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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벽골제

Gimje Byeokgolje

서기 330년!
지금으로부터 무려 1700년 전의 사건을, 삼국사기는 이렇게 담담히 전하고 있다. 이른바 벽골제의 초축(初築)에 관한 얘기다.

二十一年 始開 碧骨池 岸長 一千八百步
(이십일년 시개 벽골지 안장 일천팔백보)

삼국사기 관련 기록

흘해왕 21년에 처음으로 벽골지(碧骨池)를 축조하였는데, 그 둑의 길이가 1,800보(步)였다고 한다. 1,800보(步)가 어느 정도인지는 단위 환산에 따라 다소 달라지겠지만, 현재까지 발굴조사에서 드러난 길이는 약 3.8킬로미터에 이른다. 무려 십 리(里) 길이다. 자동차 운행에 익숙한 현대인들에게 3.8킬로미터의 거리는 눈 깜짝할 새에 그저 스쳐 지나가는 ‘짧은 거리’이겠지만, 멀고 먼 저 옛날 그것도 초기 철기시대에 맨몸으로 땅을 파고 밟고, 또 흙과 돌을 이고 지고 하면서 저 거대한 제방(堤坊)을 축조했다는 사실은 그저 놀랍기만 하다.
그런데 아직도 밝혀내지 못한 게 수두룩하다. ‘김제 벽골제’라고 하면, 다들 교과서에서 학습한 대로 ‘삼국시대 저수지’ 정도로 알고 있겠지만, 과연 그게 백제인들에 의해서 축조된 것인지, 아니면 그때까지 백제의 세력이 미치지 못했던 탓에 그 이전부터 서해안 남부지역에 군림했던 마한(馬韓)의 어느 부족국가가 축조한 구조물인지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또 우리는 일단 ‘농업용 저수지’로 알고 있지만, 일각에서는 ‘방조제설’, ‘저수답설’, ‘다목적설’ 등을 꾸준히 제기하고 있다. 그 논란도 쉽사리 가라앉을 것 같지 않다. 일견 모두 다 맞는 말이다.

어쨌든 그 실체가 완전히 규명될 때까지, 1700년 전의 사실(史實)에 대한 논의는 다양하게 전개되어야 한다. 그게 애초에 제방을 쌓고 수로(水路)를 열 줄 알았던 삼국시대 우리 선조들의 지혜인 것처럼, 근현대 민주주의의 암흑기를 거쳐오면서 우리 선배들이 붉은 피를 뿌려가며 열어젖혔던 이른바 언로(言路)의 산물이라고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재는 반듯하게 경지 정리된 김제평야의 한복판에서 아무 말 없이 남북으로 길게 드러누워 있는, 그 벽골제 앞에 나는 다시 또 발걸음을 멈췄다. 때로는 저 태평양의 외딴 이스터섬에 의문 가득한 표정으로 남겨진 ‘모아이 석상’을 대할 때처럼, 때로는 이 한반도의 남동쪽 대곡천의 거대한 암벽에 신석기인들이 정성껏 새겨놓은 ‘반구대 암각화’를 응시할 때처럼, 우리 문명의 시원을 열어젖힌 그 거대한 역사의 흔적과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에, 가벼운 전율마저 느껴졌다.

이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지금 우리 건축사들이 건축주와 공무원에게 고비 때마다 시시각각 시달려가며, 밤새 일궈낸 노력의 산물이 이렇게 역사의 흔적으로 남는 것이다. 그게 후세에 다시 또 의문투성이의 ‘모아이 석상(石像)’이 될지, 아니면 산티아고 순례길의 종착지로 강한 인상을 남기고 있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으로 남을지, 그것도 아니면 노트르담의 꼽추로 더 알려진 빅토르 위고의 소설 『노트르담 드 파리』의 무대가 된 ‘노트르담 대성당’으로 더 거듭날지,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기원전 15000년 전, 알타미라 동굴벽화를 그린 어느 구석기인도 우리처럼 몇 번을 망설여가며 기본안을 구상했을지도 모를 일이고, 대곡천 반구대 암벽에 바다 위를 치솟아 오르는 고래를 새겨 넣던 그 신석기인의 손끝에도 온갖 피멍이 맺혔을지도 모를 일이다. 또 ‘노트르담 대성당’의 건축에 참여한 설계자도 간밤에 미열로 고생하던 딸아이 걱정을 하며 서둘러 설계 작업을 마무리해놓고는, 점차 형체가 드러날 때마다 가슴을 쥐어짜며 후회했을지도 모른다.
살다 보면, 힘들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아득히 먼 그 옛날에도 힘들고 고독하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힘이 들고 고독하니, 하나둘 변하고 흩어지길 여러 번 반복하다가, 마침내 때가 되면 순서만 다를 뿐 모두 다 무대에서 내려와 어둠 속으로 총총히 사라지게 된다.

