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클 | Article/칼럼 | Column

살아 숨 쉬는 건축여행 ⑥예산 시가지 발달과 예산의 발전

월간 건축사지 2022. 11. 10. 14:27
A living and Brenthing Tourism for Architecture
⑥ Yesan Urban Development and Yesan Development

 

1. 농산물의 집산지 및 화교 일본인 상업활동
내포지방 예산에서, 상업적 농업의 발전과 미곡을 중심으로 한 농산물의 상거래는 내포지방의 지주들이 화폐경제에 눈을 뜨게 한 동기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작은 농촌 소읍인 예산에 충남산업주식회사가 설립된 것으로 본다. 또한 예산은 인천과 군산에 수송될 농산물의 집산지라는 지리적인 면에서 화교들의 상업활동에 일대 거점이 되는 요인이 되었다. 이때 청일전쟁이 발발되자 인천에 일본군의 병참본부가 서게 된다. 이에 인천 재유화교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자 인천을 피하는 화교들의 상업활동 거점인 예산이 이거(移去)하였다. 예산이 한국인뿐만 아니라 화교상인과 일본인 상인의 활동거점이었음을 ‘충남산업지‘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예산은 본도에서 연안에 이르는 교통 상의 최요구지로서 불과 4리 떨어져 있는 곳에 아산항의 요항 선장을 끼고 있다. 예산은 경성과 인천방면으로 물자 중개시장으로서 오지에는 공주와 청양을 잇는 상업상의 중심지로 한국인 거상과 중국인 상인, 일본인 거주자가 많은데 이곳의 대유 중국인은 일청 전역도피자가 많이 잔류하여 금일에 이르렀던 것으로 중국인의 상업가는 견인해서 날(日) 달(月)에 따라 그 세력이 신장하여 예산거주 중국인 중에는 수십만원의 자산을 가지고 있는자가 적지 않았다.”


2. 교육정책에 의한 지방 발전
보통학교의 수는 해를 거듭하면서 늘어났으나 중등교육기관은 극히 희소한 분포상태였다. 당시 도내 중등교육기관으로서는 본교(충청남도공립농업학교)를 비롯하여 강경상업 그리고 공주고보의 3개교, 5년제 학교뿐(그것도 50명 모집에 25명은 일인) 나머지는 각 군에 배치된 2년제 농업보습학교 정도였다.
공주공립농업학교가 충청남도공립농업학교로서 예산으로 이전된 1920년대는 이 지역에 일대변화가 일어난 시기였다. 즉 일본은 대륙침략의 준비로 경북·호남선 철도의 개통에 이어 1922년 6월에는 장항선 철도를 개통했다. 본교가 예산으로 오기 전 1913년에는 충청은행, 호서은행이 설립되었고, 1926년에는 충남제사회사가 설립되는 등 각종 기관이 설립됨으로써 예산은 본교를 주축으로 하여 충남서부지역 문화의 중심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8.15 해방 전까지 예산에 세워진 교육기관으로는 예산국민학교가 1912년에, 예산여자고등학교가 1941년에, 금오국민학교가 1944년에 각각 설립되었다. 당시 총독부는 각도에 사범학교 설립을 명하게 되었다. 그러나 충청남도 재정형편으로서는 공주농업학교 이외 사범학교 설립이 어려웠다. 그 무렵에 홍성에서는 고등보통학교 설립 기성회가 활발히 움직이고 홍성지방에 상급학교(고등보통학교) 설립을 강력히 요구하였으므로 충청남도에서는 공주농업학교를 홍성에 이전하고 그 자리에 사범학교를 설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홍성지방 유지들은 실업학교인 농업학교는 필요 없고, 인문계인 고등보통학교 설립만을 고집하며 원래의 약속인 학교부지의 제공과 교사의 신축경비 부담을 거절하였다.
이에 당황한 도당주자들은 당시 서부충남의 경제권을 잡고 있던 호서은행(지금의 충청은행 예산지점자리)의 경영주인 성원경 씨에게 사정을 하면서 예산지방에 받아줄 것을 간청하므로, 성씨 등이 학교 부지를 제공하고 교사신축비의 대부분을 희사함으로써 예산에 이전하게 되었다.
본교가 공주에서 이전된 후 교명이 충청남도공립농업학교로 바뀐 것은 당시 교장선생의 청원에 의한 것이었으며 학교의 모든 짐은 10여 대의 우마차에 싣고 학생과 교직원들은 책걸상을 걸머진 채 백리 길을 걸어서 왔다.
1922년 2월 개정된 조선교육령에 의하여 4년이던 보통학교를 6년으로, 고등보통학교가 4년에서 5년으로, 고등여학교가 3년에서 4년으로 개정되었다.

