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건축사지 2023. 4. 18. 19:27
Capital Letters vs Small Letters

 

 

 

어느 대학에서 글꼴의 진화에 대한 강의를 하고 있었다. 라틴 알파벳은 대문자가 먼저 태어났고, 기원후 3세기 무렵에야 소문자가 나타났다. 로마인들은 글자를 쓸 때 두 개의 기준선을 그은 뒤 그 안에 글자에 채워 넣었다. 그런데 3세기 무렵부터 그 기준선 밖으로 뛰쳐나가는 글자가 생기면서 소문자가 탄생했다. 예를 들어 b, d, f, h, k, l은 평균선 위로 글자 선이 올라간다. 평균선 위로 올라간 부분을 ‘어센더(ascender)’라고 한다. 반면에 g, j, p, q, y는 평균선 아래로 선이 내려간다. 아래로 내려간 부분을 ‘디센더(descender)’라고 한다. 그에 따라 소문자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뉘게 되었다. 어센더가 있는 글자, 디센더가 있는 글자, 어센더도 없고 디센더도 없는 글자. a, c, e… x, z 같은 글자다. 어센더와 디센더가 없이 키가 작은 글자의 폭을 ‘엑스하이트(x-height)’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소문자는 모두 4개의 기준선을 갖게 된다.<사진 1> 엑스하이트를 중심으로 어떤 글자는 위로 삐쳐 올라가고 어떤 글자는 아래로 삐쳐 내려간다. 이렇게 글자의 키가 들쭉날쭉하게 되자 글자 하나하나의 판독성이 높아지는 결과가 나타났다. 판독성이 높으면 가독성 또한 함께 높아진다. 

 

<사진 1> 타이포그래피 라인 용어 ⓒ Max Naylor


이런 설명을 하는데 한 학생이 질문을 한다. “그러면 가독성을 높이려고 소문자를 만든 건가요?” 아주 훌륭한 질문이다. 고대 로마시대에 ‘판독성’이나 ‘가독성’이라는 개념은 없었을 것 같다. 판독성은 글자 하나하나를 구별할 수 있는 정도이고, 가독성은 단어나 문장이 잘 읽히는 정도다. 높이가 다 똑같은 대문자보다 글자의 높이가 들쭉날쭉한 소문자가 글자마다 형태 차이가 크므로 판독이 더 쉬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목적으로 소문자를 만든 건 아니다. 그런 목적을 갖고 소문자를 만들었다면, 소문자는 한 번에 탄생했을 것이다. 학자들이 모여 판독성을 높이는 형태를 찾아 합의하고 발표했을 것이다. 마치 한글이 특정한 날 반포된 것처럼 말이다. 소문자는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조금씩 진화했다. 그 진화는 글씨를 빠르게 쓰려는 동기에서 비롯한 것이다. 글씨를 빠르게 쓰려면 펜을 종이에서 떼지 않고 이어서 써야 한다. 대문자는 펜을 떼어야 쓸 수 있지만, 대부분의 소문자는 펜을 떼지 않고 이어서 쓸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어떤 글자는 위로 뻗어 올라가고 어떤 글자는 아래로 내려갔다. 나의 추측은 이렇다. 대문자 B를 빨리 쓰다 보면 어센더가 생길 것 같다. 반면에 대문자 Y를 빨리 쓰다 보면 디센더가 생길 것 같다. 그것이 왠지 자연스럽다. 결과적으로 빨리 쓰려는 목적이 판독성을 높였다. 인공적 사물의 세계에서는 그런 일이 흔하다. 원래 특정한 목적으로 뭔가를 만들었는데, 그 결과 다른 이익을 얻는 경우가 있다. 


아무튼 소문자가 생기자 판독성이 높아졌으므로 사람들은 글을 쓸 때 소문자 위주로 쓰게 되었고, 책도 소문자로 만들었다. 소문자를 훨씬 많이 쓴다는 건 초기 인쇄술의 활자 상자 위치에서도 잘 나타난다. 활자 상자는 크게 대문자 상자와 소문자 상자로 나뉜다. 손에서 가까운 곳에, 즉 낮은 상자(lower case)에 소문자를 놓고, 그 위쪽 상자(upper case)에, 즉 손에서 먼 곳에 대문자를 놓았다.  <사진 2> 이에 따라 upper case는 대문자를, lower case는 소문자를 뜻하게 되었다.<사진 3> 

 

<사진 2> 활자 상자의 로워 케이스와 어퍼 케이스 ⓒ Maggie McCain
<사진 3> 활자 상자 드로잉. 인쇄를 할 때 소문자는 더 많이 필요하므로 글자 칸이 대문자보다 훨씬 크다. 가장 많이 쓰이는 소문자 e는 칸이 가장 크며 손이 가장 잘 닿는 곳에 자리한다.


