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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꼬만 간장과 로봇 시장과의 공존, 4차 산업혁명과 아날로그 건축

The 4th Industrial Revolution and Analog Architecture,
Coexistence of kikkoman Soy Sauce and Robot Market

 

일본은 전 세계에서 로봇 산업이 가장 먼저 개발되고 확산된 나라다. 이미 1970년대부터 제조 로봇 등을 개발하고 생산하기 시작했다. 현재는 1조 이상의 매출을 올리는 기업들이 상당하고, 세계 10위권 중 6개 기업 이상이 랭크돼 있다. 야스카와 전기나 가와사키 중공업 등이 그 존재들이다. 하지만 1970, 1980년대 로봇 기업들은 투자만큼 수익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때문에 일본의 저명한 경제 전문가도 내일의 미래 산업투자만큼이나 현재 취업률을 보장해주는 기꼬만 간장과 비교한 글을 기고한 적이 있다. 즉, 모든 산업이 첨단으로 간다고 할지라도 분명히 전통적 아날로그 산업도 존재한다는 뜻이다. 실제 8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일본의 로봇 시장은 기꼬만 간장 시장보다 작았다.

우리나라는 국가 중심의 어젠다를 선정하고 정부가 주도하는 산업 정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라다. 그런 만큼 역대 정부들은 매번 새로운 산업 지향점과 목표, 정책을 발표하고 있다. 이미 지난 여러 정권을 통해서 윤곽이 드러나기도 했지만, 알게 모르게 우리 생활 자체가 이미 첨단산업화의 한복판에 있다. 정부의 특정한 ‘~뉴딜’ 정책을 굳이 말할 것도 없이, 게임이나 IT, 지식 산업 기반의 판교 디지털밸리 내 연간 총 생산액을 보면 확연히 드러나는 사실이다. 그곳에서 연간 80조가 넘는 GRDP(지역내총생산)를 만들어내고 있다. 부산 지역의 제조업 벨트 GRDP 70조를 훨씬 상회하는 수치다. 벌써 우리 생활중심에 제4차 산업혁명이 와 있는 셈이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이미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매우 비관적이고 비판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환상처럼 달려가는 제4차 산업혁명의 결과가 매력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경제적 측면이나 과학의 측면이 아닌 사회적인 측면에서 그렇다. 인공 지능을 적극 활용하고 로봇을 노동에 무한으로 투입하면 고도의 생산성과 효율성을 장점으로 취할 수 있다. 그렇게 생산된 결과물들은 다양한 가격대와 품질을 보장한다. 최근에는 창조의 영역까지 만들어내고 있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의 참여도는 줄어든다. 나노 단위 시간으로 이어지는 다양한 인공지능의 연산과정을 따라가기 어려워졌고, 인공지능은 스스로 발전하고 학습하며, 실패와 오류를 점검하는 인공지능까지 등장했다. 생산 라인의 자동화 수준이 아니라, 생산을 설계하고 결정하는 과정까지 가능해진 것이다.

아마도 머지않아 모든 제조업뿐만 아니라 경제 활동에 생산되고 제공되는 상당수의 영역에서 사람들이 극도로 배제되는 상황이 올 것이 뻔하고, 이는 극심한 빈부 격차를 만들어 낼 것으로 보인다. 극단으로 보면 생산과 공급의 의사결정자들만 생존할 수 있다. 복지가 소비를 위한 최소한의 공급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 두려운 상황이다. 실업의 일상화다. 생산을 소비하기 위해 최소 단위의 복지를 만들어도 결국 모든 이익을 극소수의 집단이 독점하게 될 것이 뻔하다. 때문에 제4차 산업혁명의 위기와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주장이 나오고 있다.

반 기계화 운동으로 일컬어지던 러다이트 운동(Luddite Movement)이 새삼 21세기에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흐름에서 건축 역시 제4차 산업혁명의 흐름에 동반하고자 하는 다양한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다. 건축을 제조업으로, 고도 생산성 생산품으로 확장하자(?)는 주장과 실질적인 노력들이 나타나고 있다. 분명 앞으로의 건축은 그렇게 변할 수 있다. 이미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을 이용한 토지 분석은 이제 상당한 수준의 건축 계획까지 가능하게 한다. 직방이나 밸류맵, 랜드북 등 수많은 사이트가 등장하고, GPS와 빅데이터를 결합한 소비공간 분석이 가능한 기술까지 등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당연히 그런 흐름을 타야 성공의 자리를 보장받을 수 있다. 19세기 러다이트 운동이 있었지만, 결국 시대는 변했다. 이런 와중에 과거 어느 시대보다 소외될 사람들을 구제할 분야는 없을까?

천만다행으로 건축의 아날로그는 산업 구조 전체에서 유일하게 첨단 지식화에 합류하기 어려운 사람들에게 구제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유일한 분야다. 건축의 일부 특성이 아날로그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파급효과 또한 크다. 건축이 개인의 디자인 취향과 소비와 만나게 되면 생명력 또한 확보된다. 다만, 현재 우리나라 어떤 정책과 리더, 싱크탱크도 이를 주목하지 않는다는 점이 아쉽다. 아날로그 건축을 재조명해보는 것도 21세기 경제의 복지가 아닐까?

글. 홍성용 Hong, Sungyong 본지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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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공감_악몽

“이겨내고 있습니다만.

어린 시절 유난히 저를 괴롭혔던 꿈이 있었습니다.
빨간색 집안에서 무자비하게 자라나는 큰 나무.
자다 보면 어느새 가지에 휩싸여
하늘 높은 곳으로 쓸려 올라갔던 꿈.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그곳에서 바라보는 이 땅의 모습은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지옥을 연상케 했습니다.
성장하면서 두려웠던 그 악몽을 극복했던 방법은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찾아내는 것이었습니다.
멋진 경치, 배경, 사람, 색, 소리, 향기, 음식 등
오감의 만족을 채울 수 있는 것들에 대한 탐구였지요.
이러한 일상 속 일탈은 자연스레 여행과 관련이 지어졌고,
여행의 대표적인 콘텐츠는 역시 건축이라는 결론이 내려졌습니다.
멋진 건축물을 바라보며 위안을 얻는 이상한 처방이 완성되었습니다.
질병으로 인해 국내외 여행의 발목이 잡혀
다시금 빨간 집의 나무가 자라고 있습니다.
두렵습니다만,
이제는 받아들이고, 이겨내고 있습니다.
힘을 내시고 이겨내세요.

악몽(The Nightmare)  / 42cm X 29.7cm , 종이에 펜, 디지털 컬러링, 2020  / 길쭉청년 한정훈 2000family@naver.com 디자인헌터스 대표, FlyingArtist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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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왜 건축은 서비스산업인가?

건축담론

 

건축사_설계의 확장성을 묻다

최근 SNS에서 지난 20∼30년간 건축사의 설계대가 변화에 대한 토론이 뜨겁게 진행되고 있다. 사실 공공에서 발주하는 설계대가는 물가 상승률에 따라 증가세를 보인다. 그럼에도 민간 설계 시장은 그렇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어떤 이는 90년대 이후 전체 소비자 가격 가운데 실질적으로 하락한 항목이 딱 두 가지인데, 하나는 컴퓨터이고 다른 하나는 민간 시장에서 설계비라고 말한다. 그리고 수도권에서 500세대 이상의 아파트 단지 하나를 분양하면 가장 큰 이익은 시행사와 건설사의 몫이고, 두 번째가 공인중개사,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주방가구 업체와 건축사 순이라고 말하는 것도 더 이상 이상한 주장은 아니다. 대한건축사협회 차원에서 이를 보완할 여러 가지 방법을 고민하고 있지만 가시적인 성과를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토론이 필요해 보인다. 건축사가 되기 위해서 대학 교육도 5년을 다녀야 하고, 어느 직종보다 전문적이면서 동시에 책임이 따르는 업역임에도 정작 현실에서의 보상은 다른 직종에 비해 요원하다. 자세히 살펴보면 설계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수많은 산업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이 존재하는 곳에는 어떤 형태로든 건축물이 있고, 이와 관련된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시장과 관련 산업은 무한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건축사는 전통적인 산업구조 안에서 설계 하나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나쁜 소식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최근 급변하는 라이프스타일과 이에 따른 산업구조 변화에 따라 일부 건축사들을 중심으로 설계를 넘어 다양한 산업으로의 창의적인 확장성을 도모하는 움직임과 이에 따른 실질적인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작은 변화는 다분히 놀랍기도 하고 후배 건축사들을 위해 반갑기도 하다. 이제 설계 이전 단계에서 기획은 물론이고 프로그램에 맞춰 건축물을 넘어 소소하고 디테일한 부분까지 설계를 하고 이후 운영까지 맡아 수익구조에 긍정적인 변화를 얻거나, 본인이 설계한 새로운 방식에 대해 지적재산권을 확보하기도 한다. 나아가 건축과 관련된 다양한 소프트웨어와 애플리케이션을 직접 개발하고 건축 과정 전반을 공유하는 플랫폼 등도 다양하게 만들어지고 있다.

이렇게 기존에 없던 새로운 방식의 도전과 성과가 어떤 의미가 있고 앞으로 전통적인 설계를 넘어 어떻게 확장성을 가지게 될지 관련된 식견을 가진 전문가들의 의견을 물어본다.

글. 김창균 (주)유타건축사사무소 대표·건축사

 

 

01 Why does architecture belong to service industry?

연구소 재직 시절 건축설계를 산업화 개념으로 처음 접근했을 때 그 반응들을 생각하면 감회가 새롭다. 그 당시 건축계는 ‘예술’과 ‘기술’이라는 단어에 매몰되어, 담론조차 형성하지 못하고 있었고, 건축을 산업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서비스’는 굳은 일을 대신하는 일로 생각하고 있다. 음식점을 가거나, 물건을 구입한 후 그에 대한 친절한 배려를 받았을 때, ‘서비스가 좋다’라는 말을 하곤 한다. ‘서비스’는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면 ‘용역(用役)’이다. 그 뜻은 재화를 생산하지 않는 업무로 산업적 차원으로 보면 ‘사람을 대신해서 일반적이거나, 전문적인 일을 대신해서 처리해주는 고부가가치 산업’을 말하며, 이를 ‘3차 산업’이라고 한다. 따라서 ‘서비스산업’은 크게 ‘일반서비스’와 ‘지식서비스’로 구분되며, 건축설계산업은 단순히 특정지식이 없어도 수행이 가능한 ‘일반서비스’가 아니라 고도의 지식을 기반으로 전문적인 능력을 발현하는 ‘지식서비스산업’에 속한다. ‘지식서비스산업’군에는 의사, 변호사 등도 함께 포함된다. 이러한 이유로 맨 처음 ‘건축서비스산업’이라는 화두를 꺼냈을 때 구구절절이 자세한 내용을 설명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우리나라 건축설계업계는 열악한 산업환경으로 기형적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삼풍백화점, 성수대교 사고 등을 통해 설계에 대한 문제가 사회적 화두가 되면서,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열악한 건축사사무소 대신 건설사가 모든 책임을 질수 있도록 건축사사무소를 선정해서 참여하는 ‘일괄도급 방식(Turn key)’이 공공분야에 채택되면서 사무소는 대형화 되고, 산업구조가 개편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실은 이러한 사고의 원인이 부실설계의 문제가 아니라, 부실시공의 문제로 밝혀지긴 했지만, ‘책임소재를 분명히 한다’는 논리에 막혀 설계업계는 점점 사회적으로 목소리를 잃게 되었다.

