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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대한 여러 가지 제도적 시각의 모순

Contradictions of different institutional perspectives of ‘house’

몇 해 전 한 정치인이 집은 사는(Buy) 것이 아니라 사는(Living) 곳이어야 한다는 발언과 함께 경고성 정책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녀의 기대와 달리 ‘집’은 사는(Buy) 것(Product)의 가치로 맹위를 떨치며 요란스럽게 자산증식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더욱 키웠다.
‘집’의 본질은 원천적으로 인간이 보호받을 수 있는 거처다. 오랜 기간 ‘집’은 그 역할에 충실했고, 의식주의 하나로 존재했다. 그런 집이 20세기에 들어서 갑자기 부수적 기능이 커지기 시작했다. 이른바 자산화되고, 수익화된 ‘부동산=집’의 등장이다. 그리고 의식주 중 하나인 집의 가격 불안정성은 모두의 불만 대상이 되었고, 당연히 정치인들의 구호와 정책에 등장했다. 이렇게 과잉의 자산증식 수단이 된 ‘집’을 바라보는 건축사들의 마음은 불편하다.
전문가인 건축사들은 ‘집’에 대한 본질적 가치와 의미를 고민하고 이를 다루는 것을 우선한다. 그런데 건축사에게 건축을 의뢰하는, 특히 ‘집’을 상품으로 의뢰하는 사업가들의 요구에 난감해진다. ‘집’의 상품화가 강조된 시장 상황에선 ‘가치’가 의사결정의 우선순위에서 밀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산화, 도구화된 현재의 ‘부동산=집’ 이라는 공식에 거부 반응을 보이는 것도 타당하지 않다.
오늘날의 ‘집’은 자산인 동시에 또 다른 의미의 가치를 지닌다. 즉, 사는(Buy) 것의 성격과 사는(Living) 곳의 성격 모두가 중요하다. 그런데, 이런 복합적 21세기의 ‘집’을 하나로만 정의하려는 시선 때문에 자꾸 왜곡되고 틀어지고 있다. 근본적인 접근이 아닌 부수적인 접근으로 인한 부작용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 과잉된 부정적 시각은 계속해서 임기응변식 정책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 결과 2021년 대한민국의 ‘집’을 다루는 각종 제도는 서로 충돌하는 모순을 만들어 내고 있다. 정치인들의 법안 발의도, 중앙정부의 행정가들도 이런 모순 창조에 동참하고 있다.
다중생활시설, 생활형숙박시설, 오피스텔의 공통점은 뭘까? 바로 모두가 집의 기능을 하지만, 건축법상 집이 아니라는 것이다. 건축법에서 집은 단독주택이나 공동주택으로 구분하며, 관련법들의 적용을 받는다. 살기 위한 집도 있지만, 매매하기 위한 목적으로 다량으로 집을 건축하기에 별도의 ‘주택법’도 존재한다. 주택은 주민등록이 가능한 대상이다. 주민등록이 되어야 ‘집’이 된다. 이는 거주자의 권리와 법적 행위 행사를 위한 것으로, 행정안전부에서 정의를 내리고 있다. 그런데 ‘다중생활시설’이라는 법적 용어로 정의된 고시원에도 주민등록이 된다. 그렇다면 ‘다중생활시설’인 고시원은 ‘집’인가?
이는 세금과 관련이 있다. 다주택 소유, 잉여주택의 독과점적 소유문제를 주거안정을 해치는 부동산 가격 폭등의 주범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때문에 다주택자에게 누진세를 부과하게 했다. 또 매매할 때 발생하는 양도세와 소유과정에서 발생하는 재산세, 취득·등록세 등 각종 세금 부과 대상이다.
자! 그렇다면 다중생활시설은 ‘집’인가, 아닌가? 도시형 생활주택과 연립주택, 다세대주택, 다가구주택 등은 여러 가지로 달리 정의된 주택에 대한 용어다. 그렇다면 오피스텔은? 업무시설이면서 주택이다.
그런데, 이런 규정과 제도들이 건축 인허가를 대행하고 설계하는 건축사들 입장에서 보면 어이가 없다. 각각을 구분하고자 억지로 만든 세부 법 규정의 모순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 집은 집인데, 집이라고 말할 수 없는… 집으로 인정하지 않아야 절세하는…… 2021년의 집은 괴롭다.

 

글. 홍성용 Hong, Sungyong 본지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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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 피어 공원

Fan Pier Park in Boston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휩쓸면서 해외 여행이 쉽지 않다. 옛 사진과 그림을 뒤적인다. 벌써 10여 년 전이다. 보스턴을 여행하면서 숙소에서 가까운 피어 공원을 갔었다. ‘Pier 4’라는 아담한 건물이 한가롭게 자리하고 있다. 이민자들의 배와 많은 어선이 드나들던 때 어촌에 있음직한 식당 건물이다. 경사지붕이 여러 겹으로 겹쳐있고 넓은 폭의 붉은 벽돌 굴뚝이 건물의 중심을 이룬다. 미국 국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주변에 드문드문 곧은 파이프의 가로등이 있다. 보스턴 풍의 항구 분위기. 오래된 사진을 이번에 그림으로 작업하면서 구글 지도를 찾아보았다. 모든 건물이 3차원으로 작업되어 있는 지도에 그 건물을 찾을 수 없었다. 비어있던 피어의 많은 곳에 10층이 훨씬 넘는 빌딩들이 서있다. 보스턴도 개발의 흐름을 피해가지는 못하는 듯하다. 도시는 사라지고 세워지고 잊혀지고 새로워진다. 우리도 그 변화의 시간 속에 있다.

글. 이관직 Lee, Kwanjick (주)비에스디자인 건축사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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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비평_인간과 역사를 마주한 건축사 이광만

Architecture Criticism
Architect Lee Kwang Man, facing human and history

통영국제음악당(2013)부터 대화를 풀어 나갔다. 경남 통영에는 물적 토대인 음악당 이전에 음악제가 있었다. 음악당 건립은 통영이 배출한 세계적 현대 작곡가 윤이상(1917~1995)을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1967년 소위 ‘동백림’ 사건으로 국내로 강제 송환되어 1969년 해외 추방된 윤이상은 살아서는 통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윤이상은 어린 시절 아버지와 밤낚시를 나가 배 위에 앉아 물고기가 헤엄치는 소리나 배에서 배로 이어져 나가는 어부들의 침울한 남도창을 들었다. 수면이 그 울림을 멀리 전해주었고, 바다는 공명판 같았으며 하늘에는 별이 가득했다.(『윤이상, 상처입은 용』, 윤이상·루이제 린저)

경남 통영시는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이나 스위스의 루체른 페스티벌을 벤치마킹해 국제음악 휴양 도시를 목표했으나 걸맞은 인프라스트럭처를 갖지 못했다. 통영시는 2004년 세계 최정상의 뉴욕 필하모니를 초청했으나 필하모니는 시설 미비를 이유로 ‘공연 불가’를 알려왔다. ‘시설’은 전용 비행기가 인근에 착륙할 공항을 포함한 공연장, 호텔이었다.

통영국제음악당은 위치 선정부터 논란이었다. 이광만은 옛 충무관광호텔, 통영시 도남동 1번지 현재의 자리에 섰을 때 겁부터 났다. 윤이상 음악 세계를 그대로 전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를 고민했다. 건축사로서, 약간의 터치만 있으면 되는 곳이라고 보았다.

공연장은 세계 최신의 말굽형, 빈야드(포도밭)형 디자인으로 가야 된다는 여론이 비등했으나 음향 전문가 주장대로 직사각형 형태로 풍부한 반사음을 구현하는 슈박스(shoebox)로 결정했다. 평면을 보면 밋밋하다. 음악당의 본질은 음악을 드러내는 풍경이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건축적 형태는 항구를 드나드는 고깃배를 따라다니는 갈매기가 떠 있는 형상을 이입시켰다.

통영국제음악당은 아시아 대표 음악축제인 ‘통영국제음악제’와 ‘국제음악콩쿠르’를 세계적 음악축제로 발전시키고자 추진한 사업이다.

통영국제음악당 © 염승훈

음악당은 3만3,058제곱미터 대지 위에 연면적 1만4,618제곱미터, 지상 5층 규모로 전자악기를 사용하지 않는 어쿠스틱 사운드(acoustic sound)를 중심으로 하는 1,300석의 클래식 콘서트홀과 다양한 장르의 공연이 가능한 300석 규모의 블랙박스 공연장으로 구성되었다.

음악당 재정 자립과 활성화를 고려한 건축 디자인은 음악제 사무국, 예술감독 등 전문가와의 치열한 토론을 통해 현실적이면서도 전략적인 공간 계획으로 나타났다. 메인 홀은 클래식 공연장 쓰임으로 한정했고, 블랙박스 공연장은 대관율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공연과 행사 유치를 통해 가변무대-객석시스템의 차별화를 적용하였다. 지역 문화예술단체와 시민들에게 참여 기회를 확대한 공공성도 고려했다. 공연 없는 기간을 감안해 주변 통영을 즐길 수 있는 카페테리아와 휴게 공간을 고려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 오스트리아 빈 무지크 페어라인(Wiener Musikverein), 루체른 KKL 등을 참고했으며 최종적 음향 지표인 잔향 시간, 명료도 등을 고려한 설계에 1년 반이 걸렸다.

건축사 이광만은 대학에서 온라인으로 ‘건축사로 살아가기’를 강의한다. 인터뷰하면서 그는 종종 강의 노트를 펼쳐든다. 한국은 20세기 초까지도 건축(architecture)이라는 말이 없었다. 1920년대 일본에서부터 ‘건축(建築)’이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했다.

르 코르뷔지에에게서 배운 김중업(1922~1988), 일본 도쿄예대와 도쿄대 출신의 김수근(1931~1986)이 실천적 건축사였다. 일본 와세다대 출신의 정인국(1914~1974)은 대학 건축 교육의 기틀을 다졌다. 미국 하버드대 출신의 김성국(1937~2010)은 국내 현실과 맞지 않았다. 이광만은 대학 4학년 때 미스 반 데어 로에가 학장을 지낸 미국 일리노이공대(ITT) 출신 김종성(1935~ )으로부터 설계를 배웠다. 김종성은 서울 힐튼 호텔 설계를 맡아 한국에 들어와 있었다. 김중업으로부터 르 코르뷔지에를, 김수근으로부터 일본 건축을, 김종성으로부터는 미스 반 데어 로에를 받아들였다. 다양한 건축 계보는 한국을 40여 년 만에 대형 건축사사무소만 10여 개에 이르는 수준으로 폭풍 성장시켰다.

이광만은 학생 군사교육 ‘교련’ 철폐 운동이 벌어진 1971년 대학에 입학했다. 근대건축사인 르 코르뷔지에가 뒤늦게 본격 조명되던 1983년, 정림건축과 일본 유학과 현지 실무를 거친 김자호, 정림건축 이광만, 공간의 이범재가 ‘간삼건축’을 창립했다. 어떤 건축사무실이어야 하느냐를 고민했다. 김수근, 김중업, 김종성 등 스타 건축사 1인 체제를 지양하기로 했다. 파트너십, 건축의 본질 추구, 각자의 한계와 재능을 인정한다는 게 합의 사항이었다. 당시 파트너십 경영체제는 ‘원도시 건축’이 유일했다.

건축은 사색의 대상이 아니라 실천의 대상이라고 한,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를 연 로버트 벤투리(1925~2018)와 데니스 스콧 브라운(1931 ~ ) 부부가 스티븐 아이즈너와 공저로 ‘라스베이거의 교훈. Learing from Las Vegas. 1972)을 출간한다. 건축디자인에 있어 일사불란한 통일성보다는 복잡다단한 모순이, 기하학적 순수성보다는 다혈질의 열정이, 모더니즘의 형식주의보다는 역사성(history)과 버내큘러(vernacular·지역성)를 강조하는 건축의 문맥(contextualism)을 주장했다.

간삼을 론칭시킨 지 얼마 되지 않아 이광만은 이 책을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 근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 건축 현실에 대한 해법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원서 강독을 통해 자신만의 건축론을 단단히 할 수 있었다.

간삼건축은 신입 직원에게 1년 동안 도면 그리기 등 교육만 시킨다. 1988년부터 15년간 니켄 세케이(Nikken SekkeiI·日建設計·1900~ ), 니혼 세케이(Nihon Sekkei), 도큐 세케이(Tokyo Sekkei·東急設計)에 실무 연수 및 교류 목적으로 직원들을 파견했다. 니켄 세케이와의 제휴는 서울 포스코 센터(1995), 포항 포스코 역사박물관(2003), 포스코E&C 인천 송도 사옥(2010), 포스코 중국 베이징 사옥(2015) 수주로 이어졌다.

니켄 세케이는 신일본제철(新日本製鐵) 공장들을 설계하였고, 신일본제철과 제휴사인 포스코도 공장 설계를 맡기게 되었다. 니켄 세케이 제휴사인 간삼건축은 포스코센터(1995) 실시 설계를 담당했다. 니켄 세케이는 포스코센터 주변의 트레이드타워(무역회관), 도쿄 롯폰기힐스를 디자인하였다. 간삼건축은 니켄 세케이와 30여 년간 제휴를 잇고 있다. 양사 간 디자인(형태) 설계는 거의 대등한 위치에 와 있으나 고급 기술 자문은 여전히 받고 있다.

1990년대 초까지도 한국은 호텔, 백화점조차도 설계할 능력이 없었다. 일본 회사가 기본 설계를 맡고 실시 설계를 한국이 배웠다. 핵심은 산업의 이동에 따른 신업태에 대한 이해 및 공간 구성 경험이 없어서였다. 중국은 동일한 흐름으로 우리와 일정한 격차를 보여준다. 일본에서 구조, 안전성 등 현대건축의 본질을 배운 한국 건축계는 2000년대부터는 건축 설계를 수출하고 있다.

포스코역사관 © 염승훈

포스코 역사관(2003)은 타원형의 박물관이다. 이광만은 철이 갖고 있는 물성을 최대한 활용했다. 자동차에 주로 쓰이는 냉연강판, 아연강판, 건설 현장에서 쓰이는 H빔 등 다양한 철을 사용(cladding)했다. 철은 보다 가볍고 얇은 건축물을 만들 수 있는 수단이다. 재료와 구조의 물리적 경량화는 시각적으로도 건물을 무게가 없는 추상적 오브제처럼 보이게 만든다. 철은 건축물을 만드는 재료이자, 다른 한편으론 비물질화된 건물을 만들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다.

대형 프로젝트는 설계 인력만 100~200명이 참여한다. 구현된 건물이 특정 건축사의 작품일 수는 없다. 프로젝트는 직책만 남아 있다. 2000년 초까지 간삼건축은 대부분 집단으로 작업한 작품에 대해 의도적으로 책임 건축사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으나 이후 교육적 차원에서 이름을 명기한다.

1997년 건축서비스산업진흥법이 발의되면서 산업으로서 건축 설계가 정의되며 범위가 정해진다. 기획(planing), 설계(design), 건설관리(CM), 시설관리(FM) 등 4개 분야다. 이 법과 관련해 2005년부터 대학 건축학부 학제가 바뀐다. 건축대학이 5년제, 학부 비전공자는 건축 대학원 3년 과정이 골격이다.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국가로서 해외 대학과의 교과과정 상호 인증을 받기 위해서였다.

