화를 이룬다. 여러 부분으로 꺾인 지붕과 이층까지 뚫려있는 높은 천장은 카페를 보다 입체적이고 열린 공간으로 만들었다.
가장 힘을 준 부분은 ‘창’이다. 건축물 앞에 설치한 전면 창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논밭 풍경을 카페 안으로 자연스럽게 끌어들인다. 새벽에는 푸른빛 공기를, 저녁에는 살구 빛으로 물든 평야를 볼 수 있고, 풍경에 따라 분위기가 변화하니 카페 공간이 자연과 함께 움직이는 듯하다. 뒤쪽에 높게 단 작은 창문들엔 나뭇가지와 파란 하늘이 그림처럼 걸려 있는데, 이 또한 다른 카페에서는 보기 드문 광경이다. 모든 창은 채광, 조망, 기능 등을 고려해 설치됐다. 또 대부분 창틀에 각도를 줘 시간의 흐름에 따라 빛이 머무는 부분이 달라지도록 했다.
2층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외부가 아닌 카페 주방에서 시작된다. 계단으로도 큼지막한 창이 있어 주변에 펼쳐진 정원과 유치원 등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집 내부 천장 역시 지붕 형상에 따라 각기 다른 경사가 있어 방마다 분위기가 다르게 느껴진다.

 

지난해 11월 카페조슈아 마당에서 올린 결혼식 사진.
사진=김현정, 이상준 부부

쉬운 듯 어려운 집, 그리고 그곳을 찾는 사람들

카페조슈아는 지역 인사들이 보러 올 정도로 지역에서 개성 있는 건물로 자리 잡고 있다. 오픈한지 이제 두 달 차에 접어들었지만 개업 첫날부터 지금까지 주말마다 카페조슈아의 공간감과 경치를 즐기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는다. 건축사는 이를 인터넷의 힘이라고 말하지만 그 힘의 원동력이 건물임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를 짚어주자 건축사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천장이 정형이 아니라 경사가 있다 보니 건축 현장 분들이 무척 힘들어했어요. 평범하지 않은 설계라 그분들도 아마 처음 접하는 도면이었을 거예요. 몇 번이나 다시 뜯고 공사하면서 골조를 맞췄죠. 쉬운 듯 어려운 집이었습니다.”
쉬운 듯 어려운 집. 그 말에 부부도 고개를 끄덕거린다.
“공사하는 동안 소음 때문에 이웃 분들이 고생하셨을 텐데 오히려 이곳이 지어지는 것을 보러 구경도 오고, 젊은 사람들이 외지에서 왔다며 환영도 해주셨어요. 완공 후에는 이곳 덕분에 동네 분위기가 달려졌다고 칭찬도 해주셨고요. 저희 때문에 회의도 했대요. 이곳이 잘 돼야 동네가 좋아진다고. (웃음) 며칠 전에는 근처에 사는 할머니께서 개나리를 꺾어 선물로 주셨는데, 그새 새 잎이 났네요. 이곳을 위해 많은 분들이 도와주셨어요.”
도시에서 만난 젊은 남녀가 낯선 땅으로 와서 집을 짓고 부부의 연을 맺었다. 용감한 선택의 연속들이었다. 지금 그들은 평택 땅에서 고소한 커피를 내리며 달콤한 시절을 즐기고 있다. 새로운 인연들은 늘어가고, 부부 사이는 더 단단해진다. 그러는 사이, 의문의 장소는 어느새 낯선 이들이 모이는 새로운 풍경으로 바뀌어간다.
“이곳에서 논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져요. 무중력 상태에 있는 기분이랄까요. 풀벌레 기어가는 소리가 들릴 것처럼 조용해요.” 현정 씨의 말을 건축사가 이어받는다. “아마 멀리서 보면 이 집 역시 자연처럼 보일 거예요. 산을 보면 정형이 아니라 한쪽은 낮고 한쪽은 조금 내려가 있잖아요.”
건축사는 부부를 닮은 집을 만들었고, 그 집에 사는 부부는 지금, 자연을 닮아가는 중이다.

