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천루>와 <브루탈리스트> ① 2025.4
<The Fountainhead> and <The Brutalist> ①
아키텍트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는 의외로 많지 않다. 아키텍트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유명한 영화로는 1974년작 <타워링>과 1993년작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 있다. 각각 폴 뉴먼과 톰 행크스라는 스타가 주인공 아키텍트로 나왔고 두 영화 모두 흥행에서도 대박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들 영화는 건축을 다루지 않는다. <타워링>은 초고층 건물의 화재를 소재로 한 재난영화고,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은 로맨스 영화다. 주인공이 건축을 업으로 삼고, 내용도 건축을 다룬 영화가 최근 한국에서 개봉되었다. 영화 <브루탈리스트>는 2025년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올랐고 주인공으로 나온 에이드리언 브로디는 남우주연상을 받았다.<사진 1> <브루탈리스트>는 1949년작 <마천루>와 함께 건축을 본격적으로 다룬 대표적인 두 개의 작품이다.<사진 2>
<마천루>의 원제는 <The Fountainhead>다. 직역하면 ‘샘의 원천’이지만 ‘창조의 원천’ 정도로 의역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천루>와 <브루탈리스트>는 대중의 머릿속에 각인된 아키텍트의 이미지를 전달한다. 그것도 평범한 건축업자가 아니라 위대한 건축 예술가로서 주인공을 부각한다. 두 영화를 통해 대중 또는 작가들이 아키텍트를 보는 시각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은 타협할 줄 모르는 불굴의 창조적 영웅이다. 모든 분야가 그렇겠지만 영화는 현실보다 이상화되거나 과장되거나 왜곡되거나 축소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소설도 그렇지만 대중성을 확보해야 하는 영화는 더욱더 어떤 전형적인 인물을 다루게 되기 때문이다.
두 영화 모두 어떤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건축이라는 직업, 그것도 비타협적인 예술가를 부각시킨다. 그런 유형의 인물은 현실성을 어느 정도 획득해야 한다. 그리하여 건축계에서 활동했던 실제 인물을 모델로 삼았다. 특히 <마천루>가 그렇다. <마천루>의 주인공 하워드 로어크는 비타협적인 인물로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를 모델로 했다. 영화에는 하워드 로어크의 건축 스승이 등장하는데, 그는 라이트의 실제 스승인 루이스 설리번을 모델로 했다. 루이스 설리번은 시카고 학파의 주요 아키텍트로서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설리번은 19세기 말에 이른 전성기를 맞이해 미국의 현대적인 마천루 양식을 개척했다. 하지만 20세기가 되자 시카고 학파의 혁신적이고 모던한 건축 스타일은 고전 양식으로 외관을 장식하는 관습적인 건축에 밀려난다. 더구나 디자인을 맡은 카슨 피리 스콧 백화점이 파산하는 바람에 설계료를 받지 못했고, 50대부터는 소규모의 지방 은행 일만 하면서 알코올에 의지한 채 재정적으로 궁핍한 삶을 살다가 쓸쓸히 삶을 마감했다.
<마천루>에서 주인공의 스승으로 나오는 헨리 카메론은 설리번의 건축 철학과 고통스러운 말년을 비슷하게 재현한다. 카메론은 외면받는 아키텍트로서 삶을 비관하며 제자인 하워드 로어크에게 이렇게 말한다.<사진 3>
“하워드, 저 빌딩들을 좀 봐. 마천루, 인류의 위대한 구조적 발명품이지. 그러나 사람들은 그걸 그리스 신전처럼 보이게 만들었어. 고딕 성당과 빌려올 수 있는 모든 고대 양식의 잡종들이야. 건물의 형태는 반드시 기능을 따라야 해. 새로운 재료는 새로운 형태를 요구하는 거라고. 하나의 건물은 다른 모양의 조각을 빌려올 수 없어. 한 사람이 다른 이의 영혼을 빌릴 수 없는 것처럼 말이야.”