건축서비스산업진흥법은 건축 설계 업무 영역 확장을 위해 한국건축가협회장 재임(2012년 6월~2014년 2월) 시절 확립되었다. 지금도 여전히 건축이라고 하면 설계(design)만 얘기한다.

“표준에 눌려서 창의가 사라져서는 안된다. 기술을 범용화시켜야 더 나은 표준을 만드는 게 아닌가.” 자신의 세대는 표준을 벗어나면 안된다고 배웠다. 표준을 규제로 이해했다. 한국 사회는 여전히 옛날식 신군사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건축사사무소는 도제(徒弟) 방식을 따르는 아틀리에, 서비스산업 규모를 갖춘 대형 사무소로 구분된다. 이광만은 대형 사무소 경영자 출신의 건축사다. 건축단체는 크게 건축사협회, 건축가협회, 건축학회로 구분된다. 대한건축사협회는 건축사 자격증을 가진 건축사 단체, 한국건축가협회는 대체로 건축 설계 업무를 사업으로 이어가는 건축인들을 말한다.

보헌빌딩(2005)은 서울 북촌 한옥 지구와 경복궁, 창덕궁 등 역사적 건축물이 밀집한 장소에 위치해 전통과 현대 사이에서의 갈등과 고민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주변 경관과 자연스럽게 연결하기 위해 재료와 색채를 고려했고, 공간 조직을 위해 전통 건축에서 드러나는 중정(中庭) 형식을 도입했다. 이중의 공간적 두께로 표현해 도시 안에 사적 침묵 공간을 이끌어내려고 했다.

보헌빌딩 © 염승훈

골프존 대전 사옥 © 이광만

형태만으로 한옥을 흉내 내는 것은 지역 정서를 해칠 우려가 있기에 조심했다. 업무 시설 기능을 충족하면서도 전통 한옥의 공간 배치 원칙에 따른 평면 구성을 통해 사용자들의 친숙도를 높였다. 보헌빌딩은 한옥 특유의 절제되고 자연적인 질감의 전통 재료와 나지막이 둘러친 건물 주변의 기와 담장을 통해 북촌마을과 자연스럽게 융화된다.

건물 중심 진입로로 형성된 열린 축은 건물에 들어선 이의 시선을 자연스레 유도하고, 오르막 지형에 따른 단의 차이는 지하 1층으로 들어서기에 용이하다. 3층 발코니와 옥상에서 북촌마을 경관을 조망하도록 했다. 지하 3층~지상 3층, 대지 1,203제곱미터(364평), 건축면적 721제곱미터(218평), 연면적 3,987제곱미터(1,206평)다.

타워호텔을 반얀트리크럽앤스파(2010)로 변경하는 리모델링은 결코 쉽지 않았다. 1969년 건설된 타워호텔은 2006년까지 객실, 수영장 등이 운영되다가 문을 닫았다. 관련 법규상 남산에 건물을 새로 짓거나 증축, 재축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뼈대는 그대로 두면서 새것처럼 만들어야 했다. 당대의 부실한 시공으로 인해 구조적으로 문제가 있었다. 관청은 도면이 남아 있는 김수근이 설립한 건축사사무소 ‘공간’에서 서명을 받아오라고 했다. 이광만은 그대로 놔두어서는 명품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가졌다. 현대 건축문화유산이어야 할 김중업의 제주대 본관(1966)은 조잡한 시공으로 해체되지 않았나. 타워호텔이 김수근 건축사의 기념비적 작품이기에 외관을 그대로 두고 내부 공사를 진행해 많은 시간이 걸렸다.

스크린골프는 노래방, 찜질방처럼 한국 현대문화가 낳은 산물이다. 골프존 대전 사옥(2014)은 실내에 연습장과 경기장을 넣어야 했다. 전 세계 어떤 건축물도 표준으로 삼을 만한 것이 없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건물을 설계해야 했다. 건축주는 자연을 형상화해달라고 했다. 골퍼들이 산지와 구릉을 오르내리며 접하는 산과 암반 등 자연 경관과 비거리를 늘리기 위해 디자인된 골프공의 오톨도톨한 표면을 모티프로 삼았다. 엑스포 과학공원 등 지역의 컨텍스트를 고려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이 혼과 열정을 다해 성장시킨 기업의 소유 지배구조에서 벗어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일이다. 간삼 건축 창립 때 파트너들은 65세 은퇴를 약속했다. 10년마다 세대 교체가 있었고, 30여 년이 지나면서 파트너십이 의미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창립 멤버인 이범재가 가장 먼저 떠났고, 한국은행 본점(1987) 프로젝트 진행을 위해 영입된 원정수, 지순 부부 건축사, 김자호, 이광만 순으로 간삼을 떠났다. 이광만은 3분의 1에 해당하는 전체 지분을 내놓았다.

회사 규모가 커지면 주식시장에 상장해 자금을 용이하게 조달할 수 있으나 주주들 간섭 때문에 창의력을 생명으로 하는 건축회사의 정체성이 흔들린다. 제휴사 니켄세케이가 100년 넘게 유지할 수 있었던 경영 비결을 수용하기로 했다.

반얀트리 클럽 앤 스파 서울(타워호텔) © (주)간삼건축 종합건축사사무소

간삼은 오랫동안 가장 입사하고 싶은 설계 사무소 1위가 되었다. 타 장르의 전문가들을 불러서 사회와 소통하려고 노력했다. 이광만이 만든 문화 매거진 ‘G스타일’은 ‘G포럼’으로 발전한다. 이광만은 모교 홍익대 총동문회장을 지냈다. 직원 600명, 연매출 800억 원 규모의 대형 건축사사무소 회장 직함을 가졌기에 주변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

삶이나 주택이나 설계의 원리는 같다. 집을 통해 삶의 방식이 바뀐다. 행복한 삶은 자신이 중심이 돼야 하는 게 주택 설계의 기본 방향이다. 집을 짓는 것도 치유의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광만은 간삼건축 은퇴 후 서울 퇴계로6가와 5가 사이 30여 년 된 붉은 6층 벽돌 건물을 인수해 2년간이나 리모델링했다. 이광만은 청소년기를 서울 제기동과 신설동에서 보냈다. 장충동에도 살았다. 부친은 도심지로 출근하면서 ‘문안 갔다 온다’는 말씀을 했다. ‘문안 건축’ 간판을 달았다. 건물은 역사이고, 축적된 시간이 오롯이 담긴다. 사옥이 지역의 문화 시설로 기능했으면 하는 바람을 목표로 했다. 1층은 후배가 경영하는 다양한 종류의 인화지 필름 가게이며, 별도의 출입문을 낸 지하는 카페다. ‘건축사로 살아가기’ 강의에는 ‘자기가 건축주 되기’가 있다.

강경중학교 어린이 도서관(2018)은 중목 구조로 지었다. 결구 방법 등 구조 형식을 일본에서 빌려왔다. 일본 재료를 써도 우리 형식으로 만들었다. 목구조 건축에 있어 반석(盤石)에 기초를 놓는 방법은 일본이 한국에서 배워갔다.

강경중학교는 논산의 작은 읍에 위치해 묵묵한 형태와 색상을 계획하여 동네의 조용한 배경이 되기를 바랐다. 내외부 모두 목재를 사용하여 마감함으로써 시간과 함께 점점 더 주변에 친숙해져갈 것을 기대한다.

이광만 건축사는 ‘서구의 건축을 베끼다 만’ 세대라고 자조한다. 지금은 소화해서 우리 것으로 만드는 단계에 들어섰다고 본다. 선배들은 건축을 형태로만 받아들였다. 우리에게 건축을 가르친 일본도 애초 그렇게 받아들였다. 건축의 기본인 구조, 안정성 등을 먼저 수용했어야 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이광만 작품의 특징은 비일상을 포함하는 ‘일상(vernacular)의 건축’이다. ‘골목길 탐방’ 과목은 예전 학교에서는 가르치지 않았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을 관찰해서 건축적 결론을 만든다. BTS의 노래가 그런거 아닌가. 건축 작품을 보면서 건축사는 당대 무슨 생각으로 만들었을까를 짚어본다. 일상의 건축은 자신이 살고 있는 풍속(風俗)을 기반으로 한다. 변혁기 풍속은 기존의 가치와 새로운 가치가 갈등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진짜 좋은 건축은 도예가가 일생을 통해 몇 점 만들지 못하는 달 항아리와 같은 것이다. 혼이 들어간 작품은 작가 평생의 노력 끝에 이루어진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공동체와 협업해서 만들어내는 게 진정한 건축이다. 특정 한 사람의 아이디어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사람의 능력과 시스템과 프로세스가 결합해야 한다. 건축은 삶이 녹아 있고, 투쟁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광만은 단독주택의 산업화에 관심이 많다. 일본 건축은 분업체제 구축으로 산업이 되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주택은 고쳐서 쓸 수 있다. 일본에서 모듈화된 목재를 들여와 일본 목수들에게 시공을 시켰으나 도량형 기준이 우리와 달라 현실과 맞지 않았다. 우리가 설계하고 목재, 창호, 욕조 등을 들여와 보기도 했다.

우리 주택 문화는 바닥에 온돌을 깐 좌식이다. 신축 목조 주택은 대부분 2~3층이다. 층마다 온돌을 깔면 하중, 공정 추가, 열에너지에 대한 과다한 투자 등 문제가 발생한다. 1997년 이후 수년간 지속된 IMF 경제 체제에서 목재 수출국인 미국은 우리에게 아파트보다는 단독주택을 장려하였다. 우리 사회는 주택은 ‘세를 준다’는 고정관념이 강했다. 공무원은 ‘국민주택’ 규모 등 아파트처럼 크기로 규제할 수 없다며 반대했다.

한국은 산지(山地)가 많아 가옥으로 주택이 적합함에도 목구조는 화재에 약하다는 선입견이 깔려 있다. 주택의 산업화가 가능하려면 유럽처럼 설계와 시공이 일관돼야 한다.

성북동 집(2018) 터인 직사각형 대지는 옛 간송미술관의 땅이었던 곳을 일부 주택 필지로 분할하면서 생겨났다. 뒤로는 간송미술관의 숲이, 앞으로는 서울 성곽이 펼쳐 보이는 곳으로 옆으로는 비슷하게 생긴 대지가 이어져 있다. 모두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것으로 이곳만의 독특한 가로(街路)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전면은 차고 겸 상가로, 안쪽으로 마당과 주택이 배치돼 있었다. 동네만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으면서 기능적인 볼륨을 배치하기 위해 많은 고민이 필요했다.

앞뒤로 펼쳐진 풍경을 가로막지 않고 자연스럽게 흐르도록 하여 거리를 다니는 행인에게든 안쪽에 생활하는 거주자이든 기분 좋은 거리 풍경을 제공하고자 했다. 주택과 상가를 결합할 때 ‘저층 상가-상층 주택’이라는 수직적 배치 고정 관념을 ‘전면 상가-후면 주택’ 개념으로 전환해 기능을 수평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사이사이 길과 마당을 확보하고 빛과 바람이 드나드는 공간을 만들었다. 전면 상가와 통로를 지나 안쪽 마당을 거쳐 집으로 들어가도록 동선을 계획하고, 집 안에서 오픈된 영역인 주방과 프라이빗한 거실 및 침실 영역을 구분함으로써 복합 기능의 건축물이지만 각 구성 요소가 위계를 가지도록 했다.

한국 현대건축은 역사가 짧다. 도시에도 자연은 머문다. 수풀이 우거져 덤불이 되는 대지를 관찰하지 않았고, 토목과 건축은 따로 놀아 과학적이지 않았다. 조경(造景)은 아예 머릿속에 없었다. 건축적 고민은 세대를 초월해 지속적으로 가야 세계적 수준에 이르게 된다.

“여전히 건축 평면이 권력으로 작용한다. 독일 식당은 주방이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도록 건축 표준이 정해져 있다. 손님이 아닌 식당 노동자가 손님 테이블 옆 창밖 풍경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대형 건물에 근무하는 청소부의 휴게실은 전기 및 기계 시설이 있는 지하실이다. 1층 프레시룸 곁이어야 한다.”

이광만은 우리 건축은 아직도 근대, 개화기 수준의 담론에 머물러 있다고 본다. 인간이 중심이 된 건축관을 정립하는 데 기여하는 걸 자신의 임무로 본다.

서울 자곡동 류이재 주택은 목구조 노출이 장점인 중목구조(重木構造·heavy timber structure)로 지어졌다. 집은 남향이고, 동선은 짧고 공간은 크며 공사비는 적게 들어야 한다는 건축주의 고정관념을 삶의 가치 개념으로 전환시켜야 했다.

외관 디자인은 수직 요소를 기본으로 가능한 모든 디자인을 덜어냄으로써 간결하게 표현하였다. 중목구조는 건물 형태와 모양에서부터 접근하지 않고 구체적인 공법이나 재료에 접근해 바로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외벽과 지붕의 표면 재료는 금속 패널인 컬러 갈바륨 강판을 적용했다. 집짓기 과정을 통해 건축사와 건축주는 인생의 의미를 나누는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아파트가 곧 부동산인 하이에나 자본주의 시대에는 무리에 속해 있어서는 안된다. 코로나 팬데믹 시대는 삶의 가치와 방식을 바꾸어 무리를 벗어나야 숨을 쉴 수 있다. 건축주든 건축사든 삶은 예측 불허이다. 한 지붕 아래 공간을 나누는 가족은 시간의 변화에 따라 축복이 될 수도 굴레가 되기도 한다. 이 모든 걸 건축사가 예측해 공간 설계를 할 수 없다.

주택은 가족 구성원의 변화에 따른 인간의 오욕칠정을 담아내면서도 인간의 자존을 지켜내는 곳이어야 한다.

 

글. 심정택 Shim Jung Taik 칼럼니스트

심정택 칼럼니스트

심정택은 쌍용자동차, 삼성자동차 등 자동차회사 기획 부서에서 근무했고 홍보 대행사를 경영했다. 이후 상업 갤러리를 경영하면서 50여 회의 초대전, 국내외 300여 군데의 작가 스튜디오를 탐방한 13년차 미술 현장 전문가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각 언론에 재계 및 산업 칼럼을 써왔고, 최근에는 미술 및 건축 칼럼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저서로는 ‘삼성의몰락’, ‘현대자동차를 말한다’, ‘이건희전’이 있다.
marange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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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마을 대한민국 ‘도시재생사업 1호 마을’ 창신동 절벽마을 ②

Disappearing village
South Korea’s ‘No.1 Urban Regeneration Project Village’
Changsin-dong Cliff Village ②

도시 재생사업과 그곳의 삶

창신동 길을 따라 걷다 보면 ‘토월/도시재생기념관’, ‘창신동 라디오 덤’, ‘000간/공공공간’, ‘뭐든지 도서관’, ‘창신 소통공작소’, ‘산마루 놀이터’, ‘돌산마을 조망점’, ‘채석장 전망대’, ‘이음피음봉제 역사관’, ‘봉제거리 박물관’, ‘AMKSTA’, ‘종로여가’, ‘백남준 기념관’, ‘봉제공방’ 등 공공 재생사업지와 몇 군데의 민간재생사업으로 탄생한 공간들이 많이 있다. 세계에서 유일한 봉제 전문 방송국인 ‘창신동 라디오 덤’은 봉제마을의 독특한 소통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정식 주파수가 아닌 인터넷과 휴대폰 앱을 통해 청취하지만, 평소 라디오를 들으며 작업하는 창신동 봉제인들을 위해 소중한 방송국이다. ‘000간’은 지역밀착형 문화센터, 지역아동센터, 도서관, 지역재생 프로젝트 등을 진행하면서 봉제마을의 생산과 문화예술을 함께하며 지역주민과 공생을 꿈꾸는 곳으로 자리 잡고 있다. 봉제 거리의 재단·재봉 작업실들을 도로에서 바라보면서 한편으론 지난 봉제거리의 역사를 보여주는 ‘거리 박물관’을 따라 올라가면 창신동의 필수 관광코스인 ‘이음피음봉제 역사관’이 나오고, 다양한 역사 체험을 할 수 있다. 또한 이곳에서 재단사였던 전태일 열사를 기리는 ‘전태일 재단’도 볼 수 있다. 또한 화가 백남준과 박수근, 가수 김광석과 배호의 집터가 있는 예술인이 자란 곳의 모습도 볼 수 있다. 흥인지문 옆 창신동은 서울성곽 바깥의 첫 마을이다. 흔히 ‘봉제의 메카’로 부르는 바로 이곳. 그러나 그런 표현만으로는 창신동을 다 담아낼 수 없다. 서울 어디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풍경과 분위기가 창신동에 있기 때문이다.

