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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오딧세이 ⑬ 낡아 해어진 구두처럼 명멸하는 수제화 거리 2024.6

월간 건축사지 2024. 6. 30. 09:50
City Odyssey ⑬ A street of handmade shoes disappearing like worn-out shoes

 

 

 

내 발에 꼭 맞는 신발을 신는다는 건 참으로 편안한 행복이다. 동남아에서 전래한 ‘원숭이 신발’이라는 우화가 있다. 공짜 신발에 길들여진 원숭이가 결국 맨발로는 걸을 수 없게 되어, 가진 모든 걸 내어주면서 신발을 사 신는 처지로 전락한다는 이야기다. 우화는 제국주의 침략을 비판하기도, 면면히 이어온 풍습이 신문물로 대체되는 현상을 빗대기도 한다.
신발은 만드는 재료에 따라 제각각이다. 풀이나 짚을 엮어 만드는 짚신부터 나무를 깎아 만든 나막신, 가죽신은 물론 쇠로 만든 신발까지 다양하다.
가난한 백성은 짚신을 신었다. 1920년대 혜성처럼 등장한 고무신이 혁명적 변화를 몰고 온다. 짚신에 비해 더할 수 없이 긴 수명과 방수는 물론 값마저 저렴해 선풍적 인기를 끌면서다. 이로써 옛 신발은 일순 자취를 감춘다. 구두가 일반화된 건 한참 후이나, 식민지 시대에도 소득이 높은 계층에선 구두를 신었다. 당시 신문 광고로 미루어 상당한 고객층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구두와 관련된 도시 공간의 형성은 대체로 재료 수급에 기인한다. 재료 수급이 수월한 곳에서 초기 신발산업이 태동했고, 이를 기반으로 성장해 기업화한 공장의 이동 경로를 따라 공간구조 천이가 일어났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구두나 고무신은 우리에겐 마치 원숭이 신발 같은 존재였다.

 


염천교에서 탄생한
1925년 문을 연 서울역엔 여러 창고가 부속시설로 딸려있었다. 그중 가죽을 보관하던 창고에서 하나둘 물품이 빼돌려진다. 이는 훌륭한 구두 재료였다. 서울역 북쪽 염천교 부근에 수제화를 제작하는 솜씨 좋은 기술자들이 자연스레 모이기 시작한다. 수제화 거리의 생성이다.
일제 강점기에 형성된 염천교 부근 수십 개 구두 공방이 해방을 맞아 기지개를 켠다. 용산 미군기지에서 흘러나온 헌 군화 등이 이곳에서 수선, 다시 제작되어 상품으로 팔린다. 자본이 부족하던 시절, 여기서 얻은 이익이 상권 확산의 밑거름이 된다.
전쟁이 끝나고 불어닥친 산업화는 염천교의 위상을 더욱 높여준다. 신발, 특히 운동화와 구두의 일상화는 염천교 전성기를 예비하고 있었다. 초기 신발산업 발달이 곧장 수요로 이어진다. 그 바람을 타고 전국 구두 도매 시장을 염천교가 장악한다. 500여 공방과 공장, 가죽 등을 취급하는 재료 상점이 성업을 이룬다. 이곳에서 제작된 구두는 주로 도매로 거래됐으며, 가까운 봉래동에서 번성했던 소매점 흔적은 아직도 남아있다.
하지만 염천교 전성기는 그리 길지 못했다. 이곳 산업 생태계를 기반으로 성장한 독점 기업의 공장 이전으로 1980년대를 전후해 영향력을 상실한다. 금호동과 성수동으로 공방과 공장, 재료상이 빠져나간다. 그나마 명맥을 유지하던 염천교 수제화는 1990년대 중후반 사실상 쇠퇴기에 접어든다. 쓰나미로 밀려든 중국산 기성화에 고객을 앗기는 철퇴를 맞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100여 곳 남짓의 수제화 공장과 상점뿐이다. 염천교 수제화 거리는 서소문 역사공원 남측에 흔적으로 남았다. 1층은 매장으로, 2~4층은 공방과 공장이다. 이 상점가는 다행히 대규모 ‘서울역 북부 역세권개발’ 압력에도 살아남았다.