이러한 것들이 사실 우리 일상생활에서 보면 대수롭지 않은 일 같지만, 산업적 측면에서 보면 매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컴퓨터를 예로 들어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쉬운데, 컴퓨터의 성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크게 하드웨어 부분과 소프트웨어 부분의 발전이 수반되어야 한다. 초창기에는 하드웨어 부분산업이 괄목한 성장세를 보이면서 소프트웨어가 이를 뒷받침하는 구조를 갖는다. 그러나 일정 시간이 지나면 소프트웨어가 새로운 프로그램을 앞서 개발하고 그것을 구현하기 위한 기술을 수반한 하드웨어가 발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소프트웨어 기술과 하드웨어 기술은 서로 견인하는 역할을 한다.

필자는 건설은 하드웨어, 건축설계는 소프트웨어로 생각한다. 이 두 가지의 산업이 균형적인 발전을 도모해야 하는데 우리는 지난 20년간 건축설계산업에 대해서는 국가적으로 어떠한 지원도 받지 못했고, 건설사 책임의 설계시장이 괄목하게 성장하면서 건축설계시장은 침체되고 말았다. 침체된 건축설계산업을 개편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인재를 지원․육성하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여야 하며, 공공기관의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 산업구조를 개선하여야 한다. 이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제도가 수반되어야 가능하다.

우리나라의 모든 산업이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정부의 지원에 의해 발전하였지만, 우리 건축계는 이러한 사실조차 알지 못했고, 뒤늦게나마 관련 법안을 제안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건축서비스산업진흥법’이다. 많은 사람들의 진정성 있는 노력과 인내로 법안을 준비한지 5년 만에 ‘건축서비스산업진흥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국가 입장에서 산업적 정책을 수립하는 이유는 ‘안정적인 산업생태계’를 구축하여 국․내외 시장을 확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면에서 건축설계산업은 연계된 후방산업에 많은 영향력을 끼쳐, 건축설계산업이 활성화 된다면, 내수시장의 활력을 도모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산업적 차원에서 중요성이 인정된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우리나라 건축설계산업은 대규모 건축사사무소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고, 소규모 사무소는 시장진입 자체가 어렵다. 쉽게 설명하면 전체 건축사사무소 중 대규모 사무소가 약 1% 정도이나 전체 매출규모의 약 40%를 차지하고 있는 기형적인 구조를 갖고 있다. 따라서 법령을 제정할 때 산업생태계를 안정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 대규모 사무소에게 편중되어 있는 국내 물량이 중규모, 소규모 사무소까지 확장되는 방향을 모색하고, 건축분야의 지원정책을 개발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 일환으로 대규모 사무소가 해외시장에 진출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항목을 마련하여 시장규모의 확대를 모색하였으며, 소규모의 역량있는 건축사들은 공공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도록 법령에 그 길을 열어 주었다. 현재 일부 지자체에서는 이러한 행정조직을 운영 중에 있고, ‘공공건축가’ 제도를 활용하여 공공프로젝트에 ‘조력자’로 건축사를 참여시키고 있지만, 산업적 지원을 위한 ‘건축진흥원’은 아직 설립되지 않고 있다. 아직까지 산업차원에서 정책은 미온적이라 할 수 있다.

서비스산업으로서 건축설계산업은 제반 환경 투자가 적은 고부가가치 산업이며, 고도의 지식기반 서비스산업이다. 재화를 생산하지 않지만, 건설산업을 견인할 수 있고, 후방산업에 대한 영향력도 막대하다. 우리 건축계는 어렵게 제정된 ‘건축서비스산업진흥법’이 잘 실현될 수 있도록 적극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글. 김진욱 예지학 대표

김진욱 예지학 대표

건축도시공간연구소 정책센터장, A&U 도시디자인본부장, 중앙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건축서비스산업진흥법, 경관법 연구책임자로 활동한 바 있다.
jwkim@yeziha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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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건축의 산업화에 대해 _4차 산업혁명 시대, 건축사 외연의 확장

건축담론

 

건축사_설계의 확장성을 묻다

최근 SNS에서 지난 20∼30년간 건축사의 설계대가 변화에 대한 토론이 뜨겁게 진행되고 있다. 사실 공공에서 발주하는 설계대가는 물가 상승률에 따라 증가세를 보인다. 그럼에도 민간 설계 시장은 그렇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어떤 이는 90년대 이후 전체 소비자 가격 가운데 실질적으로 하락한 항목이 딱 두 가지인데, 하나는 컴퓨터이고 다른 하나는 민간 시장에서 설계비라고 말한다. 그리고 수도권에서 500세대 이상의 아파트 단지 하나를 분양하면 가장 큰 이익은 시행사와 건설사의 몫이고, 두 번째가 공인중개사,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주방가구 업체와 건축사 순이라고 말하는 것도 더 이상 이상한 주장은 아니다. 대한건축사협회 차원에서 이를 보완할 여러 가지 방법을 고민하고 있지만 가시적인 성과를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토론이 필요해 보인다. 건축사가 되기 위해서 대학 교육도 5년을 다녀야 하고, 어느 직종보다 전문적이면서 동시에 책임이 따르는 업역임에도 정작 현실에서의 보상은 다른 직종에 비해 요원하다. 자세히 살펴보면 설계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수많은 산업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이 존재하는 곳에는 어떤 형태로든 건축물이 있고, 이와 관련된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시장과 관련 산업은 무한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건축사는 전통적인 산업구조 안에서 설계 하나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나쁜 소식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최근 급변하는 라이프스타일과 이에 따른 산업구조 변화에 따라 일부 건축사들을 중심으로 설계를 넘어 다양한 산업으로의 창의적인 확장성을 도모하는 움직임과 이에 따른 실질적인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작은 변화는 다분히 놀랍기도 하고 후배 건축사들을 위해 반갑기도 하다. 이제 설계 이전 단계에서 기획은 물론이고 프로그램에 맞춰 건축물을 넘어 소소하고 디테일한 부분까지 설계를 하고 이후 운영까지 맡아 수익구조에 긍정적인 변화를 얻거나, 본인이 설계한 새로운 방식에 대해 지적재산권을 확보하기도 한다. 나아가 건축과 관련된 다양한 소프트웨어와 애플리케이션을 직접 개발하고 건축 과정 전반을 공유하는 플랫폼 등도 다양하게 만들어지고 있다.

이렇게 기존에 없던 새로운 방식의 도전과 성과가 어떤 의미가 있고 앞으로 전통적인 설계를 넘어 어떻게 확장성을 가지게 될지 관련된 식견을 가진 전문가들의 의견을 물어본다.

글. 김창균 (주)유타건축사사무소 대표·건축사

 

 

02 About Architecture Industrialization_The Era of the 4th Industrial Revolution, The Scope Expansion of Architects

들어가며
20세기에 규정된 근대적 삶의 양식과 사고에 영향을 미친 요인 중 하나가 ‘기술’임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건축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건축이란 예술과 기술이 결합된 문화적 산물이다’라는 주장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산업화시대에 건축이 양적으로 팽창하면서 산업구조는 복잡하고 다양하게 변했다. 그리고 AI가 자동차를 스스로 운전하고 스마트폰을 이용해 어디서든 인터넷 세상과 연결될 수 있는 21세기 현대 삶 속에서 건축과 ‘기술’의 관계는 그 어느 때보다 긴밀해졌다.

 

기술과 지적재산권
기술의 의미는 점점 광범위해지고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진리라는 뜻으로 사용된 테크네(Techné)는 ‘만들다’ 혹은 ‘생산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tetk’에서 파생된 단어로, 특정한 방식을 이용하는 수단처럼 사용된다. 생산활동이나 과정, 이와 연관된 실천적 행위나 의지 또한 기술로 간주되곤 한다. 가령 물건을 생산하고 도구를 제작하는 것도 기술이지만 대중의 심리를 선동하는 것에도 기술이란 개념을 사용한다. 이처럼 특정한 목표를 향한 인간 활동의 총체로 정의할 수 있는 ‘기술’은 광범위한 영역에서 정의된다. 기술의 다양성만큼이나 세분화되고 제도화된 현대사회에서 기술은 산업을 만들어내고 복잡한 이해관계를 도출한다. 20세기 산업화를 통해 기술은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진화해왔고, 이에 우리는 광범위한 기술을 정리하고 규정할 필요가 생겼다.

인류는 지적재산권이라는 방식으로 개별 기술을 분류하고 정의하며 관리해왔다. 우리나라의 지적재산권은 20세기 초 칙령 제 196호의 특허령 제정에 의해 처음 도입된 특허제도와 함께 등장했다. 1977년 특허청이 개청한 뒤 2만 5천여 건의 산업재산권이 등록됐고 37만여 건이 출원돼 한국은 세계 4위 출원 대국이 됐다. 건축과 관련된 지적재산권도 상당수다. 건축에서도 지적재산권과 관련된 이슈가 여러 개 있다. 건축사의 설계업무를 창작활동의 결과물로 보고 건축사가 지적재산권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수년 동안 있었다. 2008년 민규암 건축사가 제기해 승소한 헤이리 UV하우스 소송은 TV광고 배경으로 등장한 건축물에 대해서도 ‘건축저작권’을 인정한 사례다. 상업적 목적으로 건축물을 배경으로 사용한 경우 이를 설계한 건축사에게 저작권료를 지불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2009년엔 ‘설계공모 수상작의 설계 저작권은 건축사에게 있다’는 공정거래위원회의 시정 조치에 따라 대한건축사협회가 TF팀을 꾸려 건축사의 설계권을 보호하기도 했다. 2020년 강릉 테라로사 카페 설계 모방에 따른 ‘저작권 침해’ 판결은 건축계에 새로운 화두를 던졌다. 건축사의 창작물을 모방했을 경우 이를 저작권 침해로 본 사례로, 법원이 ‘모방’이라는 정성적인 부분을 인정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이처럼 무형 지적재산권에 대한 이해의 폭이 사회적으로 넓어졌다. 지적재산권과 관련된 사례들을 통해 건축사의 창작물인 건축설계의 저작권이 어느 정도 윤곽을 드러냈다. 그러나 앞에서 본 일련의 사건을 통해 건축사의 지적재산권을 고찰해보면 아쉬운 점이 발견된다. 바로 지적재산권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건축사 업무에 적용하고 있지 못한 현실이다.

 

건축사, 적극적으로 지적재산권을 행사해야
대부분 건축사는 누군가가 본인의 지적재산권을 침해할 때에서야 문제제기를 하며 대응에 나선다. 즉, 수동적으로 지적재산권을 보호한다. 그도 그럴 것이 건축설계는 대부분 하나의 대상지에 설계돼 일회성이 높은 까닭에 ‘특허’ 혹은 ‘디자인 등록’을 하기엔 무리가 있다. 이러한 태생적 한계로 건축사가 설계한 계획안을 지적재산권화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특허청에서도 설계안 전체를 평가하기보다 보편적 요소를 제외한 독특한 창작성에 대해 평가하고 이에 지적재산권을 부여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재산권 침해 소송을 하게 될 때에도 그 기간이 너무 길고 많은 시간이 소요돼서 건축사가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어렵다. 분주한 일상을 살아가는 건축사의 입장에서 소송을 진행하는 것은 상당한 부담이다. 그렇기 때문에 건축사가 선제적으로 지적재산권을 획득하는 일이 절실히 필요하다. 건축사가 창의적 아이디어를 구현한 부분이 보편적 건축요소가 아닌 독특한 기술이라면 지적재산권리에 대해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이는 창의적 아이디어에 대한 방어 차원이 아닌 업역 확대의 발판을 만드는 외연의 확장이다. 다행히 국가는 건축사의 지적재산권을 인정하고 공공 프로젝트에 이를 적용할 수 있는 다양한 혜택을 주고 있다. ‘국가를 당사자로 하는 계약에 관한 법률(이하 국가계약법) 시행령 제26조(수의계약에 의할 수 있는 경우)’는 이러한 독특한 아이디어에 대해 직접 계약을 할 수 있는 여러 조항을 만들어 창작자가 직접 아이디어를 구현할 수 있도록 했다. 다만, 계약을 성사시키기까지 건축사가 갖춰야 할 자격조건들이 있기에 이를 함께 준비해야 할 것이다.

