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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가 장악한 세상 2022.4

BillKim 2023. 2. 18. 09:06
A world dominated by the media

 

현대인은 자신이 얼마나 미디어에 장악 당한 채 살아가고 있는지 느끼지 못한다. 현대인은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미디어에 접속하고 잠이 들기 바로 전까지 그 접속 상태가 지속된다. 그리하여 미디어가 없는 세상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것을 보여주는 현상은 곳곳에서 찾을 수 있다. 그중 하나는 과거를 재현하는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때 쉽게 찾을 수 있다. 세계적으로 흥행한 영화 <글래디에이터>를 보면, 로마 원로원의 위원들이 검투사 경기가 열린다는 홍보 전단지를 보는 장면이 나온다. 고대에 종이가 얼마나 귀한 물건이었는지를 생각하면 이런 장면은 결코 연출될 수 없다. 물론 현대의 사극 영화들은 그러한 고증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을 무시해도 된다고 영화 제작자들은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중세까지 종이가 극도로 귀한 물건이라는 걸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중세까지도 종이가 대단히 귀했다. 중국의 채륜이 발명한 종이는 10세기가 되어서야 북아프리카를 통해 스페인 지역에 겨우 도착했기 때문이다.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이용한 인쇄술을 발명한 시기가 15세기 중반인데, 이때서야 비로소 전 유럽에 종이가 퍼진 상태였다. 종이가 없던 시절에는 양피지를 사용해 기록을 하고 책을 만들었다. 양피지는 염소, 양, 송아지 같은 살아 있는 가축을 죽여 그 가죽으로 만든 종이다.<사진 1> 중세 유럽에서 가축은 대단히 귀해서 우유, 털, 노동력을 착취한 뒤 더 이상 이용할 가치가 없을 때 비로소 도축했다. 요즘처럼 전적으로 식용으로 키우는 게 아니라 에너지를 제공하는 소중한 자원이었다. 그런 자원을 기록을 위해 도살한다는 건 상당한 대가를 치르는 일이었다. 그런 종이를 검투사 경기의 홍보용 전단지로 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종이를 홍보용 전단지로 쓴 것은 인쇄술이 발명된 뒤인 16세기부터다. 그마저도 양피지가 아니라 식물로 만드는 종이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진 1> 양피지를 만드는 모습. 양, 염소, 송아지 가죽으로 만드는 양피지는 상당히 고가 의 물건이다.


알렉산더 대왕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며 “알렉산더 대왕이 어린 시절부터 책을 무척 좋아했다”는 대목을 듣고 나는 또 한 번 미디어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대인이 이런 말을 들으면 알렉산더 대왕이 위대한 군사 전략가이면서 동시에 지적 호기심도 대단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알렉산더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머리맡에 두고 즐겨 봤다고 한다. 만약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아들이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머리맡에 두고 즐겨 봤다면 그 아이는 정말 지적 호기심이 대단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왜냐하면 책 보기를 방해하는 매력적인 미디어들이 주변에 널려 있기 때문이다. TV, 컴퓨터, 스마트폰의 유혹을 물리치고 책을 본다는 건 정말 책에 대한 도를 넘는 집착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알렉산더는 어땠을까? 그의 주변에는 어떠한 미디어도 없다. 미디어가 없다는 건 즐길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칼싸움이나 씨름 같은 몸을 써서 하는 놀이는 언제든지 즐길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언어 정보로 구성된 콘텐츠는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없는 것이다. 그나마 책이 있으면 좋겠는데, 양피지로 만든 책은 엄청난 고가인데다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도 거의 없어서 책은 잘 만들지 않았다. 고대는 물론 중세까지도 90% 이상의 민중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소리꾼의 목소리로 들었지 결코 책으로 보지 않았다. 떠돌이 소리꾼이 동네에 나타나 한번 들려주고 떠나면, 그 재미난 이야기를 언제 또 들을 수 있을지 기약이 없었다. 심지어는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의 저자인 호메로스조차도 자신의 이야기를 글로 쓴 적이 없고, 이 동네 저 동네 떠돌아다니며 입으로 노래했던 것이다. 그런 시대에 왕의 아들이라는 금수저로 태어난 알렉산더는 그 귀한 책을 소유하는 특권을 누렸던 것이다. 미디어가 없이 무료한 날을 보내는 고대인들에게 책은 기가 막히게 재밌는 사물이었다. 독서를 극도로 싫어하는 우리 아들이 만약 고대 세계로 시간 여행을 떠났다면, 스마트폰에 빠져 사는 것보다 훨씬 심각하게 책에 중독되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알렉산더가 책을 좋아했다는 사실은 이렇게 번역해서 들어야 한다. 그는 손쉽게 책을 얻을 수 있는 특권을 가짐으로써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똑똑하게 자랄 수 있었다. 

