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이었다가 영영이었다가 2023.12
It was a moment
It was forever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오래전에 최영미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다. 시에 빗대어 나의 2023년을 돌아보면 꽃처럼 피었던 적도 없는데, 이제 잠깐 사이에 져버릴 것이 분명하다. 삼백예순다섯 날 중 어떤 날은 늪처럼 깊은 수렁이 되어 내 야윈 발목을 잡았고 어떤 날은 우산 없이 만난 소나기처럼 온몸을 흠뻑 적셨다.
어느 하루 쉽게 지나간 날 없었다. 그런데, 아주 잠깐처럼 느껴진다.
5년 전에 세상을 떠난 선배의 추모식에 갔었다. 선배의 뜨겁고 여여(如如)했던 삶을 기억하는 이들이 모여 그를 추억하고 생전의 에피소드를 나누며 점심을 같이 먹었다. 선배가 늙기를 멈추고 있는 동안 나만 차곡차곡 나이 들어서 선배보다 늙어버렸다. 5년 전 선배의 부고를 듣고 간 영안실에서 국 한 그릇을 달게 먹었는데, 선배의 추모식에 가서 또 공짜 밥을 먹었다. 덕분에 잘 먹었으니 다음엔 내가 밥을 사고 싶은데 살 기회는 영영 없다. 가끔 끊어지다가도 용케 이어진 죽은 선배나 모인 사람들과의 40년 가까운 인연도 지금 생각하니 역시 잠깐이었다.
선배의 묘비에 새길 묘비명을 부탁받았을 때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 생각났다. 그의 묘비명은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라는 해석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평생 망설이며 하고 싶은 일을 미루고 살다가 죽어 땅에 묻혀버린 현실을 후회하는 말처럼 들린다. 죽은 뒤에 후회하지 말고, 살아있을 때 도전하고 모험하고 삶을 즐기라는 뜻으로 자주 인용되는 글귀다. ‘내 언젠가 이 꼴 날줄 알았지’라는 번역도 있다. 두 해석 모두 오역이라는 시각도 있다. 조지 버나드 쇼는 절대 우물쭈물한 삶을 살지 않았기에 틀린 번역이라는 주장에 무게가 더해지기도 한다.
그는 사후에 화장되어 영국에 있는 자택 정원에 뿌려졌고 무덤도 묘비도 없다. 본인이 썼다는 묘비명의 원문은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이다. 아흔셋까지 살았던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도 인생이 잠깐이었다고 느꼈을까? 그이에게도 후회나 아쉬움이 있었을까?
이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명은 유명 인사들의 칼럼은 물론 KTF의 3세대 이동통신서비스(WCDMA)인 쇼(SHOW)의 론칭 광고에도 등장했다. KTF는 삶의 지루함과 답답함을 모두 묻어버리고 새로운 통신 서비스가 주는 즐거움을 누리라는 이야기를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명을 인용하여 전달했다. 영상 속의 사람들은 유쾌한 얼굴로 지루함과 답답함이 묻힌 무덤에 꽃을 던지면서 웃고 춤춘다.
자막) 우물쭈물
살다가
이렇게 끝날 줄 알았지
-버나드 쇼
지겨움도 죽었다
심심함도
하품도
답답함도 죽었다
세상에 없던, 세상이 기다리는
3월
Na) SHOW가 시작된다.
SHOW
“나는 살 만큼 살았어, 지금 죽어도 아무렇지 않아.”
아흔 살 우리 엄마는 입버릇처럼 말씀하신다. 90번의 겨울과 90번의 봄, 여름 그리고 가을을 지나온 엄마의 90년도 어쩌면 잠깐이었는지 모른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120살까지 살 생각하라고 짐짓 큰소리를 치지만 엄마의 날은 그리 오래 남지 않았을 것이다. 알면서도 엄마는 언제나 뒷전이다. 단풍을 보러 가느라, 경조사에 참석하느라, 일정 없는 휴일엔 늦잠을 자느라 엄마의 집으로 가는 길은 점점 더 멀어진다. 잠깐이면 갈 수 있는데 그 잠깐이 가끔 아주 한참이다.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앞에서 인용한 최영미 시인의 시는 이렇게 끝난다. 세월을 보내는 건 쉬워도 켜켜이 쌓인 기억을 잊는 건 한참이나 걸릴 것이다. 영영 한참 걸려서 어쩌면 영영 잊지 못할 기억도 있을 것이다.
잠깐 사이에 지나가버린 내 2023년 안에도, 영영 못 잊을 기억 한두 개는 들어있을 것이다.
*선운사에서_최영미(『서른, 잔치는 끝났다』에 수록)
https://play.tvcf.co.kr/12084
KTF SHOW_TVCM_2007_tvcf링크
글. 정이숙 Jeong, Yisuk 카피라이터
정이숙 카피라이터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카피라이터로 광고와 인연을 맺었다. 롯데그룹의 대홍기획을 시작으로 한화그룹의 한컴, 종근당의 벨컴과 독립 광고대행사인 샴페인과 프랜티브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로 일했다. 지금은 디지털 마케팅 에이전시의 CD로 퍼포먼스 마케팅의 세계에 발을 담그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응답하라 독수리 다방(2015)』, 『광고, 다시 봄(2019)』, 『똑똑, 성교육동화(2019)』 시리즈 12권, 『김민준의 이너스페이스(2020)』가 있다.
abacaba@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