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양성 전문가 2024.6
Architects : experts who train experts
상상, 그리고 설렘
사람들은 이사를 가기 전에 빈 공간을 어떻게 활용할지, 어떤 가구와 가전을 배치해서 어떤 톤으로 공간을 꾸밀지를 상상한다. 최근에는 SNS와 검색 포털의 알고리즘이 개인의 관심사를 파악해 계속해서 레퍼런스를 제공하는데, 이사를 계획하는 순간부터 입주할 때까지 끊임없이 자신이 살게 될 공간에 몰두하게 된다.
‘집’은 우리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며 고민하는 일상의 공간이기 때문에, 개인의 라이프스타일에 맞추어 책상과 침대를 배치하고, 선호하는 커튼과 소파를 선택해서 거실의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렇게 우리는 ‘내 공간’에 대해서는 전문가라고 자부한다. 이미 구축된 공간을 어떻게 채워 넣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시간을 투자하게 되는데, 하물며 더 큰 비용을 치르는 ‘건축’을 상상하는 이들에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쏟아지는 콘텐츠들로 인한 변화
‘건축’은 단순히 디자인을 넘어서 다양한 법적 규제를 검토하고, 인허가 프로세스를 거쳐야 하기에 클라이언트는 ‘건축사’를 찾게 된다. 이미 ‘내 공간’에 대한 전문가인 클라이언트는 다양한 경로로 건축에 대한 정보를 취득하고, 짓고 싶은 건물에 대해 많은 상상을 하고서 찾아온다. 건폐율과 용적률 같은 용어들은 건축을 하기로 마음먹기 전부터 익히게 되는 용어들이고, 지역 지구에 따라 받게 되는 일조권에 대한 규제는 물론, 최대 규모에 따른 주차대수는 몇 대여야 할지 등에 대해서도 미리 알아보고 오는 경우가 대다수다.
“좋은 건물을 짓고 싶어요”, “임대가 잘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최대한 많은 세대수를 뽑았으면 좋겠어요” 등에서 그치지 않고, “여기는 법규 때문에 주차대수가 11대 정도 나올 것 같은데, 10대가 넘어가면 장애인 주차구획을 설치해야 해서 1층 임대면적이 줄어들 것 같아 걱정입니다. 주차대수를 최대로 9대로 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혹은 “지자체 고시에 의해 경관지구에 속한 이 대지는 전면도로에서 건축선이 지정되어 있어요”라는 얘기를 첫 만남에 꺼내는 클라이언트들까지 생겼다.
이러한 변화는 예비 건축주들을 위한 정보교육이 많아지고, 다양한 미디어에서 건축을 다루고 있으며, 건축을 진행하고자 하는 클라이언트의 주변에는 이미 경험이 있는 지인들이 다수 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어찌 보면 여러 프로젝트를 다루어야 하는 건축사와는 달리, 클라이언트는 단 하나의 건물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높아진 정보의 접근성으로 인한 당연한 변화라고 생각된다. 마냥 어렵고 다가가기 어려웠던 전문 분야를 알아가는 과정은 그들에게 다른 어떠한 일보다도 흥미로운 시간일 것이다.
정보의 접근성이 높아진 반면 그 생산 속도마저도 굉장히 빨라졌기 때문에, 수많은 콘텐츠 사이에서 필요한 정보를 골라내기가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건축은 법적인 규제 사항을 통한 규모검토뿐 아니라, 구축의 영역까지 고려해야 하기에, 꽤 오랜 시간의 다양한 경험이 쌓여야만 종합적인 판단이 가능하다.