로지아Y_벽돌패널 특허 적용. 외부 이중외피인 벽돌패널 제작 설치

시전당_벽돌패널 특허 적용. 제작 설치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아이디어 구현’이란
디지털시대에 건축사의 창작활동은 모니터 안 가상공간에서 자유롭게 이뤄지고 있다. 중력이 존재하지 않는 가상공간에서의 디자인을 현실세계에 구현하는 일에는 구축적 성격이 있다. ‘중력’과 절대적 ‘시공간’ 속에서 물리적 존재 기반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건축은 구축성을 거부하고는 존립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는 일회적 퍼포먼스나 여타 가설적 예술과 구분되는 지점이다. 현재 건축사의 업역은 설계, 공사감리, 건설사업관리(CM) 등이다. 구축 부분은 ‘시공’의 영역에 포함된다. 건축사는 이를 감독하는 역할을 맡는다. 전문화되고 분업화된 산업구조의 결과다.

하지만 우리는 융복합의 시대라고 말하는 4차 산업시대에 살고 있지 않은가. 3D 프린터와 디지털 데이터로 가상공간에서의 디자인을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고 현실세계에 구축해준다. 3D프린터 결과물을 생활 속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해 기존에 없던 가치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아이디어와 디자인이란 것은 세상에 나오기 전까진 모니터 속에 갇힌, 말 그대로 무형의 가치다. 구축을 거쳐야 무형의 지적재산권이 우리 삶 속으로 들어온다. 건축사의 다양한 아이디어가 꼭 건축돼야만 지적재산권의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건축사의 창작물을 왜곡 없이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서는 건축돼 공간으로 만들어져야 한다. 구축 또한 창의적 방식으로 이뤄질 수도 있을 것이다. 타 분야와의 다양한 협업을 통해 이뤄질 수도 있고, 직접 구축의 과정에 뛰어들 수도 있다. 구축 방식은 이미 건축보다 가볍게 시작할 수 있는 다른 영역에서 다양한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니체가 말했듯이 ‘계획은 확정된 것이 아니라 실행하고 수정하며 만들어가는 것’이다. 창작자의 창의적 아이디어는 모든 디자인이 그러하듯이 구축과 수정의 반복적 과정을 거쳐 완성된다. 창작자가 직접 구축 과정에 참여해 만들고 다듬은 아이디어는 단단하고 파급력이 높다. 창작자는 최고의 아이디어 전문가가 되고 창작자에겐 그에 맞는 권위도 주어진다. 건축엔 사람들이 사용하는 공공의 성격이 있다. 그러므로 건축사는 건축 창작물의 구축 과정에 직접 개입해 건축이 갖춰야 할 기본을 충실히 지켜야 할 것이다.

평창 눈꽃광장_간접조명 방식의 가로등 특허, 제작 설치

용산 아이파크몰 어반네쳐_디자인등록. 제작 설치

송파야간명소화사업_특허, 디자인등록. 제작설치

건축사, 변화하는 산업구조에 적응이 필요하다
현재 우리는 극심한 변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 산업구조, 기후환경, 방역환경, 인구구조 모두 극단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시대에 변화하고 적응하는 자세는 무엇보다 중요할 것이다. 코로나19 사태로 급변하는 사회와 산업구조 변화를 보면서 건축사의 업역과 외연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건축사자격시험 제도의 변화로 많은 건축사가 배출되는 현실 속에서 새로운 도전이 필요한 시점이다. 전통적 산업구조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의 창의적 발의가 가능한 시스템과 업역을 찾아야 한다. 지적재산권을 이용해 창의적 아이디어를 보호하고 구현하는 것이야말로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건축사가 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론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수정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렵다. 하지만 건축사는 건축문화를 선도하며 국민의 안전과 행복을 책임져야 할 전문가다. 다양한 방식으로 이를 성취해야 하기에 건축사에게 새로운 도전은 의미 있고 계속돼야 할 것이다.

 

 

글. 유주헌 JHY 건축사사무소 · 건축사

유주헌 JHY 건축사사무소 · 건축사

서울예술고등학교 미술과를 거쳐 서울대학교 조소과, 건축학과를 졸업했다. 김태수장학재단, 장프르베(김중업장학제) 장학제에 선발되었으며, 건축사사무소 아뜰리에 17(건축사 권문성), 자끄페리에아키텍쳐(Jacques ferrier architecture)에서 실무를 익혔다. 성균관대학교 건축학과에서 겸임교수를 역임하고 있으며, 대한민국 건축사를 취득하고 현재 JHY건축사사무소(jhyarhchitects&associate), ㈜제이에이치와이조형을 함께 운영, 다양한 영역의 경계를 넘는 건축적·공간적 실험을 하고 있다. 2018신진건축대상 및 서초건축상을 수상했다. 대표작으로는 The East Garden, 천경재, 판교 시전당, 통인동 스튜디오하우스, 대관령 눈꽃광장 조성사업, 송파 야간관광명소화 조성사업 등이 있다.
jhy@jhya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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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건축, 기획의 시대

건축담론

 

건축사_설계의 확장성을 묻다

최근 SNS에서 지난 20∼30년간 건축사의 설계대가 변화에 대한 토론이 뜨겁게 진행되고 있다. 사실 공공에서 발주하는 설계대가는 물가 상승률에 따라 증가세를 보인다. 그럼에도 민간 설계 시장은 그렇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어떤 이는 90년대 이후 전체 소비자 가격 가운데 실질적으로 하락한 항목이 딱 두 가지인데, 하나는 컴퓨터이고 다른 하나는 민간 시장에서 설계비라고 말한다. 그리고 수도권에서 500세대 이상의 아파트 단지 하나를 분양하면 가장 큰 이익은 시행사와 건설사의 몫이고, 두 번째가 공인중개사,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주방가구 업체와 건축사 순이라고 말하는 것도 더 이상 이상한 주장은 아니다. 대한건축사협회 차원에서 이를 보완할 여러 가지 방법을 고민하고 있지만 가시적인 성과를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토론이 필요해 보인다. 건축사가 되기 위해서 대학 교육도 5년을 다녀야 하고, 어느 직종보다 전문적이면서 동시에 책임이 따르는 업역임에도 정작 현실에서의 보상은 다른 직종에 비해 요원하다. 자세히 살펴보면 설계와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수많은 산업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이 존재하는 곳에는 어떤 형태로든 건축물이 있고, 이와 관련된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시장과 관련 산업은 무한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건축사는 전통적인 산업구조 안에서 설계 하나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도 나쁜 소식만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최근 급변하는 라이프스타일과 이에 따른 산업구조 변화에 따라 일부 건축사들을 중심으로 설계를 넘어 다양한 산업으로의 창의적인 확장성을 도모하는 움직임과 이에 따른 실질적인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작은 변화는 다분히 놀랍기도 하고 후배 건축사들을 위해 반갑기도 하다. 이제 설계 이전 단계에서 기획은 물론이고 프로그램에 맞춰 건축물을 넘어 소소하고 디테일한 부분까지 설계를 하고 이후 운영까지 맡아 수익구조에 긍정적인 변화를 얻거나, 본인이 설계한 새로운 방식에 대해 지적재산권을 확보하기도 한다. 나아가 건축과 관련된 다양한 소프트웨어와 애플리케이션을 직접 개발하고 건축 과정 전반을 공유하는 플랫폼 등도 다양하게 만들어지고 있다.

이렇게 기존에 없던 새로운 방식의 도전과 성과가 어떤 의미가 있고 앞으로 전통적인 설계를 넘어 어떻게 확장성을 가지게 될지 관련된 식견을 가진 전문가들의 의견을 물어본다.

글. 김창균 (주)유타건축사사무소 대표·건축사

 

 

03 The Era of Planning Has Arrived in the Architectural Field

‘확장시대’에서 ‘축소시대’로
지금까지 한국은 전 세계 유례없는 고도성장을 경험했다. 매년 10%에 육박하는 경제성장기를 거치며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이들은 도심에 몰렸다. 주택은 늘 부족했고 상업공간과 사무실 공간은 짓자마자 임대가 완료됐다. 같은 시기 단독주택은 다세대, 다가구 주택으로 분화되고 아파트를 위시한 공동주택은 부동산 시장의 급성장과 함께 대규모 공급이 이뤄졌다. 대형 건물도 시공하는 족족 분양과 임대가 됐다. 지금까지는 ‘시행’, ‘시공’, ‘분양’의 시대였다. 반면 저성장 시대는 시행, 시공, 분양보다 ‘임대관리’, ‘금융’, ‘개발’, ‘리모델링’이 더 중요해진다. 즉 매각차익보다 임대수익이 더 중요해지므로 종합 부동산 서비스나 자산 관리업체의 역할이 더 중요해진다.

더불어 공급자 중심의 생산방식에서 벗어나 다양한 수요자의 요구에 대응하는 형태로 건축 업무의 패러다임이 바뀌고 있다. 실제로 건축 설계 단계 이전에 사전기획이 잘 된 경우에는 불필요한 설계 변경이나 공기 연장, 공사비 증액 등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고, 건축물의 품질을 높일 수 있다. 더불어 가장 큰 이유는 공실의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 신축과 리모델링 시 막대한 비용이 드는데 대부분 건축주는 펀드나 금융권에 대출을 받기 때문에 상업건물의 경우 예상대로 임대가 되지 않으면 큰 손실을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다양한 건축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체가 등장하고 설계자와 협업해 공간 콘텐츠를 구상하고 운영 전략을 수립하는 ‘기획 중심’의 건축서비스 업무가 필요한 시대가 도래했다.

 

건축서비스산업과 기획업무의 현주소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건축서비스 산업으로서 ‘건축기획’ 업무의 제도적 정착은 미흡한 실정이다. 2014년 「건축서비스산업 진흥법」을 통해 건축서비스란 단어가 처음으로 법정 용어로 인정받았고, 주요 업무인 건축설계가 「건설기술 진흥법」의 건설기술에서 제외됐지만, 설계에 앞서 수행해야 하는 기획 업무는 여전히 건설기술의 개념으로 남아있다. 따라서 설계 업무와 연속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공공발주 사업의 경우 「건축서비스산업 진흥법」상 ‘사업계획 사전검토’는 전체 예산의 약 5% 이내로 정의하는데, 여전히 건축사사무소의 영역이 아닌 엔지니어링 업체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최근엔 입찰 참가 자격이 학술연구 용역기관, 엔지니어링사업자, 기술사사무소가 주이나 일부 건축사사무소가 포함되기도 한다. 해당 업무는 보통 ‘기본구상’, ‘타당성 조사’, ‘기본계획’이란 이름으로 분리되어 단일 사업보다 건축설계와 공동으로 발주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

그렇다면 건축기획이란 정확하게 어떤 업무일까? ‘건축 관련 사업을 추진하면서 설계 이전에 기본 방향을 설정하고 설계와 공사 이후에 유지 관리를 위한 사전 전략을 수립하는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사업의 특성에 따라 ‘사업기획’과 ‘설계기획’으로 구분할 수 있다.

