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트로피와 풍화, 인공과 자연 2024.1

2024. 1. 31. 09:20아티클 | Article/디자인스토리 | Design Story

Entropy & Weathering, Artificial & Nature

 

 

 

<사진 1> 트레이

 

서촌에 있는 일상여백이라는 공간엘 갔다. 목공예가 최성우의 작품전이 열리고 있었다.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트레이였다.<사진 1> 이 트레이는 나무껍질을 거의 가공하지 않은 상태다. 나무껍질 겉 표면을 옻칠한 것이 작가가 한 공예적 노력의 전부인 것 같다. 이 트레이는 기능적으로 약간 부실하다고 여길 수도 있다. 나무껍질의 형태를 그대로 가져왔으므로 둥글게 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정도면 펜이나 연필을 담아두는 데 전혀 손색이 없다. 나는 이 트레이가 쓸모 이상의 어떤 가치를 전달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것은 무엇일까? 

일반인이 이런 나무껍질을 보았다면, 대부분은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거기서 쓸모를 발견하기란 좀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창의성이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사물에서 쓸모를 ‘발견’하는 것이다. 이때 그 사물의 형태는 기능을 품고 있다. 기능은 형태를 따르는 것이다. 이런 창의성은 뭔가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없었던 원시 인류가 최초로 했던 디자인이다. 그러니까 최초의 디자인은 제작이 아니라 발견인 셈이다. 하지만 정교한 도구가 공장에서 생산되자 가장 똑똑한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는 오히려 사물에서 쓸모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창의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런 창의성을 수행하는 일은 대개 예술가나 공예가들의 전문적인 영역이 되고 말았다. 그들의 집은 뭔가 쓸모의 가능성을 품고 있지만, 아직 발현되지 못한 잡동사니 재료들로 가득 차기 마련이다. 


그러한 쓸모 중에서는 ‘무용의 쓸모’라는 것도 있다. 무용의 쓸모란 바로 아름다움이다. 19세기 말 댄디로 유명한 영국의 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그의 대표작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이런 말을 한다. “무용한 사물을 만들어낸 것에 대한 단 하나의 구실은, 우리가 그것에 강렬히 찬탄한다는 것이다. 모든 예술은 상당히 무용하다.” 그렇다면 어떤 대상을 강렬히 찬탄한다는 말일까? 그것은 바로 아름다운 대상이다. 어떤 사물이 아무런 쓸모가 없어도, 아름답기만 하다면 사람은 그것을 갖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생긴다. 

그렇다면 어떤 대상이 아름다울까? 아름다움의 개념은 굉장히 다양하지만, 여기에서는 질서가 높은 상태에 이른 대상에 대해서 말하고자 한다. 엔트로피 법칙으로 말하자면 ‘낮은 엔트로피’의 상태다. 엔트로피 법칙은 경우의 수로 정의된다. 경우의 수가 낮으면 엔트로피가 낮은 것이고, 경우의 수가 높으면 엔트로피가 높은 것이다. 미국의 물리학자 리처드 뮬러는 『나우 : 시간의 물리학』에서 엔트로피를 이렇게 정의한다. 

 

“엔트로피는 무질서의 척도, 곧 무질서도라고 불리기도 한다. 예를 들면 한구석에 모든 분자가 몰려 있는 경우처럼 기체의 엔트로피가 낮은 상태는 고도로 정렬된 상태다. 분자들이 흩어져 있는 엔트로피가 높은 상태는 무질서한 상태다. ‘엔트로피가 높다’라는 것은 그 상태가 임의적인 과정들을 거쳐 나타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의미다. 반면 ‘엔트로피가 낮다’라는 것은 그러한 조직된 상태가 있을 법하지 않다는 뜻이다. 고도로 조직된 상태는, 거의 정의 그대로 제멋대로의 임의적인 과정을 통해서 찾아볼 수 없다는 뜻이다.” 