소통공작소

채석장전망대

이음피음봉제역사관

전태일재단

백남준기념관

산마루놀이터3

나 혼자 지키는 창신동 달빛

“요즈음은 머지 않아 아파트 숲에 묻혀버릴 내 고향을 오래 기억하기 위해 자주 앨범을 뒤적입니다. 앨범 속엔 나의 유년에서 지천명까지의 창신동의 작은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아파트가 들어서면 지금보다는 많이 편해지겠지만 제게는 편안함 뒤에 감추어진 인간성의 상실이 큰 걱정입니다. 고향을 잃기 전에 고향의 살가움을 남기려고 이 시집을 엮었습니다.”

– 김복희 시집 『나 혼자 지키는 창신동 달빛』 머리글 중에서

 

글·사진. 정원규 Jeong, Wonkyu 창대 건축사사무소 ·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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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건축 11 건축물

Term@Architecture 11
Building

architectural terms 건축용어
우리나라 건축용어 중에는 왜 그렇게 표현하는지 어원을 알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이 연재에서는 필자가 이해하기 어려웠거나 호기심이 크게 생겼던 표현들을 소개하고, 그 어원과 출처를 추적할 것입니다. 이를 통해 독자들과 함께 보다 적절한 표현은 무엇일지 고민하는 계기를 갖고자 합니다.

 

‘건축사님은 아파트에 사세요, 빌라에 사세요?’ 종종 이런 질문을 받는 경우가 있다. 다른 이가 살고 있는 주거 유형을 물어보는 것이 우선 불편하지만, 주거 유형을 아파트와 빌라로 단순 구분해서 물어보는 것도 불편하다. 그런데 이 ‘아파트’는 무엇이고 또 ‘빌라’는 무엇일까?

아파트는 떨어지거나 분리하는 것을 의미하는 ‘apart-’와 결과나 생산물을 뜻하는 ‘-ment’가 합쳐진 말이다. 무엇인가 떨어지고 분리되어 존재하는 모습을 의미한다. 프랑스에서는 ‘아파트멍(appartement)’이라고 했는데, 궁전이나 대저택에서 각각 독립된 생활공간들을 의미하는 용어로 쓰였다. 주인이 거주하는 곳, 방문객을 응접하는 곳, 하인들이 생활하는 곳 등 각 기능을 하는 부분을 아파트멍(appartement)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시민사회로 접어들면서 아파트멍(appartement)은 공동주택이라는 의미도 갖게 된다. 미국에서도 20세기 초반에 승강기와 개별 전기 등 편리한 시설을 갖춘 도심 공동주택이 대도시를 중심으로 다량 공급된다. 그러면서 왕족과 귀족들의 대저택을 지칭하던 용어인 아파트멍(appartement)을 도심 공동주택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했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아파트먼트(apartment)’다. 우리는 이 아파트먼트(apartment)라는 용어에서 apart- 부분만 따서 5층 이상 규모의 공동주택을 ‘아파트(aprt-)’라고 지칭하고 있다. 우리의 아파트다.

프랑스의 appartement

미국의 apartment

법적 용어는 아니지만, 일반적인 용어로써 다세대와 다가구를 통칭하는 ‘빌라(villa)’라는 용어가 사용된다. 그럼 빌라(villa)는 무엇일까? 본래 빌라(villa)는 로마시대 귀족들이 소유한 농지를 가리키는 말인데, 농지를 관리하는 대저택도 빌라(villa)라고 한다. 빌라(villa)는 주변의 넓은 농지를 활용해 독립적인 생산 시스템을 갖추는데, 하인에게 농지를 경작시키고 수확한 작물로 빵과 와인을 생산하고 저장했다. 일종의 생산시설인 빌라(villa)는 자급자족이 가능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를 비롯한 대도시에서 생활하던 귀족들은 언제든 빌라를 찾아가서 장기간 머무르며 휴양을 할 수 있었다. 자신의 빌라(villa)에는 하인들이 항상 대기하고 있었고, 창고에는 빵과 와인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로마시대 빌라 구성

옛 빌라(villa)를 설명하는 그림을 살펴보자. 누워서 식사하는 식당인 트리클리니움(triclinium), 욕실(baths), 주방(kitchen)이 있고, 2층에는 방들(family rooms)이 있다. 기본적인 주거 공간을 제공한다. 나머지는 모두 생산과 저장을 하는 공간들이다. 빵을 굽는 곳(bakery), 외양간(cowshed), 포도를 가공하고 기름을 짜는 공간(room for pressing grapes, oil-pressing rooms), 포도주 발효를 위한 마당(fermenting yard)과 탈곡하는 마당(threshing floor) 그리고 창고(barn)를 갖추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시설을 운영하는데 하인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하인들이 머무르는 공간(servants’ rooms)도 있다. 이런 점에서 빌라(villa)는 계급사회였던 조선시대의 종갓집 구성과 공통점이 많다. 양동마을의 향단은 로마시대 빌라(villa)처럼 생산과 저장을 위한 공간을 모두 갖추고 있다. 양동마을이 비옥한 안강 평야를 기반으로 가문의 세력을 유지했던 것도 필자가 로마의 빌라(villa)와 우리의 종갓집을 유사하게 바라보는 이유이다. 양동마을의 또 다른 종갓집으로 ‘농사짓는 것을 바라본다 ‘는 의미의 관가정(觀稼亭)을 곱씹어 볼 만하다. 그 시대의 사회구조를 엿볼 수 있는 이름이 아닐 수 없다.

빌라 로툰다와 주변 농지

계급사회를 벗어난 현대에 이르러 빌라(villa)는 일반적으로 휴양지의 별장이나 규모가 큰 개인주택을 지칭하고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우리는 도심에 위치한 소규모 공동주택을 빌라(villa)라고 부르고 있다. 귀족들이 소유했던 집이라는 특별함이나 호사스러움 같은 이미지를 차용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래서 빌라(villa)라는 말을 들으면, 계급사회를 동경하는 시민사회의 아이러니한 모습이 느껴져서 안쓰럽고 착잡한 맘이 든다.

조선시대 종갓집(향단) 구성 ⓒ 한옥기술개발연구단

양동마을과 안강평야 ⓒ 네이버 항공사진

한편으로 빌라(villa)가 지칭하는 법정 용어인 ‘다가구’나 ‘다세대’는 어떤가? 건축법에서는 주택을 크게 단독주택과 공동주택으로 분류하는데, 소유를 구분하여 등기할 수 없으면 단독주택으로 분류하고, 소유를 구분하여 등기할 수 있으면 공동주택으로 분류한다. 다가구는 단독주택에 속하고, 다세대는 공동주택에 속한다. 즉 다가구는 구분 소유를 할 수 없는 단독주택의 한 종류이고, 다세대는 개별 호를 구분하여 소유할 수 있는 공동주택이다. 그런데 정작 가구(家口)와 세대(世帶)라는 개념은 건축물의 용도와는 무관한 개념이다. 가구(家口)는 혈연관계와 상관없이 주거와 생계를 함께 하는 단위를 뜻하고, 세대(世帶)는 혈연, 혼인, 입양 등으로 하나의 가족 구성을 이룬 사람들의 집단을 뜻한다. 그래서 거주하는 건축물의 용도 구분을 하는데, 가구(家口)나 세대(世帶)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예를 들어보면, 다가구 주택은 하나의 소유주체에 여러 개의 독립된 생활공간인 호(戶)들로 구분되어 있는데, 각각의 호(戶)에는 구분된 세대들이 거주한다. 건축물의 용도 구분은 다가구로 구분되지만, 여러 세대가 거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다가구인가, 다세대인가? 건축물 용도 구분에서 용도의 개념과 용어의 개념이 상호 오류에 빠진 부분이다.

건축법의 건축물 용도에는 없지만, 한국사회 전반에서 전문 용어처럼 언급되는 땅콩주택과 협소 주택이라는 말이 있다. 땅콩주택은 하나의 필지에 두 세대가 함께 거주하는 주택을 지칭하는 말이다. 단독주택만 허용되는 필지에 두 세대가 토지와 건축물을 지분으로 나누어 공동 소유하지만, 구분된 호(戶)에서 독립적으로 생활하는 형식을 의미한다. 건축법의 용도로는 단독주택에 속하는 다가구이다. 단독주택이기 때문에 소유권을 구분하여 등기할 수 없으므로, 지분으로 공동소유를 하고 상호 간에 협의를 통해 생활공간을 구분하여 사용하는 것이다. 같은 다가구이지만 공동 소유하지 않고 임대인과 임차인으로 생활하는 일반적인 다가구는 땅콩주택이라고 할 수 없겠다. 땅콩주택이라는 용어는 다가구주택을 공동 소유하는 특별한 경우로서 일반적인 임차/임대 방식과 구분되는 개념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무분별하게 일반적인 다가구를 칭하는 데 사용되는 것은 지양해야 할 것이다.

얇디얇은집(AnLstudio) ⓒ 이한울

몽당주택(AnLstudio)

협소 주택이라는 용어 또한 기준 없이 각자 주관적으로 사용하고 있어 불편함이 크다. ‘협소’라는 말은 좁다(협, 狹)라는 의미와 작다(소, 小)라는 의미의 한자로 구성된 용어이다. 좁다와 작다 모두 상대적인 의미이므로 어느 정도를 좁거나 작은 것으로 볼 것인지 기준이 필요하겠다. 필자가 설계하고 2019년 서울시 건축상을 수상한 ‘얇디얇은 집’은 일반적인 생활공간이나 건물과 비교하여 폭이 좁은 집이다. 폭이 가장 좁은 부분이 1.5미터를 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규모는 지하 1층, 지상 4층이고, 연면적은 140제곱미터에 이르니 결코 작은 집이라고는 할 수 없겠다. 그렇더라도 ‘얇디얇은 집’에 일반적인 가구를 적용할 수 없을 정도로 폭이 좁은 것은 분명하므로,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작은 집은 아니지만, 폭이 좁은 주택’이라고는 할 수 있겠다. 또 다른 예인 몽당 주택은 지상 3층 규모의 단독주택인데, 연면적이 49.5제곱미터이다. 연면적 50제곱미터를 넘기면 주차장을 설치해야 하는데, 대지면적이 34.5제곱미터였던 몽당 주택은 주차장을 설치할 수 없어서 연면적을 49.5제곱미터에 맞췄다. 몽당 주택으로 생각해 보면, 주차장을 설치할 수 있을 만큼 여유(?) 있는 규모의 대지와 건축물을 협소하다고 할 수 있을까? 다양한 매체에 쏟아지는 협소 주택들은 택지개발기준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작은 크기의 필지에 지어진 주택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주차장을 설치해야 하는 주택규모(50제곱미터)를 초과하는 경우도 많고, 국민주택규모(85제곱미터)를 넘는 경우도 많아 보였다. 우리 건축계가 협소 주택의 개념을 정의하지 못한 것은 안타깝다. 그래서 법적인 용어가 아니더라도 협소 주택의 사회적 정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건축물의 용도기준은 1978년 10월 30일 건축법 시행령 제2조 제1항에 근거한 [부표] 시설로부터 시작된다. 모법인 건축법이 제정된 것이 1962년이었으니, 16년이나 지나서야 생긴 것이다. 게다가 자주 개편이 된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60번이 넘는 용도분류체계 개편이 있었다고 하니, 1년에 한 번 이상은 꼬박꼬박 변경이 있었던 셈이다. 이렇게 자주 변화하며 나름 사회의 변화에 대응하는 건축물의 용도지만, 건축법의 건축물 용도와 무관한 용어들도 많다. 타법에서 필요에 의해 만든 건축물의 구분이 그것이다.

농막

‘지방세법’에서는 세율을 달리 구분하기 위해 ‘고급주택’을 정의하고 있다. 농지법에서는 농민이 농업을 하는데 필요한 시설로서 ‘농막’을 정의하고 있다. ‘펜션’은 법적으로 숙박시설이 아니다. 주택을 활용하는 ‘농어촌 민박사업 시설’은 ‘농어촌 정비법’과 ‘관광진흥법’에서 정의하고 있다. ‘휴양펜션업 시설’이라는 용어는 ‘제주특별자치도 설치 및 국제자유도시조성을 위한 특별법’에서 정의하고 있으니, 이 법에 따른 제주도의 ‘휴양펜션업 시설’에서 ‘펜션’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농어촌민박업과 제주도의 휴양펜션업은 ‘공중위생관리법’에 따른 ‘숙박업’이 아니고, 건축법의 숙박시설도 아니다. 단독주택으로 구분된다. 이런 이유로 펜션이라는 용어는 ‘비숙박업’과 ‘숙박업’을 넘나들며 소비자에게 혼란을 주는 용어라고 생각하며, 소비자의 피해와 고소, 고발이 있으니 나쁜 용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겠다.

‘발코니 확장’은 우리 건축계가 반성하고 고쳐야 할 큰 문제 중 하나다. 법에서는 ‘발코니 등의 구조변경’으로 명시한 ‘발코니 확장’은 바닥면적에 산입되지 않는 ‘발코니’를 실내로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문제는 바닥면적에서 제외하고, 취득세와 재산세를 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 국민에게 적용되기 때문에 공평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부적절하고 정의롭지 못하다. 용어의 표현도 부적하다. 발코니 부분을 거실로 만들면서 거실이 확장되는 것이니 ‘거실 확장’이라고 하거나, 조사를 붙여 ‘발코니로 확장’이라고 해야 한다. 아니면, ‘발코니 삭제’ 또는 ‘발코니 전용’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발코니 확장’은 부정적 행위를 긍정적으로 인식하게 한 최악의 용어라고 할 수 있다.

모델하우스의 발코니 확장라인 ⓒ 송의현

‘다가구, ‘다세대’, ‘발코니 확장’처럼 잘못 사용되어 널리 퍼진 용어를 바로잡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새로운 개념을 만들거나 도입할 때 적절한 용어와 이름을 사용하는 인식이 필요하겠다. 부적절한 용어를 사용해서 후배들에게 부끄러운 선배가 될까 싶어 오늘도 조심스럽다.