소문자는 3세기경에 나타났다. 시간이 흐르면서 고유한 글꼴들이 나타났는데, 그중에서도 7세기경에 등장한 인슐라체(Insular script)는 아일랜드에서 시작돼 서유럽으로 퍼진 중세의 대표적인 글꼴이다.<사진 4> 인슐라체는 글자가 어센더와 디센더가 짧고, 동글동글하다는 특징이 있다. 인슐라체 뒤에 등장한 중세의 또 다른 대표적인 글꼴은 8세기에 등장한 카롤링거 소문자체(Carolingian minuscule)다.<사진 5> 카롤링거 소문자와 인슐라체의 소문자를 견주어보면 카롤링거 소문자의 어센더와 디센더가 더 길고, 글자의 획이 더 곧다. 따라서 카롤링거 소문자로 구성된 문장의 가독성이 더 높다. 하지만 12세기 이후에는 고딕체(Gothic script)가 서유럽 필사본의 유력한 서체로 떠오른다.<사진 6> 고딕체는 카롤링거 소문자는 물론 인슐라 소문자보다도 가독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12세기 이후 거의 모든 필사본 책들이 고딕체로 쓰여서 15세기에 구텐베르크가 금속 활자를 개발했을 때 그 활자는 자연스럽게 고딕체로 디자인되었다.<사진 7> 

 

<사진 4> 켈트족의 서적에 쓰인 인슐라 소문자, 7세기경.
<사진 5> 칼로링거 소문자
<사진 6> 중세의 고딕체, 15세기경
<사진 7> 구텐베르크가 인쇄한 성경책에 쓰인 고딕체, 1454-56년경. ⓒ Fondo Antiguo de la Biblioteca de la Universidad de Sevilla


인쇄술은 재빨리 전 유럽으로 퍼졌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르네상스를 맞이한 이탈리아 북부 도시들이 유럽 인쇄의 중심지가 된다. 특히 베네치아는 유럽에서 발행되는 책의 50%를 차지할 정도가 되었다. 이탈리아의 인문학자들이 고딕양식의 건축을 혐오했듯이 고딕 건축을 닮아 뾰족한 고딕체도 좋아할 리 없었다. 이때 그들은 로마의 전통을 살려 로마시대 기념비에 쓰인 대문자인 로만 스퀘어 대문자(Roman square capitals)를 가져와 고딕체의 대안으로 로만체(Roman script) 대문자를 디자인한다.<사진 8> 이탈리아의 인문학자들은 자신들의 문화유산을 바탕으로 대문자를 개발한 것이다. 그렇다면 로만체의 소문자는 어디에서 가져왔을까? 바로 카롤링거 소문자다. 카롤링거 소문자는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가 학문을 장려하며 만들어진 프랑스/독일의 문화유산이다. 

 

<사진 8> 돌에 새긴 로만 스퀘어 대문자, 2-3세기경. ⓒ Jérémie Silvestro


자존심 높은 15세기 이탈리아 인문학자들에게 프랑스와 독일은 문화 수준이 낮은 열등한 민족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만든 카롤링거 소문자도 고딕체처럼 열등한 민족의 글꼴이다. 그런데 왜 그들이 만든 소문자를 가져왔을까? 샤를마뉴의 학문장려에 따라 그 시대 프랑크 왕국의 학자들은 고대의 문헌들을 필사본으로 남겼다. 그중에는 로마의 철학자이자 정치인 키케로가 남긴 문헌도 있었다. 바로 이 문헌을 복제한 샤를마뉴 시대의 필사본을 이탈리아 시인이자 인문학자인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가 이탈리아를 여행하다 발견한다. 그는 곧바로 그 문헌에 쓰인 카롤링거 소문자로 자신의 필체를 바꿨다. 14세기 인물인 페트라르카는 르네상스를 연 첫 번째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이 필사본을 고대 로마의 것으로 여겼지 샤를마뉴 시대의 프랑크 왕국의 것으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페트라르카를 따라 그 뒤의 이탈리아 인문학자들도 카롤링거 소문자를 자신들의 문화유산으로 여겼다. 바로 이런 배경에 따라 고딕체의 대안으로 개발된 로만체의 대문자는 로마의 유산을 이어 받았지만, 소문자는 프랑스/독일 문화권인 프랑크 왕국의 유산을 이어 받은 것이다. 로만체는 가독성이 떨어지는 고딕체를 대체하고 라틴 알파벳의 표준 글꼴이 된다. 

