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살생부 쓰기 2023.2
Writing a book ‘Salsengbu(hit list)’
해마다 연말, 연초가 되면 하는 이벤트가 있다. 책꽂이 정리다. 책은 꾸준히 늘어나는 데 반해 집안의 공간은 늘어나지 않는다. 책꽂이에 책을 꽂으면 약간의 남는 공간이 생긴다. 키가 비슷한 책들의 윗부분, 그리고 책을 밀어 넣은 뒤 남는 앞부분이다. 이 공간들마저 책으로 채워지고 있다. <사진 1> 이제 책을 빼내기도 쉽지 않다. 나중에 꽂힌 책들에 가린 뒤쪽 책들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책은 멀어진 책과 같은 신세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돼버리는 것이다. 거리가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는 것처럼 보이지 않아서 심리적으로 멀어진 책은 읽힐 가능성이 현저히 줄어든다.
그리하여 나는 책을 대처분하기로 한다. 최소한 수백 권은 버려야 한다. 이제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훨씬 줄어들었다. 과연 이 책들을 다시 볼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책의 살생부를 쓰기 시작한다. 완독하지는 못하더라도 직업적으로 언젠가는 한 번이라도 들춰볼 가능성이 있는 책들은 남겨두기로 한다. 미술, 사진, 건축, 디자인, 공예, 영화, 광고, 미디어/이미지론, 소비이론 같은 범주의 책들은 아무리 봐도 버릴 게 없어. 그냥 놔두기로 한다. 철학, 역사서도 왠지 몇 페이지라도 볼 거 같아. 게다가 인류의 소중한 사상을 담은 책은 가치가 높아. 역시 버리지 못한다. 내 전공은 아니지만 과학책이 또 백 권이 넘는다. 신문 주말판 책 소개란에 실려 나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해 속절없이 사둔 책들이다. 많이 읽어봐야 몇 십 페이지 정도 진도가 나가다 만 그런 책들이 수두룩하다. 나의 지적 교양을 위해 이 책들은 언젠가는 꼭 읽으리. 게다가 철학이나 역사만큼이나 재미있고 사상적 가치가 높아 남겨두기로 한다.
만만한 건 역시 문학 분야다. 예전에도 늘 살생부에서 제거 대상에 주로 오르던 책들이 소설과 수필이다. 왠지 또 읽어볼 거 같지가 않아. 꼭 다시 읽어보고 싶다면 도서관에서 빌리면 되지. 몇 권을 고르려고 했는데, 이미 많이 없애버렸고 정말 꼭 남아야 할 것만 남아서 이제는 선정할 책 찾기가 오히려 힘들어졌다. 결국 최재우의 『동주열국지』 8권을 살부에 등록했다. 내가 언제 『열국지』를 또 보랴. 이 책은 매년 살부 후보에 올랐다가 가까스로 살아남기를 반복했으나 올해는 넘기지 못했다. 하지만 고우영의 만화 『열국지』 4권은 도저히 버리지 못했다. 『열국지』를 펼쳐본 순간 그 속의 그림들이 너무나 매력적이다.<사진 2> 마치 중세 채식필사본처럼 빛이 나는 거 같아. 나는 그 이미지에 황홀해하면서 이 책은 오래 간직해둬야겠다는 다짐까지 하고 말았다. 역시 이미지는 힘이 세다.
이미지가 힘이 세다는 걸 또 한 번 증명해 준 책이 있다. 한때 밀리터리와 프라모델 월드에 푹 빠져서 산 항공모함, 전투기, 탱크, 무기 관련 책들이 가뜩이나 비좁은 내 책꽂이를 무려 두 칸이나 점령하고 있다. 내가 언제 또 프라모델을 만들 것이며, 또 언제 무기 책들을 들여다볼까? 내 책이 줄어드는 걸 간절히 소망하는 내 아내가 늘 하는 충고가 떠오른다. “죽기 전에 그 책 또 볼 거 같아?” 게다가 평화를 염원하는 내 철학과도 맞지 않는 무기 책을 간직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 그래서 『The Great Book of Combat Aircraft』라는 책을 살부 리스트에 올리고자 펼쳐보았다. 내지 펼침면을 보는 순간 나는 또 한 번 중세 채식필사본을 보듯 눈이 부셨다.<사진 3> 아 이토록 아름다운 전투기들이라니! 인류가 이 아름다운 무기들을 쓰지 말고 감상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부질없는 망상을 하다가 항공모함, 전투기, 탱크 책들은 밀리터리가 아니라 디자인 범주에 속한다는 큰 깨달음에 이르렀다. 이 책들은 디자인 범주 칸으로 옮겨 살려두기로 한다. 대신 프라모델 관련 책들은 살부에 올리기로 한다. 눈도 침침해지는 판에 내가 언제 또 프라모델을 만들 것인가? 이것은 정말 내 아내의 충고에 가장 잘 들어맞는 책들이 자명하다. 그리하여 이 분야에서 무려 5권의 책을 살부에 등재할 수 있었다. 아내의 충고는 언제나 옳다. 아니 옳다기보다 실용적이다. 하지만 프라모델 책들 중에서도 제작 기술을 가르쳐주기보다는 잘 만든 프라모델 도록은 역시 버릴 수가 없었다.<사진 4> 그것은 프라모델 책이라기보다 디자인 작품집에 더 가까우니까.
