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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오딧세이 ⑱ 디지털 산업단지에서 다시 던지는 질문 2024.11

월간 건축사지 2024. 11. 30. 09:35
City Odyssey ⑱ Questions raised again in the digital industrial complex

 

 

 

 

상전벽해인 공간이 젊다 못해 어리광을 부리고 있다. 예전엔 ‘한국수출산업단지’였고, 지하철은 가리봉역과 구로공단역이었다. 그러던 곳 이름이 디지털 산업단지라는 긴 꼬리표를 달았다. 최첨단의 끝없는 확장성이라는 디지털의 생명력을 장착한 것이다. 그럼에도 모태는 아날로그일 수밖에 없다. 아날로그 생명력은 이어짐의 연속이자 흐름이다. 옛 공단이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바뀌었을망정 이곳에서 옛 아날로그 감성을 찾아내 다시 읽어 보고 싶어진 이유다.
1964년부터 수출을 기치로 내걸고 조성된 공단은 당시로선 놀랄만한 규모였다. 높은 굴뚝에 엉성한 공장에서 기계처럼 일해야 했던 노동환경은 열악함 그 자체였다. 비좁은 쪽방을 전전해야 하는 비참한 생활환경은, 도시의 다른 곳과 동떨어진 전혀 다른 공간을 창출하는 배경이 되었다.
이곳이 모든 걸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 흡입력은 노동이건 자본이건, 꿈이건 희망이건, 인권은 물론 알량한 자존심까지를 망라했다. 배타적 공간으로 내몰렸다. 노동자는 사람대접을 받지 못했고 혐오와 비하가 버무려진 공순이 공돌이라는 이름을 가졌을 뿐이다. 누이와 형이었고 친구였는데도 말이다. 야근과 철야가 일상이었고, 고된 노동 후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찬 소주 한잔 들이붓는 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위로였다.
디지털로 변태하지 않은 아날로그 흔적을 그래서 더 찾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고단했으되 아련한 우리네 청춘의 한 페이지 같은.

 

