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담론] 150년 역사의 독일 건축설계 대가 규정과 한국 건축계의 미래를 위한 시사점 2024.7
150 Years of History: Lessons from Germany’s Architects and Engineers Fee Schedule for the Future of the Korean Architectural Industry
독일은 구속력 있는 설계 대가를 제정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150년에 걸쳐 노력해 왔고 현재 업계 전반에 적용되고 있다. 이 글에서는 독일의 설계대가 요율을 적용했을 때 설계 대가가 우리나라와 어느 정도 차이가 나는지 사례를 기준으로 비교해 본다. 그리고 이에 더해 독일의 “건축사 및 엔지니어를 위한 대가 규정” 발전 과정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Honorarordnung für Architekten und Ingenieure
건축사 및 엔지니어를 위한 대가 규정
독일의 설계 대가에 관한 법, Verordnung über die Honorare für Architekten - und Ingenieurleistungen(Honorarordnung für Architekten und Ingenieure, 이하 HOAI)은 한국어로는 ‘건축사 및 엔지니어를 위한 대가 규정’으로 번역할 수 있다.
HOAI는 건축사 및 엔지니어를 위한 대가 규정이기 때문에 적용 대상이 광범위한데, 건축뿐만 아니라 도시개발계획, 조경, 실내건축, 옥외시설, 엔지니어링 구조물, 교통시설, 구조계획, 기술 장비 시스템 영역이 포함되어 있다.
설계비 구성을 보면, 전체 단계는 Leitungsphase(LPH) 1∼9로 나누어져 있다. 각 단계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LPH 1 : 기초 조사, LPH 2 : 계획설계, LPH 3 : 기본설계, LPH 4 : 허가 설계, LPH 5 : 실시설계, LPH 6 : 발주 준비, LPH 7 : 발주 시 협력, LPH 8 : 현장감독 및 문서화, LPH 9 : 건축물 관리로 구성돼 있다. 물론 여기서 사용된 계획설계와 기본설계, 실시설계라는 용어가 우리나라에서 통용되는 업무 범위와 일치하지는 않지만 큰 범위에서 유사하기 때문에 선택했다. 그리고 각 단계별 설계비의 비율은 다음과 같이 정해져 있다. LPH 1: 2%, LPH 2: 7%, LPH 3: 15%, LPH 4: 3%, LPH 5: 25%, LPH 6: 10%, LPH 7: 4%, LPH 8: 32%, LPH 9: 2%.
독일은 설계의 난이도에 따라 설계대가 영역(Honorarzone)을 5단계로 나눈다. 영역 1은 가건물 또는 놀이터 등의 설계, 영역 2는 판매대, 축사 등의 설계, 영역 3은 유치원, 청소년센터 등의 설계, 영역 3과 영역 4는 단독주택, 사무실, 학교, 도서관, 청사 등의 설계(세부적인 난이도에 따라 영역 3 또는 영역 4에 포함된다.), 영역 4와 영역 5는 연구소, 실내수영장, 비행장, 박물관, 극장 등의 설계(역시 세부적인 난이도에 따라 영역 4 또는 영역 5에 포함된다.), 그리고 영역 5는 종합병원, 대학병원 등의 설계로 분류돼 있다.
한국과 독일의 건축설계 대가 비교
그렇다면 현재 공공 설계공모에 제시되는 공사비와 설계비의 사례를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건축설계비와 HOAI를 적용하였을 때의 건축설계비를 직접 비교해 보겠다. 이를 위해 도서관, 공공청사, 청소년센터 세 가지 프로젝트를 선택했다. 그리고 통계청의 비교 물가지수를 참고해 현재 한국이 독일 물가의 약 88%인 점과 기획업무에서 실시설계까지의 비율이 HOAI에 따르면 전체 설계비의 52%라는 점을 반영했다. 비교 결과는 아래 표와 같다.
위의 비교 사례를 보면 한국의 공공건축 설계비는 독일의 약 70∼80%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건축설계비가 독일 대비 낮다는 점 외에 또 다른 문제는 이 결과가 설계 변경이 없고, 설계 변경에 의한 기간이 늘어나지 않고, 공사비가 상승하지 않고, 협력업체 비용이 설계비의 약 30% 정도라고 전제한 경우라는 점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 한국과 독일의 건축설계비 차이는 더욱 늘어난다. 독일에서도 발주처가 설계 변경을 요청할 수도 있다. 그런 경우는 실비 정산 방식으로 설계비가 추가로 산정되고, 그에 따라 설계 기간도 늘어나게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아직도 대가 없이 빈번히 설계변경을 요구하면서 설계 기간도 지키도록 한다. 또한 설계대가 증액 없이 안전 관련 요구사항이 복잡해지면서 협력업체 비용도 함께 늘고 있다. 더욱이 현재 건축시장의 80%가 넘는 민간건축시장에는 이런 기준조차 없고 실질적인 설계 대가는 공공건축 설계대가 보다 현저히 더 낮은 실정이다.