먼저 사업기획은 사업의 전반적인 기본 방향을 정하고 전략을 수립하는 업무로, 사업의 일반적인 개요에서 시작해 현황분석, 건축물 규모 분석, 예산과 사업관리, 운영계획 등을 수행하는 종합적인 활동이다. 또한 설계기획은 사업기획을 토대로 건축물 디자인 방향을 구체적이고 전략적으로 설정하는 업무로, 대지와 건축의 세부적인 설계 조건을 제안하는 활동으로 구분할 수 있다. 설계기획은 「건축사법」에 따라 그 업무를 규정하는데, ‘건축물의 규모검토’, ‘현장조사’, ‘설계지침’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건축기획의 개념이 현재 건축법상 명확하게 없고, 유사한 기술서비스 업무가 「건설기술 진흥법」, 「건축서비스산업 진흥법」, 「건축사법」 곳곳에 서로 다른 개념으로 산재해 있다. 그마저도 대부분 극히 일부의 공공건축에 국한되며, 소규모 사업은 제외된 실정이다. 「건설기술 진흥법」에는 기본 구성, 타당성 조사, 건설공사 기본계획 수립이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고, 「건축서비스산업 진흥법」에는 공공건축에 관한 사업계획, 「국가재정법」에는 예비타당성조사, 「지방재정법」에는 투자심사를 기획업무로 볼 수 있다.

정음철물 매장 전경

기획업무의 과정과 단계
일반적으로 ‘방향 및 목표설정’, ‘현황조사 및 분석’, ‘유사사례조사’, ‘사업규모 분석 및 범위검토’, ‘사업성 조사 및 전략구상’, ‘사업계획관리’ 등으로 세부 업무의 범위를 구분할 수 있는데, 2016년 창업한 건축기획사 프로젝트데이는 위의 업무와 프로세스를 정리해 다음과 같은 단계별 기획업무 서비스를 제공한다. 물론, 이는 공공프로젝트보다 상업 프로젝트나 개인 프로젝트에 더 적합한 방식이나 사전 기획의 세부 업무 내용엔 큰 차이는 없다.

1) 요구사항 분석(OPR 도출): 건축주와 심층 인터뷰를 통해 OPR(Owner’s Project Requirements)을 설정한다. 먼저 목표 설정과 이유, 사실 수집 및 분석, 목표 달성 방법, 필요성 결정(자원과 시간), 중요도 결정과 같은 4단계를 거친다.
2) 지역 분석(Areal Research): 인근 지역의 인구, 상권, 업종, 교통, 주거환경 등 기초 지역 분석 자료를 토대로 해당 대지의 기본적인 규모와 법규를 분석하는 과정이다.
3) 프로그램과 콘셉 만들기(Architectural Programing): 앞선 두 가지 기본 자료를 바탕으로 건축 프로그램에 대한 명확한 방향을 정하고, 이에 따라 설정 가능한 건축물과 공간의 전체 콘셉트를 수립한다.
4) 기획 디자인(Concept Designing): 주변 부동산 정보와 시장 데이터를 기반한 상업적 가치를 발견하고 이를 극대화할 수 있는 디자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
5) 임차인 분석(Tenant Research): 기획 디자인에 따라 어느 정도 건물의 볼륨과 면적이 나오면 층별로 분할하고 각 공간에 적합한 업종을 제안한다.
6) 제안요청서 및 리포트 작성(RFP): 지금까지 조사한 데이터와 분석을 바탕으로 향후 필요한 건축사사무소, 시공사, 운영사 선정을 위한 RFP(Request for Proposal) 보고서를 작성한다.
7) 종합운영서비스(MS, Management Service): 구체적으로 임차인에 대한 정보와 건물을 설계할 실시설계사, 시공할 시공사, 인테리어 디자이너 및 운영사 등에 대한 정보와 연결 등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기획업무의 법제화와 업무 대가 기준
기획업무의 필요성과 구체적인 프로세스는 아직 부족하지만, 법적으로 명확하고, 사회적으로 그 중요성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대가 기준의 경우도 설계비같이 규모나 공사비 대비 일정 비율로 책정되는 방식이 아니라 직접 집행비를 기준으로 산정되므로 기존 설계비가 아닌 별도의 기획비를 책정할 수 있다. 또한 사후 운영 전략의 경우도 브랜딩이나 마케팅 전략 수립의 차원과 같이 별도의 비용을 받는 경우가 늘고 있다. 이는 대기업이나 대형 빌딩, 일부 자산가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동네에 있는 작은 건물도 체계적인 계획과 개발 그리고 운영이 필요하다. 그 방법은 개발시대의 ‘속도’와 ‘크기’, ‘용도’의 기준을 따르는 게 아니라 지역에 적합하고 필요한 개별적인 방법이다. 이는 지역의 이야기(콘텐츠)를 발굴하고 장점을 극대화해 공간화하는 방식인데, 이것이 앞으로의 공간 개발의 모델이 될 것이다. 그 방법은 단일 건물을 기획하고 개발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맥락을 분석하고 개발해야 마을의 앵커가 될 수 되고 임팩트 있는 공간을 만들 수 있다. 이를 위해 부동산, 금융, 건축, 시공, 운영 등 분야별 칸막이식 컨설팅이 아닌 종합적이고 순차적인 기획이 중요하다.

 

정음철물, 실증 데이터를 기반한 공간운영 전략
지난 9월부터 프로젝트데이에서 운영하는 연희동 정음철물은 건축기획을 이론적으로 연구하는 것을 넘어서 실증적으로 증명하는 모델이다. 주식회사 정음은 2019년 7월 로컬 콘텐츠 기업 어반플레이와 지역 관리사인 쿠움파트너스, 건축 기획사 프로젝트데이가 세운 조인트벤처로 연희동에 있는 30년 된 낡은 전파사 겸 철물점인 정음전자를 ‘동네 집수리 컨시어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철물 편집숍인 정음철물로 리뉴얼했다. 정음철물 2층에는 지역 기술 장인과 예술가를 연결해 DIY 워크숍 교육을 진행하는 정음제작소가 있고 낡은 건물을 쓸모 있는 공간으로, 가치 없어 보이는 것에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활기를 넣는 컨설팅을 하는 정음연구소를 운영 중이다. 이곳에서 공간 컨설팅과 공간 기획업무를 하며 실제 데이터를 기반한 사용자 경험 설계를 한다.

앞으로 건축기획은 지속가능한 공간을 만들어야 하는 미션이 있다. 중소규모 건물의 임대, 개발, 관리 등 토탈 서비스의 필요성과 개별 건물이나 공간이 아닌 지역 맞춤 콘텐츠의 필요성에 따라 건축설계 산업보다 큰 산업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관련 전문가가 부족하다. 경영이나 마케팅 지식과 경험으론 종합적인 공간 기획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공학과 건축학으로 분리된 대학에는 엔지니어 혹은 디자이너만 양산한다. 이런 상황에서 올해 2학기 국내에서 처음 개설되는 울산대학교 건축학부의 건축기획 수업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직은 전공필수 과목은 아니지만, 향우 건축기획 전문가를 양성하는 첫 과정임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김은희 외, ‘건축기획 업무범위 및 대가기준 개선 방안’, 건축도시공간연구소, 2017

 

 

 

글. 심영규 프로젝트데이 PD·울산대학교 겸임교수

심영규 프로젝트데이 PD·울산대학교 겸임교수

건축기획사 프로젝트데이의 대표이자, 정음철물 대표, 울산대학교 겸임교수로 있다. 중앙일보 디지털뉴스룸, 월간 <SPACE>를 거쳐 건축재료 처방전 <감(GARM)>, <아는동네> 매거진의 편집장으로 일했다. 건축주와 건축사, 건자재업체와 소비자, 공공과 시민을 연결하는 활동을 하고, 정음철물을 통해 낡고 오래된 공간의 가치를 발견하며 공간 기획과 운영의 실증적인 데이터를 모으고 있다.
shim09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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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_“도시설계 시 건축이 베이스 돼야…건축사의 역할 한정짓지 마세요”

“도시설계 시 건축이 베이스 돼야…
건축사의 역할 한정짓지 마세요”

 

지난 7월 10일 광주 펭귄마을 양림문화공원 운영사무실에서 총괄건축가 박홍근 건축사(우), 설계를 맡은 박종호 건축사(좌), 홍건영 광주디자인진흥원 디자인융합팀장(중앙)을 만났다. 촬영 장소는 운영사무실 옥상 맞은편 난간.

2017년에 시작된 양림동 공예특화거리 조성사업이 올해 6월 건축적 측면에선 마무리가 됐다. 총괄건축가로 참여한 박홍근 건축사(주.포유 건축사사무소)와 설계를 맡은 박종호 건축사(유민 건축사사무소)가 느낀 것들이 많았으리라. 지난 7월 10일 광주 펭귄마을 양림문화공원 운영사무실에서 두 사람을 만나 마을재생사업과 건축 간의 관계에 대해 들어보았다.

박종호 건축사는 마을재생사업에서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모으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지역단체, 주민, 건축사 등 여러 사람들이 의견을 나누고 이를 모으는 과정, 일명 집단지성의 협력이 중요합니다. 무엇보다 이 과정에 지역 주민들이 반드시 참여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사업이 끝난 후에도 주민들의 주인의식이랄까 공동체의식이 더 강해지고 이는 향후 마을의 성장에도 도움이 됩니다.”

박종호 건축사는 이번 사업이 추진되기 십여 년 전부터 이미 양림동 근대 건축물의 현황과 연혁을 조사해온 인물이다. 광주 시민이면서 양림동 근대건축물의 건축테마투어 담당자이기도 하다. 그가 양림동 공예특화거리조성사업 공모에 선정돼 설계를 맡게 된 데에는 이러한 경험들이 바탕이 됐다. 사업을 마무리한 후 마을재생사업에 대한 소감은 어떨까.

마을재생사업은 건축사들 입장에서도 배울 점이 많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일반 건축물을 설계할 땐 설계와 감리 등 이런 부분들만 고려하면 일이 진행되지만 마을재생사업을 할 때에는 기획 등 도시설계의 전체 업무를 다 생각해야 합니다. 쉬운 작업은 아니지만 건축사에게는 좋은 경험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박홍근 건축사의 조언은 보다 직접적이다. “건축사라면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또,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벌어지는 건축적 상황에 대해 궁금해 해야 합니다. 그리고 반대 의견이 있다면 반대만 할 것이 아니라 대안을 함께 제시해야 합니다.”

“도시설계는 건축을 베이스로 시행돼야 합니다. 건축사들의 업무는 설계나 감리 등의 업무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건축사의 역할을 건축물에 한정 짓지 말고 마을과 도시로 그 폭을 확장한다면, 좋은 공간을 향유하는 것이 건축사의 역할이라고 관점을 확대한다면, 건축사의 일은 앞으로 틀림없이 더 많아질 것입니다.”