 



명동에서 맞은 전성기

 

염천교 거리

한국전쟁이 끝나고 맹아기던 신발도 산업화에 진입한다. 서대문 사거리 부근에서 창업한 K 제화가 1954년 기성화 시대를 연다. 1961년 명동에서 창업한 E 회사는 1966년 수제화 자동화 공정을 도입함으로써 소비자가 원하는 대로 디자이너가 직접 제작하는 살롱화 시대를 연다.
1960년대 축적된 자본으로 1970년대 초고속 성장의 산업화 시대를 연다. 늘어난 소득은 의식주를 풍족하게 했고, 잉여의 산물은 생활의 질을 높여 나갔다. 신발도 예외가 아니었다.
구두 수요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일제 강점기부터 구두 제작 기술을 갖고 있던 장인들이 명동을 근거지로 활약하고 있었다. 염천교에서 갈고닦은 실력이 살롱화 바람을 타고 이들과 결합하면서, 염천교 자본과 기술이 명동으로 옮아온다. 최대 상권으로 떠오른 명동은 구두 제작과 판매의 최적지였다.
1970년대 명동은 유행을 선도한다. 일제 강점기 형성된 금융과 소비재 등 중심상권에 더해 옷과 신발, 미용이 결합한 형태다. 최고로 비싸다는 땅값과 함께 백화점, 맞춤옷의 양복점과 양장점, 유명 미용실과 최고급 신발 가게가 이 공간을 지배한다. 테일러와 유명 여성복 매장이 화려한 쇼윈도로 지나는 젊은 남녀를 유혹한다. 말 그대로 패션 1번지였다.
패션의 완성은 구두다. 멋과 유행을 따르려는 젊은 숙녀와 신사는 명동을 중심으로 유통되는 최고급 살롱화에 열광한다. 이런 경향이 한세대를 이어왔으나, 1980년대 후반 밀려온 값싼 기성화 파고를 넘어서진 못했다. 1990년대 후반 청담동 등으로 유행과 패션 주도권을 넘겨주면서 패션 1번지라는 명동의 명성이 서서히 저물어 갔다.

 

명동(1976) © 서울역사박물관
수제화 공장과 매장이 일체로 운영 중인 곳.

낡아 해진
성수동의 지금은 낡아 해진 구두를 닮았다. 여러 번의 시련이 이 공간을 흔들어 댔다. 그때마다 꿋꿋한 장인 정신과 동류의식으로 뭉치고 견뎌냈다. 그러함에도 빛나던 화양연화는 황혼처럼 저물고,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낡고 해어진 흔적만 남아 흔들리고 있다.
변화와 시류에 적응하지 못해서였을까? 난마처럼 얽혔으나, 낮은 공임 몇백 원 인상에 산사태처럼 무너져내리는 취약한 산업 생태계의 구조적 문제일까? 그도 아니면 최종 납품가의 5∼6배수에 책정되는 구두 가격을 놓고, 원청 기업이나 백화점 등 상위 포식자들이 승냥이처럼 찢어발겨 생겨난 현상일까?
카페와 인쇄, 사무공간 등 다른 업종에 자리를 내어주고 점점 야위어 가는 성수동 수제화 거리는, 그러나 말이 없다. 마지막 잎새라도 지켜내려 몸부림치는 쉼 없는 장인의 망치질 소리와 달리, 수제화 거리엔 쇠퇴기로 접어드는 스산한 바람만 불어온다.
1960년대 후반 K 사가 생산공장을 확장 이전한다. 당시로선 서울 외곽이던 금호동이다. 1970년대 초반엔 E 사와 또 다른 E 사가 성남으로 이전한다. 이들의 이동 경로를 따라 가죽 등 재료를 취급하는 업체는 물론 구두를 제작하는 기술자와 노동자가 같이 이전해 와, 성수동 수제화 공간이 형성된다.
1970년대부터 생겨난 성수동 수제화는 80년대를 거쳐 90년대 최전성기를 맞는다. 이 공간을 발판 삼아 번성하다 명멸해간 제화기업이 부지기수였고, 그런 현상은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다. 그렇듯 거대 신발 기업이 수십 년 이 공간을 지배해 왔음에도, 자기들 발판인 이곳에 건강한 산업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몇 년 전에 벌어진 공임 1,300원 인상에 수백 개 기업이 줄도산한 사례가 이를 극명하게 증명하고 있다.