이 대사는 루이스 설리번이 1896년에 발표한 에세이 ‘예술적으로 고려된 고층 사무실 빌딩’의 다음과 같은 대목을 인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층 사무실 빌딩은 백과사전적 의미에서 건축 지식을 전시하는 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잡다하게 모아놓는 것은 혐오스러운 것이다.” 이 문장은 초기 마천루가 고전 양식의 외피를 입은 것을 비난한 것이다.<사진 4> 건물의 형태는 반드시 기능을 따라야 한다는 말, 하나의 건물은 고유해야 한다는 대사 역시 이 에세이에서 인용한 것이 틀림없다.
스승의 말을 충실히 따르는 주인공 로어크는 큰 은행의 일을 맡게 된다.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저층부를 필로티 공간으로 처리한 글라스 타워를 제안한다.<사진 5> 건축주는 이 안이 너무 파격적이고 대중적이지 않다는 판단 아래 절충안을 제안한다. 그것은 저층부와 측면에 고전 양식의 외피를 입히는 안이다.<사진 6> 이 절충안을 단호히 거절하는 로어크는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건물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고유한 모습이 있어요. 건물은 그 자체의 아이디어에 충실해야 하고, 그 자체의 고유한 형태를 가져야 하며, 그 자체의 목적에 봉사해야 해요.” 로어크가 단호하게 절충안을 거부하자 건축주는 고객의 말을 따라야 할 의무가 있지 않느냐고 타협을 강요한다. 이에 받아 치는 로어크의 대답은 건축업자가 아니라 진정한 건축 예술가의 면모를 맹렬한 기세로 보여준다.
“나는 고객을 확보하려고 건물을 짓지 않아요. 내 건물을 지으려고 고객을 찾지요.”
스스로가 창조적인 예술가라면 누구나 이렇게 통쾌하게 말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을 무겁다. 당장 먹고사니즘이 예술적 판단을 마비시킨다. 일단 타협을 해서 실적을 쌓는 것이 먼저다. 진짜 자기가 하고 싶은 건축은 명성이 쌓인 뒤에 도모해도 되지 않을까. 이것이 현실적인 판단이고 태도다. 하지만 하워드 로어크는 일을 잃더라도 타협하지 않는 영웅적인 예술가로 그려진다. 원작 소설에서 20대의 젊은 아키텍트로 설정된 로어크는 이 프로젝트를 거절함으로써 결국 건설 현장의 막노동자로 전락한다. 하지만 그의 혁신적인 디자인을 알아본 돈 많은 후원자 덕에 조금씩 실적을 쌓게 된다.<사진 7> 그리고 영화 후반부에서 대규모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이 역시 로어크로서는 참기 힘든 타협의 순간이 찾아온다. 그의 아이디어는 왜곡되고 만다. 이때 그가 선택한 것은 놀랍게도 다이너마이트로 건물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는 고발되고 재판정에 서게 된다. 마지막 변론이 주어지자 그는 일장 연설을 한다. 이 연설은 <마천루>를 쓴 작가 아인 랜드의 철학을 대변하는 것이다. 그 대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창조자도 형제를 기쁘게 하려는 욕망에 이끌리지 않는다. 그의 진실이 유일한 동기다. 오직 작품이 그의 유일한 목표다. 그는 다른 사람이 동의하든 하지 않든 자신의 길을 간다. 진실만이 그의 유일한 깃발이다. … 창조자는 자신의 판단 위에 서 있다. 기생충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따른다. 창조자는 생각하고 기생충은 모방한다. 창조자는 독립성을 요구하며 섬기지도 지배하지도 않는다. 기생충은 권력을 추구하고 모든 인간을 공동의 행동과 공동의 노예로 묶고 싶어 한다. 기생충에게 인간은 사용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역사 속 모든 위대한 업적은 독립적인 정신의 독립적인 작업에서 비롯되었다. 모든 공포와 파괴는 인간을 두뇌가 없고 영혼이 없는 로봇으로 만들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개인의 권리도, 개인적인 야망도, 의지도, 희망도, 존엄성도 없이 말이다.”
