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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 vs 육체지능 2024.5

월간 건축사지 2024. 5. 31. 09:15
Artificial Intelligence vs Physical Intelligence

 

 

 

이세돌이 인공지능 알파고와 세기의 바둑대결을 한 것이 벌써 8년 전 일이다. 두뇌 게임에서 인공지능과 인간의 대결은 이미 20세기 말에 성사된 바 있다. 1997년, ‘딥블루’라는 컴퓨터가 체스 세계 챔피언을 꺾었다. 그리고 2016년 알파고가 이세돌과 대결한다고 했을 때 많은 바둑 전문가들이 바둑만큼은 인공지능이 사람을 따라오지 못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왜냐하면 바둑은 체스보다 경우가 수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많을 뿐만 아니라 단순 계산을 넘어 맥락적 사고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섯 번의 대결에서 이세돌은 겨우 한 판만을 겨우겨우 이겼다. 그 뒤에 세계의 수많은 고수들이 도전했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는 것은 물론 인간이 접바둑을 둬야 겨우 이길 정도가 되었다. 접바둑이란 하수가 고수를 상대할 때 실력 차가 커서 승부의 긴장을 위해 고수에게 핸디캡을 주는 것을 말한다. 바둑판에 하수의 돌을 미리 깔아놓는 것이다. 미리 깔아놓은 바둑돌이 많을수록 실력 차이가 크다. 첫 대결 뒤 8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인공지능의 실력은 더욱 늘어나 하수 인간은 석 점을 먼저 깔아야 겨우 이길 정도로 차이가 벌어졌다. 앞으로도 인간의 실력보다 인공지능의 실력이 더 빠르게 성장할 것이다. 

지난달 <동아사이언스>에 알파고 승부에 대한 이세돌의 흥미로운 소감이 실린 것을 보고 인공지능과 인간의 결정적인 차이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차이로부터 나는 예술 분야에서만큼은 인공지능이 사람을 영원히 따라올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도 얻을 수 있었다. 이세돌은 바둑을 두며 벽과 테니스를 치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왜 그랬을까? 알파고는 물리적 형태를 지닌 로봇이 아니라 소프트웨어다. 따라서 인공지능이 바둑판의 좌표값에 어떤 수를 결정하면 그 수를 옮기는 대리인이 필요하다. 바둑판의 한쪽에 앉은 이세돌이 돌을 놓으면, 그 맞은편에 앉은 알파고의 대리인은 아무런 고민도 긴장도 없이 알파고의 명령을 받아 돌을 옮길 뿐이다. 그는 오히려 바둑돌을 옮기며 이세돌을 응원했을 것이다. 이런 현실적인 상황에서 이세돌은 맞은편에 앉은 사람을 적으로 느끼지 못한다. 

이는 사람과 사람이 대결하는 것과 큰 차이다. 대결 상대가 사람 사이의 대결에서는 아주 가까이에 있는 상대방의 호흡과 심리적인 반응을 느끼며 대국한다. 상대가 긴장을 하면 바둑돌을 놓을 때마다 돌 위에 땀이 배어 나온다. 백돌보다는 흑돌이 땀을 잘 반사시켜 번들거린다. 더 긴장을 하면 손의 떨림을 느낄 수도 있다. 상대가 무릎을 치거나 다리를 떨거나 깊은 한숨을 쉬거나 뭐라 뭐라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등의 반응을 느껴가며 승부를 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대국 중 흡연이 허용되었다. 세계적 기사 조훈현은 대국 한판 둘 때 장미 담배 세 갑을 피운 것으로 유명하다. 상대방은 조훈현이 뿜어대는 담배 연기를 마셔가며 대국을 해야 했다. 옛날에는 담배에 참 관대했다. 일본 기사 요다 노리모토는 바둑돌을 세게 내리치는 것으로 유명하다. 나무 바둑판과 돌이 부딪히며 크게 ‘딱’ 하는 소리가 나면, 상대방은 심기가 불편해지는 것이다. 이처럼 바둑 기사는 단지 바둑 실력 말고도 다양한 버릇, 고유한 특징과도 상대해야 한다. 반면에 알파고의 대리인은 마치 기계처럼 바둑을 두니 이세돌은 온라인으로 바둑을 두는 듯한 느낌이었을 것이다.  

상대가 벽이라고 느끼는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이세돌은 이렇게 말했다. “예술이 아닌 정답을 맞히는 과정이 된 것 같아 아쉽다. 내가 바둑을 처음 배웠을 때는 바둑은 두 명이 함께 수를 고민하고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예술로 배웠다. 그런데 AI가 나온 이후로는 마치 답안지를 보고 정답을 맞히는 것 같아서 오히려 예술성이 퇴색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생각도 하지 않고 거침없이 돌을 놓는 알파고는 말 그대로 피도 눈물도 없는 차가운 기계였던 것이다. 아무리 절박한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고민이 없다는 것, 긴장도 하지 않는다는 것, 가끔 엉뚱한 버그는 있더라도 실수 없이 정답만을 내놓는다는 것, 따라서 승부의 승패와 관계없이 욕망도 후회도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인공지능의 본질이다. 그저 주어진 임무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머뭇거림도 없이 수행해나간다. 당연히 보상도 바라지 않는다. 

