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니즘과 엔트로피 2022.6

2023. 2. 20. 09:05아티클 | Article/디자인스토리 | Design Story

Modernism & Entropy

 

문학, 미술, 음악, 건축, 가구 등 어떤 장르를 막론하고 모더니즘의 보편적 특징은 새로움이다. 다른 장르와 마찬가지로 모던 건축과 모던 디자인 역시도 역사주의와 결별하고 완전히 새로운 것을 발표해서 사람들을 당혹하게 했다. 문학이나 미술, 음악은 그것을 감상하려면 특정한 공간으로 들어가 집중적으로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따라서 그것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느낄 수 없다. 제임스 조이스가 아무리 낯선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소설을 썼다고 해도 그것을 읽지 않는 한 그 새로움을 체험할 수 없다. 피카소의 입체주의 그림이나 쇤베르크의 무조음악도 보거나 듣지 않으면 현대인의 삶과 별로 관계가 없다. 그러니 문학과 미술과 음악은 그 새로움이 피부에 와닿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실제로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이 모더니즘 예술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채 죽는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모더니즘 예술은 태어난 지 벌써 100년이 지났지만 대중에게는 여전히 난해하다. 내가 유명한 모더니즘 소설인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을 읽을 때 이게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두 번째 읽을 때야 비로소 그 형식에 조금 적응했지만, 그렇다고 쉽게 술술 읽지는 못했다. 소설의 형식이 너무 독특하고 파격적이어서 그러한 모더니즘 기법은 좀처럼 널리 퍼지지 못하는 것 같다. 미술 분야의 모더니즘은 조금 더 대중화되는 길을 걸었지만, 이 역시 공부하지 않으면 어떻게 감상해야 할지 난감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건축과 제품은 주변에 널려 있으니 눈을 감지 않는 한 피할 도리가 없다. 좋아하든 싫어하든 때로는 그런 모던 건물의 내부로 들어가 그 공간을 강제적으로 체험 당하지 않을 수 없다. 제품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모던한 가구를 싫어하더라도, 공공장소에서 모던한 의자에 앉는 일이 발생하지 않을 경우의 수는 무척 낮다. 아니 불가능에 가깝다. 건축과 제품의 모더니즘은 그것을 회피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 양식에 익숙해진다. 익숙해지면 난해하거나 혐오스러운 것이 될 수 없다. 21세기에 커튼월 건물을 보며 “저 유리로 반짝이는 건물이 정말 싫어”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호불호의 대상마저 되지 않을 정도로 모던 건축과 제품은 일상이 된 것이다. 하지만 한때 모더니즘 디자인은 그것을 처음 발견한 유럽인들에게 혐오의 대상이었다. 그들은 모더니즘을 일종의 문화반란, 문화모독으로 받아들였다. 모던한 건물에 손가락질을 하고 돌을 던졌다. 그러나 아무리 싫은 대상이라도 자꾸 보면 친숙해지니 그것을 반기지 않았던 사람도 가랑비에 옷 젖듯이 그것에 익숙해졌다. 이것이 모더니즘 문학이나 모더니즘 미술과 다른 모더니즘 디자인의 유리함이다.  

모던 디자인이 대중이 수용할 수 있는 보편적 미학이 된 더 근본적인 원인은 모던 디자인이 궁극적으로 순수형태를 추구했다는 데 있다. 즉 원, 삼각형, 사각형 같은 기하학의 가장 근본 형태로 조형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바우하우스가 발표한 조명과 주전자, 가구들이 그렇다.<사진 1, 2> 1950년대 보수적인 미국에 모더니즘의 전파를 주도한 뉴욕 현대미술관은 굿 디자인 전시회를 개최하면서 굿 디자인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사진 3> 그중 하나가 절제된 순수형태로 제품을 디자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던 디자인은 흔히 기능주의를 특징으로 하고, 그 점에서 역사주의와 구별된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것은 절반쯤만 맞는 말이다. 어떤 경우 역사주의 가구가 모던 가구보다 더 기능적이다. 모던 가구가 더 기능적인 부분은 생산효율성뿐이다. 그러니 기능주의는 모더니즘 디자인의 부차적인 문제다. 