글 이유리 기자 · 사진 장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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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서부 광야, 그랜드 서클

Wilderness of the American West, Grand Circle

그랜드 서클(Grand Circle)은 한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무려 열세 시간 이상을 가야 도착한다. 지루한 시간이 지나가면 거대한 아메리카 대륙이 가슴에 확 와 닿는다. 라스베가스다! 그랜드 서클을 지나는 관문에 있다. 라스베가스를 뒤로 하고 다시 일곱 시간을 차로 달려가야 드디어 그랜드 서클 서쪽에 있는 페이지(page) 시에 도착한다.
그랜드 서클은 아리조나 주, 유타 주, 네바다 주, 이 세 개 주가 연결돼 지도로 보면 커다란 원형 관광벨트처럼 보인다. 그래서 이곳이 그랜드 서클이다. 이곳은 많은 사람들의 버킷리스트에 랭크되었고 각 방송국들이 앞 다퉈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기도 한, 세계적인 관광지다.
이 지역을 탐방하는 동안 여러 가지 감회를 느꼈지만 그 중에서도 아직까지 뇌리에 남아있는 것은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태도다. 이방인을 대하는 정겹고 온화한 태도, 법을 정확하게 준수하며 살고 있음직한 그들의 생활 태도, 그리고 어디를 가도 쓰레기 하나 볼 수 없이 잘 유지되고 있는 자연에 대한 이들의 배려심이 인상 깊다. 이런 면모들이 오늘날 거대한 미국의 위상을 형성한 원동력이 아니었을까?

경이로운 수만 년의 세월, 브라이스 캐년
유타주 남부에 펼쳐진 거대한 원형 땅에 자리한 브라이스 캐년은 자이언 국립공원에서 보면 북동쪽으로 대략 85마일 거리에 있다. 일출과 일몰 때 후드라 불리는 핑크색 바위 수백만 개가 빛을 발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무수한 바위들이 몇 만 년의 세월을 거쳐 비바람에 깎이면서 형성되었을 것을 생각하면 경이로움을 느낀다.

서부영화의 단골 촬영지, 모뉴멘트 밸리
애리조나 주와 유타 주 경계, 동쪽으로는 뉴멕시코 주 근처에 위치한 모뉴멘트 벨리(Monument Valley). 끝없이 펼쳐진 붉은 평원과 거대한 바위기둥, 언덕, 나바호(Navajo) 인디언 마을들로 새로운 감흥을 불러 일으킨다. 이곳은 서부 개척 시대에 백인들에 의해 수많은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죽임을 당한 불행한 역사가 깃든 곳이다. 하지만 동시에 나바호 인디언들의 영혼의 성지기도 하다.
인디언 자치 구역에 위치한 모뉴멘트 벨리 나바호 부족 공원은 서부영화의 단골 촬영지로 현재까지도 수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존 웨인이 활약했던 서부영화 속 익숙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면 마치 영화에 출연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말을 탄 채 절벽 끝에서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주인공을 상상하며 필자는 정신없이 셔터를 눌렀다.

빛이 부리는 마술의 공간, 앤틸로프 캐년
페이지 시내에서 약 11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앤틸로프 캐년(Antelope Canyon)은 업퍼 캐년(Upper Canyon)과 로우 캐년(Lower Canyon)을 통칭하는 곳이다. 업퍼 캐년은 입구보다 높은 곳에, 로우 캐년은 입구보다 낮은 곳에 형성된 계곡이다.
앤틸로프 캐년은 나바호 인디언 말로 ‘Tse’ bighanilini’다. 이는 ‘the place where water runs through rocks(바위틈으로 물이 흐르는 곳)’란 뜻이다. 그랜드 캐년이나 브라이스 캐년, 자이언트 캐년만큼 알려진 곳은 아니지만 자연의 신비와 빛의 마술을 체험하기엔 그지없이 좋다. 수만 년 동안 물이 흐르면서 이리저리 깎인 탓에 지금은 붉은 사암층의 협곡만이 남아 있다. 협곡 안으로 빛이 들면 반사된 빛이 붉은 사암층을 비춘다. 암석 계곡의 깊이는 40~50미터 정도다. 구불구불해서 하늘이 잘 보이지는 않지만 간혹 하늘이 보이는 공간에서는 직사광선 빛이 부리는 마술을 볼 수 있다. 바닥에 있는 고운 모래를 허공에 한 움큼 뿌리면 먼지와 빛이 떨어지는 듯이 아름답고도 마술 같은 현상이 펼쳐진다.