임의적인, 즉 원칙 없이 제멋대로의 자연 과정을 통해서 결코 낮은 엔트로피의 상태로 이를 수 없다. 질서는 거저 얻을 수 없다. 문명이란 고도의 기술과 노력으로 이룬 낮은 엔트로피의 상태다.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물건들, 그런 물건들로 가득한 건축물, 그런 건축물과 도로로 조직화된 도시가 그것이다. 인공물이란 높은 엔트로피 상태의 거친 재료들을 고도의 기술로 조직화하여 질서를 부여함으로써 낮은 엔트로피로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고도로 조직화된 낮은 엔트로피의 인공물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조금씩 질서가 와해돼 무질서한 방향으로 나아간다. 엔트로피 법칙에 따르면 낮은 엔트로피, 즉 질서는 자연스럽게 높은 엔트로피, 즉 무질서로 가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자연 그대로 놔두면 어떠한 대상도 무질서해지고 궁극적으로 파괴될 것이다. 

사람이 고도로 조직화된 질서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는 건 그런 인공적 노력과 기술에 대해서 경이로움을 느끼는 것이다. 놀라움과 신기함이라는 감정을 이끌어내는 낮은 엔트로피의 인공물은 그렇지 못한 상태를 경멸하는 경향이 있다. 예로부터 문명화란 삶의 환경을 낮은 엔트로피의 상태로 만들어내는 것인데, 그것을 이룬 문명은 그렇지 못한 문명을 야만이라고 멸시했던 것이다. 문명사회에서도 권력과 금력을 가진 자들은 더욱 낮은 엔트로피의 인공 환경을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크고 화려한 종교 건축과 궁궐들, 정교하고 장식적인 가구와 식기들이 그것이다. 그것은 권력의 상징이 된다. 그런 낮은 엔트로피의 인공 환경을 유지하려면 높은 비용이 들기 때문에 이를 소유한 자들은 더욱더 재산을 늘리려고 할 것이고, 그를 위해 필연적으로 타인의 노동력과 자연을 착취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낮은 엔트로피의 인공물이 갖는 아름다움의 특징이 생긴다. 바로 오만함이다. 사람들은 그것을 부러워하는 동시에 불편해한다. 

자연은 이런 오만함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고 낡아가게 만든다. 즉 높은 엔트로피의 무질서한 상태로 만들려는 강력한 반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풍화의 본질이다. 풍화는 낮은 엔트로피의 인공물에 상처를 내고 흠을 만들어냄으로써 그 기고만장한 기를 꺾으려고 한다. 그렇게 풍화를 수용한 인공물은 겸손해진다. 사람은 인공물과 문명이 자연의 풍화로 무질서해진 상태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낀다. 마치 젊어서 타고난 재능과 아름다움으로 거만했던 사람이 삶의 풍파를 겪고 늙은 뒤 겸손해지고 관대해지는 것처럼 인공물 역시도 자연의 풍화를 겪은 뒤 편안해진다. 그런 편안함에서 사람들은 낮은 엔트로피와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다. 카프리치오(capriccio)는 고대 유적지를 환상적으로 다시 구성한 풍경화 양식을 말하는데, 그것을 대개 한때 고도로 조직화되던 문명이 폐허가 된 무질서의 상태를 표현한다. 낮은 엔트로피가 파괴된 폐허에서도 사람은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다. 고색창연은 낮은 엔트로피의 문명과 사물이 풍화로 인해 높은 엔트로피로 변화된 아름다움을 표현한 말이다. 

 

<사진 2> 풍화로 낡아진 소반의 상판


나는 목공예가 최성우의 작품들이 바로 그런 낮은 엔트로피가 풍화로 인해 자연스럽게 높은 엔트로피의 상태로 변화된 과정과 상태를 표현한 것이라고 느꼈다. 소반의 상판을 보자.<사진 2> 이 소반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는 깨끗한 표면을 가졌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며 칠은 벗겨지고 가장자리는 조금씩 뜯겨나갔고 표면은 조금씩 깨지고 금이 갔으며 얼룩이 생겼다. 이 상처와 흠들은 사람이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자연이 만들어낸 것이다. 이 풍화에서 사람들은 편안함을 느낄 뿐만 아니라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이다. 최성우는 여기에 흰색 수직선을 그었는데, 이것이 유일한 인공적 질서다. 마치 낮은 엔트로피와 풍화의 높은 엔트로피를 대비시킨 듯하다. 최성우는 버려진 사물에서 쓸모의 가능성과 함께 풍화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것을 보라고 제안하는 것이다. 

 

<사진 3> 최성우 <Sugar in the Air>의 전시 작품들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kshin201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