 

글. 신민재 Shin, Minjae AnLstudio 에이앤엘스튜디오 건축사사무소

신민재 에이앤엘스튜디오 건축사사무소

한양대학교 건축공학부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Artech과 JINA에서 실무를 했다. 2011년부터 AnLstudio 건축사사무소를 공동으로 운영하며 전시기획에서 인테리어·건축·도시계획까지 다양한 스케일의 작업을 하고 있다.
젊은건축가상(2016, 문화체육관광부), 경기도건축문화상 특별상(2017, POP하우스), 충남건축상 최우수상(2017, 서산동문849), 대한민국목조건축대전 본상(2018, 양평시옷(ㅅ)집), 서울시건축상(2019, 얇디얇은집), 한국리모델링건축대전 특선(2020, 제이슨함갤러리) 등을 수상했다.
현재 한양대학교 겸임교수이자 서울시 공공건축가이다.
shin@anlstudi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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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건축 워치 09 북한의 건축교육 ①

North Korean Architecture Watch 09
North Korea’s architecture education ①

북한은 김정은 위원장이 집권한 후 대규모 건설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건축대학의 위상도 높아지고 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집권한 해인 2012년 평양건설건재대학의 명칭을 평양건축종합대학으로 바꾸었으며, 2013년 현지지도 시에 학생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그리게 하였다. 2014년에는 평양건축종합대학의 명예총장이 되겠다고 발표하였으며, 12월에는 노동신문 한 면을 할애하여 평양건축종합대학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최근 평양건축종합대학은 북한에서 가장 경쟁률이 높은 대학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남북 관계가 개선되면 철도, 도로, 항구, 발전소, 전력망, 경제특구개발 등 대규모 건설사업이 추진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건축기술수준, 건설산업, 건축교육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북한의 개발 시 북한건축인력의 활용이 필수적이므로 북한의 건축교육현황 파악과 건설관련 인력양성방안 검토가 필요하다.

1. 북한의 교육

일본은 이미 1900년에 4년제 초등의무교육을 실시하였으며, 1909년에는 6년제 의무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에서는 의무교육을 실시하지 않았으므로 1936년 조선의 초등학교 취학률은 26%, 해방 당시에도 초등학교의 취학률은 43%(남학생 60%)에 불과하였다. 1935년 일본에서도 중등학교 진학률이 20%를 넘지 못하였고, 대학진학률은 3%에 불과하였으므로 식민지 조선인 중 중등교육과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은 아주 적은 숫자였다. 1944년 전문학교(2~3년제)와 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1만9,658명(당시 인구 약 1,500만 명)에 불과하였다.

김일성대학 건설과 관련한 북한 영화 <졸업증>의 한 장면(북한방송 캡처). 대학생들이 대부분 남학생이고, 교복을 입은 것이 이채롭다.

국가의 미래를 위하여 무엇보다 교육이 중요하다. 남북은 1945년 해방 후 국가 건설을 위하여 교육체제 정비를 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두었다. 남북은 모두 제도교육 정상화를 위하여 ▲초, 중등교육기관의 학제개편 및 확대 ▲초등의무교육 실시 ▲고등교육기관 설립 등을 추진하였고, 문맹률이 78%에 달하였으므로 문맹퇴치 운동도 시행하였다.

북한은 해방 후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새로운 교육제도 수립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인력 양성 ▲민주개혁을 위한 사상의식개조 등을 교육의 목표로 정하였다. 이를 위하여 1945년 11월, 일제강점기의 ‘국민학교’라는 명칭을 ‘인민학교’로 개칭하였으며, 학교 교육제도는 소련의 교육제도를 참고하여 1년제 유치반을 포함하여 인민학교 5년, 초급중학교 3년, 고급중학교 3년, 대학 4-5년으로 정하였다. 1949년에 북한은 초등학교의 취학률이 98%에 달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초등의무교육을 1950년부터 실시할 예정이었으나, 한국전쟁으로 미루어져 1956년에 4년제 초등의무교육을 실시하였다. 1958년에는 의무교육을 7년으로 늘렸으며, 1969년에는 9년제 중등의무교육(인민학교 4년, 중학교 5년)을, 1976년에는 취학 전 교육 1년과 인민학교 4년 및 고등중학교 6년을 합쳐 11년제 의무교육을 실시하였다. 2012년 김정은이 집권한 후 12년 의무교육제 실시를 발표하고, 2017년부터 12년제 의무교육을 실시하였다. 12년제 학제는 입학 전 교육 1년, 소학교 5년, 초급중학교 3년, 고급중학 3년으로 구성되어 있다.

남한은 6년제 초등의무교육을 1950년부터 실시하기로 하였으나, 6.25전쟁으로 인하여 지연되었다. 1953년 휴전 후 의무교육완성 6개년 계획을 수립하였으며, 1959년 취학률이 96%를 넘어 초등의무교육이 정착되었다. 그러나 시설이 열악하고 부족하여 한 반이 70~80명에 달하는 과밀학급이 많았고, 2부제·3부제 수업을 하기도 하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학교 수가 증가하고, 출산율도 떨어지면서 교육환경은 지속적으로 개선되었다. 남한의 중학교 의무교육은 도서지방 등을 대상으로 1985년부터 시작되었으나, 완전한 중학교 의무교육이 시행된 것은 2004년이 되어서다. 일본은 1947년에 9년제 의무교육을 실시하였으며, 많은 국가들이 1970년대에 9년제 이상의 의무교육을 도입한 것에 비하면 남한의 중등의무교육 도입은 많이 늦은 것이었다.

해방 후 북한의 교육정책에서 의무교육 외에 시급하게 추진한 것은 종합대학교 설립이었다. 일제의 식민통치 시기에 조선인은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적었다. 해방 직후 조선에는 고등교육을 받은 인텔리가 매우 적었으며, 북한지역에는 그 수가 더욱 적었다. 일제강점기 고등교육기관은 경성제국대학과 전문학교를 포함하여 20여 개가 있었고, 1942년까지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한 조선인은 600여 명에 불과하였다. 해방 당시 북한지역에는 평양의학전문학교, 평양공업전문학교, 함흥의학전문학교 등이 있었을 뿐이다.

1945년 광복 후, 남북한에 일제 군국주의적 교육정책을 청산하고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고등교육기관의 확대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조성되었다. 남한은 1946년 4월 경성제국대학의 3개 학부, 관립전문학교와 사립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를 통합하여 종합대학교를 설립하는‘국립서울대학교설립안’을 발표하였으며, 1946년 8월 국립서울대학교가 설립되었다. 대학 설립 후 일부 학생과 교수들은 대학교의 통합과 학교에 대한 경찰의 간섭 반대, 그리고 친일 교수 배제 등을 주장하며 국대안 반대 운동을 본격화하였다. 이 운동은 해방 후 정치적 상황에 영향을 받아 좌·우익의 대결 양상으로 전개되었으며, 일부 지식인들이 월북을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북한은 해방 후 국가 건설을 위한 지식인과 권력 엘리트를 양성하기 위하여 여러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우선 군사정치학교인 ‘평양학원(1946년 2월, 초대원장 김책)’, 당 간부 양성을 위한 ‘중앙당학교(1946년 6월, 초대교장 김일성)’, 경제관료 양성을 위한 ‘중앙고급지도간부학교(1954년 인민경제대학으로 변경)’를 설립하였다. 이들 교육기관은 2~6개월의 단기교육과정으로 당장 필요한 간부인력을 양성하는 학교였으므로, 국가 건설을 위한 고급인력의 체계적 양성을 위한 고등교육기관 설립이 절실하였다.

북한은 종합대학을 설립하고, 종합대학을 모체로 하여 분야별 대학을 설립하는 방침을 세우고 1945년 11월에 평양대학건설기성회를 결성하였다. 건설기성회는 김일성을 고문으로 최용건 위원장, 강윤범 외 8명의 위원으로 구성됐다(통일뉴스, 2016.10.02). 1946년 5월에는 종합대학 창립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으며, 일부 대학 설립자금은 주민들의 모금으로 충당되었다. 북한 지도층에서는 대학 설립보다 경제분야에 예산을 사용하여야 한다며 반대하는 목소리도 있었으나, 대학 설립에 대한 주민들의 열망이 높았다.

1946년 7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북조선에 대학을 설치하는 결의’를 채택하고 법령 40호를 발표하였다. 결의는▲1946년 9월 1일 신학년부터 평양시에 북조선종합대학을 설립하며 ▲평양의학전문학교와 평양공업전문학교는 대학으로 승격해 종합대학에 편입시키고 ▲본 종합대학에 조선해방을 위하여 일본 제국주의와 투쟁한 조선민족의 영웅 김일성 장군의 이름을 부여하여 ‘김일성대학’이라 칭한다 등의 주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리고 법령 서문에서 김일성은 ‘진보적 민주주의 원리에 입각하여 인민경제와 문화를 건설할지 도력 있는 고등기술인들을 발달시키는 것을 중요시하여’ 대학을 설치한다고 밝혔다.

김일성종합대학은 1946년 9월 15일 개교식을 하였으나, 실제로는 1946년 10월 1일 개교하였으며, 공식적인 창립일은 1946년 10월 1일로 하고 있다. 김일성종합대학을 서둘러 창립한 것은 남한의 서울대학교 설립에 대한 대응이기도 하였다.

대동동업전문학교를 설립한 이종만에 대한 이야기가 실린 책 「럭키경성」.

김일성종합대학은 평양의학전문학교와 평양공업전문학교(대동공업전문학교의 후신)를 대학으로 승격시키고 학부로 편입시켜서 설립하였다. 대동공업전문학교는 일제강점기 시절 금광왕으로 불리던 이종만이 1938년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자진 폐교한 숭실전문학교 건물을 인수하여 설립하였으며, 1944년 태평양전쟁으로 경영이 어려워지자 총독부에서 인수하여 관립인 평양공업전문학교가 되었다. 이종만은 최근 강동원 배우의 친일파 외조부로 화제가 된 적이 있으나, 단순히 친일파로 보기는 어려운 이상주의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일성대학은 평양공전 2학년과 평양의전 3학년 학생을 대학 1학년의 자격으로 입학시켰다. 창립 당시 7개 학부, 24개 학과, 1개 예과가 설치되었으며, 68명의 교원과 1,500명의 학생으로 구성되었다. 해방 당시 중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많지 않았으며, 특히 가난한 노동자와 농민의 자녀들은 교육을 받을 기회가 거의 없었으므로, 노동자와 농민 자녀들을 입학시키기 위하여 대학교 설립과 동시에 3년 과정의 예과를 개설하였다.

부족한 교원은 남한의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을 초빙하였다. 남한에서 전문학교를 통합하여 국립서울대학교를 설립하면서 실직하였거나, 사회주의 성향을 가진 지식인 또는 국대안에 반대한 교원들을 초빙하였으며, 특히 과학·기술계통이 많았다.

1947년에 김일성종합대학은 8개 학부, 학생 수는 3,813명이 되었다. 초기에는 교사가 없어 흥국공업중학교, 창생상업중학교, 평양사범학교, 인민재판소, 검찰청 건물 등을 교사로 사용하고 일본인 소유의 호텔과 식당은 학교 식당과 기숙사로 사용하였으며, 1948년 9월에 모란봉 동남쪽 용남산 기슭에 대학 본 교사가 건설되었다. 김일성종합대학은 1949년 첫 졸업생을 내보냈다. 현재 김일성대학교는 부지 156만 제곱미터에 건물면적은 40만 제곱미터이며, 학생 수가 12,000여 명에 교직원 수는 2,500여 명이다.

1948년 7월 7일에 북조선 인민위원회는 제69차 회의에서 결정 157호 ‘북조선 고등 교육 사업 개선에 관한 결정’을 통과시켜 김일성종합대학에서 4개의 학부(공학부, 운수공학부, 농학부, 의학부)를 분리했다. 이를 모체로 하여 평양공과대학(현 김책공업종합대학), 사리원농업대학(한국전쟁 전에 원산으로 옮겨 현 원산농업대학), 평양의과대학 등 3개 대학을 새로 창설하였다. 종합대학에서 분야별 대학으로 분리는 소련의 교육체제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김태윤, 「해방 직후 북한의 과학기술 교육기관 설립과 체제형성(1945~1950)」, 서울시립대 통일평화연구원, 통일과 평화 10집 2호·2018, p115~155). 그 외에도 1947년에는 북한 최초의 공업대학인 흥남공업대학(현 함흥공업화학대학)을, 1948년에는 보건의료인력확보를 위하여 함흥의과대학, 청진의과대학 등을 설립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만주 일대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하다가 회생된 독립운동가 자녀의 교육도 해방 후 북한의 중요한 교육정책 중 하나였다. 김일성은 해방 후 중국 동북지방 및 국내에서 항일유격대 유자녀와 생존한 항일유격대의 가족들을 찾기 위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광범위한 조사를 하여 이들을 귀국시켰으며, 1947년 10월 평안남도 대성군 간리역에 임시교사를 설치하여 개교한‘평양혁명자 유가족학원’에 입학시켰다. 1948년에 만경대에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하였고, 1958년에는 만경대혁명학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한국전쟁 후에는 전사한 군인들의 자녀들도 입학하게 하였으며. 이들 중 일부는 소련과 동유럽 국가에 유학을 보내기도 하였다. 만경대혁명학원은 중고등학교과정 6년과 군사교육 2년 등 8년제 과정이며, 졸업 후에는 김일성종합대학 및 각종 군사학교에 진학하여 북한의 핵심 엘리트로 길러지게 된다. 만경대혁명학원의 졸업생은 총리를 지낸 연형묵과 최영림(1기 졸업생), 인민무력부장을 지낸 김영춘, 국방위 부위원장을 지낸 오극렬 그리고 최근 핵심 실세로 떠오른 최용해, 김영철도 만경대혁명학원 출신들이다. 만경대 유자녀학원 외에도 남포유자녀학원(남폭혁명학원), 신의주유자녀학원, 해주유자녀학원 등도 설립하였다.

1980년대, 김정일의 후계체제가 공식화되면서, 교육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초반까지 북한교육의 특징으로 ▲과학기술과 외국어교육의 강화 ▲수재교육의 도입 ▲고등교육의 대중화와 이원화를 들 수 있다.

과학교육을 위하여 인민학교와 고등중학교의 교과내용에 수학, 과학 및 전자계산학 등의 과목을 개설하여 교육하고, 김책공업종합대학, 평양기계대학, 평양철도대학 등에 프로그래밍학과, 전자계산기학과, 정보처리학과 등 관련 학과를 설치하거나 기계, 전자, 자동차 부분의 단과대학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대외교역 확대와 외국선진기술 습득을 위하여 인민학교, 고등중학교에서 외국어교육, 특히 영어교육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평양에만 있었던 고등중학교 과정의 외국어학원을 각 시도별로 12개 추가 설립하였다.

평양 외국어학원 전경 © 통일부

1984년 평양 제1고등중학교를 설립하면서 수재교육을 시작하였다. 고급인력양성이 국가발전을 이끈다는 김정일의 방침에 따라, 1985년에는 각도재지 12개지역에 제1고등중학교를 설치하였다. 1995년에는 각 도와 시에 26개의 제1고등중학교가 운영되고 있었으며, 1999년에는 그 수를 더 늘어났다. 그리고 남한에 널리 알려져 있는 예술분야의 영재교육기관인 ‘금성학원’도 1989년 ‘금성제1고등중학교’로 설립되었으며, 나중에 인민학교, 중학교, 전문학교, 대학교과정이 있는 금성학원으로 바뀌었다.

