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오딧세이 ⑪ 변화의 흐름 속에 놓인 종로 인사동길 2024.4
City Odyssey ⑪ Insadong-gil, Jongno, amidst the flow of change
수십 년 전엔 이 길에 들어설 때마다 ‘하필 전통문화 공간을 상업화하려는가?’라는 물음을 던지곤 했다. 곳곳에서 변질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길은 고즈넉했고 인사동 특유의 분위기가 감돌았다. 질주하는 차가 매연과 소음을 일으켰어도, 화랑과 전시장 등 문화시설은 물론 민속공예품과 골동품, 필방과 표구점, 고서점과 도자기 등 전통과 관련된 매장이 곳곳을 채우고 있어 예스럽고 멋스러운 분위기였다.
길은 보헤미안의 공간이기도 했다. 민예총(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과 민미협(민족미술인협회)이 들어서자 민중미술가와 만화가는 물론 해직된 기자와 교수 등 시대가 탄생시킨 방랑자 차지였다. 1980년대 후반 형성된 이런 분위기는 자연스레 문인과 작가, 공연예술인, 화가와 사진가는 물론 언론인과 지식인을 끌어들이는 구심력으로 작동했다.
구석구석 박힌 크고 작은 술집들은 늘 이들 차지였고, 그곳에선 세상 이야기와 문학, 진지한 예술 담론이 술잔을 넘실거렸다. 찻집은 물론 지필묵 내음 가득한 음식점도 여럿이었다. 이때부터 1990년대까지가 인사동 최전성기였다. 그때까지는 그래도 앞의 물음이 유효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사동길은 시나브로 예스러운 정취를 잃어갔다.
인사동길
인사동길은 개울이었다. 경복궁 동쪽 언덕 아래에 모인 물이 안국동천을 따라 흐르다 청계천으로 빠져나갔다. 개울 양편으로 마을이 자리했다. 조광조나 율곡 같은 시대를 짊어진 이도 있었으나, 주로 중인이 모여 살며 북촌 권세가를 뒷받침하던 배후지였다. 1920년대 개울이 복개되어, 안국 사거리에서 탑골공원까지 1킬로미터 남짓 인사동길이 생겨난다.
관훈동이 인사동길 대부분이고, 정작 인사동은 일부에 불과하다. 18세기 중반까지 도화서가 있었던 조계사 앞 견지동도 인사동길 통칭이다. 도화서가 광교 근처로 이전했음에도, 그 존재는 인사동의 탯줄이 되어 주었다. 자연스레 그림을 사고팔았으며, 문방사우를 취급하는 점포가 있었으리라.
인사동길은 전통문화를 떠오르게 한다. 이는 공간구조가 규정한 인지 특성이다. 전통과 문화는 익숙하긴 하나 몹시 어려운 말이다. 사전적 정의도 추상적이며 어려운 말투성이다. 이를 잇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전제에서 이 길을 살피면, 인사동길은 분명 전통문화의 맥이 흐르는 공간임에는 분명하다.
와르르 쏟아진
인사동의 변화도 강압된 근대화와 함께였다. 갑오개혁(1894)으로 왕조를 지탱해 온 계급구조가 해체되지만, 종이에 적힌 문구일 뿐 실질엔 이르지 못했다. 강제 병합 후속 조치인 ‘조선귀족령(1910)’으로 76명의 귀족이 탄생한다. 왕조시대 권력과 경제력을 거머쥐었던 세도가 중 일제가 임명하는 귀족에 포함되지 못하거나 거부한 양반이 이때부터 실질적 몰락의 길로 접어든다. 강제된 계급 해체다. 부와 권력을 뒷받침하던 경제 기반도 같이 해체당한다.
힘을 잃은 많은 북촌 양반이 절체절명이다. 당장 호구지책으로 집안 대대로 물려온 고서화나 도자기, 공예품 등을 우선 처분한다. 북촌 배후지 인사동으로 진귀한 물품이 와르르 쏟아져 나온다. 부를 축적한 인사동 중인과 자본력을 갖춘 일본인이 이들 물건을 취급하기 시작한다. 돈이 되었기 때문이다. 추레한 역사가 만들어낸 강제된 흐름이다.