‘준전문가’가 되어가는 예비 클라이언트와의 만남이 점점 어려워지는 것도 이러한 이유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클라이언트에게는 정확한 정보를 주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알지 못했던 부분들을 더 알려주어야 첫 만남에서 신뢰감을 줄 수 있다. 그렇게 만남은 프로젝트로 연결된다. 전반적으로 속도가 빨라진 시대에서 “그 부분을 지금 말씀드리긴 힘들 것 같습니다”와 같은 답변은 프로젝트의 성사 여부를 불투명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소통으로 인한 큰 대가를 치를 수 없기 때문에, ‘전문가’ 역시 꾸준한 노력으로 계속해서 공부해야 한다.
함께 만들어 가는 여정
내 집을 꾸미는 일만으로도 너무나 즐거운 경험을 하게 되는데, 하물며 더 큰 스케일의 ‘건축’을 만드는 일은 얼마나 설레겠는가. 단순한 이사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많은 비용과 시간을 투자하기 때문에 클라이언트는 가구와 가전, 커튼의 색상을 고를 때보다 훨씬 많이 몰두하고 신경 쓴다. 하지만 디자인된 공간을 상상에서 실재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건축이 완성되기까지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설비 공간을 고려하며, 나아가 시공성과 유지 보수의 측면까지 살펴야 한다. 이 많은 것들을 모두 설명하고자 하면 클라이언트가 매일 사무소에 함께 출근해서 온종일 옆에 앉아 있더라도 다 알려줄 수 있을지 의문이다. 어떤 것들까지 협의하고 소통해야 할지 선택하는 것은 건축사의 몫이지만, 지금까지 만나본 클라이언트들은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알려준 것에 감사를 표해주었고, 이는 다시 나에게 동기를 부여했다.
건축을 한두 번 경험한 것만으로 전문가가 되기는 힘들다. ‘전문가’를 표방하는 건축사 역시도 프로젝트마다 매번 새롭고 어려운 부분들을 만나게 되어 계속해서 공부해 가며 일해야 하는 것이 ‘건축’이라고 생각한다. 클라이언트들보다는 조금 더 정확한 정보에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 ‘건축사’이기 때문에, 큰 비용과 시간을 들이는 클라이언트들과 짧지 않은 건축의 과정을 함께 공유함으로써, 그들이 적어도 내 건물에 있어서만큼은 ‘전문가’가 되었으면 한다. 그렇기에 개소 이후에 여러 작업들을 진행하면서, 앞으로 지어질 내 건물의 구석구석을 궁금해할 클라이언트들에게 함께 만들어 가는 공간에 대한 각각의 이야기들을 쉬운 언어로 해석해 세세한 부분까지 설명해 주려 노력한다. 이것이 내가 사무소 명으로 우리말의 가장 기초가 되는 첫 두 자음(기역니은)을 선택한 이유다.
건축의 과정이 완료되면 그때부터 공간은 사용자들에 의해 완성되고 관리된다. 그렇기에 클라이언트는 누구보다 건물을 자세히 알아야 한다. 누군가가 클라이언트를 찾아와서 건물에 대해 묻는다면 공간의 콘셉트뿐만 아니라 이 공간과 저 공간의 조명은 왜 색을 달리 했는지, 여기 문 손잡이는 왜 이걸 썼는지, 이 벽은 왜 석고보드가 아닌 합판으로 구성되어 있는지까지 설명할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오늘도 2시간 분량의 미팅 내용을 준비하고 있다.
글·사진. 박승진 Park, Seungjin 기역니은건축사사무소
박승진 건축사 · 기역니은건축사사무소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엔이이디 건축사사무소에서 10년간 실무 경험을 쌓으며 개인 클라이언트부터 기업까지, 한적한 외곽지역에서부터 밀도 높은 도심지까지, 소규모 인테리어에서부터 수천 제곱미터에 이르는 복합 용도 건축물까지 다양한 스케일의 프로젝트를 경험했다.
2022년 기역니은건축사사무소를 개소했다. 공간을 구축해 나가는 과정을 이해하기 쉬운 언어들로 공유하며 짧지 않은 과정을 즐거운 여정으로 만드는 것을 목표로 작업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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