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는 마을일제 강제징용의 마을, 일광 광산마을 2022.6

2023. 2. 20. 09:12아티클 | Article/포토에세이 | Photo Essay

Disappearing village _ Ilgwang Mining Village, 
a village of forced labor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부산광역시 기장군 일광읍 달음길 44(원리 663-7번지) 일원, 달음산 북동쪽 산기슭에 있는 광산(鑛山)마을은 자원 약탈을 위해 1930년 3월 11일부터 일본의 전범 기업인 스미토모 광업 주식회사에서 닛코광산(일광광산)을 개발하면서 형성된 광산촌이다. 광산의 규모는 조선의 5대 구리광산이었으며 채산성도 우수한 곳이었다. 일제 강점기 말인 1944년 4월 1일 이후에는 자원 약탈의 목적으로 인력을 강제로 징용하여 매일 주간과 야간 2교대로 쉬는 날 없이 일을 시키는 지옥의 일터로도 유명했었다. 해방 후에도 채광과 휴광을 거듭하기도 하고 구리 대신 중석(텅스텐)을 채광할 때와 1980년대 중화학 공업의 발달로 구리 수요가 급증할 때는 규모도 커지고 광산과 마을이 활성화되었지만, 1994년 폐광되면서 광산촌의 기능은 상실되었다. 당시 마을은 광산 입구에서 동쪽으로 흐르던 실개천에 다리를 설치하고 개천 가장자리에 석축을 쌓아 집터를 만들었다/ 마을 부지는 계단식으로 형성하여 4개 단지로 구성되어 있고, 지금도 그 당시 쌓은 일본식 모서리가 각진 석축과 진입 계단들을 볼 수 있다. 초기에 형성된 20여 채의 가옥은 이후 90여 채까지 지어졌으나, 지금은 57여 채가 남아있고 실제 거주 가옥은 45여 채다. 가옥은 그동안 많이 수리되고 재생 사업으로 지붕도 바뀌었지만 지금도 마을의 건물에서 일본식 적산가옥의 특징인 함석판 지붕과 눈썹 처마, 목재 비늘판 외벽 등을 볼 수 있고 일본식 마름모 모양의 석축들도 그대로 남아있어 일제 강점기 역사적 현장으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2020년 새뜰마을사업 대상지로 선정되어 재생 사업을 시행 중이지만 주민 초고령화로 인한 마을의 쇠퇴는 불가피하며, 마을은 역사적 의미의 유적지로 남겨질 것이다.

 

사택(舍宅)과 숙소(宿所)
마을 부지는 계단식으로 형성, 4개 단지로 구성하여 맨 위쪽은 일본인 숙소, 두 번째는 일본인 간부 사택, 나머지는 조선인 숙소를 만들었다. 일본인 간부급 사택과 조선인 숙소 등이 아직도 일본식 적산가옥의 건축양식으로 그대로 남아있다. 일본인 간부 사택은 넓은 마당을 가진 독립체로 형성되어 있고 숙소는 일자형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기본단위는 23제곱미터로 이곳에 일본인 2가구, 조선인 5가구가 모여 살았다. 1가구를 4명으로 산정해도, 20명이 이 좁은 숙소에 살았다는 것이다. 아직 남아있는 공동 화장실과 공동 우물, 빨래터, 집 앞 외부 화구 등에서 그 당시의 열악한 주거환경을 짐작할 수 있다.

적산가옥(敵産家屋)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스미토모광업주식회사 사무실과 간부 사택으로, 일본식 걸침기와의 지붕과 입구 포치, 창문 위 눈썹지붕의 모습은 전형적인 그 당시의 일본식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가옥 옆에는 그 당시 심은 은행나무가 역사의 아픔을 지키고 서 있다.

더덕더덕 붙어있는 다양한 자재의 낡은 외벽과 문짝들. 지금은 재생 사업으로 많은 가옥이 기와로 덮여 있지만, 오랜 세월에 때 묻은 슬레이트 지붕들은 오랜 세월 덧입혀진 시간의 아픈 흔적으로 애잔함이 묻어나온다.

지금은 창고로 사용되고 있는, 마을의 가장 뒤편에 일렬로 설치했었던 공동 화장실의 배치가 독특하다.

아직도 주민들이 사용하고 있는 공동 우물.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아왔던 모습과 달리 형태가 독특하다. 마을에는 원래 두 개의 우물이 있었으나, 수도시설이 설치된 후 공용 빨래터로 사용되었던 한 곳은 최근에 해체되었다. 

노동에 지친 징용자들이 사는 좁은 숙소에는 별도의 조리 공간은 없었다.
숙소마다 집 앞에 설치하여 사용했던 아궁이의 화구(火口)와 장독대가 이들의 삶의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나의 노래
 - 오장환 

나의 노래가 끝나는 날은
내 가슴에 아름다운 꽃이 피리라.

새로운 묘에는
옛 흙이 향그러

단 한 번
나는 울지도 않았다.

새야 새 중에도 종다리야
화살같이 날아가거라

나의 슬픔은
오직 님을 향하여

나의 과녁은
오직 님을 향하여

단 한 번
기꺼운 적도 없었더란다.

슬피 바래는 마음만이
그를 좇아
내 노래는 벗과 함께 느끼었노라.

나의 노래가 끝나는 날은
내 무덤에 아름다운 꽃이 피리라.

 

 

글·사진. 정원규 Jeong, Wonkyu 창대 건축사사무소 · 사진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