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형태와 이미지 2023.5
Forms and images of music
친구들과 LP바에서 음악을 듣다가 각자 스마트폰에 음악파일을 어떻게 관리하는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친구들이 음악 파일만 스마트폰으로 옮기고 그 음악 파일의 이미지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친구 스마트폰의 음악 앱을 보니까 특정 노래를 재생해도 이미지는 텅 빈 채로 있었다. 나는 이미지가 없는 음악 파일은 스마트폰으로 옮기지 않는다. 일단 컴퓨터에 저장된 모든 음악 파일은 그 음악이 실린 앨범의 이미지를 찾아내 연결해 준다. 그렇게 아이튠즈(애플의 음악 관리 앱)에 저장된 모든 앨범이 이미지로 채워졌을 때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사진 1> 만약 이미지가 없는 앨범이 하나라도 있으면 조화가 무너진 그림처럼 영 찜찜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이미지를 찾은 파일만을 스마트폰으로 옮기는 것이다. 나는 현대의 대중음악은 이미지와 연결되어 있을 때 완결된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 이유를 설명하고자 한다.
소리를 저장하고 재생하는 장치가 발명되기 전 음악이란 연주되거나 노래하는 동안만 감상할 수 있었다. 공연이 끝남과 동시에 감미로운 음악은 덧없이 사라지고 만다. 음악이라는 예술은 회화나 조각과 달리 형태를 갖지 않는다. 형태가 없으므로 특정한 위치를 차지하지도 않고 눈으로 볼 수도 손으로 만질 수도 없다. 이것이 음악이 갖는 매력이다. 영구적으로 소유할 수 없는 신비로운 존재인 것이다. 말은 그나마 문자로 기록할 수 있어서 읽을 수 있다. 음악도 음표와 악보라는 기호로 기록할 수 있지만, 음표와 악보로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게다가 음악의 기호인 음표와 악보는 말의 기호인 문자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잃어버린다. 문자는 말이 갖는 여러 가지 정보 중에서 목소리의 톤과 높낮이, 길이, 억양 등은 상실하지만 가장 근본적인 정보는 사라지지 않는다. 시와 소설 같은 문학은 말로 하기 전에 먼저 문자로 만들어진다. 그러니 그것을 문자로 감상하는 것은 어떠한 손실도 없다. 반면에 음악은 문학과 달리 바로 그 소리의 높낮이, 길이, 속도, 그것을 표현하는 연주자나 가수의 개성 등이 핵심적인 정보인데, 그것이 사라진 음표만으로 음악을 감상하는 건 상당한 손실을 감수하는 것이다. 그나마 악보로 음악을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는 극소수의 사람에 한정한 것이다. 한 마디로 음악은 연주되는 그 순간에만 온전하게 감상할 수 있는 예술이다.
음악이 형태를 갖지 않는다는 건 미술과 달리 음악은 자연의 어떠한 대상도 모방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회화와 조각은 형태를 가지므로 필연적으로 자연의 대상을 모방하면서 발전해 왔다. 20세기 전반기에 화가들은 회화가 갖는 이런 모방이라는 숙명을 벗고자 했다. 그들은 음악가들이 자연을 모방하지 않는 만큼 좀 더 창조적이라는 이상한 열등감에 시달렸다. 화가들은 결국 대상을 모방하지 않는 비구상 회화를 탄생시키기에 이른다. 그들에게 대상은 오직 선과 면과 색채로 환원되고 만다. 그렇다면 형태가 없는 음악은 자연의 대상과 전혀 무관한 예술일까? 음악가들이 비록 꽃과 나무, 산과 바다, 동물과 사람을 직접적으로 모방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묘사하려고 애쓰는 것이 틀림없다. 사람들은 음악을 감상하며 꽃이 피는 봄의 생동감이나 안개 낀 호수, 침묵하는 바다, 춤을 추는 댄서 같은 것을 연상하기 때문이다. 음악은 단지 감정에만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시각적인 대상, 즉 어떤 이미지를 사람들의 마음속에 떠올리게 하려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음악은 형태와 전혀 무관하지 않은 예술이다.