안국동천 복개는 급격한 변화를 추동한다. 천도교 교당과 승동교회 등 종교시설, 인쇄소와 한성도서 등 출판사, 태화관 같은 요릿집과 해정병원 등이 근대화 바람을 타고 인사동에 들어선다. 길 좌우로 골동품과 고서화 등을 취급하는 상가가 들어선다. 종로와 충무로에 있던 통문관 등 여러 고서점도 이때 옮겨온다.
일제 강점기 전국적으로 셀 수 없는 문화재가 일본 등 해외로 빠져나간다. 인사동도 그 통로 중 하나로 1930년대부터 전성기를 구가한다. 값나가는 문화재를 취급하는 골동품점이 호황을 맞으며, 진귀한 문화재가 일본인들 손아귀에 넘어간다. 이 또한 피할 수 없는 흐름이었다면, 이는 분명 비극이다.
잇고, 변화하는
한국전쟁의 폐허와 굴곡진 현대사를 지났어도 공간구조는 1960년대 후반까지 비교적 순탄하게 지켜진다. 전쟁으로 주인 잃은 고서화와 고가구, 고미술품이 인사동으로 쏟아져 이를 취급하는 점포와 필방, 표구점이 지배하는 거리로 변모한다. 통인가게를 비롯한 골동품상과 이름난 표구점 등이 당시를 대표하는 상점이다.
미술 붐이 일기 시작한 1970년대, 인사동은 현대화랑을 필두로 상업화랑 시대를 구가한다. 화랑 여럿이 속속 문을 열고, 김기창 등 유명 화가의 화실도 인사동에 있었다. 고서와 그림에 대한 잠재 수요 증가로 고미술상이 전성기를 누렸고, 예술가와 문인의 발길이 잦아진다. 이들의 공간으로, 자연스럽게 길 안쪽 한옥에 옛 정취 물씬 풍기는 음식점이 차례로 들어선다.
1980년대는 문화 불모지였다. 이 여파로 상업화랑들이 크게 위축된다. 대신 관훈미술관이 전시장을 대여해 숨통을 터준다. 민중미술을 전시하던 그림마당 민 등 대안공간은 인사동으로 민중미술가와 사회변혁을 바라는 젊은이를 끌어들인다. 명동을 근거지 삼던 문인들도 이때 인사동을 새 둥지 삼아 자리한다. 천상병 시인 부인이 차린 귀천 등 여러 전통찻집이 이때 생겨난다.
민정당이 1981년 조계사 앞 관훈동에 당사를 마련하고, 3당 합당 후인 1990년부터 민자당 서울시지부로 쓴다. 당사가 있었어도 정치인들은 인사동에 어떤 순기능도 불어넣지 못했다. 다만 밥만 먹고 가는 이들을 겨냥한 가회 등 한정식집이 이때 생겨난다.
찢겨 박제화한
오히려 이젠 ‘어떤 모습으로 상품화해야 길의 전통문화가 되살아날까?’가 화두인 시대다. 차에 빼앗긴 보행권을 되찾아주려는 시작은 분명 선의였고 방향도 옳았으나, 준비가 치밀하지 못했다.
길이 ‘전통문화의 거리(1988)’로 지정되면서부터 공간 왜곡이 시작되었으니, 이는 분명 지독한 역설이다. 전통 놀이판의 관제 축제가 이목을 끌던 시절이다. 일요일(1997)과 주말(2003)에 차량 진입을 금지하니, 사람이 몰려든다.
평일 차 없는 거리(2011)를 만들자, 길이 인파로 채워진다. 몰려든 인파는, 인사동길 점포를 순차적으로 바꿔나갔다. 고서점과 화랑, 민속공예품 등이 값싼 기념품이나 옷, 화장품과 아이스크림 가게에 밀려나야 했다.
