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명분 2023.7

2023. 7. 21. 11:59아티클 | Article/디자인스토리 | Design Story

The justification of ‘form conforms to function’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이 유명한 건축/디자인계의 경구를 언제 처음 들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말을 처음 듣는 순간, ‘아, 이 말은 진리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문장은 직관적이다. 직관은 논리적 사유와 추리를 거치지 않고 대상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말을 듣고 곧바로 이해가 되었던 것이다. 그만큼 이 말은 디자인의 이치를 함축적이면서도 알기 쉽게 표현하고 있다. 어떻게 기능을 따르지 않는 형태가 있을 수 있을까? 국물을 안전하게 담을 수 있는 숟가락을 보라. 앉을 수 있는 의자를 보라, 적은 에너지로 잘 굴러가는 바퀴를 보라. 그 어떤 사물에서도 기능에 적합하지 않은 형태를 찾기란 쉽지 않다.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말은 진리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말을 한 루이스 설리번은 정말 그런 의도로 이 문장을 만들었을까? 

유명한 경구들은 그것이 태어난 시대와 지역의 맥락을 알지 못하면 오해하기 쉽다. 르 코르뷔지에의 유명한 경구 “주택은 살기 위한 기계다”가 대표적이다. 주택을 기계로 비유한 것은 직관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왜냐하면 주택, 즉 집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은 따뜻하고 아늑한 것인데 반해 기계는 그러한 관념을 전혀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이 말에 대해 “그 말이 맞다. 인간의 심장이 펌프 기계라면 말이다.”라고 비꼬았다. 바우하우스의 마르셀 브로이어도 “집이 기계라고 해도, 벽에 기대었을 때 옷에 기름이 묻기를 바라지는 않을 것”이라며 거들었다. 

르 코르뷔지에가 주택을 기계에 비유한 것은 기계가 가지고 있는 합리주의와 기능주의를 수용하고자 한 것이다. 그 문장이 쓰인 전체 단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비행기는 수준 높은 선택에 따른 산물이다. 비행기가 주는 교훈은 문제를 파악하고 그것을 깨닫게 하는 논리에 있다. 주택의 문제는 아직 제기되지 않았다. 건축에서의 현재 관심사들은 더 이상 우리의 요구에 부응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거를 위한 표준은 존재한다. 기계류는 자체에 이미 선택을 요구하는 경제적 요인을 내포하고 있다. 주택은 살기 위한 기계다.”(이관석 번역 『건축을 향하여』에서 발췌) 

 

<사진 1> 『건축을 향하여』 표지, 1923년. 표지에 나온 사진은 주택이 아니라 여객선의 복도다.


이 글은 1923년에 출간한 『건축을 향하여』의 ‘보지 못하는 눈’이라는 제목의 장에 등장한다.<사진 1> 이 장은 대형 여객선, 비행기, 자동차 이렇게 세 가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장은 20세기 산업사회의 대표적인 기계 생산물인 대형 여객선, 비행기, 자동차를 소개함으로써 새로운 시대, 즉 기계미학의 시대가 되었음을 주장한다. 이 기계생산물은 과거의 건축물과 달리 완전히 새로운 미학을 창조하고 있다. 새로운 기계 생산물에서는 장식이 필요 없으며 수학과 논리를 바탕으로 질서를 구축하고 있다. 하지만 20세기가 되어서도 아카데미즘을 숭배하는 건축 예술가들은 과거의 건축 언어를 관습적으로 답습하고 있다. 그리하여 ‘보지 못하는 눈’이라는 제목으로 가장 대표적인 기계생산물인 여객선과 비행기, 자동차를 소개한 것이다. 오직 건축 예술가들만이 새로운 정신을 요구하는 새로운 기계를 보지 못하고 장님이라고 꾸짖고 있는 것이다. 