또 하나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위와 같이 기초조사 단계에서 실시설계 단계까지만 잘라내어 비교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독일은 프로젝트의 성격이나 규모에 상관없이 설계자가 감리까지 담당하기 때문이다. 설계자가 사정이 있어 자의에 의해 감리를 안 할 수는 있지만, 하고 싶어도 타의에 의해 못하게 되는 상황은 없다. 설계공모에 당선되거나 민간 프로젝트를 진행하더라도 그것을 바탕으로 충분히 사무실을 운영하고 처음부터 끝까지 프로젝트를 이끌어가면서 건축물의 품질도 유지할 수 있다. (기초 조사 단계에서 실시설계 단계까지 설계비 비율이 52%이고 현장 감리를 포함한 나머지가 48%이다.) 이것은 단순한 한국과 독일의 건축설계비의 차이 그 이상을 의미한다.
독일의 건축설계 대가 규정의 발전과정과 시사점
독일의 건축설계 대가 규정은 1871년에 시작되어 150년이 지난 현재에 이르기까지 여러 단계를 거치면서 발전했다. 그렇기에 주요한 역사를 단계별로 살펴보고 그에 따라 현재 시사점을 주는 부분이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건축사를 위한 민간 설계대가 규정은 1871년에 최초로 만들어졌고, 1878년 엔지니어를 위한 민간 설계대가 규정이 건축사를 위한 설계대가 규정을 참고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1888년에는 독일 건축사협회 및 엔지니어협회 연합(Verband Deutscher Architekten- und Ingenieurvereine)에서 두 규정을 통합해 ‘함부르크 규범(Hamburger Norm)’을 제정했다. 이 규범은 구속력 없는 적절한 대가를 위한 지침의 역할만 했지만, 1903년 독일 건축사 연맹(Bund Deutscher Architekten, BDA)이 설립되면서 회원을 대상으로 함부르크 규범을 의무적으로 적용하도록 했다. 그 후 1942년에 건축사를 위한 설계 대가가 의무적으로 적용됐고, 1977년에 최초로 건축사 및 엔지니어를 위한 대가 규정(Honorarordnung für Architekten und Ingenieure, HOAI)이 시행됐다.
여기서 흥미로운 부분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독일 건축사협회와 엔지니어 협회가 연합을 만들어서 설계대가 관련 규범을 제정했다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건축사와 구조기술사가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다. 독일 건축계의 주도 세력이었던 두 협회가 협력해 중요한 진전을 이루었듯이 우리도 서로의 전문성을 존중하고 협력하는 방안을 모색한다면 더 큰 것을 얻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또 다른 하나는 그 당시에 구속력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건축사 연맹 스스로 책임감을 가지고 함부르크 규범을 연맹 회원 건축사들의 설계대가 기준으로 의무화했다는 것이다. 독일 건축사 연맹은 “예술적으로 창의적인 건축사의 보호, 건축예술과 설계공모 문화의 장려, 교육의 개선, 그리고 BDA라는 약어를 훌륭한 건축의 상징으로 확립하는 것을 목표”(1904년 매니페스토에서 발췌)로 하는 연맹으로 초기 멤버로는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아키텍트인 페터 베렌스, 브루노 타우트, 발터 그로피우스, 한스 푈치히 등이 있다. BDA에 선발되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기준을 통과해야 하는데 현재 회원은 약 5,000명으로 전체 독일 건축사의 약 3.5%만 가입이 되어 있다. 1903년 당시에 함부르크 규정은 의무사항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상당히 영향력 있는 건축사 연맹이 책임감을 가지고 이 규정을 기준으로 스스로의 설계 대가를 산정했으므로 그 파급력은 상당했을 것이다.
현재 우리도 설계 대가를 법제화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합리적인 설계 대가가 산정돼야 프로젝트에 따라 적절한 인원을 투입해 정해진 기간 안에 좋은 품질의 안전한 건축물을 완성할 수 있다. 현재는 적은 설계비로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보니 건물의 품질 자체가 떨어지고, 프로젝트를 수행하여도 순이익이 남지 않고, 이 때문에 우수한 인력이 점점 더 건축계를 떠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미래의 건축계를 위해 설계대가 법제화 추진과 더불어 건축계 자체적으로도 독일 건축사 연맹의 사례와 같이 영향력 있는 상위 3∼5%에 포함되는 건축사분들이 적절한 요율을 기준으로 설계 대가를 산정하겠다는 선언을 하거나 그것을 의무로 하는 모임을 만드는 것은 어떨까? 물론 3∼5%의 기준은 수상실적, 건축사사무소 인원수와 매출 규모, 대중매체 영향력, 건축 관련 협회에서의 위치 등 다양한 요소를 고려할 수 있다. 건축계의 자발적인 움직임이 있다면 설계대가 법제화를 좀 더 앞당기고 민간시장에서도 합리적인 설계비가 일반화되는데 밑거름이 될 것이라 확신한다.
글. 위호진 Wi, Ho-Jin 위 아키텍튼 건축사사무소
위호진 건축사 · 독일 건축사 · 위 아키텍튼 건축사사무소
위호진은 한양대학교를 졸업하고 독일정부 초청 장학생(DAAD-Stipendium)으로서 칼스루에 공과대학교 건축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졸업 후 함부르크의 gmp Architekten von Gerkan, Marg und Partner와 베를린의 léonwohlhage Architekten, 그리고 서울의 디자인캠프문박 디엠피 건축사사무소에서 다양한 실무 경험을 쌓고 위 아키텍 튼 건축사사무소를 설립했다. 2019년 한양젊은건축가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대구시 수성구 공공건축가이자 한양대학교 ERICA 건축학부 겸임교수이다.
hojin.wi@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