<사진 1> 바우하우스 학생 빌헬름 바겐펠트가 디자 인한 조명. 기하학의 순수 형태로 디자인했다.
<사진 2> 바우하우스 학생 마리안느 브란트가 디자인한 주전자. 순수 형태가 지나쳐서 기 능적인 문제가 있다
<사진 3> 뉴욕 현대미술관의 <굿 디자인> 전시회, 1951-1952


최근 『엔드 오브 타임』이라는 물리학 대중서를 보면서 그 점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 이 책의 두 번째 장에서는 엔트로피 법칙에 대해서 말한다. 엔트로피 법칙은 경우의 수로 정의된다. 경우의 수가 낮으면 엔트로피가 낮은 것이고, 경우의 수가 많으면 엔트로피가 높은 것이다. 책의 저자 브라이언 그린은 분자가 공기 중에 어떻게 배열되는가 하는 경우의 수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내가 숨 쉬고 있는 방에서 산소 분자들이 골고루 퍼져 있는 것은 엔트로피가 높은 상태다. 산소 분자들이 어떤 특정한 곳에 모여 있을 가능성은 대단히 낮다.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나는 숨을 쉬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그렇게 분자가 아주 유별나게 배열될 확률은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의 비율로 경우의 수가 낮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엔트로피가 어마어마하게 낮아서 그렇게 죽을 일이 없다. 

브라이언 그린은 이를 좀 더 쉽게 설명하기 위해 동전 던지기를 예로 든다. 동전 100개를 던졌을 때 모두 앞면이 나오거나 모두 뒷면이 나올 확률은 대단히 낮다. 그런 상태가 엔트로피가 낮은 것이다. 앞면이 50개 안팎이 나오고 뒷면 역시 50개 안팎이 나오는 경우의 수는 굉장히 높다. 그런 상태가 엔트로피가 높은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흔히 엔트로피 법칙은 ‘무질서도’라고 비유한다. 질서가 잡힌 상태는 나올 경우의 수가 낮으므로 엔트로피가 낮고, 무질서한 상태는 보편적인 상태이므로 엔트로피가 높다. 엔트로피가 낮은 상태, 즉 질서가 잡히도록 만들려면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한다. 아름다움을 질서가 잡힌 상태로 본다면, 질서는 엔트로피가 낮은 것이므로 엄청나게 노력하지 않으면 아름다움에 도달할 수 없다.  

이것을 조형의 상태로 옮겨보자. 자연에서 기하학의 순수 형태인 원, 삼각형, 사각형으로 이루어진 대상을 찾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만약 그런 기하학적 형태의 사물을 찾으면 사람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생겨날 경우의 수, 즉 엔트로피가 매우 낮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람들은 그렇게 저절로 어떤 질서 있는 형태가 이루어지면, 그 대상을 버리지 않고 간직한다. 보석이 이에 해당할 것이다. 표면이 매끄럽고 모난 데가 없이 동글동글한 돌도 좋아한다. 거기에서 어떤 미적 쾌감을 느낀다. 이는 거의 본능에 가깝다. 나는 우리 아들이 만 두 살 조금 넘었을 때 정원에서 발견한 반짝이는 하얀 돌을 주우면 ‘예쁜 돌’이라며 가져가고 싶어 했던 모습을 기억한다. 문명 세계의 미적 규범을 배우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였는데도 말이다. 그러니 그 아이의 판단은 학습된 것이 아니라 타고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들조차 엔트로피 법칙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 작용에 대해서는 이미 타고난 감각이 있는 것이다. 
또 하나 예를 들어보자.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는 원시 인류의 미적 체험에 대한 내용이 잠깐 나온다. 영화 속 인류는 언어조차 갖고 있지 않을 정도로 원시적이다. 외계인이 그들을 가르칠 목적으로 어떤 물질을 보낸다. 그 물질은 마치 미스 반 데어 로에가 디자인한 시그램 빌딩처럼 대단히 매끄러운 직육면체의 물질이다. 그 물질을 본 원시 인류는 그것에 눈을 떼지 못한 채 다가간다.<사진 4, 5> 그들은 그것을 두려워하기도 하고 강렬한 호기심도 갖는다. 이것이 바로 경이로움의 감정 상태다. 그들은 왜 그런 비석 같은 직육면체의 물질에서 극도의 경이로움을 느꼈을까? 그런 형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고, 그런 물질의 존재란 엔트로피가 어마어마하게 낮기 때문이다. 비록 영화의 한 장면이지만 만약 원시 인류에게 그런 일이 진짜로 발생했다면, 충분히 그렇게 반응을 할 것이라고 상식적으로 예측할 수 있다. 