건축여행 “광주 최초로 서양 근대문물 받아들인 곳… 마을 전체가 광주 역사 건축박물관이네”
옛 것으로 꾸며진 정감 가는 골목길, 곳곳엔 백년 가옥들도 일제강점기 시절 선교사들의 다난한 역사 깃든 교회·병원·학교

2017년부터 광주시와 남구, 광주디자인진흥원이 추진했던 ‘양림동 공예특화거리 조성사업’이 올 6월 마침내 마무리됐다. ‘펭귄마을’로 알려진 양림동은 광주광역시 남구에 위치한 마을로 무려 5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가옥을 비롯해 서양 근대건축물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여기에 버려진 생활용품들로 주민들이 꾸민 골목과 텃밭들의 풍경이 더해지면서 몇 년 전부터 펭귄마을은 광주의 뉴트로 관광지로 입소문을 탔다. 공예특화거리 조성사업은 펭귄마을의 역사를 보존하면서 마을의 문화적 주민·관광객과의 교류를 확대할 목적으로 진행된 사업이다. 문화공원 부지에 공예거리를 마련하고 총괄건축가의 지휘 아래 일부 보완을 거쳐서 골목길을 잇고 여러 문화적 장치들을 마련했다.

발 가는 대로 동네를 구경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역사 혹은 건축물을 자세히 알고 싶다면 건축테마투어 ‘건축가와 함께하는 양림건축여행’을 신청하는 것을 추천한다. 건축사와 건축학과 교수 등이 관광객과 함께 직접 펭귄마을과 양림동을 돌면서 건축물들에 깃든 역사와 구조 등을 쉽게 설명해준다. 양림동의 건축물들은 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역사적 사연이 깊고 다양하기 때문에 이를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과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지면에서는 인상적인 건축물 몇 곳을 소개한다.

옛 것도 있고 텃밭도 있네, 그 골목엔


펭귄마을은 양림동 양림커뮤니티센터 남측에 마련된 ‘공예특화거리’를 포함한 인근 주변을 이른다. 이곳에는 지금의 펭귄마을을 있게 한 정크아트 예술가 김동균 촌장이 머무는 ‘펭귄마을 촌장실’을 비롯해 은반지, 도자기, 나무도마 등을 다루는 공예가게들이 있다. 근처에 마련된 부스에서는 광주 MBC 진행자들이 라디오 방송을 진행한다. 펭귄마을의 진면모를 볼 수 있는 곳은 골목이다. 한때 공동화 현상과 화재 등으로 폐허가 돼가던 마을과 이를 극복하려고 한 김 촌장과 주민들의 흔적이 간직돼 있다. 주민들은 버려진 생활용품들로 골목을 치장했고, 곳곳에는 텃밭들을 가꿨다. 골목은 처마 아래로 이어지기도 하고 우물터로 데려다 주기도 한다. 중장년들에겐 옛 시절을 떠올리게 하고, 젊은이들에겐 새로움을 선사하는 풍경이다.

2019 양림건축여행3단리플렛

 

민속문화재로 지정된 백년 가옥들

시 지정 민속문화재 제1호 이장우 가옥.

독립운동에 앞장선 도시에 걸맞게 양림동에서도 독립운동가와 관련된 전통 가옥들을 볼 수 있다. 그중에는 독립운동가 최상현의 집(현 최승효 가옥)도 있다. 그의 부친이자 근대 민족 교육기관 홍학관을 지은 최명구가 1920년대에 만들었다. 정면 8칸, 측면 4칸, 팔작지붕으로 구성된 가옥인데, 전통가옥이 개화기를 지나면서 어떻게 변화했는지 그 흔적이 묻어 있다. 광주광역시 민속문화재 제2호로 지정돼 있다. 위치: 남구 양촌길 29-4.

1899년에 지어진 121년 역사가 깃든 집도 있다. 1899년에 정낙교가 건축한 현 이장우 가옥(광주광역시 민속문화재 제1호)이 그것이다. 팔작지붕 기와집으로, 조선시대 상류 가옥 양식을 따르고 있다. 위치: 남구 양촌길 21.

 

선교사 영향 받은 근대식 양림교회·기독교병원·학교

양림교회 전경

양림교회는 1904년 배유지 목사 사택으로 시작해 1960년 신축을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선교사들의 다난한 역사가 깃든 곳이다. 1919년엔 신도들이 3·1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교회 터를 몰수당해 건물이 헐리기도 했다. 그 탓에 신도들은 1926년까지 오웬 기념각에서 예배를 봤다. 굴곡 많은 역사를 겪었지만 건축물 자체는 근엄하고 단정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붉은 벽돌을 사용해 긴 장방형 평면 형식을 갖췄다. 정면으로 보이는 첨탑형 종탑 탓에 수직성이 강조된 것도 특징이다. 위치: 남구 백서로 70번길 2.

기독교병원은 1905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에서 파송한 놀란이 의료 선교를 목적으로 세운 콘크리트 병원이다. 제중원이란 이름으로 개원됐고, 1970년 광주기독병원으로 개칭돼 현재에 이르렀다. 1960년대에 지어진 인근 병원장 사택과 함께 비교해서 봐도 좋다. 사택은 2층짜리 벽돌건물로, 현재는 리모델링 작업 후 직장어린이집으로 이용되고 있다. 위치: 남구 양림동 37.

등록문화재 제370호로 지정된 광주 구 수피아여학교 윈스브로우 홀

광주 구 수피아여학교 수피아홀(등록문화재 제158호)은 개신교 선교지의 근거지인 동시에 광주 지역 최초의 여성 교육학교다. 오래된 회색 벽돌로 된 2층 건축물로, 교육·종교·역사 등 여러모로 의미가 있는 곳이다. 수피아홀에 이어 광주 구 수피아여학교 윈스브로우 홀(등록문화재 제370호)과 수피아 소강당(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7호)이 1927년, 1928년에 차례로 건축됐다. 윈스브로우 홀은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붉은 벽돌 건물이며, 좌우에 복도가 있고 정면 출입문에 포치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남장로회 서로득(Swinehart) 선교사가 설계에 참여했다. 소강당은 수피아여학교가 학교 인가를 위해 신축된 곳으로, 광주에 남아 있는 체육시설 중 가장 오래됐다. 무엇보다 당시의 건축 양식과 기술을 볼 수 있어 건축물로서의 가치가 크다. 위치: 남구 백서로 13.

 

광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서양식 주택

시 지정 기념물 제15호인 우일선 선교사 사택

우일선 선교사 사택 지하 1층 평면도(좌)와 1층 평면도(우)

양림동산 기슭에 자리한 2층 회색벽돌 건물은 1920년 전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제중병원 2대 원장 우일선 선교사가 사택으로 사용한 곳(기념물 제15호)이다. 광주에 현존하는 서양식 주택 중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자 개화기 흔적이 담긴 귀중한 근대 건축 자산이다. 위치: 남구 제중로 47번길 20(호남신학대학 내).

글 이유리 기자 · 사진 장영호 기자
자료 제공 = 박종호 건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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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교육 공간디자인 혁신사업 ‘학교, 고운 꿈을 담다’ Ⅲ

Seoul Education Spatial Design Innovation Project
‘School, Having a Beautiful Dream’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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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릉도원을 꿈꾸게 하는 섬, 보길도

Bogildo Island,
Your dream paradise

보길도는 완도에서 서남쪽으로 23.3킬로미터, 노화도 남서쪽에서 1.1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섬이다. 동경 126도 37, 북위 34도 06에 위치한다. 면적은 32.9제곱킬로미터, 해안선 길이는 41킬로미터다. 보길도 윤선도 원림은 2008년 1월 8일 명승 제34호로 지정된 곳으로 많은 여행객들이 찾아온다.

노화도와 연결된 보길대교, 그 위를 지나는 정기연락선

선상에서 본 보길도

전라남도 기념물 제37호인 부용동 정원은 고산 윤선도의 유적지로 유명하다.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윤선도가 세속을 뒤로 하고 제주도로 가던 중 보길도의 자연경관에 심취돼 격자봉 아래 낙서재를 만들고 부용동에 세연정(洗然亭)이란 연못을 판 뒤 그곳에서 선유를 즐겼다. 세연정을 가꾸면서 자신만의 이상향 세상을 그린 듯하다. 이곳에서 그는 불후의 명작으로 오우가, 어부사시사 등을 남겼다.

세연정

세연정에서 본 정원 입구

세연정 서편에서 본 전경

세연정 물길이 유입되는 입구

세연정 내부 전경

서편에서 바라본 정원의 판석보 출수전경

윤선도의 개인 작품인 부용동 정원에서는 그가 노래한 어부사시사와 오우가에 등장하는 물, 돌, 소나무, 대나무, 달 등의 자연을 은유적으로 담아 조성한 흔적들을 엿볼 수 있다. 윤선도가 추구한 세상에서 받은 온갖 고뇌와 번민에 노장사상의 철학을 접목해 그만의 세상을 품어보고자 한 끝없는 그의 갈구가 보인다. 현재 보길도 섬 내의 지명들도 거의 윤선도가 명명한 것이다. 보길도의 형상이
연꽃을 닮아 보길도 자체를 부용동이라 이름 지었다.

글. 김기성 Kim, Kisung 예가 건축사사무소 ·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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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건축 08 화성 장안문(長安門)

Immortal architecture 08
Janganmun, Hwaseong Fortress

건축법에서 재축(再築)이란 ‘건축물이 천재지변이나 그 밖의 재해(災害)로 멸실된 경우 그 대지에 다시 축조하는 것을 말한다’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신축, 재개발, 재건축 등 새로 짓는 것이 건축의 주류인 상황에서 재축된 건축물들을 소개하고 건축의 의미를 돌아보고자 이 연재를 준비했습니다.

 

18세기 말 조선. 정조(1756∼1800)는 영조(1694∼1776)에 이어 조선의 중흥기를 이끌고 있었다. 효심이 지극했던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기로 결정하며, 왕이 머무를 수 있는 행궁과 자급자족이 가능한 신도시를 만들도록 했다. 지금으로 치자면 경제 기반형 자족도시를 계획하고 건설하는 일인 셈이다. 왕이 비전을 제시했으니, 실행할 적임자가 필요했을 것이다. 정조는 이 일을 정약용(1762∼1836)에게 시킨다. 어명이니 전공 불문 이유 막론하고 정약용은 도시계획과 건축계획에 착수한다. 이때가 1790년이니 당시 정조는 34세였고, 정약용의 나이는 28살이었다.

화성성역의궤 : 화성전도(1801) © 고려대학교

어명을 받은 정약용은 신도시 계획을 2년 만에 수립하고 1792년 정조에게 계획안을 제출한다. 여기에는 도시계획, 성곽 계획 그리고 개별 건축물의 계획까지 정리되어 있었다고 한다. 단순 비교는 어렵겠지만 지금으로 치면,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신입사원이거나 대학원 연구생 정도의 나이였다고 생각하니 놀랍기도 하고 질투가 나기도 한다. 정조의 승인을 받은 정약용의 마스터플랜과 건축계획 그리고 시공계획을 바탕으로 1794년 1월 수원화성 건설이 착공된다. 그리고 2년 7개월의 공사기간을 거쳐 1796년 9월 완공된다. 28세의 정약용이 계획한 것도 놀랍지만, 그 계획을 바탕으로 33개월 만에 축조된 것이 더 놀랍다.

33개월간의 축조 과정은 모든 것이 세세하게 기록되었다. 도시 전체를 보여주는 ‘화성 전도’를 비롯하여 ‘장안문’, ‘팔달문’ 등 주요 건축물의 내·외부 모습이 도면으로 표현되었다. 성곽을 구성하는 각종 문루, 노대, 치성, 포루 등의 모습과 축조 방식이 담겨있고, 거중기, 설마 등 각종 기계의 도면과 해설을 싣고 있다. 사용된 재정의 조달과 지출내역, 공사에 들어간 물품의 수량과 단가, 투입된 장인의 명단과 근무일수 및 담당업무, 수당까지 기록되어 있다. 각종 건축 용어를 이두로 표기하고 있어 학술적으로도 중요한 자료라고 한다. 이러한 영건의궤는 지금의 건설지와 같은데, 수원화성의 것은 영건의궤 중에서도 가장 풍부한 내용을 수록하고 있다고 한다. 의궤의 간행은 축조를 마치고 5년 뒤인 1801년 9월에 이루어진다. 「화성성역의궤」는 대한민국 보물 제1901호로 지정되었다.

