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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되지 않는 평면과 열려있는 건축 2024.5

월간 건축사지 2024. 5. 31. 09:35
Incomplete floor plan and open architecture

 

 

 

서촌 인근의 한옥 리모델링 일을 맡은 지 벌써 두 달이 되어가지만, 아직도 평면 계획은 진행 중이다. 의뢰인의 요구사항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방안을 짜보았지만 딱히 이렇다 할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가장 큰 난관은 건축주가 원하는 바에 고정된 방향성이나 구체적인 형태가 없다는 것이었다. 건축물을 사용하게 될 인원도 확정되어 있지 않고, 건축물의 용도 또한 모호한 상황이었다. 자녀 한 분과 건축주까지 둘이서 거주하는 공간이지만, 추후 부모님 한 분과 함께 살 수도 있는 가능성을 고려해야 했다. 또 가족의 작업 공간과 주택이 공존하면서도 독립적으로 작동해야 하는 부분, 앞으로 이 공간이 거주지에서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될 수도 있다는 잠재성을 약 46제곱미터(14평)의 작은 공간에 모두 담아내야 했다.
우선 건축주가 요청한 모든 부분을 46제곱미터의 공간에 밀어 넣었다. 마루와 부엌, 작업실, 서재, 침실, 화장실과 같은 방들과 냉장고, 세탁기, 안락의자, 이젤 등 필수적인 가전이나 도구부터 손님용 침실, 작업실용 별도 동선, 문화 공간을 염두에 둔 보조 출입문 등 미래에 대한 변화 가능성까지 꽉꽉 눌러 담는다. 계획을 진행하면 할수록 공간은 촘촘히 분할되고, 조금이라도 틈이 나면 그곳을 쪼개는 데 급급하다. 화장실을 보면 일본의 비즈니스호텔의 욕실이 오히려 여유롭게 보일 정도다. 그렇게 만들어진 계획안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평면이다. 잘게 분절된 방들은 맡은 바 기능을 만족하며 존재하지만, 각각이 독립된 비좁은 섬과 같아서, 바라보고 있자니 이내 갑갑해져 온다. 종이에 인쇄된 2D 평면이지만 망치로 헝클어트리고 싶은 충동이 인다.

 

그러던 중 건축주 미팅 차 5년 전 리모델링 프로젝트로 진행했던, 건축주가 현재 거주하는 주택에 방문하게 되었다. 이곳은 건축주 한 명만을 위한 주택이자 작업 공간으로, 약 17제곱미터(5평)의 마당을 둔 약 33제곱미터(10평)의 디귿자 한옥이다. 차를 끓이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우신 사이에 집을 둘러본다. 시간이 지나면서 계획했던 당시와 달라진 부분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동안 늘어난 책들은 계획된 책장을 넘어 곳곳에 넘쳐흐르고 있었고, 달라진 가구 배치나 추가된 가구들, 추위와 벌레 등의 문제로 인해 목창호에서 PVC 시스템 창호로 변경한 부분을 보고 있으니 당혹감과 기쁨이 동시에 몰려든다. 나라면 생각하지도, 선택하지도 못했을 가구나 창호의 조합이 이상하게도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설계 당시에는 계획하지도, 예상하지도 못했던 부분이었지만 집 자체와 그 속의 사물들이 거주자의 분위기를 닮아가며 더욱더 자연스러운 느낌이다.

개다리소반에 내주신 차를 마시며 마당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건축주는 이 집이 원래 규모 이상의 공간으로 느껴진다고 했다. 부엌, 거실, 침실, 서재가 모두 마당을 둘러싸고 있어서, 어떤 방에 있어도 바라보이는 마당의 면적이 지금 있는 방의 일부처럼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실제 실내공간은 약 33제곱미터 (10평)이지만, 약 17제곱미터(5평)의 마당 면적이 각각의 방에 더해져 대지 50제곱미터(15평)를 훨씬 초과하는 공간처럼 인지된다는 말에 크게 느끼는 바가 있었다. 건축주와 대화를 마치자 이번 프로젝트를 해결할 실마리가 손에 잡힐 것 같았다.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의 문제는, 모든 것을 현재의 평면 안에서, 각각의 방 안에서 완결하고자 하는 내 태도에 있었다. 실내공간만을 활용해, 아니면 각각의 명확한 공간 구획의 내부에서 구분된 기능들을 완성하고자 했고 사용자의 필요에 따라 계속해서 변경될 건축물의 미래를 ‘나’의 세계 속에 가두어 두려는 욕심이 평면을 답답한 형태로 귀결시켰다.
지금의 결론은 고정된 형태가 없는, 다양한 가능성에 열려있는 평면이다. 공간 구획이 다양하게 변하며, 각각의 경계는 모호하다. 벽들은 있다가 없다가 하며 나누어진 공간이 되기도, 커다란 원룸 공간이 되기도 한다. 분절의 명확성과 구획의 효율성에서 벗어나자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길이 열린다. 구체적인 형태를 고정하지 않아 오히려 더욱 많은 가능성과 다양함, 유연함을 갖게 되었다.

수많은 고민과 노력을 통해 설계하고 시공을 통해 실제로 건축물을 구현해 내지만, 건축은 거기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건축은 설계자의 기획이나 의도와는 상관없이 사용자의 필요와 창조성에 의해 다양하게 변주되며 스스로의 삶을 이어간다. 설계안을 그릴 때엔 여러 변수를 최대한 예측하려 하지만, 정말 살아야만 알게 되는 부분이 있기에, 집이란 건축사와 시공자, 그리고 살아 숨 쉬는 건축주가 계속되는 시간 속에 만들어가는 진행형인 듯하다. 그래서 나 역시 사용자를 통해 끊임없이 새로운 가능성이 발견되며 다채로운 생각이 개입될 여지가 있는 공간을 만들었으면 한다. 특정한 삶의 방식이나 메시지, 자기주장만을 강요하는 폐쇄적인 건축보다는 주변과의 여러 관계 맺음과 앞으로의 가능성에 활짝 열려있는 건축을 하고 싶다. ‘나’로 가득 찬 공간을 넘어서, 다양한 삶의 방식을 긍정하고 자기 완결적인 태도에서 벗어나고 싶다.

 

 

 

글. 윤여춘 Yoon, Yeochun 경윤 건축사사무소

사진 건축주 제공

 

 

윤여춘 건축사 · 경윤 건축사사무소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했다. 건축사사무소 OCA에서 실무수련 후 2019년 사무소를 개소, 경연성 건축사와 함께 경윤 건축사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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