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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사가 아마추어 취급받는 대한민국 설계공모전

Korea design competition
where architects are treated as amateurs

나는 건축사다. 그리고 박사학위가 있고, 정부 추천도서를 3권이나 저술했다. 여러 건축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설계공모에 당선되어 설계를 진행하고 있다. 또 30년 넘게 현업에서 실무 중이다.
대한민국 사회에 묻는다. 나는 프로인가, 아마추어인가?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된 이유는, 대한민국 여러 공공기관에서는 건축사를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조달청을 비롯한 많은 관들의 행태를 보면 우리나라 건축 수준이 왜 인정받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그 저변에는 현장에서 수십 년째 일하는 경험이 풍부한 건축사들을 업자 취급하는 사회 인식이 있고, 그런 인식으로 공공건축을 진두지휘하는 기관들이 많다. 논란의 여지가 많았지만, 실력이 검증되고 입증된 공공건축, 특히 최근 서울에서 몇 년간 진행된 공공프로젝트는 이전과 확연한 차이와 성과를 보여주었다. 프로젝트 서울이 한 예이다. 이런 성과의 이면에는 공공건축 설계공모의 심사를 담당하는 심사위원들의 인적 구성이 큰 이유를 차지한다. 현업에서 다수의 설계를 진행한 대학교수들과 다양한 연령층의 현업 건축사들이 치열한 토론과 논쟁을 통해서 당선작을 뽑고 있다.
하도 말 많은 설계공모인지라 영상을 생중계도 하고, 심사 참관 신청을 받기도 한다. 물론 심사위원과 생각과 관점이 달라 공모에서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고, 그 이면의 또 다른 부조리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현업 건축사가 완전히 배제된 조달청이나 기타 기관의 설계공모전에 대한 소문이 깨끗하지 않고, 실제 각종 부정부패로 종종 수사도 받고 법적 징벌도 받는 경우가 많다. LH의 설계공모나 각종 공기관의 설계공모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내가 분노하는 것은 현업에서 프로로 일하는 수많은 건축사들의 경력과 경험에서 비롯된 피드백이 보다 나은 공공건축을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배제되는 것이다. 현업 건축사들은 충분한 안목과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현업 건축사들의 설계공모 심사위원 배제에 대한 발주처들의 거부 이유는 황당을 넘어 참담하다. 이해당사자의 심사는 부정할 수 있다는 핑계다.
프랭크 게리, 안도 다다오, 알렉한드로 아라베나, 이토 도요… 이들은 여전히 일선에서 활동하는 현역들이다. 세계적인 스타아키텍트(STARCHITECT)인 이들은 이해당사자라는 이유로 심사위원에 배제되지 않는다.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건축설계공모 심사에 현업 건축사들이 반드시 참여한다. 물론 실적과 경험으로 검증된 자들이다.
왜 조달청과 LH 등은 현업 건축사들을 배제하는가? 가끔 수준 낮은… 등의 자존심 상하는 표현도 들려온다. 그렇다면 당선된 경험이 있거나, 각종 상을 수상한 건축사이거나, 하다못해 법에 표현된 ‘역량 있는 건축사’들을 심사에 청빙하면 되는 것 아닐까?
물론 심사위원으로 추천하는 건축사 단체의 역할도 제대로 해야 한다. 지인 추천 등의 검증되지 않은 방식으로는 그동안의 비난과 폄하를 극복하기 어렵다. 더욱 까다롭고 엄격하게 해야 한다. 이런 자아비판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설계공모에 현업 건축사들이 단 한 명도 없는 공모에 분노가 느껴진다.
심사위원에 단 한 명의 건축사도 포함되지 않은 설계공모는 모든 현업 건축사들이 보이콧해야 하는 것 아닐까?

 

글. 홍성용 Hong, Sungyong 본지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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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후 도시를 위한 방향성 담은 종합 마스터플랜 만들 것_강병근

Drawing up a comprehensive master plan
incorporating the direction of cities for the next

강병근 Kang, byeonggeun 서울시 총괄건축가·건국대학교 명예교수

작년 7월, 강병근 건국대 건축공학과 명예교수가 제4대 서울시 총괄건축가로 위촉돼 활동 중(임기 2년)이다. 서울시 총괄건축가는 도시와 건축관련 정책, 디자인 등 시의 건축사업 전관을 총괄 기획·조정한다. 강병근 서울시 총괄건축가는 지난 5월 18일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100년 후 도시가 나아갈 방향을 담은 마스터플랜을 계획하는 것이 급선무라 밝히며 관련 계획을 수립 중이라고 밝혔다. 또한 체계적 시스템의 부재로 인한 아쉬움을 지적하고, 서울건축기본계획 등의 시스템 구축과 공공의 도시공간을 위한 실현 방안 등을 계획·정리 중이라고 밝혔다. 아울러 단순한 행정기획이 아닌 선제계획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중앙·지방정부부터 기초단체까지 시티아키텍트, 즉 시티플래너가 있어야 한다고 언급했다.

 

# 향후 100년 내다보는 서울시 종합 마스터플랜 수립 중…
제도, 시스템 정비 작업 선행돼야

홍성용_그간 서울시 도심재개발, 도시디자인 혁신을 위한 원칙, 디자인 규정을 세우는 작업을 추진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강병근_일단 제도가 하나씩 정비돼야 실현가능한 것들이 많습니다. 서양에서는 시스템이 제대로 구축돼있어서 그대로 준비하고 움직이면 되는데, 우리나라는 그러지 않다 보니 시행주체에 따라서 그때그때 적응하고 대응해야 하는 것들이 많아 어려움이 큽니다. 어떤 시스템이 체계를 갖추면 현실에 맞게 보완·수정하면 되는데, 우리는 새로운 것을 자꾸 만들다 보니 낭비가 큽니다. 시작하다 얼마 되지 않아 사라져버리기도 하죠. 연속성을 가지면 더 발전됐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제도·시스템을 정비 중입니다.

홍성용_총괄건축가로서 실무체계 안으로 들어와 활동하시면서 그동안 느꼈던 점과 앞으로 진행하고자 하시는 것들을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강병근_개인적으로, 외부에서 자문이나 위원회 등으로 참여했던 것은 주제·과제단위였기에 어떠한 전체 틀을 보는 덴 한계가 있었다고 봅니다. 그 때는 조각을 보고 이야기를 했다면, 서울시 총괄건축가로 위촉을 받아 거꾸로 관의 입장에서 보니 그 조각 상호 간의 관계 맺기를 할 때 어떤 퍼즐이 모아지면 나중에 하나의 그림이 될까에 집중하게 됐어요. 우리가 그걸 흔히 마스터플랜, 종합계획이라고 하잖아요. 어떤 종합적인 큰 그림 하에 이 조각들이 붙어있는지 찾다 보니, 우리 사회가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전체의 큰 그림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국가로 보면, 국토계획법이 있는데 국토이용계획이 없다는 거죠. 그동안은 필요한 지역을 조금씩 오려서 지구단위계획이란 툴을 가지고 부분적으로 종합계획을 수립했었거든요. 그래서 서울시 총괄건축가를 맡게 되고 나서 ‘아, 이렇게 돌아가는구나’ 하는 것을 이해했다는 게 개인적으로 가장 큰 변화이고, 그 틀에서 제일 먼저 100년 후 우리 서울이 이런 모습으로 가야 한다는, 서울시의 종합 마스터플랜을 짜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현재 서울은 단시간에 팽창한 도시지 계획도시라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앞으로 이렇게 100년을 더 갈 것이 아니라, 100년 후에는 최소한 이런 모습을 갖출 수 있도록 나아가야겠다는 계획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내년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도 100년 후 서울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에 대한 국제적인 여론을 모으는 쪽으로 계획 중입니다. 내부적으로 100년 계획을 위한 토지이용계획 방향, 또 어디는 고밀로 하고 어디는 저밀로 갈 것인지, 또 도시는 어떻게 관리하고, 수로와 육로 그리고 항공수송로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계획이 누군가에 의해 시작은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 해서 저희 도시공간기획과에서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변화입니다.

강병근 서울시 총괄건축가 _ 건국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베를린공대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서울시 건축위원회, 도시계획위원회, 공원위원회 등을 다년간 역임했으며, 1997년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 제정을 이끌기도 했다.

# 단순 행정기획 NO! 선제계획 가능한 시티플래너 필요
좀 더 폭넓은 공공건축가 역할 구상 중

홍성용_2011년도에 도입된 공공건축가 제도가 10년을 넘겨 확대·개선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초기 직접 계획에 참여하셨던 전문가 입장에서, 또 현재 서울시 총괄건축가로서 의견을 부탁드립니다. 또 공공건축가와 관련해 새로운 명칭을 고민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고민 중인 새로운 명칭과 역할 범위에 대해서도 말씀 부탁드립니다.

강병근_저도 초창기부터 참여해 공공건축가 제도를 제안했었고, 팀을 이뤄 일하기도 했습니다. 원래 중앙정부나 지방정부 모두 마찬가지로 해야 할 역할이 바로 선제계획(마스터플랜)입니다. 도시에 관한 것이든 건축에 관한 것이든 선제계획을 해놓고 그 상위계획 틀 안에서 실행계획이 따라가야 해요. 선제계획, 큰 방향의 줄기가 맞다면 실행계획은 언제든 바뀔 수도 있는 거고 지역·시대 수요에 따라 얼마든지 수정·보완이 가능한 거죠. 그렇게 간다면 그 역할을 담당하는 플래너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아요.
저는 단순히 행정기획에 그치는 게 아니라 선제계획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원래는 중앙·지방정부, 기초단체까지 시티아키텍트, 즉 시티플래너가 있어야 한다고 봐요. 우리말로는 공공건축가로 부를 수 있는 시티아키텍트 중에 건축설계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도시는 어반플래너, 조경은 랜드스케이프 아키텍트 등으로 다 따로 이름을 가져갈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 시티플래너가 없으니 다 행정만 보잖아요. 그래서 선제계획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지원하자는 뜻에서 공공건축가 제도를 제안해 만들어졌고,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는데, 현재의 공공건축가는 애초 봉사 개념으로 출발했습니다. 의무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반대급부로 보수가 주어지는 것도 아니지만 관 내부에 선제기획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없으니 외부에 조직을 만들어 할 수 있는 한 지원하자는 취지로 시작된 거죠. 그런데 조직화되다 보니 위원회도 만들어지고, 거기서 무언가를 심의한다거나 하는 것은 제가 볼 땐 본래 취지와 조금 다르다고 생각되어 원래의 취지대로 돌릴 수 있는 방향을 잡으려 합니다.
명칭이나 이런 것은 구체적으로 생각한 것은 없지만, 현재 공공건축가 외에도 마을건축가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여러 분들이 계신데요. 각자 하시는 일들과 상관없이 초창기에 생각했던 공공건축가, 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지칭할지에 대한 것을 좀 더 고민하고 있습니다. 제도권 내에서 일하는 것이 아닌 외부에서의 지원 세력으로 본다면, 현재처럼 사람에 따라 언제부터 언제까지 기간별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폭넓게 많은 분들이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전체적 구상을 갖고 있습니다.