현대인에게 그 글꼴의 출처가 고대 로만인지, 중세 프랑크 왕국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대문자와 소문자가 각자 다른 용도를 갖는다는 것이다. 대문자는 소문자보다 크기 때문에 뭔가를 강조하고자 할 때 활용한다. 문장은 첫 글자만 대문자로 쓰고 나머지는 소문자로 쓴다. 대문자로 새로운 문장이 시작되었음을 강조한 뒤 가독성이 높은 소문자로 빠르고 쉽게 문장을 읽히려는 의도다. 때때로 문장 전체를 대문자로 쓰기도 한다. 대문자로만 쓰인 문장은 흔히 감정을 드러내는 것으로 해석된다. 소리를 치고 화를 내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반면에 책의 표지, 포스터, 간판, 브랜드, 패키지의 상표 이름 등은 강조해야 하고 눈에 띄어야 하므로 모든 글자를 대문자로 쓰기도 한다. 짧은 문장이나 단어, 이름은 가독성이라는 제약에서 자유롭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도로 사인은 어떨까? 도로 사인은 문장도 아니고 짧은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특정 장소를 강조한다는 의미도 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전부 대문자로 써야 할 것 같다. 하지만 도로 사인은 전 세계 어디를 가나 첫 글자만 대문자이고 나머지는 소문자로 쓴다.<사진 9> 도로 사인은 자동차를 타고 빠르게 지나가는 운전자들의 눈에 재빨리 읽혀야 하기 때문이다. 대문자와 소문자가 같이 쓰였을 때 더 빠르고 쉽게 인식된다고 한다. 

 

<사진 9> 마거릿 캘버트가 디자인한 영국의 도로사인


1920년대 중반 바우하우스의 디자이너들은 대문자와 소문자를 함께 쓰는 것이 비효율적이고 비경제적이라고 판단했다. 바우하우스의 뛰어난 그래픽 디자이너인 헤르베르트 바이어는 ‘유니버설’이라는 글꼴을 개발했는데, 대문자 없이 소문자로만 구성되어 있다.<사진 10> 문장을 쓸 때도 대문자를 쓰지 않고 전부 소문자로만 쓰는 경우가 있다. 비례에 예민한 사람들에게 문장 첫 글자의 대문자가 튀어 보일 수 있다. 디자이너들에게는 문장을 쓰는 관습보다 글자들의 조화로움이 더 중요할 수 있다. 소문자로만 쓰인 문장이 더 조화롭고 아름답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현대인은 첫 글자가 대문자로 쓰인 문장에 익숙하기 때문에 그 조합이 지극히 자연스럽다. 하지만 그런 관습과 편견에서 벗어나면 소문자로만 구성된 문장이 더 간결하고 좋아 보일 수 있다. 

 

<사진 10> 유니버설 글꼴, 디자인: 헤르베르트 바이어, 1925년


이름조차도 소문자로만 쓰기도 한다. 스티브 잡스의 사인은 소문자로만 되어 있다.<사진 11> 스티브 잡스는 대학 때 들은 수업 중 가장 감명 깊었던 것이 글꼴에 대한 강의라고 말할 만큼 글꼴의 조형에 예민한 경영자다. 나는 예전에 어떤 영화의 타이틀 장면을 보는데 배우와 스태프 이름이 전부 소문자로 쓰인 것을 보고 대단히 세련됐다고 느꼈다. 그 영향으로 내 개인 명함의 이름을 전부 소문자로 디자인했다. 스티브 잡스를 흉내 낸 건 아니다. 비교적 최근 영화로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타이틀 디자인의 모든 이름을 소문자로 디자인했다.<사진 12> 그것은 세련된 패션 문화를 상징하려는 듯하다. 

 

<사진 11> 소문자로만 구성한 스티브 잡스의 사인
<사진 12>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타이틀 시퀀스 장면


글꼴 디자인이란 글자가 가진 여러 가지 요소를 변화시켜 표정과 인상을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하지만 대문자와 소문자라는 두 가지 요소만으로도 라틴 알파벳은 다양한 의미 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소문자는 더 빨리 쓰고자 하는 욕구에서 태어났지만, 그것이 가져다 준 이익은 실용적인 가독성을 넘어 글꼴의 형태와 상징성을 풍부하게 해주었다.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kshin201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