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0. 31. 09:15ㆍ아티클 | Article/디자인스토리 | Design Story
Why is the profile photo a front view?
루이 16세는 프랑스혁명으로 자기 권력의 위협을 느껴 평민으로 가장하고 튈르리궁을 빠져 나와 오스트리아로 도망가기로 한다. 오스트리아 국경에 가까워질 무렵 작은 시골 마을의 우체국 관리가 이들을 수상하게 여겨 제지한다. 그는 마차에서 내린 남자가 프랑스 국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요즘처럼 미디어가 발전하지도 않은 18세기에, 게다가 국왕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지방 관리가 어떻게 그를 알아봤을까? 그것은 루이 16세가 사용한 ‘아시냐(assignat)’라는 프랑스혁명 당시 정부가 발행한 임시 지폐 덕분이다.<사진 1> 임시 지폐에는 아직은 국왕이었던 루이 16세의 프로필(profile), 즉 옆모습 그림이 인쇄되어 있었다. 그 옆모습이 자신이 보고 있는 남자의 옆모습과 닮았던 것이다. 루이 16세와 그의 가족은 체포되어 다시 파리로 압송되었다. 그는 결국 단두대에 올라 생을 마감하게 된다. 만약 아시냐에 프로필이 인쇄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프로필 이미지는 프랑스의 이미지 재현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프로필 이미지가 인기를 얻게 된 것은 이미지 재현이 훨씬 쉽기 때문이다. 루이 14세 시대에 그림자 프로필 이미지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검은색 종이에 사람의 옆얼굴을 윤곽선만으로 그린 뒤 그것을 오려내서 간직하는 것이다.<사진 2> 세부 묘사 없이 윤곽선만으로 이루어진 이미지를 ‘실루엣(silhouette)’이라고 부른다. 이는 루이 15세 통치기간 재무장관이었던 에티엔 드 실루엣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실루엣 장관은 당시 국가 부도 위기에 처한 프랑스 정부를 구하고자 애썼으나 아무런 실질적 효과가 없었다. 취임 초기에는 과단성 있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인기가 있었으나, 경제가 좋아질 기미가 전혀 없자 인기가 급락한 것은 물론 조롱을 받게 되었다. 그저 그림자에 불과한 무능한 장관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림자 프로필 초상화에 실루엣 장관에게는 불명예스럽게도 자신의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18세기 말에는 이런 이미지를 자동으로 제작할 수 있는 기계가 발명된다. 자동초상제작기(physionotrace)가 그것이다. 이미지를 재현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자신의 초상을 만들고자 하는 고객은 의자에 앉는다. 촛불이 의자 옆에 세운 초상 제작기에 고객 옆얼굴의 그림자를 만들어낸다.<사진 3> 화가가 축도기를 이용해 옆얼굴 그림자의 윤곽선을 따라가면 고객의 그림자 이미지를 적당한 비율에 따라 수학적 정확성으로 얻어내는 것이다.<사진 4> 이런 방식으로 불과 몇 분 만에 실루엣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 실루엣 이미지를 얻은 뒤 솜씨 좋은 화가가 세부를 완성하기도 했다.<사진 5> 이런 기계의 등장은 단지 발명가의 순수한 열정으로 탄생하는 것이 아니다. 18세기 말 프랑스에서는 중산층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신분 상승 욕구가 강한 그들은 귀족처럼 자신, 또는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이나 연인의 이미지를 간직하고 싶었다. 그러한 욕구가 기계의 발명을 촉진한 것이다.
자동초상제작기 이전에는 훨씬 비싼 초상산업으로서 미니어처 초상이 있었다.<사진 6> 이는 16세기부터 영국과 프랑스의 귀족사회에서 유행했다. 미니어처 초상은 벽에 거는 거대한 액자 초상화와 다른 용도를 갖는다. 아주 작게 얼굴을 묘사한 뒤 대개는 펜던트 형식으로 만들어 목에 걸고 다니거나 주머니 속에 소중하게 간직하는 것이다. 숙련된 화가가 채색을 하고 정성을 들여 제작하여 비용이 많이 들 수밖에 없는 미니어처 초상화는 그야말로 귀족의 전유물이었다. 반면에 자동제작 초상은 솜씨 없는 사람도 금방 익힐 수 있었고, 제작하는 기간도 대폭 축소되었다. 초상 제작비가 낮아지니 중산층의 신분 상승 욕구에 딱 들어맞았다. 자동초상이 큰 인기를 끌자 수많은 미니어처 화가들이 사라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마치 산업혁명으로 가내수공업자들과 장인들이 몰락한 것과 비슷하다. 저렴한 기계가 사치품을 흉내 내자 사치품을 만들어내는 산업이 위기를 맞이한 것이다.
