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2. 23. 09:08ㆍ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A living and Brenthing Tourism for Architecture ④
Formotional Process of Modern town &
Problems on Yesan County development
1. 고려와 조선시대 행정체계상 예산의 위치
고려시대의 치도는 한마디로 역로가 대표적인 육상교통통신시설이었다. 역로의 등급은 대로·중로·소로로 나누고 역정을 배치하였으며, 역은 6등급으로 구분하여 일과에서 5과로 정하고, 일과는 개경에서 서경(평양) 사이였으며 이과는 서경에서 의주 사이였다고 한다. 994~995년 경 역로와 역수를 간추려보면 평구도의 경우 30역, 금교도는 16역, 여교도 12역, 충청주도 34역 등으로 고려의 역제는 22역 역도로 구분되며, 총 525역이란 방대한 역로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그중에서 예산은 충청주도의 일부로서 수원, 해미, 예산, 부여, 문의를 연결하는 22역도 중에 하나의 역으로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고려의 길은 사람이 다니기 어려울 정도로 도로의 기능을 갖추지 못했으며, 실례로 1178년(명종 8년) 3월에 중방이 소하기를 “길 곁에 옥택, 난원하여 비록 척수이라도 관로(시가지도로인지 지방도로인지 알 수 없음)를 침범한 곳이 있으면 모두 복구토록 명령하소서” 한 것을 보면 도로획지를 무질서하게 점유한 사례가 많았던 것 같다. 그러나 예산의 경우, 충남주도(14번)의 일부였다는 점과 고려조에 상업로로서 역로가 이용되었다는 점에서 예산이 상업적 거점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고 판단된다.
그런데 이 역관제도는 고려시대에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삼국시대에는 신라 소지왕 9년(AD488)에 우역을 세우고 관로를 닦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이미 7세기 이전부터 전국적인 교통 통신 체계가 수립되어 있었다고 한다.
왜란과 호란 이후 기능을 잃어가던 역은 19세기 말에 와서 통신, 교통의 일대혁신과 함께 완전히 기능을 상실하였다. 1882년 우정사 개설, 1884년 우정국 개설, 1885년 전신시설개통 등의 통신방법과 1889년의 경인철도개통을 선두로 각 노선의 철도개통은 역의 고유기능을 불필요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역제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1) 고려와 조선후기 도시의 예산의 지정학적 위치 고려시대의 역관제도지도
(2) 고려와 조선후기 도시의 예산의 지정학적 위치 조선시대의 근대적 행정체계
현재 시직제(市職制), 읍면제(邑面制)의 뿌리는 갑오경장(甲午更張)과 함께 1898년 전국 팔도제(八倒制)를 폐지하고 23부(府)로 개편되면서 명칭을 군(郡)으로 동일하게 하고 조선시대를 통해 유지되어오던 부, 대도호부(大都護府), 목(牧), 군, 현(縣)의 체계가 개편되었다. 이때 새로 지정된 23부 이외의 부, 목, 군, 현들은 모두 군으로 개칭되었다.
(3) 조선시대 지방행정단위와 그에 따른 등급
조선말 충청도는 홍주부와 공주부, 충주부 3개로 홍주부는 태안, 서산, 당진, 해미, 덕산,면천, 신창, 온양, 청양, 대흥, 정산, 부여, 입천, 한산, 홍주 등으로 공주부는 직산, 천안, 목천, 전의, 연기, 공주, 진정, 연산, 진산, 명동, 황간으로 이때 예산은 현에서 군으로 승계된다.
조선시대 지방도시는 수도서울을 제외하고는 군현의 소재지는 소읍으로 최소한 3,000명에서 5,000명의 집단취락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바 참고로 ‘대전회통’에 기록된 부, 대도호부, 목, 군, 현의 소재는 다음과 같이 나눈다.
1896년에 23부제가 폐지되고 현재와 같은 13도제가 만들어지면서 이후에 예산군면으로 개칭해 이어지다가 1914년 일인들에 의해 군면으로 통폐합되었다. 이때 변의 통폐합은 약 4리 호수 800을 최저기준으로 미달하는 ‘면’은 합병조정하였다.(내무부 앞의책39쪽)
1917년에 연중에 비교적 인구가 많고 상공업이 발달되어 도시적인 면모를 갖춘 곳을 ‘지정면’으로 지정하였으며 예산지방은 1930년 12월 총독부 제령 제 11호로 공포된 읍면제가 시행되면서 지정면이 ‘읍’으로 개칭되었다.