강병근 서울시 총괄건축가가 서울시의 향후 100년 마스터플랜 수립을 위한 서울시의 지형, 교통, 녹지체계 등이 담긴 지도를 가리키고 있다.

# 건축의 상위기본계획 만들고,
각 구에 총괄건축가 두고 상호작용할 수 있는 시스템 구축 목표

홍성용_공공건축가 제도가 만들어지고 나서 마을건축가 제도도 생겨났는데요. 계속 새로운 제도를 만들 것이 아니라, 말씀하신 시티아키텍트 개념을 좀 더 구체화 하는 식으로 제도를 하나로 통합해가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강병근_뭐라고 칭할 것인가, 누구로 한정할 것인가 혹은 개방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떠나 실제로 무엇을 하고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고 봐요. 해서 두 가지 시스템을 구축하려 하는데, 하나는 건축의 상위기본계획을 만드는 겁니다. 현재는 마스터플랜이 없더라도 도시기본계획이라는 상위계획이 마스터플랜 역할을 하는 거나 진배없습니다. 너무 포괄적으로 많은 것을 담고 있어서 그렇지. ‘서울건축기본계획’이라는 것을, 시스템적으로 정기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이 계획이 일방적이지 않도록 각 구나 기초단체마다 이를 시에서 내려 받아 자체적으로 마스터플랜을 짜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싶은 겁니다. 또 자치단체에서 직접 실행해보면서 보완을 바라는 점이 있으면 그걸 상위계획에서 5년 단위로 주기적으로 수정 보완해 업그레이드 하는 식으로 쌍방으로 소통한다면 쉽게 자리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서울시 총괄건축가가 있듯 각 구에도 총괄건축가가 있어야 한다는 게 제 생각이에요. 현재도 대표적으로 은평구 같은 일부 구나 지방정부에서 하고 있는데, 상위계획과 실행계획으로 나눈다고 하면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는 게 아니라 상호보완적으로 작용할 거라고 봐요. 그러면 10년 전의 기획취지 그대로 실행될 수 있다고 봅니다. 지금 프로세스 중이니까, 일단 이렇게 시스템이 구축되고 나면 당장 올 연말에 2040년까지 실행했으면 하는 서울시 도시기본계획, 건축기본계획이 어느 정도 자리 잡아 안착될 거예요.
지역마다 종 구분과 높이, 용적률, 건폐율이 각양각색이잖아요. 현재는 이걸 필지 단위로 모든 행위가 다 이뤄지는데, 그러지 말고 옛날 지구단위계획을 하듯 그 지역에 대한 마스터플랜을 짜서 매니지먼트 하란 거예요. 시가 다 하기는 한계가 있고, 각 자치구에 대한 것은 해당 구가 잘 알고 있으니까요. 이런 것을 기획하고 우리 시의 정책을 갖다 조율할 수 있는 시티아키텍트가 있다면 그게 가능해지죠. 그러기 위해 지역 혹은 단지나 필지별 사전기획을 하자는 겁니다. 인허가 때가 아니라요. 그러면 시에서도 건축, 도시, 조경, 교통, 경관을 다루는 위원회를 만들어 사전기획안을 서로 협상하는 방안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 도시공간기획과에서 공공이 원하는 도시공간이나 환경, 교통에 대한 13가지를 분류해 놨는데요. 공공이 원하는 수준에 어느 정도 도달하느냐에 따라 차등으로 인센티브를 제공하겠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유럽은 건축허가제가 아니고 신고제입니다. 책임을 지라고 라이선스를 부여한 거니까, 건축의 모든 권한을 건축사에게 주는 대신 책임도 무한으로 집니다. 그것이 제가 생각하는 올바른 시스템입니다. 우리도 그 방향으로 가는 게 맞는 것 같아요.

 

# 교통·환경 등 공공의 도시공간 위한 13개 꼭지 분류
모든 도시와 건축, 태생이 공공·공공재…건축사 권한과 책임 중요

홍성용_동의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현재 건축사 위상이 높지 않은 이유 중 하나가 책임을 지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관련해서 고민하신 내용이나 앞으로의 방향에 대한 의견을 편하게 부탁드립니다.

강병근_관에서 어떻게 공공기여를 요구하고, 또 외부에서 공공에 기여하는 것들이 연동되면 과연 우리 도시가 어떻게 돌아갈 수 있을까에 대해 환경·교통 등 도시공간에 대한 13개 꼭지를 정해 실현 방안을 만들어 놓고 있어요. 2040 계획과도 연관돼있기에, 연말이 되면 구체적인 양까지 정리해 혜택을 드리려고 하는데 의무라는 어떤 법적인 허들을 만들진 않으려 해요. 그보단 선택으로, 추가적인 이득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에 대해서 내부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모든 건축물 치고 공공재가 아닌 건축물은 하나도 없습니다. 누군가 사유 도시를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사유는 없습니다. 도시나 건축은 태생이 공공, 공공재니까요. 그렇기에 사실 모든 건축사는 공공건축가죠. 개인 건축사라는 건 없잖아요. 저는 건축사들이 자기 역할을 하기 위해 책임을 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봐요. 그래서 건축실명제도 생각 중입니다. 제도적으로는 명패를 붙이는 방식이 있는데요. 예를 들면 모든 건물에 반드시 붙이되, 그에 대한 책임을 지라는 거죠. 고대 함무라비 법전에 건축사의 책임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는데요, 너무 강렬해서 말씀드리긴 그렇지만…. 이집트 피라미드 건축 종사자의 임금 역시 어마어마했습니다. 임금을 그만큼 보장했다는 건 엄격한 책임이 주어졌다는 거거든요. 함무라비 법전의 수준까진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준하는 책임을 지는 방식으로, 권리를 확보하려면 건축사들이 무한 책임을 지겠다고 먼저 선언하고 그에 맞는 설계 요율을 요구하면 되는 거죠. 저는 독일의 요율에 따라 매년 받고 있는데, 1년에 하나만 설계해도 될 정도로 우리처럼 많이 작업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무한 책임을 져야 하니 하나뿐이더라도 피로도는 더 높을 수 있죠. 우리는 늘 누군가의 의뢰를 받아 작업하는 입장이다 보니 요구에 끌려다니는 일이 많은데, 그런 게 어딨어요. 모든 지적 소유권을 갖고 있는 건축사의 요구에 그들이 맞춰줘야지. 하지만 의견을 관철할 수 있는 권한과 설득력을 갖고 있는 건축사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힘을 합쳐서, 건축사가 원하는 건물을 설계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자는 거죠.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리고 서로 손해와 아픔이 있더라도요.
또 저는 인허가를 담당하는 관공서의 모든 부서에 건축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같은 건축사가 도면을 확인하는 게 너무나 타당하지 않나요? 그런 식으로 건축사들이 할 수 있는 외연을 넓히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 설계공모 심사 자체적 운영 제도화 중
심사 전(全) 과정 공개, 질적 향상 불러올 것

홍성용_공공건축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설계공모 심사에서 공공건축가들의 참여 비율이나 현지 건축사 참여 등에 관한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하며 심사위원 자질 논란이 많은데요. 관련해서 서울시 차원에서 일정 부분 이상의 자격을 갖춘 공공건축심사단 인력풀을 조성해 운영하고, 윤리적으로 문제 사유가 있는 경우 제한을 하는 방안은 어떨까 생각합니다.

강병근_우선 서울시 입장에서 지금까지 일정 인원의 공공건축가가 심사에 배정되던 것은 제가 오고 나서 없앴습니다. 기초단체 혹은 산하단체에서 요청이 오더라도 파견이나 배정을 하지 않아서, 심사위원은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것으로 제도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문제없이 공정성을 갖추기 위한 방안으로 제가 일전부터 이야기한 기준이 공고부터 모든 심사위원 공개, 공개된 심사위원들에게 지키지 못할 행동은 하지 않도록 윤리적 요구, 심사 현장 실시간 공유 등입니다. 현재 LH 같은 경우도 심사장을 생중계하고 있죠. 또 프로토콜을 책자로 엮어 주기적으로 일반에 공개하라고 제가 감사원에게 요청한 적 있습니다. 심사 과정이 정당하다면 채점표까지 공개하지 못할 이유가 없어요. 그렇게 해서 나오는 결과는 스스로 책임질 일이지 누가 가서 벌을 주거나 혼낼 일이 아닙니다. 문제가 있으면 도태되도록 하는 제도를 만드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되면 한두 번 정도 지나고 나면 누구를 심사위원으로 초빙해야 할지 금방 알 수 있을 거라 봐요. 그래야 공정하고 정당한 투명사회가 되는 거죠. 공개된 내용에 따라 심사위원들이 어떤 부분을 높이 평가했는지도 확인할 수 있고, 그런 부분들이 전반적인 수준을 끌어올려 질적인 향상이 생길 수밖에 없을 거예요. 예를 들어 독일에서는 설계공모 당선작뿐 아니라 미당선작과 심사평까지 모조리 실어 발간하는 잡지가 있습니다. 저도 수십 년간 사서 보고 배우고 있는데요. 스스로 객관적으로 평가한다는 게 어렵거든요. 그러니까 공개되는 내용을 통해 이런 과정을 거치면 스스로 자질을 다듬을 수 있는 역량과 사회적인 역량이 함께 키워진다고 봅니다. 이런 부분이 제도적으로 유지되면 건축할 만하지 않을까요? 독일 사회에서는 유일하게 건축사만이 비석에 직함을 새길 수 있습니다. 그 정도로 존중받죠. 건축을 대가를 받고 하는 직업군의 한 부류로만 보지 말고, 건축사가 사회적 역할을 하며 존중받는 그런 사회가 됐으면 합니다.

대담 홍성용 편집국장
글 육혜민 기자 · 사진 장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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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비평_셸터와 텐트

Architecture Criticism
Shelter and tent

캠핑은 자연 속에서 인간의 거주 환경을 조성한다는 의미에서 아마도 건축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일 것이다. 경량화, 소형화, 간편화를 치열하게 추구하는, 그리고 가격 또한 이에 상응하는 캠핑 업계의 속성은 이러한 원초적 성격을 더욱 극한으로 치닫게 한다. 이 과정은 개별 제품 간의 경쟁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개념 간의 경쟁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치열한 과정에도 불구하고 각 사물의 핵심 개념과 개념 사이의 경계는 여전히 유지된다는 사실이다. 합종연횡이 쉽게 일어날 것 같지만 경험적으로나 선험적으로 어중간한 성격의 물건들이 설 자리는 의외로 좁다. 그중에서도 셸터와 텐트는 일견 유사하면서도 엄연히 다른 그 개념적 차이를 여전히 지속하고 있는 흥미로운 사례다.

