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노트르담 성당 복원의 역사 2023.11

2023. 11. 30. 09:20아티클 | Article/디자인스토리 | Design Story

History of the restoration of Notre-Dame Cathedral in Paris

 

 

 

<사진 1> 2019년, 불타기 전 노트르담은 보강 작업을 하고 있었다.

 

<사진 2> 2019년 4월 15일, 노트르담 성당에 심각한 화재가 발생했다. ⓒ GodefroyParis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이 불타기 불과 두 달 전에 그곳을 방문한 적이 있다.<사진 1> 가톨릭 신자인 나는 그곳에서 미사도 보았다. 흥미로웠던 것은 영성체 시간이다. 워낙 여러 나라에서 온 관광객들이 많다 보니 성당에서는 성체를 받아먹는 방식이 다양했다. 한국에서는 두 손을 모아 받은 뒤 입으로 가져가 먹는다. 어떤 나라 신자는 무릎을 꿇은 뒤 입을 벌려 혀로 받아먹고, 어떤 신자는 그냥 서서 입을 벌려 받아먹는다. 아마도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은 가장 국제적인 미사 공간이 아닐까 싶다. 21세기에 들어와 노트르담 성당은 해마다 1,300~1,400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했다. 물론 지붕이 불타기 전의 일이다.<사진 2>

이 세상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딕성당이 있다. 하지만 파리 노트르담 성당만큼 드라마틱한 역사를 지닌 성당도 없을 것이다. 가장 뜨거운 역사의 현장 한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불어 ‘Norte-Dame’은 영어로 ‘Our Lady’로 번역되며 성모 마리아에게 바친 성당을 뜻한다. 중세까지만 해도 프랑스 전역이 기독교화된 것은 아니었다. 지방에 사는 많은 이들이 여전히 토착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대지의 여신에 대한 신앙은 깊었다. 프랑스 성직자들은 이들이 믿는 대지의 여신을 대체할 기독교 신앙을 제시할 필요가 있었다. 바로 성모 마리아다. 이 세상에 순수한 기독교는 없다. 기독교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그 지역의 토착신앙과 어떻게든 절충이 일어난다. 이교도였던 프랑스인들은 성모 마리아를 자신들이 믿었던 대지의 여신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기독교인이 되었다. 

12세기부터 성모 마리아 신앙이 유행했고, 성당의 이름도 ‘노트르담’이 급증했다. 중세 프랑스에 지은 많은 성당 이름이 노트르담이다. 로마의 산 피에트로(베드로) 성당, 베네치아의 산 마르코(마가) 성당, 런더의 세인트 폴(바울) 성당, 쾰른의 장트 페트루스(베드로) 성당 등 다른 지역에는 여러 성인에게 바쳤지만, 유독 프랑스에서는 노트르담이 많다. 고딕 대성당으로 유명한 샤르트르 성당, 아미앙 성당, 랭스 성당, 루앙 성당의 이름이 모두 노트르담이다. 이 도시들은 크지 않아 노트르담 성당이라고 하지 않고 그냥 도시 이름으로 부른다. 이 도시들에도 성당이 여러 개 있겠지만, 사람들은 샤르트르 성당이나 아미앙 성당 하면 바로 그 고딕 대성당을 떠올린다. 하지만 대도시 파리에는 유명한 성당이 하나 둘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파리 성당’이라고 하지 않고 ‘노트르담 성당’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정확한 이름은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Cathédrale Notre-Dame de Paris)’이지만, 그냥 ‘노트르담 성당’이라고 부름으로써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이 모든 노트르담 성당의 대명사가 된 셈이다. 

 

 

<사진 3> 오늘날의 노트르담 성당 서쪽 파사드와 1841년에 찍은 모습. 포탈의 문설주 조각들과 그 위쪽 장미창 아래 벽감 조각들이 사라진 것을 볼 수 있다.
<사진 4> <나폴레옹의 대관식>, 그림: 자크 루이 다비드, 1805-07년