1986년에는 대학입시에 예비시험제도를 도입하였다. 북한의 대학입시는 각 기관, 기업소별로 대학 입학시험을 볼 수 있는 추천 인원이 정해져 있다. 성적, 품행, 성분, 군대근무 등을 고려하여 인원을 추천하면, 추천받은 인원은 각 대학별 시험을 치뤄서 합격하면 대학생이 될 수 있었다. 김정일은 당 간부의 자녀이면 성적이 낮아도 대학에 입학할 수 있다고 비판하면서 지역별 예비시험을 도입하도록 하였다. 예비시험을 본 후 성적을 고려하여 대학별로 시험을 볼 수 있게끔 추천을 받도록 규정을 바꾼 것이다.

김정일은 1984년 고등전문학교를 단과대학으로 개편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에 따라 1984년 20개의 고등전문학교가 단과대학으로 개편되는 것을 시작으로, 점차 3-4년제 단과대학으로 개편되었다. 대학 수는 1960년 78개에서 1970년 129개, 1980년 170개, 1990년 260개로 빠르게 증가하였다. 이 정책은 중심대학(김일성종합대학, 김책공업종합대학 등)을 통하여 핵심인재를 양성하고 단과대학, 전문대학을 통하여 지방의 산업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 고등교육 기회를 확대하는 정책이었다.

2011년 김정일 위원장이 사망한 후 2012년 김정은이 집권하면서 가장 먼저 교육개혁 정책을 발표하였다. 학제를 11년에서 12년으로 개편하고, 12년 의무교육제 실시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발표 후 5년이 지난 2017년부터 12년제 의무교육이 실시되었다. 의무교육 학제는 학교 입학 전 교육 1년, 소학교 5년, 초급중학교 3년, 고급중학 3년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학교시설 개선에 대대적인 투자를 진행하고, 정보화 등 첨단과학기술 교육을 강화했으며, 일반 노동자 대상 원격교육 등에 대한 인프라도 구축하였다.

김정숙제사공장의 원격교육 모습 © 내나라

의무교육을 12년으로 개편한 것은 국제적으로 의무교육 혹은 무상교육이 12년제로 실시되는 것이 일반적이고, 북한이 만 17세에 사회에 진출하는데 반하여 외국은 19세에 사회에 진출하는 것을 고려한 것이다. 그리고 중등교육 다양화와 직업교육을 강화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참고문헌
신효숙, 「북한의 체제와 정책」中 12장, 명인문화사, 2014, p.354~380.

 

글. 변상욱 Byun, Sangwook
대한건축사협회 남북교류협력위원회 위원·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도라산출입사무소장·건축사·시공기술사

변상욱 건축사·건축시공기술사

1999년부터 현대아산에서 근무하면서 금강산관광지역 건축물과 평양체육관 등 건설사업관리업무를 수행했으며, 2004년부터 2016년까지 개성공업지구관리위원회에서 근무하면서 개성공업지구 종합지원센터, 기술교육센터 등 건설사업관리와 공장건축 인허가업무를 담당하였다.
gut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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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사(Architect)로 산다는 것은

Living as an architect

‘어떻게 하면 평범한 일상에서 건축의 공간을 느끼고 더 좋고 편리한 건축으로 만들 수 있을까?’
질문의 연속이다. 나는 대학 시절 서양의 유명 건축사의 이론과 작품을 탐구하면서 건축을 시작했다. 유명 건축물들의 섬세함과 공간의 창의성은 감동으로 다가왔고, 나도 저런 건축을 하는 건축사(Architect)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지금까지살아왔다.

건축 스타일과 구축 방식은 수 세기 동안 역사적인 기록과 작품으로 우리에게 전달되어 우리의 문화와 환경에 맞게 변화하여 오늘날의 건축 형태를 만들어 냈지만, 좋은 건축을 만들고, 사람들과 소통하고, 만족하며 감동을 전달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건축사는 어떤 메신저(messenger·전달자)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내가 건축을 시작했던 1970년대에는 어떠한 정보나 서적도 쉽게 구할 수 없고, 일본어로 된 자료집이나 복사된 책, 가끔 접하는 잡지에서 보는 평면도가 고작이었다. 이 자료들을 짜 맞추어 상상하는 것이 전부였다. 1980년대 들어 외국 서적을 사 모아 연구하면서 건축을 알아갔다. 1990년대는 해외여행 자유화로 건축탐방이 가능해져 현지로 날아가 심층적으로 학습할 수 있었다.

점차 건축사로 살아가면서, 무엇이 좋은 건축물인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내가 설계한 도면대로 시공되면 좋은 건축물이 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은 멈추지 않았다. 나는 형태적 창의성과 공간의 구성 등의 요소에 골몰, 건축의 구법과 재료, 디테일에 답이 있다고 생각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유행하던 시기, 나는 여전히 모더니즘 건축에 천착했다.

업력이 쌓이면서 건축은 예술이며, 그 자체로 중요한 메시지(message)를 전달하며 기호(signage)를 나타낸다는 점을 깨달았다. 이 모든 게 시공을 통해 이루어진다. 많은 건축사들은 건축물이 들어설 현장을 방문하여 장인들과 소통하면서 디자인을 결정하고 만들기에 관여한다.

“전체와 디테일은 하나다(르 코르뷔지에)”, “돈 없이는 디테일도 없고 개념뿐이다(렘 콜하스)” 이는 건축의 유명한 명제이다. 현장을 방문할 때마다 디자인은 디테일이 결정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말들을 주문 외우듯 중얼거렸다. 건설(시공)이란 단지 건축물의 실용적인 필요에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건축을 바라보는 감각과 경험을 실제화하는 과정이다. 이는 건축물을 이해하는 방식이 과학의 표본이 되고, 감성적 반응의 대상이 되며, 역사의 한 부분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골프존카운티 청통 GC 클럽하우스 © 이승무

나는 건축사가 갖는 미적 감각 수준의 메시지만으로는 건축 장소를 해석할 수 없고, 공간을 이용하고 건축하는 사람들의 통합된 사고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본다. 건축이 예술품으로 인지되는 것은 현실 이상의 어떤 가치를 사회에 전파하기 때문이다. 건축은 구축을 넘어 지향점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나에게 주어진 반복되는 질문이지만 예술의 경지에 이른 건축은 일생에 한 번도 기회를 주지 않을 수도 있다.

 

기억 속으로

어린 시절, 비 오는 날이면 집에 머물며 긴 시간을 보냈다. 중정 마루에 앉아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며 친구들과 밖에 나가 놀 마음에 조바심을 냈다. “가야 하는데… 나가야 하는데…” 떼를 쓰면서 할머니가 홍두깨로 밀어 만든 칼국수 삶는 걸 보며 비가 그치길 기다렸다. 여름 장마 기간에는 긴 시간 집에 머물게 된다. 심심하면 집에 대해 이것저것 살펴본다. 마루 하부는 왜 비어 있나. 비가 떨어지면서 댓돌 하부로 떨어지게… 처마와 채양, 비를 모으는 학의 입모양인 물받이, 마루의 패턴 등과 한지 문을 열면 눈에 들어오는 뒷마당과 나무 담장. 나의 어린 시절 건축적 기억은 실내 공간에 머물며 외부를 바라보는 즐거움이었다. 특히 비 오는 날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소리는 상상의 날개를 펴게 했다.

소규모 주택을 계획하면서 사용자의 입장에서 ‘나에게 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프로젝트는 많은 사람의 의견과 상호 조율로 개념 설계를 시작한다. 개념은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사고의 틀 속에 기억되는 것이다. 대형 사무소에서 시작한 주택 프로젝트는 나만이 누릴 수 있는 건축적 열망의 재점화였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 나의 주거지는 전통 한옥을 거쳐 서울 제기동의 개량 한옥이었다. 결혼 후에는 집장사가 지은 양옥집 그리고 아파트. 조선, 일본, 서양의 혼종 건축물을 경험한 게 전부였다. 한국 건축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할 기회가 없었다.

 

일상의 건축으로

집이란 나에게 무엇인가?
집이라는 공간에서 반복적이고 습관적인 생활에 젖다보면 공간에 대한 생각은 잊어버리고 산다. ‘나에게 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하게끔 만든 주택 설계에 집중한 2000년대 이후, 인문학적 사고가 깊어지면서 건축사로 성장해가고 있다고 느꼈다. 아파트 시대 이전 본래의 거주공간인 주택을 설계하면서 한국인으로서의 삶과 정체성, 공동체의 나아가야 할 방향에 눈을 떴다.

성북동 주택 스케치 © 이광만

건축사로 살아오기를 40년. ‘나는 건축으로 이 세상의 무엇을 개선하였고 무슨 개념과 표준을 만들었는가?’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돌아보면, 양적으로 엄청난 건축 설계 실적을 쌓았지만, 일본, 서양 것을 적당하게 어루만져서 변형시키는 작업으로 호구지책을 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정보화 시대, 매일 쏟아지는 건축 정보의 홍수 속에서 정보를 감각적으로 받아들여 정리를 하곤 한다. 여전히 대부분이 서구적 르 코르뷔지에의 개념을 이해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왜 우리 세대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고 주택의 표준을 만들어 세계에 나누어주는 선진화된 지식인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는가? 왜 우리 세대는 식민시대에 예속된 사고의 틀 속에 머물러야 하는지 고민에 빠지게 된다. 각 분야에서 새로운 개념을 만들고 표준을 만들어 선도국가로서 역할을 하는데, 유독 건축 분야는 왜 아직도 ‘건축은 예술이다’라는 주장에 머물러 있으며 몇몇 아틀리에 건축사들의 조형 언어가 후배들에게 선망이 되곤 하는가?

2000년대 생들의 대표격인 BTS는 세계적인 수준의 K-POP을 만들어 선도 국가의 능력을 발휘하는데, 건축 분야에서는 누가 프리츠커상을 받을 수 있는가? 우리 건축은 아직도 중국, 일본 건축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서로의 개념과 표준에서 도약하고 건너가려는 혁명적인 갈등과 투쟁적 논쟁도 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다시,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하는가? 무엇을 하려는가? 나에게 소명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과 연속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한국 건축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겹쳐진다. 국제주의 건축이 등장한 이래 그동안 우리의 많은 천재 건축사들이 도시에 축조물을 실행하면서 건축을 “창조자이며 새로운 예술”이라 말하였다. 건축사들은 전문가의 식견과 창의적 발상을 시공자와 자신을 구분짓는 기준으로 삼는다. 그런 행위가 전체 맥락에서 차별성을 갖는 작품 행위라는 자부심을 갖고 노력한다. 지난 40년, 특히 주택 설계를 하면서 시공과 디테일을 우선으로 하는 장인의 위치로 돌아가는 게 나의 건축적 소명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한국 건축’, ‘한국 주택’ 개념을 설정하는데 중요한 장인 기술은 결국 산업화된 목재 건축 강국 일본의 현대적 중목 구조에 관심을 갖기에 이르렀다.

청담동 주택 © 이광만

 

한국건축

‘한국건축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한국인의 정의는 어떻게 내리는가?’
‘한국인의 본질은 무엇인가?’
‘대한민국에 살면서 우리가 하는 건축을 한국 건축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영어로 KOREAN ARCHITECTURE라는 호칭을 생각해 보았다. 한반도에 살면서 중국, 일본, 미국, 서구의 건축 등 다양하게 이야기하면서도 우리 건축은 국제주의 양식, 근대건축, 현대건축이라는 서구 기준의 시대 구분으로만 이야기했다. 우리 풍토, 기후, 환경에 적용하면서 프랑스식, 일본식, 바로크, 로코코, 바우하우스 양식이라는 다양한 수식어를 사용하였다.

수식어가 무엇인지 오랫동안 고민하던 중에 ‘버나큘러’라는 개념을 접했다. 처음
에는 그 나라의 기후나 환경에 잘 적응하는 지역 건축이라고 생각했다. 버나큘러를 처음 알린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이끈 로버트 벤투리와 데니스 스콧 브라운이다. 이들은 『라스베이거스의 교훈(Learing from Las Vegas. 1972)』에서 일사불란한 통일성보다는 복잡다단한 모순을, 모더니즘의 형식주의보다는 역사성(history)과 버나큘러(vernacular·지역성)를 강조하는 건축의 문맥(contextualism)을 주장했다.

성북동 주택 © 윤재혁

한국 건축은 시간이 지나면서 ‘버나큘러’라는 개념 어휘로 설명되었다. 나는 집장사가 지은 프랑스식 집에서 자라 바우하우스 스타일 초등학교를 다녔고, 미스 반 데어 로에 스타일 사무실에서 일하고, 디즈니랜드 스타일의 결혼식장에서 결혼식을 치르고, 르 코르뷔지에 스타일 아파트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한 세대에 속한다. 우리 세대와 동년배 건축학도는 국립민속박물관, 부여박물관, 전주시청사, 독립기념관 등의 정체성 논란을 거치면서, 한국 건축이 무엇인지 생각하였다. 나에게 한국 건축은 무엇인가? ‘한국식 버나큘러’ 건축은 실제 존재하는가?

풍토건축, 지역 건축의 뜻으로 쓰이는 ‘버나큘러’라는 수식어는 생소함과 모호함과 위화감을 준다. 우리는 이 개념에 익숙하지 않다. 한국 사람들은 버나큘러 건축(일상의 건축)이라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다. 나는 이를 깊이 생각하고, 체험하고, 이론화하기 전까지 ‘일상의 건축’에 대해, 그 가능성에 대해서 무지하였다. 개념을 구체화하면서 ‘버나큘러’, 즉 한국의 ‘일상의 건축’에 빠져들었다.

‘버나큘러 건축’은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한국에서 건축사로 살아가면서, 한반도를 떠나서 이민자나 유학생의 소수자, 이방인이 되었던 이들의 경험은 비슷하다. 외국에서의 문화 충격에 자신의 존재를 묻는 것은 비슷할 것이다. 한국 건축이란 개념을 찾아가야 하고 논쟁을 해야 한다. 한국인들의 한국 건축은 무엇인가. ‘버나큘러’의 개념과 지식으로 개념과 표준을 논해야 한다.

2000년대에 들어 고품질 주택의 설계, 시공을 위해서 소비자가 만족할 수준의 산업 및 시장이 형성되어야 한다. 건축 산업을 규정하는 건축서비스산업 진흥법의 주요 내용은 기획·설계·CM·FM의 4가지 업역을 정하고 자재공급과 생산 및 제조, 유통에 이르는 건축 관련 산업 전반이다. 건설이 제조업으로 자리 잡으려면 프리패브리케이션까지 공급·유통하여야 하기에 단체장으로서 법제화에 노력했다.

건축물이 플랫폼으로 만들어져 제조, 자재, 유통까지 합쳐진 조립 공정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디자인이 구축되어야 한다. 선진화는 ‘개념을 확실히 하고 표준을 전해 널리 사용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국경을 초월한 세계화(globalization)를 뜻하기도 한다.

일본주택 산업은 100년 전 주택의 모듈 개념에 대해 토론하여 자, 척 모듈을 표준으로 건축 산업 전반에 사용하도록 정해 모든 자재, 가구 집기에 적용한다. BTS는 서양 음악을 차용하여 K-POP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가고 있다. 설계 수업 시간에 가장 많이 토론했던 건축 개념은 무엇인가? 이를 어떻게 표준화할 수 있을까?

