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건축사지 2022. 11. 1. 21:02
Turn off yesterday and turn on tomorrow

 

맑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졌다. 소나기였다. 서둘러 창을 닫았다. 닫히는 창문 틈을 비집고 바람이 훅 쏟아졌다. 창 넘어 보이는 나뭇가지들은 온몸을 떨며 바람을 맞고 있었다. 십여 분이나 흘렀을까? 땅이 채 흠뻑 적기도 전에 비가 그쳤다. 창문을 다시 열었다. 바람의 온도가 바뀌어 있었다. 뺨에 닿는 공기가 서늘했다. 가을이 코앞에 있었다. 불과 몇 분 만에 훌쩍 계절이 바뀌는 다리를 건너온 것 같았다. 나뭇잎이 우스스 서로 스치며 바스락 소리를 냈다. 나무들은 어느새 초록을 끄고 단풍을 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초록이 꺼지고 단풍이 켜지는 찰나!가 울컥 느껴졌다.
곧 천지에 단풍이 들겠지? 이어서 낙엽이 지고, 나무들은 빈 몸으로 겨울을 맞을 것이다. 겨우내 마른 가지에 새 움을 키우다가 봄이 되면 슬그머니 연둣빛 새 잎을 내놓을 것이다. 내년의 그 잎은 지금 저물어가는 초록이 되살아나는 것일까? 아니면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는 것처럼 올해와 똑같은 초록은 다시 볼 수 없는 것일까? 생각은 엉뚱한 곳으로 흘러 미술품 보존복원 전문가를 모델로 내세운 광고 영상을 떠오르게 했다. 코로나 백신 접종으로 일상 회복의 기대감이 높았던 2021년, 기아자동차가 시리즈로 만들어 내보낸 광고다. 영상 속의 모델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사라지고 마스크를 벗어도 팬데믹 이전으로 감쪽같이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라는 진실을 미술품 복원에 빗대어 이야기하고 있다.

 

    자막) 미술품 보존복원 전문가 김겸
    김겸) 감쪽같이 돌려놓는 복원이라는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작품에게도, 우리에게도 회복의 시간이라는 게 필요하죠.
              견뎌낸 시간만큼 더 단단해진 우리의 일상이 모두에게 돌아올 겁니다.
    Na)    더 뉴 기아 K9.
    자막) Masters that inspire The new Kia K9
              KIA
              Movement that inspires

 

나는, 초록이 꺼진 자리에 단풍이 켜질 것을 알지만 코로나가 꺼진 자리에는 무엇이 켜질 것인지 아직 알지 못한다. 코로나가 강제한 거리두기와 혼자 놀기, 자가위생검열이, 강제성이 사라진 후의 내 일상에 어떤 흔적을 남길지 궁금하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기아 광고 속 복원 전문가의 말처럼 완벽한 복원이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팬데믹 이전의 나는 아주 바빴다. 지나치게 오지랖이 넓었다. 다른 사람을 만나는데 많은 시간을 쓰느라 내 안 깊은 곳의 나를 잊고 살았다. 늘 시간이 부족했는데 늘 시간을 헤프게 썼다. ‘돈이 없지 마음이 없냐’를 모토로 순간의 감정에 쉽게 몰입했다. 혼자 흥에 겨워 남보다 빨리 마음을 열고, 남들도 다 나 같으려니 순진하게 믿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며 자주 현실을 외면했고 미래의 불안함을 얼렁뚱땅 얼버무렸다. 
변함없는 똑같은 날들이 영원히 되풀이될 것처럼 미련하게 살다가 코로나19 바이러스와 만났다. 그리고 3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어찌어찌 적응해 살다 보니 이제는 코로나 이전으로 ‘감쪽같이 복원’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지나온 날들은 지나온대로 충분하다는 자각이 들었다. 계절이 열두 번 바뀌는 동안 어쩌면 과거는 이미 서서히 잊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제가 사라진 자리에 내일이 서서히 밀려들고 있다.

역시 상념은 제멋대로 흘러 아주 오래 전에 만들었던 에너지의 날 행사 슬로건 ‘불을 끄고 별을 켜다’가 생각났다. 국내 최대 규모의 에너지 전문 NGO 연대기구인 ‘에너지시민연대’는 매년 8월 22일 에너지의 날이 되면 밤 9시부터 5분 동안 모든 건물의 전등을 끄는 행사를 진행한다. 2004년엔가 그 단체의 간사로 있던 친구의 부탁으로 만들었던 슬로건이자 행사 명칭이 바로 ‘불을 끄고 별을 켜다’이다. 나와 꿍짝이 가장 잘 맞는 아트디렉터와 간사인 친구까지 셋이 앉아 회의를 하다가 30분이 지나기도 전에 떠올라 결정한 슬로건이다. 단 4개의 단어로 이루어진 짧은 문장이 내가 쓴 카피 중에 가장 오랜 수명을 기록하며 올해까지 쓰이고 있다. 

 

불을 끄면 별이 보인다. 별을 보려면 아쉬워도 불을 꺼야 한다. 
코로나 이후를 환하게 밝히려면 코로나 이전을 꺼야 한다고 말하면 지나친 역설이 될까?
나는 지금, 코로나의 긴 터널을 지나면서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기꺼운 마음으로, 어제를 끄고 내일을 켜고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0jCCMBNiM2I
기아_더 뉴 기아 K9 | Masters that inspire, 김겸 편_2021_유튜브 링크

 

글. 정이숙 Jeong, Yisuk 카피라이터

 

정이숙 카피라이터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카피라이터로 광고와 인연을 맺었다. 롯데그룹의 대홍기획을 시작으로 한화그룹의 한컴, 종근당의 벨컴과 독립 광고대행사인 샴페인과 프랜티브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로 일했다. 지금은 디지털 마케팅 에이전시의 CD로 퍼포먼스 마케팅의 세계에 발을 담그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응답하라 독수리 다방>(2015), <광고, 다시 봄>(2019), <똑똑, 성교육동화>시리즈(2019) 12권, <김민준의 이너스페이스>(2020)가 있다.
abacaba@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