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마을뱃사람과 노동자의 마을, 목포 다순구미 마을 2022.3

2023. 2. 17. 09:07아티클 | Article/포토에세이 | Photo Essay

Disappearing village
Dasungumi Village in Mokpo, a village of sailors and workers

 

마을은 유달산 아래 가파른 경사길을 따라 목포 바다를 바라보며 형성되어 있다. ‘구미’는 바닷물이 깊이 들어오는 오목한 지역이라는 뜻이고, ‘다순’은 따뜻하다는 뜻의 사투리이다. 해서 바닷물이 들어오는 양지바른 유달산 남쪽 비탈마을을 ‘다순구미’라 불렀다. 지금은 같은 뜻의 한자명인 온금동(溫錦洞)이란 행정구역 명칭이 붙어 있다. 1897년 고종황제의 칙령으로 개항한 목포는 경술국치로 일본인들에 의한 근대 도시개발계획에 따라 바다 앞 평지인 시가지는 일본인의 거주지가 되었고, 조선인 주민들은 도시 북쪽과 서쪽 유달산 자락에 달동네를 꾸려야 했다. 이전에는 진도 조도와 완도 노화도, 신안 암태도에 살던 뱃사람의 마을이었으며 이후에도 뱃사람들이 주로 이주해와 많이 살았다. 
1910년대 다순구미 일대 간석지를 매립하여 ‘째보선’으로 불린 어선 정박지로 조성하여 사용했으며, 1938년 세워진 조선내화 목포공장의 부지가 되어 마을 주민들과 함께 뱃사람과 공장 근로자들이 거주하기도 했다. 마을 입구에는 아직도 공장 건물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2016년부터 운행한 해상 케이블카에서 내려다보이는 이 마을은 바다가 훤히 보이는 전망과 북쪽에 유달산을 끼고 남쪽으로 트인 지형으로, 여름의 시원한 남동풍과 겨울의 북서풍을 막아주는 따뜻한 언덕을 가진 최고의 주거지로서 서산온음지구 재개발 1지구에 포함되어 아파트 재개발이 진행될 예정이다. 또한 입구의 조선내화 공장은 등록문화재로 등록되어 역사적 건물과 더불어 복합문화공간으로 조성해 활용할 계획이다.

 

조선내화 주식회사 목포공장은 용광로에 들어가는 내화벽돌을 생산하기 위해 일제강점기 말기(1938년)에 설립됐다. 조선내화는 한국경제의 고도성장기에 제철 시멘트 유리공업에 필요한 내화제를 생산하여 세계적인 내화제 기업으로 성장했다. 1997년 본사가 광양으로 이전하면서 목포공장은 폐쇄되었다. 1938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설비와 굴뚝, 가마, 산업화시대 공장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어 2017년 등록문화재 제707호로 지정받았으며, 총 29,200제곱미터 전체 부지를 역사적 유적 보전과 복합문화공간으로 조성하기 위한 개발사업이 2021년 12월 건축 허가를 받고 공사가 시작되었다.

다순구미 골목에는 
유달산을 바라보며 형성된 좁고 비탈진 긴 골목길과 가파른 계단 사이로 집들이 마치 바위 위에 붙어있는 조개류처럼 옹기종기 붙어있다. 물이 귀해 마을 밑에 있는 우물에서 머리에는 물동이, 등에는 물지게를 지고 오르내리던 골목길을 따라 힘들게 걷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면 목포 바다가 아련히 마음속에 들어온다. 계단을 따라 집들의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 속에서, 일제강점기의 조선인과 지금까지도 여전히 가난한 주민들의 삶의 애환, 그래도 복닥거리며 행복을 나누었을 가족들의 흔적들이 엿보인다. 미끄럼을 방지하기 위해 시멘트 길바닥에 그어놓은 선들이, 오랜 세월 수많은 사람이 이 길을 밟으며 떠나고 들어오면서 흘렸을 눈물과 땀으로 새겨진 온금동 주민들의 삶의 나이테로 여겨진다.

골목길에서 바라보여지는 목포 바다는 
뱃사람들에게 어떤 생각을 하게 했을까?
언덕길에서 바다를 보면 깃발을 먼저 보았을 것 같다. 배에 걸린 깃발을 보면 만선인지 사고가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는데, 바다는 집에 남겨진 가족들의 마음을 긴장하게, 또 행복하게 하고 때로는 깊은 슬픔을 전하는 그런 곳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이곳은 그리스의 산토리니 언덕에서 보이는 풍경보다 더 아름답다.

마을 중앙에 있는 우물 공동시암은 1922년에 큰 가뭄으로 식수난을 겪을 때 정인호가 조성한 것이다. 가로 150×세로 135 센티미터의 크기로 우물 뒤편에는 2기의 비석이 있는데, 우물 조성에 기금을 낸 정인호의 공적을 기리는 ‘정인호시혜불망비’와 온금동 주민들에게 긍휼을 베푼 김영수를 기리는 ‘김영수시은불망비’이다.
이곳의 최대 문제는 식수 부족인데, 수질도 좋지 않았다. 이때 돈을 기부해 새 우물을 만들어주었으니, 대단한 기부였다. 

조금새끼들도 지금은 거의 다 마을을 떠나고 없다.
뱃사람들이 바다로 나갈 수 없는 조금(썰물)때와 흉어째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많아져서 이때 많은 아이가 태어났다. 이 아이들을 온금동 사람들은 ‘조금새끼’라고 불렀다. 한날에 태어난 아이들은 생업을 이어받아 바다로 나갔다가 거친 풍랑에 함께 바다에 묻히기도 했다. 그래서 이곳의 남자들은 같은 날 생일과 제삿날이 많았다.

다순구미마을
 - 박정구 

목포 온금동에 가면 
허리 굽은 계단들이 하늘을 향해 있다
뱃사람들이 하나둘 모여 살던 마을
하늘 아래 첫 동네라서
달도 가장  먼저 뜬다
눈먼
다순구미 마을이 아름아름하다
아비의 아비 자식의 자식으로 물려지는 뱃일처럼
가난한 마을에는 불빛도 흐리다

 

목포 은금동에 가면
하늘 계단들이 바다를 향해 있다
뱃사람들 하나둘 떠나는 마을
씀바귀 같은 사람들의 고향에 기다림은 길어도
봄이 오고 또 꽃은 피지만 바닷바람이 차다
온금지구 재정비촉진사업 흉흉한 소문
귀먼
다순구미 마을이 무너지고 있다
흐린 불빛마저 꺼져가고 있다

 

 

 

 

글·사진. 정원규 Jeong, Wonkyu 창대 건축사사무소 ·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