아찔한 절벽 끝, 호스슈 벤드
호스슈 밴드(Horseshoe Bend)는 콜로라도 강이 270도로 휘어 U자 형태로 흘러가면서 형성된 곳으로 그 모습이 말발굽을 닮았다고 해서 그 같은 이름을 갖게 되었다.호스슈 밴드가 해발 1,300미터 높이인데 반해 콜로라도 강은 해발 980미터에서 흐른다. 그러니 절벽 높이는 300미터쯤 되는 셈이다. 이곳에 서서 아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하고 어지럽다. 헌데 특이한 점은 높이가 수백 미터나 차이 남에도 불구하고 절벽에는 안전난간 하나 없다는 것이다. 절벽 끝에 서면 오금이 저릴 정도로 아찔한데 왜 안전난간을 설치하지 않았을까? 이따금 경치에 취해 호기를 부리다 추락하는 사고도 발생하는데 말이다. 미국인들만의 독특한 정서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참고로 필자는 절벽 끝에 엎드린 채 이 사진을 촬영했다.

너무 길고 너무 깊은 그랜드 캐년
미국 애리조나 주 북서부 고원지대는 콜로라도 강의 침식으로 생긴, 폭 0.2~29킬로미터, 길이 443킬로미터의 거대한 협곡이다. 애리조나 주 북쪽 경계선 근처 파리아 강 어귀에서 시작해 네바다 주 경계선 근처 그랜드위시 절벽까지 이어진다. 그랜드 캐년은 이곳에서 갈라진 수많은 협곡과 고원지대를 아우른다. 남과 북, 양 끝에 위치한 사우스 림(South-Lim)과 노우스 림(Nouth-Lim)의 거리와 깊이는 너무 길고 깊어 짐작조차 어렵다.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그랜드 캐년을 제대로 여행하려면 계곡의 가장 아래 지점인 콜로라도 강까지 꼬박 하루를 걸어서 내려가야 한단다. 계곡의 거대함이 새삼 실감난다. 사우스 림 끝에 서 있는 나 자신은 너무나 작다.

 

글. 김기성 Kim, Kisung 예가 건축사사무소 ·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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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건축 02 5th 에비뉴 애플스토어

Immortal architecture 02
Apple 5th avenue glass cube

건축법에서 재축(再築)이란 “건축물이 천재지변이나 그 밖의 재해(災害)로 멸실된 경우 그 대지에 다시 축조하는 것을 말한다”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신축, 재개발, 재건축 등 새로 짓는 것이 건축의 주류인 상황에서 재축된 건축물들을 소개하고 건축의 의미를 돌아보고자 이 연재를 준비했습니다.

거대한 20세기 건축물과 대비되는 투명한 glass cube

iPhone의 미국 내 시장점유율은 50%를 넘고, 글로벌 시장에서도 네 명 중 한 명이 iPhone을 사용한다. 스마트폰 절대강자라고 할 수 있겠다. 이 iPhone을 만드는 회사를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렇다. 바로 「애플」이다. 「애플」은 iPhone 외에도 iMac, iPod, iPad 등 다양한 제품들을 선보이고 있는데, 이 제품들은 모두 혁신적으로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통합 개발하고, 단순하지만 일관된 디자인으로 소비자를 열광시켰다. 거기에 자사 제품만 판매하는 전용공간까지 기업이미지를 확장시켜 「애플」이라는 브랜드를 완성했다. 그래서일까? 「애플」이 신제품을 출시하면 소비자들이 매장 앞에 줄을 서는 진풍경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졌다. 그리고 그 배경은 항상 「애플스토어」였다. 전 세계에 퍼져있는 「애플스토어」들 중에서도 뉴욕의 「애플스토어」는 「애플」 소비자들에게 성지 같은 곳이다. 디자인 과정에 「애플」의 창업자인 스티브 잡스가 관여했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유리로 만든 투명한 정육면체 형태가 「애플」의 기업 이미지를 건축적으로 가장 잘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이 건축물이 이번에 소개할 apple 5th avenue glass cube다.

apple 5th avenue glass cube는 가로 × 세로 × 높이가 각각 9m인 투명한 정육면체다. 건축물로는 작은 크기지만, 주변의 대형건축물들과 대비되어 특별해 보인다. 폭 3m, 높이 9m의 대형 유리 15장으로 만들어진 작지만 투명한 이 건축물은 「애플」을 상징하며, 인접한 20세기 건축물들과 겨루기라도 할 기세로 서 있다. 골리앗에 맞서는 다윗처럼 작지만 당당하다.

