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다, 이런 기분이었지!" 2023.3
“That’s right, this was how it felt!”
친구의 딸이 딸을 낳았다. 엄마가 간지럼을 태우는 손길에 방긋거리는 아기 얼굴을 사진으로 보니 내 입꼬리도 저절로 올라갔다. 아직 말도 못 하는 아기들은 아무 조건 없이 웃는다. 배부르고 기저귀만 보송보송하면 아무 걱정이 없다. 눈 맞추면 웃고 간질이면 웃고 ‘푸’ 하고 볼에 입 바람만 불어줘도 웃는다.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아가의 웃음이 주는 행복을 맛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맞아, 아이 키우는 건 이런 기분이었지!”
비가 내린 적도 없는데 땅이 젖어 있다. 혹시 빗방울이 떨어지나 하늘을 두리번거리고 허공에 손바닥을 펼쳐본다. 비는 아니다. 조금 더 걷다가 깨닫는다. 아, 땅이 녹고 있구나! 그러고 보니 길가의 나무들도 물기를 머금어 살짝 통통해졌다. 바싹 말랐던 나뭇가지가 낭창하게 휘어지도록 어느새 물기가 스며든 것이다. 긴 겨울 이 땅은 물론이고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난 가슴 아픈 사고 소식을 듣고 견디느라 봄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아직도 마음은 한겨울을 벗어나지 못 하고 있는데 꽝꽝 얼었던 땅이 슬그머니 부드러워지는 것을 목격하며 또 듣는 이 없는 말을 했다.
“맞다, 봄! 이런 느낌이었지!”
몽글몽글 간질간질 두근두근… 가슴 뛰고 얼굴이 달아오르고 손에 땀이 배던 순간은 전부 어디로 사라졌을까? 간절하고 흥분되고 기다리고… 하루하루 자라고 있다는 사실에 보물을 숨겨놓은 것처럼 뿌듯하던 마음은 다 누가 가져갔을까? 별똥별에 소원을 빌고 빗방울에 설레고 텅 빈 운동장을 보면 먹먹하던 작은 소녀는 지금 어디로 가버렸을까?
코로나 바이러스 탓인지 나이 탓인지 마음에 아무런 바람 불지 않은 지 꽤 여러 해가 되었다. 첫눈이 내려도 진달래 개나리가 흐드러져도 문득 첫사랑이 떠올라도, 덤덤하다. 잠깐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모니터로 눈을 돌린다. 살수록 알 수 없는 것이 인생이어서, 사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더라. 아니 마음 휘둘리는 것이 불편하니 웬만한 일에는 눈 질끈 감아버리도록 보호본능이 작용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넌 사는 게 재미있어?”
만 여든아홉 살 우리 엄마가 물었다.
“글쎄 재미…, 있나? 그냥 사는 거지 뭐.”
난데없는 엄마의 질문에 60을 눈앞에 둔 딸이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러면 넌 뭘 제일 하고 싶어?”
엄마의 질문은 에둘러가는 법이 없는데, 어떻게 살아야 좋을지 아직 허우적거리고 있는 딸의 대답은 뻔하고 구차하다.
“음, 여행. 세계 여러 나라 가보고 싶은 곳이 아직 많아.”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엄마는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명쾌하게 말했다.
“나랑 가자!”
“아이고 엄마, 그 나이는 이제 비행기에서 안 태워줘. 아흔에 장거리 여행하다가 탈 나면 어쩌려고….”
영원히 살 것처럼 시간을 허투루 쓰고 있는 딸은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오는 엄마의 질문을 팩트공격으로 못되게 얼버무리고 만다. 여행하고 싶다는 소원에 당장 가자고 번개처럼 대답할 수 있는 엄마의 결단은 아마도 삶이 유한하다는 깨달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짐작된다. 막상 그런 결단을 할 수 있을 때 실행할 만한 건강과 총기가 남아있지 않다는 데에 엄마 90 인생의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하지만 나도 엄마를 흉볼 처지는 아니다. 팬데믹으로 비행기 타는 일이 불가능해졌을 때 ‘이 봉쇄가 풀리기만 하면 어디든 떠나리라. 언제 또 못 가는 상황이 발생할지 모르니 갈 수 있으면 무조건 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PCR검사나 격리 없이 여행할 수 있게 된 후에도 난 아직 아무 곳으로도 가지 못하고 있다. 휴가일수가 많지 않아서, 비행기표가 너무 비싸서, 단체 관광은 피곤하고 자유여행은 번거로워서, 같이 갈 사람이 마땅치 않아서… 달력을 들여다볼 때마다 주저앉을 핑계는 흘러넘쳤다. 더 늦기 전에 후회가 찾아오기 전에 떠나야 한다, 아시아나항공의 광고를 보며 생각한다.
