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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마을5·18민주화운동의 근거지, 광천 시민아파트

월간 건축사지 2022. 11. 10. 15:02
Disappearing village _ Gwangcheon Citizen Apartment,
the base of the May 18 Democratization Movement

 

광천동은 일제 강점기 이전에는 광주천 옆에 새로 방죽을 쌓았다고 해서 새방천 혹은 신방천이라 불렸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일제의 잔영을 없애기 위한 잠정적 조치로 법적 절차를 밟지 않은 채 일제 강점기에 광천정이라 부른 이름을 취락동이라 고친 후 1947년에 광천동이 된다. 일제 강점기에 종연 방직공장이 있었으며, 광복 후에는 다양한 종류의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광천공단으로 불리며 공장근로자들의 거주지를 이루었고, 6.25전후 피난민과 도시빈민들의 판자촌이 많았던 대표적 광주의 달동네였다. 광천 시민아파트는 광주광역시 서구 죽봉대로119번길 22-9에 1969년 도시계획에 따라 주거환경개선목적으로 광주에 최초로 지어진 연립 시민 주택이다. 대지면적 3,605제곱미터에 연면적 4,5544.10제곱미터, 철근콘크리트구조의 3층 규모의 디귿(ㄷ)자형 3개 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단위세대 면적 23제곱미터 93세대, 33제곱미터 91세대 등 총 184세대로 1970년 7월 9일 사용승인을 받았다. 가구당 면적이 좁은 관계로 각층 계단실 입구의 공동화장실과 세탁장에서 세면과 빨래, 취사 준비 등을 해결했고, 당시 재래식이었던 화장실로 인하여 악취 등 주거환경이 매우 열악했다. 
이곳은 5.18민주화운동의 많은 열사와 시민들의 항쟁의 역사적 삶을 담고 있는 건축물로 역사적 가치도 갖고 있다. 1978년 7월 광천동성당 교리실에서 문을 연 광주전남 최초 노동야학인 들불야학의 교사들이 세 들어 살았고, 나중에 들불야학의 교실(다동)이 있기도 했다. 또 항쟁 기간 민중 언론 역할을 했던 ‘투사회보’를 제작했고, 한국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노래가 된 ‘임을 위한 행진곡’ 탄생의 공간적 배경이 되기도 했다. 2012년 12월 15일 구역 지정으로 시작되어 2019년 12월 31일 사업시행인가를 받은 광주지역 최대규모 재개발지구인 광천동 재개발 사업은 설계업체 공모 현장 설명회를 시작으로 본격화됐다. 2028년도 완공을 목표로 전체 조합원 2,377명, 사업 면적 425,984제곱미터를 대상으로 건폐율 15.13%, 용적률 234.63%를 적용한 지하 2층, 지상 33층 규모의 53개 동, 5,611세대 및 부대시설들이 들어서는 사업이다. 철거 위기에 몰린 들불야학 터인 시민아파트의 보존에 오랫동안 많은 갈등을 빚었으나, 아파트 나동을 보존하는 양해각서를 2021년 5월 조합 측과 체결하여 5.18민주화운동의 역사 기억체험관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이렇게 광천 시민아파트는 작은 흔적과 그리움을 남기고 오랫동안 자리했던 곳에서 사라지고 새로운 기억의 시간을 만들어갈 것이다.

들불열사들의 아지트 민중의 연대를 위하며 지식과 노동의식을 가르친 들불야학은 1978년 7월 23일 광천동성당 교리실에서 시작됐고, 후에 광천동 시민아파트로 옮겨졌다. 학당은 다동 307호에 있었다고 한다. 들불야학을 도왔던 7명의(박기순·윤상원·박용준·박관현·신영일·김영철·박효선) 열사가 이곳에서 배출됐다. 김영철(가동)·박영철·박용준·박관현(가동)·윤상원(나동) 열사가 광천동 시민아파트에 거주하기도 했다. 시민 소식지였던 ‘투사회보’ 발간이 시작된 곳이자 5.18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 탄생의 공간적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참고: 문화매거진 <대동문화> 129호)
광천동 성당 서구 죽봉대로 119번길 28-13 시민아파트 다동 뒤편의 골목 끝에 넓은 잔디밭을 가진 이곳은 1950년 6월 25일 공소 설립 허가 후 1970년 11월 16일 본당 승격과 새로운 성당이 축성되었다. 1978년 7월 23일에 노동자들에게 지식과 노동 의식을 가르치고 노동운동의 토대를 넓히기 위해 선구적인 젊은이들이 뜻을 모아 시작된 들불야학의 장소를 제공하고 적극적으로 도움을 제공하여 7인의 들불 열사를 배출하였고, 5.18 민주화운동의 사적지로 지정되었다. 이곳의 들불야학 교리실은 2004년 1월 20일 교육관·사제관·수녀원 축성 때 교리실 입구 벽체만 남기고 철거되었고, 2006년 5년 10일 들불야학 기념비와 2014년 8월 29일 표지석을 설치하여 기념하고 있다. 이번 재개발에서 들불야학의 교리실을 보존하기 위해서 다시 복원하기로 했다.
내부공간 현관, 방 1·2, 연탄 아궁이가 있었던 부엌, 그 위의 다락이 전부인, 1970년대의 다른 시민아파트에서는 볼 수 없는 열악한 공간을 가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공동시설을 이용해야 했고 일부 살림살이들을 복도에 내어놓은 모습들을 지금도 볼 수 있다.
공동시설 시민아파트임에도 불구하고 세대 안에 욕실이 없는 관계로, 각층 중앙계단 옆에 재래식으로 남녀 구분 없는 공동화장실을 두었고, 정면에 다용도실을 두어 취사와 세면, 세탁 등의 다양한 용도로 사용했었다. 지금은 화장실이 수세식으로 바뀌었다.
공동시설 앞 복도에 놓인 의자가 눈에 들어온다. 아마도 기다림과 짧은 쉼의 자리였을 것 같다. 이 자리는 주민들의 소통의 장으로 힘든 삶을 서로 위로하고 나누는 중요한 공간으로 자리매김했을 것이다.


 - 임경림​ 

오래 닫아만 둔다면
그건 문이 아니야,
벽이지

열기 위해
잠시 닫아 두는 게 문이야
벌서는 아이처럼
너무 오래
나를 세워 두지 말았으면 좋겠어

 

본래 하나였던 세상,
나로 인해 나누어진다는 건
정말 슬픈 일이야

안과 밖이
강물처럼 만나
서로 껴안을 수 있게
마음과 마음이
햇살되어
따뜻이 녹여줄 수 있게
이제 그만
나를 활짝 열어 주었으면 좋겠어

 

글·사진. 정원규 Jeong, Wonkyu 창대 건축사사무소 ·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