특히 비행기는 잘 못 만들면 생명을 앗아간다. 비행기는 더욱 철저하게 논리적 선택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르 코르뷔지에의 언어를 빌리면 비행기는 “차가운 이성과 상상력”을 요구한다. 날아다니지는 않지만 주택 역시도 똑같은 능력을 요구한다. 그것을 입증하고자 르 코르뷔지에는 비행기 편에서 주택이 요구하는 기능주의에 대해 나열한다. “더위, 추위, 비, 도둑, 귀찮은 사람으로부터의 피난처”, “누워서 기지개를 켤 수 있는 침대”, “정리 작업이 금방 끝날 수 있는, 서랍이 충분한 수납장”, “창문은 빛의 양을 조절하는 역할을 하며, 밖을 내다보는 데에도 사용된다” 등등. 이처럼 주택과 그 내부의 설비와 가구 등을 아름다움과 장식이 아니라 기능의 대상으로 부각함으로써 주택 역시도 비행기와 마찬가지로 ‘수준 높은 논리적 산물’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신의 주장을 사람들에게 더 강렬하게 전달하고자 대담하게 주택과 기계를 등가물로 표현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문장의 본질은 주택은 기계처럼 기능적인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르 코르뷔지에가 말하려는 진정한 의도였을까? 기능주의가 전부였을까?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말도 이 문장이 쓰인 글을 봐야 그 정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이 문장이 등장하는 글은 1896년에 발표한 <예술적으로 고려된 고층 사무실 빌딩(The tall office building artistically considered)>이다. 19세기 말 뉴욕과 시카고에서 인류 역사에서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건축물이 탄생하고 있었다. 그것은 철골을 구조로 한 고층 건물이다. 이른바 마천루(skyscraper)다. 글의 초반부에서 설리번은 고층 빌딩이 탄생하게 된 기술적 경제적 배경을 설명한다. 그다음 새로운 건축물의 디자인에 대한 여러 건축 비평가들의 이론을 소개한다. 그런 이론이 옳고 그름에 대해서는 비평하지 않고, 마지막에 반드시 거부해야 하는 디자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층 사무실 빌딩은 백과사전적 의미에서 건축 지식을 전시하는 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잡다하게 모아놓는 것은 혐오스러운 것이다. 16층 빌딩은 꼭대기에 도달할 때까지 16개의 분리되고 구별되며 관련이 없는 층들의 조합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설리번은 이 점을 비평가와 이론가들이 동의한다고 강조한다. 실제로 19세기 말 뉴욕과 시카고에 건설된 수많은 초기 마천루들은 백과사전적으로 양식을 나열하는, 그의 표현을 따르면 ‘혐오스러운’ 디자인을 채택했다. 

 

<사진 2> 뉴욕 트리뷴 빌딩, 디자인: 리차드 모리스 헌트, 1875년 1차 완공, 1907년 증축
<사진 3> 홈 인슈어런스 빌딩, 디자인: 윌리엄 르 배런 제니, 1885년


뉴욕의 초기 마천루 건물인 뉴욕 트리뷴 빌딩은 1875년에 10층 건물로 완공되었고, 그 뒤 증축하여 19층이 되었다.<사진 2> 이 건물의 외관은 설리번이 지적한 잡스러운 모음의 전형적인 사례일 것이다. 1층부터 최고층 탑까지, 칼럼, 코니스, 덴틸, 필라스터, 망사르 지붕, 스파이어에 이르기까지 정말 수많은 고전적 양식과 모티프들의 전시장이 되었다. 시카고에 건설된 최초의 철골 마천루인 홈 인슈어런스 빌딩도 마찬가지다.<사진 3> 칼럼과 필라스터, 코니스는 물론 포치, 러스티케이션, 피아노 노빌레, 발루스터 같은 고전 어휘들이 눈에 띈다. 이 건물을 디자인한 윌리엄 르 배런 제니는 나중에 장식이 없는 진보적인 마천루를 디자인하지만, 초기에는 이처럼 고전적 어휘들을 구사했다. 이것은 새로운 개념의 사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반드시 거치는 통과의례 같은 것이다. 자동차가 마차를 모방하고, 라디오나 TV가 가구를 모방하는 것처럼 철골 마천루 역시도 스스로 새로운 개념의 건축이 아니라 기존의 친숙한 건축처럼 보이려고 한 것이다. 보수적인 대중에게 새로운 건물이 아니라고 안심시키려는 것이다. 

 

<사진 4> 제2라이터 빌딩, 디자인: 윌리엄 르 배런 제니, 1891년


하지만 제니는 몇 년 뒤에는 그러한 고전적 어휘들을 제거하고 매끈한 사무실 빌딩을 디자인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제2라이터 빌딩에 잘 드러난다.<사진 4> 루이스 설리번을 비롯한 시카고학파의 많은 이들이 제니의 사무실에서 견습 과정을 거쳤다. 설리번은 제니의 영향으로 더욱 급진적으로 마천루를 정의하고자 했다. 그는 철골 마천루는 완전히 새로운 건물이라고 여겼다. 새로운 건물은 새로운 형식과 미학으로 디자인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마천루가 과거의 형식으로 디자인되니 그 꼴을 참지 못했다. 이런 관습을 바꾸는 방법은 무엇일까? 설리번이 찾아낸 해법은 바로 ‘기능’이다. 사실 19세기는 물론 20세기 전반기까지도 건축 디자인에서 기능과 형태는 무관한 것처럼 보였다. 건물의 프로그램이 신전이든 관공서든 사무실 건물이든 미술관이든, 언제나 전반적인 형식은, 특히 표면은 고전적 어휘로 마감되었다. 대학에서 각 시대별 양식의 문법을 배우는 건축 예술가들에게 중요한 것은 프로그램이 아니라 건축 언어였기 때문이다. 즉 어떤 양식으로 표면을 장식할 것인가가 가장 큰 관심사였다. 

