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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적 이미지 vs 가상공간 속 이미지 2023.3

월간 건축사지 2023. 3. 16. 13:26
Physical Image vs Cyberspace Image

 

〈사진1〉 19세기 전반기의 채색석판

 

1980년대에는 영화를 보고 싶다면 극장엘 가든지 아니면 주말에 TV에서 해주는 영화 프로그램을 보는 수밖에 없었다. 당시 TV 채널은 3개밖에 없어서 주말에 해주는 영화도 3편이 최대치다. 극장에서 개봉하거나 TV에서 해주는 영화 이외에는 볼 길이 없었다. <시민 케인>, <게임의 규칙>, <전함 포템킨> 같은 영화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걸작들은 그 이름이 알려져 있을 뿐 볼 수가 없었다. 그저 잡지에 실린 스틸 이미지로만 아는 영화가 대부분이던 시절이었다. 그러다가 비디오가 대중화함으로써 영화를 보는 새로운 통로가 생겼다. 하지만 대중적인 영화 위주로 출시되는 비디오로는 나 같은 시네필(Cinephile, 영화 애호가)의 갈증을 채워주지 못했다. 

그러다가 1990년대 중반 이후 디지털과 인터넷 세상이 열리면서 영화 정보가 갑자기 폭발했다. 나는 21세기에 들어서 열심히 DVD를 구매하다가 어느 시점부터는 영화를 디지털 파일로 소장하기 시작했다. 내가 언제든지 꺼내 볼 수 있는 영화가 수천 편에 이르렀다. 어디 그뿐인가, OTT 서비스까지 더하면 언제든지 볼 수 있는 영화가 수만 편에 이를 것 같다. 이렇게 영화가 흔해지자 이번에는 예상치 못한 현상이 나타났다. 영화를 보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이 사라진 것이다. 디지털 시대 이전에 귀한 정보는 ‘소장’이라는 욕망의 대상이었다. 반면에 요즘 젊은 세대는 법정스님의 무소유 정신을 실현하듯 소장에 초연한 것 같다. 언제든지 온라인에 접속하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접속해서 언제든지 볼 수 있는 정보, 그리고 물리적인 실체로서 내 주위에 있는, 즉 소장하고 있는 정보는 큰 차이가 있다. 그것은 라이프스타일을 바꾸며 심지어는 집안 인테리어에도 영향을 미친다. 

지난달 글의 연장선에서 책을 스캔해서 디지털 파일로 소장하는 것과 책꽂이에 꽂아서 소장하는 것의 차이부터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이북(e-book)도 많이 가지고 있다. 이북의 형태든 PDF 파일로 하드 디스크 속에 저장된 형태든 디지털 책은 내가 의식적으로 찾지 않는 한 눈에 띄지 않는다. 반면에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은 내가 그 책이 있는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강제적으로라도 눈에 들어온다. 이 둘의 존재 방식은 자극의 차이를 낳는다. 물리적인 책은 디지털 책보다 훨씬 더 나를 자극하며 말을 건다. 나를 좀 봐달라고 속삭인다. 때로는 언제까지 자신을 방치할 것이냐고 나를 책망하기도 한다. 이런 속삭임에 굴복해 책을 펼쳐 몇 페이지를 읽어보기도 한다. 이런 속삭임은 물론 정말로 책이 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만약 시각적으로 눈에 띄지 않는다면 그런 마음과 잠시나마 책을 펼쳐보는 일도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마음의 움직임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책이 눈에 띔으로써, 즉 ‘우연히’ 생긴 것이다. 