이 둘의 차이는 간단하다. ‘외기’의 차단 여부다. 셸터는 외기의 유입을 허용하는 구조물이고 텐트는 적어도 개념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간단히 ’외기’라고 썼지만, 이것은 동시에 여러 가지를 의미한다. 외기란 바깥 공기만이 아니며 그 공기가 포함하는 여러 가지, 즉 습도와 온도, 심지어 벌레, 먼지 등을 모두 포함한다. 셸터는 이처럼 공기와 함께 다른 여러 가지 것들이 모두 드나드는 것을 전제로 하는 구조물이다. 어느 정도의 비와 눈, 그리고 바람 정도를 막아 줄 뿐이다. 텐트는 다르다. 텐트는 일단 여러 가지 방법으로 외기를 차단한다. 공기의 흐름은 물론, 벌레를 막기 위한 방충망도 필수다. 환기를 위한 배려가 있으나 어디까지나 우선 차단을 전제로 하고 난 사후 조치다. 얇디얇은 한 겹의 패브릭으로 구성된 텐트의 외피가 얼마나 외기를 차단할까 싶지만 실제로 야전에서 그 효과는 엄청나다. 패브릭 안팎의 기온 차이에 의한 결로가 텐트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일 정도다. 많은 캠퍼들이 어스름한 새벽, 마치 송곳처럼 위에서 떨어지는 결로수에 맞아 본 섬찟한 경험을 토로한다.

아산 일대를 주 무대로 활동하고 있는 구국현 건축사의 아산시 농업기술센터 농기구보관창고를 보러 간 날은 초여름의 햇살이 점차로 뜨거워지고 있는 5월 말이었다. 직접 운전을 해서 갔는데, 자동차란 이를테면 냉난방 설비가 갖춰진 이동식 텐트 같은 것이다. 사실 기온 자체가 그리 높은 것은 아니어서 어느 정도 문을 열고 바람이 들어오게 하면, 즉 셸터처럼 활용하면 나름 쾌적할 날씨였으나, 속도에 의한 바람의 세기와 먼지, 소음 등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텐트처럼 창을 닫고 달릴 수밖에 없었고 결국 에어컨을 틀게 되었다. 사실 자동차라는 밀폐된 환경은 어느 정도 햇살이 뜨거워지기만 해도 내부 거주성이 급속도로 나빠지며 결국 기계의 힘, 즉 에너지를 사용하게 한다. 그래서였을까, 건물에 처음 들어섰을 때 ‘시원하다’, 그리고 ‘쾌적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밀려왔다. 적어도 그 시점에서 자동차보다는 훨씬 더 환경적 설득력이 있었다.

아산시 농업기술센터 농기구보관창고는 셀터로서의 건축이 갖는 성격을 여실히 보여주는 작업이다. 기본 철골 구조에 하부는 벽돌, 상부는 PVC 파이프를 설치하여 외기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했다. 농기구를 보관해 놓고 있다가 주로 농번기에 집중적으로 인근 지역 농민들에게 임대하기 위한 시설로서는 매우 합당한 형식이다. 그러나 이 판단이 예사롭지 않았음은 이 건물 바로 맞은편에 있는, 이 건물 이전에 지어진 같은 성격의 시설이 어떠한지를 보면 된다. 샌드위치 패널로 벽과 지붕을 온통 감싸고 거기에 창을 낸, 그러니까 전형적인 텐트 형의 건물이다. 처음 구국현 건축사에게 이 건물의 설계를 의뢰했을 때, 발주처는 이와 유사한 건물을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구국현 건축사는 텐트가 아닌 셸터의 개념을 제안했다. 단순히 다른 디자인이 아니라 다른 형식을 제안한 것이다. 바로 위에서 언급한 텐트와 셸터의 차이점 때문이며, 나아가 건축이 지어지고 사용되는 사이클의 전 과정이 모두 달라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로 건축의 모든 영역에서의 차이를 가져오는 판단이었다.

<아산시 농업기술센터 농기계보관창고> 동측 전경 © 나르실리온 포토그래피

우선 가장 눈에 띄는 것은 PVC 파이프라는 재료에 대한 색다른 해석이다. 주어진 프로그램의 성격상 외기의 유입을 허용하면서도 작업이 용이하고, 미적으로 설득력이 있으며, 무엇보다 내구성이 좋아야 했다. 거기에 추가하자면(이런 성격의 프로젝트를 한 번이라도 해 본 건축사라면 누구나 동의하겠지만) 비용적 타당성도 필수적이었다. PVC는 어떤 재료인가. 일단 가격이나 내구성 면에서는 데이터로나 경험적으로나 매우 출중한 재료다. 구국현 건축사 자신도 여러 업체들과 접촉했는데, ‘실내 백 년, 실외 오십 년’이라는 답을 들었다고 했다. 나 자신도 그간 설계해 온 건물이나 내가 거주해 오는 건물에서도 실내 건 실외 건 PVC가 별다른 외력 없이 깨지거나 분해되는 것을 경험한 기억이 없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PVC는 수많은 합성수지 중에서도 폴리염화비닐(Polyvinyl chloride)의 약자인데, 내약품성, 전기 절연성, 내수성이 우수하여 주로 파이프, 접착제, 도료 등의 재료로 많이 활용된다. 일상적으로는 각종 배관용 재료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열가소성 재료라서 열을 가하면 변형이 쉽게 일어나 적절히 가공하기 쉬운 것도 장점이다. 자외선과 저온에 다소 취약하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 건물의 구조상 재료 표면적의 대부분은 그늘 속에 자리하고 있을 것이며 비내력 재료로 사용하여 하중을 그리 받지 않으므로 현실적인 내구성에 미치는 영향은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원래 용도와는 다른 방식으로 재료를 사용한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합목적성을 발휘한다는 점, 그리고 자연광 및 인공광과 결합했을 때 창고 건축의 일반적인 기대를 뛰어넘는 새로운 미학적 경지를 보여준다는 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촌이라는 환경에서 이웃집 사람처럼 친숙한 재료를 특별한 방식으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이 프로젝트의 묘미, 나아가 어떤 통쾌함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 논의의 다음 단계로서 이러한 선택이 얼마나 밀도 있게 실천되었는가라는 문제, 즉 완성도라는 피할 수 없는 단계가 기다리고 있다. 현장에서 구국현 건축사와 주고받은 대화를 소개하는 것으로 그 이야기를 갈음하자면 다음과 같다. 일단 하단부의 벽돌 부분은 아마도 역시 PVC로 대체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장비를 움직이는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충격, 혹은 보행자의 접촉 등을 염두에 둔 처리라고 판단되지만, 건물 전체가 PVC로 구성되었을 때 오는 개념적 상쾌함이란 측면에서 다소 아쉬운 부분이었다.

<아산시 농업기술센터 농기계보관창고> 배치도 © 나르실리온 포토그래피

또 다른 부분은 기하학적 엄정함에 대한 것이다. PVC처럼 일상적인 재료를 특별하고 귀하게 다루는 것은 건축의 묘미다. 그런 재료일수록 기하학적 엄정함과 결합했을 때 그 어떤 고가의 재료보다 더 고결한 느낌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이 건물에서는 철골 부재의 각도와 PVC의 적층된 각도 사이의 불일치가 그런 점을 다소 아쉽게 한다. PVC의 단면은 원형이므로 이것을 자연스럽게 적층했을 때 얻어지는 각도는 60도, 즉 정삼각형이 된다(물론 다른 방식으로 쌓는다면 다른 각도를 얻을 수도 있다.). 그런데 현재 이 건물에서 철골 부재의 각도가 이와 맞지 않다 보니 부분적으로 PVC를 쌓는 방식이나 각도가 달라지고 철골 부재와의 정합성도 어긋나게 된 점은 아쉽다. 전반적인 효과와 기능이라는 점에서는 매우 훌륭하지만 부재와 부재를 서로 연결시켜 나가는 텍토닉이라는 궁극의 진검승부에서는 다소 미흡한 점이 있는 것이다. 이런 논의는 건축 전문가들에게만 유효한 것이 아니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으나, 사실상 이런 측면을 간과하고 인류의 건축사를 논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현장을 안내해 준 건물 관리인, 즉 발주처 공무원은 이 건물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사용상 이렇다 할 문제가 거의 없고, 외관도 아름다우며, 게다가 전반적인 공간 구성은 농촌 헛간의 2층 구조와도 닮아 있으니 새롭지만 여전히 친숙하다는 것이었다. 그 짧은 말속에 전통과 근대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기본적인 생각 또한 담겨 있는 것 같아서 흥미로웠다. 하단부에 설치되어 있는 창문은 인허가 과정에서 이 건물을 ‘무창층’으로 해석한 지역 관청의 입장이 다소 엉뚱하게 반영된 것인데, 이 역시 본질적으로 셸터를 여전히 텐트라는 입장에서 바라보려 했던 습관이 다소 코믹하게 드러난 결과일 것이다. 구국현 건축사의 이 작업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이 얼마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지, 그리고 그것이 오히려 얼마나 더 사물과 건축의 핵심에 접근하는 좋은 통로가 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유쾌하고 의미 있는 사례다. 이런 작업의 연장선상에 보다 다양하면서도 엄정한 건축의 꽃이 피어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글. 황두진 Hwang, Doojin (주)황두진 건축사사무소

 

황두진 건축사·(주)황두진 건축사사무소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와 예일대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했고, 김종성과 김태수의 사무실에서 실무를 익혔다. 2000년 황두진건축사사무소를 창립하여 서울 구도심의 한옥에서 기계 미학의 복합 건축, 해외 박물관의 한국실에 이르는 다양한 프로젝트를 소화해 오고 있다. 실무 건축사이면서도 이론과 저술 활동을 꾸준히 병행해 오고 있으며 ‘무지개떡 건축’은 그의 이러한 다면성이 잘 드러나는 주제다. 대표작으로 캐슬오브스카이워커스, 춘원당, 무카스 사옥, 원앤원 63.5, 노스테라스 등이 있고 서울시 건축상, 김종성 건축상, 한국건축역사학회 작품상 등을 받았다.
hwangdj@djharch.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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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키움센터_청담다함께키움센터, 미미위세곡키움센터

청담다함께키움센터, 미미위세곡키움센터

우리동네키움센터는 방과 후나 방학 등의 돌봄 공백 발생기간에 돌봄이 필요한 만 6~12세 아동을 돌봐주는 서울시의 초등 돌봄시설입니다. 2018년 6월 성북구(장위1동)에 1호가 시범 개소된 후 초등돌봄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오고 있습니다.

키움센터는 서울시와 관할구(지자체)가 협력해 운영·실시하며 접근성을 중시하는 일반형(80제곱미터 이상 소규모), 지역아동센터와 협업해 마을권역별 돌봄거점으로 운영하며 긴급·주말 돌봄기능을 강화한 융합형(210제곱미터 이상 중규모), 서울시가 직접 운영하는 지역대표 특화 돌봄시설이자 문화·예술·체육과 부모교육 등을 강화한 거점형(1,000제곱미터 이상 대규모) 시설 세 가지로 나뉩니다.

올 3월 2일 서울시 우리동네키움센터는 총 200개소가 운영 중입니다. 서울시에 따르면 2021년 키움센터 서비스 만족도 조사 결과 학부모의 96%가 센터 이용에 만족하고 88.6%가 경제활동 참여에 도움이 된다고 응답한 바 있습니다. 서울시는 올해 연말까지 초등돌봄 수요를 고려해 지역별 우리동네키움센터를 균형있게 설치해 총 275개소로 확대할 계획입니다.