인공지능과 사람의 근본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건축과 디자인, 회화, 조각, 공예와 같은 조형예술 분야에 한정해서 말한다면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상호작용이고, 다른 하나는 의지다. 먼저 상호작용에 대해 살펴보자. 건축이나 디자인을 할 때 사람은 의뢰인과 의견을 조율하며 최종 결과에 다가간다. 이 과정에서 의사소통이 중요하다. 사람의 의사소통은 쉬운 것 같지만, 수많은 경험과 통찰이 있어야 한다. 특히 맥락적 판단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보자. 엄마가 공부하지 않고 놀기만 하는 자식에게 “그래 평생 그렇게 놀고먹고 살아라.”라고 했을 때 자식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는다. 자신이 지금 처한 상황, 엄마의 표정과 목소리 톤, 과거의 경험 등을 종합해 그 말이 반어법이라는 걸 금방 알아챈다. 이것이 바로 맥락적 판단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그것을 기계적으로 해석한다. 번역기가 아직 인간 번역의 품질을 따라가기 힘든 이유다. 사람은 맥락적 판단이라는 고도의 지적 활동을 빠르게 해낸다. 인공지능은 단순 계산은 빛의 속도로 해내지만, 이렇게 복합적인 상황 판단에는 아직까지 취약하다.  

 

<사진 1> 인공지능 넥스트 렘브란트가 3D 프린팅으로 그린 그림. 딥러닝 알고리즘과 얼굴 인식 기술로 제작되었다.

디자인 작업이란 언제나 의뢰인의 요구로 시작된다. 즉 상호작용의 작업이다. 의뢰인의 요구는 언어로 전달된다. 언어는 의뢰인의 마음과 욕망 등이 압축된 것이다. 의뢰인은 때로는 자신의 진짜 욕구가 정확히 무엇인지 언어로 표현하지 못할 때도 있다. 그때 디자이너는 의뢰인이 처한 상황, 경쟁사의 현황, 지금의 트렌드 등에 대한 다양한 자료를 수집해 솔루션을 제공한다. 의뢰인은 단번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수정과 확인 작업이 지속된다. 이 과정에서 필요한 디자이너의 능력은 상호작용과 의사소통이다. 단순히 그래픽만을 표현한다면 인공지능이 더 나을 수도 있다. 인공지능은 고흐나 렘브란트 풍의 그림을 사람보다 더 엇비슷하게 만들 수 있다.<사진 1> 하지만 의뢰인의 막연한 요구를 해석해서 거기에 맞는 솔루션을 제공하는 과정은 사람보다 훨씬 오래 걸릴 수 있다. 

의뢰인 없이 작업하는 순수 아티스트는 어떨까? 그의 작업 역시 상호작용의 결과다. 사람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을 보고 느끼고 대응하며 정보와 지식을 축적한다. 아티스트의 작품이란 오랜 시간 그에게 축적된 이러한 경험의 산물이다. 모든 사람은 다른 경험을 하므로 수학이 아닌 이상 주어진 문제에 각자 다른 답을 할 것이다. 조형예술뿐만 아니라 시와 문학, 음악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작품을 감상할 때 특정한 사람의 삶을 느끼는 것이다. 어쩌면 작품 자체보다 그것을 창조한 사람이 더 중요하다. 피카소는 이렇게 말했다. “중요한 점은 미술가가 무엇을 하는지가 아니라 그가 어떤 사람인가이다. 만일 세잔이 블랑슈처럼 살고 생각했다면, 그가 그린 사과가 열 배나 더 아름다웠다고 해도 나는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세잔의 불안이다. 그것이 세잔의 교훈이다. 고흐의 고통, 그것이 그 인간의 참된 드라마이다. 나머지는 껍데기이다.” 반면에 인공지능의 작품은 고유한 ‘삶’이 아니라 방대한 데이터 학습의 결과다. 따라서 사람은 그 작품의 결과만을 감상할 뿐 그것을 창조한 인공지능이 누구냐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인공지능에게는 사회, 자연과 상호작용한 삶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세돌이 알파고를 벽으로 느낀 이유도 이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알파고는 한 마디로 상대와 상호작용하지 않는다. 어떤 상황이든 무관하게 그저 최선의 답을 찾을 뿐이다. 사람은 정답보다는 환경을 고려한다. 