90장의 유리로 2006년에 만들어진 첫 번째 glass cube

15장의 유리로 2011년에 만들어진 두 번째 glass cube

유리를 사용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지만, 단점도 있었다. 투명한 유리는 glass cube의 디자인 의도를 잘 표현하지만, 충돌에 강한 재료는 아니다. 안타깝게도 2014년 1월 21일 제설차가 충돌하는 사고로 glass cube의 유리는 산산조각 났다. 사고의 전말은 이렇다. 뉴욕은 심한 눈보라가 몰아치고 있었고, glass cube 주변에서 제설작업 중이던 제설차가 glass cube에 충돌한 것이다. 15개의 대형 유리로 구성된 glass cube를 만드는 데, 약 670만 달러(2011년 기준)가 소요되었으니, 유리 1장당 대략 45만 달러 정도로 계산해보자. 단순 계산으로 1장에 4억 원 정도 하는 유리가 파손된 것이다.

당시 트위터 등 SNS는 이 사고소식을 전했고, 그중 일부 네티즌의 글에서 깨진 유리가 아름다운 작품 같다는 반응도 있었다. 이런 반응을 이해하려면 강화유리의 깨짐 특성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강화유리는 일반 유리와 깨지는 형상이 다르다. 일반 유리는 충격지점에서 방사형으로 갈라지며 길게 깨진다. 반면 강화유리는 깨질 정도의 충격을 받으면 표면장력이 파괴되면서 충격지점과 상관없이 유리판 전체가 작은 조각으로 산산이 깨진다. 교통사고가 났을 때 자동차 유리가 파손되는 모습과 비슷하다. 다행스럽게도 glass cube의 유리는 필름이 붙은 강화유리(laminated tempered glass)였다. 그래서 3m × 9m의 대형 유리가 깨졌지만, 깨진 조각들은 필름에 붙어있었고, 형태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다친 사람이 없었고, 행인들은 깨진 유리를 아름다운 작품으로 감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뉴요커들의 감성적인 시선에도 불구하고 보수는 곧 이루어졌다.

「애플」 입장에서는 많이 속상했을 것이다. 2006년 첫 번째 glass cube를 완성하고, 겨우 5년 만인 2011년에 개축했는데, 개축 2년 뒤에 제설차 충돌 사고로 유리가 깨졌기 때문이다. apple 5th avenue glass cube의 개축 과정은 이렇다.

첫 번째 glass cube는 사고가 있기 8년 전인 2006, BCJ (Bohlin Cywinski Jackson) 건축사사무소에서 9m(가로) × 9m(세로) × 9m(높이) 크기인 투명한 정육면체로 디자인을 했다. 전체 크기와 사용된 재료가 유리라는 것은 지금과 같다. 하지만 이때 사용된 유리는 약 1.5m(가로) × 3m(높이) 정도의 크기로 지금 유리보다 훨씬 작았다. 이렇게 작은 크기의 유리로 만들다 보니 90장이나 필요했다. 그래서 연결 부분이 많아지고 결속을 위한 부속들도 많아졌다. 투명한 정육면체라는 건축개념은 좋았지만 구축된 모습은 만족스럽지 못했을 것 같다.

「애플」의 디자인에 대한 집착 때문이었을까? 첫 glass cube는 오래가지 못하고 5년 만에 개축된다. 크기와 형태는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사용된 유리는 90장에서 15장으로 개수가 대폭 줄었다. 그만큼 유리 한 장의 크기는 커졌다. 두 번째 glass cube에 사용된 15장의 대형 유리는 중국에서 만들고 태평양을 건넌 뒤 아메리카 대륙을 횡단해서 뉴욕까지 긴 여정을 했다. 2011년의 개축에서 「애플」은 glass cube의 투명성을 높이는데 640만 달러를 들였다.