아무튼 유럽의 심각한 책 부족 현상은 15세기에 구텐베르크가 가동활자와 인쇄술을 발명함으로써 해결되었다.<사진 2> 책의 대량 인쇄가 가능해짐으로써 그전에는 책으로 옮기지 않고 단지 구전되던 시와 소설 같은 대중문학이 본격적으로 문자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바로 이것이 유럽의 역사를 뒤바꾼 전환점이 되었다. 인쇄술이 발명되기 전까지 사람들은 대부분의 정보를 음성으로 들었다. 문자를 아는 지식인들조차 그랬다는 것이다. 책이 대량생산되자 책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인쇄술 발명 전까지 유럽 도서관의 책을 다 모아도 5만 권이 안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인쇄술 발명 뒤 50년의 기간 동안 유럽에서는 무려 900백만 권 이상의 책이 발행되었다. 그렇게 되면 문자를 아는 지식인들의 정보 유통 방식이 혁명적으로 바뀐다. 목소리로 듣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읽는 것이다. 이것은 무슨 의미를 가질까? 

<사진 2> 구텐베르크가 인쇄한 성경, 1450-1456년.


귀로 듣는 소리 미디어는 시각에 호소하는 문자 미디어보다 훨씬 감정적이다. 공간을 가득 채워 귀로 들어오는 소리는 사람의 감정을 뒤흔들 수 있다. 배우는 같은 단어를 수 십 가지 다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현대인은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문자로 읽을 때 좀처럼 감정의 동요가 일어나지 않는다. 반면에 호메로스가 노래하듯이 이야기해 주는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를 듣는 고대인들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울렁임은 현대인이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것을 훨씬 넘어선다. 귀로 듣는 이야기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과 마음으로 들어온다. 반면에 문자로 읽는 이야기는 가슴과 마음이 아니라 머리, 즉 이성에 호소하므로 좀처럼 감정적 동요를 일으키지 못한다. <일리아드와 오디세이> 같은 고대의 서사시는 기본적으로 음성으로 전달하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므로 현대인이 그것을 문자로 읽는 것은 마치 영상을 보지 않고 영화 시나리오를 읽는 것처럼 메마른 것이다. 이것이 청각에 호소하는 예술인 음악이 시각에 호소하는 예술인 미술을 감정적으로 압도할 수 있는 이유다. 회화는 기본적으로 그 내용을 해석할 수 있는 사전 지식과 이성을 필요로 하지만, 노래는 사전 지식 따위 필요 없이 순식간에 사람을 사로잡는다. 문자 메시지의 세계에서 이모티콘이 발전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시각, 즉 이성에 호소하는 문자가 메마른 미디어이기 때문이다. 현대의 소설가가 묘사력이 뛰어난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그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문자밖에 없는데, 문자는 기본적으로 논리적 속성을 지닌다. 따라서 소설가는 가능한 한 독자가 머릿속에 생생한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도록 자세하고 섬세한 묘사력을 곁들여 독자의 감정적 동요를 일으키려는 것이다. 미디어가 덜 발달한 20세기 중후반기까지만 해도 이런 소설은 힘을 가졌다. 하지만 영상 미디어에 완전히 장악 당한 21세기의 젊은 세대들은 소설의 치밀한 묘사를 읽어낼 능력을 키우지 못한다. 

