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오딧세이 ⑥ 위협받고 있는 서울 도심의 생산 생태계 2023.11

2023. 11. 30. 09:40아티클 | Article/연재 | Series

City Odyssey ⑥ Endangered ecosystems in downtown Seoul

 

 

 

 

세운상가 주변(2010)_노란색 구간이 재정비 구역 © 서울역사박물관

 

태엽을 감지 않은 시계는 그 시침에서 멈춰버린다. 도시공간도 마찬가지다. 살아남으려면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을 지속해 가꿔나가야 한다. 하지만 멈춰버린 시계 같은 공간이 종로에 또 하나 생겼다. 세운상가 북동쪽 끝 ‘예지동 시계골목’이다. 세운재정비촉진지구 제4구역인 이곳은 태엽 끊긴 시계처럼, 그 삶을 다했다. 그 많던 점포는 어디론가 흩어지고, 무자비한 철거에 수십 년 쌓인 시공간이 송두리째 지워졌다.
그 자리에 들어설, 계단식 모양의 건물 조감도가 공개되었다. 옥상정원으로 도시녹지를 늘이겠다는 구상에도 불구하고,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건물일 뿐이다. 완공 후엔 업종 및 기능별 젠트리피케이션에 시달릴 것이고 결국 피맛골에 들어선 그것처럼 보통의 도심 빌딩으로 변모해갈 것이다.
세운상가와 주변은 40년 이상 개발압력에 시달려 왔으며, 여러 차례 재개발을 시도하려 했지만 실행되진 못했다. 2006년 8개 구역으로 나눠 ‘세운재정비촉진지구’가 지정된다. 2014년 철거 대신 보전과 재생으로 방향을 바꾸어 부분 재개발이 이뤄지고, 2020년 미착수 구역에 대해선 지구 지정이 해제된다.
세운상가와 주변은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도심제조업 생태계가 살아 꿈틀거리는 곳이다. 무척 건강한, 내세워 자랑할 만한 공간구조다. 이곳 생태계는 다른 그것들과 공존하며 서로 연결되어 있다. 순환 고리와도 같은 생산체계는 무척 강한 끈으로 움직인다. 재료와 부품은 물론 제품 완성까지 적게는 몇 곳, 많게는 십여 곳 이상 공정을 거치는 철저한 공정 분업체계다. 비용과 시간을 절약하려는 지혜의 산물임과 동시에, 최정점 기술이 집약되어 순환하는 특화된 공간이다. 이런 제조업 생태계가 물리적 환경이 열악하다는 이유로 야금야금 파괴되고 있다. 모두는 급기야 흔적 없이 사라질 위기에 직면해 있다.

살아있는 골목
세운상가 옆 좁은 길로 들어서면 구불구불 굽은 골목이 미로처럼 이어진다. 세운재정비촉진지구 제2구역에 해당하는 장사동으로, 세운상가 쪽은 전기와 전자제품을 생산·판매하는 크고 작은 가내수공업형 제조공간과 상점이 밀집해 있고 안으로 더 들어가면 공구상가가 나온다. 창고와 구별이 어려울 만큼 비좁은 가게가 수두룩하다. 가게마다 수북이 진열된 부품과 기기는 도무지 그 용도를 알 수 없는 것들뿐이다. 한눈에도 ‘서울에 이런 곳이?’라는 탄성이 터져 나올 만하다.
이 동네는 백여 년 전의 공간구조를 온전히 보존하고 있다. 1912년 지적도와 2000년대 초 현황을 비교한 한 건축전문가의 탐구는 변화가 거의 없음을 밝히고 있다. 굽어 오래된 골목이 온전하고 낡은 한옥도 제법 남아 있다. 외관이 변형된 한옥은 공장과 상가로 쓰인다.

 

 

오랜 시간이 층으로 쌓인 장사동 초입 © 이영천
장사공구상가 © 이영천


하지만 이곳의 기능은 엄청난 변화를 겪어 왔다. 청계천로 주변의 공구상가와 제조업의 시작은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부터다. 전쟁 후 서울에서 가장 슬럼화한 공간이 청계천 변이었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군수품 및 공구, 장비를 취급하는 노점상이 청계천 변에 자리 잡는다. 1960년 4월 청계천 복개 도로(청계천로)가 개설되자 이곳에서 장사하던 상인들이 주변 주택가로 스며든다. 이후 급격한 산업화로 전국에 공업단지가 생겨나고, 이곳 공구상가와 제조업이 이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담당하며 성장한다. 하지만 성업 중이던 이곳은 청계천 복원으로 타격을 입고 곳곳으로 흩어져 버린다. 도로의 존폐가 공간 기능에 영향을 끼친 아이러니가 작동한 공간이다.
종로 3가와 청계천에 면한 이곳엔 아직 기계공구상가 흔적이 남아 있다. 청계천 변 ‘장사기계공구상가’라는 빨간 간판은 아래로 여러 가게 이름을 달고 있다. 골목 안은 각종 기계와 부품 등을 파는 상점, 금속을 가공해 제품을 만드는 소규모 공장이 공존한다.
도시는 시간의 부피가 만들어 낸 물리적 공간이다. 한 공간에 시민의 삶과 유사 기능이 집적되면 하나의 특성을 가진 공간구조가 형성된다. 집적화한 공간은 세분화하는 기능에 따라 다시 유기적으로 해체된다. 이런 움직임은 엔트로피(entropy)를 만들어 또 다른 기능을 가진 공간으로 진화해 나간다. 도시 생태계도 이렇듯 생명력을 가진 자연계와 같다. 장사동을 가만히 둔다면, 자신의 힘으로 더 특이한 생태계로 진화할 가능성이 농후해 보였다.