화성성역의궤 : 장안문 외도(1801) © 수원화성박물관

장안문 주변 옛 사진 ©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NARA

장안문 주변 옛 사진 © 국립중앙박물관

장안문 주변 옛 사진 © 경기대학교 박물관

허물어진 수원화성의 동북공심돈(1967) 수원시박물관사업소 소장

한국전쟁 중 장안문(1950) ©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NARA)

한국전쟁 중 장안문(1952) © 수원박물관

한국전쟁 중 장안문(1952) © 경기대학교 박물관

장안문 배면(1967) 수원시박물관사업소 소장

서장대 방화 현장(2006) © 수원소방서

서장대 방화 현장(2006) © 연합뉴스

수원의 화성(Hwaseong Fortress)은 1997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다. 화성은 등재기준(ii)과 (iii) 2가지를 충족하고 인정받았다. 간단히 인정 내용을 살펴보자. 기준(ii)에서는 축조과정에서 우리나라의 기존 성곽은 물론 중국, 일본, 유럽의 성곽을 면밀히 연구하고 수원에 가장 적합한 성곽 양식을 만들어 낸 것을 중요하게 보았고, 동서양 과학기술의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라는 가치가 인정받았다. 기준(iii)에서는 기존 우리나라 성곽들이 산마루에 축조되었던 것과 달리 평탄하고 넓은 땅에 조성된 점이 주요했다. 전통적인 성곽 축조기법을 전승하면서 군사, 행정, 상업적 기능을 담당하는 신도시 구조를 갖추었기 때문에 18세기 조선 사회의 상업적 번영과 사회변화, 기술 발달을 보여주는 새로운 양식이라는 점이 가치로 인정받았다. 이러한 가치를 설명하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화성성역의궤의 기록이 매우 중요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혹자는 새로 복원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건축물들이 어찌 문화재적 가치가 있겠느냐,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오래됨 이면에 있는 내용적 가치의 중요함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된다. 20세기에 들어서서 화성은 크게 훼손되고 파괴되어 사라지고 있었지만, 다시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건설기간 보다 2배의 기간이 소요된 화성성역의궤의 꼼꼼한 기록 덕분이 아니었을까? 덕분에 지금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가치와 우수성을 인정받아 복원과 관리가 잘 이루어지고 있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찾아가서 아름다운 모습과 역사적 의미를 살펴볼 수 있다. 하지만 항상 화려했던 것은 아니다. 폐허 직전에서 구사일생한 화성의 파괴와 재축의 과정을 살펴보자

1922년 수원에는 유래를 찾기 어려운 홍수를 겪는다. 이 과정에서 남수문이 유실되었고, 90년간 복원되지 못한다. 35년간 일제강점기 기간에는 한양도성과 마찬가지로 화성의 성곽이 조금씩 조금씩 해체되었다. 광복을 맞았지만, 생존의 절심함이 컸던 어려운 빈곤국가에서 사라진 왕국의 성곽을 복구하거나 관리할 여력은 없었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수원은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의 치열한 전장이 되고 만다. 교통의 요지로서 상업이 번창한 수원이었지만, 교통의 편리성 때문에 전쟁 중에는 가장 치열한 격전지가 되었던 것이다. 장안문은 한국전쟁 초기만 하더라도 다수의 사진에서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1952년 사진에는 서쪽 지붕이 지우개로 지워진 듯 잘려나간 모습이다. 큰 폭발로 한쪽이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파괴된 장안문 앞에 소련제 탱크가 버려져 있는 모습을 보면 수원에서의 치열한 전투를 짐작해 볼 수 있겠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그나마 남아있던 나머지 문루도 말끔하게 사라진다. 장안문은 한국전쟁 기간에 석재 기단부를 제외하고 모두 소실되었다.

수원 화성은 1975년 장안문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복원이 시작된다. 한국전쟁 때 파괴된 장안문의 실측자료가 없었기 때문에 당시까지 확인된 사진자료와 화성성역의궤의 도면이 복구의 기준이 되었을 것이다. 다시 한번 화성성역의궤의 중요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18세기 조선에서 2년 만에 축조한 화성은 20세기 대한민국에서 20여 년 동안 조금씩 조금씩 복구된다. 신축보다 리모델링이 더 어려운 것은 현대 건축물도 마찬가지이니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다. 1996년 정도가 되면 화성은 본래의 모습을 많이 되찾게 된다. 20여 년간 노력한 복원 결과를 바탕으로, 수원 화성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하는 준비를 가게 된다. 이때 주민의 부주의로 서장대에 화재가 발생한다. 성곽 주변을 살피고, 화성 내 군사를 지휘하기 위해 팔달산의 가장 높은 곳에 있던 2층 누각 서장대 전체가 이 화재로 완전히 소실되고 만다. 다행히도 서장대 복구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듬해인 1997년 수원화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지만, 화성이 본래의 모습을 완전히 되찾은 것은 아니었다. 18세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도시의 확장과 증가한 인구 그리고 자동차를 위한 도로확장으로 현재의 도시상황에 맞추면서 복원과 관리를 병행해야 했다. 보존과 개발의 균형점은 언제나 풀기 힘든 방정식이다. 난해한 방정식에 매달리고 있을 때 다시 한번 서장대 화재의 악몽이 되풀이되었다. 1996년 화재 이후 10년 만인 2006년에 서장대는 다시 화재 피해를 입는다. 이번엔 방화였다. 2층 누각에 오른 방화범은 불을 지르고 도주했고, 서장대의 2층 누각이 소실되고 말았다. 2008년 숭례문이 방화로 소실되기 2년 전의 일이다.

복원된 장안문

홍수, 일제강점기 훼손, 한국전쟁, 화재, 방화 등 수원 화성이 마주했던 파괴와 소실의 과정은 참담하다. 이런 화성의 역사는 수원의 역사이기도 하다. 수원은 역경을 딛고, 산업, 경제, 교육,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대한민국을 대표할 만한 도시로 성장했다. 인구는 125만 명 정도로 울산광역시보다 많고, 대전광역시나 광주광역시 인구에 조금 밑도는 정도다. 18세기 말 정조가 꿈꾸었던 모습의 도시는 아니지만, 현대적 의미의 화려한 대도시가 되었다. 그럼에도 도시의 정체성과 역사성을 상징하는 화성을 보전하고 관리하는 모습과 태도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화성은 조선에서 100년을 지내고, 혼란의 20세기 100년간 훼손, 파괴의 시기를 거쳐 기적처럼 부활했다. 역사를 이해하는 수원 시민들과 함께 수원의 화성이 불멸의 건축으로 남기를 바란다.

복원된 수원 화성

 

글. 신민재 Shin, Minjae AnLstudio 에이앤엘스튜디오 건축사사무소

신민재 에이앤엘스튜디오 건축사사무소

한양대학교 건축공학부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Artech과 JINA에서 실무를 했다. 2011년부터 AnLstudio 건축사사무소를 공동으로 운영하며 전시기획에서 인테리어·건축·도시계획까지 다양한 스케일의 작업을 하고 있다. 2016년 젊은건축가(문화체육관광부) 수상자이며, ‘얇디얇은집’으로 서울시건축상(2019)을 수상했다. 현재 한양대학교 겸임교수이자 서울시 공공건축가 겸 골목건축가이다.
shin@anlstudi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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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잉카 04 상상력과 호기심의 도시, 마추픽추를 걷다

Hello, Inca 04
Trekking in Machu Picchu, a city of imagination and curiosity

안데스의 품에 숨어 있는 마추픽추

마추픽추는 밀림으로 열린 잉카 제국의 식량기지 서쪽 관문으로 3박 4일 잉카 정통 트레킹으로 다가갈 수 있다. 살칸타이봉(6,271m)을 사이에 두고 남으로는 초케키라우(3,033m)가, 북으로는 마추픽추(2,430m)가 서쪽 밀림의 관문을 지키고 있다. 초케키라우가 아푸리막강을 두르고 있듯이 마추픽추는 우루밤바강을 두르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차로 편리하게 마추픽추에 다가가지만, 정통 잉카 트레킹을 따라 마추픽추에 다가가기를 간절히 원하는 이들도 많다. 케추아어로 왕의 길을 뜻하는 이 길을 따라 해마다 잉카 왕이 마추픽추로 다가섰기 때문이다.

루트의 시작은 쿠스코에서 승합차로 오얀타이탐보에서 장비를 싣고 마지막으로 도착하는 베이스캠프 칠카(2,793m)다. 우루밤바강을 가로질러 와이야밤바(3,060m)에서 첫 밤을 보내고, 죽은 여인을 뜻하는 공포의 와르미와뉴스카 고개(4,125m)를 지나 파카이마유(3,600m)에서 둘째 날을 보낸다. 룬크라카이 고개(3,998m)를 지나 사약마르카(3,600m)를 거쳐 위냐이와이나(2,630m)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이른 아침 해 뜰 시간에 인티푼쿠(2,650m)에 선다. 떠오르는 해를 등지고 마추픽추를 바라보는 것이 모든 여행자의 간절한 바람이다.

마추픽추 정통 잉카 트레킹은 6개월 전에 예약해야 할 정도로 인기다. 케추아어로 ‘왕의 길’을 의미하는 잉카 제국의 길, 즉 카팍 난이 그만큼 가장 완벽하게 보존돼 있기 때문이다. 친체로를 지나 우루밤바로 내려설 즈음 절벽을 타고 도는 길이 심하게 구불거린다. 줄곧 우루밤바강을 따라 두 시간동안 덜컹거리다가 오얀타이탐보에 도착했다. 오얀타이탐보는 잉카 트레킹이 시작되는 유적지이자 마추픽추로 가는 첫 번째 기차역이 있어 언제나 여행자의 기대와 희망으로 설레는 곳이다.

 

숨은 장소에 있는 도시
하늘이 점점 가까워지는 오르막길에 나무 벤치가 나타나고 그 앞으로 수로가 넘칠 듯이 맑은 물이 흘렀다. 지나가던 말이 길게 목을 빼고 물을 마신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언덕길을 따라 걸었다. 우루밤바강을 밀어내고 산등성이를 오르자 지천으로 깔린 호박돌 사이로 오솔길이 거칠게 이어진다. 눈앞에 반듯한 평지가 나오자 앞서 가던 일행이 일제히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갔다. 반달 모양의 약타파타 유적지(2,850m)다. 쿠시차카 강줄기가 산허리를 감싸며 흐르다 우루밤바강과 만나는 삼각주에 놓였다. 곧바로 감탄사가 터져 나온다. 건축가 책상 위에 놓인 모형처럼 선명하다.

잉카인은 까마득한 협곡 아래 강줄기를 따라 석축을 쌓고 그 위에 귀족의 주거지를 짓고, 유선형의 테라스를 만들었다. 반달 모양의 석축은 강줄기에 발을 딛고 선 퓨마의 발톱 모습이다. 잉카 장인에게 대지는 노동의 대상이 아니라 감정을 가진 생명이었다. 거대한 농경지를 하나의 대리석 판에 펼쳐놓고 섬세하게 조각한 모습이다. 산허리와 만나는 상부 테라스에는 집과 광장, 통로와 구조물이 반달 모양 속에 녹아들어 있다. 이곳이 단순한 촌락이 아니라 주요 농산물의 생산과 집하를 관리하는 신성한 장소였음을 증명해준다.