2. 조선후기 도시의 시가지 형태(충청도)
예산시가지 결정요인으로서 입지형태
예산과 같은 도시들은 대부분 조선시대 이전에 선조들이 자리 잡은 고을(邑)과 마을(村)로부터 시작된 것들이다. 따라서 우리의 도시의 입지는 현재의 우리자신이 아닌 선조들이 선택한 결과이며 그 선택은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공간이 구성된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대지가 자연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면, 입지란 인간의 의지와 사고가 반영되어 선택된 것이라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예산은 내포지방에 속한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에도 전화를 입지 않고 평온무사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사람살기에 가장 적당하여 옛날부터 가거지 도는 복지라고 일컬어져 예부터 많은 부자와 여러 사대부가 이지방에 대를 이어 세거(世居)하였다.
실학자 이중환(1672-1756)이 저술한 택리지에 의하면 “내충천도측위상”이라는 문구가 있다.
(1) 조선시대의 지도(예산)
(2) 지도상에 나타난 치도사업의 발전
(3) 지도상에 나타난 치도사업의 발전
도로 등급을 9등급으로 나누어 도로를 건설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어로(御路)와 한성부터 전국에 이르는 육대로(六大路), 팔도 각읍에서 사계(四界)에 이르는 거리, 그리고 사연로(四沿路), 대중소(大中小)의 역로(驛路), 파발로(擺撥路), 보발로(步撥路), 봉로(烽路), 해로(海路), 외국과의 해로, 조석(潮汐), 전국 장시의 개시일 등 각종 도로 즉 육로와 해로, 정기시장이 기록돼 있다.
3. 예산을 경유하는 도로
한성에서 충청수영, 460里
예산의 경우, 고려시대에는 역으로서 지역을 이동하거나 정보를 전달하는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와서 역로제도가 소극적으로 이용되고 상업활동이 비하되면서, 조선 초기까지 도로체계자체도 없었으며 이동에 큰 불편을 겪었다. 그러나, 임락 이후 도로체제를 정비하고 실학자들이 치도의 중요성을 언급하면서, 도로를 따라서 상업이 발달하게 된다. 1700년대까지만 해도 예산은 덕산, 대흥보다도 낮은 현의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1895년에 군으로 승격되고, 1896년에 군면으로 개칭되었다. 1914년에는 예산군면으로 대흥과 덕산을 흡수하게 된다. 이는 예산지역이 위치적으로 중요하다는 면을 내포하기도 한다. 하지만, 더욱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철도가 개설되기 이전부터 대한제국말에 상업적 거점으로 큰 역할을 했으며, 전업상인들을 중심으로 상권(시장)이 형성되다보니 사람들이 점차 유입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1) 도로망과 상업 네트워크
고려시대의 도로는 역로(역로, 역관) 가 대표적인 육상교통이자 통신방식이었다. 고려의 역제는 22역도로 구분되며, 총 525역이란 방대한 역로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예산의 경우도 충청주도를 연결하는 34개소 안에 포함되어 있었으며, 북으로는 개성, 서울, 수원 등을 연결하고 서로는 해미, 서산, 남으로는 부여, 전주 등을 연결하고 있었다. 또한, 조선시대의 도로는 초기에는 폐쇄적이고 방어적인 형태였다. 임진왜란 이후 교통수요가 증가하게 되면서, 도로가 개설되기 시작한다. 예산의 경우, 1710년에 윤두서(1668~1715)에 의해 제작된 동국여지도를 보면, 대흥, 예산, 당진을 통해서 내포지역에서 해안지역으로 수로나 도로를 통해 연결되고 있는 교통체계를 볼 수 있다.
(2) 도로망과 상업네트워크
대한제국 말, 장지연(1864~1920)에 의해서 발행된 대한신지지(지부지도, 1908)를 보면, 신 원(예산)은 동과 북으로는 한양과 평택을 연결하고 있으며, 서로는 태안, 당진과 홍성, 남으로는 청양, 전주로 이어지는 새로운 도로망이 개설된 것을 볼 수 있다.
