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건축사지 2023. 8. 17. 20:09
Even though it's a new to me, I miss it already

 

 

 

길고 지루한 장마의 한가운데서 8월의 칼럼을 고민한다. “8월” 하고 가만히 소리 내어 불러본다. 눈을 감고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는 8월의 풍경으로 발을 옮긴다. 뜨거운 태양과 눈부신 파도, 울창한 숲이 거기 있다. 산과 바다, 하늘과 구름, 물장구치는 소리, 깔깔 웃는 아이들 소리… 그렇다, 내 기억의 8월엔 방학과 휴가가 있다!
내 평생 처음 맞이하는 2023년의 8월이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시간처럼 그립다. 시작도 하기 전에 벌써부터 아깝고 애틋하다. 수많은 8월을 살았고 지나왔는데, 다시 새로운 8월이 눈앞에 있다. 해마다 오는 8월인데 해마다 처음인 것처럼 새롭고 낯설다. 이번 8월, 나는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장소에 가게 될까? 올해의 8월은 내게 어떤 추억을 남기고 내 곁을 떠나갈까? 
일본의 소주 회사 니카이도가 광고에 썼던 ‘어디에나 있는 풍경. 여기에만 있는 풍경.’이라는 카피를 흉내 내자면, 이번 8월은 내게 매년 있는 8월이지만 올해만 있는 8월이다. 광고는 30초의 CM 안에 규슈 지방의 후쿠오카현과 구마모토현에 실재하는 물이 있는 풍경 12곳을 보여준다. 장소가 바뀔 때마다 영상 안의 물소리가 바뀌는 것에서 영감을 얻었는지 광고에 ‘물의 한숨’이라는 제목을 달아 놓았다. 

 


Na) 어디에나 있는 풍경. 

       여기에만 있는 풍경.
       고요함은 말을 걸고, 
       흐름은 속삭임으로 변한다.

 

자막) 그날
         여행한 장소로,
         나는 흘러들어갔다.


Na) 보리100%, 오이타보리소주 니카이도.

 

 

 

니카이도 소주는 1987년부터 외로운 감정이나 그리움, 쓸쓸함, 후회처럼 누구나 인생의 어디쯤에서 느꼈을 법한 감정을 영상과 카피에 담아 광고를 제작하고 있다. 2002년도 CM ‘아버지’ 편의 제작진 중 한 명이었던 하시모토 료스케는 니카이도의 브랜드 콘셉트가 ‘처음인데 그립다’였다고 밝혔다. 야후재팬을 검색하다가 알게 된 사실이다. 30년이 훌쩍 넘는 세월 동안 니카이도 소주 광고에서 일관되게 느껴지는 정서가 무엇인지 명쾌하게 알려주는 콘셉트다.
니카이도 소주의 광고를 몇 개 더 살펴보자. 
어린 시절에 살던 집과 동네에 가서 낡은 책을 꺼내거나 놀이터의 그네를 흔들어 보고, 아버지 손을 잡고 걷던 골목길을 더듬는 중년의 남자는 “바라니까 희망이 된다”고 이야기한다. 희망이라는 것은 간절히 바라는 어떤 것이 있어야 생긴다는 뜻일까? 내가 바라는 것, 내가 절실하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래서 생겨난 나의 희망이 무엇인지 무의식 중에 돌아보게 하는 카피다.

 


Na) 만약 그 무렵의 나를 만날 수 있다면, 
       어떤 말을 건넬까…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앞을 향한다.
       지나가 쌓인 날들이, 
       지금의 나를 강하게 지지해 준다. 


자막) 바라니까 희망이 된다.


Na) 나는 보리100%. 오이타보리소주 니카이도.