돌봄시설의 중요성이 차츰 높아지는 가운데, 월간 <건축사>가 건축사 작업으로 서울시에 개소 완료된 우리동네키움센터를 지면에 장기적으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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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마을 일제 강제징용의 마을, 일광 광산마을

Disappearing village _ Ilgwang Mining Village,
a village of forced labor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읍 달음길 44(원리 663-7번지) 일원, 달음산 북동쪽 산기슭에 있는 광산(鑛山)마을은 자원 약탈을 위해 1930년 3월 11일부터 일본의 전범 기업인 스미토모 광업 주식회사에서 닛코광산(일광광산)을 개발하면서 형성된 광산촌이다. 광산의 규모는 조선의 5대 구리광산이었으며 채산성도 우수한 곳이었다. 일제 강점기 말인 1944년 4월 1일 이후에는 자원 약탈의 목적으로 인력을 강제로 징용하여 매일 주간과 야간 2교대로 쉬는 날 없이 일을 시키는 지옥의 일터로도 유명했었다. 해방 후에도 채광과 휴광을 거듭하기도 하고 구리 대신 중석(텅스텐)을 채광할 때와 1980년대 중화학 공업의 발달로 구리 수요가 급증할 때는 규모도 커지고 광산과 마을이 활성화되었지만, 1994년 폐광되면서 광산촌의 기능은 상실되었다. 당시 마을은 광산 입구에서 동쪽으로 흐르던 실개천에 다리를 설치하고 개천 가장자리에 석축을 쌓아 집터를 만들었다/ 마을 부지는 계단식으로 형성하여 4개 단지로 구성되어 있고, 지금도 그 당시 쌓은 일본식 모서리가 각진 석축과 진입 계단들을 볼 수 있다. 초기에 형성된 20여 채의 가옥은 이후 90여 채까지 지어졌으나, 지금은 57여 채가 남아있고 실제 거주 가옥은 45여 채다. 가옥은 그동안 많이 수리되고 재생 사업으로 지붕도 바뀌었지만 지금도 마을의 건물에서 일본식 적산가옥의 특징인 함석판 지붕과 눈썹 처마, 목재 비늘판 외벽 등을 볼 수 있고 일본식 마름모 모양의 석축들도 그대로 남아있어 일제 강점기 역사적 현장으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2020년 새뜰마을사업 대상지로 선정되어 재생 사업을 시행 중이지만 주민 초고령화로 인한 마을의 쇠퇴는 불가피하며, 마을은 역사적 의미의 유적지로 남겨질 것이다.

사택(舍宅)과 숙소(宿所)
마을 부지는 계단식으로 형성, 4개 단지로 구성하여 맨 위쪽은 일본인 숙소, 두 번째는 일본인 간부 사택, 나머지는 조선인 숙소를 만들었다. 일본인 간부급 사택과 조선인 숙소 등이 아직도 일본식 적산가옥의 건축양식으로 그대로 남아있다. 일본인 간부 사택은 넓은 마당을 가진 독립체로 형성되어 있고 숙소는 일자형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기본단위는 23제곱미터로 이곳에 일본인 2가구, 조선인 5가구가 모여 살았다. 1가구를 4명으로 산정해도, 20명이 이 좁은 숙소에 살았다는 것이다. 아직 남아있는 공동 화장실과 공동 우물, 빨래터, 집 앞 외부 화구 등에서 그 당시의 열악한 주거환경을 짐작할 수 있다.

적산가옥(敵産家屋)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스미토모광업주식회사 사무실과 간부 사택으로, 일본식 걸침기와의 지붕과 입구 포치, 창문 위 눈썹지붕의 모습은 전형적인 그 당시의 일본식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가옥 옆에는 그 당시 심은 은행나무가 역사의 아픔을 지키고 서 있다.

더덕더덕 붙어있는 다양한 자재의 낡은 외벽과 문짝들. 지금은 재생 사업으로 많은 가옥이 기와로 덮여 있지만, 오랜 세월에 때 묻은 슬레이트 지붕들은 오랜 세월 덧입혀진 시간의 아픈 흔적으로 애잔함이 묻어나온다.

지금은 창고로 사용되고 있는, 마을의 가장 뒤편에 일렬로 설치했었던 공동 화장실의 배치가 독특하다.

노동에 지친 징용자들이 사는 좁은 숙소에는 별도의 조리 공간은 없었다.
숙소마다 집 앞에 설치하여 사용했던 아궁이의 화구(火口)와 장독대가 이들의 삶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나의 노래
– 오장환

나의 노래가 끝나는 날은
내 가슴에 아름다운 꽃이 피리라.

새로운 묘에는
옛 흙이 향그러

단 한 번
나는 울지도 않았다.

새야 새 중에도 종다리야
화살같이 날아가거라

나의 슬픔은
오직 님을 향하여

나의 과녁은
오직 님을 향하여

단 한 번
기꺼운 적도 없었더란다.

슬피 바래는 마음만이
그를 좇아
내 노래는 벗과 함께 느끼었노라.

나의 노래가 끝나는 날은
내 무덤에 아름다운 꽃이 피리라.

 

글·사진. 정원규 Jeong, Wonkyu 창대 건축사사무소 ·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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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와 건축 _ 영화로 읽는 소설 속 도시와 건축 ③ <기러기> 1953년 도요타 시로 감독 (원작: 1915년[1911~1913] 모리 오가이 소설 ‘기러기’/ 각색: 나루사와 마사시게/ 음악: 단 이쿠마)

Architecture and the Urban in Film and Literature ③
The Wild Geese-雁, がん, GAN
film 1953 directed by Toyoda Shirō 豊田四郎(1906~1977) /a 1915(1911~1913) Novel by Mori Ōgai 森鷗外 (1862~1922) /screenplay: Narusawa Masashige 成沢昌茂(1925~2021)/music: Dan Ikuma 團 伊玖磨(1924~2001)

<기러기> 포스터 © The Criterion Collection

영화 <기러기(雁, Wild Geese. 1953)>는 모리 오가이(森鷗外 1862~1922)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이다. 도요다 시로(豊田四郎 1906~1977)감독의 비탈진 골목길을 다루는 안목과 당대 여배우 다카미네 히데코(高峰 秀子, Takamine Hideko, 1924~2010, 오타마 역)의 연기는 괄목할 만하다.

영화 <기러기>의 동명 원작 소설(모리 오가이作) © 문예출판사

시간적 배경은 1880년이고, 공간적 배경은 도쿄의대에서 시노바즈노이케(不忍池)로 가는 비탈진 골목언덕인 무엔자카(無緣坂)를 중심으로 한다. 오타마라는 한 소녀의 삶의 현실과 다양한 모습의 사랑들을 다루고 있다. 주인공 오타마(お玉)는 엿장수를 하는 아버지와 근근히 살아가는데 처자(妻子)가 있는 줄 모른 채 순사와 거의 강제 결혼을 한다. 어느 날 고향에서 온 그의 아내가 난리를 치자 우물에 빠져 죽겠다고 뛰쳐나갔다가 겨우 이웃이 말려서 살게 되었다. 그런 상황을 다 아는 스에조(末造)라는 고리대금업자가 매파를 넣어서 오타마를 첩으로 들여앉힌다. 오타마는 스에조가 포목상을 하는 줄 알고 그의 도움을 받으며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지만, 사실은 스에조가 고리대금업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게다가 상처한 줄 알고 첩 자리를 허락했는데 부인이 나타나서 갈등한다. 그러던 중 매일 집 앞을 산책하는 도쿄 의대생 오카다(岡田)에게 마음이 간다. 오타마는 기회를 기다리지만 끝내 마음을 전하지 못하고 독일로 유학을 떠난다. 이러한 줄거리에 공간적 배경인 옛 에도 도쿄의 한 골목길과 일본 가옥 등이 잘 녹아들어 있는 영화다.

“오래 전 이야기다”라고 시작하는 소설 원작은 24개의 소절로 구성되어 있고. 시간적 배경인 1880년 이후 35년이 지나 당시를 회상한다. 주인공 오카다와 가미조(上條)라는 하숙집에서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옆방에 살았던 선배격의 ‘내’가 서술한 소설이다. 이야기의 일부는 오카다와 친하게 지내면서 목격한 것이고, 나머지는 오카다가 독일로 떠난 후에 우연히 오다마를 알게 되어 전해들은 것이다. 즉, 전에 본 것과 나중에 들은 것을 조합하여 만든 이야기라고 소설의 말미에 서술하고 있다.

수 년 전 우연한 계기로 이 영화를 보게 되었고 영화의 한 장면인 귀뚜라미가 들어 있는 유리 사각형 등에 관심이 가서 다시 보고, 또 다시 보았다. 2년 전에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조선왕실 등 만들기 키트’인 사각형 등을 조립할 수 있는 상품으로 개발하여 판매함과 동시에 경복궁의 몇몇 전각에 매달아 놓았다. 그것을 보고 1880년을 배경으로 하는 1953년작 일본 영화에 등장하는 것과 같은 등이니 시대규명 등에 참고하라고 권했다. 국립고궁박물관 관계자는 이 등은 일본이 아닌 청나라와의 교류에 의한 산물이라고 한다. <사진 참조> 판단은 독자 여러분께 맡긴다.

영화 <기러기> 속 사각등 / 경복궁 만춘전의 사각등 © 조인숙

시노바즈노이케(시노바즈연못, 上野不忍池)는 일본 도쿄도 다이토구에 있는 우에노 공원 안의 천연 연못으로, 주위 둘레는 약 2킬로미터, 너비는 약 110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한다. 7~8월에는 연꽃이 피고, 겨울에는 11만 마리가 넘는 철새가 찾는다. 연못 한 가운데에는 칠복신 중 하나인 벤자이텐(弁才天べんざいてん、梵、巴: Sarasvatī)을 모시는 사당인 벤텐도(弁天堂 弁天島べんてんじま)가 있다.

무엔자카 언덕길은 동서로 200미터 정도, 북쪽에는 화재가 많았던 에도의 마을에서 지금도 현존하고 있는 방화 건축인 소석회(石灰Stucco, lime)로 외벽 마감을 한 고안지(講安寺, Kogan-ji)나, 도쿄대의학부가 있다. 남쪽에는 구 이와사키 저택의 돌담이 이어진다.
그 비탈 위에 무엔지라는 절이 있었던 것에서 유래하여 ‘무엔자카’라고 명명되었다고 한다. 에도시대의 지도에도 그 이름이 남아 있는 언덕이다. 혼고의 도쿄 대학에는 정문, 아카몽, 용오카몽 등 역사적인 많은 문이 있는데, 의학부 뒤편에 있는 철문도 그중 하나다. 1876년(메이지 9년)에 도쿄대 정문으로서 만들어지면서, 다이쇼 시대에는 철거되어 2006년 의학부 150주년 기념에 재건되었다고 한다. 이 철문에서 우에노 시노바즈노이케(연못)로 향해 내려가는 한 언덕길 일대가 바로 이 <기러기>의 무대 무엔자카다.