<시대별 도로 체계의 변화>
4. 시가지 결정 요인으로서 입지형태
조선시대에 마을의 입지는 풍수지리설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이 우주 또는 자연과 관계가 있는 생의 충족한 곳을 찾았으며, 넓은 의미로 볼 때 정주지를 선택하고, 정착하여 살아가기 위한 장소로 토지를 찾았다. 토지가 가지고 있는 기(氣)라는 것은 풍수지리의 본질이며, 기는 바람이 있는 곳을 찾아 마을을 형성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예산의 경우, 조정간인 향천사뒷산(광덕산)으로부터 뻗어 나온 금오산이 주산이 되어 북쪽을 받치고 동서남북의 산이 위요내부를 에워싼 분지로 동쪽에 있는 향천사에서 흘러나오는 내수인 개천이 흘러 외곽을 흐르는 외수인 무한천에 합류하는 형태가 한양의 풍수와 흡사하다.
5. 1910~30년대 도시공간의 변화
행정체계의 변화와 인구증가
예산은 1700년대까지만 해도 덕산, 대흥보다도 낮은 현의 위치에 있었으나 1895년에 군으로 승격, 1896년에 군면으로 개칭되었으며, 1914년(大正 3년)에 예산군면(禮山郡面), 덕산군면(德山郡面), 대흥군면(大興郡面) 등이 모두 예산군면으로 통합되었다.
이를 계기로 전업상인들 중심으로 상권(시장)이 형성되면서 사람들이 점차 유입되기 시작했다. 그 상인들 가운데는 서울과 인천의 객주들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덕산과 대흥의 부호들이 예산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예산지역은 사방으로 8리요 면적은 35,121방리이며 1914년 인구는 81,458명 중에 일본인이 465명, 중국인이 220여 명이었다. 1920년에는 80,793명(14,835세대) 중에 일본인이 408명(124세대), 중국인이 213명(42세대)이었다.
(1) 행정체계의 변화
(2) 행정체계의 변화
예산지역은 사방으로 8리요 면적은 35,121방리이며 인구는 81,458명중에 일본인이 465인, 중국인이 220여 명이었다. 예산은 충남에서 물산매매가 성행하고, 경남철도가 통과해서 교통이 편리하였으며, 아산군 선장포와 홍성군 광천포가 국호가 되는 곡물역이 있었다. 따라서 일반산업은 호기를 띄고 발전되었으며, 외부상권의 침범이 적어 경제적으로 활약이 컸으며, 우리나라의 중심으로 되었다.
다음 도면들은 1914년 이전 예산군면, 덕산군면, 대흥군면 등의 경계영역을 보여주며, 통합된 이후의 영역은 지금의 영역과 동일함을 알 수 있다.
6. 시가지형성과 입지형성, 예산의 시대별 도시변화
경남철도는 1922년에는 천안에서 신례원까지 개통되며 점차적으로 1924~1925년에는 광천과 보령까지, 1931년에는 군산까지 완전개통된다. 예산은 철도개통이후 상대적으로 거주인구가 오히려 증가했다. 통계로부터 1920년에서 1935년까지 예산군의 인구는 약 2만8,000명 정도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고 일본인도 360명 정도 증가했다.
이것은 경남철도에서 당초 계획했던 철도역사위치가 구시가지와 많이 떨어져 있어 한인지식인과 지주들이 예산읍내와 최대한 가까운거리에 건설하도록 청원했고, 그로 인해서 구도시 상권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심지어, 한인들은 기성회(회장 성낙헌)를 조직하고 1만 평(약 33.057제곱미터)의 정거장 터를 경남철도회사 측에 기부하여 이를 성사시켰다.