이런 건축 디자인의 관습을 바꾸고자 설리번은 자연의 법칙을 보라고 말한다. 자연의 모든 생명체와 무생물은 그 필요에 완벽하게 부응하는 형태를 추구하고 있다고 역설한다. “자연에서 형태는 동물, 나무, 새, 물고기가 가진 내면의 생명, 타고난 본질을 표현한다. 그 형태는 특징적이고 구별하기 쉬워서 간단히 ‘자연스럽다’고 말할 수 있다. … 날아가는 독수리, 활짝 핀 사과꽃, 열심히 일하는 일꾼, 한가로운 백조, 가지를 뻗은 참나무, 굽이치는 시냇물, 떠도는 구름, 흘러가는 태양 어느 것이든 형태는 언제나 기능을 따른다(Form ever follows function). 이것은 법칙이다.” 

 

<사진 5> 웨인라이트 빌딩, 디자인: 루이스 설리번, 1891년


고층 사무실 빌딩은 현대 산업문명이 낳은 완전히 새로운 개념의 건물이다. 새로운 개념의 건물이 새 옷을 입어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에 강력한 근거를 대고자 자연의 법칙을 끌어온 것이다. 자연의 생명과 사물이 기능에 따라 다른 형태를 취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니 고층 사무실 빌딩도 그 법칙에 따라야 한다. 그렇다면 그런 빌딩의 외관은 어떠해야 하나? 설리번은 고층 빌딩의 본질은 그 높이와 수직성에 있다고 보았다. 당시 마천루는 10층 정도의 높이로 오늘날의 관점으로 보면 별로 높지도 않지만, 당시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높이로 다가왔다. 이 ‘높이’야말로 고층 사무실 빌딩의 본질이다. 따라서 그런 특질은 더욱 강조되어야 한다. 그것이 이상적으로 표현된 건물이 1891년에 완공한 웨인라이트 빌딩이다.<사진 5> 이 빌딩에서 창문과 창문 사이의 기둥이 중단 없이 저층부터 고층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기둥의 수직성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고자 아래 창문과 위 창문 사이의 벽체를 기둥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하여 기둥은 마치 근육질 운동선수 팔뚝의 힘줄처럼 강력하게 도드라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외관의 표현이 고층 사무실 건물의 기능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만약 그 기둥에 고전적 언어를 덮어 씌운다고 해서 그 건물의 기능이 달라질까? 설리번의 디자인은 분명 과거 고전적인 옷을 입은 마천루들과는 분명하게 구분된다. 현대적인 것이 자명하다. 그의 디자인이 기능과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의 디자인은 새로운 개념의 건물이 갖춰야 할 형식적 정체성과 더 관련된 것처럼 보인다. 루이스 설리번에게는 철골로 지은 고층 건물에 더 어울리는 형식, 즉 새로운 장식, 새로운 아름다움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기능은 명분에 불과하다. 새로운 장식과 아름다움에 대한 논리적 명분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냥 디자인을 하면 되지 왜 굳이 명분을 글로 밝혀야 하는가?’ 그것은 건축주가 새로운 형식을 받아들이는 데 관대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 있다. 화가나 음악가와 달리 건축 예술가는 건축주 없이 자신의 디자인 철학을 실현할 길이 없다. 늘 그렇듯이 새롭고 낯선 디자인은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건축주의 보수성은 미국에서, 특히 시카고보다 뉴욕에서 고전적 형식의 마천루가 1950년대까지 지배했다는 사실에서 증명된다. 설리번은 보수성에 맞선 진취적인 예술성으로 말미암아 말년에는 외면을 받고 알코올에 의지한 채 가난하고 외롭게 살다가 생을 마감했다. 이런 보수적인 건축주들을 설득하여 건축환경을 바꾸는 데에는 논리적이고 통찰력 있는 글만한 것이 없었을 것이다. 다른 분야의 예술가들보다 건축 예술가들이 훨씬 더 많은 글을 쓰는 이유가 여기 있지 않을까 싶다. 

 

<사진 6> 바실리 체어, 디자인: 마르셀 브로이어, 1925년
<사진 7> 브라운 포노슈퍼 SK4, 디자인: 디터 람스, 1956년 ⓒ Koichi Okuwaki


아무튼 루이스 설리번과 르 코르뷔지에가 진정으로 추구한 것은 사실 기능이 아니라 아름다움이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과거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새로운 재료와 기술로 할 수 있는 새로운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만으로는 건축주를 설득하기 힘들다. 미적 취향은 잘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좀 더 논리적인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모더니스트들은 기능에서 그 해법을 찾은 것이다. 루이스 설리번의 개런티 빌딩을 봐도, 르 코르뷔지에의 빌라 사부아를 봐도, 더 나아가 마르셀 브로이어의 바실리 체어를 봐도, 디터 람스의 브라운 오디오를 봐도, 조너선 아이브의 아이폰을 봐도 그 유명한 모던 디자인에서 내가 느끼는 것은 기능을 압도하는 아름다움이다.<사진 6, 7> 기능은 그저 명분이고 알리바이일 뿐이다. 기능주의가 아니라 미학주의라고 해야 한다.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kshin201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