강경중학교 어린이 도서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기술의 선진화이다. 일본 주택의 900모듈의 개념은 제품 기술 선진화로 인한 대량생산과 품질보증이다. 친환경주택이란 개념으로 100년 주택을 만드는 그들이다. 우리 아파트 건설 산업은 이미 기술 선진화를 이루었지만, 개념과 표준까지는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세계적인 명성이 있는 한국의 아파트가 해외 시장에 진출할 수 없는 이유이다. 모듈을 설정 표준화하는 것이 해외경쟁력을 강화하는 방법이다. 부동산의 평당 가격에서 나온 안목 치수와 발코니 확장이라는 정치적 레토릭에서 벗어나는 게 선진화하는 방법이다.

어떻게 표준화할 것인가? 건축이 산업이라는 개념에 합의도 못하고 있고 ‘표준’ 성격을 규정하고 분석하는데 게을리하면, 현상에 대한 각자의 답은 현상 자체이다. 정보화 시대의 보편성이란 측면에서 접근하면 답이 보인다. 소품종, 대량생산이라는 모순되어 보이는 산업의 이해와 기술 선진화는 주택 산업을 변화시키는 단서가 된다. 이는 다양한 규모의 (설계)사무소와 건설, 시공 단체, 업체들이 자신만의 디자인 모듈, 단위 공간, 유닛에 대한 독창적인 사고와 나름의 규모의 경제(scale merit)를 구축한다는 의미이다.

덴마크 건축사 BIG는 “우리 집은 점점 비싸지고 틀림없이 품질이 점점 낮아지고 있다”고 이야기 했다. “모든 주택의 99%는 동일한 공간과 평면을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 그 안에 생활하는 사람은 다 다르다. 이런 건축은 처음부터 끝까지 상상할 수 있는 엄청난 잠재력이 있다. 집을 만드는 제조 및 제품의 힘과 대량 생산, 조립하여 다양한 주택을 만들 수 있는 일련의 모듈식 요소를 만든 건물을 개발할 것이다”라고 언급했다.
이제 ‘우리가 집을 짓는 과정에서 제조 및 제품화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면 어떨까?’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우리도 다양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모듈 방식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하고, 한국 건축에 맞는 모듈 혹은 유닛(단위)의 개념을 논의하여 우리의 표준을 정하는 게 필요한 시점이다.

대량생산, 조립하여 다양한 주택을 만들 수 있는 일련의 모듈식 요소로 만든 건물을 개발하는 것이 한국 건축을 선진화하는 길이고, 건축사로 사는 나의 마지막 소명으로 받아들인다.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서 건축적 사고로 일상에서 건축의 공간을 느끼고 사유하며 경험과 지식을 나눔으로써 기여하고자 한다.

 

글. 이광만 Lee, Kwangman (주)간삼건축 종합건축사사무소

이광만 (주)간삼건축 종합건축사사무소 · 건축사

홍익대 건축과를 졸업하고 정림건축에서 실무를 쌓았다. 1983년 간삼건축을 설립하여 2020년까지 대표 건축사로 근무 후 현재 고문으로 활동 중이다. 아울러 현 서울사이버대학교 건축공간디자인학과 석좌교수로 후학을 가르치고 있다. 30년 동안 다수의 건축작품을 남겼으며, 2018년에 대한민국 화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최근 중요작품으로는 골프존 대전 사옥, 이원의료재단, 골프존 청통 클럽하우스, 청담동 주택, 성동 주택 등이 있다.
klee715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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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게임, 건축의 계급적 포지션

Squid Game, hierarchical position in architecture

웹드라마 <오징어 게임> 포스터 © 넷플릭스

떠들썩하다. 십여 년 전 싸이의 노래 강남스타일이 국위 선양하며 국뽕에 차오르게 하더니, 이번엔 BTS에 이은 한국 드라마가 넷플릭스에서 선전하고 있다. 일종의 금메달을 딴 느낌이다. 온·오프라인의 뉴스도 연일 국위 선양(?)하는 시청률을 보여준 드라마 한 편에 흠뻑 취한 느낌이다. 하도 요란해서, 탈퇴했던 온라인 스트리밍 서비스에 재가입하고 연휴기간에 드디어 <오징어 게임>을 보았다. 9편의 시리즈를 전부 보고 나서 느낀 느낌은… 영화 <기생충>의 버전 2 같달까? 워낙에 좋아하는 장르여서 그런지 엉덩이에 땀이 날 정도로 집중해 보았다.

<오징어 게임> 스틸컷 © 넷플릭스<오징어 게임>은 총 9편의 시리즈로 되어 있다.

드라마는 경쟁 사회에서 이탈, 또는 패배한 자들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경쟁 사회에서 도태됐다고 해서 마냥 착하고, 순한 어린양이 아니다. 적당한 욕망과 게으름, 허영과 처절함, 상처와 더불어 거친 상황에서 나고 자란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다. 해서 초반에 등장인물들에게 감정이 이입되진 않는다. 이 문제 많은 사회의 패배자들 앞에 쥐덫의 먹이처럼 끄나풀로 살짝 살짝 유혹하는 죽음의 게임의 문이 열린다. 게임에는 논리나 당위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도 이런 설명이 불필요하도록 가장 간단하고 기본적인 어린이용 놀이를 게임의 룰로 선정한 것인지도 모른다. 줄다리기에 어떤 대단한 룰이 있는 것도 아니고,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와 같은 놀이 역시 아주 단순하다. 뽑기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구슬놀이는 조금 머리를 써야 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이렇게 단순한 게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선수의 자질(?)이나 능력, 인성 등은 중요하지 않다.

이 드라마는 반어법과 상징, 은유를 이해하지 못하면 그냥 폭력적인 영화로 보일 수도 있다. 반면 조금 더 상상력을 발휘해서 은유와 상징, 반어법과 우리 사회에 대한 어두운 면을 상기해 보면 소름 돋을 만큼 적나라한 묘사가 아닐 수 없다. 도덕적 보완 요소와 인권에 대한 인식이 없는 시장 자본주의의 냉혹함은 정글 그 자체가 아닌가. 그것은 우리가 이미 19세기 산업사회에서 겪었고, 당장 수많은 산업화 국가들의 초기 과정에서 겪은 바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지난 1960~1970년대 공장 노동자나 수많은 생산 기반 노동자들에 가한 비 인격적, 반 인권적 폭력을 떠올리면 된다. 그 시절엔 경쟁에서 이기지 않으면 생존이 어려웠다.

비단 우리나라만 그런 것은 아니다. 모든 사회 변화는 유사한 과정을 겪게 되며, 갈등이 발생하고 문제가 생긴다. 이런 갈등과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는 그 사회의 몫이다. 천만 다행으로 우리는 치열하게 한 단계씩 극복해 나갔다. 경우의 차가 있을 뿐 현재 자본주의 경쟁 사회의 룰에서 탈락한 사회 패배자(loser)들에게 선택할 기회는 없다. 사회 시스템의 문제일 수도 있고, 개인의 문제일 수도 있다. 그들이 가능한 것을 꿈꾸었다 실패했을 수도 있고, 과잉 욕망 또는 지나친 욕심으로 실패했을 수도 있다. 다만 이들은 21세기 사회 속 경쟁에서 탈락하는 순간 설 자리를 잃어버린다.

<오징어 게임>에서는 이 게임에 배팅하는 자본가들이 나오는데, 이들은 중국인, 미국인 등 다양한 글로벌 유한계층이다. 이들에게 목숨을 건 보통사람들의 생존게임은 한낮 게임의 배팅 대상일 뿐이다. 이들의 게임 속 놀잇감으로 전락한 사람들은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인물들이 아니다. 외딴섬에 있는 네모난 스타디움 같은 게임장은 이런 은유로도 보인다. 완전히 폐쇄된 곳이 아니라 하늘이 열려있는 곳이다. 하지만, 그 네모난 열린 상자 안에서 이들은 생사를 건 게임을 하고 있다. 이런 한계는 에셔의 공간같이 그려진 파스텔톤의 미로 공간에서도 드러난다. 보색관계로 구성된 핑크와 녹색, 그리고 노란색은 삼원색의 파스텔 톤 버전인 셈이다. 통상 만화적이고 유아적인 공간을 묘사하거나 표현할 때 사용하는 화사한 색상이 죽음의 게임이 벌어지는 공간에 사용된 것을 미장센의 메타포로 해석하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 아니다. 왜냐면 에셔의 끝없는 계단을 연상시키는 이동 공간의 구성은 영화 속 게임 주관자들의 강력한 지배력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오징어 게임> 스틸컷 ©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 스틸컷 © 넷플릭스

그리고 매 게임의 장치들과 구성 역시 관념으로 우리가 통상 이야기하는 것들을 공간화 시켰다. 사회는 경쟁 구도일 수밖에 없고, 이런 경쟁에서 승리자가 전리품을 모두 획득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온라인 비즈니스의 경우도 시장 지배력이 점차 커지면서 시장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고, 오프라인 비즈니스 역시 마찬가지다. <오징어 게임>의 승리자가 획득하는 456억의 상금은 바로 이런 사회적 현상을 그대로 옮겨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당장 우리 사회에서 기업들을 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개별 기업들이 M&A가 되었든 단순 매각이 되었든 간에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끝없이 흡수하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456억의 상금을 모두 확보하기 위해서는 영화처럼 상대들을 희생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오징어 게임>의 살벌한 메타포는 게임 참여자들과 진행자, 보조요원들의 신분에서 드러난다. 게임 참여자들은 우리 사회 최고의 학벌이라는 서울대부터 공업고등학교 출신, 그리고 조폭과 의사 등 모든 사회적 출신과 배경을 망라하고 있다. 다만 이들은 언제든 우리 사회 속 경쟁에서 탈락해서 없어져도 아무도 모르는 먼지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 이들을 구경하고 관람하는 이들은 권력과 부를 가진 자본가들이다. 이들 역시 이들 간 계급구조로 상호 계급의 구성이 생기기도 한다. 즉, 먹이사슬 구조처럼 윗단계, 그다음 윗단계 식으로 연속되어 있다. 이런 연속된 관계의 정점에 누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그런 역학적 관계는 약간의 상호관계로 존재할 수도 있다. 한마디로 절대 지배자가 없다. 프런트맨과 VIPS의 관계에서 이를 보여준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는 내내 건축계 비즈니스가 중첩되었다.
공공이 되었건 민간이 되었건, 건축사의 가치를 존중하지 않는 태도와 이들 ‘갑’의 행태들이 중첩되었다. 이들의 요구에 의해 건축사는 본인의 작품을 공개하지 못하기도 한다. 공공건축은 여기저기 완장을 찬 이들의 간섭과 오지랖 넓은 지적질로 휘청이곤 한다. 같은 건축사사무소는 어떤가? 대형 건축사사무소들은 발주처로부터 당한 것을 한풀이라도 하듯이 외주비를 지연시키고, 덤핑을 유도하며, 물밑 로비를 통해 프로젝트 계약을 한다. 이들은 비즈니스 테크닉이라는 허울 좋은 타이틀로 설계외주를 통해 수익을 보전하고, 을의 지위를 ‘갑’의 지위로 신분세탁한다. 제한된 시장에서 건축사들은 네모난 게임장에서 벌이는 죽음의 게임 참여자들처럼 과잉 서비스와 무한 정보제공, 낮은 설계비를 감수하면서 제로섬게임에 참여하고 있다. 심지어 <오징어 게임> 참여자들의 서로를 죽여가면서 게임에 몰두하듯이 상호간의 허점을 휘두르며 완장질도 하고 있다. 그런 게임 모두 게임 주체자의 손바닥에서 왔다 갔다 하는 것임에도 말이다.

사실 건축에서의 사회적 관계를 언급하지만, <오징어 게임>의 사회 비판적 자아 고찰이 건축적 형태나 흐름으로 나타나긴 힘들다. 건축은 그 자체가 미학적 시각에서 출발하는 경향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 건축도 최근에는 서서히 사회적 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왜냐면 건축의 상당수는 사람들의 거주공간인 주택이고, 오늘날 주택문제는 심각한 사회 문제의 하나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난 수천 년간 삶의 고통과 투쟁은 먹고살기 위한 생존성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오징어 게임>도 근본적으로 먹고사는 삶의 문제에서 시작된 것이다. 반면에 건축은 우리가 벽을 뜯어 먹고 살 것도 아니기 때문에 잠잘 곳만 있으면 해결되는 대상이었다. 그런 대상이 먹고사는 삶의 문제로 떠오른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건축이 잉여자산으로 활용되고 상품과 이익 수단으로 확대되면서부터다. 21세기에 들어서며 전 세계 곳곳에서 주거문제가 삶의 필연적 복지 문제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주택이 상품으로 공급되었던, 또 정책적 이유로 사회공공주택이 공급되었던 건축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적극적으로 건설되는 것은 19세기 이전엔 없었던 일이다. 건축은 잉여 생산물이 아니며, 소수의 사용자를 위한 전형적인 주문 제조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공공은 공공대로 공급될 주택을 만들어야 했고, 정치적 이슈로도 경제적 이유로도 주택이 필요해졌다. 보다 생산적이고 다량으로 만들어 낼 필요가 있었고, 이는 고밀도 주택이 탄생하는 사회적 배경이 되었다. 국가 중심의 통제권이 강한 정부에서는 아파트라는 대량 공급 시스템을 국가적 주택 정책으로 제공하며, 민간 중심의 국가에서는 민간에게 허가권을 주면서 공급하도록 한다.

이렇게 공급을 해도 수요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주택이다. 주택은 어떤 재화보다 많은 비용이 투입되기 때문이다. 문화권에 따라서 공공주택에 투입되는 비용은 더 커진다. 당장 우리나라의 경우만 하더라도 온돌문화로 비용이 훨씬 더 투입된다. 정책은 민간과 공존하는 공급 정책을 펼 수밖에 없다. 민간에 의존하는 경우는 수익창출의 기회를 극대화하려는 특성상 대중적 주택보다 고가 주택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주택 공급은 각 사회 경제적 계층에 균일하게 매칭되기 극히 어렵다. 이런 불균형의 간극을 메우기란 정말 쉽지 않다.

민간이 공급하는 주택은 가격이 올라갈 수밖에 없고,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은 가격 상승의 동력이 된다. 가격 상승의 결과로 주택은 투자 상품이 된다. 사람들이 반드시 있어야 할, 거주해야 할 상품이기 때문에 시장에서 가장 안정된 수요 상품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주택은 캐피탈 게인(Capital Gain)의 도구화가 되어 공개시장에 던져지고 있다.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주택을 매입하기도 하지만, 가장 안정적으로 소득을 증가시킬 수 있는 대상으로 인식해 투자대상으로 매입하기도 한다. 이런 잉여 투자수단은 과소유 대상이 되며, 다시 가격 상승의 압박요인으로 작용한다.

<오징어 게임> 스틸컷 © 넷플릭스

이 과정에서 <오징어 게임>의 패배자처럼 타이밍을 놓친 사람들은 거주안정성을 상실하게 된다. 주식시장처럼 솟아오르는 주택 가격은 점점 투자 게임 참여자를 확대시키면서 한 번 기회를 잃은 사람들로부터 멀어져 간다. 이들의 노동 소득으로 결코 구입하기 어려운 가격으로 올라가는 것이다. 사회 작동 구조가 바뀌지 않는 이상 이미 상승한 주택 가격을 끌어내리는 것은 쉽지 않다. 그 사회, 국가 경제가 곤두박질치지 않는 이상 말이다.
그렇다면 <오징어 게임>의 구슬치기처럼 게임에서 진 사람은 총을 맞고 죽을 수밖에 없을까? 주거 안정성을 확보하지 못한 사람들은 악에 받쳐서 죽자사자 비 오는 날 온몸을 던져 싸울 수밖에 없을까? 이런 사회에서 건축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일까? 주택은 21세기의 새로운 주식(主食)의 대상인데 말이다.