* 고안지는 정토종 사원(浄土宗寺院)으로 센슈잔 칭앙원(専修山称仰院)이라고 한다. 고안지는 경장 연간 유시마 텐진시타에 창건, 1616년(겐와 2년) 이곳으로 이전, 1928년(쇼와 3년) 8월 29일, 마츠가야 소안지(松が谷宗安寺)와 합병했다고 한다. 고안지 본당과 고(庫) 등은 토장조(土蔵造り)라는 방화 건축 양식이 남아 있어 분쿄구 문화재(文京区文化財)로 지정되어 있다.
* 토장조(土蔵造り)란 건물의 외관이 토장(土蔵)처럼 대벽(大壁 おおかべ)구조로 흙벽 위에 석고 등을 바르고 마무리한 것으로, 그 이름대로 창고에 많은 건축양식이다. 토장(土蔵)의 주구조는 목조이지만, 외벽을 두꺼운 토벽으로 하고 표면은 백벽으로서, 외측에 목조부분을 노출하지 않는 방화 건축이다. 참고로 대벽(大壁 おおかべ)은 기둥 등의 나무구조를 노출하지 않는 구조이고 진벽(真壁 しんかべ)은 기둥과 보가 노출된 구조다.

 

주인공인 오카다 청년은, 무엔자카를 산책로로 걷는다.
“오카다가 매일 하는 산책은 대체로 그 코스가 정해져 있었다. 한적한 무엔자카(無緣坂)를 내려가, 오하구로(お歯黒)처럼 검은 아이소메천(藍染川)이 흘러 들어가는 시노바즈노이케(연못) 북쪽을 돌아 우에노 산(上野山)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유명한 요릿집인 마쓰겐(松源)이나 간나베(雁鍋)가 있는 히로코지(廣小路)로 가서, 좁고 번잡한 나카초(仲町)를 지나 유시마텐진(湯島天神) 신사 경내를 통해 음산한 가라타치데라(カラタチ 寺)의 모퉁이를 돌아서 온다. 가끔 나카초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무엔자카로 돌아올 때도 있다.” (모리 오가이, 김영식 옮김, 『기러기』, 문예출판사, 2012, 11~12쪽)

* 오하구로(お歯黒): 이를 검게 물들이는데 사용하는 액
* 아이소메천(藍染川): 도쿄(東京都)를 흐르는 타니타가와(谷田川)의 다이토구(台東区)부근의 별명.

 

“그 당시에도 무엔자카 남쪽엔 이와사키 저택이 있었는데 지금과 같이 높은 토담은 없었다. 거칠게 쌓은 돌담의 이끼 낀 돌들 사이로 고사리와 쇠뜨기가 보였다.” (모리 오가이, 김영식 옮김, 『기러기』, 문예출판사, 2012, 15쪽)

* 구 이와사키 저택 (旧岩崎邸庭園) : 구 이와사키 저택은 미츠비시 재벌을 창설한 이와사키 가문의 본저로 1896년에 건립되었다. 3대 사장 이와사키 히사야(1865~1955)때 세운 양옥이다. 영국 건축사 조시아 콘도르(Josiah Conder, 1852~1920)가 설계한 서양식 건물로 17세기 영국의 자코뱅(Jacobean) 스타일을 바탕으로 르네상스나 이슬람 양식도 도입한 목조 건축이다. 서양식 건물과 함께 일본식 건물의 일부도 남아 메이지 시대에 근대화를 향해 힘차게 발돋움하던 당시 재벌의 장대한 저택의 모습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주소: 다이토구 이케노하타 1-3-45)

<기러기> 캡처 _ 도코노마

“스에조는 진위를 알 수 없는 육필 유키요에(浮世繪) 족자와 치자꽃을 꽂아 놓은 작은 꽃병이 있는 도코노마(床の間)를 등지고 앉아 예리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리 오가이, 김영식 옮김, 『기러기』, 문예출판사, 2012, 34쪽)

* 도코노마(床の間)란, 일본 주택 중 격식을 높인 손님간 등에 마련되는 일정한 공간으로 바닥보다 한 간 높게 만든 곳이다. 족자를 걸고 도자기나 꽃병 등으로 장식한다. 정확하게는 ‘토’로 부르고, ‘도코노마’는 속칭이다.

<기러기> 캡처 _ 마쓰겐(松源)

영화에는 특히 당대 도쿄의 무엔자카 및 일본 목조주택건축의 세세한 부분을 화면에 잘 담고 있다. 요리집 마쓰겐(松源)이나 오타마가 사는 집의 다다미 구조 및 장마루, 다다미와 후수마 및 도코노마 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주요 등장인물들은 무엔자카를 반복해서 산책하거나 지나간다. 스에조는 물건을 사들고 오타마를 방문하고, 스에조의 아내와 오타마는 선물받은 양산을 들고 언덕길에서 마주친다. 보이지 않는 영역을 잇기도 하고 가르기도 하는 조그만 다리에서 아버지와 만나기도 하고 떠나는 오카다를 바라보기도 한다. 게다가 기러기가 안행(雁行)을 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소설의 마지막에는 기러기를 잡아서 가져가는 부분이 나오는데 한 쌍이 함께 하지 못한다는 것을 은유하는 것 같다. 다양한 에피소드가 무엔자카 비탈길 언덕에서 묘사된다.

<기러기> 캡처 _ 장마루가 있는 구조

또 하나, 이 비탈을 유명하게 한 것은, 사다 마사시(さだまさし佐田 雅志 1952~ )의 명곡 <무엔자카>다. “‘어머니’가 어린 ‘나’의 손을 잡고 이 무엔지(無緣寺)를 올라갈 때마다 언제나 한숨을 쉬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한다.”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어른이 되고 나서 불우했던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리는 이야기의 노래인데, 비탈의 이름의 슬픔과 함께, 듣는 사람에게 강한 인상을 남기고 있다.
여기서 무엔(無緣)이란 행운과는 정말 인연이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오카다는 졸업을 기다리지 않고 유학을 가기로 결정해 벌써 외무성에서 여권을 받고 대학에 자퇴서를 냈다. 동양의 풍토병을 연구하러 온 교수 W가 왕복 여비 천 마르크와 월급 2백 마르크를 주는 조건으로 오카다를 고용했기 때문이다. 독일어를 할 수 있는 학생 중에서 한문을 잘 하는 사람을 찾아 달라는 부탁을 받고 벨츠(Baelz)교수가 오카다를 소개했다.” (모리 오가이, 김영식 옮김, 『기러기』, 문예출판사, 2012, 128쪽)

* 벨츠(Baelz) 교수는 독일의 의학자로 1877년 초청을 받아 일본에 왔다. 도쿄대학에서 생리학 내과 정신학 등을 강의하며 일본 근대의학의 확립에 공헌했다.

지금 도쿄대의 전신인 일본의 현대식 고등교육은 1877년 시작되었다. 19세기 말의 일본과 독일의 교류에 대한 내용이 소설에 녹아 있다.

모리 오가이(森 鷗外, 1862~1922)는 일본 메이지·다이쇼 시대의 소설가·번역가·극작가다. 육군 군의총감 정4위 훈2등 공3급 의학박사이자 문학박사로 제1차 세계대전 이래, 나츠메 소세키와 나란히 문호(文豪)라고 불렸다. 본명은 모리 린타로(일본어: 森林太郎)이고, 도쿄제국대학 의학부를 졸업했다. 대학 졸업 후 육군 군의관이 되어 일본 육군성에서 파견한 유학생으로서 독일에서 4년을 보냈다. 귀국 후 번역시 ‘오모카게(於母影)’, 소설 ‘무희(舞姫)’, 번역시집 ‘즉흥시인’을 발표했고, 또 스스로 문예잡지 <시가라미 소시(しがらみ草紙)>를 창간해서 문필 활동에 들어갔다. 그 후, 군의총감(중장에 해당)이 되어 한때 창작 활동에서 멀어졌지만, <스바루(スバル)> 창간 후에 ‘이타 세쿠스아리스(ヰタセクスアリス)’, ‘기러기’ 등을 집필했다. 노기 마레스케의 순사에 영향을 받아서 ‘오키쓰 야고에몬의 유서(興津弥五右衛門の遺書)’를 발표한 뒤에, ‘아베 일족(阿部一族)’, ‘다카세부네(高瀬舟)’ 등의 역사소설, 사전(史伝) ‘시부에 주사이(渋江抽斎)’를 썼다. 또, 제실박물관(帝室博物館) 총장이나 제국 미술원(帝国美術院, 현재의 일본 예술원日本芸術院) 초대 원장 등도 역임했다.

도쿄대 의대생 오카다 역의 배우 아쿠다카와 히로시(芥川 比呂志 1920~ 1981)는 라쇼몬(羅生門 1915)의 작가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あくたがわ りゅうのすけ 1892~1927)의 아들이기도 하다.

다음 호는 김동인(1900~1951)의 장편 연재소설 ‘젊은 그들(1930~1931)’을 신상옥 감독의 1955년 필름으로 다룬다.

* The Youth-Jeolmeun geudeul-(film 1955 directed by Shin Sang Ok(1925~2006)/screen play by Lee Hyung Pyo(1922~2010)/a1930~31 Novel ‛the Young Ones’ by Kim Dong-in(1900~1951)/running time: 89 minutes.

글. 조인숙 Cho, In-Souk 건축사사무소 다리건축

조인숙 건축사·건축사사무소 다리건축(1986~ 현재)

· 한양대학교 공과대학 건축학과 졸업(공학사)
·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건축학과 석사/박사
· 건축학 박사(역사·이론–논문: 한국 불교 삼보사찰의 지속가능한 보전에 관한 연구)
choinsou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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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사로 산다는 것은?

What does it mean to live as an architect?

오늘도 치이다
오늘은 어떤 법이 바뀌었을까? 설계에 전념할 시간도 부족한데 이것저것 챙길 것이 많다.
요즘 부쩍 “아오 진짜 설계 그만하고 싶다!”라는 기분이 든다. 천직이자 가장 좋아하는 일인 설계 자체가 싫은 것이 아니라, 건축사로서 짊어져야 할 혹은 검토해야 할 사항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설계 작업 전에 각종 건축 관련법을 검토하고 혹여 심의대상이면 심의자료 리스트를 점검하여 도서를 작성하고 게다가 지역마다 법의 해석이나 적용은 왜 이리 다른지 자칫 맘을 놓고 있다가는 큰일 나기 십상이다. 또한 충분하고 면밀한 검토시간 없이 사고 등 정치적 이슈의 영향으로, 살짝 과장하면 자고 일어나면 생기는 법도 많으니 어떻게 작성하고 적용해야 할지 참 난감하다. 검토하는 것 자체가 일거리로 느껴지는 요즘이다. 지인 건축사들과 이야기해도 서로가 모르고 있거나 알아도 내용을 잘 모르거나 이런 것까지 건축사가 해야 하나 싶은 사항들도 많다. 아무튼 요즘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점은 전문가라도 혼란스럽다는 점이다.

