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을 포착하는 윌리엄 클라인의 사진 2023.9

2023. 9. 14. 15:44아티클 | Article/디자인스토리 | Design Story

A picture by William Klein that captures serendipity

 

 

뮤지엄한미 삼청에서 열리고 있는 윌리엄 클라인 사진전을 보러 갔다. 한국에서 보기 쉽지 않은 사진가의 전시다. 한국은 유별나게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전시회를 많이 한다. 우리에게 브레송은 마치 사진계의 빈센트 반 고흐 같다. 하지만 그런 브레송조차 한국인들에게는 아주 대중적인 이름이 아니다. 몇 년 전 나는 디자인과 대학원 수업으로 브레송 전시를 보러 갔는데, 여러 학생들이 이 전시회로 브레송을 처음 알게 되었다고 했다. 2000년대에 유서프 카쉬 전시회가 열렸을 때 관객이 엄청나게 들었던 기억이 난다. 유서프 카쉬가 유명한 사진가여서 그런 것이 아니다. 처칠, 아인슈타인, 피카소, 오드리 헵번 등, 유서프 카쉬가 찍은 인물들이 압도적으로 유명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사진계의 대가라고 하더라도 흥행에 성공한다는 보장이 없다. 윌리엄 클라인을 아는 한국인이 몇 명이나 될까? 게다가 그는 유명인을 찍지도 않았다. 그런 사진가의 전시라니 시쳇말로 ‘대박’ 전시회가 아니겠는가. 전시회를 연 뮤지엄한미 삼청의 대담함에 박수를 보낸다. 

비 오는 날 갔더니 주말인데도 관람객이 한산하다. 구경하기에는 최적의 환경이다. 나도 윌리엄 클라인은 사진사 책에 나온 몇 개의 사진만을 알 뿐이다. 하지만 그의 사진은 워낙 강렬해서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다. 그렇게 정보가 없는 사진가의 전시를 보니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많다. 우선 클라인은 사진가가 아니라 화가로 출발했다. 회화 작품을 보니 1940년대 중반부터 미국 화단을 지배한 추상표현주의 화풍을 구현하고 있었다. 전시회 자료를 보니 클라인은 유럽으로 건너가 막스 빌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막스 빌은 바우하우스를 졸업한 스위스의 아키텍트이자 디자이너로서 기하학적 색면 추상 회화를 구사한 화가이기도 하다. 빌은 몬드리안의 구성작품으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했다. 


윌리엄 클라인은 또한 막스 빌의 바우하우스 스승인 라슬로 모호이너지의 책을 읽으며 그의 새로운 미디어 이론을 받아들였다. 화가이자 사진가였던 모호이너지는 사진이라는 새로운 미디어가 인간의 시각을 확장해 줄 것이라고 믿었고, 그런 시각 확장의 가능성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사진기라는 ‘기계 눈’은 사람 눈이 다다를 수 없는 완전히 다른 시각 경험을 제공해 줄 수 있다. 하지만 19세기 동안 사진가들은 여전히 기존 미디어인 회화적 시각을 모방하는 데 그쳤다. 모호이너지는 그런 회화적 시각과 단절하고 회화가 따라갈 수 없는 사진만의 표현 기법을 찾고자 했다. 예를 들면 포토그램 같은 것이다. 인화지 위에 물체를 올려놓고 빛에 노출시키면 물체에 가리지 않은 부분만 빛에 반응하여 물체의 모양이 배경과 대비를 이루며 인화지에 재현된다. 자연이나 건물을 찍을 때도 특이한 구도, 극단적인 부감 촬영이나 앙각 촬영으로 일상적 시각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이런 사진들은 대체로 그 대상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는 대상들이 만들어내는 구성적 관계와 효과로 특별한 시각적 경험을 준다. 