예산역이 건설됨에 따라 인구증가와 산업발달로 새로운 시가지 계획이 이루어진다. 예산의 서쪽편 도로계획은 상권이 분리될 것을 염려한 시민들이 반대하였으나 성낙헌 씨의 기부로 구시가지와 가까운 남쪽 방향으로 이동하여 예산역이 건설됨에 따라 이것은 시대조류이며, 주민들이 불편하기 때문에 도로가 설치될 필요가 있다는 여론이 대두되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이시기에 공립농업학교의 이전과 보통학교의 신축과 급설전화의 개통 등이 예정되고 있어서 도로와 철도의 개설은 예산을 근대도시로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
국토지리정보원 http://www.ngii.go.kr
운송 및 통신수단의 변화가 근대도시로의 발전
(1) 철도부설이전과 이후의 신시가지와 구시가지 비교
1920년대 지적상의 변화는 사설철도인 경남철도가 1922년 6월 예산까지 개통으로 예산 구시가지와 예산역과의 도로신설로 동서로 가로지르는 새로운 축이 형성되면서, 시가는 서쪽방향으로 서서히 확산되며 도시변화의 분기점이 되었다. 1922년 4월 14일자 동아일보에서는 이번에 발전에 기회로 삼아 공립농업학교 이전과 보통학교 신축, 급설전화개통, 신구시가지를 연결하는 도로의 신설 등 여러 가지 새로운 사업이 진행 중이라고 언급되고 있다. 이는 철도부설과 신시가지 건설, 물류의 집산지(경제의 중심) 등으로 인해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공공시설 즉, 학교, 전화국, 우체국, 은행 등이 들어서고 있는 상황을 설명해주는 것이다. 1927년 일제에 의해 시가지 구획정리가 된 것을 보면 도시화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2) 필지증가와 구도심의 구획정리
1911년 일본인이 많이 살았었던 남서구역을 비교해보면, 먼저 1930년 지적도의 C와 같이 새롭게 도로가 건설되거나 기존 획지가 세장형 형태로 구획 정리가 되었다. 이러한 슈퍼블록은 1930년대 이후에 발생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들 필지는 약 5×15미터에서 크게는 약 10×30미터 정도였다. A, B, C에서 보인 약 250×150미터 크기를 가진 큰블록(a1)은 호서은행과 본정통사거리 남쪽을 따라 다시 서쪽으로 양조장을 지나고, 북쪽으로는 제일(감리)교회를 지나 터미널과 만나고 있다. 이들 가로폭은 약 8~10미터였다. 특히 중심지인 본정통과 호서은행, 예산극장을 가로지르는 본정통 사거리를 중심으로 세장형 필지가 두드러지게 증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일본의 전통주거인 마찌야(町屋) 가옥으로, 도시공간이 재구성(재생산)되었음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주거와 상업용도로 사용된 마찌야(町屋)는 옆집과 접하게 되기 때문에 창이 없으며, 좁은 전면폭을 최대한 이용하도록 건축된 일본 주거건축의 전형적인 형태였다.
7. 예산 발전에 대한 논의들(1930년대)
(1) 주요 인사들의 미래에 대한 토의
1931년에 동아일보에 의해서 주최된 주요도시 순회좌담에서 9명의 예산 주요인사들의 예산 미래상에 대한 난상토론이 있었다. 이에 관련된 주요의제는 상공업발정책, 교육, 공희당, 차가임대, 전기, 수조, 풍기위생, 농촌진흥책, 시가정리(도시개량), 교통, 물가조절, 충남도청, 관청의 업무 및 정책 등으로 구분될 수 있다.
주요도시 순회좌담회를 요약해 보면, 예산의 상업은 10년 전보다 많은 발전을 하였지만 상업잘전과 예산의 발전을 위해서 예산의 신·구시가지 중간에 시장의 이전이나 상공회사 등이 필요하다고 지적하며 이에 대한 긴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시가지는 가로등이 없어 불편했고, 경남철도 개통 시 예산읍에 기관건물이 새로 신축되었으며, 시가지도 정리하였다. 당시, 모든 공공시설은 역을 중심으로 배치될 필요가 있으며, 역이 들어서면서 역전으로 옮기지 못한 것에 대한 비판을 언급하기도 했다. 또한 읍과 역의 연장선에서 삼거리 남향에 외장을 세우고, 읍장을 그대로 두고, 한 달에 12장을 둘 것을 검토했으며, 예산에 하천정리 필요성과 특히 삼거리방면에 하천정리를 최우선으로 하는 지적도 나왔다.