제설차 충돌로 유리가 파손된 두 번째 glass cube @krissyhotdogs

개축된 두 번째 glass cube에 사용된 약 3m × 9m 유리 크기를 대략 가늠이라도 해보자. 건물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한국의 아파트와 비교하면, 3층 정도 높이다. 가까이는 세종대로에서 비슷한 크기의 대형유리를 볼 수 있다. 동화면세점이 입점해 있는 광화문빌딩의 로비에 폭 2m × 높이 8m 정도인 유리가 설치되어 있다. 국내 최대 유리인 만큼 광화문빌딩 로비에서 느껴지는 개방감은 훌륭하지만 아쉽게도 눈으로 직접 확인하는 것은 어렵다. 홍보물이 전면 유리를 덮고 있기 때문이다.
유리는 얼마나 크게 만들 수 있을까? 지금의 유리(float glass) 생산방식은 1957년 상용화되었는데, 이론상으로는 원하는 길이만큼 유리를 뽑아낼 수 있다. 가래떡을 뽑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된다. 다만 유리의 가공, 운반, 설치 작업을 고려하면 적절한 크기로 자르는 것이 필요하다. 2011년 개축은 더 투명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기술적으로 만들 수 있는 최대 크기의 유리를 적용했다. 그리고 생산, 가공, 운반 그리고 설치까지 모든 과정에 최초가 붙는 어려운 도전을 한 것이다. 그래서 2011년 개축된 두 번째 glass cube가 갖는 건축적 의미는 크다.

두 번째 glass cube

특수 필름으로 감싼 세 번째 glass cube(2019)

최근 세 번째 glass cube가 공개되었다. 완전한 투명성을 지향했던 두 번째 glass cube와는 달리 세 번째 glass cube는 특수필름을 사용해서 다양한 색이 겹쳐 보이도록 했다. 부드러운 자연광을 지하 매장까지 유입시키는 독특한 천창들도 추가되어 내부 공간의 분위기가 변한 것도 주목된다. 이 작업은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Foster & Partners 건축사사무소의 디자인이다.

지난 15년 사이 「애플」은 기업을 상징하는 glass cube를 두 번씩이나 개축했다. 변화와 혁신을 지향하는 IT기업 「애플」답다. 이런 「애플」이라면, 몇 년 뒤 또다시 개축이나 리모델링을 하지는 않을까? 다음 개축을 한다면, 어떤 개념으로 어떤 모습의 개축될지 벌써부터 궁금하다. 그리고 5th avenue glass cube는 21세기 불멸의 건축으로 남지 않을까?

※ 국내 건축법은 재축과 개축을 구분한다. 천재지변 등 외부요인으로 건축물이 소실된 경우는 재축이고, glass cube처럼 건축물 소유자의 자발적 의사에 의한 경우는 개축이다.

글. 신민재 Shin, Minjae AnLstudio 에이앤엘스튜디오 건축사사무소

신민재 에이앤엘스튜디오 건축사사무소

한양대학교 건축공학부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Artech과 JINA에서 실무를 했다. 2011년부터 AnLstudio 건축사사무소를 공동으로 운영하며 전시기획에서 인테리어·건축·도시계획까지 다양한 스케일의 작업을 하고 있다. 2016년 젊은건축가(문화체육관광부) 수상자이며, ‘얇디얇은집‘으로 서울시건축상(2019)을 수상했다. 현재 한양대학교 겸임교수이자 서울시 공공건축가 겸 골목건축가이다.
shin@anlstudi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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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의 부장들’ 그리고 ‘홍등’

‘The Man Standing Next’ and ‘Raise The Red Lantern’

영화 속 공간은 단지 아름다운 무대 배경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의 내용을 보완하고 때로는 더 강력한 역할을 하는 제3의 주연일 때도 있다. 문득 2000년 즈음에 대한건축사협회가 주최한 건축영화제 토론회에서 들었던 패널의 발언이 생각난다. 미술감독이었던 그는 영화와 건축은 별개고 영화에서는 건축적 언어를 크게 다루지 않는다고 말했다. 영화 속 건축에 대해 책도 내고 이곳저곳에서 관련 이야기를 하고 있던 내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웠다. 그의 말대로 영화 속에서 공간이나 건축은 그저 액세서리로 다뤄지는 걸까. 당시에는 영화 시나리오의 짜임새도 약하고 자본이 취약한 시기였다. 미장센의 중요성에 대해 언급되는 일도 적었다. 때문에 책을 쓰면서 한국 영화를 소재로 사용할 때 거의 발굴 수준의 노력을 해야 했다. 주로 60~70년대 몇몇 영화, 80년대 후반부터 등장한 영화들, 예를 들어 이장희, 임권택, 이창동 감독의 영화들을 주로 다뤘다.
월간 건축사에 글을 연재하며 돌이켜보니 벌써 23년 전의 이야기다. 그 사이 한국 영화는 장족의 발전을 이뤘고, 영화는 더 정밀해졌다. 이야기 구조가 디테일해지고, 아무 의미 없이 등장하는 컷들이 적어졌다는 의미다. 하나하나가 은유고, 대사와 표정 외의 다른 장치들도 이야기를 완성하는 도구들로서의 제 역할을 한다. 대표적인 영화가 ‘기생충’이다. 이미 사지에 다룬 바 있지만, 이 영화에서 공간은 이야기 전체를 압축적으로 설명하는 일종의 시놉시스같은 역할을 한다. ‘기생충’을 보면서 1997년에 책을 쓸 당시 공부하듯이 보았던 히치콕의 공간과 장예모의 공간을 떠올렸다.

