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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대학교_제주대 구 본관, 제주의 꿈과 희망으로 부활하라 2023.8

월간 건축사지 2023. 8. 18. 17:25
The old main building of Jeju University, resurrect as a dream and hope of Jeju

 

 

 

1960년대 제주 ⓒ 곽재환

 

1. 시대성


건축사 김중업과 제주대학교의 인연이 시작된 것은 재정난으로 폐교 위기에 몰렸던 도립 제주대가 1962년 국립대학으로 승격되어 기사회생 되면서부터였다. 김중업 선생은 1963년 서귀포로 이전한 제주대 이농학부를 먼저 설계했고, 연이어 1964년 용담 캠퍼스 제주대 구 본관을 설계했다. 당시 제주도는 4.3사건이 마무리된 지 10년이 지나 겉으론 사회 불안이 진정됐지만, 그 사건으로 인한 희생자가 6만여 명이나 되어 내상이 아물지 못한 채 남아 있었다. 그해 제주도 총 인구가 29만 3천 명이었는데, 해방 후 귀국한 수많은 제주도민들은 아직 안주하지 못한 상태였다.

더구나 4.3사건으로 제주 중산간 지대는 거의 초토화된 상태였고, 그동안 정부로부터 전후 복구 사업도 배제되어서 생활 환경 또한 매우 열악했다. 1965년 생활전선에 뛰어든 제주 해녀가 무려 2만 3천여 명에 달할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제주는 1960년대 말까지 먹고살기 위해서 돈 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하던 시기였다. 1964년 12월이 되어서야 비로소 정부 수립 후 처음 제주도 개발계획이 발표되긴 했지만 1969년에 겨우 제주시와 서귀포를 잇는 5.16 도로가 개통되었을 뿐, 구 본관이 준공되던 1970년까지 제주도는 육지와 왕래하던 배가 몇 척 없었던 소외된 땅이었다. 그리고 1980년대까지도 해안가와 중산간 지대엔 땔감 파는 “낭삽써” 소리가 들릴 정도로 살림이 곤궁했으며 외부와 단절된 변방의 외딴 섬일 뿐이었다.

제주대 구 본관은 그처럼 헐벗고 피폐한 시대 상황 속에서 기적처럼 태어난 것이다. 그러나 구 본관의 처음 계획안은 지금과 전혀 달랐다. 곡면이 없었고, 여느 건물처럼 장방향으로 정리된 안이었는데 어느 날 변경됐다. 아마도 그렇게 변한 계기가 꿈을 잃은 학생들에게 희망을 심어 주기 위해 당시 문종철 학장과 김중업 선생이 의기투합한 결과였으리라 짐작한다. 그렇게 준공된 구 본관을 보면서 학생들은 물론 제주도민 모두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을 것이다. 허허벌판에 느닷없이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유람선처럼, 하늘에서 내려온 우주선처럼 나타났으니 말이다. 그것은 고난의 시기에 시대의 상처와 아픔을 극복하며 제주도민이 건축사 김중업과 함께 지어낸 한편의 동화였다. 땅과 정성으로 함께 꽃피운 한 떨기 연꽃이며 수선화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제주대 구 본관은 제주도민에겐 잊을 수 없는 건축이요, 잊어선 안 될 건축이 됐다. 하여 구 본관의 존재 의미는 단지 제주대 구 본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준공 당시 구 본관 ⓒ 곽재환

 


2. 장소성


내가 구 본관을 처음 본 것은 마침 준공되던 해인 1970년이었다. 그날 시커먼 바위와 용두암을 보다가 언덕으로 올라서니 그곳에서 홀로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1965년에 시작된 공사가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다 그제야 준공됐다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됐지만, 주위 건물은 벌써 기억에서 지워졌어도 언덕 위에서 맞닥뜨린 그 예기치 못한 건축의 경이로움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마치 전혀 다른 미지의 세계로 건너온 듯, 환시를 불러일으켰다. 건축 도면은 한편의 낭만적인 월광곡을 연주하는 듯 나를 사로잡았으며, 마치 수많은 선이 서로 어우러져 감미로운 춤을 추는 듯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993년 구 본관을 보존 운동 차 방문했던 것이 마지막 조우가 됐다.

 

구 본관 준공 당시 항공 사진 ⓒ 곽재환


제주대 구 본관이 철거된 지도 어느덧 28년이 흘렀다. 그런데 지난해 뜻밖에 제주대에서 다시 복원하겠다고 계획을 세우니, 실로 놀랍고 감회가 깊었다. 그렇지만 어디에 어떻게 복원할 수 있을까? 예전 장소엔 이미 다른 건물이 들어서 있고 주변은 복원이 불가능할 정도로 변했기 때문이다. 제주대는 이미 아라캠퍼스 내에 복원하기로 방침을 정한 것 같지만, 그 캠퍼스 복원 예정지에선 바다가 보이는지 궁금하다.

