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센호프 지들룽 2018.07

2022. 12. 5. 09:12아티클 | Article/디자인스토리 | Design Story

Weißenhof-Siedlung

 

1907년 12명의 미술가와 산업종사자들이 모여 독일 공작 연맹(Deutscher Werkbund)을 건립했다. 미술가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함께 하는 공동작업을 통해 독일에서 생산되 는 공산품의 질적 향상 및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지는 효과를 기대했다. 독일 공작 연맹이 가지고 있는 모토가 있었는데, 이 모토를 통해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문화적인 그 들의 목적을 세웠다.

 

“소파부터 도시까지..(vom Sofakissen bis Städtebau)”

 

20세기 초 독일에서는 대도시에서 주거 부족 문제가 심각해졌다. 사람의 삶을 윤택하게 해줄 수 있는 환경을 가진 주택은 지나치게 가격이 상승했다. 1차 세계 대전 이후 이런 악 순환이 지속되면서, 건축과 미술 또한 사회 분위기에 따라 공공성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정치적인 상황이 정상화되고, 경제 특히 건설경기가 되살아났다. 수 많은 도시 들에서 다양한 주거 건축이 진행됐으며, 전쟁을 통해 훼손된 주거를 재해석하는 움직임 또한 강하게 일어났다.

 

Le Corbusier 옥상정원

 

이후, 1925년 독일 공작 연맹(Deutscher Werkbund)에서는 다시 한번 주거 환경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제기한다. 표준이 될 수 있는 주거를 만들고, 이에 대한 토론을 자주하여 모두가 공유했다. 그 중심에 21개의 다양한 주거 프로토타입을 독일 남부도시 슈투트가 르트(Stuttgart)에서 진행한 바이센호프 지들룽 프로젝트(Weißenhofsiedlung)가 있다. 대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형태를 제공하고자 하는 것이 이 전시에 가장 큰 목표였다.

 

이 주거지역은 독일 공작 연맹의 주도로 이루어진 전시 ‘주거(Die Wohnung)’에 포함된 계 획중에 하나였다. 당시 메르세데스 벤츠(Daimler Mercedes-Benz)의 후원으로 이루어진 이 전시는 슈투트가르트안에 다양한 지역을 대상으로 주거의 새로운 형태를 제안했다. 21주의 짧은 시간동안 63세대 21채의 건축물을 지어내는 계획은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를 통해 주거의 형태가 단순히 양적인 증가가 아닌 질적인 면에서 새로운 주 거 형태를 제안할 수 있는 성숙한 성장을 기대했다.

 

독일 공작 연맹이 이 프로젝트와 관련된 슈투트가르트 시청의 건축 허가 승인을 받고 난 뒤, 건축사 미스 반 데 로에가 이 프로젝트를 총괄하는 담당자로 지목됐다. 당시 미스 반 데 로에는 당시 시대의 흐름과 다른, 철골과 유리로 고층 건물을 설계하는 디자이너로 유 명했다. 전체 그림을 그리고 난 뒤, 1925년부터 독일 공작 연맹에서 다양한 건축사의 추천 을 받는다. ‘대도시 시민을 위한 주거’의 주제에 맞는 아이디어로 설계를 보여주는 기회를 가지기 시작한다. 이중 대표적인 작가가 르 꼬르뷔지에(Le Corbusier)였다. 그가 설계한 집은 현재 세계 문화 유산으로 보호받고 있다. 하나의 정형화 된 집을 설계했으며 다양한삶의 기본이 될 수 있는 주거의 프로토타입을 제시했다. 기능을 중요시 하지만, 화려한 장 식을 최대한 자제하여 기본적인 형태를 만들고자 했다. 그의 설계 다섯가지 원칙 ‘필로티, 옥상 정원, 자유로운 평면, 파사드, 연속적인 수평창’이 가장 잘 보여지는 대표작이다. 이 원칙을 바탕으로 주거의 형태가 기능에 충실하고 담백한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실내에 서는 간소화된 요소가 더욱 잘 보인다. 가구 자체는 굉장히 절제되고 공간의 비율과 함께 어울려 과하지 않는 모습을 담아내고자 했다. 미닫이 문과 이동식 가구는 이에 맞춰 시간 대별 공간을 다양하게 할 수 있으며, 당시 전통적인 사고 방식에서는 이러한 미학적 관점 이 급진적으로 평가받았다. 당시 대량 생산체제가 가장 큰 화두였던 만큼, 그의 생각은 한 세기를 지배할 정도로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그의 작품과 그가 초반에는 사실 선택되지 않았다. 르 꼬르뷔지에가 스위스 출생 이었던 만큼, 정치적인 이유로 그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 다. 당시 혼란스러웠던 정세와 더불어 독일과 스위스와 관계는 좋지 않았다. 이에, 독일 공작 연맹은 선정된 건축사나 미술가를 독일인 위주로 결정해 한다는 주장을 했다. 정세 를 배경으로 독일에서 진행되는 프로젝트인 만큼 꾸준히 독일스러움이 프로젝트에서 묻 어 나와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미스 반 데 로에는 독일 공작 연맹의 주장과 달리 그가 가진 역량을 높게 샀을 뿐 아니라, 이 프로젝트가 독일을 넘어서 세계에서 주목 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당시 르 꼬르뷔지에가 주장했던 다섯 가지 원칙이 프로젝 트의 흥행 요소 중에 하나였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원칙에 기하학적인 형태 구성, 새로운 재료 즉 콘크리트와 철재 사용은 새로운 화두거리를 만들기에 충분한 상황이었다.

 

프로젝트 관련된 공사가 마무리되고 다음해인 1928년 한 장의 사진이 다시 사람들의 입 에 오르기 시작한다. 한 젊은 숙녀가 깔끔한 정장을 입고, 스포츠카 앞에 포즈를 취하고 있다. 당시 메르세데스 벤츠에서 출시한 8/38 PS-Roadster, 최고 속도는 시속 75킬로미터. 3년간의 연구 끝에 만들어진 자동차로 F1에서 메르세데스 벤츠가 기타 자동차 제조사보 다 경쟁력을 가질 수 있게 도와준 차량이다. 이 차량은 르 꼬르뷔지에의 혁신적인 생각만 큼, 메르세데스 벤츠가 차량을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시작점이었다. 당시 기록으로 전 세계 약 7,000대의 차량이 판매됐다는 점을 보면 그 수준을 미리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르 꼬 르뷔지에의 건축물 앞에서 작업된 이 사진은 벤츠의 본사가 있는 슈투트가르트의 발전을 보여주는 건축물과 차량이 동시에 담겨 있어 인상적이다.

 

현재 건물의 모습

 

 

글. 김성환 Kim, Sungwhan 현대자동차 크리에이티브디자인팀 디자이너