이를 막고자 허용업종을 강력히 규제하는 ‘문화지구(2002)’로 지정한다. 전통문화 보존과 활성화가 목적이나, 부작용과 편법도 만만찮은 현실이다. 문화지구는 오히려 찢겨 박제화한 몇몇 표식과 기호만 상징처럼 이 거리에 남겨 놓았을 뿐이다.
인파는 아울러 이 공간 조직을 투자대상으로 바라보게 작동했다. 인사동 외곽 큰 도로에 면한 필지가 우선 먹잇감이다. 크고 작은 필지에 공격이 시작된다. 1990년대 후반 탑골공원 옆 대일빌딩 자리가 파헤쳐지면서 신호탄이 쏘아 올려진다.
낙원상가 서쪽의 작은 블록과 예전 종로경찰서 동쪽은 고층 빌딩 일색이다. 대성산업에서 삼성화재로 주인이 바뀐 옛 민정당사 자리엔 낯선 얼굴의 호텔이 인사동길을 압박한다. 안국 사거리와 태화관 자리 및 주변은 오래전 고층화했다. 인사동 옛 피맛골은 철거재개발로 벌거숭이가 되어버렸다. 어떤 이질감이 이 공간을 채워갈지 생각만으로도 아찔하다.
필지가 합쳐지면서 골목이 사라진 곳에선 어떤 전통의 맛도 느낄 수 없다. 도시형 한옥은 인사동길과 삼일대로 사이에 옹색한 모양새로 남았을 뿐이다. 이 작은 공간이나마 어찌 보존하고 계승 발전시킬 것인가를 모색해야 할 때다.
긴 시간, 다른 방향으로
길이 흐름이듯, 공간도 그렇다. 인사동은 변화하는 시대와 찾는 사람에 따라 다른 얼굴을 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시간이 만드는 흐름이기 때문이다. 이 흐름을 인위적으로 막아낼 수 있을까. 불가능하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어떤 방법으로 공간 특성을 지켜내야 하는가?
공간 특성을 잃은 인사동은 골목마저 잠식당하고 있다. 업종 규제가 능사가 아니라는 방증이다. 규제를 통해 길의 특성을 지켜보겠다는 생각은 이해하지만, 이 방법은 분명 한계가 농후해 보인다. 차가운 자본의 공격은 늘 있었고 더 강해질 것이다. 먼저 변화에 순응하자. 흐름에 맡기고, 외부에 보여주고 싶은 박제화한 전통부터 버리자.
‘쌈지길’과 ‘안녕 인사동’을 보면 특별계획구역 지침(마당은 대지면적의 20% 이상, 고도는 18m로 제한)이 어떤 성과를 냈는지 의문이다. 쌈지길 아류들이 판을 칠 개연성만 더 키워 놓았다. 좀 더 적극적인 방향으로 공간을 보존하면서 바꿔보는 건 어떤가.
일정 면적의 필지 병합을 불허하고 골목은 어떤 경우라도 존치하자. 이로써 공간구조만이라도 지켜내자. 그리고 목조 한옥에 초점을 맞추자. 기술 발달로 수 개 층의 한옥도 건립이 가능해졌다. 긴 시간을 갖고, 신축 필지에 이를 적용해 보자. 백 년이 걸릴 수도 있다. 후세대가 누릴 몫으로 남겨두자. 이게 순리라 생각한다.
글. 이영천 Lee, Yeongcheon 자유기고가
이영천 자유기고가
도시공학 학사(홍익대학교), 도시계획 석사(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계획기술사(1999). 엔지니어링사에서 도시계획 업무를 시작으로 건설사에서 오랜 기간 사회간접자본 투자사업에 종사했다. 자유기고가로 한국도로협회 계간지 <도로교통>에 다리 에세이 연재 중이다. 인터넷 매체 ‘오마이뉴스’에 다리 및 근대건축 관련 에세이를 연재했고, 현재 도시 관련 에세이 연재 중이다. 저서로 『다시, 오래된 다리를 거닐다』와 『근대가 세운 건축, 건축이 만든 역사』가 있다.
shrenrhw@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