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니즘 시대의 여성 아키텍트와 디자이너 2024.3
Female architects and designers of the modernist era
21세기에 들어와 20세기 전반기 여성 아키텍트와 디자이너를 조명하는 콘텐츠들이 지속적으로 생산되고 있다. 지난 2016년에 개봉된 <그레이 매터스(Gray Matters)>는 마르코 오시니가 감독한 다큐멘터리로서 1920년대 급진적인 모더니즘 시대에 활약한 여성 아키텍트이자 디자이너인 에일린 그레이를 조명하고 있다.<사진 1> 에일린 그레이는 1920년대 프랑스에서 르 코르뷔지에보다 먼저 강철관 가구를 발표했다.<사진 2> 1925년 바우하우스의 마르셀 브로이어가 최초로 강철관 의자 B3 의자를 발표한 뒤 강철관이라는 재료는 모더니스트들의 전가의 보도가 되었다. 그레이는 1920대 중반 강철관 가구를 디자인하고 자신의 별장을 꾸미는 데 사용할 정도로 선구적이었다. 하지만 여성 아키텍트라는 이유로 거의 잊혔다가 1972년 첫 번째 전시회가 열리며 비로소 조명을 받았다. 1878년에 태어난 그레이는 장수(98세에 사망)한 덕분에 90대의 나이에 자신의 성취가 남성이 장악한 건축계에서 인정받는 현실을 경험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 아키텍트 마가레테 쉬테 리호츠키도 102살까지 장수하면서 말년에 아키텍트와 가구 디자이너로서의 업적을 평가받을 수 있었다. 리호츠키는 1926년 현대 주방의 효시가 된 프랑크푸르트 주방을 발표했다.<사진 3> 1932년에는 비엔나에 베르크분트 주택단지 건설 프로젝트에 30명의 아키텍트 중 유일한 여성으로 참여했다.<사진 4> 그녀는 특히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해 소련에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나치가 정권을 잡은 뒤 게슈타포에 체포돼 반역죄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다양한 건축 프로젝트에 참여했음에도 그녀는 단지 프랑크푸르트 주방의 디자이너로만 기억되었다. 80살이 넘어 1980년에 비엔나 시로부터 첫 번째 건축상을 받았다. 1993년, 96세 나이에 자신의 대규모 전시회가 처음으로 열렸다. 올해 뉴욕에서 <마가레테 쉬테 리호츠키: 선구적 아키텍트이자 활동가>라는 제목으로 전시회가 열린다.
하지만 20세기 전반기에 유리천장을 뚫고 활약한 대부분의 여성 아키텍트와 디자이너가 빛을 보지 못한 채 삶을 마감했다. 독일의 디자이너 릴리 라이히는 직물, 가구, 인테리어, 전시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했다. 독일공작연맹은 20세기 전반기 독일의 모더니즘을 이끈 단체다. 라이히는 1920년에 남성 위주의 이 단체에서 최초로 여성 이사가 되었다. 그녀는 1926년에 미스 반 데어 로에를 만나고 그녀의 경력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다. 1927년에 슈투트가르트에서 개최된 <주거(Die Wohnung)> 전시, 1928년 투겐타트 주택, 1929년 바르셀로나 박람회의 독일관이 그것이다. 이때 라이히는 바이센호프 체어(MR 의자)와 브르노 의자, 그리고 바르셀로나 의자를 미스와 함께 디자인했다.<사진 5, 6> 1931년, 미스가 바우하우스의 교장이 되자 그녀를 교수로 영입했다. 짧은 기간이지만 라이히는 바우하우스의 교수는 물론 학교 관리자라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했다. 그녀는 1947년, 6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0세기 중반 이후에 비로소 릴리 라이히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미스의 초기 건축과 가구 프로젝트에서 그녀가 얼마나 큰 기여를 했는지 밝혀졌다. 예를 들어 그녀와 협업하기 전까지 미스는 모던 가구를 제대로 디자인하지 못했다. 1996년에 뉴욕 현대미술관은 <릴리 라이히: 디자이너이자 아키텍트> 전시회를 개최했다. 이때 비로소 미스의 거대한 명성에 가려 잊혔던 릴리 라이히라는 존재가 부각되었다.
21세기에 들어와 뉴욕 현대미술관은 여성 아키텍트와 디자이너들을 조명하는 전시회를 잇따라 개최했다. 2014년에 <디자인닝 모던 위민(Designing Modern Women) 1890-1990>를 개최해 에일린 그레이, 릴리 라이히, 샬롯 페리앙, 아이노 알토(알바 알토의 부인), 레이 임스(찰스 임스의 부인), 데니스 스콧 브라운(로버트 벤투리의 부인), 벨라 비넬리(마시모 비넬리의 부인)와 같은, 파트너나 남편의 명성에 가려 알려지지 못한 다양한 분야의 여성 디자이너를 소개했다.<사진 7> 2017년에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전시회를 개최했다. 이 전시는 192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진행된 모던 인테리어 디자인을 소개한다. 특히 이 전시는 파트너나 부인으로 참여했지만, 남성 권위주의에 얽매여 가명이나 이름 없이 참여한 여성 아키텍트와 디자이너들을 집중 소개했다.