사실 이런 시각에서의 주택 공급 노력들은 세계 각국에서 오래전부터 진행되어 왔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대체로 20세기 초반,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여러 가지 이유로 노동자 주택, 사회적 주택, 공공 임대 주택 등 다양한 이름으로 국가나 민간 자선 단체 중심으로 공급되고 있다.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그나마 반가운 사실은 초기 공급된 사회적 가치의 공공주택들은 ‘공급’ 자체에 의미를 부여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공주택은 르 코르뷔지에가 언급했다던 “주택은 살기 위한 기계”적 가치로서 비를 피할 보송한 공간 정도로 만들어 공급되었다. 그러나 이런 생색내기 공급이 사람들에게 만족스러울 리가 없다. 왜냐면 사람은 단백질과 세포로 구성된 생물체가 아니라, 생각과 감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공짜에 준하게 제공되는 공공주택이라 할지라도 심리적 안정과 편안함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오징어 게임>처럼 타인의 죽음으로 획득되는 456억의 거금이 아닌, 누군가의 희생보다는 협력과 사회 재생산, 재기의 동력으로 만들어지는 공공적 주택이어야 한다.

이미 다양한 사례에서 이런 협력과 사회 재생산의 시각을 제공하는 주택들이 있다. 이 과정에서 건축은 힘을 발휘하고, 성과를 내고 있다. 단지 ‘공급’이 아닌 사람의 심리와 감성을 이끌어내는 디자인된 주택이 등장하고 있다. 성공하지 못했지만 영화배우 브래드 피트가 공급했던 ‘메이크 잇 라잇(Make it right)’ 재단과 함께 했던 프랭크 게리의 작품 같은 세계적 건축 작품들이 있다. 매번 전미 건축상 AIA를 수상하는 미국 홈리스지원 단체 ‘Skid Row Housing Trust’ 재단이 공급하는 공동주택도 있다. 그런가 하면 매년 각종 건축상을 수상하는 유럽의 수많은 사회적 주택들 역시 마찬가지다. BIG를 세계적으로 주목 받게 만든 저소득층 공동주택도 있고, MVRDV를 스타로 만든 네덜란드 노인 공동주택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떤가? 정치적 이슈로 등장한 사회적 주택, 공공 임대는 우리 사회에서 혐오시설로 치부되는 형국이다. 누구보다 이를 설득해야 할 정치인이 공개적으로 이를 공격한다. 서유럽의 우파 정치인이나 미국의 트럼프조차 하지 않는 발언을 일삼는다. 이건 좌·우를 벗어난 무개념 선동이다. 슬픈 것은 이런 선동에 동의하고 박수치는 이기적 심리가 존재한다. 덕분에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 주택, ‘공공’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공동주택들은 이름을 숨기고 있다.

인도의 계급사회를 지적할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 건축의 계급을 극복해야 한다. <오징어 게임>에 숨어 있는 경제적 계층의 위상을 도시와 건축에서는 없애야 한다. 그래야 인간의 착한 본성이 인정받을 수 있다. <오징어 게임>의 마지막에서 우린 다음과 같은 희망을 볼 수 있다. 그래도 인간은 희망의 존재라는……. 슬프면서도, 아프면서도 <오징어 게임>의 핑크색이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어쩌면 이런 인간성에 대한 희망 때문인 듯도 싶다.

 

글. 홍성용 Hong, Sungyong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 본지 편집국장

홍성용은 건축사(KIRA), 건축공학 박사, 서울시 공공건축가로 건축의 크로스오버를 오래 전부터 주장했다. 국내 최초의 영화와 건축을 해석하는 <영화속 건축이야기, 1999> 을 시작으로 여행기, 마케팅을 연구했다. 건축사로 최초의 경영서적인 <스페이스 마케팅 2007>을 삼성경제연구소를 통해 출간하였고, 도시경쟁력 연구인 <스페이스 마케팅 시티, 2009>, 그리고 2016년 <하트마크>를 출판했다. 신사동 임하룡씨 주택, 근생 멜론 등 다수의 건축작품과 인테리어 작품들이 있다.
ncslab@ncsarchitect.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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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숨 쉬는 건축여행 가치에 대한 소망

A living and Brenthing Tourism for Architecture
A Hope to preserve Architerure Valuee

일제 강점기의 건축유산을 어떻게 볼 것인가?

현행 문화재 보호법은 개화기부터 한국전쟁 전후까지 만들어진 근대문화유산 가운데 보전·활용가치가 큰 유산들을 등록문화재로 분류해 관리하고 있다. 근대문화유산 문화재 등록 제도가 2001년 3월에 개정되면서 법률적 보호근거가 마련되었다.

일제 식민통치 침략전쟁 민족문화 말살 및 경제적 수탈로 이용된 동산 또는 부동산은 문화재로 지정하거나 등록될 수 없으면 철거가 가능하도록 되어 있으며, 기존 등록된 것도 말소가 가능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다만 역사적 교육적으로 보존 및 활용가치가 있다고 인정될 경우 역사적 보존 자료로 지정하게 됐다. 문화재 관련 학계는 이와 관련 “치욕의 역사도 지켜야 할 우리 역사”라며 “문화 선진국들은 치욕적인 인류의 과오를 보여주는 유산 등 소위 ‘네거티브 유산’들을 적극적으로 보전함으로써 쉽게 잊어버리는 대중에게 산교육의 장이 되게 하고 있다”면서 비판하고 있다.

현행 제도는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축물을 보전·활용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 문화유적을 관광자원화 하려는 일부 지방단체의 반발도 크다.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과 옛 나가사키18은행(現 구 일본제18은행) 군산지점 등 일제 관련 유적이 많은 군산시는 “한국 근대사의 애환을 간직한 문화유산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냐”라며, 역사적 교훈을 준다는 점에서 국가적 차원에서 보전해야 한다고 맞서고 있다. 그동안 서대문형무소 복원, 동대문운동장 철거, 하룻밤 사이에 철거된 을지로 4가 국도극장 등의 근대건축문화유산 보전과 활용방안에 대하여 많은 갈등을 빚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근대 건축유산들을 어떻게 보전 활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건축역사 학계에서 오랫동안 제기되어 왔다.

예산군에서 예산읍 주교리 239-1 외 7필지 농업미곡창고의 인테리어 필요성을 찾고자 실측한다는 정보에, 예산군 비서실 연결을 통해 관련부서인 도시재생과 김상혁 팀장과의 대화를 나눴다. 그 과정에서 학술의 가치를 찾을 수 있는지 의견을 제시하고, 약속한 날짜인 올 9월 3일 학술의 가치와 건축의 기법을 알고자 서울특별시건축사회 사진 답사회장인 삼정환경건축의 김창길·엄성용 건축사를 대동해 현장을 방문했다. 오전 10시에 사무실을 출발하여 예산에 12시경 도착했고, 점심 식사 후 현장을 찾았다. 예산군 김상혁 도시재생과팀장, 김상훈 주무관과 주교리 장정순 이장님이 반갑게 맞이하며 현장을 안내했다.

예산 일제강점기 시대(1910~1930년대) 건축물 © 忠淸南道 禮山郡 『禮山郡々勢一班』 1937年

일제 강점기 건축물 활용방안 발굴조사

조사일 2021년 9월 3일
조사자 김득수

 

건축개요

1. 건 축 주 예산군, 관리부서–도시재생과 팀장 김상혁, 주무관 김상훈
2. 대지위치 충청남도 예산군 예산읍 주교리 239-1 외 7필지
3. 주요용도 지상 1층 2개동 창고(농업) 1개동 철거년도 확인
4. 주요구조 철근 콘크리트 벽식구조, 목조왕대공트러스 양철(아연즙평가건) 지붕마감
5. 주요마감 외부–시멘트몰타르위 뿜칠, 내부-석고 회반죽, 변화과정-없음
6. 현재면적 가동 약 330㎡(100평), 나동 약 330㎡(100평), 중간연결동 약 198㎡(60평)
7. 최고높이 7.42m
8. 건 폐 율 농업창고설치 2개동 현존 1개동 약 330㎡(100평) 철거
9. 준공년도 1925년 농업창고 약 661㎡(200평) 준공
1931년 7월 착공준공 창고건평 330㎡(100평) 증축

 

전문기술협력

1. 실측 설계 조지현 건축사_주.청운 건축사사무소 / 충청남도건축사회
2. 현장 사진 김창길·엄성용 건축사_삼정환경 건축사사무소 / 서울특별시건축사회
3. 전기·소방 서기봉_소방 설비기술사
4. 인테리어분야 –
5. 종합현장조사 김득수 건축사_종합건축사사무소 S.S.P. 삼대 / 서울특별시건축사회
6. 참여대학교수 김영재 교수_한국전통문화대 문화재수리기술학과

배치도 © 조지현 건축사

예산역 농업창고(1925)
© 忠淸南道 禮山郡 『禮山郡々勢一班』 1937年

주교리 농업창고 330㎡ 증축(1931년 준공)

1909년 『韓國各府郡 市場 商況 調査書』
(한국각부군 시장 상황 조사서)

내포지역(內浦地域)에 장항선 철도가 부설(1922년 6월)되기 10년 전 예산은 농산물의 집산지요, 도매의 신상(臣商)들이 집거(集居)하고 있던 상업의 요충지였다. 예산은 당시 도청소재지였던 공주보다 경제와 금융면에서 성황을 이루며 충남 서부지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그 배경을 물동 거래의 액면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909년에 발행된 『한국각부군 시장 상황 조사서(韓國各府郡 市場 商況 調査書)』를 보면, 도청소재지인 공주는 지방행정의 중심지일 뿐더러 기본단위가 되는 면(面)의 수 21면에 그 당시에 인구가 100,578명이나 되는 반면, 예산은 12면에 19,895명에 불과한 협소한 면적에 소수의 인구밖에 안 되는 예산의 연간취인액(年間取引額)은 310,000원으로, 공주의 260,000원과 비교해 볼 때 큰 차이로 높게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로써 내포지역에 경남철도가 1922년 6월에 부설되기 10년 전에 예산은 이미 농산물의 집산지이자 금융경제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문화재 연혁 및 성격

예산 미곡창고는 당시의 목구조 건축기술로 2층도 짓기 어려운 시기에 구하기 힘든 건축자재, 장비와 숙련된 기술을 요하는 기능공 부족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1922년 경남철도가 천안에서 예산까지 개통되면서 1925년 미곡창고 2개동 약 661제곱미터(200평)가 준공됐다. 그 이후 1개동 약 330제곱미터(100평) 증축이 1931년 완성된 건축물로, 독특한 형식의 철근콘크리트 벽식구조에 정교한 목조 왕대공 지붕트러스 건축기법을 구사하였다. 미곡창고의 기능에 걸맞은 전·후면 상하부의 환기창, 지붕의 환기시설 및 벽체 내·외부의 작은 습도조절 환기구 설치로 전형적인 미곡창고 기능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완성되었다.

철도 개통 이전에 인천과 서울에서 미곡집산지대인 군산을 연결하는 해로의 중간지점에 있는 선장 포구는 내포로 들어가기 위한 교두보 역할이었다. 1922년 6월에 경남철도가 부설되면서 인천으로부터 직접 운송으로 철도를 통한 다량의 물류 수송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물길을 통한 기존의 물품 운반로는 쇠퇴했다. 경남철도는 1922년 천안에서 신례원(예산)까지 개통되며 1924~1925년에 광천과 보령까지 개통되었고, 1931년에 이르러 군산까지 완전 개통되었다. 철도 개통 이후 통계에 의하면, 1920년에서 1935년까지 예산군의 인구는 약 2만 8,000명이었으며 그중 일본인은 360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 것을 기록에 의하여 확인할 수 있다.

1931년 철도개통을 계기로 세워진 예산군 미곡보관 창고건축물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물자가 수탈되었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건축물로, 학술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생각에 당시의 미곡창고에 대한 건축물의 이력, 이용현황, 현황조사 및 각종 문헌을 조사하였다.

1997년도 사진 © 김득수 건축사

2021년도 현재의 모습

창고로 방치돼 있던, 옛 일제강점기시대의 수탈의 역사를 간직한 증거물로 100년 가까이 보존된 미곡창고. 오랜 세월이 고여있는 듯 정적이 배어 있어 들뜬 마음으로 들어선 창고의 깜깜한 내부, 그 넓은 공간에 높이 매달려 있는 희미한 천정 등은 고작 3개뿐으로, 조사에 임하는 것은 그리 쉽지가 않아 보였다. 다행스러운 것은 사진답사 전문 분야인 작가가 아니면 해결할 수 없는 사실로 나타났다. 건축물의 외벽과 내벽마감재 지붕목조 트러스 등의 보수 흔적이 없으며, 지붕, 천정, 수동식 환기구 및 환기창 등이 원형 그대로 남아 있어 1925년도 준공 건축물로 믿을 수가 없었다.

출입구 위 작은 습도구멍 / 내부하부 환기장(오름내림창 수동식)

콘크리트 벽식구조에 외벽, 내벽의 작은 구멍은 항온·항습 기능을 위한 숨통으로 보였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습기를 차단하고 공기순환 역할을 하는 하부 환기구 및 외부, 내부 하부와 상부의 통풍구 단면구조는 방법용 환봉 설치 병충해를 막는 방충망으로 구분하고 있다. 미곡창고로써 완벽한 구조 상태로 잘 보전되어 있다(사진 참조).

내부하부 통풍환기창 및 상부환기창

환기구 및 벽체 내·외부 습도조절 확인 사진

지붕상부 천장의 수동식 환기구 및 환기창. 미곡창고 건축의 전형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사진참조).

내부상부에 설치한 창

외부상부에 환기창

벽체구조 및 목조트러스 극요단면도s=/50 © 삼정환경 건축사사무소

확대 트러스 평면도 S : 1/60 © 삼정환경 건축사사무소

예산 농업미곡보관창고는 독특한 형식의 철근콘크리트 벽식구조로 그 상부에 도리 방향으로 상호 연결된 목조 왕대공 트러스를 정교한 지붕으로 가설한 일제강점기 창고 건축물로 매우 특이한 건축시공 기법을 볼 수가 있다(사진 참조).

 

동간 연결된 공간 모습

가·나동 연결부분 전개도

© 매일신보

인천, 군산, 목포 등 개항 도시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현재 근대건축물 보전 운동이 일어나 도시재생사업으로 보존 및 개·보수하여 관광지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논산 강경지방은 근대건축물이 집중적으로 남아있는 일대를 강경근대문화거리로 조성하여 많은 관심을 받고 있으며, 관광지로서 지역 경제 활성화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이제 막 연구·조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충남 예산 미곡창고도 근대 건축문화유산의 보전과 지역경제 활성화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인천광역시, 군산시, 충남 논산시 강경읍, 예산군 예산읍에 존치되어 있는 개항장 일대 근대건축물, 폐 장항선 철로, 간이역 등 기타지역은 근대산업시설을 공연장, 미술관 등 문화공간으로 활용하는 사업을 지방자치권에서 추진하여 활용하면서 많은 호응을 얻고 있다.