하워드 로어크는 이와 같이 마지막 변론을 통해 조직이나 집단이 아닌 개인의 욕망, 그러니까 다른 이를 해치는 탐욕이 아니라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욕망을 긍정하고, 그런 개인이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창조적인 성취가 일어난다고 말한다. 이는 <마천루>의 작가 아인 랜드가 전개한 ‘객관주의 운동(Objectivist movement)’을 대변한다. <사진 8> 객관주의는, 영웅적인 존재인 개인이 이성적인 이기심에 따라 자신의 행복과 자유를 추구하는 것을 도덕적 목적으로 삼고, 그런 개인적 행복 추구의 목표가 실현되는 자유방임의 자본주의 사회를 지향한다. 아인 랜드는 이런 철학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소설을 쓰고자 했다. 그런데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창조자로 아키텍트를 선정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왜 랜드는 자율성이 더 많은 문학 분야의 작가, 또는 화가나 조각가, 또는 뮤지션 같은 직업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건축이 오히려 창조성의 제약을 더 강하게 받고, 따라서 덜 자율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즉 객관주의라는 철학을 대중적인 소설을 통해 널리 알리고자 한 작가에게 개인의 이성적인 욕망과 의지, 그리고 자율성이 갖는 힘과 가치를 알리려면 그런 것들이 오히려 위기를 맞는 설정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문학, 미술, 음악 분야의 창조자들은 그런 자율성의 속박을 상대적으로 덜 받는다. 개인의 의지와 욕망을 위협하는 위기와 갈등은 대부분 그 주체의 내면에서 일어난다. 반면에 큰 자본이 필요한 건축과 영화 분야의 창조자는 수많은 난관과 갈등과 타협의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자신의 예술성을 증명할 수 있다. 그런데 영화는 작품을 만드는 데 참여하는, 또는 참견하는 전문가의 숫자가 훨씬 많고 복잡하다. 반면에 건축은 아키텍트와 건축주 두 주체가 갈등한다는 점에서 단순하다. 그렇게 창조적인 의지와 욕망이 관습적이고 보수적인 자들의 간섭과 훼방을 받을 때 창조자의 자율성이 갖는 위대함을 훨씬 더 드라마틱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인 랜드는 그렇게 강력한 경쟁자, 또는 훼방꾼의 간섭을 무력화하고 영웅적인 개인의 욕망을 대담하게 펼쳐 이 세계에 탁월한 성취를 남기고 사회를 진보시킨 사람으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만한 사람이 없다고 결론 내렸을 것 같다. <사진 9> 그는 소설을 쓰고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를 연구했고, 자연스럽게 루이스 설리번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마천루>의 원제인 ‘The Fountainhead’는 설리번의 자서전에 두 차례 등장한다고 한다. 실제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건축주에 주눅 들고 끌려다니기는커녕 건축주를 통제한 아키텍트로 유명하다. 수많은 건축주들이 자신의 돈으로 라이트의 예술적 욕망을 기꺼이 실현시켜 준 것이다. 그런 건축주의 자녀들 중에서는 라이트를 미워한 사람도 많았다. 자신의 아버지가 라이트의 포로가 된 듯한 모습을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실제 현실에서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처럼 권위를 발휘할 수 있는 아키텍트나 디자이너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대다수는 때로는 양보하고 때로는 타협하고 때로는 설득 당하기도 하면서 작품을 만든다.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이 나쁜 것도 아니다. 때로는 더 좋을 수도 있다. “나의 작품을 위해 고객을 선택한다”고 통렬하게 말할 수 있는 디자이너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고객에게 상처받는 것은 거의 모든 디자이너의 숙명이다. <브루탈리스트>의 주인공은 <마천루>의 하워드 로어크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건축주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받는다. 그 이야기는 다음 달에 해보고자 한다.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kshin201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