디지털 책을 보는 경로는 이와 다르다. 디지털 책은 스마트폰 앱을 켜든지, 아니면 컴퓨터 폴더를 찾아 들어가는 수고를 해야 한다. 이러한 행동을 촉발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반드시 책을 봐야 하는 어떤 이유가 있어서 앱을 켜거나 컴퓨터 폴더를 여는 것이다. 다시 말해 디지털 책을 보는 데는 우연보다는 ‘의지’가 필요하다. 나는 동시에 여러 권의 책을 찔끔찔끔 보는 버릇이 있다. 책꽂이 옆을 지나다가 ‘어, 저 책 읽다 말았지’ 하면서 꺼내서 훑어본다든지, 그냥 심심풀이로 책들을 둘러보다가 어쩐지 손이 가는 책을 꺼내 본다든지 하는 경우가 있다. 의지와 상관없이 책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에 비롯된 우연한 만남인 것이다. 그렇다면 물리적인 책이란 자주 자신을 보여줌으로써 일종의 광고를 하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디지털 책은 자신의 매력을 끝까지 숨기고 있는 수줍음 많은 책이다. 소장자의 의지가 없다면 영원히 가상의 공간에서 외면당할 신세다. 

태어나자마자 디지털 세상을 사는 젊은 세대는 이런 나의 분석을 납득하기 힘들 것이다. 디지털로 정보를 얻는 것이 훨씬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포털 사이트의 홈페이지나 유튜브 첫 화면에서 서로 자신을 봐달라고 아우성치는 정보의 파편들을 선택하는 것이 우연한 정보 접근의 사례일 것이다. 그들에게 필요한 정보란 책이 아니라 디지털 세상에서 언제든지 구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굳이 소유를 할 필요가 없다. 그런 무소유 태도가 가장 극명하게 나타나는 것이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의 이미지다. 

 


디지털 세상이 되기 전 이미지는 결코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디지털 이전의 이미지는 물리적인 실체를 가져야 한다. 그것은 인쇄된 낱장의 종이거나 여러 이미지들을 담고 있는 물리적인 잡지나 책이다. 물론 영화나 TV의 이미지도 있지만, 그것 역시 물리적 실체가 없다는 점에서 디지털 이미지와 비슷하다. 스크린에 투사된 이미지, 전파를 타고 온 TV의 이미지는 내가 손으로 움켜잡거나 소유할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책과 잡지, 낱장의 종이에 인쇄된 이미지는 영원히 고착되어 있고, 내가 움켜쥘 수 있으며, 그리하여 소유할 수 있다. 그것을 얻는 방법은 돈과 교환하는 것이다. 반면에 오늘날의 디지털 이미지는 무료, 또는 아주 적은 비용으로 볼 수 있다.  

디지털 시대가 되기 전의 이미지는 흔하지 않았으므로 값이 나가고, 그런 이미지를 얻으면 그것을 소장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다. 특히 자기가 좋아하는 스타의 이미지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 욕망이 대형 사진을 방의 벽에 부착하는 문화를 낳았다. 스크랩 역시 이미지가 소중하던 시절의 문화다. 디지털 시대가 오기 전 학생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분야의 스타 사진을 모아 스크랩을 하는 게 유행이었다. 스타 사진이 흔하지 않아서 신문이나 잡지에 게재되면 그것을 오려서 모아놓은 것이다. 나는 스포츠를 좋아해서 초등학교 시절, <주간스포츠>와 <스포츠동아>에 나오는 유명 선수들의 컬러 사진들을 오려서 스케치북에 붙여 놓는 게 취미였다. 당시 스포츠 관련 잡지는 주간지가 전부였다. 따라서 운동선수의 컬러 사진은 오로지 주간지에 게재되는 것 말고는 구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중철 제본 주간지에서 컬러 페이지는 알량하게도 앞쪽과 뒤쪽 한 10여 쪽에 불과했다. 그러니 이미지라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 요즘 세대는 상상이 가지 않을 것이다. 친구들과 같이 스크랩을 했는데, 나에게 없는 스타 사진이 친구에게 있으면 그게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돈이 풍족하지 않으니 주간지를 매번 살 수도 없었다. 그러니 자기가 독점적으로 가진 스타 사진을 자랑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게 있는데, 친구가 굉장한 걸 구했다고 나에게 연락을 해서 가보았다. 그 친구가 대학 야구팀 주요 투수 열댓 명의 컬러 사진을 스크랩한 것이다. 그중에는 당시 연세대 재학 시절의 박철순과 최동원 사진이 있었다. 침을 질질 흘리며 부러워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사진2〉 빅토리아 시대의 발렌타인 카드
〈사진3〉 스크랩들을 모아서 하나의 페이지에 구성했다. 이 스크랩들은 발렌타인 카드 따위에 쓰인 것을 떼어내 모은 것이다.