노트르담 성당은 1163년에 공사를 시작해 1345년에 완공되었지만, 그 뒤로 끊임없이 수정되고 파괴되고 복원되는 역사를 거쳤다. 15~16세기 르네상스 시대에는 고딕을 경멸하는 분위기여서 내부의 기둥과 벽을 태피스트리로 가렸다. 18세기 말 프랑스 대혁명 기간에는 성당의 많은 재물들이 파괴되고 약탈당했다. 성서 속 왕을 묘사한 조각들은 프랑스 왕으로 오인되어 머리가 잘리는 수난을 당했다. 서쪽 포탈(portal, 정문)에 있는 조각들도 파괴되었다.<사진 3> 그뿐만 아니라 성당의 기능을 잃고 창고로 사용되기까지 했다. 1804년에 노트르담에서 대관식을 치른 나폴레옹은 성당으로서의 기능을 되살렸지만, 내부를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장식했다.<사진 4> 나폴레옹이 황제가 된 뒤에도 파리에서는 크고 작은 봉기들이 지속되면서 노트르담 성당은 끊임없이 훼손되고 약탈당했다. 그리하여 완전 철거를 고려할 지경에 이르렀다. 

 

 

<사진 5> 프랑수아 니콜라 쉬플라트의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 삽화, 1876년


바로 그때, 빅토르 위고의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이 1831년에 출간되었다. <사진 5> 위고가 이 소설을 쓴 이유 중에는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서 점차 훼손돼가는 성당을 살리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11부로 구성된 이 장편 소설에서 3부의 절반이 온전히 파리 노트르담 성당에 대한 위고의 비평과 감상으로 할애되었다. 그는 오래된 성당을 파괴하는 세 가지 원인이 있다고 말한다. 첫 번째는 세월의 풍화이고, 두 번째는 정치적, 종교적 혁명이다. 마지막은 양식의 유행이다. 위고는 이 세 번째 원인이야말로 가장 야만적이라고 판단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건축양식의 필연적인 타락 과정에서, 르네상스의 무정부주의적인 화려한 탈선 이래로 갖가지 유행이 바뀌었다. 유행은 혁명보다도 더 많은 해독을 끼쳤다. 유행은 뿌리째 뽑아내고 예술의 뼈대를 침식하고, 형식에서나 상징에서, 논리에서나 미(美)에서, 건물을 베고 자르고 무너뜨리고 죽여놓았다. 그런 뒤에 유행은 고쳐 만들었는데, 세월이나 혁명은 적어도 그런 야심은 없었던 것이다. 유행은 ‘높은 감식안’이라는 이름 아래, 고딕 건축물의 상처에다 시시껄렁한 하루살이의 장신구를, 대리석 리본을, 금속의 술을 갖다 댔으니… 세 가지 상해가 오늘날 고딕 건축물의 모습을 보기 흉하게 만들어놓고 있는 것이다. 표피의 주름살과 무사마귀, 그것은 세월의 소행이요, 폭력, 만행, 타박상, 골절, 그것은 루터로부터 미라보에 이르기까지 혁명의 소행이다. 골조의 절단, 삭제, 해체, 복원, 그것은 비트루비우스와 비뇰을 따르던 교수들의 그리스식, 로마식, 그리고 야만적 작업이다. 반달족이 만들어낸 이 장엄한 예술을 아카데미는 죽여놓았다.”

정기수 번역, 민음사, 『파리의 노트르담』 발췌(두꺼운 글씨는 필자의 강조)

 