벌집 © 서울역사박물관


벌집에서 산 공순이 공돌이
노동자가 살던 집을 ‘벌집’이라 불렀다. 열악한 칸막이였을 뿐 결코 주거공간이 아니었다. 코딱지만 한 부엌에, 두셋이 눕기에도 비좁은 방 하나가 딸렸다. 화장실은 물론 수도도 공동이다. 새벽부터 긴 줄을 서야만 겨우 생리현상을 해결할 수 있었다. ‘달방’이라 부르는 허술한 벌집은 무수한 청춘의 빛나는 시간과 살과 뼈, 피를 빨아먹었다. 그러함에도 수많은 누이와 형, 친구가 불나비처럼 이 공간으로 빨려 들어갔다.
가산디지털단지역 인근에 ‘금천 순이의 집’이라는 구로공단 노동자 생활체험관이 있다. 지하에 ‘쪽방’을 재현해 놓았지만, 온전히 그 시절을 다 보여주기엔 분명 한계가 있어 보였다. 그럼에도 열악하기 그지없다.
당시 수십만 노동자 대다수가 여성이었고, 이 중 10대 중후반이 50∼60%를 차지했다. 죄라면 가난이 유일했다. 농어촌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상경하여 이곳으로 흘러온다. 눈물을 흩뿌리며 기차에 몸을 실어야만 했다. 먹고살아야 한다는 당위성으로, 혹은 남동생 학비를 벌어야 한다거나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의무감이었을 터다.
1980년대 중반 이곳 노동자 월급은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8.5만 원이다. 벌집은 구로, 가산, 가리봉에 밀집되어 있었다. 임대료는 보증금 20만 원에 월세 3만 원이다. 이를 아끼기 위해 근무 시간대가 다른 노동자 3∼4명이 방 하나를 임대한다. 같은 방에 살지만, 밤낮이 바뀌니 서로 얼굴 볼 틈도 없다.
이곳에서 고된 몸을 뉘며 꿈을 꾼다. 세상을 이야기하고 노동법을 공부한다. 그래야만 끝없는 야근과 철야의 고단함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달에 하루 쉬기도 힘든, 하루 12시간 이상의 살인적인 노동이다. 그런 시간을 쪼개어 야간학교에 다닌 억척과 용기에 탄복할 따름이다. 벌집이나 닭장으로 부르던 비좁은 쪽방에서 꿈꾸던 젊은 청춘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그들이 지금 그대의 어머니이거나 아버지임을 기억해야 한다.
디지털 1단지에 서 있는 ‘수출의 여인상’은 엄청난 왜곡이다. 수출만이 살길이라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였다. 가발, 섬유, 봉제, 완구, 전자 등 노동집약형 산업에 어린 여성 노동자는 저임금에 시달려야 했고, 가혹한 노동환경에 병을 얻기도 하는 등 착취 속에서 연명해야 했다. 햇볕은커녕 환기도 제대로 되지 않는 먼지투성이 공장에서 하루 대부분을 보내야 했다. 들라크루아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연상시키는 횃불 든 이 여신상은, 그래서 가짜다. 당시 권력이 조장한 ‘산업역군’이라는 허상의 현시일 따름이다. 인간다운 삶의 권리를 주장하며 저항하는 여성 노동자가 이들의 참모습이다.
이곳을 거쳐 간 여성 노동자의 삶은 이후에도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낮은 학력은 늘 삶을 옥죄는 형틀이었다. 나이 들어 건물 청소부나 식당 등 비정규직을 전전하는 게 다반사다. 이들을 일컬어 ‘라보때(라면으로 보통 때우는) 인생’이라 부른 적도 있었다. 그러나 분명하게 기억해야 한다. 이들의 피땀으로 산업을 일궜고 경제가 고도화했으며 이만큼 살게 된 바탕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수출의 여인상 © 구로구청


가리봉시장과 오거리
가혹한 노동에 쉴 짬이나 있었을까. 벌집에서 끓일 라면 살 시간도 여의치 않았다. 이런 이유로 인근 가리봉시장이 성황을 이룬다. 좁은 시장통이 인파로 빼곡하다. 짧게라도 쉬는 시간이면 상기된 얼굴로 서로 어깨 부딪는다. 살 순 없어도 구경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박노해는 시 「가리봉시장」에서 “돈이 생기면 제일 먼저 가리봉 시장을 찾아 / 친한 친구랑 떡볶기 500원어치, 김밥 한 접시, / 기분 나면 살짝이 생맥주 한 잔이면 / 스테이크 잡수시는 사장님 배만큼 든든하다”며 애달픈 풍경을 그린다.
손발이 퉁퉁 붓도록 비싼 옷을 만들어도 노동자에겐 그저 구경거리일 뿐이다. 알량한 월급이라도 받으면 큰맘 먹고 원피스 한 벌 사겠다고 다짐하는 게 할 수 있는 전부다. 
“앞판 시다 명지는 이번 월급 타면 / 켄터키 치킨 한 접시 먹으면 소원이 없겠다 하고 / 마무리 때리는 정이는 2,800원짜리 / 이쁜 샌들 하나 보아둔 게 있다며 / 잔업 없는 날 시장 가자고 손을 꼽는다”며 가리봉시장이 나이 어린 여성 노동자들에게 어떤 공간이었는지를 말한다.
저임금 정책은 가혹했다. 저곡가 정책으로 농촌이 황폐해지고, 농민이 산업예비군으로 떠밀려 도시로 몰려든다. 임금이 낮아진다. 낮아진 임금은 열악한 노동과 고된 삶을 강요한다. 뼈 빠지게 일해도 치킨 한 조각 맘껏 사 먹지 못한다.
“허기지고 지친 / 우리 공돌이 공순이들이 / 싸구려 상품을 샘나게 찍어 두며 / 300원어치 순대 한 접시로 허기를 달래고 / 이리 기웃 저리 기웃 / 구경만 하다가 / 허탈하게 귀갓길로 / 발길을 돌”리며 시는 끝을 맺는다. 명동을 방불했다는 가리봉시장은 지금 한산하다 못해 휑한 지경이다.