 

스크랩 문화는 서양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런 문화를 낳은 결정적인 기술적 발전이 있었다. 그것은 채색석판화의 발명이다.<사진 1> 18세기 말에 발명되어 19세기에 꽃을 피웠다. 19세기에는 사진도 발명되었지만, 19세기까지만 해도 채색석판화의 복제력이 사진의 복제력을 압도했다. 채색석판화가 발명되기 전 컬러로 재현된 이미지는 유화와 수채화, 프레스코화 같은 그림인데, 그림은 오랜 시간 기술을 연마한 화가들이 생산하는 것으로서 작품 하나는 유일한 것이고 복제할 수 없어서 그 가격이 무척 비쌌다. 이에 반해 채색석판화는 대량생산할 수 있어서 이미지의 대량복제시대를 열었다. 스크랩(scrap)은 ‘조각’이란 뜻인데, 19세기에는 채색석판화로 인쇄한 작은 종이 조각을 ‘스크랩’이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제과점에서 케이크를 장식하는 용도로 등장했다. 요즘 같으면 사용한 뒤 버리겠지만, 이미지가 귀했던 19세기 사람들은 그것을 모으기 시작했다. 스크랩은 밸런타인 카드, 크리스마스 카드, 새해 인사 카드 같은 다양한 용도로 확장되었다.<사진 2> 이런 스크랩들을 버리지 않고 책에 모아두면 그것이 ‘스크랩북(scrapbook)’이고, 그런 행위를 ‘스크랩부킹(scrapbooking)’이라고 한다.<사진 3, 4> 지금은 사진이나 글 등 인쇄된 모든 정보를 모으는 것을 스크랩이라고 하지만,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스크랩은 말 그대로 채색석판화 조각(scrap)을 모으는 것이었다. 이 문화는 당시 이미지가 무척 소중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오늘날 디지털 기술은 스크랩북 문화를 쇠퇴시키고 있다. 

 

〈사진4〉 스크랩북


디지털 기술의 등장으로 또 하나 쇠잔해진 문화가 있다. 틴에이저들이 자기 방을 스타 사진으로 도배하는 문화다. 이 문화는 196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커다란 사진, 특히 로큰롤 스타의 사진으로 방을 장식하는 유행은 틴에이저 인테리어 디자인의 가장 유력한 현상이었다. 오디오, LP판, 스타 사진 또는 포스터, 이 세 가지는 틴에이저의 방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소중한 보물이다. 1960~70년대 서구에서도 이미지가 지금처럼 범람하지는 않았다. 스타 사진이라고 해도 지금처럼 쉽게 구할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다. 사진이 흔하지 않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첫째는 구하기 힘든 만큼 어떤 사진을 얻게 되면 그것은 성물(聖物)의 지위를 획득한다는 것이다. 마치 독실한 신앙인들이 성인의 이미지를 방에 걸어두는 행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 둘째는 그 이미지가 획일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1970~80년대에 ‘오늘도 무사히’라는 기도하는 소녀의 이미지가 있었다.<사진 5> 그것은 집집마다, 그리고 이발소, 심지어는 택시와 버스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 이미지는 한국 사회에서 아이코닉한 이미지가 되었다. 이미지가 귀할 때는 특정한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복제되고 유통되어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되는 효과를 낳는다. 

 

〈사진5〉 〈오늘도 무사히〉 그림은 영국 화가 조슈아 레이놀즈의 그림을 바탕으로 한글을 삽입했다.