설계의 질을 높이고 디테일을 고민하고 어떤 자재를 적용할지 등 연구할 것이 많건만, 각종 법에 치여 시작부터 지치는 기분을 느끼는 것은 나만이 아닐 것이다. 각종 인증 제도도 지금보다 복합 및 단순화할 필요를 느낀다. 한번 신청기간을 놓치면 한두 달 기다리는 건 다반사이다. 유사한 제도는 통합해서 합리적인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다. 인증제도 간 서로 상충되는 부분도 있을 터이고 모두를 만족시키기 위해 건축사는 고군부투하며 최선의 안을 찾아내야 한다. 법에 한번 치이고 인증제도에도 치여, 각종 절차만으로 건축사는 점점 지쳐간다. 좀 규모가 큰 건물인 경우엔 각종 법규, 인증 등 그야말로 검토에 검토는 물론이고 분야별 협의까지 상당부분 설계기간이 필요하다. 이 모든 과정에서 건축사는 각종 법규를 검토하고 공간을 디자인하고 구조, 기계, 전기, 토목, 조경, 각종 인증업체들과 협의해 이를 종합적으로 재검토하여 적절하고 합리적인 방향으로 설계 전반을 이끌어 가야 한다.

이런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건축주와의 소통이다. 건축주는 원하는 바를 건축사에게 오롯이 전달해야 하고 건축사는 건축주의 생각이 잘 표현되도록 대화를 잘 유도해 매끄러운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이런 과정을 잘 지나고 나면 이제는 시공이다. 시공과정에서도 설계 사후관리나 감리 등 디자인 의도에 맞게 공사가 잘 진행되는지 점검해야 한다. 문제가 생기면 대부분의 건축주는 건축사에게 SOS를 청한다. 꼭 설계의 문제가 아닐지라도 건축사는 시공자와의 불협화음을 잘 조정해야 하며, 간혹 주변의 민원 문제까지 해결해야 할 상황도 만난다. 경우에 따라서는 건축주의 인생 상담과 하소연까지 듣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마음까지 어루만져야 최상의 건축물이 되는 셈이다. 물론 일의 성격에 따라 별도의 계약을 통해 업무를 진행하고 있지만, 도대체 건축사의 역할은 어디까지란 말인가?

건축사는 설계의 모든 과정을 조율하고 이끄는 지휘자와 같다고 한다.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자꾸 더해지는 책임의 무게는 버겁기만 하다. 충분한 공감과 존중을 바탕으로 가치를 인정받는다면 좀 나아질 텐데. 여전히 먼 길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후배 건축사들에게 좀 더 나은 건축 환경의 토대를 위해서는 결코 포기하지 말아야 할 숙제이다.

숙제를 푸는 현실적인 방안 한 가지를 제안해 본다. 실무에서 위와 같은 법이나 각종 인증제도 등에 치이지 않도록, 정보를 용이하게 찾아볼 수 있는 통합적인 시스템을 협회가 구축해 주길 바란다. 이런 비효율적인 상황을 개선해 보려 사무소를 운영하는 건축사가 직접 자치법 등을 찾기 쉽게 모아 공유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인증이나 심의제도보다는 비교적 개선이 용이해 보인다. 더해서 자치단체별로 각기 다른 해석이나 적용도 통합하거나 불합리한 부분은 개선할 필요가 있으니 각 자치단체별로도 긴밀한 협조가 필요해 보인다. 전문가의 의견을 최대한 경청하도록 국토교통부 관계자들과의 협의도 필요하다. 내부에서 제기하는 여러 문제가 마지못한 읍소가 되지 않도록 의견을 모으고 힘주어 말해야 한다.
비효율적인 인증제도는 통합하여 검토하거나 단순화해야 한다.
치이는 건축사가 아니라 건축의 지휘자로서 최대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바람직한 환경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건축사도 돈을 벌수 있을까?
몇 해 전에 건축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건축사는 참 가성비가 낮은 것 같아요. 몇 개월을 설계하고 또 몇 개월에 걸쳐 감리도 하는데 그에 반한 설계비는 막상 직접 경험해 보니 너무 낮은 것 같아요. 공인중개사 가성비가 훨씬 좋네요.” 참으로 속상한 말이지만 사실이기도 하다. 밤낮으로 야근과 철야를 밥 먹듯이 하며 일하지만 이를 인정받는 가치는 그에 못 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차라리 건축사보다는 법에 자유로운 인테리어나 가구디자이너가 홀가분해 보일 때도 있으니 말이다. 지휘자로서의 역할이 건축사라지만 이런 반복적인 환경에서 열정을 무기로 견디기보다는 우리도 살아야 하지 않는가? 과다한 가치를 요구하는 것이 아닌 그에 합당한 가치를 스스로 만들고, 또 이를 인정하는 사회 분위기도 필요할 것이다.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을 바탕으로 조금 폭넓게 시야를 확보할 필요성도 느낀다. 지인 건축사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상담 중 건축주가 설계비를 줄여달라는 말에 그럼 완공 후 건축으로 인해 수익이 늘어난다면 비례해서 설계비를 더 주시겠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결론은 설계비는 그대로였다고.

설계 경력 25년이 지난 지금, 행복하고 보람 있는 건축을 오래 하기 위한 나름의 방법을 고민 중이다. 과연 건축사는 건축으로 돈을 벌수 있을까? “그렇다”라는 것이 나의 답이다. 그 답을 찾아가는 여정은 시작되었다.

 

건축이 좋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일처럼 행운인 것이 있을까? 좋은 건축물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는 모든 과정이 설레고 행복하고 보람차다. 때로는 예기치 않은 많은 상황에 지치기도 하지만 눈이 반짝이며 필(feel) 받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집중할 수 있는 일이 바로 설계이니 난 참 행운아다. 가슴 떨리는 건축이 곧 나의 삶이니 난 건축을 재미있게 즐기련다.

 

글. 서경화 Seo, Kyounghwa 플라잉 건축사사무소

 

서경화 건축사·플라잉 건축사사무소

대한민국 건축사(KIRA)이자 미국친환경기술사(LEED AP)이다. 2012년 ‘신나는 공간여행’을 모토로 플라잉 건축사사무소를 설립했다. 설계하는 모든 과정이 ‘설렘’이듯 건축주와 이런 느낌을 공유하는 것이 무엇보다 가치 있는 일이라고 믿는다. 유쾌한 반전을 좋아하고 우연이 만드는 인연에 즐거워하며, 복잡함 보다는 단순함이 주는 명쾌함에 끌리고 여유를 은유삼아 유머(HUMOR)를 공간에 담고자 한다. 2014년부터 동료건축사들과 ‘말 많은 건축사들의 건강한 집짓기 토크쇼’인 ‘집톡(ZIPTALK)’에 참여해 일반인과 건축의 접점을 찾고 있다. 경기도 건축문화상을 수상했으며 저서로는 『99하우스』가 있다.
flyingarc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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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 하디드 아키텍츠의 미래 건축 기술, 9월 18일까지 DDP에서 선보인다

Futuristic architecture technology of Zaha Hadid Architects,
presented until September 18th at Dongdaemoon Design Plaza(DDP)

‘시작된 미래’ 전시 포스터

디지털 세계에 다시 태어난 자하 하디드… ‘시작된 미래’展
혁신, 상상, 융합을 주제로 미래 지향적인 디자인을 추구한 자하 하디드(1950~2016). 동대문디자인프라자(DDP)를 디자인한 그가 과거와 현재, 가상과 실존, 장르의 경계를 넘나들며 탐구해 이뤄낸 디자인의 결과와 과정을 보여주는 전시 ‘시작된 미래(Meta-Horaizons: The Future Now)’가 막을 올렸다.
서울디자인재단이 5월 26일부터 9월 18일까지 자하 하디드 아키텍츠(Zaha Hadid Architects, ZHA)와 공동기획으로 개최하는 첫 기획 전시 ‘시작된 미래’는 DDP 디자인박물관에서 진행된다. 재단은 융합을 통해 디자인 혁신과 사회적으로 직면한 이슈를 해결하고, 더 나은 미래를 설계·제안하고자 이번 전시를 기획하게 됐다고 밝혔다.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에서 도시에 작업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기회를 얻게 될까?’, ‘디지털 설계 도구의 개발은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을까?’와 같은 ZHA의 고민을 전시에서 선보인다.
전시장은 ▲혁신적인 프로세스와 연구(Innovation-Process & Research) ▲상상하는 디자인과 가상 세계(Imagination–Design&Virtual) ▲실감형 기술과 융합(Interaction–Technologies) 등 3개 섹션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 작품은 스터디 모델, 프로토 타입, 대형 벽면 프로젝터 영상과 비디오, VR 콘텐츠 등으로 이뤄져 있다. 이는 ZHACODE 팀, ZHA SOCIAL 팀, ZHA A+I 팀, ZHVR 팀 등 ZHA의 다양한 연구팀이 그동안 진행해온 연구 프로젝트를 중심으로 구성된 것이다.
전시에 출품된 모든 작품은 미래를 준비해 온 ZHA의 철학이 담겨 있다. ZHA의 작품은 건축 외 다양한 각 분야 전문가들과의 협업 결과물들로, 오래전부터 디지털 기술, 메타버스, 블록체인, AI, 친환경, VR 같은 미래 소재를 반영하고 있다. ‘실감형 기술과 융합’ 섹션에서는 레픽 아나돌 스튜디오(RAS)와 ZHA의 협업 작품, 아키텍팅 메타버스_RAS×ZHA(2022)도 만나볼 수 있다. 특히 마지막 섹션의 일부 공간인 이머시브 룸(Immersive Room)에서는 공간 전체를 에워싼 미디어 아트가 펼쳐진다. 또 최대 4명의 관람객이 동시 접속해 디지털 공간에 건물을 디자인해볼 수 있는 VR 작품 ‘프로젝트 코렐(Project Correl 1.0, 2018)’ 등의 새로운 관람 형식도 경험할 수 있다.
관람료는 성인 1만 원, 청소년(만 13~18세) 7,500원, 어린이(만 7~12세) 5,000원이며, 20인 이상 단체는 할인이 적용된다. 관람시간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8시(입장 마감 오후 7시)까지로, 추석 당일은 휴관한다. 관람, 할인 혜택과 이벤트 등의 자세한 내용은 DDP 홈페이지(www.ddp.or.kr)에서 확인하면 된다.

육혜민 기자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유럽 문화 공원에 설치된 스트리아터스 다리(Striatus)의 모습
© Naaro / Zaha Hadid Architects
첫 번째 섹션 ‘혁신적인 프로세스와 연구’에서는 로봇 기술, 건축 기하학 및 참여형 설계와 관련한 다학제적 연구와 협업을 통해 개인 사용자에게 적합할 뿐만 아니라 효율적인 에너지 사용과 탄소의 영향을 최소화하는 다양하고 광범위한 디자인을 소개한다. 대표 작품인 ‘스트리아터스 다리(Striatus), 2021’는 3D 프린터로 콘크리트를 출력해 내부에 철근 같은 보강재 없이 제작된 최초의 다리로써, 컴퓨터를 이용한 정교한 설계 후 3D 프린터로 딱 필요한 만큼의 재료를 사용해 제작됐다.