충청남도 조감도(충청남도 발전사 호남일보사 발행)
충청남도 조감도 및 물산분포 및 노선안내도 물산분포도 및 자동차 노선안내도, 충청남도 발전사, 昭和 7년 3월 1932, 예산 뱃길 : 아산만→삽교천→선장포구→무한천→창소리(신례원)→예산주교리→삽교천(금미천)→ 만포→덕산


3. 1920년대 예산에서의 상점 등장과 경제활동 증가
예산이 충청남도에서 상업활동의 중심지가 된 배경을 보면, 예산은 인천과 경성에 연하는 해로의 출발점인 선장이란 요항을 옆에 끼고 있는 농산물의 일대 집산지였다. 철도가 부설되기 전에는 농산지에서 생산된 미곡은 예산에 모아 선장을 거쳐 인천과 경성 그리고 군산에 운반됐다. 예산은 미곡수송 및 거래의 중간지점이었다. 상업과 산업의 요위지로 조성된 것은 상인의 도산매 거상들이 집결되었기 때문이다. 면화와 저마의 재배를 장려하고 외국수입에 저항할 정도의 수준이 상인들이 모였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상인을 1926년 1월에 간행된 『조선인회사 대상점사전(전)』(1927)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1) 윤창규상점 : 개량농구와 토목건축 용재전문으로 1913년 설립되었고, 설립자는 상계에 몸담은 지 40여 년에 상업에 대한 지식과 경험과 자본이 풍부한 인사이다.
(2) 황학주상점 : 주단포목, 제적물무역, 신구잡화, 기타 선혜 등 각종 물품을 취급하는 상인으로서 1916년 1월에 점포를 설립하였으며, 설립자는 어려서부터 사업에 종사하며 실제적인 지식과 경험이 자못 풍부한 자였다.

『조선인회사 대상점사전(전)』 표지, 영수증, 책 내용

(3) 진숙양복점 : 각종 양복 제조전문, 기타 부속품 일식, 각종 학생모자의 제조도매로 1918년 자본금 1만 원으로 설립되었다. 설립자 임진숙씨는 상계에 발을 들여놓은 지 20여 년에, 점포는 거금 9년 전에 개시되었다고 하며 최신식 유행 양복을 오로지 기술에 치중하여 운영하였다.
(4) 대창 상점 : 주단포목, 제직물 무역도배, 각종 지물 도산매로 1919년 11월에 백양봉 씨가 설립하여 민활한 수완으로 융성하게 했다.

(5) 예산 상회 : 주단포목, 각종지물, 신구잡화, 각종모자, 비료, 기타 관공서 용달전문으로 1922년 11월에 성천영 씨가 1만 5천 원의 자본금으로 설립하여, 상계의 ‘에누리’ 폐습을 타파하기 위하여 정찰 신용손위로 운영하면서 육영사업도 겸하였다. 
(6) 삼성 상회 : 해육물산 무역 및 위탁도매업으로 1925년에 강후학, 이근식 씨가 설립하고 윤성구 씨가 주무를 맡고 신용본위로 운영하고 있다. 강씨는 상계투신한지 30여 년에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인사이다.
예산은 이와 같은 경제사회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예산은 이와 같은 경제사회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4. 시가지 공간구조와 상가 형성영역
충남상업주식회사는 1915년 12월에 설립하여 자본금 15만 원으로 미곡무역과 급운송을 영업하였는데, 무역액이 연 60만 원에 달하는 상황이며, 현재취제역 신익교씨는 같은 회사에 많은 노력을 하여왔다 한다.
1930년대를 살았던 이완규 씨의 “70년 전 예산 그때 그 시절”을 살펴보면, 지금의 중심지 본정통 사거리를 기준으로 동쪽 예산극장 맞은편, 근처에 미곡상회와 싸전이 있었으며, 삼성식당 맞은편에 고기전(육간)으로 함석장옥 10칸을 지어 1호점에서 7호점까지는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팔고, 8호점에서 10호점까지는 개고기를 팔았으며, 쌍소나무 옆으로 흐르는 예산천을 따라 나무전 숯전이 형성되었고, 숯전 아래쪽에 생선전이 있었다고 한다.
중심 본정통 사거리는 경양식(만복식당), 중국음식점(동화루·덕성루), 중국인 잡화상(공화동), 도량형기 석유도매(윤창규), 주류도매상(임도영 상회) 중국인 잡화상 뒤쪽에 옹기전 사거리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주단 포목전이 즐비하게 있었다고 한다.