(2) 교통 문제
교통 문제는 역과 읍 사이 교량손상을 지적하고, 지역발전상 문제로 삼았다. 시급한 것으로 대흥통로에 정류소에서 베룩부리까지 직통도로를 계획하고, 역에서 사원내부를 경과하며, 당진군 합덕면 신리(삼거리)로 직통하는 도로를 건설하고, 이에 대해 구양교를 신설하고, 이 도로는 삼거리와 연결하고자 했다.삼거리에서 합덕시장 지선으로 고덕면 대천으로 통하도록 하자는 것은 향후 도시의 미래를 내다본 신시가지의 확장을 고려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3) 수도 문제
수도 문제로 넓은 평야를 가진 예산에 예당수리조합설립과 조선총독부 방침으로 1931년대 몽리구역인 예산군, 당진군, 아산군 등 3개군의 광대한 평야를 농지정리 계획으로 댐공사 필요성을 제기했는데, 당국에서는 수년 전부터 설계해 오던 중 지주와 당국간에 마찰이 있는 듯 하나, 총독부에 저항하기로 했다. 대회사인 토지개량주식회사는 기본 측량까지 끝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해방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중단된 공사는 군사정권에 이르러 쌀증산대책으로 1960년대에 준공을 보게 된다.
(4) 교육 문제
이외에도 교육, 집회장소 문제를 거론했다. 교육 문제는 교육열이 높아서 보통학교에 입학지원자를 전부 수용할 수 없어 학급증설 필요성과 부녀자 교육도 거론했다. 유아교육을 맡은 신명 유치원 이외에 성공회의 유아교육신설에 기대를 하고 있으며, 학부형과 선생님 간의 유대와 친밀함이 참교육이라 생각하고, 학부모의 참여를 강조하였다.
(4) 공회당 문제
집회는 공회당이나 교회를 빌려 쓰기는 하지만, 100여 명 이상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집회장소가 없어 건설할 필요가 있다며 군민의 불편함을 다루고 있다.
(5) 풍기위생 문제
하수도 공동변소, 공동정호 등 인근도시와의 위생 문제를 비교하면서, 위생시설이 부족한 것으로 파악되어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갔다.
(6) 전기 문제
실생활에 필요한 전기 문제는 새로운 기계로 교체하고 요금을 낮출 것을 요구하였으며, 요금감하동맹 등을 조직하여 철저히 촉구했다.
(7) 농촌진흥책
소농과 증농의 몰락을 염려하여 농촌진흥책으로 부업권장의 필요성을 강조하였으며, 양돈, 양계 등 농민을 잘 지도하여야 좋은 성과를 얻을 수 있다고 보고 농민조합의 필요성과 농민보호를 강조했다.
(8) 물가조절 문제
예나 지금이나 중간상인, 중간매매가 성행했으며, 중간 마진을 피하는 방법으로 구매전매조합의 필요성을 느꼈다.
(9) 시가정리 하수도 문제 등
시가지에 가등이 없어 생기는 불편함과 당시에 역을 중심으로 하지 아니한 것이 실책임을 자인하면서 역과 읍을 연장하는 방법, 하수도 문제, 하천정리가 제일 필요성을 강조한다. 비가 오면 하천이 범람해 전, 답, 시가지는 바다가 되므로 삼거리 방면에 하천 정리를 건의하는 등 시가지 정리문제도 제시했다.
끝으로 도청 이전과 관청의 희망에 대해서는, 이전은 불필요하지만 도청의 이전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언급하면서, 대전보다는 천안쪽이 적지이며 도당국이 군민에게 강제로 배포한 기계는 도당국의 실책이라고 지적했다. 이와 같이 밤늦게 까지 장시간을 토론하면서 밤 11시 40분에 폐회하였다.