 

 

<사진 1> Mural Project, c.1952 ⓒ Estate of William Klein
<사진 2> Moving Diamond on Turning Panels, 1952 ⓒ Estate of William Klein


윌리엄 클라인의 초기 회화 작품과 사진은 막스 빌, 몬드리안, 라슬로 모호이너지의 영향 아래 있는 듯하다. 그의 1940년대 추상 작품들은 동시대 미국의 대표적인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인 잭슨 폴록이나 마크 로스코, 윌렘 드 쿠닝의 작풍과 다르다. 분명한 선으로 면들이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어서 어찌 보면 구성 디자인 같은 인상을 준다.<사진 1> 그의 초기 사진은 이런 회화의 연장선에 있다.<사진 2> 그것은 라즐로 모호이너지의 실험적인 포토그램과도 연결된다. 이 작품들은 날카롭고 뾰족하고 신경질적인 느낌을 준다. 형광등 불빛, 생선 회칼, 고딕 성당의 피너클 같은 것들이 연상된다. 추상 이미지를 볼 때 사람들은 그 자체를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무리 봐도 뭔지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이미지를 통해 다른 것을 연상하려고 노력한다. 이때까지 클라인은 구체적인 대상에 관심이 없는 듯하다. 

 

 

<사진 3> William Klein, Barn on Walcheren Island(where Mondrian lived), Zeeland, Holland, 1952 ⓒ Estate of William Klein


두 번째 전시장에서 비로소 구체적인 대상, 즉 집을 찍은 사진들이 등장한다.<사진 3> 하지만 그 대상을 온전히 재현한 것이 아니다. 집의 파사드에 보이는 나무 부재들과 창문 프레임을 과감하게 크로핑해서 구성작품처럼 보이게 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허름한 집의 입면에 나타난 창문과 나무 부재들을 자신의 시각으로 조직화하고 질서를 만들어내 그럴듯한 기하학적 구성을 창조한 것이다. 이 사진들은 사진으로 재현한 몬드리안 회화 같다. 그런 점에서 19세기 사진가들이 회화를 모방한 것처럼 클라인은 20세기 기하학적 추상작품을 사진으로 모방한 셈이다. 나는 이것이 진정한 사진적 시각이라고 보이지 않는다. 

 

 

<사진 4> Walker Evans, Negro Church, South Carolina, U.S.A, 1936 ⓒ 뮤지엄한미 소장


이 전시회에는 특이하게 이 두 번째 전시장에 워커 에반스의 사진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마치 두 사진을 비교해 보라고 권유하는 듯하다. 에반스의 사진과 견주면 클라인의 사진은 더욱 대비된다. 에반스가 찍은 시골 흑인 교회 사진을 보라.<사진 4> 이 사진에는 클라인의 구성사진에서 보이는 기교가 전혀 없다. 에반스는 대단히 솔직하고 정직하게 교회를 담았다. 클라인이 이 교회를 보았다면, 독특한 시각 경험을 찾아내려고 혈안이 되지 않았을까? 그리하여 교회를 잘라내고 파편화해서 자신의 구성 솜씨를 자랑했을 것 같다. 워커 에반스는 소박한 교회 건물, 그 대상 자체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었다. 그래서 찍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반면에 윌리엄 클라인은 그 건물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대상의 표면에서 남들이 발견하지 못한 독특한 구성을 찾아낼 뿐이다. 

 

 

<사진 5> 뉴욕 사진 전시장 전경
<사진 6> Dance in Brooklyn, 1954 ⓒ Estate of William Klein


그다음 세 번째 전시장에 가니 비로소 익숙한 윌리엄 클라인의 대표작들이 전시되어 있다.<사진 5> 자신이 사는 뉴욕을 기록한 이 사진들에서 클라인은 비로소 대상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물론 뉴욕 사진에서도 그의 그래픽적 구성사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뉴욕 사진의 주인공은 사람이다. 게다가 이 사진들에는 그가 전에 추구했던 구성적 질서가 없다. 사람을 찍을 때 그는 조화롭고 안정적인 구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심지어는 초점도 맞지 않고 노출이 길어서인지 이미지가 흔들려 있다.<사진 6> 사진에 등장하는 뉴욕 사람들은 활기차고 거칠고 버릇없다. 뉴욕이라는 도시의 인종적 다양성, 활력, 혼란을 아무런 기교를 부리지 않고 담았다. 신중하게 계산하지 않고 카메라를 그 삶의 현장 한가운데 들이대서 즉흥적으로 얻은 사진들이다. 질서를 잃은 대신 강렬한 현장감을 얻었다. 