1940년대 예산본정통 상가모습. 사진작가 신현성

예를 들어 김흥국 포목전을 비롯하여 이주현·최경훈·양태복·유팽열 상점이 있었는데, 이주헌 상점은 김흥국 상점에서, 최경호 상점은 황학주 상점에서 수석점원으로 오랫동안 일하다가 퇴직 후 각각 독립한 상점들이었다. 황학주 상점 이웃에는 청국인 상점이 있었는데, 하나는 해천상점이고 하나는 엽서방상점이었다. 그들 역시 주단포목상이었으며, 규모도 제법 컸었다고 한다. 이들 상점들은 엽서방(중국인)과 해천문(중국인), 최경효 주단 포목전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중에 김흥국 주단포목전은 충남도에서 2번째로 크며, 종업원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예산천 근처에는 여관 집단지역이 있었다. 예산천 양쪽도로는 목조다리로 연결되었으며 나무전, 숯전, 생선전 아래쪽 개천 한쪽에는 재봉틀을 놓고, 조끼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조끼전 10여 호가 집단으로 있었다. 개천 건너편에는 건어물전, 제수용품전 및 창고집 앞에는 대추전(밤, 대추, 감, 은행, 사과, 배 등 과자류와 사탕)과 한약방, 주단포목전으로 형성되고 있었다

1930년대 본정통 예산천변 상점분포
1920~1930년대 예산시가지와 시장재현 조감도 © 종합건축사사무소 S.S.P 삼대 김득수
1930년대 일본인거주 및 상점분포

병원도 본정동 4거리를 중심으로 북쪽에 대동외과의원(최익렬), 서쪽에는 순천과의원(이종대), 남쪽으로는 중앙의원(조성두)과 해동안과의원(오도영), 부인의원(김효순) 등이 있었다. 예산천 아래쪽 현재 성결교회 앞쪽에 쇠전(우시장) 개천 건너에 도살장(현 예산상설시장 내)이 있었다고 한다. 여관 집단지는 그 당시 5일장에 따라 주변 7개군의 도소매인 봇짐장수(보부상과 같은 역할)을 위한 쉼터로 붐볐다고 한다. 그 당시 일본인학교(금오공립초등학교)와 중국화교학교가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일본인과 중국인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5. 청국인·일본인 기업활동
청국인의 상품진열방식은 상점구조를 모두가 은행의 영업대처럼 설치했다. 상점 안쪽 벽의 유리 달린 진열장에 상품을 진열해 놓고 손님은 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며, 손님과 거래할 때는 상품을 영업대 위에 꺼내놓고 사고 팔았다. 청국인들은 주로 산동성 출신자들로 상점 외에 음식점에도 많이 진출하였다. 농산물은 휘청거리는 긴 목채 천평(천칭)대의 양 끝에 채소를 담은 광주리를 달아 어깨로 맨 채 예산읍까지 걸어와 채소를 팔았다.