8. 예산읍 승격 제이 (번영회 촉진운동 맹열)
「예산」 충남 예산은 경남선의 중앙에 재하고 거주 호수 2천4백호 인구 일만이천을 포용하는, 모든 행정·교통·위생문화와 산업통신의 충남 서부에 으뜸가는 상업용도일뿐 아니라 앞으로는 수만 정보의 예산 합덕의 양평야 쌀의 곡창을 연결한 지방의 중심 도시이며 본 군내에는 사방에 대소 광산이 발굴되어 활발한 발전의 도정을 밟아 나날이 약진상을 보이게 되어 수년 전부터 군면 당국은 물론 예산 번영회 역원급 지방유지 제씨는 차에 통감한바 있어 예산면을 읍으로 하루 바삐 승격시키는데 대하여 도당국에 진정운동을 거듭하는 한편 면에서는 기본 자료를 수집하여 도당국에 제출하였는데, 도에서도 이러한 문제들을 절실히 느꼈음인지 지난 7월 10일부터 6일간 예정으로 도관계관 3인을 현재 예산면에 출장 보내서, 기초조사를 진행 중인데 금번 조사 여하에 따라 금년 10월부터는 여러 해 동안 숙제로 내려오던 읍제 실시가 시행되리라고 시민은 상당한 기대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식산은행지점설치 문제에 관하여는 식산본점에서는 우금 경남연선에 지점을 두지 못하여 유감으로 생각하는 차에 소화 9년 이래 지방유지들과 예산번영회과 협력하여 식산본점은 물론, 본부 도당국을 여러차례 력방운동을 하여 각 관계 당국에 상당한 인식을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식산은행본점에서는 경남연선중 예산이 모든 산물의 집산지이요, 넓은 곡작평야에 농산자금대 부의관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상업의 중심이기 때문에 설치하기를 희망할 뿐만 아니라 지점의 설치 예정지에 편입되었다고 하며 금후 총독부 당국의 한시바삐 결정이 필요하다. 이러한 두 가지 긴급문제로 지난 7월 12일 면사무소 계상 회의실에서 번영회를 개최하고 긴장하고 의의 있는 토의를 마치고 오후 7시에 무사 폐회하였다고 한다.
- 동아일보 1939년 7월 19일자 기사
9. 예산시장의 쇠퇴와 인구감소
1970년 전후로 해서 시장의 모습은 축소된 형태를 갖게 된다. 새마을 운동과 근대화과정 등 1970년대 이후 급격히 발전하는 공업화에 따라, 가로의 길에 점포가 늘어져 있던 패턴에서 자동차 증가, 가로폭 확장, 운송수단 발전으로 인해 물류집산지의 기능을 가진 중심도시보다는 각각의 도시들이 시장을 모두 설치하게 됐다. 이에 따라, 예산외 다른 지역으로 물류 및 사람들이 이동하며 유입이 소멸되었다는게 주요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1970년 이후 정부가 농업위주의 정책보다 중화학공업 등의 육성에 치중함에 따라 농업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감소되었고, 예산내의 시장들도 점차 쇠퇴하게 된다. 이 시점에 인구가 급속도로 감소하게 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또 다른 원인은 시장주변에 집중해있던 공공시설들이 교통이 편리해짐에 따라 다른 지역으로 분산되면서, 사람들의 유입도 상대적으로 줄었기 때문이다.
결론으로 내포지방 예산, 홍성 중간지점 충청남도 도청소재지 결정으로 인구 50만여 명에 이르기까지 30여 년 동안은 예산, 홍성, 삽교, 덕산으로의 인구 분산으로 인구증가에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참고문헌
충청남도 발전사(1932년 3월25일 호남일보사간)
일제시대 소읍도시형성과정에 관한 연구 김득수 석사학위 논문(2003년 8월)
글. 김득수 Kim, Deuksoo 종합건축사사무소 S.S.P.삼대
김득수 건축사·종합건축사사무소 S.S.P.삼대 대표
영등포구지역건축사회 회장(3회 연속), 서울특별시건축사회 회장 직무대행, 대한건축사협회 이사·감사 등을 역임하고, 대 한건축사협회 50년사 발간위원장을 지냈다. 서울 영등포구, 동작구 건축·민원조정 위원, 에너지관리공단 건축·도시·관광 단지 심의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예산읍 초대 명예읍장으로 위 촉(1997.02.15.~2006.12.03.)된 바 있다. 서울특별시 시장 표창 5회와 대통령 표창(제200398호)을 받았으며, ‘일제시대 소읍도시 형성과정에 관한 연구’, ‘일제강점기 근대도시의 도 시공간 변화 특성에 관한 연구’ 등의 논문을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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