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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이너의 나이

The designer’s age

송해가 95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 칼럼에서는 어떤 사람이든 존칭 없이 이름만 쓴다. 하지만 ‘송해가’라고 표현하는 것이 왠지 불경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그는 국민의 사랑을 받는 최고령 아나운서였다. 그것이 어떤 직업이건 90대에도 현역으로 활동할 수 있다는 건 분명 축복이다. 포르투갈 영화감독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는 104세의 나이에 장편 영화를 연출했다. 영화 대본도 본인이 썼다. 이 영화에 출연한 배우 잔느 모로는 당시 84세였다. 이런 경우는 아주 희귀하다. 그렇더라도 사람들에게 자극을 준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나이와 일, 성취의 상관관계에 대해 무척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디자이너의 나이는 어떨까?

구겐하임 미술관 건설 현장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1867-1959), 1959년

건축, 디자인계에서 노익장을 과시한 대표적인 인물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다. 그는 말년에 그야말로 일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의 평전을 쓴 에이다 헉스터블에 따르면, 82세가 된 1949년과 1950년만 하더라도 600건이 넘는 의뢰를 받았고, 그가 행한 모든 일의 1/3 이상을 말년 9년, 즉 80대의 나이에 해치웠다고 한다. 1957년, 그의 나이 90세에 마지막 대규모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캘리포니아주 마린 시민센터로서, 이 건물은 나중에 조지 루카스의 SF영화 <THX 1138(1971)>, 그리고 또 다른 SF영화 <가타카(1997)>의 무대가 되었다. 90세 노인의 공상과학적 상상력이 폭발한 것이다. 라이트는 1959년 9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말년에 디자인한 작품이 너무 많아서 구겐하임 미술관을 비롯해 많은 작품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라이트는 말년에도 큰 성취를 이루었지만, 아주 이른 나이에 성공한 건축사이기도 하다. 그가 주택 설계로 두각을 나타낸 시기는 애들러&설리번 사무소를 나와 독립한 1893년이다. 이때 그의 유명한 프레리 양식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26세 때였다. 라이트가 이렇게 이른 출세를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19세기 말 시카고에서 건축을 시작했다는 사실이 있다. 대학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은 그의 진정한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루이스 설리번 역시 19세기 말 시카고에서 일을 시작했다. 설리번의 본격적인 성취는 1879년에 시작되었다. 그의 나이 23세 때였다. 그리고 1889년, 오디토리움 빌딩이 완공돼 설리번 경력의 절정기를 맞이했을 때 불과 33세였다. 이 프로젝트에는 22세의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참여했다. 왜 이들은 이토록 어린 나이에 큰일을 해낼 수 있었을까? 19세기 말 시카고를 비롯한 미국의 주요 대도시에 건축 붐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게다가 시카고는 1871년에 터진 대화재로 인해 도심이 완전히 파괴되었고, 그 재난 덕분에 새로운 건축을 관대하게 수용하는 토대가 마련되었던 것이다.

39세 무렵의 루이스 설리번
(1856-1924)

윌리엄 르 바론 제니(1832-1907)

한편 루이스 설리번에게 철골 건물의 공학과 디자인을 가르친 윌리엄 르 바론 제니는 이들보다 늦은 나이에 자신의 최고 작품을 남겼다. 제니의 주요 경력 중 첫 작품은 홈 인슈어런스 빌딩이다. 철골로 지어진 최초의 마천루로 평가받는 이 빌딩이 1885년에 완공되었을 때 제니는 53세였다. 그의 사무실에는 설리번을 비롯해 다니엘 번햄 등 이른바 시카고 학파의 대표 건축사들이 근무했다. 그들은 독립해서 다들 큰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그 시기가 모두 1880년대다. 이때 설리번과 번햄은 모두 30대의 팔팔한 나이였다. 반면에 제니는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건축을 배운 뒤 미국으로 돌아오자 바로 남북전쟁이 터져 북군 공병으로 복무했다. 그가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에 맡았던 주요 건축 프로젝트는 그랜트 장군을 위한 요새, 그리고 보급선을 단축시키기 위한 도로 건설이었다. 제니가 설리번이나 번햄보다 재능이 모자라서 늦은 나이에 주요 작품을 시작한 것이 아님은 자명하다.

재능은 언제나 그것을 가진 사람의 나이보다는 그것을 요청하는 시대에 따라 폭발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19세기 말에 건축을 시작했다는 것이 그의 경력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인지 알 수 있다. 1932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모던 건축: 국제 전시회>를 기획했던 큐레이터 헨리 러셀 히치콕과 필립 존슨은 라이트를 약간 조롱조로 ‘19세기 아키텍트’라고 불렀다. 그만큼 라이트의 나이가 다른 모던 건축의 개척자들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그는 빌리 더 키드, 부치 캐시디 같은 서부영화의 전설적인 갱들과 동시대 인물이다. 라이트가 젊은 혈기로 모던 주택을 정의할 때 유럽의 거장들인 발터 그로피우스, 르 코르뷔지에,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초등학생이었다. 이들이 뚜렷한 성취를 보인 나이는 대체로 40대 초반이다. 바우하우스 빌딩(1925-1926년, 그로피우스 42세), 빌라 사부아(1928-1931년, 르 코르뷔지에 41세), 바르셀로나 독일관(1929년, 미스 반 데어 로에 43세)이 지어진 시기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경제대공황이 시작되기 전 문화적 황금기였던 1920년대다. 이 시기, 특히 독일에서 가장 진보적인 성취가 건축, 디자인, 미술, 연극, 영화, 문학 등에서 쏟아져 나왔다. 나이가 몇 살이든 창조적인 분야에 종사하는 많은 이들이 이 시기에 최고의 작품을 내놓았다.

나이보다 시대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가 있다. 이탈리아 디자이너 마르첼로 니촐리는 그래픽 디자인과 매장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활동하다가 53세의 나이에 처음으로 기계 제품을 디자인하기 시작했다. 1950년, 63세의 나이에 올리베티 레테라 22 타자기를 디자인했다. 레테라 22는 타자기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타자기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니촐리가 그렇게 늙은 나이에 최고의 산업 디자이너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재능도 출중하지만 이탈리아에서 산업 디자인이 막 시작되던 시기에 그 일을 시작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20세기 중반 이후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마르첼로 니촐리(1887-1969)

비슷한 운명이 미국의 자동차 디자이너 할리 얼에게도 찾아왔다. 1920년대까지 자동차는 엔지니어들이 디자인했다. 얼은 그렇게 생산된 차를 개조하는 디자이너였다. 그의 디자인이 GM의 경영진 눈에 띄어 발탁되었다. GM의 CEO 알프레드 슬론은 자동차 기업 최초로 디자인 부서를 설립해 얼에게 디렉터를 맡겼다. 얼의 나이 34세 때다. 그는 1958년에 은퇴할 때까지 무려 31년 동안 GM에서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 그가 창조한 많은 디자인이 1950년대까지 미국 자동차 스타일을 정의했다. 산업에서 새로운 분야가 막 생겨날 때, 바로 그 순간 뛰어든 사람들은 늘 큰 이익을 본다. 말하자면 무주공산(無主空山), 즉 임자 없는 산을 쉽게 차지할 수 있는 유리한 위치에 있는 것이다. 나이는 늘 두 번째다. 천재성은 스스로 드러나지 않는다. 시대가 불러내는 것이다.

콘셉트 카 뷰익 Y-Job을 타고 있는 할리 얼(1893-1969)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kshin201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