두 번째 차이인 의지에 대해서 살펴보자. 사람의 의지는 그저 결심한 것을 묵묵히 해내는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의 의지는 의식이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몸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의지는 연약한 ‘육체의 의지’다. 육체를 완벽하게 통제하는 의식의 의지가 아니라는 뜻이다. 인공지능은 바로 이 사람만이 갖는 ‘육체의 의지’가 없다는 점에서 창의성의 결핍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 시키는 일에 충실하다. 반면에 사람은 누군가의 통제를 받는 것을 극도로 힘들어한다. 사람이 연초에 금연을 하겠다거나 살에 빼겠다는 결심을 하지만 작심삼일이 되는 건 그가 의지력이 약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그 결심이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 타인 또는 사회적 명령이라는 것을 그의 몸이 인식하고 의지력을 발동해 강력하게 거부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군가의 지시에 거역하려는 본능이 있다. 엄마가 공부를 하라고 하면 더욱더 하기 싫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통제받는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누군가의 그림풍으로 그리라고 하면 그의 의식이 그런 명령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의식보다 더 근본적이고 솔직한 몸은 그것을 거부한다. 그리하여 어떻게든지 자기 식의 표현을 더한다. 그것이 바로 ‘예술의지’다. 그것은 의식의 의지가 아니라 육체의 의지로부터 출발한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인간의 명령을 받아서 수행하는 척하는 의식과 그것을 거부하는 몸으로 이원화되어 있지 않다. 

 

<사진 2> <커튼이 있는 정물>, 폴 세잔, 1898년
<사진 3> <감자 먹는 사람들>, 빈센트 반 고흐, 1885년

바로 이런 예술 의지가 솜씨는 서툴더라도 더 높은 창의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세잔은 기술적으로 탁월해야만 하는 19세기 아카데미즘으로부터 멀어짐으로써 완전히 다른, 즉 창조적인 현대미술의 길을 열었다.<사진 2> 고흐 역시 기술적으로 탁월한 화가가 아니다.<사진 3> 동시대의 윌리엄 부그로 같은 아카데미즘 화법을 구사하는 화가가 테크닉은 더 뛰어나다.<사진 4> 하지만 오늘날 윌리엄 부그로를 아는 대중은 없다. 왜냐하면 그는 마치 인공지능처럼 과거의 관습을 답습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고흐를 비롯한 대가들은 과거의 관습을 익히는 과정 속에서도 그것을 거부하는 예술 의지가 큰 사람들이다. 인공지능에게 모차르트의 모든 곡을 입력해 학습시키면 모차르트풍의 음악을 그럴듯하게 작곡한다. 하지만 모차르트의 영향을 받아 대가가 된 인간 음악가만큼 독창적인 작곡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따라서 정답을 찾는 것이 중요한 수학이나 바둑에서는 사람이 인공지능을 이길 수 없지만, 다름과 반항이 더욱 중요한 창조적인 영역에서는 인공지능은 아직 멀었다. 

 

<사진 4> <님프와 사티로스>, 윌리엄 아돌프 부그로, 1873년

육체란 유한하다. 언젠가는 썩어서 없어질 것이다. 살아가는 동안에도 그 유한성으로 인해 의식의 의지를 자꾸 좌절시킨다. 공부를 해야 하고 일을 해야 하는데, 쉬고 싶고 놀고 싶다. 단호하게 결심을 하고 밀고 나가야 하는데 우물쭈물 우유부단하다. 이런 육체의 연약함이야말로 기계와 다른 사람의 본질이며 창의성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저 기계처럼 노력하면 창의성에 이르는 줄 아는 사람이 아직도 많은 것 같다. 사회는 질서유지라는 명분으로 사람을 통제하려는 경향이 있다. 학교가 가르치는 것 역시 사람이 가진 근본적인 반항심을 거세하는 것이다. 특히 독재적이고 권위적인 사회는 사람이 타고난 이 육체의 의지, 거부의 의지를 무력화하려고 한다. 사람을 기계처럼 만들려는 것이다. 사회는 어쩌면 인간을 인공지능처럼 만들고 싶은지도 모른다. 명령을 내리면 주저하지 않고 답을 내리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렇게 질서로 꽉 짜인 사회가 바로 통제사회이며, 이세돌이 말하는 예술성이 거세된 사회다. 그것에 반항할 수 있는 근본적인 힘은 아이러니하게도 유한하고 연약한 육체에서 나오는 것이다. 

인공지능과 자동기계가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 이는 통제사회를 만들려는 권력층의 기대가 실현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말 잘 듣는 종업원을 원하는데 그들이 자꾸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러면 불평불만 없이 명령을 충실히 실행하는 기계를 고용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인공지능과 기계는 사람만이 갖는 몸으로부터 발현된 ‘육체지능’이 없으므로 창의성과 예술성까지 기대할 수 없다. 결국 인공지능의 확대는 질서로 가득하지만 생동감이 전혀 없는 사회를 만들 것이다. 무질서하더라도 생동감이 있는 사회가 훨씬 좋은 것이다. 연약한 육체성을 존중해 주면 사회는 훨씬 살만해질 것이다.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kshin201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