나는 사용자가 제한된 캠퍼스 부지보다는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관광차 와서 쉽게 접근이 가능한 바닷가에 복원되길 소망한다. 모두들 유람섬 같다고 기억하는 구 본관을 왜 한라산 중턱에 정박시키려고 하는 것인지 안타깝다. 배가 산에 있으면 쓸모가 없는 것처럼 구 본관이 캠퍼스 뒷방 노인 신세처럼 전락될까 우려된다. 구 본관은 제주대의 자산뿐만이 아니고 제주도민 모두의 자산이고, 나아가 대한민국이 자랑할 만한 현대건축의 기념비적인 건축이다. 미래를 보며 보다 개방되고 일반인들도 쉽게 접근해 사용할 수 있는 곳에 복원·재현 장소를 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3. 정체성


구 본관은 푸른 바다가 보이는 용담 캠퍼스에서 태어났다. 건축물이 낭만적이어서 학생들의 꿈을 키우는데 최상이었고 파도 소리가 들릴 정도로 바다 내음이 깊이 스며든 건축이었다.

결국, 해풍에 날아온 염분으로 몸이 병들고 부식돼 끝내 부서지고 사라지긴 했지만, 제주의 올레길을 닮은 뒤편의 경사로는 끝없이 바다로 이어져 왈츠를 추며 오르내려야 할 것 같은 자태를 지녔으며, 난간에 기대어 ‘샤를르 트레네’의 샹송 ‘La mer’를 부르며 지는 해와 떠오르는 해를 바라봐야만 할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집주인은 맨발로 춤추는 이사도라 던컨이거나 긴 날개를 지닌 갈매기 혹은 알바트로스가 돼야 한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그만큼 바다를 향하여 나가는 멋진 유람선을 닮았고, 푸른 창공을 나는 하얀 갈매기를 닮았다.

 

제주의 올레길을 닮은 뒤편의 경사로는 끝없이 바다로 이어져, 왈츠를 추며 오르내려야 할 것 같은 자태를 지녔으며, 난간에 기대어 ‘샤를르 트레네’의 샹송 ‘La mer’를 부르며 지는 해와 떠오르는 해를 바라봐야만 할 것처럼 보였다. ⓒ 곽재환 건축사


그래서 이번 복원이 본래의 장소에서 불가능하다면, 파도 소리가 들리는 곳에서 더 이상 주변 환경이 변할 것 같지 않은 호젓한 바닷가 그 어디쯤에 세워지길 소망한다. 그리고 그 검은 바위 언덕에 정박하고 있던 예전의 눈부신 모습처럼 복원되길 바란다. 꿈을 상실한 자는 죽은 자요,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한 건축은 존재 가치를 상실한 건축이다. 문득 『해변의 묘지』를 쓴 ‘폴 발레리’가 생각난다. 그에게 남프랑스 세트의 풍경이 영감을 주었듯, 복원된 공간에서 영감을 받으며 미래에 몸을 내맡기는 젊은 청년들이 있기를 바란다.

 

“아름다운 하늘, 참다운 하늘이여,
 보라 변해 가는 나를!
 그토록 큰 교만 뒤에, 그토록 기이한,
 그러나 힘에 넘치는 무위의 나태 뒤에,
 나는 이 빛나는 공간에 몸을 내맡기니.”

- 해변의 묘지 중에서


해외 건축 평단에서 오래전에 구 본관을 두고 20세기에 21세기 건축이 나타났다고 극찬했다. 본래의 정체성을 살려, 마치 꿈을 좇아 20세기 용담 바닷가 캠퍼스에서 21세기의 또 다른 제주 바닷가기슭으로 공간과 시간을 이동한 것처럼 복원·재현되기를 바란다.

 


4. 재현성
현재 복원·재현에 필요한 주요 도면(평면, 입면)은 준비되어 있지만, 상세 도면의 존재 여부를 알 수 없다. 그러나 구조 결함 때문에 철거된 이 건축물이 내진구조 설계에 의해 보강되면 각 부재의 크기와 치수는 달라질 것이다.

 


또 전 층을 관통하는 직통 계단이 없어 소방법상 내부 평면 조정이 불가피하며 단열 처리 또한 필요하다. 그리고 당시 사용된 자재와 마감 재료는 동일한 상태로 조달 방법이 난감하다. 그래서 이런 이유로 예전과 동일한 복원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또 복원은 일반적으로 신축보다 더 많은 예산이 소요된다. 그렇지만, 자재 성능과 시공기술이 현재는 그때보다 훨씬 우수해져서 약간의 치수와 재료 조정을 통해 최대한 외형을 유지하며 재현은 가능하리라 판단된다.