저렴함은 기계의 힘으로 얻은 것이다. 초상을 만들어내는 미디어가 기계로 바뀌자 이미지의 내용도 바꾸었다. 귀족들의 미니어처 초상은 고객의 요구를 따른다. 상류사회의 고객은 자신이 더욱 고귀한 존재로 이상화되길 바라고, 그것은 화가의 솜씨로 구현된다. 이는 고객과 화가에 의도에 따라 주관적으로 재현된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기계로 만드는 자동제작 초상은 얼굴의 객관화를 강요한다. 게다가 얼굴을 묘사하는 방향이 미니어처는 주로 얼굴의 앞모습이거나 비스듬한 각도이고, 자동제작기는 언제나 옆얼굴을 묘사한다는 것도 주관성과 객관성의 차이를 만들어낸다. 옆모습, 즉 프로필은 주관적으로 해석하거나 이상화하기 힘들다.
이는 고대 이집트의 화가들이 사람을 묘사할 때 프로필을 정면으로 인식한 것과도 관련이 있다. 고대 이집트 양식은 이른바 ‘정면주의(frontalism)’의 원칙에 따라 대상을 묘사한다. 그들은 이 세계의 모든 대상은 입체적인 데 반해 그것을 모방할 때는 2차원의 평면으로 환원해야 된다는 사실에 큰 갈등을 느꼈다. 어느 각도에서 본 모습을 그려야 할까? 그리하여 정면주의라는 독특한 양식을 탄생시켰다. 그 대상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난 각도를 정면이라고 인식하고, 언제나 그 방향만을 묘사하는 것이다. 물고기라면 옆에서 본 모습이 정면이다. 물고기를 앞에서 보거나 위에서 본다면, 물고기의 특징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의 신체는 좀 복잡하다. 다리는 측면에서 본 모습이 정면이다. 그래야 다리의 특징인 무릎과 발의 길이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몸통은 정면에서 본 모습이 정면이다. 정면으로 봐야 두 개의 가슴과 배꼽을 모두 표현할 수 있다. 얼굴은? 이집트 화가에게 얼굴은 옆모습이 정면이다. 하지만 눈만큼은 앞에서 본 것이 정면이다. 얼굴, 몸통, 다리의 가장 큰 특징들이 하나의 각도에서는 드러나지 않는다. 결국 이집트의 인물화는 앞에서 본 부분과 옆에서 본 부분이 하나의 화면에 모두 포함되는 독특한 양식으로 묘사된다.<사진 7>
다리가 측면에서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난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얼굴의 특징이 왜 옆에서 본 모습에서 드러난다고 생각했을까? 이것을 좀 더 치열하게 연구한 사람은 19세기에 범죄자 사진의 전형을 창조한 프랑스 경찰관 알퐁스 베르티옹이다. 19세기 과학사진사를 소상히 밝힌 『박상우의 포톨로지』에 따르면 베르티옹은 객관적 인물사진의 실체를 처음으로 밝힌 사람이다. 그가 예술 사진가로서 사진을 연구한 것이 아니라 경찰청 신원 감식부 반장으로서 사진을 연구했다는 점이 바로 인물사진의 실체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던 것 같다. 사진이 발명된 뒤 사진의 실용적 가능성을 처음으로 발견한 전문가 집단은 바로 경찰이다. 그들은 범죄자를 관리하는 도구로서 사진의 탁월한 능력을 알아챘다. 하지만 범죄자 사진 제작을 사진관 사진사들에게 맡기자 그들은 관습적으로 일반 시민을 이상적으로 묘사하는 방식으로 범죄자를 촬영했다. 베르티옹은 그런 사진들이 귀족의 인물화만큼이나 주관적이라는 사실을 곧 깨달았다. 범죄자를 가장 객관적으로 기록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한 끝에 그들의 옆얼굴과 앞얼굴을 정확한 각도에서 찍는 이른바 ‘머그샷(mugshot)’을 고안하기에 이른다.<사진 8> 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옆얼굴과 앞얼굴 중 어느 각도가 더 객관적인지를 연구했다.