해마다 책 살생부를 작성할 때 무거운 마음을 가볍게 해주는 범주가 하나 있다. 바로 잡지다. 잡지 인생을 17년 살아온 만큼 내 주변에는 잡지로 넘쳐난다. 사람들은 잡지를 아무런 미련 없이 버리지만 나는 잡지도 웬만하면 모아둔다. 잡지도 아름다운 이미지로 가득하며, 책에서는 볼 수 없는 정보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잡지는 느리지만 꾸준하고 성실하게 공간을 잠식해나간다. 내가 과거에 만들었던 잡지는 차마 버릴 수 없어 모아두었지만, 정말 어느 순간 그 얇은 잡지가 책꽂이를 가득 메워버렸다. 게다가 책보다 들춰볼 일이 더 없다. 그리하여 대거 노끈으로 묶어서 창고로 귀양을 보내버렸다. 그리고 지난해 배달된 잡지들, 왠지 모아두어야 할 거 같은 잡지들 수십 권을 살부에 등록했다. 잡지를 버리는 게 왜 더 마음이 가벼울까? 그것은 아마도 정보의 질서가 책보다 부족하기 때문이 아닐까. 엔트로피 법칙으로 설명한다면 책은 질서가 더 높고 따라서 더 단순하다. 정보를 찾기가 더 쉽다. 잡지는 책과 견주면 무질서하고 복잡하다. 정보를 찾기 힘들다. 엔트로피가 낮은 책은 엔트로피가 높은 잡지보다 가치가 있어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고 정말로 잡지가 책보다 가치가 낮다는 것은 아니다. 시각적으로 그렇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의 살생부를 쓰다가 누군가에서 들은 책 스캔 서비스를 떠올렸다. 책을 스캔해서 PDF 파일로 만든 뒤 버린다는 것이다. 전자 책과 물리적 실체를 갖는 책은 분명 다르지만, 둘 다 똑같은 정보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는 동일이다. 나는 당장 그것을 실천해 보기로 하고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봤다. 그랬더니 책 한 권을 전자문서로 바꿔주는 서비스 비용이 무려 2만 원 안팎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책을 전자문서로 바꾸는 이유는, 나의 경우는 순전히 물리적 공간의 확보에 있다. 그렇다면 책 한 권의 공간 확보에 2만 원이 드는 셈이다. 돈이 많으면 수백만 원을 투자해 물리적 공간을 확보하고 싶다. 하지만 나로서는 비용 초과다. 돈이 있더라도 그렇게 못할 거 같다. 왜 그럴까? 책은 읽히지 않아도 정보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은 사물이다. 언제든지 나에게 요긴한 정보, 아름다운 이미지, 인생의 큰 깨달음,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 기회를 갖는다면, 즉 그것이 읽히기만 한다면, 책만큼 우리에게 풍요로운 것을 줄 수 있는 사물이 또 있을까? 책은 읽히지 않아도 그 자체가 아름답다. 책만 한 인테리어 소품이 또 있을까?
아주 작은 쓸모의 가능성 때문에 물건을 하나도 버리지 못하고 집안을 가득 채우는 저장강박증 환자처럼 나는 결국 수백 권의 책을 버리겠다는 목표는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 차라리 돈을 더 벌어서 더 큰 공간을 확보한 뒤 내가 가진 모든 책들이 살아남는 그런 희망을 가져보기로 한다. 사실 내가 죽으면 이 책들 죄다 버려질 것이 뻔하지만,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안전한 삶을 보장해 줘야 할 것이다. 책의 살생부를 더 이상 쓰지 않는 날을 기원해 보는 것이다. 또 하나 생각해볼 것이 있다. 물리적인 책과 실체가 없는, 즉 가상공간에 파일로 존재하는 책은 과연 동일한 가치를 지니는가? 그 이야기는 다음 달에 해보기로 한다.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