 

가리봉 시장이 내려다보이는 언덕길

공단의 기억은 가리봉 오거리로 잇닿는다. ‘구로 동맹파업’ 공간이다. 여러 공장과 단위 사업장 노조가 연대하여 벌인, 한국전쟁 이후 최초 노동자 정치투쟁이었다. 1985년 동맹파업을 벌인 5개 사업장과 이를 지지한 5개 사업장 노동자 4천여 명이 참여한 거대한 싸움이었다. 43명이 구속되고, 불구속 38명, 구류 47명을 비롯해 1,500여 명이 해고당한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서막이었다. 이런 대규모 탄압에도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외침이 사회 곳곳에 가닿아 변혁 의지를 일깨웠다.
상전벽해가 된 오거리에서, 그날의 외침이 아직도 유효해 보이는 건 무슨 까닭일까. 부품이거나 소모품 취급당하는 여전히 취약한 노동환경 탓일까, 아니면 최고 권력자의 노동에 대한 천박한 인식 탓일까?



굴뚝이 있던 자리

전통 제조업이 ‘굴뚝산업’이라면 토지 등 고정 자본재와 철도, 고속도로 등 사회간접자본에 얽매이지 않는 ‘풋루즈(Footloose)’를 통상 4차, 5차의 지식집약형산업이라 일컫는다. 아날로그의 옛 굴뚝산업에서 풋루즈(Footloose)로 급격히 변모한 대표적인 도시공간이 서울디지털산업단지다. 업무와 첨단산업이 빌딩 숲을 이뤘다. 변화하는 산업구조에 따라 도시공간이 동조해 진화한 경우다.
20여만 명에 이르는 젊은이들이 이 공간에서 꿈꾸고 있다. 고향을 떠난 어린 여성 노동자가 울면서 찾아 들던 공간이, 이제 꿈꾸는 젊은이들이 희망을 안고 제 발로 찾아드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공간이 상전벽해라면 꾸는 꿈은 격세지감이라 할만하다.
통상 기술의 발달이 철학과 인식의 변화를 추동한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굴뚝산업 당시 노동자에 대한 인식과 인권, 노동환경은 낙제점에 가까웠다. 디지털로 무장한 최첨단 산업이 노동자에 대한 인식과 인권, 노동환경의 개선을 뒷받침하고 있을까. 디지털산업단지 노동자들은 잔업과 야근, 철야 근무에서 과연 얼마나 자유로울까.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갈라 무수한 차별과 착취를 벌이고 있는 건 아닐까? 이 질문에서 서울디지털산업단지는 물론 우리는 정녕 자유로운가? 옛 구로공단에서 1980년대 던졌던 질문을 그래서 다시 던져 본다.

 

디지털산업단지 한복판

 

 

 

 

 

글·사진. 이영천  Lee, Yeongcheon 자유기고가

 

 

이영천  자유기고가

 

도시공학 학사(홍익대학교), 도시계획 석사(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계획기술사(1999). 엔지니어링사에서 도시계획 업무를 시작으로 건설사에서 오랜 기간 사회간접자본 투자사업에 종사했다. 자유기고가로 한국도로협회 계간지 <도로교통>에 다리 에세이 연재 중이다. 인터넷 매체 ‘오마이뉴스’에 다리 및 근대건축 관련 에세이를 연재했고, 현재 도시 관련 에세이 연재 중이다. 저서로 『다시, 오래된 다리를 거닐다』와 『근대가 세운 건축, 건축이 만든 역사』가 있다.

shrenrhw@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