최근 정치 느와르의 영화 한편도 공간적 관점에서 흥미롭게 다가왔다. 최근 개봉한 ‘남산의 부장들’이라는 영화다. 서울 태생으로 70~80년대 청소년기를 종로 한복판에서 보낸 내 입장에서 이 영화는 지독히도 생생하게 느껴졌다. 1970년대 말에는 밤 12시가 넘어 통행금지가 시작되면 창덕궁에서부터 이화동 로터리를 지나 대학로 방향으로 탱크가 이동했다. 그 소리가 하도 크고 진동이 있어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집에서 시험공부를 하는 나에게까지 전달되곤 했다. 창문을 열면 이동하는 탱크들의 행렬을 볼 수 있었다. ‘남산의 부장들’은 그 당시 어른들이 겪었던 시간에 대해 다루고 있다.
궁정동 안가로 통하던 첩첩 요새의 공간은 창덕궁 옆 중학교를 다니던 나에게는 소문으로만 듣던 비밀스러운 곳이었다. 당시에는 권력의 중압감에 밀려 말조차 함부로 하기 어려운 시대였으니, 그곳은 비밀스러운 듯 비밀스럽지 않은 곳이었다. 그때 나는 중학생이었다. 중학생이란 신체 변화만이 아니라 생각에 있어서도 세상에 조금씩 눈을 뜨기 시작하는 시기다. 그때 나는 어른들의 세상이 궁금했고, 대학교를 다니던 형들의 대화도 신기했다. 학교에서는 비밀스런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이 많았지만, 학교 선생님을 비롯해서 수많은 어른들은 겁을 주며 비밀스런 이야기를 못하게 했다.
말하기 어려운 중압감이라고 할까? 그런 중압감은 경복궁 담벼락만큼 높았고, 또 조심스러웠다. 아마도 그런 것이 스케일이 주는 심리적 압박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의 위압감일 것이다. 비밀과 보이지 않는 압력. 어쩌면 그것이 1970년대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아니었을까?
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이런 시대의 압박과 무게를 잘 표현했다. 카메라가 공간의 켜, 담과 담 사이를 서서히 이동한다. 담이라는 것은 안과 밖의 경계인 동시에 아무에게나 개방되지 않은 그들만의 영역이다. 켜가 많을수록 쉽게 다가가기가 어렵고 통제된 사회다. 그 안에 자리 잡은 집은 익히 우리가 알고 있는 마음의 고향 같은 포근한 곳이 아니다. 집의 형태를 취한 비밀스러운 이들의 장소다. 수많은 켜들은 소리도 차단하고 사람들도 차단한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켜 바깥을 지난다 한들, 높은 담벼락 안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그렇기에 비밀스런 일을 하는 공간들은 가려진다. 수동형을 쓰는 이유는 이것이 숨는 것과는 다른 개념이기 때문이다. 자랑스럽다면, 그러니까 최소한 과시욕이라면 오히려 드러내려 할 것이다. 비밀이라는 말은 긍정적인 말이고, 은밀하게 해야 하는 행동은 숨을 곳을 찾아서 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가릴만한 건축의 요소들을 사용한다. 담을 쌓고, 해자를 파고, 길을 우회하고……. 이런 방식들은 인간의 역사와도 함께하는 건축적 테크닉이다.
남산 한켠에 있었던 중앙정보부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은 남산 터널을 지나 명동성당 방향에서 과거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세월이 흘러 누구나 사용하는 평범한 용도의 공간으로 바뀌었지만 도로를 향해서 조금 열려있는 그 시절의 창문은 한때는 두려움과 공포의 공간이었다. 1970년 남산을 간다는 것은 정보부 요원이 회사로 가는 길이었고, 그에 의해 강제로 끌려가는 이들은 인생을 포기하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주는 잔인한 곳이었다. 어린 시절에도 남산의 두려움을 누누이 들어 알고 있었다. 그 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몰랐지만 죽음을 불사하는 곳이었음은 막연하게나마 알았다.
‘남산의 부장들’은 마피아 조직의 잔인함과 폭력을 다룬 영화 ‘대부’처럼 채도를 높여 표현했다. 다소 낡은 듯한 화면 색상은 당시 공포와 위협을 한발 떨어져서 보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들 마피아와 남산의 공포주의 정치를 주도하는 비밀요원들이 같은 행보를 보이고, 그들의 공간 또한 유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남산의 부장들’은 공간의 구성과 배치뿐만 아니라 색의 사용에 있어서도 굉장히 건축적이다. 영상을 지나치게 선명하게 묘사했다면 감정이 잘 이입돼 공포를 느꼈을 것 같다. 바로 이 점에서 ‘남산의 부장들’이 영악한 선택을 했다는 것이다. 영화는 공포심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한발 물러선 관찰자의 시각으로 그 시대를 감상토록 했다. 이는 퇴색한 고성의 흔적을 보았을 때 느끼는 제 3자의 객관적인 시선과 비슷하다.
먼지가 쌓임으로써 건물의 색이 무채화되는 모양새에서 우리는 과거의 시간을 느끼고 관찰하게 된다. 의도치 않았더라도 이 영화 역시 그와 동일한 감성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영악하다. 지나친 감정이입은 영화를 영화로 보기보다는 정치적 프로파간다로 오해할 소지가 있다. 정치적 영화로 보여지는 순간, 영화의 가치는 평가 절하된다.