리버랜드 메타버스의 모습 ©Zaha Hadid Architects / Mytaverse
두 번째 섹션 ‘상상하는 디자인과 가상세계’에서는 ZHA가 최근 진행하고 있는 가상 세계 속의 디자인을 선보인다. 대표 프로젝트 중 하나인 리버랜드 메타버스(LIBERLAND METAVERSE)는 가상세계에 구축한 새로운 국가 모델로, 실제로 존재하는 마이크로네이션(초소형 국가, 독립국가라고 주장하지만 국제기구와 각국 정부로부터 나라로 인정받지 못한 집단이다) 리버랜드 자유공화국을 기반으로 삼고 있다.

두 번째 섹션에서 게임 ‘배틀그라운드(PUBG: Battlegrounds)’를 위해 ZHA가 디자인한 메디컬 센터 © Zaha Hadid Architects
에란겔(Erangel) 맵에 위치한 이 메디컬 센터는 로봇 수술, 노화 방지와 장수를 위한 연구, 회복과 예방 및 진단 의학을 위한 3개의 연동 건물로 설계되었다. 배틀그라운드의 메디컬 센터 디자인은 사이버 공간 및 메타버스에 대한 ZHA의 오랜 관심을 반영하고 있으며, 병원의 미래와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아키텍팅 메타버스_RAS x ZHA ©Refik Anadol Studio with OpenAI
마지막 전시 섹션 ‘실감형 기술과 융합’에서는 실감형 인터랙션 기술을 통한 협업과 디자인 프로세스를 소개하고 증강현실, 가상현실 및 물리적 세계와 혼합현실 속에서 참여형 설계와 몰입형 기술의 경험을 선사한다.

‘프로젝트 코렐(Project Correl 1.0(2018)’ © Zaha Hadid Architects
가상 공간에서 몰입형 건축 기술을 시연하는 인터랙티브 체험 프로젝트다. 이 작품은 최대 4명의 관람객이 VR 장치를 착용하고 동시 접속해 디지털 공간에서 자유롭게 원하는 구성 요소들을 선택하거나 크기를 조절하고 배치하면서 전시 기간 동안 디지털 구조물을 설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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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숨 쉬는 건축여행 ② 개화기 가장 빠른 내포(內浦)의 호서은행

A living and Brenthing Tourism for Architecture ②
Regarding Hoseo Bank in inner port areas, the earliest established in the modern flowering stage

1. 호서은행(湖西銀行)의 설립

호서은행이 지형상 내포의 주심인 예산(禮山)이란 작은 고을에 1913년 5월 21일 설립되었다는 것은 구포은행(龜浦銀行, 1912년 6월 23일), 대구은행(大邱銀行, 1913년 5월 29일)과 더불어 민자자본(民資資本)에 의하여 가장 일찍이 세워진 지방은행 중의 하나이다. 당시 은행은 귀족이나 관료계 인사와 대상인들에 의하여 설립되었으나, 호서은행은 예산을 중심으로 한 내포 지역의 지주들로 유진상(兪鎭相), 유진태(俞鎭泰) 형제와 성낙규(成樂奎), 성낙헌(成樂憲) 형제, 그리고 최규석(崔圭錫), 이기승(李基升, 태안) 등으로 순수한 지방 자본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2. 은행제도(銀行制度)의 시초와 민족은행 설립

우리나라 은행은 1876년 2월 강압으로 강화도조약이 체결되면서 다른 열강보다 우위를 점한 일본이 1878년 6월에 부산지점을 개설한 것이 시초다. 이어서 제18은행과 제58은행 등이 일본인들을 지원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부산, 원산 등 개항지에 진출했고, 뒤따라서 영국계의 홍콩상하이은행(香港上海銀行)이, 인천 그리고 노국계(露國系, 러시아)의 한로은행(韓露銀行)이 1898년 경성에 각각 개점되었다.

 

3. 호서은행 설립의 의지(意志)

1910년 국치(國恥)를 당하면서 지방은행이 설립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경제계나 은행계의 실정에서 전형적인 농촌지대이며 내포지역 가운데서도 작은 고을 군 소재지이기는 하나 면 소재지인 예산에서 중소 지주들에 의하여 순수한 지방의 민족자본으로 호서은행이 1913년 5월 21일에 설립된다.
이 호서은행을 창립함에 있어 민족의 경제자립이란 목적을 두었으며, 은행 운영에도 자주적이었다. 이 사실이 바로 내포 지역을 주 무대로 삼고 그 중심거점에 세워진 호서은행의 취지가 다른 지방도시에 설립되었던 민족은행들과 그 뜻을 달리한 점이다.

왼쪽에서 부터 최규석(창립자 충남상업 사장), 유진상(창립자 초대은행장), 성낙규(설립자), 김진섭(창립자 마지막 은행장) © 예산문화원보(1987년 1월호. 1월 1일 발행, 통권 9집)

지방의 지주층에 속해있던 거주인 유진상·유진태·성낙규·성낙헌·최규석 그리고 태안(泰安) 이기승 등 설립자 6인은 개화된 민족의식이 강한 인사일 뿐더러 상공업에도 참여의식이 높았다.
뿐만 아니라 1927년 ‘下半期巳淸南道文(하반기사청남도문)’ 제25기 영업보고서에 의하면 호서은행 총 주수 40,000주에 주주는 274명인데, 이 가운데 한국인이 소유한 주수는 39,293주임에 비해 일본인이 소유한 주수는 불과 707주이고, 한국인 주주는 255명인 데 일본인 주주는 19명에 불과하다.

 

4. 호서은행 본점의 입지배경과 그 도시적 의미

안톤 마르틴 펠러(Anton Martim Feller, 1892~1973)와 나카무라 요시헤이(中料興資平, 1880~1963)에 의해 설계된 호서은행 본점의 건축형식은 당시 대부분 은행건축물이 고전주의복고풍이었던 것에 반해, 20세기 초 유럽에서 유행했던 세제션풍(Secession/Sezession, ‘제체지온’이라 부르기도 함)이라는 새로운 건축양식이었다.
호서은행 본점의 입지배경과 은행설립을 통해 나타난 도시적 의미를 세 가지 측면으로 주목하였다. 먼저, 호서은행 설립이 일제에 의한 타율적인 지배의 산물이 아닌 ‘순수토착지주의 자본’으로 설립된 자율적 선택의 산물이었음을 밝혀내고, 두 번째로는 예산지역 호서은행 본점이 입지하게 된 배경을 정량화된 수치를 통해 이해하고, 세 번째로는 예산이 근대적 도시공간으로 변화하는 단계에서 호서은행본점의 입지가 갖는 도시적 의미와 변화과정을 다루고자 한다.

1913년에 이 지역 민간유지들이 설립한 민족 금융기관인 호서은행 예산 본점은 우리의 근대 자본주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건물로 일본인 나카무라 요시헤이(中村與資平)가 설계하여 1922년 준공되었다.
지상 2층의 연와조 건물로 적절한 비례구성과 세부의 간결한 장식, 그리고 1, 2층을 하나로 연결하는 대담한 창문구성 등을 통해 근대적인 조형 감각을 담아내고 있다. 입구 부분을 돌출시키고 지붕형태를 이채롭게 곡선처리하여 정면을 강조하는 등 지붕을 통해 보이는 계획의 의도가 금융기관이라는 기능에 부합하면서, 조형적 아름다움도 함께 표현되고 있다. 아울러, 저잣거리 중심부의 삼거리 모퉁이 대지가 지니는 강렬한 정면성을 건물의 입면구성 및 동선 등을 통해 그대로 내부로 유입시키고 있다.
당대의 금융시설로서 하나의 모델로 지금까지 남아 본래의 기능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건축사적 가치 역시 크다. 1987년 충남 기념물 제66호로 지정되었다.

예산군 군내면 강대리 22통 5호(당시 중국인 소유주택을 개조)
1913년 5월 21일 설립 본점모습

설립당시 배치도 (실측 2000년대) © 김득수

1922년 호서은행 본점 준공 모습

1922년 신축당시 배치도 © 김득수

1999년 좌측 이면도로에서 바라본 후면 및 주차장

1999년 내부변경 및 부속건물철거 배치도 © 김득수

우측면 계단부

2층 창문 주출입구

호서은행 1922년 신축당시계단모습(현존). © 김득수 / 호서은행 1999년 변경된 내부 객장 모습
© 김득수

2019년 후면 부분 일부철거 모습 © 김득수

배치도 © 김득수

입면도

종합건축사사무소 S.S.P 삼대 외관참조 작업 © 김득수

© 김영래,김득수(2013) 호서은행본점의 입지배경과 도의적 의미, 도시설계 v.14 n.5

1913년 5월 21일 창림당시호서은행본점과 서쪽으로 150m 이동 1922년 신축한
호서은행 본점 현재의 모습(충남기념물 제66호)

 

5. 호서은행의 변화

당시 은행은 귀족이나 관료계 인사와 대상인들에 의하여 설립되었으나, 호서은행은 예산을 중심으로 한 내포지역의 지주들로 예산 거주인 유진상, 유진태 형제와 성낙규, 성낙헌 형제, 그리고 최규석, 이기승(태안) 등으로 순수한 지방의 씨족지주들의 자본에 의하여 설립되었다. 호서은행의 경제자립의 의지로 1918년 충남상사(주)를 설립하고, 또한 1927년에는 충남제사공장을 자매회사로 설립하여 종합상사와 생산공장을 지은 것은 호서은행의 설립목적인 민족경제의 자주자립 의지를 수행한 실증이라고 하겠다.

동일은행 예산 지점으로 운영되던 1930년대 주변에 점포건물이 있었으며, 포장되지 않은 거리가 다를 뿐 건물의 외형은 지금과 거의 같은 모습이다.
외관은 좁은 정면에 높이가 강조된 건물로 주출입구 부분에 장주를 설치하고 돌출된 형태로 만든 후 곡선의 지붕을 설치하였으며, 외벽 면에서는 상부 2개 하부에 2개의 장식띠를 두어 외형은 옛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호서은행을 설계한 안톤 마르틴 펠러와 나카무라 요시헤이는 1920년에 한성은행 대구지점을 설계하여 건축되었으나 해방 후 영남일보 사옥으로 사용되기도 한 건물이다. 현재는 철거된 상태다.
호서은행 본점건물은 충청남도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66호로 지정되었다. 호서은행 본점 건물을 바라보면 중후하고 비례감각이 매우 조화롭다. 이 건물이 번화한 예산 시가지의 삼각코너에 버티고 있는 모습은 당당하고 의젓하다.

①공장작업실황 ②제조작업실황 ③동사의 정문 ④생사전령검균 작업실황
⑤생사정리 작업실황 ⑥충남제사공장전경

 

6. 경이적 발전과 자매회사 설립

충남상업주식회사(忠南商業株式會士).
이 호서은행이 경이롭게 발전되었다는 것은 여신(餘信), 수신(受信)의 액수가 상상외일뿐만 아니라 최규석, 유진태, 정두화의 발기로 곡류 상업농산물 무역과 도매위탁 판매업을 주로 하는 충남상업주식회사 자매회사로 1918년에 설립하여 사장에 최규석을 호선(互選)하였다.

