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은 없을, 새봄 2024.5
New Spring, which won’t happen twice
여느 때처럼 헤드폰을 끼고 출근길을 걷고 있었다. 헤드폰을 끼면 주변의 소리가 모두 사라진다. 소리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움직임도 덩달아 희미해진다. 바로 옆을 지나치는 사람이 들고 있는 종이컵도, 한쪽에 옹기종기 모여선 사람들이 뿜어내는 아침 담배연기도, 짐을 내리는 택배기사의 분주함도 영화 속 화면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그렇게 헤드폰의 소리에만 집중하며 걷던 내 눈에 무언가 번쩍하고 들어왔다. 코엑스 건물에 달려 있는 글판에 내걸린 문안이었다.
새싹을 밟을까봐, 아이는 깡총깡총 걸었다
뭐지? 저렇게 순한 문장은? 새싹을 밟을까봐 조심하는 어린이라니, 게다가 살금살금 걷지 않고 봄 햇살이 주는 흥을 못 이겨서 깡총깡총 걸었다니! 쇼핑몰의 세일 행사를 알리는 것 같지는 않고, 왜 저런 문장을 걸었을까? 책상 앞에 앉아서도 그 짧은 문장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검색해 보니 서울시가 2024년 봄을 맞아 ‘꿈새김판’에 게시한 글귀였다.
서울시는 2013년 6월부터 서울도서관 정면 외벽에 ‘꿈새김판’을 설치해서 운영하고 있다. 각박한 일상 속에서 시민에게 따뜻한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문안은 주로 시민의 공모를 통해 정해지는 모양인데, 이번 봄 편을 뽑는 공모전만 해도 1,061건의 문안이 접수되었다고 하니 시민들의 관심이 제법 뜨거운 것을 알 수 있다. 꿈새김판을 볼 수 있는 곳은 서울시 중구에 있는 서울도서관 외벽과 신세계백화점 본점 대형 전광판, 강남구 코엑스 스퀘어 미디어 등 옥외전광판과 서울시 보유 홍보매체들이다.
최첨단 미디어 아트 기술로 놀라운 영상을 보여주는 거대한 전광판과 자극적인 문안으로 소비자를 유혹하는 광고판이 즐비한 삼성역 주변에서 글과 그림 모두 소박한 서울시의 글판을 만나니 반가운 마음이 일었다. 느끼한 양식만 열흘 먹다가 멸치 국물 우려 끓인 슴슴한 시래기 된장국을 맛보는 기분이 들었다.
눈사람이 녹을까 봐 냉동실에 넣어두었던 내 아이의 어릴 적 모습이 꿈새김판에 겹쳐 떠오른다. 내가 만났던, 작고 힘없고 사라지기 쉬운 것을 발견하고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들이 새삼 고맙게 상기된다. 엘리베이터 없는 계단 아래서 막막하게 서있는데 유모차를 번쩍 들어 올려주던 행인①, 지하철 역사에 들어가는데 뒷사람이 올 때까지 문을 잡고 있던 행인②, 만원 전철에서 다른 사람이 탈 수 있게 안쪽으로 한 뼘 움츠려주던 승객①, 서있는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던 본인도 머리 허연 승객②… 딱히 특별하다고 할 수도 없는 이런 몸짓들이 모여 새싹을 지키고 꽃을 피우는 것이 아닐까?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봄이 떡하니 와버렸다. 입춘이 지나고도 한참 동안 겨울 외투를 벗지 못했는데 갑자기 반팔 셔츠를 찾게 되었다. 개나리도 진달래도 제대로 마주친 적 없는데 이파리의 초록은 하루가 다르게 짙어지고 있다. 봄꽃놀이 한번 못 했는데 봄이라 할 수 있나, 섭섭해지는 마음에 몇 년 전 꿈새김판의 문장이 슬며시 위로를 건넨다.
이름 없는 날도 봄이 되더라
이름 없는 꽃도 향기롭더라
봄이다, 이 봄의 거의 모든 날이 평범한 날로 무심하게 흩어지겠지만
두 번은 없을 새봄이다.
글. 정이숙 Jeong, Yisuk 카피라이터
정이숙 카피라이터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카피라이터로 광고와 인연을 맺었다. 롯데그룹의 대홍기획을 시작으로 한화그룹의 한컴, 종근당의 벨컴과 독립 광고대행사인 샴페인과 프랜티브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로 일했다. 지금은 디지털 마케팅 에이전시의 CD로 퍼포먼스 마케팅의 세계에 발을 담그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응답하라 독수리 다방(2015)』, 『광고, 다시 봄(2019)』, 『똑똑, 성교육동화(2019)』 시리즈 12권, 『김민준의 이너스페이스(2020)』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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