이 문장을 보면 노트르담이 오랜 세월 겪어온 무수한 상처의 역사를 요약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비평은 빅토르 위고가 이 소설을 쓴 시기인 19세기 전반기까지 노트르담 성당에 상처를 낸 세 가지 범죄자를 고발하고 있다. 범죄자는 세월, 혁명, 아카데미다. 아카데미는 바로 르네상스 양식을 의미한다. 마지막 문장에 “반달족이 만들어낸 장엄한 예술”이라고 쓴 것은 고딕양식을 뜻한다.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학자이자 예술비평가인 조르조 바사리는 11세기 프랑스인들이 만들어낸 건축 양식에 ‘고딕(gothic)’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탈리아인들에게 고트족(goths)이란 위대한 로마제국을 멸망시킨 북방의 야만족이다. 따라서 ‘고딕양식’이란 경멸을 담은 용어다. 15세기 이탈리아인들은 고대 로마의 양식을 재생하며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 고전주의를 근본으로 한 아카데미즘이 자리 잡는다. 따라서 “반달족이 만들어낸 장엄한 예술을 아카데미가 죽여놓았다”는 문장은 이탈리아인이 자부심을 갖고 만들어낸 르네상스 이후의 고전양식이 그들로서는 야만인으로 보이는 프랑스인이 만들어낸 고딕양식의 노트르담을 망쳤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행위를 ‘야만적 작업’이라고 비난한다. 이는 고딕을 야만양식으로 규정한 이탈리아인과 르네상스 양식에 대한 복수인 셈이다. 인용된 글에 등장하는 비트루비우스는 고전양식을 최초로 체계화한 로마시대의 아키텍트이고, 비뇰은 르네상스 시대에 고전양식의 체계를 더욱 발전시킨 아키텍트 자코모 바로치 다 비뇰라다. 위고는 그 두 사람을 고전양식을 대변하는 인물로 언급한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소설의 배경이 15세기 말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비뇰은 16세기 인물이다. 3부 1장 노트르담 편에서는 비뇰 말고도 카트린 드 메디시스, 마틴 루터 같은 인물들이 언급된다. 이들도 16세기 인물들이다. 이는 3부만큼은 시대 배경인 15세기를 초월하고 있음을 뜻한다. 소설의 시대 배경과 무관하게 19세기까지 노르트담 성당이 겪은 역사와 19세기 바로 그 시점에 처한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글의 형식도 다른 부분과 달리 비평문이다. 따라서 이 3부는 읽지 않아도 소설을 이해하는 데 전혀 문제가 없다. 하지만 이 부분은 소설의 핵심이기도 하다. 소설이 발표된 뒤 많은 문학인들이 소설의 진정한 주인공은 노트르담 성당이라고 비평했다. 19세기, 철거 위기에 처한 노트르담에 대한 위고의 간절한 사랑과 애달픈 마음이 그 어떤 위대한 시나 문장보다도 강렬하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노르트담 편의 마지막에 그는 모든 것을 긍정하는 방향으로 선회한다. 세월이 성당에 입힌 상처는 필연적인 것이다. “큰 건물들은 큰 산들과 매일반으로 허구한 세월의 작품이다.” 대성당은 이름 있는 건축가 아니라 익명의 민중, 그리고 의도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자연과 세월이 조금씩 바꿔간다. 마지막 문장은 위대한 소설가의 통찰로 마무리된다. “밑바닥에 그토록 질서와 통일성을 간직하고 있는 저 건물들의 비상한 외적 다양성은 거기에서 유래한다. 나무의 줄기는 변함이 없으나 생장은 변덕스러운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고딕이라는 근본 구조는 바뀌지 않지만, 수백 년이 흐르면서 세월과 혁명과 유행 양식의 흔적은 표면에 남을 수밖에 없다. 

 

 

<사진 6> 노트르담 복원 공사 장면, 사진: 이폴리트 바야르, 1847년. 중앙 첨탑이 없다.
<사진 7> 외젠 비올레 르 뒥이 만든 첨탑, 1859년. ⓒ Hilader


노트르담 성당의 부활을 호소하는 듯한 이 소설은 결국 결실을 보았다.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며 노트르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치솟았다. 출간된 지 13년이 지난 뒤 정부에서는 성당 복원 예산이 마련되었다. 외젠 비올레 르 뒥이 복원 아키텍트로 선정되었고, 그는 1864년에 복원을 완료했다. 그는 조각상들을 복원했고, 특히 유명한 중앙 첨탑도 복원했다.<사진 6> 이 첨탑은 복원이라기보다 비올레 르 뒥이 새로 디자인한 것이다.<사진 7> 첨탑은 13세기에 처음 만들었고, 18세기 말에 구조적 문제가 제기되어 해체했다가 르 뒥이 복원하고 2019년 4월에 화재로 다시 사라졌다. 프랑스 정부는 새로운 지붕을 위한 국제 공모전을 개최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 유리와 같은 현대적인 재료로 복원한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하지만 프랑스 국회는 화재 이전과 똑같은 재료와 형태로 복권할 것을 결정했다. 특히 르 뒥이 디자인한 첨탑은 원형 그대로 복원되고 있다. 하지만 새 시대 새 디자인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 놓아야 한다는 여론도 맞서고 있다. 어떻게 진행되든 빅토르 위고의 통찰은 여전히 유효하다. “나무의 줄기는 변함이 없으나 생장은 변덕스러운 것이다.”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kshin201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