약타파타 유적지는 테라스 상부의 주거지와 강 연안의 테라스 모두 대지의 곡선 형태를 존중해 건설돼 있다. 테라스 상부의 주거지는 마당 혹은 중정을 중심으로 건물이 둘러싼 형태다. 출입구는 마당을 향해 열려 있지만 창문은 잉카인이 신성시하는 아침 해가 뜨는 동쪽을 향해 개방돼 있다. 주거지의 창문을 하나같이 동쪽으로 내면서도 적절하게 마당을 공유하고, 이를 통해 광장의 동선을 공유하는 독특한 배치다.

약타파타 유적지

강 연안으로 내려갈수록 테라스가 올록볼록 아치를 그리는데 퓨마의 발톱처럼 보인다. 강 연안 북쪽, 유적지의 동쪽 끝 테라스에 풀피트유흐라 불리는 반원 탑이 있다. 문헌에 따르면 풀피트유흐는 잉카 시대의 명칭이 아니고, 설교대를 의미하는 스페인어와 케추아어의 접미어를 묶어 만든 복합어다. 돌출된 자연석 위에 탑을 세우고, 바위 끝에 돌기둥을 세워 무너지지 않게 받쳤다. 쿠시차카강 연안의 저지대를 굽어보고 있는 모습이 마치 상상 속 코끼리 같다.

동쪽 벽의 창문으로 빛이 들어오면 어두운 실내 바닥에 의미 있는 빛의 자국을 남겼을 것이다. 다소 조악한 둥근 벽에는 손목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구멍이 나 있다. 마추픽추 콘도르 신전의 벽감에 나 있는 구멍과 같은 모양이다. 이것을 두고 감옥이나 미라를 안치했던 곳으로 추정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눈 위의 도시
다시 가파른 절벽 앞에 섰다. 암석 가운데로 길쭉한 굴이 나 있고, 한 사람이 겨우 지날 수 있는 정도의 계단이 이어진다. 굴에서 나와 몇 발짝 걸어가자 삼각뿔 모양의 굴이 또 반듯하게 나타난다. 잉카인은 석축을 쌓을 수 없는 절벽에 맞닥뜨렸어도 절망하지 않고 20m의 굴을 뚫었다. 손과 돌만으로 단단한 암석에 구멍을 뚫은 잉카인의 열정이 손에 잡힐 듯하다.

단단한 암석에 길을 낸 잉카인들

푸유파타마르카(3,680m)에 이르는 트레킹은 열대우림 속 긴 터널을 지나듯 깊은 숲길이 이어진다. 푸유파타마르카라는 이름은 이곳을 탐험한 페호스가 눈 위의 도시, 마을, 장소라는 뜻으로 붙였다. 장소와 이름이 딱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있다면 푸유파타마르카가 그럴 것이다.

유적지는 피르카(돌과 돌 사이를 좀 거칠게 짜 맞추는 고대 건축 양식)라고 불리는 건식 마름돌쌓기 공법으로 지어졌다. 중앙 돌출 부분의 계단을 중심으로 유적지 양쪽이 정반대의 형상이다. 푸유파타마르카로 다가서는 순간 전형적인 잉카 테라스의 간결함에 압도되는데, 정상에 오르는 순간 서쪽은 동쪽과 완연하게 다른 모습에 놀라게 된다.

동쪽의 기하학적 모양의 테라스가 서쪽으로 휘어질수록 주름을 말아 올린 듯 우그러져 있기 때문이다. 동쪽에서 만나는 직사각형 샘은 그 아래로 연속된 여섯 개의 샘으로 이어진다. 서북쪽 경사지의 건물 유적은 말미잘 모양으로 구불구불한 자연의 주름을 따라 벽을 쌓아올린 특이한 공간이다.

푸유파타마르카 유적

건축적으로 하나의 공간을 다른 형태와 구조로 둘러싸는 것은 결코 평범한 구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특별한 목적이 있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푸유파타마르카를 보면서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이 떠오른다. 미술관의 외관은 빌바오강 방향으로 유선형의 곡선이 굽이치지만, 도시를 향해서는 기존의 박스 건물과 비슷하게 직선축의 돌로 마감되어 있다. 도시와 조화를 이루면서도 구겐하임만의 독창성을 잃지 않기 위함이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이 독특한 공간에서 잉카인은 도대체 무슨 일을 한 것일까. 오른쪽이 기하학적 배치라면, 왼쪽은 자연의 산등성이에 아슬아슬하게 자리한 자유 곡선 배치다. 빛과 어둠, 기쁨과 슬픔, 자유와 구속 같은 극적인 대비를 불러일으킨다. 이들은 왜 가파른 경사지의 절벽을 따라 삐뚤빼뚤 벽을 쌓았을까.

 

태양이 머무는 자리
푸유파타마르카 서쪽으로 7km 떨어진 인티파타로 가는 길. 수직으로 깎아지른 계단을 내려가기가 무섭게 뒤를 돌아보았다. 층층이 쌓아올린 곡면의 석벽이 하늘에 벌집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다. 돌계단이 대나무 숲 사이로 내리꽂히듯 깊게 이어진다. 해발 3,670m 고지에서 야영장까지 1,000m쯤 수직으로 떨어지는 느낌이다. 자욱한 안개 사이로 인티파타 테라스가 경사지에 불룩하게 솟아 있다. 거뭇거뭇한 석축 테라스가 층층이 절벽에 박혀 있다.

가지런히 포장된 돌계단을 따라 끝도 없이 하강하는 숲길이 열리고 닫히기를 반복하더니 마침내 석굴이 막아선다. 돌의 결을 따라 길쭉한 타원 모양으로 난 굴은 안데스의 여신이 두 손 모아 기도하는 모습이다. 그 속으로 난 계단은 자주 허리를 구부려야 지날 수 있다. 굴을 벗어나자 발밑으로 우루밤바강이 굽이쳐 흐른다.

1941년 폴 페호스의 탐험대가 발견한 인티파타는 마추픽추와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지만 마추픽추와 완벽하게 차단돼 있다. 페호스는 태양의 자리라는 의미로 이곳을 인티파타라고 불렀다. 아침마다 해가 테라스를 비추면 인티파타는 대지의 여신처럼 일어난다.

야마 떼가 한가롭게 노니는 풀밭을 지나 작은 목책 다리를 건너 유적지 사이를 걸었다. 거대한 테라스의 물결이 해일처럼 몰려와 금방이라도 덮칠 기세다. 칼날같이 날카로운 돌이 절벽에 층층이 박힌 가파른 테라스 중앙에 수직 사다리가 있다. 네 발로 기어오르자 어느새 계단은 사라지고 오른쪽으로 난 샛길이 나온다. 좀 더 올라가자 인티파타의 상부 테라스와 하부 테라스 사이를 구분하는 길이 나온다.

인티파타의 허리를 따라 걸어가는 순간 왼쪽의 천 길 낭떠러지 절벽에는 테라스가, 오른쪽 위로는 건물 유적지가 망루처럼 서 있다. 상부 건물 유적지로 올라가는 가파른 계단이 하늘에 걸려 있어 네 발로 기듯이 올랐다. 왼쪽으로 의식용 샘이 낮게 자리하고 계단을 따라 을씨년스러운 유적지가 서 있다. 건물 내부는 담장으로 칸칸이 막혀 있어 전체적인 형상을 가늠할 수 없다.

거대한 인티파타의 테라스는 산등성이를 수직으로 구획하는 중앙 계단과 좌우 세 개의 다른 계단으로만 오를 수 있다. 유적지 상부에 있는 공간은 잉카 건축의 전형인 사다리꼴 문과 벽감과 창으로 이루어졌다. 급경사진 테라스 형태에 맞추어 자연스러운 곡선의 돌담이 방을 에워싸고 있다. 2층으로 된 방에는 독특한 절구 모양의 돌이 놓여 있는데,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다. 중요한 제의가 이곳에서 벌어지지 않았다면 이런 절벽에 테라스를 쌓고 건물을 짓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티파타 유적지 계단

거대한 인티파타 유적지는 멀리서는 엎어놓은 소쿠리 같아 부드러워 보이지만, 가까이 가보면 날카로운 돌일 뿐, 날카로움이 앞선다. 이곳은 마추픽추를 지키는 마지막 요새임에 틀림없다. 가파른 수직 계단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48개의 테라스를 이어주지만 중앙 계단의 머리는 아직 제대로 복원되지 않은 채 흙 속에 묻혀 있다. 신성한 샘물은 서남쪽 테라스 상부에 설치된 수로를 따라 쉬지 않고 흘러내린다.

 

그 넉넉한 품
평탄한 길을 따라 위치한 위냐이와이나 유적지는 오묵한 소쿠리 모양이라 어느 한 부분도 눈을 불편하게 하는 곳이 없다. 인티파타가 거친 남신의 일부라면, 위냐이와이나는 여신의 품이나 마찬가지다. 파차마마가 두 팔을 벌려 지친 영혼을 품어주는 것 같다. 서쪽 산등성이에 위치하는 까닭에 석양의 끝자락에서 오랫동안 물들고 있다.

인티파타와 위냐이와이나는 산등성이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누워 있지만, 인티파타에서는 위냐이와이나의 존재조차 알 수 없다. 인티파타는 동쪽 산등성이에, 위냐이와이나는 서남쪽 산비탈에 있기 때문이다. 유적 전체의 모습을 한눈에 보여주기를 거부하는 인티파타와 반대로 위냐이와이나는 한눈에 전체 모습을 펼쳐 보인다. 모성적인 공간의 위력이다.

위냐이와이나는 이 지역에 많이 서식하는 토종 난의 이름으로, 영원한 젊음을 상징한다. 이 일대는 열대운무림 지역이라 수많은 꽃과 동물에게 이상적인 곳이다. 여기에 반해 계곡 가까이 위치한 유적지는 거대한 테라스의 남쪽 사면을 따라 기하학적 모습으로 질서 있게 배치돼 있다.

위냐이와이나 유적지

수직의 계단과 맞물려 테라스 형식의 샘 여러 개가 상하의 건축물을 긴밀하게 연결한다. 상부 유적지의 내부는 이중 문설주를 통해 들어간다. 들어갈 때는 하늘을 이고, 나올 때는 안데스의 절경을 품는다. 반원형 공간이 넉넉하게 마중한다. 반원형 탑은 질이 조금 떨어지는 막돌로 쌓았지만 벽에는 잘 가공된 사다리꼴 창문과 인방 좌우로 돌출된 원형 봉이 정교하게 놓여 있다. 거친 문설주에 달린 잘 가공된 돌 경첩이 방금 만든 것인 듯 손으로 돌리니 빙글빙글 돌아갔다. 돌 틈 사이로 잡풀이 무성하다.

위냐이와이나 유적지

이곳의 성격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종교 의식을 치르는 장소였다는 주장과 주변을 한눈에 굽어볼 수 있는 요충지인 까닭에 관측소나 군사 시설이었다는 설도 있다. 잉카 시대에 권력과 신앙 숭배는 중세의 요새가 교회와 성을 동시에 상징하던 것과 비슷하다. 가장 높은 곳에 망루와 신을 섬기는 제단을 설치하고, 그 아래에 제사장의 목욕 공간, 그 밑에 귀족 거주지를 만들었다는 것은 잉카 유적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배치다.