어찌할 것인가?
청계천 건너 제3구역은 장사동과 유사한 금속 정밀기계 생태계가 지배하는 공간이다. 이곳은 이미 재개발에 노출되었다. 청계천 면한 곳에 100미터 높이로 올라간 아파트가 대표적이다. 바로 뒤쪽도 철거되어 개발 중이다. 이렇듯 세운상가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철거 재개발은 반복적으로 공간을 해체하며, 전염병처럼 확산하고 있다.
한 공간이 해체되면 다른 기능으로 대체된다. 해체된 공간은 또 다른 곳으로 이주해 유사 생태계를 형성하는 풍선효과를 일으킨다. 이런 현상은 주거나 상업보다 생산기능에서 더 강하게 작동한다. 물론 긴 시간과 막대한 비용, 지루한 갈등 과정을 거쳐야 함은 불문가지다.
갈등의 첫째 요인은 생산기능을 혐오시설로 인식한다는 점이다. 이를 지역 쇠락은 물론 땅값 하락 요인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오랜 시간 갈고 다듬어 숙련된 기술력을 상실할 위험성이다. 과거 구로공단 이주와 변모 과정이 하나의 사례다. 구로공단 생산기능은 남동, 시화, 반월공단 등 다른 도시의 산업단지로 이주가 강제되었다. 그 후 디지털단지로 변모해 갔던 과정을 되짚어 보면, 하나의 공간기능 해체가 풍선효과를 일으켜 어떤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키는지 명확해진다.
생산기능은 쉬이 소멸하지 않는다. 한쪽을 누르면 다른 쪽으로 삐져나온다. 공간의 물리적 환경 개선을 통해, 도심에 형성된 생산기능의 보전과 더불어 지속성을 어찌 확보해 나갈 것인지 해법을 찾아내야만 하는 이유다.

 

 

옛집과 개발의 공존 © 이영천



하도급 갑(甲)의 도시
토지는 고정성과 희소성이라는 특성으로 최적 배분이 어려운 자본재다. 이는 공공이 개입할 당위성을 제공하는 요인으로 그 도구의 하나인 ‘도시계획’의 용도·지역지구제를 통해 토지라는 사유재산에 제약을 가한다. 따라서 변화하는 토지시장에 효율적인 개입이 가능토록 항시 잘 다듬어져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 도시계획은 변화에 둔감했다. 지역지구제는 세밀하지 못하고, 물리적 적합성만으로 엉성한 규제를 가하고 있을 뿐이다. 넓은 평면을 하나로 묶어 천편일률적인 용도·지역지구제가 적용되고 있다.
과거 도시계획은 인구가 지속 증가할 것이란 전제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인구는 긴 정체기를 지나 감소 추세에 들어섰다. 또한 교통수단과 통신의 발달, 도시 확산 제약이라는 변화와 한계를 따라잡지 못하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이렇듯 공간 기능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엉성한 초기 규제 장치를 그대로 방치함으로써, 세밀하게 규제하고 대비해야 할 기회를 잃어버렸다. 아울러 급변하는 생활 양태를 따라잡지 못함으로써 더 복잡하게 변화할 공간구조의 수용 실패로 귀결되고 있으며, 다시 뜯어고칠 기회를 영영 잃어버릴 위기에 직면해 있다.
오로지 평면적인 용도·지역지구제만 살아남아, 용적률로 평가되는 사유재산의 잠재성만 극한으로 키워놓은 셈이다. 한마디로 투기 세력이 젓가락질하기 좋은 재료를 밥상에 올려놓은 모양새로 변질하고 말았다.
세운재정비지구 기능은 산업에 가까우나 용도지역은 일반 상업이다. 도시계획과 건축법에 따라 이곳에 들어설 수 있는 시설은 명확하다. 생산기능과 무관하다. 여기에 오세훈 시장은 ‘특례법’ 제정으로 법정 용적률 한도를 넘어서는 재개발을 추진하려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세계적으로 찾아보기 힘든 도심 생산기능이 위기에 직면하게 된 직접적 이유다.
도시는 매일 상품을 소비하지만, 생산에는 무감각하다. 하도급 기능 때문이다. 서울은 이렇듯 자기 생산기능을 끊임없이 삭제하면서, 공간 상품화에 몰두하고 있다. 이는 도시농업뿐 아니라 제조업 해체로 이어졌다. 을(乙)을 거느린 하도급 도시 갑(甲) 서울의 모습이다.
서울 도심엔 아직 생산기능이 남아 있다. 생산기능의 해체는 하도급 도시 가속화는 물론 그 기능을 다른 도시에 의존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는 다른 지역이나 도시를 수탈하겠다는 행위와 다름없다. 제조업 생태계를 파괴하지 않으면서 물리적 여건 개선 등으로 스스로 품어내야 하는 이유다. 도시와 도시, 공간과 공간 사이에 과연 우월성이 존재할까? 이를 어느 누가 재단하고 평가한단 말인가?

 

 

 

 

글. 이영천 Lee, Yeongcheon 자유기고가

 

이영천  자유기고가


도시공학 학사(홍익대학교), 도시계획 석사(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계획기술사(1999). 엔지니어링사에서 도시계획 업무를 시작으로 건설사에서 오랜 기간 사회간접자본 투자사업에 종사했다. 자유기고가로 한국도로협회 계간지 <도로교통>에 다리 에세이 연재 중이다. 인터넷 매체 ‘오마이뉴스’에 다리 및 근대건축 관련 에세이를 연재했고, 현재 도시 관련 에세이 연재 중이다. 저서로 『다시, 오래된 다리를 거닐다』와 『근대가 세운 건축, 건축이 만든 역사』가 있다.
shrenrhw@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