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건축사지 2024. 11. 30. 09:20
Pencils and Nobel Prize

 

 

한 자루의 연필을 생각한다. 
글자를 쓰기 전 꼬불꼬불 쭉쭉 셀 수 없이 그렸던 직선과 곡선을 기억한다.
기역, 니은, 디귿…, 연필심에 침 발라가며 꾹꾹 눌러쓰던 서툰 자음과 모음을 떠올린다. 
빈 공책을 앞에 두고 무엇을 쓸까 막막하던 순간은 얼마나 많았던가, 쓴 뒤에 지우고 싶었던 문장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날씬하게 길던 연필이 점점 닳아 짧아지면 하얀 모나미 볼펜 깍지에 끼워서 썼지. 
겨우 새끼손가락 한 마디 길이였던 몽당연필의 부지런함을 새삼 그리워한다. 
모두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이 불러일으킨 상념이다. 10월 10일 늦은 저녁 지하철을 기다리다가 작가 한강의 노벨상 수상 소식을 접했다. 저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읽으면 너무 마음이 아플 것 같아서 굳이 찾아 읽지 않았던 작가인데, 고작 시집 한 권, 소설 두 권 읽은 것이 전부인 작가인데 뭉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시샘이나 부러움 따위가 전혀 끼어들 틈 없는 순수한 축하가 내 안에 차올랐다.
그이의 문장 맨 처음에도 아마 한 자루의 연필이 있었을 게다. 세계를 감동시키는 문학 작품이 쓰이기 전에 먼저, 글자를 익히던 어린 손이 쥐었던 연필 한 자루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어디 문학뿐일까. 도시의 랜드마크가 된 웅장한 건축물이 설계되기 전이나 편리하면서도 매력적인 자동차가 탄생하기 전에도 한 자루의 연필이, 만든 이의 상상을 현실로 표현하는 시작이었을 것이다. 
연필 한 자루가 가진 의미를 강력한 이미지로 보여주는 광고를 만든 회사가 있다. 1662년 가내수공업 형식으로 연필 생산을 시작한 뒤 1835년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공식 설립된 문구류 제조 기업 스테들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연필, 색연필, 형광펜 등을 세계 9개의 공장에서 생산하고, 26개국에 있는 지사를 통해 약 150개국에 판매하고 있다고 한다. 

 


스테들러
모든 것이 시작되는 곳. 
STAEDTLER
Where it all begins.

 

스테들러 홍콩_옥외광고_2013



연필 다섯 자루가 있다. 쓰는 사람의 고민을 보여주듯 꼬질꼬질 손때가 묻어 있는 연필 끝을 자세히 보면 연필심에 세계적인 마천루 빌딩들이 조각되어 있다. 두바이에 있는 부르즈 할리파, 대만의 타이베이 101, 상하이 세계금융센터,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시카고에 위치한 시어스(윌리스) 타워가 그들이다. 
그리고 짧은 카피 한 줄, ‘모든 것이 시작되는 곳’. 
세상을 아래로 내려다보는 800미터나 되는 건물도 160층이 넘는 높은 빌딩도 연필 한 자루의 사소한 스케치에서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이 광고의 다른 시리즈인 ‘교회, 의자, 자동차’는 2013년 세계 3대 국제광고제 중 하나인 클리오어워드에서 금상을 수상했다. 가우디의 성가족성당과 의자, BMW 미니쿠퍼 그리고 콩코드 비행기가 연필심 끝에 매달려 있다. 이 광고를 만든 광고회사 레오버넷 홍콩은 디지털 기술의 편리함에 굴복해 연필 스케치 대신 디지털 패드에 스케치하는 젊은 세대에게 연필로 그리는 것이 자유와 영감을 준다는 점을 환기시키기 위해 이 광고를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광고에 사용된 연필심 조각은 브라질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하는 목수 겸 조각가 달톤 게티의 작품이다. 

 

스테들러 홍콩_포스터_2013


고개를 들어 책상을 보니 내 책상 위에도 연필이 놓여있다. 질 좋은 나무와 흑연으로 만들어, 쓰다가 종이가 찢어질 염려 따위는 전혀 없는(내 어린 시절의 연필은 흑연의 질이 나빠서 쓰다가 툭하면 공책이 찢어지곤 했다) 매끈한 연필이다. 연필로 글을 쓰는 일은 거의 없지만 책상에 연필이 없으면 조금 불안해진다. 아니 있는지 없는지 의식할 필요도 없이 연필은 언제나 가까이에 있었고 있을 것이다.
무엇이든 써야 할 것이 있으면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노트에 연필로 끄적인다. 모니터의 빈 화면에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보는 일보다, 머릿속이 간질간질해질 때까지 연필을 쥐고 공책의 빈 공간을 마주하는 일이 더 다정하다. 
정 아무 생각도 나지 않으면 짧은 시를 베껴 쓰기도 한다. 예를 들면 한강 작가의 서시를 연필로 한 글자씩 천천히 따라 쓰며, 
시인의 마음이 되어 글을 만들어 보려고 애를 쓴다. 
그러고 있노라면 내 속에서도 뭔가 그럴듯한 문장이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이 덕에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작품을 번역 없이 원본으로 읽는다. 한글로 쓰는 사람 한강, 참 많이 고맙다. 

 


서시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도 했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의 사이 사이, 
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 
어리고 
지워진 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볼 거야. 
떨리는 두 손을 얹을 거야. 
거기, 
당신의 뺨에, 
얼룩진.

한강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 수록_문학과지성사_2013

 

 

 

글. 정이숙 Jeong, Yisuk 카피라이터

 

 

정이숙 카피라이터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카피라이터로 광고와 인연을 맺었다. 롯데그룹의 대홍기획을 시작으로 한화그룹의 한컴, 종근당의 벨컴과 독립 광고대행사인 샴페인과 프랜티브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로 일했다. 지금은 디지털 마케팅 에이전시의 CD로 퍼포먼스 마케팅의 세계에 발을 담그고 있다. 지은 책으로 『응답하라 독수리 다방(2015)』, 『광고, 다시 봄(2019)』, 『똑똑, 성교육동화(2019)』 시리즈 12권, 『김민준의 이너스페이스(2020)』가 있다.

abacaba@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