 

성수역 수제화 거리

천이하는 성수동
성수동은 지금 수제화 거리 명성이 무색할 정도다. 다른 기능이 이미 공간을 잠식해 들었다. 상대적으로 저렴하던 초기 지대(地代)가 카페 등 젊은이 공간을 끌어들였다. 그들의 발길이 이어지자 해외 패션기업 등이 자리를 잡았고, IT 등 첨단업종의 입주도 뒤를 이었다. 강남과의 접근성 등 지리적 이점으로 사무·업무공간도 급격히 늘고 있다.
늘어난 업무공간이 이젠 거꾸로 지대를 높이는 요인으로 작동하면서, 여러 기능이 혼합된 공간 천이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수제화 공간이 살아남으려는 몸부림과 변신만으로 버텨낼 수 없는 기재가 작동하는 셈이다. 높아진 임대료와 거세진 개발압력이 짓누르고 있기 때문이다.
빛에는 그림자가 따르기 마련이다. 석양 그림자가 가늘고 길듯, 도시 공간도 그 생명력에 비례하여 명멸한다. 성수동 수제화 거리는 지금, 철 따라 바뀌는 식물군락처럼 빠르게 잠식당하는 중이다. 수제화 거리는 생명력이 약해지면서 석양처럼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이렇다 할 우세 종은 아직 없으나, 수제화가 지배하는 공간이 아니라는 점만은 명확해 보인다. 뭐가 될지는 몰라도 수제화 아닌 다른 기능이 공간을 지배할 것이란 예상은 그래서 필연처럼 보인다. 앞으로 열세 종으로 변한다면, 수제화는 어떤 방식으로 생존해 나갈까?
사라져 가는 모든 것이 아쉽고 안타깝다. 성수동 수제화 거리는 물론 수제화도 어쩌면 박물관에서나 만날 수 있게 될는지도 모른다. 도시 공간구조 변화를 인위적으로 조종할 수는 없겠으나, 정책과 힘을 모으는 노력으로 최소는 유지할 수는 있다. 기성화가 아닌 내 발에 꼭 맞는 수제화를 신어야 몸이 편안한 것처럼, 사라져 가는 도시공간을 보존하려는 노력은 그래서 잊히고 있는 우리를 다시 찾는 여정이란 생각이다.

 

 

 

 

글·사진. 이영천 Lee, Yeongcheon 자유기고가

 

 

이영천  자유기고가

 

도시공학 학사(홍익대학교), 도시계획 석사(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계획기술사(1999). 엔지니어링사에서 도시계획 업무를 시작으로 건설사에서 오랜 기간 사회간접자본 투자사업에 종사했다. 자유기고가로 한국도로협회 계간지 <도로교통>에 다리 에세이 연재 중이다. 인터넷 매체 ‘오마이뉴스’에 다리 및 근대건축 관련 에세이를 연재했고, 현재 도시 관련 에세이 연재 중이다. 저서로 『다시, 오래된 다리를 거닐다』와 『근대가 세운 건축, 건축이 만든 역사』가 있다.

shrenrhw@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