 

 

<사진 7> Le Petit Magot, November 11th,1968 ⓒ EstateofWilliamKlein


그다음 전시장은 가장 크다. 여기에는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로마, 파리, 모스크바, 도쿄에서 찍은 사진들이 커다란 공간의 벽을 채우고 있다. 이 사진들은 내가 처음 본 사진들이다. 이 사진들 역시 그의 뉴욕 사진만큼이나 현장감과 박진감이 넘친다. 네 번째 전시장의 사진들에서 미적 질서의 구축보다 사람이라는 대상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이 더욱 엿보인다. 또한 사진은 우연의 포착으로 가득 차 있다. 상황을 통제하기보다 상황에 맡긴다는 인상이 강한 사진들이 더 많다. 한 프레임 안에 여러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사진가는 영화감독과 달리 프레임 속 사람들을 통제할 수 없으므로 그들은 각자 자기 할 일을 한다.<사진 7> 우연으로 가득한 거리의 사진에는 어떤 주제나 메시지가 없다. 관객은 포착된 사진의 세부와 여러 요소들 속에서 자신만의 흥미로운 디테일을 찾아낸다. 


여기에서 롤랑 바르트가 말한 사진의 통찰이 적용된다. “사진가의 투시력은 ‘보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바로 촬영 장소인 ‘그곳에 있다’는 사실에 있다.” 이 말은, 사진가는 감상자가 흥미로워할 것을 의도적으로 찍을 수 없다는 말이다. 사진은 기계적으로 렌즈로 들어오는 모든 빛을 무자비하게 기록하기 때문에 사진가는 그 대상들 모두를 통제할 수 없다. 즉, 그는 어떤 대상은 제외하고 특정 대상만 선택적으로 기록할 수 없다. 따라서 그가 보지 못한 것도 사진 속에 담길 수밖에 없다. 클라인처럼 역동적인 도시의 현장을 찍는다면 더욱 그렇다. 그리하여 관객은 사진가가 보지 못한, 또는 의도하지 않은 세부에서 자신만이 볼 수 있는 어떤 것을 찾아내는 즐거움을 얻는다. 관객이 찾아낸 즐거움의 대상은 사진가가 ‘보았기’ 때문에 ‘찍은’ 것이 아니라 우연히 사진가가 그 장소에 ‘있었기’ 때문에 ‘찍힌’ 것이다. 사진가가 자신의 통제력을 늦출수록, 또는 혼란스러운 도시처럼 사진가가 처한 상황이 그의 통제력을 방해할수록 그는 발견의 즐거움을 관객에게 선사할 가능성이 커진다. 하지만 그것은 사진가가 절대로 의도할 수 없는 것이다. 사진가가 의도하고 통제할 수 있는 것은 그의 흥미를 끈 사람들과 사물들에게 렌즈를 향하는 것뿐이다. 이 도시의 사진들은 그가 초기에 찍었던 계산적인 구성사진들과 얼마나 다른가. 

 

 

<사진 8> On a Vespa, 1956 ⓒEstateofWilliamKlein


로마와 파리, 도쿄의 사진들, 그중에서도 거리의 사진들은 활력과 에너지가 넘친다. 다시 한번 강조하면 클라인은 바로 그 현장, 사랑과 투쟁과 생활의 현장에 ‘있었기에’ 그토록 박력 있는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이 사진들에서는 그 장소뿐만 아니라 그 시대도 느낄 수 있다. 스쿠터를 타는 이탈리아 가족과 연인, 노동자들을 보라.<사진 8> 이 사진들은 클라인이 1960년대 로마를 방문했기 때문에 담을 수 있었다. 당시 스쿠터는 로마 시민의 주요 교통수단이었다. 미국 문화에는 없는 것, 스쿠터를 타고 이동하는 가족들, 연인들, 노동자들은 그에게 분명 이국적인 것이었으리라. 그는 거기에 탐닉했던 것 같다. 스쿠터 라이더 사진이 많다. 그는 다이안 아버스가 쌍둥이나 문신한 남자를 보고 매혹되었듯이 이 스쿠터 타는 사람들에게 매혹되었다. 그리고 마치 워커 에반스가 교회를 찍듯이 솔직하고 정직하고 담담하게 스쿠터 탄 사람들을 찍었다. 사진은 구성을 통해 예술이 되려고 하기보다 이처럼 대상에 매혹되고, 그로부터 즐거움을 느끼고 카메라를 들 때 사람의 마음을 울리는 사진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그 뒤에 나오는 전시장에는 패션 사진, 그리고 그래픽적인 터치를 가미한 작품들이 있지만, 이것은 그저 부록에 불과하다.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kshin201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