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오딧세이 ⑭ 공간의 지속가능성을 좌우할 갈림길에 선 서울 약령시 2024.7
City Odyssey ⑭ Yangnyeongsi in Seoul is at a crossroads that will determine the sustainability of space.
여기에 서면 기운이 저절로 북돋는다. 지나가기만 해도 보신한다는 우스개가 회자하는 제기동 ‘서울 약령시(藥令市)’에서다. 정릉천 동쪽, 왕산로 북쪽에 남북 약 1킬로미터, 동서 약 200미터에 800여 한약재상과 한의원이 자리한 공간이다. 1995년에 인가받았으나, 이 공간이 쌓아 온 시간은 그보다 훨씬 더 깊다.
근대 도시 태동의 추동력은 단연코 기차역이었다. 인쇄술이 공화정을 앞당긴 기술이라면, 기차역은 도시화를 추동해 낸 시설이다. 인쇄술이 생각과 사상을 모으고 확산시켰다면, 기차역은 사람과 물산을 모으고 더욱 빠르게 퍼뜨렸다.
서울 약령시도 마찬가지다. 왕조시대 ‘보제원(普濟院)’이란 역원과 일제강점기 생겨난 기차역 ‘성동역(城東驛)’에서 말미암았다. 성동역은 제기동 일원에 장시(場市)를 형성시킨 일등 공신이기도 하다.
서울 약령시는 단일기능을 수행하는 서울에서 몇 안 되는 공간 중 하나다. 균질성을 확보한 집적된 단일기능은 공간 생명력을 배가한다. 같음이 동질성을 더욱 강화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런 공간은 집적 이익이나 효과를 톡톡히 누리며, 인접한 다른 기능과 상호 보완적 관계를 맺으며 확산하는 특성을 보인다.
한약재
흔히 말하는 오복을 온전히 누린 삶은 얼마나 될까? 그저 건강하게 천수를 누려도 충분히 행복한 삶 아닐까? 한의학은 이런 삶을 누리려는 욕구로 태동하여, 수천 년 우리와 함께했다. 이 땅과 우리 체질에 맞게 변화·발전해 왔고 오랫동안 축적된 임상을 통해 발현하고 재창조되었다.
한약재도 마찬가지다. 한약재는 동·식물과 광물에서 얻은 천연물로, 채취물 자체이거나 용처에 맞게 가공하여 사용한다. 따라서 재배하지 않는 한, 자연에서 채취해야 한다. 이에 약재의 채취-이송-집산이 한의학을 뒷받침하는 필수 요소였다. 더욱이 귀한 약재일수록 신경을 곤두세웠을 것이다.
왕조시대 한약재는 나라에서 운영하는 의료기구에서 주로 소용했다. 특히 전의감은 왕과 왕족, 고관대작의 약재 용처로 수요가 끊이지 않았다. 전의감이 제중원 설립으로 폐지된다. 민중 의료기구인 활인서와 혜민서에서 소용하는 약재는 과연 얼마였을까? 전의감보다 혜민서와 활인서가 먼저 폐지된 데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한약재가 주로 거래된 곳은 구리개와 배오개였다. 을지로1가∼2가에 있던 고개인 구리개엔 서민을 치료하는 혜민서가 있었고, 양반들이 이용하는 한약방도 즐비했다. 배오개는 종로4가 인근에 있던 작은 고개로 이곳은 주로 서민이 이용했다. 따라서 민간의 한약재 수요는 배오개에 밀집해 있던 한약방을 통해서였다. 종로5가에 약국이 많은 까닭은 공간에 새겨진 오래된 이런 흔적이다.
보제원
도성 4대 문밖 역원 중 동대문엔 보제원이 있었다. 흥인지문 동쪽에 노원을 거쳐 강원도로 가는 길 시작점인 지금의 안암오거리가 보제원 자리다.
보제원은 우역(郵驛)은 물론 관리와 원로에게 잔치를 베푸는 기능에 겸해, 왕이 민원을 듣는 곳이기도 했다. 흉년이 들면 백성을 진휼하는 빈민 구제 기구였고, 전염병이 창궐하면 이곳을 거점으로 병의 확산을 차단하여 치료함으로써 병이 도성에 드는 것을 방지하는 의료기관이기도 했다.
또한 선농단과 더불어 흥인지문 밖을 상징하는 시설이기도 했다. 지역 거점이자 역원으로써 주변으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맡았고, 이게 시장을 형성시킨 요소로 작용했다.
보제원의 다양한 기능에 더하여 경기도와 강원도, 충청도는 물론 멀리 함경도로 통하는 길목이었던 까닭에 한약재를 가져와 파는 약재상이 많았다. 의료기관 역할도 겸했기에 자연스럽게 보제원 근처에 약재시장이 섰다. 한약재 시장의 맹아다. 시간이 흐르며 왕래가 잦은 곳에 약재상이 번성했고, 이것을 서울 약령시의 기원으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성동역
성동역이 있었다. 지금의 서울 지하철 1호선 제기동역 자리다. 일제강점기인 1939년 7월 20일 개통한 서울∼춘천(경춘선)을 오가는 사설(私設)철도 시발역이다. 기차역은 제기동에 변화를 가져왔다.
경기 북부와 강원도의 물산이 경춘선을 타고 성동역 주변으로 실려 온다. 땔감은 물론 각종 임산물과 농산물도 함께다. 시장의 태동이다. 이 철도가 해방과 함께 국유화한다. 경춘선 덕분으로 청량리 청과물시장이 1949년 개설한다.