충남제사주식회사(忠南 製絲 株式會社).
강두영 외 15인의 발기로 작년 1926년에 창립총회를 개최하였고, 성낙규, 성낙헌 형제와 김진섭의 발기로 잠사업(蠶糸業)으로 근대적 제사공장을 갖춘 충남제사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성낙규가 사장에 취임했다. 자본금 오십만 원, 제1회 십이만오천 원을 불입하여 칠만여 원으로 공장을 건축하였고, 사만 원으로 유망함은 물론이요, 我(아) 상업계를 위하여 축복하는 바이다.

비농촌(鄙農村)에 설립된 은행으로 경성에 설립된 은행과 어깨를 같이 하였던 호서은행의 그 설립과 운영, 그리고 계열회사를 주도해 온 유진상과 유진태 형제, 그리고 성낙규와 성낙헌 형제, 최규석은 모두 예산에 거주했던 지주들이다.

광천(1917년 8월 1일, 군산항 수송거점), 안성(1919년 10월 16일), 천안(1919년 1월 10일, 경부선연변 상업권·영업권역 흡수), 홍성(1921년 3월 22일) 등에 지점을 개설함으로써 경부선일대로 영업영역을 확장하였다.
그리고 예산 본정통 사거리에 위치하고 있던 1913년부터 사용한 본점건물을 매각하고 읍내 출입구로 인식되는 삼각형대지에 본점을 신축했다. 1927년 10월 1일에는 천안경남광업의 흑자로 인해 불입자본금이 1백15만 엔으로 증가하자 천안지점을 본점으로 삼고 이전했다. 이어서 청미(1928년 10월 27일 장호원읍으로 개칭[1941년 10월 1일])와 대천(1929년 12월 2일) 등에 지점을 더 개설했다.
1930년에는 온양온천지점이 개설될 예정이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고승제 박사는 “지방도시가 아닌 농촌 고을에 세워진 호서은행의 경영 의지와 실적은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은행사에서도 인구가 1만 명이 될까말까 하는 농촌에 세워진 사례는 극히 드문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라고 그의 저서 『한국금융사 연구(韓國金融史 硏究)』에서 지적하고 있다.
또한, 내포지역 거래자를 확보하게 되어 영업권을 홍성, 서산, 당진, 청양, 아산의 내포지역은 물론이고 공주, 홍산, 천안, 안성, 장호원까지 확대되고 작은 농촌 고을에 설립된 지방은행이라는 지리적인 악조건을 물리치고 충실한 운영을 할 수 있었다.

 

7. 호서은행 설립과 전개

설립이후에 공주, 홍성, 서산, 아산, 온양 등지에 사는 주민 5천여 명의 거래선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동안 한국경제의 전무후무한 호경기와도 관련이 있다.
계속해서 충남상사(忠南商事)와 충남제사공장(忠南製絲工場)을 1918년과 1927년에 각각 자매회사로 설립하면서, 그 사이에 1921년 1월 6일 천안에 있던 경남광업주식회사를 흡수합병하여 총자본금 2백만 엔, 불입자본금 72만 5천 엔으로 증가하는 등 실적이 매년 향상되었다.

호서은행 지점과 영업소(내포지역)

 

8. 호서은행 지점들

1922년 호서은행 본점 건립 당시 4개 지점을 포함한 50명의 행원들도 모두 순수토착한인들이었다. 호서은행의 설립자구성도 예산을 중심으로 활동한 한인토착지주로서, 예산에 거주지를 둔 상공업지주인 유진상(兪鎭相)과 유진태(兪鎭泰)형제와 성낙규(成樂奎, 후에 충남제사공장운영)과 성낙헌(成樂憲) 형제와 최규석(崔圭錫), 태안(泰安)의 이기승(李基升), 미곡거상인 김진섭 등이 참여했다.
호서은행이 신장세(伸長勢)를 거듭한 배경과 내포지역의 농업경제적 측면을 살펴보기로 한다.

 

9. 조선후기 호서은행 설립주체의 형성

 

제이십오기영업보고서(第貳拾五期營業報告書)에 따르면, 총 주수는 40,000주이고 총 주주는 총 274명이었으며, 이 중에서 한국인 주주는 255명이며 주수는 39,293주였다. 반면에 일본인은 19명에 707주에 불과했다.
그중에서 김성권(710주), 성낙헌(1,304주), 성낙규(2,952주), 정두화(2,134주), 백충기(505주), 장석구(2,140주) 등 예산지역의 토작지주들의 주식점유 비율이 높았다. 이것은 서산, 당진, 공주, 연기 지역 등에 거점을 둔 이기승(100주) 김영조(1,000주) 김갑순(50주, 충청도에서 가장 많은 전답을 소유한 지주) 등의 비 예산권 토착의 주식 수를 압도하고 있다.

1909년『한국각부군 시장 상황 조사서(韓國各府郡 市場 商況 調査書)』

내포지역에는 장항선 철도가 부설(1922년 6월)되기 10년 전 농산물의 집산지요, 도매의 신상(臣商)들이 집거하고 있던 상업의 요충지이기도 한 예산(禮山)이 당시 도청소재지였던 공주(公州)보다 경제와 금융면에 성황을 이뤘다. 충남 서부지역 중심지 역할의 배경을 물동 거래의 액면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1909년에 발행된 『한국각부군 시장 상황 조사서(韓國各府郡 市場 商況 調査書)』를 보면, 도청소재지인 공주는 지방행정의 중심지일 뿐더러 기본단위가 되는 면(面)의 21면에 그 당시에 인구가 100,578명이나 되는 반면, 예산은 12면에 19,895명에 불과한 협소한 면적에 소수의 인구밖에 안 되는 예산의 연간취인액(年間取引額)이 공주의 260,000원과 비교해 볼 때 310,000원이란 큰 차로 높게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내포지역에 경남철도가 1922년 6월에 부설되기 10년 전에 예산은 이미 농산물의 집산지이자 금융경제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1926년 1월에 간행된 『조선인회사 대상점사전[朝鮮人會社 大商店辭典(全)]』에 의하면 대표적인 상인을 위와 같이 소개하고 있다.

10. 경이적 번창을 가져왔던 호서은행
비농촌(鄙農村) 소도읍에 설립된 사회적 배경

1987년 예산문화원보 1월호(통권 9집)의 예산향토사연구회 편에 따르면, 호서은행의 초대은행장이자 창립장인 유준상이 경이적 번창을 가져왔던 호서은행이 향토사를 조명해줄 건물로서 존재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해당 내용은 아래와 같다.
호서은행 본점 건물이 헐릴 것이라고 한다. 국치를 전후해서 민족자본에 의해서 설립된 은행으로서 경제계 금융계를 군림(君臨)하고 민족의 저력을 과시해 주었던 사적건물이 헐릴 위기에 처했다. 충청은행이 조흥은행으로부터 인수받아 예산지점이 영업하고 있는 건물로, 노후가 되어 사용 가치성을 잃어서 현대식으로 신축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이 건물은 우리가 일본의 식민정치를 받으면서도 민족의 경제독립이 곧 나라독립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각성한 선인들에 의해서 순민족자본, 그것도 예산지방에 거주하는 인사들만의 자본으로 호서은행이 설립되어 당시로서는 현대식으로 건축된 것이다.
이 호서은행이 비촌(鄙村) 내포의 소도읍인 예산에 본점을 둔 은행으로서 많은 지점까지 지니면서 경이롭게 번창했던 은행본점 건물로 유일하게 남아있는 유적이라 하겠다. 그래서 이 건물이 지니고 있는 우리 민족사적 특히 예산의 향토사적 유적이요 유형문화재라 하겠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금융 및 은행사의 일부를 밝혀주기도 했다.
이에 1910년(국치, 國恥) 전후해 우리나라가 처해있던 국청과 내포를 중심으로 한 충청남도의 금융결제 산업적 농업, 농가소득 등을 짚어 봄으로서 이 건물이 지니고 있는 역사성이 밝혀질 것이다.

설립면허장 휘장·제정일자 미상

 

11. 호서은행과 독립자금 사건

호서은행에서 1930년에 일어났던 사건으로 대한독립운동자금 거금 5만 8,000원을 빼돌렸던 일연 신현상 선생은 1905년 1월 20일 예산군 예산읍 신례원에서 유학자인 신학균 옹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세 되던 해에 한일 조국운동에 몸바칠 뜻을 세우고 고향을 떠나 애국선배들을 찾아 다니며 경세와 창의의 길을 찾던 중 당시에 풍마하던 무정부주의 사상에 도취되었다.
합덕에서 정미업과 미곡상을 경영하는 최석영 동지와 모의를 거듭하던 끝에 은행을 속여서 대금을 빼내기로 계책을 정하고 예산의 호서은행 위조환증을 이용하여 5만 8,000원이란 거액의 돈을 인출해, 의심을 덜 받는 최석영으로 하여금 5만 5,000원을 갖고 뒤쫓아 오도록 하고 본인이 3,000원을 인출한 사건이다.
이 사간은 비록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고 실패로 돌아갔으나, 국내외의 독립운동 전선에 한때나마 큰 흥분과 파문을 일으켜 사기를 올렸다.
그 뒤 선생의 유덕을 추모하며 남긴 뜻을 기리기 위하여 1975년 8월 김신, 이강훈, 서영훈 등과 예산의 유지들이 뜻을 모아 출생지인 신례원 고가 터에 일연각과 추모비를 세웠고, 1990년 10월 26일에 정부로부터 건국훈장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남은 유족으로는 미망인 김봉순 여사와 2남(재우순, 두순) 2녀가 있다.

호서은행 사건과 일연 신현상 선생 연구에서 발췌(예산문화원 이항복[1927年生])

참고문헌
· 한국금융사. 고승재 저
· 조흥은행 70년사. 조선은행 간
· 충청남도 농업요람(1932년 10월20일 발행). 충청남도
· 조선인 회사 대상점사전. 간재치중편집 부엄세계사간 (1926년 1월 28일 간)
· 충청남도 발전사 (1932년 3월 25일 호남일보사 간)
· 일제시대 소읍도시 형성과정에 관한연구. 김득수 석사학위논문, 2003년 8월
· 김명재, 김득수 호서은행본점의 입지배경과 그 도시적 의미 v.14 n.5(한국도시설계학회지 통권 제59호)

 

글. 김득수 Kim, Deuksoo 종합건축사사무소 S.S.P.삼대

 

김득수 건축사·종합건축사사무소 S.S.P.삼대 대표

영등포구지역건축사회 회장(3회 연속), 서울특별시건축사회 회장 직무대행, 대한건축사협회 이사·감사 등을 역임하고, 대한건축사협회 50년사 발간위원장을 지냈다. 서울 영등포구, 동작구 건축·민원조정 위원, 에너지관리공단 건축·도시·관광단지 심의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예산읍 초대 명예읍장으로 위촉(1997.02.15.~2006.12.03.)된 바 있다. 서울특별시 시장 표창 5회와 대통령 표창(제200398호)을 받았으며, ‘일제시대 소읍도시 형성과정에 관한 연구’, ‘일제강점기 근대도시의 도시공간 변화 특성에 관한 연구’ 등의 논문을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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