해외에서 출판과 전시회를 통해 여성 모던 아키텍트와 디자이너에 대한 조명이 활발히 이루어진 반면 한국에서는 그런 반향은 거의 없었다. 바우하우스 창립 100주년이었던 2019년에 디자인 연구자 안영주가 『여성들, 바우하우스로부터』를 썼다.<사진 8> 이 책은 20세기 모더니즘의 진원지이자 당시 가장 진보적인 학교인 바우하우스조차 성에 관한 한 얼마나 불평등했는지 밝힌다. 예를 들어 초창기에는 여학생들은 남학생들보다 더 많은 등록금을 내야 했다. 교장 발터 그로피우스는 여학생 수가 너무 많은 것을 우려했다. 그는 여성의 재능에는 한계가 있다고 보고 여학생을 주로 직물, 제본, 도자기 분야에 한정하려고 했다. 이에 따라 금속이나 나무 공방은 모두 남성으로만 채워졌다. 여학생이었던 알마 부셔는 목공방에 들어가고자 했으나 좌절되었고, 작업장을 부분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허락을 받고 모듈 형식의 나무 장난감을 개발했다.<사진 9> 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폭격으로 부셔는 1942년에 45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고 만다. 『여성들, 바우하우스로부터』에 따르면 완전히 잊혀졌던 알마 부셔라는 디자이너와 그녀의 장난감은 장난감 회사들로부터 창의성을 인정받아 1970년대부터 출시되었고, 1990년대에는 여러 전시회에 소개되었다.
바우하우스 하면 떠오르는 또 한 명의 여성 디자이너가 있다. 바로 마리안느 브란트다. 그녀는 이미 예술가로 활동하다가 바우하우스의 설립 이념에 반해 31세의 나이에 신입생으로 입학했다. 대부분의 여학생들이 텍스타일 전공을 숙명처럼 받아들인 것과 달리 과감하게 금속공방에 들어갔다. 금속공방의 남학생들은 그녀를 극도로 차별했다. 브란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렇게 고백한다. “처음에 나는 기꺼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금속공방에 여성을 위한 자리는 없었다. 그들은 나에게 온갖 쓸데없는 일을 줌으로써 불만을 표시했다. 나는 부서지기 쉬운 양은을 두들겨 얼마나 많은 소형 반구체를 만들었던가.”(『여성들, 바우하우스로부터』에서 발췌) 아이러니하게도 브란트는 그런 허드렛일 같은 반복작업을 수없이 한 덕분인지 금속공방의 최고 디자이너가 되었다. 그녀가 디자인한 주방용품과 조명들은 바우하우스를 대표하는 제품이 되었다.<사진 10>
그림책으로 출판된 『샬롯 페리앙,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상상한 건축가』는 20세기 전반기 모더니스트로 활약한 여성 아키텍트·디자이너에 관한 국내 책으로는 두 번째가 아닐까 싶다.<사진 11> 샬롯 페리앙은 르 코르뷔지에, 그의 사촌 동생인 피에르 잔느레와 함께 LC로 시작되는 유명한 모던 가구들을 공동 디자인한 사람이다. 이 책에는 그들이 만나는 과정이 언급되어 있다. 모던 디자인에 심취한 페리앙은 당시 모더니즘을 주도한 르 코르뷔지에의 사무실에서 일하고자 찾아간다. 르 코르뷔지에는 그녀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입사를 거절한다. 그 당시 르 코르뷔지에가 샬롯 페리앙에게 한 말은 전설이 되었다. “여기, 우리는 쿠션에 수를 놓지 않습니다.(Here, we don’t embroider cushions.)” 당시 남자는 건설가이자 구조주의자인 반면 여성은 장식가라는 고정관념이 있었다. 페리앙은 전시회에서 금속을 이용한 대단히 모던한 인테리어 디자인을 출품했다. 전시회를 본 르 코르뷔지에가 비로소 페리앙을 받아들였다. 2021년에 런던 디자인 뮤지엄에서는 <샬롯 페리앙: 모던 라이프>라는 대규모 회고전이 개최되었다. 이 전시회는 LC 시리즈 가구들의 주도적 디자이너가 페리앙임을 밝히고 있다. 그녀는 건축 설계로 바쁜 르 코르뷔지에와 잔느레를 대신해 LC 의자의 초기 스케치를 그렸다.<사진 12> 그럼에도 르 코르뷔지에라는 거장의 이름에 가려져 있었다. 이 전시를 통해 샬롯 페리앙의 역할이 재조명되었다.
오늘날 여성 아키텍트와 디자이너는 100년 전보다는 훨씬 개방적인 분위기에서 일하고 있다. 그런 환경은 거저 얻은 것이 아니다. 투쟁을 통해 성취한 것이다. 기득권자들은 결코 관대한 마음으로 자신의 권리라고 믿는 그 자리를 순순히 내주지 않는다.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남성들은 자신들이 생물학적인 성 정체성 하나만으로 얼마나 큰 특권을 누리고 있는지 깨달아야 한다는 점이다. 20세기의 위대한 모더니스트들인 발터 그로피우스, 미스 반 데어 로에, 르 코르뷔지에, 알바 알토, 찰스 임스가 만약 공평한 성평등 사회에서 경쟁했다면, 그만한 명성을 얻을 수 있었을까? 타고난 재능이 있듯이 경쟁 사회에서 타고나게 이익을 보는 성이 있는 것이다.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kshin201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