19세기 말 축음기가 발명됨으로써 음악은 진정으로 형태를 갖출 기회를 엿본다. 축음기는 소리를 저장하고 재생하는 기계인데, 그러려면 반드시 저장매체를 필요로 한다. 에디슨이 발명한 축음기의 저장매체는 원통이었는데, 나중에 독일 출신 미국인 발명가 에밀 베를리너는 저장매체로 원반, 즉 디스크를 선택한다. 원통과 견주면 원반이 더 작은 부피로 더 많은 소리를 저장할 수 있으므로 곧 디스크가 음악의 주요 저장매체가 되었다. 음악을 저장한 디스크를 판매하려면 그것을 안전하게 종이로 포장해야 한다. 이렇게 디스크를 포장한 껍데기가 생기자 자연스럽게 회화적 표현의 장이 생긴 것이다. 초기에는 ‘슬리브(sleeves)’라고 부르는 디스크 포장지에 레코드 회사의 이름 정도만을 적었다.<사진 2> 소비자는 매장에 진열된 레코드 슬리브를 보고 상품을 고르는 것이 아니었다. 매장에 와서 구매할 음악을 말하면 점원이 찾아주는 형식이었다. 당시에는 레코드 회사들이 커버의 이미지로 구매를 유도하겠다는 의지가 전혀 없었다. 20세기 초에는 지금처럼 다양한 대중음악이 없던 시절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그럴 만도 하다.
이 분야를 개척한 회사는 미국의 컬럼비아 레코드다. 이 회사는 1938년, 특별히 커버 아트를 전문으로 하는 디자이너를 업계에서 최초로 고용한다. 그의 이름은 알렉스 스타인바이스(Alex Steinweiss)다. 1920년대부터 레코드 회사들은 디스크 여러 장을 삽입하고 두꺼운 표지로 보호한 소책자 형식의 음악 상품을 판매하고 있었다.<사진 3> 1940년대까지만 해도 디스크 레코드는 녹음 분량이 적어 이렇게 디스크 4개 정도를 모아야 여러 노래나 연주곡을 감상할 수 있었다. (음악가들이 발표하는 레코드 상품을 앨범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바로 그 모양이 사진 앨범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1948년부터 생산된 LP[long play] 레코드는 한 장의 디스크만으로도 기존 레코드 4장 이상의 분량을 소화할 수 있어서 더 이상 사진 앨범 형식으로 제작되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앨범이라고 부른다.) 스타인바이스는 바로 이 앨범 커버 디자인의 개척자다. 기존의 앨범들은 디스크를 컬렉션하고 보호한다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해 한결같이 칙칙한 색으로 차별화되지 않았다. 스타인바이스는 이 구별되지 않는 앨범 커버가 참을 수 없었다. 그는 경영진을 설득해 시선을 사로잡는 시각적 이미지로 앨범 커버를 디자인하기 시작했다.<사진 4> 그 결과 놀랍게도 판매가 무려 900% 늘었다고 한다. 이는 앨범 커버 이미지가 구매를 유도한 강력한 장치임을 증명한 셈이다.
알렉스 스타인바이스의 업적은 단지 앨범 커버 디자인을 개척하고 앨범의 판매를 높인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무형의 음악에 형태를 부여한 진정한 주인공이다. 그는 아름다운 음악은 아름답게 포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음악에 적합한 그래픽 이미지를 창조하고 부여했다. 비로소 개별 음악과 앨범은 시각적 정체성을 갖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매장에 가서 이미 알고 있는 음악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진열된 앨범 커버 이미지를 먼저 보고 매료돼 음악을 듣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에 빠지게 되었다. 음악이 납작한 디스크에 담기고, 그것을 담은 4각형의 포장지 표면에 이미지가 더해졌을 때, 음악은 더 이상 공중으로 덧없이 사라지는 예술이 아니라 손으로 만질 수 있고 소유할 수 있는 물질이 된 것이다. 이것이 현대음악의 특성이다. 고전음악과 달리 현대의 대중음악은 처음 발표될 때 반드시 하나의 커버 이미지, 즉 자기만의 얼굴을 갖고 태어난다. 그것은 감상자의 머릿속에 각인된다. 기억될 얼굴이 없는 음악은 왠지 뭔가 결여된 것 같다. 그러니 디지털 음악 파일 역시도 이미지로 표시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kshin201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