# 태국 국제공항. 캐리어를 끌고 연결 통로를 걷는 탑승객들의 모습. 공항 밖으로 나서니 택시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야자수 나무와 길거리 음식을 파는 노점상들이 보인다.
남) 겨울을 떠나 여름에 도착.
6시간 만에 계절이 바뀌는 마법.
맞다, 이런 기분이었지.
아시아나항공
자막) 깨우세요
여행세포
세계 여러 나라가 코로나19 방역을 완화하면서 해외여행 수요가 빠르게 살아나고 해외여행객으로 공항이 북적인다는 소식이 들린다. 지난 설 연휴의 해외여행객 숫자는 2022년 설 연휴 때의 수십 배가 넘고, 코로나로 인한 국경 봉쇄 전인 2020년의 절반 수준에 이르렀다고 한다. 여권을 신청하는 사람도 늘어나서 일부 시•군•구청의 경우 긴급여권용 종이가 동이 났다는 신문기사도 보았다. 아시아나 영상 광고의 다른 시리즈를 보면서 나도 서서히 눌러 두었던 여행세포를 불러일으켜 본다.
# 좌석에 비치된 기내 쇼핑 안내 책자를 열심히 보는 사람, 메신저 상태 메시지를 바꾸는 사람, 안전벨트 착용 안내판을 보고 벨트를 매는 사람, 기내식 메뉴를 생선으로 바꾸는 사람, 비행기 창문으로 땅 위의 작은 불빛을 바라보는 사람 등 내레이션이 진행되는 동안 비행기 안에 탄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Na) 우리 모두에겐
잠들어 있는 세포가 있죠.
그리고 이건
바로 이때 깨어나요.
주인공도 이야기도 없는 책이 술술 읽힐 때.
메신저 상태 메시지를 바꿀 때.
자막) 김진후
12/12 ~ 12/30 나를 찾지 마라!
Na) 하늘 위에서
이 소리가 들릴 때.
S.E) (안전벨트 착용 알림음)띵-
Na) 일생일대의 고민을 하다가
여) 혹시 fish로 바꿀 수 있을까요?
Na) 문득 저 작은 점들에
내가 뭘 그렇게 매달렸나 싶을 때.
여행세포는 다시 깨어나요.
그리고 당신은 생각하죠.
맞다, 이런 기분이었지!
아시아나항공.
나보다 두 배는 더 천천히 걷는 우리 엄마, 앉았다 일어설 때마다 에구구 신음 소리를 내는 우리 엄마, 불과 10년 전 사진만 봐도 다른 사람처럼 예쁜 우리 엄마, 드라마의 줄거리를 이해 못 하는 엄마, 할 일이 없어서 자꾸 누워있는 엄마, 진심으로 죽는 날만 기다린다는 내 엄마는 볼 때마다 내게 얘기한다.
“한 나이라도 젊을 때 재미있는 거 하고 싶은 거 많이 해. 자식보다 네가 먼저야.”
엄마가 옳다. 후회가 찾아오기 전에 더 늦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
엄마 말 잘 듣는 착한 딸(?)인 나는 지금 아쉬운 대로 항공사 마일리지 표 예약 사이트를 뒤지고 있다. 밀라노, 아테네, 로마, 비엔나, 부다페스트 같은 이국의 도시 이름을 소리 내 불러본다. 윤동주 시인이 불렀던 패, 경, 옥 같은 이국의 소녀들처럼 그 도시들은 너무 멀리 있다. 하지만 갈 수 있다! 오랜만에 심장이 세차게 뛰고 가슴 가운데서 뜨거운 기운이 서서히 피어오르고 있다.
그래, 이런 기분이었어!
글. 정이숙 Jeong, Yisuk 카피라이터
정이숙 카피라이터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카피라이터로 광고와 인연을 맺었다. 롯데그룹의 대홍기획을 시작으로 한화그룹의 한컴, 종근당의 벨컴과 독립 광고대행사인 샴페인과 프랜티브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로 일했다. 지금은 디지털 마케팅 에이전시의 CD로 퍼포먼스 마케팅의 세계에 발을 담그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응답하라 독수리 다방』(2015), 『광고, 다시 봄』(2019), 『똑똑, 성교육동화』시리즈(2019) 12권, 『김민준의 이너스페이스』(2020)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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