법무사 이기붕(98세, 1906년생)과 김득수 건축사
1930년대 일본인 거주 및 상인 분포도

일본인들의 기업활동을 보면 과자제조업 3명, 석유도매업 1명, 식품잡화점 3명, 양약반 1명, 사진관 1명, 이발관 1명, 의사 1명, 치과의사 1명, 담배소매상 겸 탁주소매상 1명, 건축업 2명, 빵·과자 사탕 등 소매상 5명, 일본요리업(공장겸업) 2명, 여관업 3명, 아이스케이크 및 밀짚모자 제조 1명, 사직점 1명, 법무사 2명, 문방구점 1명, 조선목재상 1명, 미곡상 1명, 철물건축재료상 1명, 양장업 1명, 종묘생산업 1명, 신사의신관 1명, 절의 승려 1명, 지주들은 정확한 수치는 없지만 수명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예산리 201번지 본정통 사거리에서 쌍송나무 사이에 시장이 번성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에 기존 시장이 1926년 3월 20일 시장개설로 예산리 346-13외 17필지로 이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예산은 내륙도시이며 물류의 중간기지였고, 농업을 기반으로 성장한 도시로 자급자족이 가능했기 때문에 경제적 기반이 안정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상인들이 몰려들었고, 특히 한국인 상인들의 수가 많았기 때문에 도시로서의 기능이 유지될 수 있었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상권은 일본인이 갖고 있었기 때문에 기존의 다른 도시에 비해 쇠퇴하지 않았을 뿐 상황은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예산은 일제하에서 농업을 중심으로 기존 소읍에서 근대도시로 발전된 하나의 기본 패턴을 보여주고 있다. 일제의 의도가 반영돼 선형도시가 되었지만, 이러한 패턴은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6. 시가지 상권 업종분포영역
해방 이전과 이후 주요 상업공간이었던 예산 본정통을 비교해 보면, 해방 이전에는 서남쪽, 양쪽으로 시장이 길게 퍼져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는데, 업종과 상인의 수가 증가됨에 따라 시장이 점차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도심부가 본정통을 중심으로 서로 상호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서로 다른 상권이 중복되지 않고 같은 업종과 함께 인접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중심상권이 확장되면서 혼재되어 있는 업종들이 같은 상업종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유대성이 강화되고, 시장영역도 유사한 업종끼리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하며, 식민정책적으로도 장려되었기 때문에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예산에서도 이러한 발전이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재래시장이나 장시와 한성의 시전(육의전)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각기의 업종이 분리된 형상으로 배치가 이루어진 것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예산 본정통 내에서, 특히 구시가지 내에 상업활동이 활발히 성업했으며, 도시전체가 상업활동의 공간이 될 만큼 상업의 종류와 규모가 컸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상거래가 활발하고, 시장이 번성한 것은 1913년 5월 21일 예산에서 호서은행이 창립하는 결정적 원인이 됐다. 이때와 충청남도공립농업학교로 예산이전된 1920년대는 이 지역에 일대변화가 일어나는 사건이 되었다.
지난 1997년도 조흥은행 100주년 기념으로 동판으로 표적을 창립지에 대신하였다. 조흥은행 100주년 기년 금융박물관에 사진과 기록이 남아 있어 확인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현 위치에 있는 호서은행 건물은 일본인이 설계하고 청국인이 벽돌을 현지에 구워 지었으며, 창립건물은 그 후 예산면사무소(1930년 경)와 보건소로도 사용했고, 동화루 건물 2층은 면사무소 회의실로 사용했다고 한다. 조흥은행 100주년 기념박물관에도 호서은행의 배치도·평면도 및 각종 도면이 없어 아쉬움을 남겼으나, 현존 건축물을 2000년대에 실측해 살아 숨 쉬는 건축여행②(월간 <건축사> 2022년 6월 호, VOL638)에 게재했다.

1913년 5월 21일, 호서은행 창립지에 100주년 기념 동판(2013년 김득수 촬영)

 


참고문헌:
조선인회사 대상점 사원간재잔치중편집 부업세계사간(1926년 1월28일간)
예산농학 80년사 1990년 발행 예산농업전문대학
충청남도 발전사(1932년 3월25일 호남일보사간
일제시대 소읍도시 형성과정에 관한 연구 김득수 석사학위 논문 2003년8월
법무사 이기봉(1906년생) 인터뷰 및 기록작성자 2003년 5월

 

글. 김득수 Kim, Deuksoo 종합건축사사무소 S.S.P.삼대

 

김득수  건축사·종합건축사사무소 S.S.P.삼대 대표

영등포구지역건축사회 회장(3회 연속), 서울특별시건축사회 회장 직무대행, 대한건축사협회 이사·감사 등을 역임하고, 대한건축사협회 50년사 발간위원장을 지냈다. 서울 영등포구, 동작구 건축·민원조정 위원, 에너지관리공단 건축·도시·관광단지 심의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예산읍 초대 명예읍장으로 위촉(1997.02.15.~2006.12.03.)된 바 있다. 서울특별시 시장 표창 5회와 대통령 표창(제200398호)을 받았으며, ‘일제시대 소읍도시 형성과정에 관한 연구’, ‘일제강점기 근대도시의 도시공간 변화 특성에 관한 연구’ 등의 논문을 작성했다.

a01063459567@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