이 영화의 미장센을 보면서 권력과 암투, 질투와 폭력, 그리고 이런 저급한 동물적 경쟁을 다룬 영화가 중첩돼 떠올랐다. 그것은 장예모 감독이 만든 영화 ‘홍등’이다. ‘남산의 부장들’을 보는 내내 ‘홍등’이 연상된 까닭은 등장인물과 시대, 내용은 달랐지만 실제 은유하고자 한 핵심 내용은 유사했기 때문이다. 영화 ‘홍등’은 여주인공이 거대한 저택에 부잣집의 첩으로 들어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주인공 송련은 대학까지 나온 여자지만 당시의 시대 풍습과 문화를 이기지 못하고 떠밀리듯이 첩이 된다. 신여성들이 어떻게 이런 환경에 떠밀릴까 의문스럽지만 당시에 우리나라나 아시아권 여성들이 학교를 다니고 사회적 활동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인식도 좋지 못해서, 상류층 여성들이 오히려 거부하곤 했다. 덕분에 첩의 딸이나 기방 여성들이 그 혜택을 누리는 경우도 심심치 않았고, 교육을 통해 본인들의 신분을 벗어나는 일도 있었다. 송련의 배경이 설명되지 않아서 그녀가 부자의 첩으로 들어간 사연은 알 수 없지만 이런 시대적 상황을 이해하면 그녀 역시 신분이 높지 않았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 문제는 그녀가 네 번째 부인이라는 점이다. 송련은 집주인의 하룻밤을 놓고 다른 여인들과 경쟁하는 처지가 된다.
배운 여성이든 배우지 못한 여성이든 그녀들에겐 아무런 권한이 없었고, 시중을 드는 하녀와 다름없었다. 더 낮은 계급의 하녀들 역시 집주인의 선택을 받는 순간 그녀들과 동등해지는 상황이 되고, 그들이 아들이라도 낳게 되면 권력의 중심이 됐다. 홍등의 여자들은 누구도 이 구조를 깨려 하지 않았고, 구조에 갇혀 있는 여자들과 경쟁했다. 겹겹의 담벼락과 집 구조는 이 같은 사회 시스템을 깰 수 없는 상황임을 암묵적으로 보여준다. 카메라를 통해 조감도처럼 보이는 뷰는 사람들이 실제로는 보기 힘든 풍경이다. 높은 담 아래 사람들은 이처럼 전체를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사회 시스템이나 구조를 벗어날 생각을 못한다. 기껏 해야 눈앞의 경쟁자만 볼 뿐이다.
어마어마한 궁궐 같은 집은 쉽게 나가고 들어가기 어려운 켜의 중첩으로 되어 있다. 이 집의 주인을 만나는 것은 그가 신호를 보내고 찾아올 때만 가능하다. 선택권이 없다. 그렇기에 집주인의 선택을 받기 위한 첩들의 생존을 건 투쟁은 가히 필사적이다. 집주인의 선택을 받기 위한 첩의 몸부림은 한 국가 권력자의 총애를 받기 위해 애쓰는 부장들처럼 보인다. 그들의 시선은 다른 곳은 향하지 않는다. 오로지 한 명의 권력자를 향할 뿐이다. 도덕과 절차, 정당함 따위는 이들에게 의미가 없다.
홍등의 거대 저택은 ‘사합원’이라는 중국의 전통 주거 방식 중 하나다. 중국 베이징의 오래된 건물들이 왜 회색빛으로 채워져 있는 줄 아는가? 색은 황제만 사용할 수 있었다. 제한된 색 외의 다양하고 화려한 색을 사용하는 것은 권력에 대한 도전이고 반역이었다. 엄격하게 제한된 황제의 색인 자주와 붉은 톤이 섞인 오묘한 보랏빛 색과 유사해서도 안 됐다. 베이징의 전통가옥과 거리가 온통 회색인 이유는 반역의 오해를 피하기 위함이다. 회색은 자기주장이 없는 색이다.
자기주장이 없을 수 있을까? 인간은 욕망의 존재다. 색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자기 목소리를 숨기는 것이고, 그것은 공포의 결과다. 높다란 담을 쌓는 것은 보호의 목적도 하지만 자기를 숨기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베이징의 오래된 전통 건축들의 내실로 들어가면 회색을 벗고, 붉은색과 황금색 등 화려한 색들이 나타난다. 방으로 들어가면 온갖 색들로 화려한 그림과 색들이 가득하다. 외부의 억압에 대응하는 욕망의 표출이다.