 

 


술 한잔 생각이 간절하게 만드는 광고도 있다. 2014년 제작된 CM에는 집으로 오는 친구를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는 남자의 모습이 화면에 가득하다. 데크를 쓸고 정원에 의자를 내놓고 화병에 꽃 한 송이를 꽂고 음식을 만들고 부채를 내놓고 식탁을 차린다. 친구와 어린 시절로 돌아가 좋아하는 책과 영화 얘기를 나눌 생각을 하며 준비하는 손길에서 설렘이 느껴진다. 멀리서 오는 친구를 위해 온종일 집 안팎을 가꾸는 남자의 정성과 여유가 부럽다. 한여름 초록 숲에 차려진 술상에 나도 슬그머니 끼어 앉고 싶어진다. 
그에 더해 ‘마시고 싶은 사람은 만나고 싶은 사람’이라니! 여기서 술은 만나고 싶은 마음을 전하는 은근한 상징이 된다. 한잔 하자는 말은 보고 싶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 누가 한잔하자고 청하면 쉽게 뿌리치면 안 될 일이다. 


Na) 예전에 동경했던 어른은, 항상 영화와 소설 속에 있었다.
       날카로운 얼굴 표정, 조금은 허세스러운 대사. 
       가끔 보여주는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
       오늘도 그때처럼, 
       오래된 영화 이야기를 하면서 신나게 떠들어 볼까? 
       마시고 싶은 사람은 만나고 싶은 사람입니다.
       오이타보리소주 니카이도.

 

 


2020년의 광고는 혼자 기차를 타고 낯선 마을에 도착해 혼자 마시는 남자가 등장한다. 남자는 기차 시간표를 점검한 뒤 휴대용 술통에 소주를 따라 가지고 기차에 오른다. 그리고 흔들리는 창 밖의 풍경을 보며 스테인리스 잔에 소주를 따라 마신다. 작은 시골 마을에 도착해 한산한 식당에 들어가서도 일행 없이 소주와 단둘이서만 마주 앉아 잔을 기울인다. 
광고가 보여주는 것은 은퇴해서 명함에 내세울 직함은 없어졌지만 욕심을 멈추고 단순하고 꾸밈없는 매일을 사는 남자의 모습이다. 그럴 수 있다면 은퇴하는 것도 늙는 것도 꼭 나쁜 일은 아닌 것 같다. 



Na) 저것 이것 욕심내는 것을 그만둔다. 
       단순하고 꾸밈없는 날들을 살아간다.
       직함이 없는, 진정한 나 자신이 된다.
       나이를 먹으면, 더하기보다 빼기가 좋다.
       떼 지어 다니지 않고, 시끄럽지 않다.
       혼자의 시간이, 어른을 즐겁게 한다.
       오늘도, 소주와 둘이서만. 오이타보리소주 니카이도.

 

 


이제, 8월이다. 처음이지만 그리운 8월이다. 다시는 반복되지 않을 8월이다. 
8월이 서둘러 가버리기 전에 빈 공책을 펼쳐야겠다. 
늦기 전에 후회가 찾아오기 전에… 이 8월에 하고 싶은 일, 마시고 싶은 사람을 연필로 꾹꾹 눌러 적어 봐야겠다. 

 

 

 

 

https://www.youtube.com/watch?v=IU2lermMR4c&t=19s 
니카이도 소주_TVCM_「물의 한숨」편_2022_유튜브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HoA1F1t-fng 
니카이도 소주_TVCM_「황혼의 추억」편_2011_유튜브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zJwqlmTEDD4 
니카이도 소주_TVCM_「 마음을 잇는:봄여름」편_2014_유튜브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69QJXCGUiTI 
니카이도 소주_TVCM_「한 사람의 시간•여행」편_2020_유튜브 링크 

 

 

 

 

 

글. 정이숙 Jeong, Yisuk 카피라이터

 

정이숙 카피라이터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카피라이터로 광고와 인연을 맺었다. 롯데그룹의 대홍기획을 시작으로 한화그룹의 한컴, 종근당의 벨컴과 독립 광고대행사인 샴페인과 프랜티브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로 일했다. 지금은 디지털 마케팅 에이전시의 CD로 퍼포먼스 마케팅의 세계에 발을 담그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응답하라 독수리 다방>(2015), <광고, 다시 봄>(2019), <똑똑, 성교육동화>시리즈(2019) 12권, <김민준의 이너스페이스>(2020)가 있다.

abacaba@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