하지만 캠퍼스에 단순히 예전 건축물을 다시 짓는 것에 의미를 두고 일을 추진한다면 그 후 감동 없는 활용에 머물 공산이 크다. 막대한 예산을 투입해 복원·재현한 건축이 고작 노스탤지어를 만족시키는 데 그쳐서야 되겠나? 구 본관 복원·재현이 갖는 의미와 가치가 어떤 것인지, 또 어떠해야 할 것인지 두루 살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건축적 의의가 적지 않을 터이지만, 막대한 예산을 들여 어설픈 상태로 복원·재현할 바에는 차라리 전설로 남겨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 제주도민의 무관심과 발전하는 제주대의 그늘 속에서 구 본관은 쓸쓸히 사라졌지만, 이제 부활해야 한다. 그로써 이 복원·재현이 당시의 시대성과 영원성을 함께 담지하여 지속적으로 제주의 꿈과 희망의 상징으로 존재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복원된 공간은 청소년들을 위한 문화 예술 공간 혹은 현대건축 박물관 등으로 적극 사용되어, 미래 세대의 다양한 문화 예술(건축, 미술, 음악, 패션, 영화 등) 매체에 영감을 주는 창조적인 교육 장소로 활용되기를 바란다.

 


5. 실현성


복원·재현을 실현시키려면 적절한 부지와 막대한 예산이 필요하다. 기록엔 연면적이 1900㎡(575평)로 되어있지만, 당시의 건축법상 면적으로 계산되지 않은 경사로, 포치, 연못 등과 시공의 난이도를 감안할 때 적어도 예산은 어림잡아 200억 원은 필요하리라 본다. 나는 작년에 우연히 공익성 때문에 JDC(제주 국제 자유 도시개발센터)가 소송에 패한 서귀포 예래 주거단지 문제를 알게 됐다. 사정을 전해 듣고 옳다구나, 이곳이다 싶었다.

8년간 공사가 중단된 예래 주거 단지는 공공성을 위한 교육 장소로 보존해 JDC에서 산토리니처럼 문화 예술 관광단지로 개발하고, 이 지역의 공익성 확보는 제주대 구 본관을 이곳에 유치해 제주도 문화 예술센터로 활용하자는 구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공사 중단된 예래 주거 단지 ⓒ 곽재환
예래주거단지 내 2가지 배치 대안


우선 주민들로부터 찬성 서면 동의를 받았다. 그리고 제주대와 JDC 양측에 이 구상의 2가지 배치안을 메일로 보낸 바 있다. JDC 측도 철거하지 않고 8년간 방치된 사업을 이어갈 수 있으니 좋고, 제주대 역시 별관 캠퍼스가 생기는 것이니 찬성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모두 반응이 소극적이고 의례적이었다. 함께 뜻을 모으면 가능하리라 여겼는데 아쉽다. 그렇지만 예래 단지가 아니더라도 다른 곳이 또 있을지 모른다. 최근 프랑스 정부가 구 대사관 파빌리온을 허물지 않고 7년간 공을 들여 원형대로 복원했다. 그런데 이 배경엔 우리 정부에서 복원에 필요한 경비를 지원했기에 가능했다는 비공식 정보가 있다.

아시다시피 김중업 선생님은 구 본관이 준공된 다음 해에 해외로 추방당해 1969년 서귀포 수산 학부 설계를 끝으로 더 이상 제주도와 인연을 이어가지 못했다. 이 강제 추방에 대하여 정부는 마땅히 보상을 주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보상을 구 본관·재현 건립에 지원해 줄 것을, 제주대학교와 한국건축가협회 제주건축가회는 제주도민과 함께 정부에 이를 요청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안-1
대안-2

 

 

 

 

 

글. 곽재환 Kwak, Jaehwan 칸 건축사사무소(주) 대표 건축사

 

 

곽재환  건축사·칸 건축사사무소(주)

 

1980년부터 김중업건축연구소에서 수석 책임자로 근무하며 서울올림픽공원 ‘세계 평화의 문’ 등을 설계했다. 삶, 앎, 놂, 풂, 빎의 가치를 구축하며 집과 사람이 하나되는 아가일여(我家一如)를 추구해왔다. 대표작으로 ‘은평구립도서관’, ‘흑빛청소년문화센터’ 등이 있고, 이천 년대 들어 여러 차례 몽환적인 그림과 건축드로잉 전시를 하고 있다. 현재 칸 건축사사무소(주) 대표이며, 삼육대학교 건축과 특임교수로 후진을 양성 중이다.

hee1133k@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