『박상우의 포톨로지』에 따르면 연구결과는 다음과 같다. 얼굴의 앞모습은 주로 살로 이루어졌다. 살은 표정을 짓게 해 인상을 창조하는데, 이런 표정과 인상은 시간에 따라 변화한다. 눈의 시선 역시 표정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만날 때 그의 얼굴을 보며 그 특징을 기억하기보다는 인상을 통해 그의 감정을 분석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타인의 객관적 얼굴이 아니라 인상에 따라 해석한 주관적 얼굴을 머릿속에 기억하는 셈이다. 앞얼굴에는 속기 쉽다. 반면에 얼굴의 옆모습은 주로 뼈로 이루어졌다. 즉 선으로 구성된 얼굴이다. 뼈로 구성된 얼굴의 선은 시간이 지나도 변화하지 않는다. 정면과 달리 표정이 잘 보이지 않고 눈의 시선처리도 덜 보인다. 따라서 인상을 느끼기도 힘들다. 옆얼굴은 상대적으로 감정에 덜 좌우되는 만큼 이성적으로 그 사람을 기억하는 것이다. 따라서 옆얼굴이야말로 객관적인 얼굴이다. 이는 귀족들이 선호한 미니어처 초상이 옆모습이 아닌 앞모습이었지를 잘 설명해 준다. 앞모습은 대상을 훨씬 쉽게 이상화할 수 있다. 루이 16세의 정체가 드러난 이유도 바로 지폐에 좀 더 객관적인 옆모습이 묘사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집트인들은 왜 옆얼굴을 정면으로 선택했을까? 그것은 이집트인들 역시 주관적으로 변화하는 대상보다 영원히 변화하지 않는 대상을 추구했기 때문일 것이다. 고대 이집트 인물 조각을 보라. 그 조각상들도 아무런 표정이 없이 경직돼 있다.<사진 9> 표정이란 덧없는 우연의 산물일 뿐이다. 표정 없는 얼굴 조각이야말로 그 대상의 실체에 가깝고 영원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회화에서는 옆얼굴에 해당한다.
오늘날 이른바 프사, 즉 프로필 사진은 수많은 곳에서 사용되고 있다. 옛날에는 그저 주민등록증이나 운전면허증, 그리고 면접 서류 정도에서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SNS의 필수적인 표현 방법이 되었다. 현대인은 하루에도 수없이 SNS에 접속하므로 프로필 사진은 대중문화의 하나가 되었다. SNS의 프로필 사진은 주로 앞모습을 쓴다. 왜 그럴까? 자신의 객관적인 모습보다는 자신이 희망하는 어떤 이상형을 자신이라고 제안하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예전에 직장 다닐 때 면접서류의 증명사진을 본 뒤 그 사람을 직접 대면하고 놀란 적이 있다. 포토샵으로 증명사진을 너무 변형해서 실제 인물과 차이가 많이 났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재현된 이미지란 이처럼 객관적인 실체가 아니라 이상화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사진은 회화와 달리 객관성을 갖는다. 인증한다는 것이 사진의 본질이다. 하지만 지금 현재는 언제나 결핍되어 있다는 판단, 즉 더 낫게 개선되어야 한다는 사람의 주체할 수 없는 욕망으로 말미암아 객관성이라는 사진의 본질은 늘 위협받는다. 앞모습이 된 프로필 이미지의 인증은 믿을만한 것이 못 되는 것이다.
글. 김신 Kim, Shin 디자인 칼럼니스트
김신 디자인 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부터 2011년까지 월간 <디자인>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냈다. 대림미술관 부관장을 지냈으며, 2014년부터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여러 미디어에 디자인 글을 기고하고 디자인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고마워 디자인』,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이 있다.
kshin201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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