<사진 4> 미스 반 데어 로에가 디자인한 시그램 빌딩은 순수한 직육면체다.
<사진 5> 1968년작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원시 인류가 기하학적 순수 형태의 돌 형상을 보고 놀라워하고 있다. 이 돌은 10년 전에 완공된 시그램 빌딩을 닮았다.
<사진 6> 뉴욕에서 두 번째로 완공된 유리 커튼월 빌딩인 레버하우스, 1952년


실제로 그런 일이 1950년대 뉴욕에서 벌어졌다. 1952년에 유리 커튼월 건물인 레버하우스가 완공되었다.<사진 6> 뉴요커들은 이 모던 건물을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고 한다. 보행자와 택시 운전자들도 이 건물 근처에 오면 속도를 줄이고 올려다보았다. 마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원시 인류가 순수한 직육면체 물질을 경이로워하듯이 말이다. 뉴욕에는 이미 수십 층이 넘는 마천루로 가득하니 21층밖에 되지 않은 레버하우스의 높이에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은 두 가지에서 놀랐다. 하나는 순수한 기하학의 형태라는 점, 또 하나는 표면이 매끄럽다는 점이다. 재료가 유리인 것도 한몫 했겠지만, 그것보다 본질적인 것은 단차나 장식이 없는 매끄러운 표면이다. 국제주의 양식이 나타나기 전 뉴욕의 마천루는 대부분 단차가 있거나 역사주의 양식으로 건물의 표면을 장식해왔다. 그런 건물과 1950년대 완공된 뉴욕의 대표적인 유리 커튼월 건물이자 국제주의 양식을 세상에 퍼뜨린 주역인 레버하우스, 시그램 빌딩, UN빌딩은 모두 극도로 낮은 엔트로피의 조형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 역사주의 건물이라고 해서 엔트로피가 높은 것은 아니다. 그리스 신전에서 시작된 고전주의 건축과 중세에 시작된 고딕 건축 모두 서양 역사주의 건축의 양대 축으로 대단히 질서정연하고 통일된 조형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엔트로피가 낮다. 하지만 순수형태로 건설된 모더니즘 양식과 비교하면 역시 엔트로피가 높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모더니즘의 조형은 단순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러한 질서를 구축하는 데 더욱 많은 에너지가 들어갔으리라고 예측할 수 있다. 오늘날 매끈한 스마트폰을 보면 이것을 구현하는 데 얼마나 큰 에너지가 들어갔는지 예측할 수 있다. 사람들은 그 순수한 형태와 매끈한 표면에서 낮은 엔트로피를 느끼며, 동시에 그 기술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반면에 모더니즘 이전의 장식적이고 복잡한 형태의 가구들도 분명히 장인의 놀라운 기술적 산물이지만, 그것이 신의 솜씨라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즉 장인의 높은 기술로 만든 가구는 도달할 수 있는 경우의 수에 해당한다. 하지만 스티브 잡스가 요구한 것처럼 이음매가 완벽한 현대 기술의 산물들은 사람 손의 솜씨를 넘어선 것으로 여겨진다. 미스 반 데어 로에가 “신은 디테일에 있다”고 했을 때 그 디테일은 복잡한 장식이 아니라 단순한 형태에서 확인할 수 있는 완벽한 마감과 질서다. 표면의 복잡함이 사라지면 사람은 그 대상의 덩어리와 부피, 비례, 조합상태, 마감상태에 더욱 신경이 집중된다. 단순한 형태에서 결함이 훨씬 더 잘 드러난다. 그렇기에 순수한 형태의 조형에서 이루어진 통일성과 균형감, 질서는 고전건축이 이룩한 통일성과 균형감, 질서보다 더 도달하기 힘들다. 다시 말해 엔트로피가 더욱 낮다. 
결론을 말하자면 모더니즘 건축과 제품은 기능주의가 아니라 엔트로피가 낮은 아름다움에서 승부를 걸었다. 엔트로피가 낮은 상태, 그러한 조형과 질서란 난해한 소설이나 미술, 음악과 달리 사람들이 쉽게 느끼고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소설과 미술, 음악은 새로운 것을 감상하려면 사전 지식, 즉 문화적 학습을 필요로 한다. 반면에 순수 형태를 향한 선호는 학습이 필요 없다. 이미 사람의 마음속에 주어진 것이다. 그 점이 모던 디자인의 대중화를 이끈 핵심적 원인이다. 

 

<사진 7> 아이폰 첫 번째 모델. 순수한 형태, 깨끗한 이음매, 매끈한 표면을 특징으로 하는 이런 조명은 엔트로피가 매우 낮은 상태의 조형이다.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 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 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 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kshin201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