 

‘오늘도 무사히’라는 이미지가 무수히 복제된 것처럼 스타의 이미지도 특정한 사진들이 무수히 복제된다. 틴에이저들의 방을 장식한 스타 사진은 대개 대량으로 인쇄된 포스터나 브로마이드 사진이다. 똑 같은 사진들이 각 가정마다 붙어 있는 것이다. 1977년작 <토요일 밤의 열기>에서 존 트라볼타가 맡은 10대 청년의 방을 보여주는 장면이 있다. 그의 방에는 1970년대 스타들의 커다란 사진이 벽에 붙어 있다.<사진 6> 슈퍼 모델 파라 포셋, 배우 이소룡, 영화 <록키>의 포스터다. 그 이미지들은 그 시대를 산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것이다. 그 배우, 그 가수 하면 딱 떠오르는 전형적인 이미지다. 이미지가 귀하던 시절에는 이렇게 모두 사람의 기억에 각인된 아이코닉한 이미지가 있었다.<사진 7> 아이코닉한 이미지는 스타를 최고 전성기의 모습으로, 영원히 늙지 않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팬들의 기억 속에 머무르도록 만든다. 스타를 좋아하는 팬은 스타 대신에 그 이미지를 소유함으로써 그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탁월한 미디어 학자인 마셜 맥루언은 이렇게 말했다. “영화나 연극의 스타와 우상들은 사진에 의해 대중의 것이 된다.” 

 

〈사진6〉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 의 한 장면. 스타 사진들이 십대 청년의 방을 장식한다.
〈사진7〉 1970년대 슈퍼 모델 파라 포셋의 아이코닉한 이미지

 

스타 사진으로 벽을 장식하는 문화 역시도 디지털 기술로 위기를 맞고 있다. 디지털 혁명은 십대의 방도 바꿔놓았다. 오디오, LP판, 포스터를 컴퓨터와 스마트폰이라는 디지털 미디어가 대체했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에는 음악과 사진이 모두 들어 있다. 그 양도 무궁무진하다. 사진 이미지가 많을뿐더러 언제든지 볼 수 있기 때문에 벽에 스타 사진을 붙일 필요성도 없어졌다. 스타 이미지에 대한 아쉬움이 없는 것이다. 스타 사진이 사라지자 스타의 아이코닉한 이미지도 사라졌다. 디지털 미디어는 정지 화면보다는 동화상을 더욱 선호하도록 만든다. 아이코닉한 이미지란 정지 화면이다. 동영상을 대세로 만든 디지털 미디어는 더욱더 아이코닉 이미지를 몰아낼 수밖에 없다. 21세기의 팬들도 스타를 우상으로 여기지만 그들의 특정한 이미지를 경배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다들 자기 손안에 스타의 이미지는 물론 동영상까지 언제든지 접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가 범람하는 시대가 되어 이미지의 소중함이 사라지자 궁금한 것이 하나 생긴다. 사람들은 재현된 이미지의 진짜 대상을 숭배한 것인가, 아니면 이미지 그 자체를 숭배한 것인가? 이미지가 물리적인 실체로 있을 때 대중은 그 이미지와 대상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이미지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정보 역시도 마찬가지다. 아주 제한적인 정보만으로 그 대상을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때 그 제한된 정보는 소중하기 때문에 더욱 믿을만한 것이 된다. 반면에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의 대중은 특정한 정보를 의심한다. 21세기의 대중은 이미지와 대상을 동일시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미지를 경배하기보다 그 대상의 실체를 경배하려고 한다. 디지털 시대의 스타는 대중을 속이기 힘들다. 과거의 대중은 함축된 정보, 즉 스타의 정지 화면으로 대상을 파악했지만, 디지털 시대의 대중은 그런 이미지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것 같다. 과거의 대중이 스타를 시로 보았다면, 오늘날의 대중은 스타를 대하소설로 보고 싶어 한다. 그리하여 스타와 더욱 친밀한 관계를 맺고자 한다. 나는 이것이 디지털 혁명, 즉 언제든지 어디에서든지 스타의 이미지를 소환할 수 있는 시대의 현상이라고 본다. 물리적인 이미지는 한 곳에 머무른다. 틴에이저의 방 벽에 고착되어 있다. 반면에 부재하는 신이 부재하기 때문에 어디든지 있는 것처럼 디지털 이미지는 물리적 실체가 없기 때문에, 즉 부재하기 때문에 대중이 어디를 가든지 늘 함께 있는 것이다.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kshin201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