그 옛날 그때도, 간밤엔 소쩍새 소리가 밤새 그칠 줄 모르고 귓전을 울렸을 테고, 또 이른 아침이 되자 대문 밖 기와지붕 망와(望瓦)에 올라앉은 종달새는 꼬리를 촐싹대며 쉴 새 없이 지저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세월은 가고, 그 소쩍새와 종달새마저 모두 다 사라지고 난 지금, 마침내 그 거대하고 찬란한 구조물만 우리 앞에 실체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벽골제의 전설 속 쌍룡(雙龍)

벽골제 수문 장생거

그런데 벽골제 전설 속에 까마득히 묻혀있던 청룡과 백룡이 다시 또 경천동지(驚天動地)하며 나타난 것인지, 한바탕 요란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지방선거를 목전에 둔 선거유세 차량이다. 목청조차 날카롭기 그지없다. 애써 민심을 구걸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휴대폰으로 속속 접수된 문자 메시지에서도 이제는 염치조차 찾아볼 수 없다. 겨우 4년 더 먹고살자며 그리 애걸복걸한다.
아, 그런데 우리는 4년이 아니라, 한두 세기(世紀)를 뛰어넘어 저 먼 후대까지 길이 전승될 ‘흔적을 남기는 작업’을 하고 있지 않던가? 저렇게 애써 남에게 구걸하려고도 하지 않은 채, 오로지 내면으로만 침잠해가며 가시적 결과물을 도출해내기 위해 여태까지 숱하게 밤잠을 설친 게 아니던가? 따지고 보면 지금 이 시대의 언어로 창출해서, 바로 이 지점 우리들의 생활상을 저 먼 후세에 전달해 주고자 그렇게 안간힘을 쓴 것이기도 하다.

엄중한 기록을 남긴다는 차원에서 보면 사관(史官)이기도 하고, 형태를 빚어낸다는 측면에서 보면 조각가이기도 하며, 우리 실상을 하나의 프레임을 통해서 재구성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소설가이기도 하다. 또 이 지구상 어느 한 지점의 좌표를 선정하여 인공구조물을 덧붙인다는 측면에서 보면, 조물주의 속성도 동시에 지닌 것 같다. 그러니 결코 간단하거나 만만한 일은 아니었던가 보다. 예로부터 집을 뜻하는 우(宇)와 주(宙)를 합쳐서 우주(宇宙)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름부터 그렇게 거창한 일이었다. 작디작은 집 하나에 우주를 통째로 담아내다니!

김제 벽골제를 둘러보고 나오면서, 기디온(S. Giedion)의 저서 『공간, 시간, 그리고 건축(Space Time and Architecture)』을 떠올리게 되었다. 건축은 단순히 물리적인 실체를 구현하는 작업이 아니라, 좀 더 근원적인 지향점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삼 건축사(建築士)라는 직업의 무게가 느껴졌다.
이내 다시 좁디좁은 사무실에 돌아와 캐드 자판을 연신 두드리고 ESC 키를 남발하고 있지만, 이 사소한 손짓 하나로 인해 암벽에 새기고 평지에 구축하고, 또 석상(石像)을 남길 수도 있다는 생각에, 사무실 구석을 혼자 지키고 있는 것조차 이제 외롭지 않게 되었다. 점점 무더워지는 여름, 건축사 여러분들의 건투를 빈다.

 

글. 최상철 Choi Sangcheol 건축사사무소 연백당

최상철 건축사 · 건축사사무소 연백당

최상철은 전북대학교 건축학과와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마치고, 현재 ‘건축사사무소 연백당’ 대표건축사로 활동하고 있다. 그 동안의 건축설계 작업과정에서 현대건축의 병리현상에 주목하고, 산 따라 물 따라 다니며 체득한 풍수지리 등의 ‘온새미 사상’과 문화재 실측설계 현장에서 마주친 수많은 과거와의 대화를 통하여 우리의 살터를 좀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서, ‘건축’에 담겨있는 우리들의 생각과 마음을 알기 쉬운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다. 저서로는 ‘내가 살던 집 그곳에서 만난 사랑’, ‘전주한옥마을’ 등이 있다.
ybdcsc@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