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感傷) 2018.05

2022. 12. 1. 11:03아티클 | Article/에세이 | Essay

감상(感傷)

가끔 아름다운 건축물을 만나게 되면, 나는 마치 잘 빚은 도자기나 조각상 앞에 마주서있는 것 같은 착각에 쉽게 빠져들곤 한다. 그만큼형상(形象으로서의 건축은 조각과 유사한 측면이 다분한 것 같다. 물론 조각과 건축은 분명 서로 다른 장르다. 우선 조각은 대상의 표면에만 집중할 뿐, 그 내면의 세계까지 주목하지는 않는다. 게다가 조각은 심미안(審美眼)의 대상이지, 건축처럼 우리들의 일상생활을 제 품으로 끌어들일 줄도 모른다.

오백여 년이 훨씬 더 지난 지금도 여전히 생동감 넘치는 인간육체의 아름다움과 유효적절한 비례미를 자랑하고 있는 미켈란젤로의다비드(David) 만 봐도 그렇다. 조각상 내부에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지녀야 할 오장육부 중 그 어느 것 하나도 구비해놓지 않았다. 실제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 르네상스시대의 천재적 예술가들은 보다 더 사실적이고 생동감 있는 작품을 창작하기 위하여, 야밤에 공동묘지의 무덤을 몰래 파헤쳐가며 해부학을 공부하고 골상(骨相)을 짜 맞추는 실습까지 감내했다고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대상의 내부세계까지 조각해내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건축은, 저 먼 신석기시대의움집에서부터, 맹수와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내부공간의 확보를 우선 전제로 태동하였다. 그런 탓에 건축에서의 외부형태는, 내부공간과의 유기적인 결합에 의하여 자연적으로 도출되는 결과물로 자주 인식되곤 한다. 도자기나 조각처럼 외부형태에만 관심을 두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과거 우리 건축이 오랜 세월동안피난처로서의 역할을 무사히 마치고, 게다가 근현대사회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요구되던위생공간으로서의 임무마저 적절하게 수행해낸 지금, 문화예술적인 측면에서 건축의 안과 밖을 구체적으로 따지고 들면 다소 좀 애매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대부분의 경우, 좋은 건축일수록 완충공간과 매개공간 등의 배치로 인하여 이제안팎의 구분이 다소 모호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쨌든 조각이나 건축의 영원한 주제라고 할 수 있는인간역시 마찬가지다. 흔히 사람은 겉과 속이 다르다고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 인간도 안팎이 확실히 구분되는 존재는 아니었다. 생명이 유지되고 있는 바로 지금 이 순간에야 본능적으로 항문의 괄약근을 바짝 쪼이거나 입을 굳게 다물 수 있어서 그렇지, 마침내 때가 되어 어느 순간 혼줄을 놓게 되면, 누구나 입을 벌리고 괄약근의 힘줄을 풀어놓게 된다. 그러면 자연스레 입에서 항문까지 곧장 길이 뚫리게 되고, 마치뫼비우스의 띠처럼 순식간에 안팎의 구분이 사라지면서, 생물학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연에서의 안과 밖은, 더구나 건축에서의 내부와 외부는 분명 서로 다른 영역을 지칭하지만, 때로는 통합되어 하나의 완결된 공간을 의미하곤 하였다.

이는 동양철학에서 곧잘 거론되곤 하는대대(對待)’ 관계로 설명될 수도 있다. 서로 대척점으로 나뉘어있는 것 같지만, 상대가 있음으로서 내가 있고, 또 나를 통하여 상대가 더 두드러지게 된다는 것이다. 흔히 음양(陰陽)이 그 대표적인 사례지만 사실 하늘과 땅, 여자와 남자 그리고 상하(上下), 좌우(左右), 고금(古今), 유무(有無)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어쩌면 우리 인생의 프로그램 자체가 바로 이대대(對待)’하는 네트워크로 설정되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요즘 현상설계 당선작들로 대표되는 건축에서는, 우선 가시적인 외부형태만 요란스레 강조될 뿐 내부공간은 부차적으로 취급되고 있는 것 같다. 외부형태 역시 스스로 창출한 게 아니라, 그저 서로 엇비슷한 이미지를 차용하여 나열해놓았다는 의구심마저 든다. 아니, 때로는 건축물 자체를 아예 처음부터 하나의 조각품으로 취급하고 있는 것 같아, 도심 대로변에 도열된 굵직굵직한 건축물 앞을 지날 때마다 치 솟아오르는 감상(感傷)을 달랠 길 없다.

 

. 최상철 Choi Sangcheol · KIRA  건축사사무소 연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