주거지와 신전 사이를 이어주는 열 개의 도드라진 샘이 직사각형 형태로 열 지어 박혀 있다. 테라스 중턱에 돌출된 일련의 의식용 샘은 상부와 하부 유적지를 징검다리처럼 이어준다. 테라스의 경사에 맞게 계단을 설치하고 그 옆으로 직사각형 샘을 배치한 것은 기능적, 미적으로 볼 때 완벽하다. 건축은 순간의 환상으로 짓기에는 너무 지루하고 힘든 작업이다. 완벽한 건축물일수록 그 시대의 문화와 철학과 가치가 통째로 투영될 수밖에 없다. 잉카 유적에 공통된 구조와 디테일이 반복되는 것은 잉카 문화의 일관성을 대변한다.

 

태양의 문
인티푼쿠는 케추아어로 ‘태양의 문’이라는 뜻이다. 아침마다 잉카의 태양이 마추픽추 태양 신전으로 다가서기 전에 여기서 고개를 내밀었고, 잉카인의 하루를 열었을 것이다. 마추픽추가 손에 잡힐 듯 가깝구나 싶은 생각이 들 때마다 길은 꿈틀거리며 뒷걸음질 친다. 하지만 호기심을 꺾을 수 없다. 오솔길이 마지막 고개를 바짝 세운다. 600년의 시간을 당기는 발걸음이 떨린다. 높다란 계단을 오르자 인티푼쿠라는 작은 표지판이 석벽에 기대 서 있고, 그 오른쪽으로 입구가 열려 있다.

직사각형의 방이 나오고 그 왼쪽으로 벽이 트여 있다. 마추픽추의 태양 신전을 향해 난 작은 창문으로 섬광처럼 날아가는 그 빛을 보고 싶다. 잠시 희미한 자태를 드러낸 마추픽추는 안개 장막을 두르고 바람난 애인처럼 달아난다. 그 앞으로 이어지는 경사길이 뱀처럼 구불거리며 협곡을 두르고 있다. 그 위로 승합버스가 버거운 허리를 틀며 기어오른다. 마추픽추 테라스가 잠시 드러나는 순간 그 뒤로 와이나픽추가 위엄 있게 고개를 내민다.

인티푼쿠를 지나 마추픽추로 가는 길

인티푼쿠는 거대한 콘도르의 입으로 들어가는 진입도로로 연결되어 있다. 잉카 제국의 영혼이 소통하는 인티푼쿠는 지난 세월 동안 단 한 순간도 일출을 멈춘 적이 없다. 날마다 태양의 손길에 깨어나 숨 쉬는 마추픽추의 숨구멍이다. 인티푼쿠는 또한 인공적으로 쌓아올린 테라스 절벽 위에 서 있는 잉카의 눈이자 태양의 길목을 지키는 천문관측소였다.

인티푼쿠의 설렘을 가슴에 안고서 1km 거리의 마추픽추 신전으로 향한다. 그 옛날 잉카인이 걸었던 길은 산허리를 따라 포물선을 그리며 촘촘하게 포장돼 있다. 북쪽 하늘에 와이나픽추가 우뚝 솟아올랐다.

마추픽추 봉우리와 푸투쿠시 봉우리가 만나는 선상에 직사각형의 유적이 나타났다. 안데스의 신 아푸스에게 의식을 올리던 제단은 섬세한 조각으로 반짝거린다. 제단을 둘러싼 방 내부에 설치된 정갈한 벽감은 잉카의 성직자가 의식을 준비하는 공간이었을 것이다.

마추픽추, 돌의 신전 앞에 서자 침묵하던 잉카 역사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일어나는 것 같다. 놀란 가슴은 망아지처럼 날 뛰며 시간의 경계선에서 떨었다. 위대한 잉카의 힘과 논리는 예측을 거부하며 상상력의 한계를 지워버렸다.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낸 마추픽추의 존재는 현실이지만 그 존재의 이면에서 피어오르는 신비는 도저히 어찌할 길이 없다.

저 멀리 내려다보이는 마추픽추->인티푼쿠를 통해 마추픽추에 진입하면 마주하게 되는 광경

계단식 테라스의 비밀
마추픽추는 언뜻 보면 해자(빗물과 하수를 흘려보내는 통로)와 성벽을 중심으로 남쪽은 테라스, 북쪽은 도시 유적이다. 도시 유적도 반은 건물이 앉아 있고 반은 테라스로 비어 있다. 마추픽추는 비밀스럽게 쌓아올린 계단식 테라스 위에 건물이 한 몸처럼 서있다. 이집트 피라미드가 거대한 기하학적 돌 텐트라면, 마추픽추는 급경사지에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계단식 피라미드다.

잉카인은 산봉우리의 불규칙한 경사지에 집을 짓기 위해 경사도가 50퍼센트에 육박하는 사면에 테라스를 쌓아올렸다. 이집트 초기의 피라미드의 형태인 마스타바처럼 한 단 한 단 테라스를 쌓아 마지막 꼭대기까지 폭우와 지진에도 끄떡하지 않는 단단한 건축물을 만들었다. 마추픽추엔 미학적, 구조적, 공학적 요소가 모두 씨실과 날실처럼 촘촘하게 엮여 있다.

남쪽의 거대한 농경 테라스 지역뿐 아니라 요새 안의 궁전 그리고 일련의 주거 건축 지역도 모두 테라스 위에 올라타고 있다. 마추픽추는 단순히 아름다운 공중 도시가 아니다. 여기에는 콘도르의 이미지, 합리적인 도시 계획, 철저히 계산된 수로가 도시 중심으로 흐르는 과학적인 도시다. 도시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해 구조공학, 토목공학, 천문기상학 등이 융합된 건축 공학의 결정판이다.

해발 2,450m에 이르는 고지에 마추픽추는 오늘도 말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테라스와 도시를 만든 어떤 단서나 건축 디테일을 남겨놓지 않았다. 지금까지 마추픽추의 신비를 시원하게 풀어줄 특별한 장비를 발견한 것도 없었다. 로마인들이 이용한 도르래나 오늘날 크레인의 초기 단계인 기계의 도움도 받지 않고 마소의 도움도 없이 오직 원시적인 도구만으로 수십 톤의 돌을 캐서 절벽 위로 옮기고 또 그 돌을 안전하게 세웠다.

벽돌을 만들다 떨어진 자투리와 자갈로 테라스를 쌓아올렸다. 현대의 건축공학으로도 만만찮은 작업이다. 폭우와 지진으로 돌담이 무너져 절벽 밑으로 굴러떨어질 위험을 항상 안고 있었다. 고작해야 학자들이 발견한 것은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공사에 사용되었다고 주장하는 썰매와 사다리 정도다. 그 외는 모두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냈다.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위험한 정상에 마추픽추가 서있다.

마추픽추가 자리한 위치는 지진이 잦은 환태평양 화산대 지각판 위에 걸터앉아 지각변동으로 침하한 지대다. 지진과 폭우로 테라스가 허물어지면 삽시간에 모든 것이 쓸려 내려갈 수 있다. 연중 2,000mm가 넘는 폭우와 지진에도 지금까지 꿋꿋이 서 있는 테라스는 이 모든 장애를 이겨내었음을 의미한다.

테라스의 상세한 도면에 따르면 빗물이 스며들면 쉽게 흙으로 흡수되고, 잉여의 물은 외부로 흘러가게 설계돼 있다. 직접 실험해보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 서 있는 테라스가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상부에서부터 테라스가 흡수할 수 있는 양을 제외한 나머지는 하부 테라스를 적당히 채우고 나서는 외부 하수도로 신속히 흘러 내려갈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는 뜻이다.

마추픽추 테라스의 가장 큰 비밀은 테라스 단면도에 나와 있듯이 테라스 벽이 5도 산비탈 안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것이다. 5도의 기울기에 대한 과학적인 해석은 발견할 수 없었다. 마추픽추의 모든 건물 벽은 모두 안쪽으로 15도 기울어져 있다. 이 또한 왜 15도로 기울어져 있는지 과학적인 해석은 발견할 수 없었다.

건축가로서 한 가지 재미난 부분은 15도로 테라스 벽이 기울어져 있으면 경작지의 면적이 턱없이 줄어든다는 것이다. 높이 1m정도의 테라스 벽이 가장 안전하게 구축될 수 있는 마지막 한계선이 5도였음을 잉카인들이 경험으로 발견한 것이다. 잉카인들은 경작지를 최대로 확보하는 것과 테라스의 구조적 안전성을 동시에 확보하기 위해 수없이 실험하며 지금의 테라스 구조를 개발하였을 것이다. 그 다음에 빗물을 적당히 받아들이고 잉여의 물은 과학적으로 설계된 배수로를 따라 해자로 흘러내리도록 설계한 것이다.

잉카의 기술자는 지반을 적당히 파내고 맨 아래쪽에 작은 돌을 촘촘히 박아 넣은 다음 그 위에 좀 더 큰 돌을 5도의 경사를 지어가며 1m 높이로 쌓아올렸다. 벽 안에 작은 돌로 큰 돌의 틈을 촘촘히 메우고 밑에서부터 자갈, 모래, 흙(부식토와 표토)을 채웠다. 큰 돌 위에 작은 돌을 놓고, 그 위에 모래와 부식토, 표토를 덮었다.

오늘날에도 집을 지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지반을 안전하게 다지고 석축을 쌓는 일이다. 중력이 작용하는 건물이 지진에 흔들리거나 폭우로 침하 하는 순간 건물은 한순간에 무너지기 때문이다. 경사가 50도에 육박하는 산비탈에는 더욱 위험하다. 비탈의 흙을 적당히 긁어내고 돌을 위계5도 안쪽으로 기울어짐대로 쌓고 그곳에 자갈, 모래, 흙을 일정 비율로 채우는 방법까지 찾아낸 것은 한마디로 기적이다.

건축설계도는 항상 모든 경우를 대비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대표적인 몇몇 경우를 적용한 표준설계도에 불과하다. 각각의 지반 구조가 다를 경우 그 특성에 맞게 맞춤시공을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마추픽추의 테라스는 한순간에 기적적으로 만들어낸 기념비가 아니라 끊임없는 시행착오 끝에 안전한 구조와 배수 설비를 갖출 수 있었다.

오늘날 여행자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낙수용 홈은 많지 않다. 기록에 따르면 낙수용 홈이 모두 130여 개에 달한다고 한다. 이는 산정에 폭우가 쏟아지면 잉여의 물들이 미리 설계된 배수 시스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하수구를 통하여 건식 해자로 흘러내린다는 뜻이다. 계단식 테라스는 단순히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무서운 과학을 품고 있는 잉카 건축의 핵심이다.

잉카 건축의 정수로 꼽히는 계단식 테라스

 

글. 김희곤 Kim, Heegon 건축사

김희곤 건축사

마흔이 넘어 스페인으로 떠나 유럽의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건축물을 돌아보았다. 스페인 마드리드건축대학교에서 복원과 재생건축을 전공하고 돌아와 건축사사무소를 운명하며 성균관대학교, 홍익대학교, 서울시립대학교에서 겸임교수로 강의했다. 문화부 장관상을 받았으며, 대한민국건축대전 심사위원, FIKA 국제위원회 자문위원, 2017 UIA 서울 유치위원으로 활동했다. 건축은 미래로 열린 창이자 창조의 근원이라는 믿음을 독자들과 공유하기 위해 세계의 문화유적과 도시 답사를 계속하며 글쓰기와 강연에 매진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스페인은 건축이다』, 『스페인은 순례길이다』, 『정신 위에 지은 공간, 한국의 서원』이 있다.
paco9949@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