당시의 건축기술로 2층 구조의 목조 건축물을 짓기 어려운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구하기 힘든 건축자재, 장비 등 숙련된 기술을 필요로 하는 기능공 부족 등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 완성된 목조 건축물이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다는 것은 해당 예산군 관계자와 건축물에 대한 애착이 있는 건축사의 사명감에 따른 소신이라고 본다.

결론적으로 건축은 과거 시대를 거쳐 변화해온 다양한 양식의 건축물로 현재, 미래를 돌아볼 수 있는 시대의 거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는 보전 가치가 높은 근대건축문화 유산을 적극 발굴하여 현황을 파악하고 조사하여 체계적인 보존 및 활용방안을 마련하고, 친환경 및 재활용 자재를 사용해 ‘환경과 공존’을 만들어 문화·예술적 가치를 알리고 정서적 휴식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적극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글. 김득수 Kim, Deuksoo 종합건축사사무소 S.S.P.삼대

김득수 종합건축사사무소 S.S.P.삼대 대표·건축사

영등포구지역건축사회 회장(3회 연속), 서울특별시건축사회 회장 직무대행, 대한건축사협회 이사·감사 등을 역임하고, 대한건축사협회 50년사 발간위원장을 지냈다. 서울 영등포구, 동작구 건축·민원조정 위원, 에너지관리공단 건축·도시·관광단지 심의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예산읍 초대 명예읍장으로 위촉(1997.02.15.~2006.12.03.)된 바 있다. 서울특별시 시장 표창 5회와 대통령 표창(제200398호)을 받았으며, ‘일제시대 소읍도시 형성과정에 관한 연구’, ‘일제강점기 근대도시의 도시공간 변화 특성에 관한 연구’ 등의 논문을 작성했다.
a0106345956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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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의 등을 타고 가면서 신비로운 선경에 빠져들다

KIRASEOUL Mountaineering Club’s Special Hiking
Hiking notes of Seoraksan Mountain Gongnyong Ridge
Mesmerized by the mystical scenery while climbing the Gongnyong Ridge

서울건축사 등산동호회 특별산행, 설악산 공룡능선 산행기

산행 후 처음으로 드러낸 공룡의 모습

까마득히 오래전 젊은 시절에 올라보고 처음인 공룡능선. 산사람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지만, 설악산은 물론 우리나라 산 중에서도 가장 난코스로 알려진 곳이다. 산행 전날인 10월 8일 오후 서울시건축사회 등산동호회 25명의 회원들과 함께 설레는 마음으로 설악을 향해 출발했다. 그런데 비가 추적추적 내린다. 속초에 있는 친구에게 확인해 보니 사흘 째 계속 비가 내리고 있고 다음 날도 비 예보가 있어 조금은 걱정이 됐다.

다음 날 새벽 2시에 기상. 예상보다 더 많은 비가 주룩주룩 쏟아진다. 백두산 종주 때의 악몽이 떠오른다. 그러나 이런 정도로 포기할 수는 없다. 동료들과 함께하니 서로 의지가 된다. 우중산행 준비를 갖추고 3시에 소공원 매표소를 통과하면서 본격 산행을 시작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 계곡물 소리가 우레처럼 들리고 빗물이 넘쳐 길을 막는다. 그러나 우리가 가는 길은 막을 수 없다.

3.7킬로미터를 쉬지 않고 걸어와 4시에 비선대 갈림길에 도착했다. 잠시 숨을 고른 후 마등령 삼거리까지 3.5킬로미터 구간의 가파르고 거친 돌길을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걸어 오른다. 헤드랜턴 불빛과 스틱에 의지하면서 한발 한발 조심조심 걷는다. 여기서 속도조절을 잘못하면 공룡능선 완주가 어렵다. 산행에서는 처음이 힘들고 중요한데, 이 구간이 가장 힘들다고 다들 입을 모은다. 그래도 나는 평소의 단련으로 큰 어려움은 없었다. 어둠 속에서 서서히 날이 밝아 온다. 다행스럽게도 비가 조금씩 잦아들면서 서편 하늘에 별 하나가 반짝인다. 지리산에서 새벽에 보았던 금성이다. 그리고 운무에 휩싸인 암봉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아! 소리가 절로 나오는데, 그것도 잠시뿐 다시 구름에 가리고 비가 온다. 계속되는 폭우 속에서 잠깐이나마 보여준 백두산 천지의 모습도 그랬다. 하늘은 뿌연 곰탕이고 길은 죽탕이다. 등산화는 이미 속까지 젖어있고 골짜기마다 빗물이 모여 폭포를 이룬다. 6시 10분, 동료들과 모여 휴식을 취하며 간식을 먹었다. 다시 출발하여 얼굴 형상의 큰 바위가 마주 보고 있는 금강문을 지났다. 마등령에 오르는 마지막 계단, 길옆으로 마가목 붉은 열매가 눈길을 끌며 단풍을 대신한다. 고도를 높일수록 서늘한 기운이 에워싼다. 비에 젖은 몸은 점점 더 무겁지만 마음은 바람처럼 가볍다. 걸을수록 몸이 깨어나고 생각은 맑아진다. 오감이 깨어나는 즐거움이다. 자연과의 깊은 교감은 그대로 충만한 기쁨이 된다.

단체 사진(앞줄 가운데가 필자)

7시 30분, 마등령 삼거리에 도착하여 오세암 가는 쪽 공터에서 김밥으로 아침을 먹었다. 다행히 비가 멈춰주었다. 그러나 기온이 떨어지고 추워 다시 바람막이 옷을 꺼내 입으려니 빗물과 땀에 젖어 있다. 여기서 후미를 기다렸다가 합류하여 단체사진을 찍고 8시 10분에 비로소 공룡능선을 타기 시작했다.

 

마등령 삼거리에서~ 나한봉~ 큰새봉~ 1275봉 넘어 신선대로

마등령 삼거리에서 시작되는 공룡능선은 무너미고개까지 5.1킬로미터인데, 처음엔 비교적 순탄한 편이나 갈수록 험해진다. 첫 번째 봉우리인 나한봉을 향해 가면서 너덜길 위 작은 고개에 올라서니 산 아래로 운해가 피어오르는 모습이 가히 선경이다. 구름바다 위에서 내가 마치 하늘에 떠 있는 기분이다. 다시 내려가다가 흰색 빛이 감도는 바위에서 사진을 찍으러 올라갔던 여자분이 굴러떨어지는 것을 목격했는데, 다행히 배낭을 메고 있어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벌써 단풍은 지고 낙엽이 되어 고목 아래 쌓인 채 비를 맞고 있다. 9시 40분에 나한봉(?)을 지난다. 그리고 10시에 일행들과 합류하여 길목에서 잠시 쉬며 간식을 먹고 이동, 20여 분 후 킹콩바위 앞에 서게 되었다. 바위의 형상이 거대한 킹콩을 닮은 암벽을 오르며 바위와 한 몸이 되어보기도 했다. 울퉁불퉁 제멋대로 솟은 바윗길 걸음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모습의 능선길에서 수문장 같은 바위 사이를 지나자 멋진 비경이 펼쳐진다. 구름 사이로 드러난 옹골찬 바위에서 견뎌온 세월의 아득함이 느껴진다.

1217미터 고개를 넘은 다음 11시에 공룡능선의 최고봉인 1275봉에 도착했다. 1275봉은 공룡등뼈의 중심이며 공룡의 맹주로 불린다. 전체 거리상 중간 지점에 해당하고, 오르내림의 연속 중간에 쉬거나 빠져나갈 길이 없다. 거친 듯하면서도 절묘한 모습의 웅장한 자태, 강인함 가운데도 기품이 서려있다. 신성하고 신령스러운 설악산은 월출, 주왕산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암산으로 꼽힌다. 깊고 가파른 험준한 산세에 격렬한 몸짓의 암릉에서 강한 기운이 느껴진다.

구름 사이로 드러난 암봉들

1275봉을 지나고 600미터 정도를 내려갔다 다시 올라가야 한다. 신선대까지는 먼 거리다. 얼마쯤 내려가다 보니 마치 촛대처럼 솟은 바위 옆을 지나게 되었다. 이쪽은 다른 곳보다 골이 깊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법이다. 물이 흐르는 급경사 내리막길 암반 옆으로 난간대가 설치되어 있다. 다시 위로 올라갔다 내려가는데 위험 구간이다. 이렇게 중간중간에 위험한 구간이 많다. 철재 난간대가 있긴 하지만 경사가 급하고 빗길이라 미끄러운 바위를 조심해서 넘어야 했다. 11시 40분, 고사목이 누워있는 길목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었다. 주변에 멋진 자태의 소나무 한 그루와 뒤로 흐릿하게 보이는 산봉우리가 그림처럼 아름답다. 다시 이동하면서 불쑥 솟은 바위와 의자처럼 생긴 바위에도 올라가 보았다.

다시 또 걷다 보니 보이는 것마다 절경이다. 앞을 보면 비경이요, 돌아보면 선경이다. 고사목이 길을 막고 있는 곳을 빠져나와 다시 내리막길을 걷는다. 공룡이 알을 품고 있는 모습의 바위를 보며 내려가던 중 앞에 가는 우리 일행 두 명이 동시에 낙상 사고를 당하는 불상사가 발행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가벼운 타박상에 그쳤지만, 이번 산행의 유일한 안전사고다. 작은 봉우리를 또 한 번 오르내린 다음 이제 신선대를 코앞에 두고 가파른 마지막 오르막이다. 아무리 멀고 힘든 길도 한발 한발 내딛다 보니 어느새 목표에 도달할 수 있었다.

멋진 소나무와 바위

바위 위에서 찍은 사진

공룡능선의 최고 비경 신선대에 오르다
(국립공원에서 뽑은 경치 100선 중 공룡이 제1경)

오후 2시, 드디어 공룡능선의 시작이자 끝인 신선대 정상(1,242미터)에 올랐다. 신선이 산다는 이름대로 신비로운 기운이 감돈다. 온통 사방이 운무에 쌓여 있는 가운데 언뜻언뜻 보이는 산봉우리들이 마치 거창한 한 폭의 수묵화를 보는 것 같다. 설악산 최고의 비경이자 대한민국 제1경에 손색이 없다. 맞은편의 1275봉 뒤로 마등령, 세존봉, 천화대의 준령 범봉 등 기암들이 구름에 가려 있지만 그래도 긴장과 희열로 짜릿한 순간이다.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람도 자연도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져 있을 때가 더 신비로운 법이다. 흐르는 구름 따라 일망무제로 펼쳐지는 산속에 산이 있고 그 속에 내가 있다.

감격스러운 멋진 풍광은 최고의 보상이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다. 눈도 커지고 생각도 커지고 마음도 커진다. 끝없이 굽이치는 장대한 산줄기, 저 첩첩이 이어지는 산 뒤로 펼쳐지는 구름 사이에 솟은 산봉우리들… 이런 곳이 바로 신선의 세계(仙界) 아니겠는가? 이건 하늘이 준 선물이요 조물주의 무진장(無盡藏)이다. 현실과 이상세계를 넘나드는 자연의 경이로움이다.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인생이 그러하듯 행복 또한 바로 지금(now) 여기(here)에 있다.

신선대에서 바라본 모습(1275봉 뒤로 마등령, 세존봉, 천화대의 준령들이 흐릿하게 보인다.)

신선대 정상에서 촬영한 사진

이제 공룡능선 산행의 마무리를 위해 아쉬움을 뒤로하고 무너미고개로 향한다. 오르고 내리는 재미가 있는 공룡능선 끝 지점 무너미고개(1,110미터)에서 가파르게 내려오는 5.5킬로미터 구간의 천불동계곡은 지리산 칠선계곡, 한라산 탐라계곡과 함께 국내 3대 계곡에 속한다. 계곡 일대에 펼쳐진 바위가 천 개의 불상과 비슷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금강산이 1만 2천봉이라면 설악산은 1만 2천골이다. 그만큼 골이 깊고 계곡이 많다. 세월이 흘러도 멎지 않고 흐르는 계곡물소리, 그리고 하늘에서 물이 쏟아지듯 우렁차고 장쾌한 천당폭포 앞에 서니 지친 몸의 피로가 씻기고 머리가 맑아진다. 이렇듯 산에서는 영혼을 위로받고 마음에 위안을 얻을 수 있다. 주변은 여기저기 단풍으로 물들고 있었다. 소신공양 같은 붉은 단풍, 가을 속으로 풍덩 빠져드는 느낌이다. 단풍은 바람 따라 흐르고 낙엽은 이리저리 흩어진다. 바람에 가을 냄새가 묻어난다. 봄이 희망이라면 가을은 역사다.

천불동계곡

왼편으로 보이는 양폭대피소 이후부터는 비교적 평탄하지만 비선대(오후 5시 25분)까지 내려오는 동안에도 하염없이 걷고 또 걸어야 했다. 전에 같았으면 귀면암, 장군바위 같은 것을 보고 감탄을 했을 텐데 지금은 그저 더 늦기 전에 빨리 내려가는 게 능사다. 꼭두새벽에 처음 출발(오전 3시)했던 소공원 쪽으로 서둘러 내려오니 어둠이 내린 저녁(오후 6시)이었다. 약 23킬로미터 거리를 장장 15시간 걸은 것이다. 1시간 이상 후미를 기다렸다가 저녁도 못 먹고 귀경길에 올라야 했다.

 

산행을 마치고 나서

실패한 여행은 기억이 안 나는 여행이라고 했듯이 산행 또한 그렇다. 오래전 동료 건축사들과 함께한 폭우 속의 일본 북알프스 종주와 눈보라 치는 설원 속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처럼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특별한 산행이었다.
‘위험한 인생은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 인생’ 이라고 했던가. 흔들린 순간, 고통스런 시간도 있었지만 동료들과 함께 서로 격려하면서 묵묵히 걷다 보니 모두 낙오자 없이 완주를 하게 되었다. 일곱 개의 크고 작은 고개를 넘으며 그 과정에서 한 걸음 한 걸음이 무섭고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인생길도 이와 같다는 생각이다. 이 한 걸음이 인생의 한순간이 될 수 있는 소중한 시작이자 새로운 충전의 시간이었다. 경험의 폭이 행복의 깊이를 결정하고 고통의 폭만큼 인생의 폭도 커질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는 산행이었다. 그리고 자연 속에서 인간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반면에 얼마나 강인해질 수 있는지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 공룡능선,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인 공룡능선, 지나온 생각만으로도 아득하고 또다시 설레는 공룡능선이었다. 마치 공룡이 살아 꿈틀대는 듯한 암봉들의 연속, 하늘과 맞닿은 듯한 봉우리에 올라섰는가 하면 다시 깎아지른 벼랑길을 내려가야 했던 기억. 거대한 공룡의 등줄기 한가운데 거친 등위에 올라 바라보던 풍경이 그립고 암릉이 파도처럼 출렁이는 공룡능선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글. 이종호 Lee, Jongho 시원 건축사사무소

이종호 시원 건축사사무소·건축사

연세대 공학대학원을 졸업(공학석사)했다. 현재 시원건축사사무소 대표이자 서울특별시건축사회 풍수지리연구회 회장을 맡고 있다. 서울특별시건축사회·대한건축사협회 등산동호회 회장을 역임했다. 제1회 간향건축문학상 수상 및 행정중심복합도시(세종특별자치시) 수필 공모전에서 당선(국무총리상)하였고, 노원문화정보센터 등의 현상설계에 당선된 바 있다.
leewoonpa@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