영화 ‘홍등’을 보면 봉건사회의 여자들이 얼마나 열악한 환경에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그 시대의 그녀들을 불쌍하게 여기게 된다. 그러나 ‘남산의 부장들’과 놓고 보면 남자들 또한 권력자들 앞에서 마찬가지의 처지임을 알 수 있다. 일반 국민들 앞에서 ‘남산의 부장들’은 무섭고 두려운 존재지만 달리 보면 그들 역시 홍등에 등장하는 여러 부인들과 같은 처지다. 좀 더 뒤로 가서 크게 보고 내려다보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런 문제의 구조를 벗어날지 생각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홍등’과 궤를 같이 하는 건축적 영화로, 공간의 사회적 상징과 의미를 곱씹게 되는 영화다.
사실 건축은 정치와는 상관이 없다. 권력과도 상관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축은 정치와 권력에 활용되기는 한다. 감옥과 학교, 그리고 병원의 건축 구조는 유사하고 동일한 뿌리를 가지고 있다. 법원과 교회, 강당은 건축 평면의 뿌리가 같다. 시장과 거대 강당의 건축 구조는 유사하다. 사회가 변할수록 건축이 기능을 갖추면서 진화되고 세부 기능들은 가감되면서 변화한다. 현재의 구조가 정답이라고 하는 것도 위험한 발상이다. 사회적 변화만큼 세부 기능들이 바뀌면서 건축의 기능 역시 변한다.
그렇지만 건축을 사용하는 이들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서 건축이 만들어내는 공간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 생각을 자유롭게 만들기도 또는 경직되게 만들기도 한다. 이것이 사람들에게 끼치는 건축과 공간의 영향이다.

참고
영화 ‘남산의 부장들’ https://g.co/kgs/vsHoFb,
영화 ‘홍등’ https://g.co/kgs/GahC3q

글. 홍성용 Hong, Sungyong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은 건축사(KIRA), 건축공학 박사, 서울시 공공건축가로 건축의 크로스오버를 오래 전부터 주장했다. 국내 최초의 영화와 건축을 해석하는 <영화속 건축이야기, 1999> 을 시작으로 여행기, 마케팅을 연구했다. 건축사로 최초의 경영서적인 <스페이스 마케팅 2007>을 삼성경제연구소를 통해 출간하였고, 도시경쟁력 연구인 <스페이스 마케팅 시티, 2009>, 그리고 2016년 <하트마크>를 출판했다. 신사동 임하룡씨 주택, 근생 멜론 등 다수의 건축작품과 인테리어 작품들이 있다.
ncslab@ncsarchitec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