한국전쟁 후 폐허로 변한 이 지역에 다시 도시 공간이 형성된다. 청과물시장이 재건되어 사람을 끌어들인다. 철도의 존재 때문이다. 성동역 중심으로 자연발생적으로 커나가던 경동시장이 1960년 6월 인가받는다. 이때부터 경동시장에 경기도와 강원도, 충청도에서 채취된 약초를 취급하는 약재상이 모여 시장을 형성한다.
두 시장의 존재가 이곳 공간구조 변화에 불을 지핀다. 경동시장에 생긴 한약재 시장이 불쏘시개가 되고, 두 시장의 존재는 약령시가 탄생하는 필요충분조건이었다. 사람이 많아 풍부한 수요처를 확보할 수 있었고, 경기 및 충청 북부와 강원도에서 채취한 천연 약재의 집화와 유통이 수월했다는 점이다.
이때를 즈음하여 서울 도심이 급격한 도시화에 직면해 땅값이 오르고 교통난이 심화한다. 오르는 땅값에 비례하여 임대료도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이를 견디지 못한 을지로와 종로의 한약재상과 한의원이 제기동으로 이주해 오기 시작한다.
1967년 이 철도의 화물 운송기능이 사라지고, 이듬해 용두동에 마장시외버스터미널이 들어선다. 대체 시설이 생겨난 셈이다. 1971년 10월 성동역∼성북역 구간이 폐선되면서 철로와 성동역이 사라지고, 경춘선 시발역이 지금의 청량리역으로 옮겨 간다.
서울 약령시로
점진적이던 한약재상과 한의원의 제기동 유입 추세가, 1976년을 기점으로 폭발적인 증가세를 보인다. 을지로와 종로, 동대문에서 옮겨 온 한약재상과 한의원에 더하여 경상도와 강원도에서까지 이주해 온다.
제기동이 약령시로 번성한 최정점은 1980년대다. 한약재상들이 진용을 갖춰나가자, 가장 오랜 역사를 지녔다는 대구약령시를 추월해 전국 유통의 70%를 차지한다. 모든 물산이 집화하는 수도 서울이란 영향력도 컸다. 한의사 자격이 1982년 허가제로 바뀌면서 약재상은 더욱 확대한다. 면허 없는 한의사들이 약재상으로 전업해 한약재를 다루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공간은 특화하였고, 면적도 이웃한 경동시장이나 청과물시장에 버금가는 규모로 확산한다.
경동시장에 속한 한약거리로만 인식되던 제기동 한약재 시장이, 1995년 서울시로부터 승인받으면서 ‘서울 약령시’라는 이름을 얻는다. 제기동이 이미 전국 최대 약령시장으로 성장해 있었고, 한약재와 한의원으로 특화된 도시 공간구조를 형성한 덕분이다.
2000년대 들어 서울 약령시가 ‘한방 산업 특구’로 지정되자 한방 전문 빌딩이 차례로 들어선다. 이 여파로 북쪽은 홍파사거리, 남쪽은 동대문구청 부근까지 확장하기에 이른다. 2008년과 2022년에 보도와 차도, 가로등을 비롯한 기반 시설이 산뜻하게 정비된다. 숫자로 구분된 문 형식 안내 게이트와 일주문 형식의 약령시 출입문도 새로 건립해 한결 세련미를 더한다.
건강한 공간으로
공간이 ‘건강하다’ 함은 어떤 상태일까? 무엇보다 ‘지속가능성’을 담보했느냐로 귀결될 것이다. 지속가능성을 지켜내는 핵심은 공간 기능에 대한 ‘신뢰’다. 물론 공간환경을 구성하는 인프라 개선은 필수다. 쾌적한 공간환경에서 기분이 순화되고, 이는 무엇보다 발길을 끌어들이는 시금석이기 때문이다.
한때 물밀듯 밀려든 중국산 약재 때문에 한약재에 대한 불신이 팽배했었다. 이에 더하여 불분명한 원산지 표기와 가격 부풀리기로 불신은 가중되어, 한약재의 가치 인식을 형편없이 추락시켜버렸다. 소비자 발길을 스스로 끊어낸 대표적 사례였다.
서울 약령시는 지금 답보상태다. 어쩌면 공간의 지속가능성을 좌우할 갈림길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양의학 의존성은 더욱 높아지고 있다. 설령 한의원을 이용한다 해도 거주지 근처에 한정되는 추세다. 이런 이유로 한의사들이 서울 약령시를 떠나는 추세다. 한의사가 떠나버리면, 약재상만으로 공간의 지속가능성을 담보해낼 수 있을까?
한의학의 요체는 생명현상을 움직임으로 파악하고 관찰함으로써, 내적 생명력을 근본적으로 배양하여 점차로 건강을 증진 시켜나가는 의술이다. 서울 약령시의 건강성도 한의학이 추구하는 근원적 치유법처럼 생명력을 키워나가는 방식에서 찾아져야 한다. 백 년 가는 한약재상과 한의원이 건재하여, 이 공간의 건강성이 끝까지 지켜지길 바란다.
글·사진. 이영천 Lee, Yeongcheon 자유기고가
이영천 자유기고가
도시공학 학사(홍익대학교), 도시계획 석사(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계획기술사(1999). 엔지니어링사에서 도시계획 업무를 시작으로 건설사에서 오랜 기간 사회간접자본 투자사업에 종사했다. 자유기고가로 한국도로협회 계간지 <도로교통>에 다리 에세이 연재 중이다. 인터넷 매체 ‘오마이뉴스’에 다리 및 근대건축 관련 에세이를 연재했고, 현재 도시 관련 에세이 연재 중이다. 저서로 『다시, 오래된 다리를 거닐다』와 『근대가 세운 건축, 건축이 만든 역사』가 있다.
shrenrhw@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