음성 미디어의 또 다른 특징은 즉흥적이라는 것이다. 고대와 중세의 이야기꾼들은 처음에 정한 대로 이야기하는 법이 없다. 관객의 반응에 따라 이야기를 바꾸기도 하고, 흥분한 관객이 끼어들어 이야기가 즉흥적으로 바뀌기도 했다. 음성 미디어는 동시적이기 때문이다. 음성 미디어는 화자와 청자가 같은 장소와 같은 시간대에 있어야 소통된다. 또 음성으로 전달되는 메시지는 논리적으로 정확하지 않아도 대체로 그 맥락이 관객에게 전달된다. 아무리 훌륭한 문장가라고 하더라도 연설을 시키면 논리가 흐트러지고 비문이 쏟아지기 마련이다. 그렇더라도 청자는 소리가 갖는 풍부한 정보(소리의 높낮이와 장단, 감정)로 인해 쉽게 설득된다. 반면에 문자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면 독자는 당장 비문과 오탈자를 들춰내며 저자의 논리를 지적할 것이고, 그 문장은 설득력을 잃고 만다. 사람들은 음성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문자에 대해서는 가혹하다. 소통이 이루어지는 환경도 중요하다. 화자와 함께 하는 청자와 달리 문자를 읽는 사람은 혼자 고립된 채 읽는다. 동시성이 없으므로 다른 관객의 반응으로부터도 고립되어 있다. 그리하여 독자는 더욱 논리적으로 문장을 독해하려고 한다. 한번 쓰인 문자는 결코 즉흥적으로 바뀔 수도 없다. 탁월한 미디어 학자인 마셜 맥루언은 <미디어의 이해>에서 시각에만 호소하는 문자 미디어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시각 기능을 강화하고 확장하는 표음 알파벳은 문자 내에서 청각이나 촉각, 미각 같은 다른 감각들의 역할을 빼앗는다.” 따라서 문자 문화에 속한 사람들은 대단히 차갑고 논리적으로 사고의 체계가 변화한다. 이것이 구텐베르크가 인쇄 혁명을 일으킨 뒤 유럽인에게서 일어난 변화다. 책은 순차적으로 봐야 하며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집착하도록 만든다. 문자 미디어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은 분석과 분류에 더 능통하여 끊임없이 개념을 만들어내고 이러한 사고체계가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킨다. 동양에서도 책은 오래전부터 존재했지만, 대량 인쇄술이 없었던 관계로 19세기가 끝날 때까지도 문자 미디어가 아닌 음성 미디어의 세계에서 살았다고 할 수 있다. 
문자를 기반으로 한 책이라는 미디어의 특징은 움직이고 소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고대에는 벽이 미디어로서 유력하게 이용되었다. 벽은 이동할 수 없고 소유하기도 쉽지 않다. 그에 반해 책은 이동해서 다른 지역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소유할 수 있다. 마셜 맥루언은 미디어는 “인간 감각 기관의 연장”이라고 정의한다. 그런 미디어는 끊임없이 확장하려는 속성을 가지기 때문에 결국 벽을 벗어나 종이로, 그리고 책으로 확장을 했고, 20세기에 들어와 책보다 훨씬 가볍고 빠르게 이동하는 전파 미디어인 전화기, 라디오, TV로 확장되었다. 21세기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디지털 신호를 기반으로 한 온라인 미디어 전성시대를 낳았다. 손아귀에 잡히는 미디어를 누구나 소유하고 있다. 알렉산더 대왕이 그토록 소중하게 여긴 두루마리 책의 수백만, 아니 수천만 배 이상의 정보를 언제 어디에서든지 볼 수 있다. 이렇게 완벽하게 미디어에 둘러싸인 환경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은 고대, 아니 20세기 전반기의 사람과도 완전히 다른 별개의 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태어나자마자 온라인 미디어의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태어나서 TV 정도가 가장 친숙한 미디어로 알았던 50대 이상 사람과도 별개의 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미디어는 언제나 사람의 사고체계를 바꾸기 때문이다. 미디어는 사람의 사고뿐만 아니라 디자인조차 통제한다. 새로운 미디어가 등장할 때마다 디자인은 급격하게 변화해왔다. 이 부분은 다음 호에 이야기해볼까 한다.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 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kshin201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