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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쉽지만 다음 기회에… 2024.8

월간 건축사지 2024. 8. 31. 09:45
Unfortunately, next time...

 

 

 

푸르던 여름날의 현장. 설렜던 마음. 그리고, 아쉽지만 다음 기회에. ⓒ 민원홍

 

집을 짓겠다. 결심


“집을 지어야 하는 상황이 생겼어.” 
고맙게도, 내가 건축사가 되기도 전에 집을 짓게 되면 꼭 나에게 의뢰하겠다고 했던 친구가 있다. 내가 정말 열과 성을 다해서 잘해주겠다고 답했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연락이 왔다. 귀엽고 제법 큰 강아지 두 마리를 구조하게 되었고, 아파트에서 키우기엔 한계가 있어 단독주택을 짓기로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항해사인 친구는 많은 시간 집을 떠나있기 때문에 어머님이 주 거주인이 되어 강아지들과 함께할 집이다. 적당한 땅을 찾았고, 함께 몇 가지 이슈 사안을 검토 후 추진력 있는 친구(이하 건축주)는 빠르게 땅을 샀다. 
동해 바다 근처 산 아래, 묘한 비율의 굴다리를 지나면 나타나는 작은 집 몇 채를 지나 마을의 끝자락. 나지막한 산이 주변을 감싸고 남쪽으로 마을 길과 길게 접하는 널찍한 땅이었다. 어머님이 거주하실 아담한 집과 반려견들이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넓은 놀이터를 건축주와 함께 상상하며 우리의 첫 주택 프로젝트를 계약했다.

 



내가 원하는 집. 갈망


건축주가 반려동물과 함께하는 공간에 대한 갈망을 계기로 집을 짓겠다는 결심을 한 것을 보며, 공간에 대한 나의 갈망을 떠올려본다. 
서울로 유학 온 대부분의 학생과 마찬가지로 나의 첫 집은 17제곱미터(5평) 남짓한 원룸이었다. 비록 오르다 보면 숨이 차는 언덕 위에 위치하고, 창문 밖은 옆집 벽 뷰이지만, 나만의 공간을 갖게 돼 행복했다. 하지만 결국 얼마 살지 못하고 평지에 위치하는 창문이 매우 큰 집으로 이사했다. 그런데 몇 계절이 지나 겨울이 되자 창틀에는 열교로 인해 물이 흥건히 고였고, 집에서도 코가 시렸고 패딩을 입고 있어야 했다(창은 북향이었고, 창호 스펙이 엉망이었을 듯하다). 다음 집은 햇살이 잘 드는 적당한 크기의 남서향 창에 여름에 개나리꽃이 흐드러진 초등학교 담장 뷰였지만, 귀여운 초등학생들은 너무 시끄러웠으며, 그다음은 조용한 주택가였지만 공용 보일러가 말썽이어서 온수가 잘 안 나왔다. 그리고 이사에 지칠 무렵의 마지막 집은 요즘 원룸치곤 꽤나 널찍한 사이즈로 만족스럽게 오래 잘 살고 있었는데, 조용하던 골목이 갑자기 시끌벅적한 먹자골목으로 변하더니 내가 방을 뺀 후 그 자리에 화덕 피자집이 들어왔다. 결혼 후 신혼집으로 이사하고 ‘역시 아파트가 최고다, 드디어 만족!’이라고 생각했지만, 남편과 함께 건축사사무소를 개소한 후 이제 1층은 사무실, 2층은 주택인 직주 분리, 그러나 초근접인 환경을 갈망하는 중이다.

 



건축주아지경. 이입


여전히 내 집에 대한 갈망이 진행 중인 나는, 건축주가 자신의 갈망을 해소해 줄 집을 짓는다는 것이 마치 내 일처럼 설렌다. 설레는 정도가, 집이 아닌 다른 용도의 건물을 지을 때와는 아주 다르다.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건축주에게 그동안 어떤 갈망이 있었는지, 그리고 어떤 집을 상상하는지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에 이입되어 함께 상상하고 고민한다. 아직은 추상적이고 파편적인 그 갈망들을 내가 물리적인 형태로 계획하여 정리하고 해소할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짜릿하다. 분명 그 과정 중 넘어야 할 산은 계속 나타나고, 고민하고 결정해야 할 것들도 끝이 없겠지만, 집을 짓겠다는 쉽지 않았을 그 결심에 후회가 남지 않도록 나는 최선을 다할 것이다.

 

 


땅은 많고 사연도 많다. 변수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어.”
건축주에게 전화가 왔다. 계약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회사에 다닐 때도 적지 않은 수의 프로젝트들이 변경, 지연, 중단되는 것을 보았다. 다양한 변수들이 있었다. 하지만 우리의 이 소중한 첫 주택 프로젝트는, 우선 건축주의 의지와 추진력이 강했고, 우리도 이미 많은 아이디어를 내고 수많은 그림을 그려내는 중이었다. 
어떠한 변수이든 우리는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마음을 다잡고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개발행위허가를 위한 측량 작업을 하는데, 마을 주민분이 현장에 놀러 오셨단다. 건축주가 알지 못했던 정보를 주셨는데, 몇 년 전 이곳에 불이 났었고 인명피해가 있었다고 한다. 건축주에겐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주 거주자인 어머님은 달랐다. 큰 결심을 하고 짓게 된 내 집, 내 삶의 한 부분이 되어줄 집의 장소로는 이 땅의 과거가 꺼림칙하셨나 보다. 그리고 결국, 집을 짓겠다는 결심과 갑자기 튀어나온 변수 중 변수가 이겼다.
대신에 우리는 이곳에 계획 중이던 집과 비슷한 규모로 반려견 놀이터 이용자를 위한 휴게시설을 짓기로 하고, 집을 위한 땅은 다시 찾아보기로 했다. 매우 아쉽지만, 집은 다음 기회에.

 

 


아쉽지만 다음 기회에


이 주택 프로젝트는 거의 시작과 동시에 백지화되었음에도 마음이 아리다. 아마도 개소 2년 차 새내기 건축사이기 때문에, 앞으로 무수히 많을 무산 프로젝트의 첫 사례이기 때문에, 그리고 개인적인 집에 대한 갈망 때문에 더욱 그러한 듯하다. 이별도 많이 하다 보면 덤덤해지듯이, 나도 연차가 쌓이고 경험이 쌓이면 타격이 덜해지려나….(그런데 이별도 많이 하다 보면 덤덤해지던가?) 모르겠고, 우린 마음을 다잡고 다시 다음 기회를 노린다. 집을 짓겠다! 다음에는 부디 지어진 집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기를.

 

 

 

 

 

글. 최수훈 Choi Soohoon 일랑 건축사사무소

 

 

최수훈 건축사 · 일랑 건축사사무소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 후, 운생동건축사사무소에서 실무를 익히고, 선배이자 남편인 민원홍 공동대표와 함께 일랑건축사사무소를 개소한 2년차 신진건축사이다. 개소 후, 건축은 1만 시간의 법칙에 예외 됨을 깨닫고, 더 많이 고민하고 공부하며, 최선의 결과물을 내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choi@yl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